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인 정태진 선생의 생애와 학문

장세경 /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1. 가계와 가족

  나주 정씨 월헌공 수강(羅州 丁氏 月軒公 壽崗, 1454년~1527년. 강원도 관찰사, 병조 참지를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당대의 명문장가였음)님의 16대 손이며 고암공 정윤희(顧菴公 丁胤禧, 1531년~1589년. 예조참의, 호조참의,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문장가로 이름을 날림)님의 13대 손으로 1903년 7월 25일(음력) 경기도 파주시에서 정규원님과 죽산 박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8년 3월 안동 권정옥님과 혼인하였으며, 1923년 12월 아들 해동님을 낳았고, 1934년 5월 맏딸 해영님, 1938년 12월 둘째딸 해경님을 낳았다. 선생의 아버님은 1943년 1월 옥중에 있는 아들을 그리워하다가 끝내 아들 얼굴도 못 보고 돌아가셨으며, 부인은 1947년 3월 심장병으로 오랜 고생 끝에 돌아가셨다. 아들 해동님은 경제학 박사로 중앙대학교 교수, 동덕여자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정년퇴임하였으며 한글학회 감사로 선생님의 뜻을 이어 가고 있다. 맏딸 해영님과 둘째딸 해경님은 약학을 전공하였으며 손주들은 대부분 의사로서 활약하고 있다.
  아호는 석인(石人)인데 언제부터 썼는 지는 알 수 없고, 1948년 1월에 발간된 <한글> 13권 1호에는 ‘쇠돌’, 1952년에 지은 시 ‘한 생각’에는 ‘흰메’라 적고 있어 후기에 토박이말 아호를 더러 쓰신 것 같다. 

2. 학력

  선생은 경기도 파주시에서 태어났으나 1921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연희전문학교를 마치었다. 재학 시절에 민족주의자며 고명한 국학자이신 정인보 선생의 가르침을 받게 되어 민족주의의 뜻이 더 굳어지게 되었다. 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봉직하던 미국 선교사의 추천으로 1927년 청운의 뜻을 품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우스터대학(Wooster College) 철학과에 입학하여 1930년 졸업하고 1931년에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Colum-bia University) 대학원에서 교육학과 과정을 마치었다. 그 당시로서는 월등한 고등교육을 받은 분이며 영어는 물론이거니와 전공인 철학, 교육학 외에 언어학, 문학, 역사학 등 인문학의 기초를 닦은 분이다. 유교 집안에 태어났으나 기독교 학교에 다니며 선교사를 만나게 되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3. 주요 경력

  1925년 4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이하 ‘여고보’로 약칭함) 교사로 부임하여 2년간 근무하다가 1927년 5월 미국 유학을 떠났는데 1931년 9월 미국에서 돌아와 다시 영생여고보로 부임하여 1941년 6월까지 약 11년 동안을 근무하였다. 1941년 6월 연희전문학교 동문인 정인승님의 권유로(대한기독교서회 김춘배님은 기고문에서 이윤재님에게 소개하였다고 함) 그 당시 조선어학회에서 편찬중인 『조선말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종사하게 되었으니, 비교적 안정된, 그것도 교육자의 신분을 쉽게 떨쳐 버리고 사전 편찬 일에 온 정열을 쏟은 것은 오로지 이미 없어져 가는 겨레와 겨레말을 살리고(이 때 왜정은 우리 민족 말살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창씨개명을 강요하였고 국어 사용을 금지하였음) 또 여의치 않을 때 기록으로라도 남겨야겠다는 불타는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마음이 강렬하였기 때문이다.
  1942년 9월 영생여고보 학생의 일기장이 빌미가 된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져 선생은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함흥 감옥에서 복역 중 1945년 7월 1일 조국 광복 직전 만기로 출감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옥고를 치르고 있는 동안 아버님 정규원님은 아들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시고 말았다.
  1945년 8월 광복 후 미군의 군정이 시작되자 그 당시 드물었던 미국 유학 경력 때문에 미군 군정청, 외무부, 문교부 등에서 요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많았으나 끝끝내 사양하고 『조선말 큰사전』 편찬에 전념하면서 틈틈이 국어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연희대학, 중앙대학, 동국대학, 홍익대학, 국학대학, 세종중등교원양성소 등에 출강하였다. 국어를 체계있게 배운 분이 거의 없을 때라 조선어학회 회원인 국어학자들은 다 그렇게 바삐 국어학 지도에 나섰었다. 해적이에는 없는데 1946년에 조선방언학회를 창설하였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는다.(<파주저널> 1992년 4월 6일자에 실려 있음) 1949년에는 한글학회 이사로 피선되었다.   『조선말 큰사전』이 셋째 권까지 출간될 지음인 1950년 6·25동란이 일어났다. 선생은 고향에서 겨우 목숨을 보존하고, 1·4후퇴로 부산에 피난 가서 곤궁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서울이 수복되면서 선생은 사전을 마저 내야겠다는 일념으로 1952년 5월 아직도 포성이 들리는 서울로 혼자 올라 왔다. 사전 원고는 다행히 유제한님이 어렵게 간수하였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곧 유제한님도 서울로 올라와 서울신문사 공장장실에서 사전 편찬을 계속하였다. 넉 달 반 만에 원고를 넘겨 지형을 뜨게 되었다. 10월 28일 지형을 떠놓고 선생은 고향인 파주에 성묘 겸 식량을 구하러 가다가 타고 있던 군용 트럭이 뒤집혀 11월 2일 50세를 일기로 아깝게도 한 많은 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4. 인품

