두 언어의 국경지대에서 본 우리말

안인희/번역작가,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강사



  번역을 업으로 삼다보니 말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아주 많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작업을 하는 셈이므로 물론 책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에 1차적인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말 자체도 내용 못지 않게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번역작가란 밥 먹고 나면, 아니 밥을 먹으면서도 말을 생각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란 생각이 들 정도다. 한마디로 말에 대한 생각이라고 표현하였지만 ‘말’의 층위가 여럿임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단어, 문장, 단락 등에 나타나는 내용, 표현, 문법상의 문제들, 단어의 쓰임새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 혹은 온갖 문제가 두루 뒤얽힌 채로 두 언어 사이에서 방황하다 보면 때로는 국제 미아가 된 듯도 하고 때로는 두 언어 사이에서 절묘한 연결고리를 찾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작업 사이로는 말이라는 것 자체의 특성과 한계에 대한 명상도 끼어들게 마련이다. 철학적인 영역까지 기웃거리는 것이다. 
  ‘번역’이라고 하면 막연히 외국어 능력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도 그런 생각이 틀린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우리말 어휘와 표현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훨씬 더 길다. 한 권의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기까지 원문을 읽는 것은, 작업이 이루어지는 동안 극히 정밀하게 한 번, 작업 이전에 대충 읽기 한 번이고, 작업이 끝난 다음 미심쩍은 곳을 찾아 확인할 때 한 번 더 원본을 손에 잡는다. 그에 반해 우리말은 비교적 정교한 최초 번역 단계에서 한 번 씌어지고 난 다음, 출판사에 넘기기 전에 보통 두 번 정독 및 교열, 출판사 교정쇄를 가지고 한 번 더 정독 및 교열, 책이 출간된 다음 한 번 더 읽기까지 적어도 네 번 정도를 읽는다. 책이 나온 다음에도 오역보다는 우리말 표현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발견되어 속상할 때가 더 많다. 
  출판사 편집부 직원이라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할 작업과정이지만, 외국문학을 전공하고 번역을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뜻밖에도 이런 작업 방식을 얼른 납득하려고 하지 않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발설되지는 않지만 이런 태도 뒤에는 ‘한국 사람이면 갈고 닦지 않아도 누구나 우리말을 잘 쓸 수 있다’는 것과, ‘번역은 원어 해석의 능력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막연한 인식이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인식 뒤에는 다시 막연하나마 원전 텍스트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우리말을 얕잡아보는 태도가 자리잡고 있다. 그렇기에 심할 경우 번역이 한국어를 하는 독자를 위한 서비스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위대한(?) 원작의 묘미만을 살리기 위해서 조각난 한국어로 번역된 책까지도 볼 수가 있다.

  번역이나 통역처럼 두 개 언어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경우 두 언어 사이에는 제트(Z) 지대(地帶)1)

, 혹은 여명지대라 부를만한 영역이 존재하는 것 같다. 작업을 하는 중에 번역자의 사색은 접경지인 이 제트 지대를 오가게 마련이다. 원문이 간결하거나 내용과 형식이 비교적 단순하다면 이 지대를 통과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원문이 추상적이거나 내용이나 그 표현형식이 단순하지 않을 경우, 혹은 내용이나 형식에 복선(伏線)이 깔려있을 경우에 눈에 보이지 않는 국경지대의 체류시간은 길어지게 마련이다. 이 때 번역자는 두 언어의 단어나 문장 혹은 단락 사이를 오가며 각 차원에서 의미의 테두리를 비교하게 된다. 
  이때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텍스트에서 논의되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번역자는 어떤 언어로 내용을 이해하는 것일까? 어려서부터 두 언어 사용자(bilingual)가 아니라면, 그리고 텍스트를 우리말 쪽으로 옮겨오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말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시 말하자면 번역자에게 있어서 우리말이 제트 지대에서 쓰이는 언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번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외국어로 된 문헌을 읽거나 외국어로 진행되는 강연을 들을 때 내용이 극히 단순하다면 모르지만 복잡한 논리적 진행이나 추상적인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면 그 내용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같은 일이 일어난다. 우리말로 앞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문헌이나 강연의 다음 내용을 추적해서만 전체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 과정은 실제로는 말처럼 간단하지만은 않다. 원래 우리말에 있는 개념은 이해에 큰 어려움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말에 개념이 아예 없거나 불충분하거나 내용상 차이가 있을 경우에는 혼란이 생겨난다. 제트 지대에서의 언어가 우리말이기 때문에 이 혼란을 극복할 아무런 도구가 없는 셈이다. 다행히도 우리말로 된 안내서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새로운 개념에 대해 서술해 주고 있다면 그런대로 그에 대해서 빠른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완전히 낯선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서 외국어로 된 문헌만 있다면 이해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대상을 그리려고 하는데, 그것 자체의 모습을 그리지 못하고 그것을 둘러싼 주변의 모습을 그려서 그 대상의 겉 윤곽이 드러나게 하는 방법과 비슷하다. 이렇게 해서 힘들게 얻은 개념을 적절하고 납득할 수 있는 우리말로 옮겨놓으면 그 개념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머릿속에 간직된다. 그러나 외국어 그대로 남겨 놓으면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2)

