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의 내면적 깊이와 아청빛 우주

김현자/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自畵像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1. 우물 들여다보기와 무의식의 심층 

  한국 현대 시인 중에서 특히 윤동주의 생애는 우리에게 한 시인의 체질이나 心性, 시인과 사회적 배경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그가 시를 쓴 시기의 개인적 ·민족적 불행은 故人이 된 시인에게 항용 있기 쉬운 美化나 과정을 가능한 한 절제한다 하더라도 한 젊고 순결한 영혼의 너무나 비극적인 생과 죽음이 환기하는 슬픔과 함께 민족적 유대감으로서의 고통을 우리에게 준다. 그와 어릴 적부터 가까웠던 문익환 씨의 회고에 따르면 “나는 그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언제나 넋이 맑아지는 것을 경험”하였고, “그는 아주 고요하게 내면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회고는 그의 사람됨이 작품과의 유기적인 합일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그의 시들은 한 시인의 순결한 젊은 영혼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눈부신 순수의 빛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왜 자화상을 그릴까? 북적이는 현실의 거리에서 돌아온 자기만의 방에서 불현듯 자신과 대면하거나, 거울이나 냇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고, 혹은 도화지 위에 자신의 얼굴을 아로새겨볼 때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은 자아에 대한 고요한 응시와 다스림의 태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욕망과 감정에 반성하고 절제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자화상을 그리지 않을 것이다. 자화상은 물그림자에 비추인 자기 얼굴을 바라보며 무한한 자기애에 빠졌던 나르시시즘의 포즈와는 다르다. 고요하고 내면적인 포즈인 자화상 그리기의 작업은 자기가 또다른 자기에게 말을 건네는 행위이다. 그것은 서글픈 인간의 한계와 이기성을 깨닫고 때묻지 않은 본원적 자아에게 다가서려는 노력이다. 뼈를 깎고 자신을 곧추세워 나가는 다스림과 다듬음의 행위는 젊고 순결한 영혼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윤동주를 떠올릴 때마다 티 없고 해맑은 20대의 얼굴을 그려보게 되는 것도 거기서 연유한 것이리라.
  맑고 밝아서 투명한 소리가 날 것 같은 하늘의 아청빛 이미지, 어디서 우는지 몸은 보이지 않은 채 소리만 들리는 뻐꾸기, 끊임없이 스스로 몸을 맑히는 우물처럼 윤동주의 시는 우리의 영혼을 씻어 내린다. 