  필자는 선생을 직접 뵈온 기억이 없다. 혹 중학생 때 뵈었는지도 모르겠으나 기억은 전혀 없다. 다만 사진과 본인의 글과 친구, 동지, 후학, 제자들의 추도사와 맏아드님 정해동 교수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담에 의지하여 선생의 인품과 사상, 언행 등에 대하여 기술하겠다.
  우선 선생의 사진을 통하여 본 인상은 ‘근엄’과 ‘과묵’이다. 누구도 침범하기 어려운 위엄이 내비치며 굳게 다문 입술에서 굳센 의지가 나타난다. 
  다음에는 선생과 가까웠던 몇 분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대꼬챙이처럼 꼿꼿한 성격” <연희전문학교 동기이며 사전 편찬을 같이 한 정인승님>
  “한글에 살고 한글에 순(殉)한 갸륵한 한글학자 … 『한글 큰사전』의 자자구구에는 선생의 정성과 혈한(血汗)이 아로새겨 있다. 또한 선생은 인후겸묵(仁厚謙黙)하고 담백고결(淡白高潔)하며 만사를 체관(諦觀)하고 현실에 초연(超然)한 철인(哲人)이셨다. … 자허겸퇴(自虛謙退)하고 세간의 명리와 영달에 담연(淡然)하였으며 남의 어려움에는 참지 못하는 동정심이 많았다. 생애가 기구하였어도 태연자약하였고 범사에 안분자락(安分自樂)하는 의리와 정의의 군자이며 효성과 우애가 뛰어난 사람이다.” <조용욱님이 1952년 11월 30일 거행된 추도회에서 한 추도사 중에서>
  “고매한 정신은 이 흐린 세상의 버팀 기둥이요 근검 과묵한 언행은 이 겉치레 사회의 경종이었다. 미국 유학 때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념을 함께 하였고 해방 뒤 정객들의 온갖 권유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큰사전』 편찬과 후진 교육에 진력하였다.” <유제한님이 1983년 9월 3일 석인 정태진 선생 나신 80돌 추모식 때 한 추모사에서>
  “말씀이 없으시고 근면하시고 꾸준하실 뿐이었다. 하느님이 선생님께 밝은 지혜와 깊은 덕과 높은 정서가 행여나 밖으로 새어 나갈까 항상 두려워 하시는 듯” <임옥인님(영생여고보 제자)이 1954년 11월 7일에 거행된 대상 추모회에서 한 추도사에서>
  “사랑과 진실의 선생님” <임옥인님이 나신 80돌 추모식에서 한 추도사에서>