개념이란 읽거나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것을 실제로 사용하고 스스로 표현함으로써만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특수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빼면 하나의 언어가 한 인간의 사고력과 기억력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언어로 된 개념이나 사상은 우선 제대로 이해되었는지가 의문이며, 그렇다 하더라도 아주 빠른 속도로 다시 사라져버린다. 여기서 번역의 1차적인 쓰임이 생겨난다. 출판을 해서 일반 독자들에게 널리 읽힌다는 목적이 아니라도, 외국어로 된 글을 읽거나 강연을 이해하려고 할 때 중요한 개념들을 자신의 언어로 번역한다면 이해가 분명하고 기억이 오래 가는 것이다. 
  자신의 언어를 쓰는 능력이 부족해서 개념이 많이 모자라거나 논리적인 생각을 잘 전개할 수 없다면 어떤 일이 생겨날까? 물론 외국어를 처음부터 배워서 복잡한 사고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단계까지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외국어가 아니라 자신의 본래의 언어가 될 것이다. 그러지 않고 자신의 원래 언어능력이 충분하지 않은데도 그것을 제대로 보충하지 않은 채로 이 제트 지대에 들어선 사람이 복잡미묘한 내용을 다루다보면 출구도 찾지 못한 채 언제까지나 미로 지대에서 헤매는 꼴이 벌어진다.
  하나의 언어, 즉 원래 자신의 언어를 잘 쓰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거듭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외국어 교육을 언제 시작할까 하는 논의도 필요하겠지만 어떻게 하면 우리말을 잘 교육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다. 우리말 문법 교육이 어떤 이유에서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체계적으로 보이는 영문법을 자세히 배우다보니, 영문법을 우리 문법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국어문법학자들끼리의 논쟁도 중요하겠지만 설득력을 가진 통일된 국어문법안을 내놓아 학생들이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은 말할 수 없이 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한국말을 쓰는 한국 사람에게 있어서 제트 지대의 문제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경우보다 더 복잡하다. 우리는 보통 개념어로 한자어를 쓰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한자어는 그토록 오래 쓰여왔으면서도 순우리말과는 달리 말의 느낌(Sprachgefühl)이 전달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흔히 틀린 언어 사용의 예로 거론되는 ‘역전앞’, ‘초가집’에서 거듭 쓰인 순우리말 ‘앞’, ‘집’은 듣기만 해도 그 뜻이 전달된다. 그에 비해서 ‘전’, ‘가’는 따로 떼어놓고 한자를 나란히 써놓지 않으면 그 뜻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없다. 말의 느낌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미 말한 것도 모르고 시원하게 뜻이 전달되는 우리말을 나란히 한 번 더 쓰는 것이다. 
  한자어는 이렇게 우리에게 친숙한 듯하면서도 실은 친숙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쓰려면 한 번씩 속으로 번역해 보아야 한다. 우리말을 쓰면서 한국 사람들은 겉으로는 한 번만 말하거나 쓰지만 자기도 모르게 두 번씩 거듭 생각해야 할 경우가 자주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아주 고약한 습관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한 번만 말하면 될 것을 개념어가 어렵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이렇게 하나의 개념 주변을 서성이다 보면 정작 중요한 논리적 전개를 잊어버리는 수도 생긴다.3)