2. 시 <自畵像>의 구조

  이 시의 구조는,

A. 배경: 달· 구름· 하늘· 바람· 가을
B. 주인공: 사나이 → 나[我] ← 모든 人間
C. 행위: 우물 속을 들여다 봄
우물에서 떠남
다시 돌아감

의 되풀이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미움/그리움, 돌아감/다시 돌아옴의 슬픈 대조적 행동이 반복되는 구조이다. 자기 성찰에의 동경과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미움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사나이의 모습은 행위의 긴장을 유발한다. 이는 ‘우물 속의 사나이’, ‘그 사나이를 그리워 하는 사나이’로 상반된 의지를 지닌 두 자아의 대립으로 인해 더욱 고조되는 듯하다. 그러나 시 <자화상>의 긴장은 윤동주 특유의 독특한 이미지 사용법에 의해 오히려 편안함과 아련한 연민, 고요한 시적 분위기로 걸러지는데 이는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시어의 배열과 산문적 형식, 부사어에 의한 시적 분위기의 환기, 상반된 감정의 교차가 일으키는 묘한 객관화 때문이다. 시인은 객관적인 시점에서 사나이의 행동을 관찰하게 하면서도, ‘그 사나이’를 애처로워 하거나 연민하게 만들고, 결국은 독자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로 심원한 눈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한다. 스스로 논가 외딴 우물을 찾아가서 밉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제는 잊혀져 화석같은 자아의 본질과 대면하게 하는 것이다.
  1연에선 주인공의 행위가 내면적이고 고립된 것임을 강조하는 ‘외딴’, ‘홀로’, ‘가만히’ 등의 부사어가 사용되고 있다. 사나이의 행위가 자의식적 내면적 행위임을 환기해 준다. 우물의 공간성은 그 자체로 고립적 성격을 띠며, 현실 공간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진정한 자아와 조우할 수 있도록 한다. 우물은 자기 응시의 공간이다. 언뜻 보아서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우물은 평상시에는 잘 보이지 않는 내면의 공간과 유사성을 지닌다. 고요한 물에 비친 자신의 영상을 비쳐 보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지만 이 시의 경우에는 정반대되는 의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의 자세는 우물- 자신의 내부에 물이 고이기를 기다리는 긴 기다림과 망설임의 자세이다. 
  2연에서는 ‘달’, ‘구름’, ‘하늘’, ‘바람’, ‘가을’ 등의 자연배경이 제시된다. 이들 자연은 우물 속에 깃든, 즉 반영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여기서 우물의 우주성을 갖게 된다. 우물은 테두리를 가지고 있어 어떤 공간적 한계를 내포하지만, 우주 만물을 받아들여 비추임으로써 자연의 원리를 함축한다. 우물 속의 자연물들은 ‘한 사나이’와 연결됨으로써 시인의 존재 탐구와 연관을 맺고 그 배후에 숨어 있는 생의 의미 내지는 형이상학적 해명을 깨우치고 있다.
  3연의 접속부사 ‘그리고’는 대등병렬의 기능으로 우물 속의 자연물(달, 구름, 하늘, 바람, 가을)과 인간(‘한 사나이’) 간의 연접성을 강조해 준다. ‘한 사나이’는 문맥상 시적 자아 자신이지만 3인칭의 간접적 서술 형식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거리화할 수 있게 한다. 미움과 그리움, 돌아감과 다시 돌아옴의 대응적 행동의 반복을 통하여 이 시의 화자는 객관적인 서술과 自責, 그리고 자기 긍정을 되풀이한다. 이 객관화된 인물은 결국 윤동주의 자아의식이자 우리들 모두의 보편화된 心性의 원형이다.
  3연은 끊임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라는 객관적 서술에서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라는 자책과 반성으로 바뀌고 있다. 부사어 ‘어쩐지’는 존재를 추구하는 일의 덧없음, 허무를 환기한다. 우물의 폐쇄성과 함께, 돌아감/돌아오는 행위가 대비되며, 이 모순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生인 것이다. 이러한 생의 괴로움에서 야기되는 실존 자체의 문제를, 그 불분명하고 애매한 원인을 ‘어쩐지’라는 부사어를 통해 ‘미워진다’는 감정 자체를 추상화, 관념화시키고 있다. 
  끝연 ‘추억처럼 있는 사나이’는 추상의 개념을 인간으로 끌어오는 은유체계이다. ‘가을’이라는 추억하는 시간,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나이, 고여 있는 우물의 이미지 간의 동일성은 무의식적 원형이나 심연을 암시한다. 여기서 ‘추억처럼’은 外界의 것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우물 안에는 우주의 모든 것(달, 구름, 하늘, 바람, 가을)이 있다. 우물을 윤동주 자신의 내면으로 본다면, 끊임없이 외부의 것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사려 깊은 내면화의 작업인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원심적·간접적 시어법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로, 우리를 삶의 문제로 동일하게 끌어들이게 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3. 우물의 깊이와 자아의 존재론적 깊이 