  등 추모사가 있고 또 선생에 대한 회고담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정 선생님은 종교, 철학, 문학, 예술에 걸쳐 인생에 눈뜨려는 우리에게 풍부한 영양을 공급해 주셨다. 칸트, 헤겔, 페스탈로치, 톨스토이, 타고르, 한용운, 단테, 지이드, 로망 로랑 등의 사상과 예술을 소개해 주셨다. … 침묵을 사랑하시는 선생님은 그대로 돌같이 바위같이 신뢰를 안겨 주시는 분이다. … 민족과 인류애에 불타게 하는 인간의 길을 무언중에 가르쳐 주셨다. 간디의 무저항주의, 톨스토이의 인도주의, 그리스도의 사랑과 사상을 배웠다. … 상호간의 증오를 배격하고 이 땅 위에 이상 건설을 희구하였다. 자신의 사상은 무저항주의, 과묵한 속에 무한한 의지와 예지와 정열을 간직하셨다. … 그렇지만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겠다. 한 사람의 가슴 속에 길이 진심을 심어 놓고 떠날 수 있다면 그 일생은 이미 열매 있는 보람이라고. 나는 나의 가슴에 영생하는 그 분의 위대함과 아름다운 진실을 알고 있다.”<임옥인님이 쓴 ‘고 정태진 선생님’ <학원> 17권 9호에서>
  “그는 어진 사람이었다. 기쁨과 노여움의 빛을 나타내지 않았다. 춥고 더운 것을 좀처럼 말하지 않았다. 사람의 짧고 긴 것을 말하지 않았다. 입는 것과 먹는 것에 가리는 것이 없었다. 성자라고 할까? 유교풍에 자라고 그리스도교의 관용성을 배운 선비이었다.”<대한기독교서회 대표 김춘배님이 <필원 반백년>에 쓴 ‘정태진과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다음은 선생이 ‘일본 사람들은 왜 한자 폐지를 못하였던가?’라는 논설에서 맨 앞과 맨 뒤에 반복하여 쓴 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경험으로 배운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경험만을 의지한다.” 선생은 징병에 끌려가게 된 아들 정해동님이 함흥 형무소로 면회 왔을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사람은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어도 정도를 걸어야 한다.” 아들 정해동님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석인 정태진 전집』 하권, 1996. 4.>

  큰 수난의 발단 무렵인 40세부터 돌아가신 50세까지 10년 동안 부귀영화에는 담을 쌓으시고 큰 수난에 의하여 옥중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두 분과 고생하신 분들에 대한 죄책감을 간직하시었던 것 같다. 
  1931년부터 1952년까지 20여 년간 방언 수집에 오로지 힘을 기울이시었는데 이의 결실을 보지 못하신 것이 못내 아쉽게 느껴진다.

  이상 여러분의 기술과 본인의 말씀을 종합하여 볼 때 선생은 국민으로서는 위대한 애국자요, 겨레를, 특히 겨레말을 지극히 사랑하신 분이었다. 학문으로서는 연구하신 기간이 짧았으나 그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이었으며, 교육자로서는 감수성이 강한 여제자들에게 앞길을 열어 준 등불과 같은 분이었고 가장으로서는 오히려 큰 일을 위하여 괴로움을 남겨 준 분이었다. 과묵한 가운데 근검과 겸손과 인애의 마음으로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특히 잃어버릴 뻔한 우리말 지키기에 몸바치시었다. 박학 다식하면서 민족 자주 독립의식이 강한 스승으로서 이 땅의 청년 학생의 사표가 되시었다. 광복 전이나 광복 후 마음만 내키면 얼마든지 편안하고 안락하고 영예롭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ꡔ조선말 큰사전ꡕ 편찬에 참여하신 것도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위대한 행적이다. 특히 광복 후 정부, 대학 등에서의 초빙을 끝까지 사양한 것은 자기로 말미암아 많은 동지들이 고생하였는데 자기만 편안할 수 없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니 선생의 의리감과 청렴 개결한 선비 정신을 여실히 볼 수 있다.

