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안성맞춤’은 경기도 安城이 놋그릇으로 유명한 고장임이 널리 알려져 있어 그 해석에 아무 의문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행주 치마’를 幸州 山城과 결부시켜 온 것은 중세국어에 ‘’와 ‘쵸마’가 있었음이 밝혀지면서 그 잘못이 드러났다.
이 글에서는 본래 地名과 관련된 것인데 아직도 잘못된 어원 해석을 하고 있는 세 단어를 들어 간단히 논하기로 한다.
1. 납청장
내 고향 평안북도 정주군에 納淸亭이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권 52, 定州牧)에 이 亭子의 이름을 중국 使臣 唐皐가 지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렸을 때의 일이라 정자의 기억은 없지만 맑은 저수지 한가운데까지 구름다리를 타고 갔다온 기억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 저수지 옆에 우리들이 ‘납천이’라 부른 저자가 있었다. 이 곳에 서는 장은 ‘납청장’(納淸場)이라고 하였다. 이 ‘납청장’이 오늘날 시중 책방에 나와 있는 국어 사전들에 표제어로 실려 있다. 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염상섭의 소설에서 ‘납청장’과 만나고 나서였다.
내 앞에선 꿈쩍 못하게 납청장을 만들어 보겠다는 객기가 난 것이다.(三代)
저 편이 위압을 하려는 태도로 나오면 이 편은 꿈찔하여 납청장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반항적으로 나오는 것이다.(萬歲前)
그런데 몇몇 사전들을 펴보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사전」은 “몹시 얻어 맞거나 눌리어 납작해진 사람이나 물건”이라고만 하여 ‘납청장’(納淸場)이 어떻게 이런 뜻을 가지게 되었는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으나 文世榮의 「朝鮮語辭典」(1938)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었다.
평안도 정주군 납청시장(納淸市場)에서 만드는 국수는 치기를 잘하여 질기다는 뜻으로 사람이나 물건이나 압박·타격을 받는 것을 가리치는 말.
이 사전에서 ‘납청장’이 내 고향의 저자 이름임을 확인한 것은 큰 소득이었으나 정작 국수가 질긴 것과 얻어맞거나 눌리어 납작해진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얼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근의 사전들에도 문세영 사전과 한 두 글자만 다른 설명들이 있을 뿐이어서 내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들추어 온 바로는 朝鮮總督府의 「朝鮮語辭典」(1920)에서 위와 같은 설명이 시작된 듯하다. 이 사전에 일본어로 쓴 설명이 문세영 사전의 해설과 같은 것이다. 문세영 사전은 이것을 번역하다시피 한 것이었다.
이 설명도 일종의 어원 해석이라 할 수 있는데, 총독부 사전이 어떻게 이런 해석을 달게 되었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어쨌거나 이 해석은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냉면 국수를 만드는 법은 평안도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으니 납청장이 각별했다는 소문을 나는 들은 일이 없었던 것이다. 위에서 「큰사전」이 어원 해석을 빼버렸음을 지적한 바 있는데 아마 그 편찬자도 이에 어떤 의문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사전」(1992)은 아예 ‘納淸場’이란 漢字 표기까지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앞선 사전들의 어원 해석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태도를 취하였음을 본다.
최근에 간행된 단국대학교 東洋學硏究所의 「韓國漢字語辭典」에서 나는 ‘납청장’이 위의 뜻으로 쓰인 것이 유래가 얕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 사전의 ‘納淸亭’ 항에는 「薊山紀程」(著者 未詳, 純祖 때 徐長輔를 따라 燕京에 다녀온 기록)으로부터의 인용이 보이는데 이 글에는 丙子胡亂과 결부시킨 어원 해석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같은 사전에 인용된 「松南雜識」에는 ‘蠟川場’이라는 특이한 표기를 한 것이 눈길을 끄는데 洪景來亂에서 위의 뜻이 생긴 것으로 설명하였다. 홍경래란은 국지적이었으므로 그것을 끌어댄 것은 병자호란보다는 그럴듯하지만, 이 역시 하필 납청장이란 지명이 선택된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모자라는 느낌이 있다.