  시 <자화상>은 윤동주의 시와 그의 생애가 일관되게 모색해 온 하나의 태도를 보여준다. 끝없이 새 길을 찾아 떠나며, 우물 속을 들여다보며 자기 연민과 미움 속에서 방황하며, 결국은 좀더 젊고 순결한 영혼으로 자신을 고양시켜 나가려는 생의 태도인 것이다.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추억처럼 아련해진 자아의 본질에 조용히 다가서는 경험을 가져다 준다. 그래서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 우리의 마음이 맑아지고 고요해지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리라. 
  시인의 섬세한 염결성은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한계상황과 예리한 현실의 논리에 쉬이 상처받지만 결코 나약하지는 않다. 여리고 부드러운 것이 갖는 강함이 그 내면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감수성은 모순된 명제를 동시에 포용하는 자신의 내면적인 합치와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사나이,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을 나와 결합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것을 긍정적 깨달음에로 고양시키는 시적 의미체계로 나타난다. 대립하는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항들, 자연과 인간의 연접성, 시어와 이미지의 연속적 흐름 등의 구조는 시의 의미체계와 조응한다.
  그가 가장 깊이 천착한 자아의식의 공간은 ‘우물’ 이며, 물이 고여 있는 우물을 들여다보며 혹은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가는 ‘한 사나이’를 미워하고 그리워하며, 그는 자신을 정돈하는 작업을 계속한다. 때로 그러한 행위는 하늘에까지 확대되어 그는 지상에 서서 거꾸로 하늘에다 자신을 비춰보기도 한다. 하늘조차 이 시인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비춰 주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하늘과 우물과 거울은 모두 현실을 반영하는 대상으로 외부적인 것을 내면화시키는 교묘한 방법을 통해서 윤동주는 자신의 모습 뿐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모습을 비추는 대상으로 객관화시킨다. 이와 같은 그의 괴로움은 어둡고 부정적인 인간의 실존이 지니는 보편적 상황과 함께 어두운 일상 속에 매몰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괴로움의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물의 내면적 깊이와 화자의 존재론적 깊이는 서로 밀접하게 대응하는 변증법적 통합을 이룬다. 

4. 아청빛 이미지와 객관적 거리화(距離化)

  자화상을 그리는 작업은 현실적 자아가 또다른 자아(본질적 자아)에게 말을 건네는 행위이다. 그것은 자신의 지나온 삶을 성찰함으로써 영혼을 바로 세워 나가는 다스림과 정화의 과정이다. 여기에는 순결을 지향하는 시인의 정신적 모습이 각인되어 있으며 성숙한 자기 완성을 위한 몸부림과 희망의 과정이 내재되어 있다.
  시 <자화상>은 자기 성찰에의 동경과 자신에 대한 미움 사이에서 갈등하는 윤동주 특유의 섬세한 의식세계를 잘 보여주는 시이다. 자신에 대한 긍정과 부정은 ‘그 사나이’, ‘한 사나이’ 등의 객관적 서술방식을 통해 맑게 정화되고 적절한 거리의식을 확보하게 된다. 이는 이 시의 중요한 소재가 되는 ‘우물’의 반영성과도 관련이 깊다. <자화상>의 객관화, 거리화 수법은 수채화처럼 맑고 투명한 아청빛 이미지에 의해 고요한 내면의 세계로 눈을 돌리게 하는 시적 분위기를 뒷받침해 준다. 
  이 시는 또한 부사어의 적절한 배치로 시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외딴>, <홀로>, <가만히> 등은 외딴 우물을 찾아가 그 속에 비쳐드는 자연과 자신을 들여다보는 주인공의 행위가 고요하고 내면적인 것임을 강조해 준다. 부사어와 다른 문장 성분 간의 연결성은 시어의 흐름을 매끄럽게 하고, 각각의 이미지들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한다. <어쩐지>는 생의 괴로움에서 야기되는 실존 자체의 문제, 그 불분명하고 애매한 원인을 추상화, 관념화시켜 준다. <다시>는 ‘돌아감’, ‘다시 돌아옴’, ‘미움’과 ‘질책’ 사이에서 어쩌지 못하는 시인의 망설임을 환기시킨다.
  자연과 인간의 연접성을 강조해 주는 이미지의 연속적 흐름, 대립하는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항들, 부사어에 의한 의미의 환기효과 등의 형식적 구조는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긍정적 깨달음에로 고양시키는 의미체계와 조응하면서 시의 차원을 한 단계 끌어올려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