5. 조선어학회 사건과 정태진 선생

  조선어학회 사건은 선생에 의하여 발단되었다. 그 자세한 경위는 따로 기술될 것이므로 간략히 쓰겠다.
  1942년 여름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영희님의 일기장에서 발단된 사건에서 그 학생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워 준 선생을 찾아본 결과 정태진 선생을 지목하여 조선어학회에서   『조선말 큰사전』 편찬중이던 선생을 붙잡아 가서 조사하여 보니 별 혐의를 찾을 수 없었다. 음흉한 왜경은 선생이 일하고 있는 조선어학회를 독립단체로 몰고 그 사전 편찬 사업이 불온한 동기에서 시작되어 배일 감정과 독립사상을 불러일으킨다고 트집잡아 1942년 10월 1일부터 조선어학회 관련자 33명을 함경남도 홍원경찰서로 잡아들이고 음으로 양으로 도운 인사 48명을 증인으로 심문하였고 2년에 걸친 악랄한 고문 끝에 16명을 기소하였던바 예심에서 12명이 정식재판에 회부되어 5명은 실형이 선고되고 7명은 집행유예로 풀려 났는데 이들 중 선생은 1945년 7월 1일 만기로 출옥하였고 나머지 네 분은 상고를 하고 기다리다가 8월 17일 조국 해방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상이 조선어학회 사건의 줄거리인데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건의 도화선이 된 셈이다. 자신이 이 일 때문에 동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끝까지 지녔음은 이미 말하였다. 그런데 왜경은 선생과 그 밖의 조선어학회 회원과를 철저히 따로 떼어놓아 그들이 만난 때는 잡혀 들어간 지 근 2년이 지나 예심이 끝날 무렵이었다고 한다.(정인승님의 회고담에서) 왜경이 이들을 처벌하기 위하여 얼마나 악랄하게 허위 날조를 하였는지, 그래서 이 학자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 만하다. 특기할 일은 광복 후 이 사건에 관련된 분들의 회고담이 많이 나왔는데 선생을 원망하거나 탓한 분이 없고 출옥 후에는 서로 협심하여 국어 교육과 사전 편찬에 온 힘을 다한 것으로 보아 이 분들의 고결한 정신과 동지애가 우러러 보인다. 선생 자신은 자기가 당한 일에 별로 말씀이 없었던 것도 선생의 심회나 인격을 엿보는 단서가 된다.

6. 저서와 논설

6.1. 저서

(1)

『받침공부』, 서울:신생한글연구회, 1946. 6.
‘한글계몽용’이라는 부제가 붙었으며 홑받침, 겹받침이 쓰인 예를 들어 받침 쓰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책. 

(2)

『한자 안 쓰기 문제』, 서울:아문각, 1946. 6.
한자 폐지에 대한 찬ㆍ반 양쪽의 주장하는 이유를 들고, 한자의 비능률점을 지적하며 그 해결책을 찾아본 다음 점진적인 폐지론(시기적 제한, 사용범위의 제한, 자수의 제한, 자획의 제한, 어휘의 제한, 일본식 한자어의 폐지 등의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폐지하자는 주장)을 주장한 책.

(3)

『중등 국어 독본』, 김원표와 공저, 서울: 조선어학회 내 한글사, 1946. 10.
중등 정도의 각 학교 상급생들의 국어과 부독본용. 고어와 고시조가 많이 들어 있으며 국어국문학 재건을 위하여 맞춤법과 말본 배우는 이에게 참고될 내용을 넣었음. 부록으로 국어학사적인 내용이 붙었음.

(4)

『아름다운 강산』, 서울:신흥국어연구회, 1946. 12.
시가집으로 조선 향토 예찬의 글을 모은 책. 각 지역(백두산, 금강산, 경주, 합천, 서울 등)의 뛰어난 곳을 예찬한 시 37편과 향토를 노래한 고시조 47편, 한시 번역시 13편이 실려 있음.

(5)

『고어독본』, 서울: 연학사, 1947. 4.
우리의 옛말을 다시 찾아보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제1부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 제2부 첩해신어(捷解新語), 낱말 찾아보기, 부록 1 옛말모음(화어류초[華語類抄]), 부록 2 이두일람(吏讀一覽)으로 이루어졌으니 근대국어의 강독 교재라 할 만함.