어떤 지명에 어떤 특별한 뜻이 붙은 까닭을 알려면 그 고장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할 것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안성맞춤’은 경기도 안성이 놋그릇의 명산지임을 알면 곧 설명이 된다. 나는 여기서 평안도 납청장이 경기도 안성과 어깨를 겨눈 유명한 놋그릇 고장임을 상기시키고 싶다. 실상 우리 고향에는 이 놋그릇 장사로 부자가 된 집이 여럿 있었다. 그런데 납청장에서 놋그릇을 만든 방법은 안성과는 아주 달랐다. 나는 어려서 놋그릇은 두들겨 만드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이 방법을 ‘방짜’라 한다는데, 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놋그릇’ 항을 보면 이것이 납청 지방의 독특한 제작법임을 말하고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베풀고 있다.
방짜 제작법이란 일반적으로 쇳물을 녹여 바대기라 불리는 바둑알처럼 동글납작한 쇳덩이를 만들어 11인이 한 조가 되어 불에 달구어가면서 두들겨 그릇의 형태를 이루는 방법이다. 방짜는 유석에 구리와 주석 이외에 다른 물질이 들어가면 두들겨 기형을 만드는 과정에서 깨어지기 때문에 절대로 안 된다. 방짜는 일명 ‘양대’(良大)라 하는데 북한의 납청 지방에서 쓰는 말이다.
여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실컷 두들겨 맞아 납작해지는 것은 납청 지방의 냉면 국수가 아니라 놋그릇 공장의 놋쇠임을 알 수 있다.
2. 손돌바람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사전」에서 ‘손돌바람’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손돌바람
손돌 추위 때 부는 바람. 손돌풍, 손석풍. [취. 孫乭]
이 사전의 ‘손석풍’에는 ‘孫石風’이란 한자 표기가 있다. 李熙昇 편 「국어대사전」의 ‘손석풍(孫石風)’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이 보인다.
고려 때 어느 해 10월 20일, 사공 손석(孫石)이 임금이 탄 배를 저어 통진(通津)·강화(江華) 사이를 가다가 풍랑에 밀려 매우 곤란을 겪게 되매 그 임금이 다른 뜻이 있다 하여 손석을 억울하게 참살(斬殺)한 일이 있은 뒤 매년 그 날엔 몹시 추워지고 큰 바람이 인다고 전하여 매년 이맘 때 부는 바람을 이름. 손돌풍. *손돌이추위.
이것은 예로부터 전하는 說話를 요약한 것이다. 「東國歲時記」(十月)에서도 ‘孫石風’에 관한 설화가 실려 있다.
二十日 每年有大寒風 謂之孫石風 盖麗王由海路入江華 舟工人孫石進舟入一險口 麗王疑怒命斬之 未幾脫險 至今稱其處曰孫石項 孫石之被害卽是日而怨者使然也
윗 글에 ‘孫石項’이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손돌목’의 漢字名이다. 「洌陽歲時記」(十月二十日)에도 이 ‘孫石項’이 보인다.
江華海中有險礁 曰孫石項 方言謂山水險隘處謂項 嘗有梢工孫石者
以十月二十日 寃死于此 遂以名
‘손돌목’이란 地名이 손돌이란 뱃사공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했는데 실은 그 반대인 것이다. 「高麗史」(권 106 李承休)에는 元의 침입을 받고 있을 때 강화를 지키는 일에 관한 논의에 ‘窄梁’이 등장한다.
承休因獻策曰 待賊半過窄梁 遣精銳橫斷賊船 堅守江都 則前者勢孤
後者失據 前後不相應 賊可以破
이 글에 보이는 ‘窄梁’은 ‘손돌’의 借字 表記다. 아래의 설명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窄’과 ‘梁’의 새김을 이용한 표기(釋讀表記)로서 ‘손돌’을 적은 것이다. 「龍飛御天歌」(6. 59)의 설명으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음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倭賊이 강화쪽으로 침입하여 江華府와 窄梁의 전함을 불지르며 크게 기세를 올린 일이 있었는데 「용비어천가」는 이 ‘窄梁’을 ‘:손
·돌’이라 읽었음을 분명히 적었을 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註記까지 달고 있는 것이다.