 
  한자가 아닌 외국어와의 경계지대에서 우리말로 내용을 따라가면서 한자어를 사용하게 되면, 바로 그 한자어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우리말 내용으로 번역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B. Brecht)는 ‘Verfremdung(페어프렘둥)’이란 개념을 사용하였는데, 처음에 사람마다 이것을 ‘소외(疏外)’, ‘소격(疎隔)’, ‘기이화(奇異化)’ ‘이화(異化)’ 등의 다양한 용어로 번역하여 쓰면서 그때마다 번거롭게 우리말로 긴 설명을 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일반적으로 ‘낯설게 하기’라는 좀 길지만 분명한 용어를 쓰고 있는데, 이 표현은 브레히트의 개념을 정확하게 나타낸 것일 뿐만 아니라 긴 설명이 필요 없고 기억하기도 아주 쉽다. 
  위의 경우에 보는 것처럼 한국인들은 제트 지대에서 하나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하여 실제로 두 번 번역하거나 아니면 한 번은 번역하고, 한 번은 마음 속으로 새김질하는 식으로 두 번 일한다. 우리 나라 안에서 쓰이는 일상어의 상당수가 번역을 필요로 하는 판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국제화 시대에 전보다 더욱 자주 넘나들어야 하는 언어의 국경지대에서의 체류시간을 이토록 쓸데없는 일로 길게 만드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인가. 

  말이란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하나의 사회와 그 사회의 언어환경 속으로 내던져진 존재다. 언어를 배워 익히면서 동시에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관습과 도덕률, 그리고 사고방식도 함께 익히게 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언어를 수단으로 쓰고 있으나 우리의 형성과정을 되짚어 보면, 한 사회가 가진 언어의 특성과 한계가 곧 우리의 사고의 특성과 한계를 결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말을 쓰기 때문에 말이 수단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공기 속에 살고 있듯이 한 사회의 언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회의 언어사용에 심각한 문제가 발견되어도 그것을 고치는 일은 굉장히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제 자체를 볼 수가 없고, 그것을 보는 경우라도 자기가 힘들게 익힌 언어사용법을 쉽사리 버리려 드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언어환경 안에만 들어 있어서는 그 언어와 그것이 만들어낸 사고의 특성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기가 쉽지 않다. 다른 언어와 비교해서만 특정한 차원에서 우리말이 가진 특성을 어느 정도 알게 된다. 우리 자신은 우리가 얼마나 같은 뜻의 말을 되풀이하는지 잘 느끼지 못한다. 언제나 그렇게 써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의 언어와 비교해 보면 우리말 표현에서는 거창한 한자어 어휘 때문에 쓸데없이 애를 먹지만 전체 내용은 단순하거나 빈곤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단어와 문장을 쉽고 정확하게 쓰고, 내용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외국의 문헌들을 읽다 보면 그 정확함과 논리적 힘, 그리고 정보의 양과 질 때문에 그쪽의 문헌들에 대한 신뢰가 생긴다. 이러한 신뢰는 유감스럽게도 우리말과 우리말로 표현된 문헌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으로 이어진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 자신이 우리말을 2급 언어로 얕보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우리말로 정확하고 논리적이고 알찬 내용을 표현하는 일이 자꾸 많아져야 한다. 그리고 알기 쉽게 씌어져서 널리 읽혀야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 일상어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 속으로든 드러내서든 번역을 해야 하고, 두 언어의 제트 지대에서 외국어로 된 개념을 받아들이기 위해 두 번 번역하는 일이 계속된다면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한국인의 습관은 절대로 고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나쁜 습관은 외국어를 배운 젊은 사람들에게, 한국어로 된 문헌은 어렵고 길기만 할 뿐 실속이 적다는 인상을 심어 주게 될 것이고, 우리말은 고급 정보를 전달하는 언어가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한자어 논의는 지금도 계속되고, 일간신문에 한자 사용법에 대한 강좌가 연재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 나라 안에서 같은 말을 적어도 두 번 쓰는 법에 대한 강좌이다.4)

말의 정확함과 논리적 힘을 키우고 고급정보를 전달하기에 무리가 없는 말로 만들어서 국제경쟁력을 높여 나가야 하는 이 긴급한 시기에 이것이 올바른 접근법인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