(6)

『조선고어방언사전(朝鮮古語方言辭典)』, 김병제와 공저, 서울: 일성당서점, 1948. 12.
고어부(1~34쪽), 이두부(35~82쪽), 방언부(84~244쪽)로 나뉘었는데, 선생이 방언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던 때의 중간 발표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선생은 해방 후에도 연희전문학교 문학부 학생 가운데 이 방면에 취미가 있는 이들에게 방언 채집을 시켜 4회에 걸쳐 발표하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다음에 소개하는 논설 가운데 ‘시골말 캐기’가 이것이 아닌가 한다)

(7)

『어떻게 살까?』, C. G. 화펠 지음, 역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51. 11.
생활 10칙. 기독교 10계명을 새롭게 풀이한 것.

(8)

『성경 교안』, D. G. 반하우스 지음, 역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52. 4.
원제: TEACHING THE WORD OF TRUTH
성경 연구의 입문서로서 청소년을 위한 교본.

  이상에서 본 것처럼 선생의 저서는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방 전에는 국어학을 내놓고 연구하기도 어렵고 저술을 한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았으며 해방 3년 전부터는 모진 옥고를 치뤘으며 광복 후에는 사전 편찬에 매달려 밤낮을 가리지 않다가 완간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으니 어느 틈에 큰 저서를 지을 수 있었겠는가? 그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사전의 출간을 끝내고 대학에 초빙되어 마음껏 연구하여 불후의 명저를 남겼을 터인데 아쉽기 이를 데 없다.

6.2. 논설

  선생이 발표한 논설문도 많지는 않다.

(1)

「비슷하고 다른 말」, <한글> 11권 1호, 1946. 4.
우리말을 바로 알고 정확하게 쓰게 하기 위한 길잡이.

(2)

「재건도상의 우리 국어」, <한글> 11권 2호, 1946. 5.
언어는 문화의 그릇이요, 사상의 거울이다. 이 그릇을 더욱 맑고 깨끗하게 닦아야 된다. 곧 그동안 천대 받고 짓밟히었던 우리말을 되살리고 갈고 닦아 우리 나라, 우리 역사, 우리 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글.

(3)

「시골말을 캐어 모으자」Ⅰ, <한글> 11권 3호, 1946. 7.
밑의 (6), (8)과 함께 그동안 수집한 방언 자료를 정리하여 발표한 것.

(4)

 「일본 사람들은 왜 한자 폐지를 못하였던가?」, <한글> 11권 4호, 1946. 9.
일본 사람이 한자 폐지를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민족성 자체 안에 있는 뿌리깊은 보수성 때문임.

(5)

 「주시경 선생」 Ⅰ, <한글> 12권 1호, 1947. 3.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이 쓴 추모의 글을 소개하였음.

(6)

 「시골말 캐기」 Ⅱ, <한글> 12권 1호.

(7)

「주시경 선생」 Ⅱ, <한글> 12권 3호, 1947. 7.
주시경 선생의 공적과 학문 개요를 소개하였음.

(8)

 「시골말 캐기」 Ⅲ, <한글> 13권 1호, 1948, 2.

(9)

 「말과 글을 피로써 지키자」, <한글> 13권 2호, 1948. 6.
일본이 재일 동포의 한국어 교육 금지령을 내린 데 대하여 또다시 일본인에 의하여 우리말이 핍박받아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강조하였음.

(10)

 「옥치정님이 지은 『가로쓰기 새 교본』을 읽고」, <한글> 13권 2호.
가로쓰기연구회 옥치정님이 쓴 『가로쓰기 교본』에 대한 서평.

(11)

기념방송 좌담기, <한글> 14권 2호, 1949. 12.
1949년 10월 5일 중앙방송국에서 ‘한글전용’에 대한 좌담회가 있었는데 선생의 발언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한글을 전용하지 못하면 우리글은 이상적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2) 한글을 쓰려면 한글만을 써야 한다.
3) 한글전용은 한자어의 폐지가 아니다. 한자를 써야만 알 수 있는 말은 우리말이 아니니 그런 말은 버리고 우리말로 쓰자.
4)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를 가지고도 세계에서 가장 뒤떨어진 한자를 섞어 쓰는 이유를 알 수 없다.(미국 문맹퇴치 운동가 라우벅의 말)
5) 한글만을 써야 우리의 문화가 넓고 깊게 발전될 것이다. 