窄 側伯切 狹也 窄梁 在今江華府南三十里許
여기서 우리는 ‘:손·돌’의 ‘:손’이 좁다는 뜻을 가진 말임을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손’에 上聲點이 찍혀 있어 우리로 하여금 形容詞 ‘솔다’[狹]의 활용형임을 확인하게 한다. 중세국어 문헌에서 형용사 ‘솔다’의 용례를 보기 어려우나 현대국어의 ‘솔다’의 어간이 길이를 가지고 있어 ‘손돌’의 ‘:손’이 이 형용사의 활용형임을 의심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중세국어 문헌의 방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돌’은 중세국어 문헌의 여기저기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우선 ‘訓蒙字會’(초간본 上2, 개간본 上5)에서 매우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梁 ·돌량 水橋也 又水堰也 又石絶水爲梁
여기서 ‘梁’의 새김이 ‘돌’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명사는 본래 ‘ㅎ’末音을 가진 것이었음이 「杜詩諺解」(7. 5)에 적힌 처격형에서 드러난다.
고기 잡 돌해 얏도다 (滿漁梁)
여기서 ‘梁’의 새김 ‘돓’이 고대국어에까지 소급하는 오랜 전통을 가진 것임을 지적해 둔다. 「三國遺事」(권 1, 辰韓)가 ‘沙, 漸’ 등에 대하여 崔致遠의 說에 기대어 “辰韓本燕人避之者 故取水之名 稱所居之邑里”라 한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지만, ‘’字의 註記에서 ‘梁’이 ‘도’(道)로 읽힘을 지적한 것은 매우 소중한 증언이 아닐 수 없다.
羅人方言 讀字爲道 故今或作沙梁 梁亦讀道
이상의 서술로 ‘손돌’이 뱃사공의 이름이 아니라 강화도로 건너는 좁은 물목의 이름임이 밝혀진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손돌’[窄梁]이란 이름은 이 한 곳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듯한 느낌을 나는 가져 왔다. 어느 기록에선가 錦江에도 ‘窄梁’이 있음을 본 듯한 기억이 있으나 갑자기 확인할 수 없음이 유감스럽다. 지명 연구는 문헌뿐 아니라 실지 답사를 해야 하는데 나는 강화도의 ‘손돌’조차도 가 보지 않고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마음이 허전하기 짝이 없다.
3. 안동답답이
지금 시중 책방에 나와 있는 사전들은 한결같이 ‘안동답답이’의 뜻을 “굵은 기둥을 안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안동’을 ‘按棟’이라 보고 한 해석이다. 내 漢文이 짧은 탓인지는 모르지만, ‘按棟’이란 아무리 보아도 어색하다.
나는 「속담 사전」(초판 1962)을 편찬한 일이 있어 속담에는 늘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다. 지난 80년 개정판을 낸 뒤로 모은 것만 해도 새로 增補修正版을 낼 만한 분량이 되었다. 앞으로 우리 나라 속담의 정수를 가려뽑아 속담 사전의 결정판을 내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의 하나다.
새로 얻은 속담 중에 바로 ‘안동답답이’란 말이 들어 있는 것이 있다. 「古今釋林」(권20, 東韓譯語)에서 얻은 것이다.
安東沓沓牛足撑 本朝○安東人迷甚 馱卜於牛 而馱傾則用物撑牛蹄 故云
여기서 ‘按棟’이 아닌 ‘安東’을 보면서 나는 이것이 매우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였다. 참고로 「韓國漢字語辭典」에는 위의 인용을 싣고 “안동의 답답이가 소의 발굽을 괸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번역이요 실제 속담은 “안동답답이 쇠발을 괸다”임을 지적해 둔다. 그런데 위의 사전에는 「黑馬遺事」라는 책에 보이는 ‘安東沓沓’의 용례도 아울러 싣고 있다.
丙戊 復有召命 公辭以病一不就 上曰 權某之不來 可謂安東沓沓矣
처음 듣는 책이름이라 확인할 길이 없었으나, 임금이 ‘안동답답이’이란 말을 쓴 것을 보면 이 말이 옛날에 널리 쓰였음을 짐작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