(12)

「한글날을 맞이하여」, <한글> 14권 2호.
한글날은 민족주의의 승리, 우리 민족의 새로운 빛을 본 날이고, 죽음의 길을 걷던 발길을 돌려 영원의 삶의 길로 나오던 그 날이다. 이제는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며 우리말 글을 존중해야 한다. 한글날은 우리 민족이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라고 주장함.

(13)

 「세계문화사상으로 본 우리 어문의 지위」, <신세대> 1호, 1946. 3.
우리글 곧 한글의 우수성과 예술상의 우수한 점을 소개하고 우리 글의 여덟 가지 자랑을 적었음. 곧
1) 성음조직이 과학적이다. 2) 창조적이다. 3) 창제의 동기가 대중 교화 본위이다. 4) 창제 후 법령으로 반포하였다. 5) 실용적 가치가 크다. 6) 이상적 음소 문자로 읽기가 쉽다. 7) 인쇄가 쉽다. 8) 배우기 쉽다.
이렇게 훌륭한 글자로 새로운 문화 창조를 해 나갈 뿐만 아니라 우리말 자체를 갈고 닦아서 세계 문화 건설에 가장 값있는 보배로 사용하자. 그러기 위하여 표준말, 어법, 옛말 찾기, 방언 모으기, 여러 어휘의 개발, 맞춤법 바로 쓰기, 가로쓰기, 풀어쓰기의 연구, 그 밖에 초서, 속기술, 기계화에 힘쓰자고 주장함.

(14)

“Korean Alphabet". (발표지와 시기는 모름)
영문으로 한글을 소개한 글.

(15)

「조선어학회가 걸어 온 길」, <경향신문>, 1945.
아주 짧게 조선어학회가 걸어 온 역사를 적었음.

(16)

 「말을 사랑하는 마음」, <홍익대신문>, 1952. 1.
외국어 특히 한자어를 숭상하는 마음을 버리고 우리말을 사랑하자고 주장함.

(17)

 「우리말의 어원」, <교통부 교양지> 한글강좌, 1952. 9.
“우리말을 힘 있게 살리고 우리의 글을 크게 밝혀서 대한민국의 자주적 문화를 널리 세계 만방에 선포하고 만대 자손으로 하여금 배달민족의 위대한 정신을 꾸준히 북돋아 기르도록 노력하는 것이 국어 국문학도에게 부과된 중대한 책임이다.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는 우리말을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말을 하되 법 있는 말을 하고 글을 쓰되 똑똑하게 써야 되는 것이 문화민족으로서 마땅히 노력해야 될 점이다”라고 전제하고, 우리말 연구 중 말밑[어원]에 대하여 의심이 나는 몇 가지의 낱말을 들어 문화를 사랑하는 동지에게 묻고자 한다며 ‘가’와 ‘이’, ‘가늘다’와 ‘가냘프다’, ‘가랑눈’과 ‘가랑비’처럼 현재 다른 모양, 다른 뜻의 말이 말밑에서는 한 말이었을 것으로 보는 낱말 짝을 23개 들어 놓았음.(이 글은 『석인 정태진 전집』 하권 243쪽에 실린 《우리말 연구》라는 강의안과 같은데 ‘어원 연구’ 부분이 이 글보다 훨씬 많다) 

6.3. 저서와 논설을 통해 본 국어관

  이상 선생이 글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말하고자 한 뜻을 정리해 본다.
  첫째,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다. 선생의 언어관은 “모든 문화는 언어와 함께 시작되어 언어와 함께 발전하는 것으로 언어는 문화의 그릇이요 사상의 거울이다. 그러므로 이 그릇을 더욱 아름답고 든든하게 만들어야 하고, 이 거울을 더욱 밝고 깨끗하게 닦아야 한다. 나아가 민족적 자존심을 굳게 지켜 우리 문화를 북돋우고 다른 민족의 문화를 소화하여야 한다. 우리말, 우리글을 힘있게 살리고 굳세게 길러야 이 소화력이 생긴다.”라고 민족과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동안 천대받고 왜정에게 짓밟혀 거의 죽게 된 우리말을 다시 살리고 길러야 됨을 강조하였고 나아가서 우리글의 우수성을 들어 보이고 더 발전시키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1) 우리끼리는 외국어를 쓰지 말고, 2) 문맹자를 없애며, 3) 한문 고전과 외국의 권위 있는 서적은 우리말로 체계있게 번역하고, 4) 한글을 전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글 전용에 대하여 선생은 1946년 점진적 한자 폐지론을 주장하였으나(6.1.2. 참고) 1949년 10월에는 적극적인 한글 전용을 주장하였는데(6.2.11. 참고) 그 발언의 일부를 인용하겠다.

  한문을 사랑하는 분은 차라리 우리글을 섞지 말고 한문만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요, 우리글을 사랑하는 분은 한문을 고만 두고 우리 한글만을 써야 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글의 우수성을 밝혔다. (6.2.13)
  1) 성음학적으로 음운이 풍부하고, 형태상으로 어휘가 넉넉하며, 어법상으로 조리가 정연하고, 예술상으로 표현이 아름답다.
  2) 한글은 그 창제에 있어 과학적이고(성음조직, 기본 글자 설정, 가획의 방법 등) 창조적이며, 창제의 근본 동기가 대중 교화 본위이고, 창제 후 법령으로 공포한 점과 쓰기 쉽고 읽기 쉽고 배우기 쉬우며, 이상적 문자라고 하는 일음 일자, 일자 일음에 맞는 글자이며, 인쇄가 쉽다. 
  셋째, 바른 말 사용을 강조하고 우리말, 우리글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였다. 
  표준말 어법 지키기, 옛말을 찾고, 방언을 모으기, 학술어와 시어를 아름답게 연마하기, 맞춤법을 바로 쓰고, 가로쓰기, 풀어쓰기, 흘림글씨, 속기술을 개발하고 타자기를 연구하자. 
  이 밖에 특히 말밑과 방언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실제로 이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7. 학문

  선생의 학문에 대하여는 다른 분들이 분야별로 상세히 말씀할 것이므로 간략히 서술하겠다.
  우선 미국에서 언어학에 접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므로 음운, 문법, 어휘 등 기본 분야에 대한 언급은 당연하지만 그 밖에 국어사, 어원학, 비교언어학, 언어지리학, 문자학 등 광범위한 관심이 보인다. 그런 가운데 선생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는 방언학과 어원학인데 특히 방언학은 1930년대 초부터 뜻을 두어 20년간 꾸준히 방언 자료를 모았을 뿐만 아니라 사전도 만들고 강의안 밖에 남지 않았지만 방언학의 이론적 체계도 세웠었다. 선생이 더 오래 사셨더라면 방언학에 대한 불후의 명작이 나왔을 것인데 애석하기 이를 데 없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선생이 사신 50평생 중 학문에 정진할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아서 강의안 정도밖에 물려 받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그런 자료에서나마 선생의 지극한 국어 사랑과 언어학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엿볼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8. 마무리

  지금까지 좀 장황하게 정태진 선생에 대하여 기술하였는데 이러한 선생의 생애와 저술을 접하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우선 불 같은 애국 애족의 정신과 우리말·글에 대한 사랑을 볼 수 있었다. 나라에서도 이를 인정하여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추서하였으며 1997년 11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고(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광복회) 또 올해 10월 이 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문화관광부)
  다음, 선생은 과묵하고 근검, 겸손, 성실한 분이었다. 그 당시 미국 유학생이라면 전문학교 교수는 물론 상당한 지위에 오를 수 있었건만 함경남도 영생여고보 교사로 간 것과 그 후 조선어학회 사전편찬위원으로 자리를 옮긴 것도 범인은 따를 수 없는 어려운 처신이었다. 조국 광복 후 군정청, 정부, 대학에서 직접 초빙하려고 하였으나 “나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한 마디로 거절하고 오로지 사전 편찬에만 전념하다 불의의 사고로 돌아간 선생은 거의 성자의 경지에 있었다고 할 만하다. 부귀나 영화, 안일은 선생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말 사전을 완성하여야겠다는 나라 사랑의 정열과 자기 때문에 고생한 동지들에 대한 의리심도 또한 선생을 돋보이게 하고 존경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불의의 사고만 아니었다면 『큰사전』 완간의 기쁨을 나누었을 것이고 학자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여 우리 나라 국어학의 큰 별이 되셨을 선생을 못내 아쉬워하고 그리워한다.
  하늘에서 우리를 보살피고 이끌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