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참고서에서 보는 한국어에 대한 시각

이상섭  /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서양 사람이 지은 책을 보다가 한국에 대한 언급이 나오면 우선 반가워하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는 조금, 또는 아주 실망하든가 분개하게 되는 것이 보통 있는 일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자랑하는 우리 조국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이 몰라도 너무 모르고 알아도 너무 부정확하게, 불충분하게, 부정적으로, 불공평하게 안다는 사실에 경멸을 보내고, 실망하고, 분개하는 것도 다들 같을 것이다.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들춰 보는 외국 책은 영어로 쓴 언어에 관한 참고서들이다. 그 중에 감탄하면서 뒤적이곤 하는 것이 영국인들이 큰 자랑으로 삼고 있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1)이다. 그것의 ‘시디-롬’을 뒤지면 그 사전에 당당히 영어 단어가 되어 오른 한국어 낱말이 자그만치 12개나 된다. 영어 알파벳 순서로 hangul(한글), kimchi(김치), kisaeng(기생), kono(고누), makkoli(막걸리), myon(면), ondol(온돌), onmun(언문), sijo(시조), tae kwon do(태권도), won(원), yangban(양반)인데 이들은 19세기 말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 영어 문장에 쓰여 영어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영어 단어의 구실을 한다고 보수적인 편인 『옥스퍼드 사전』 편찬자들이 인정한 낱말들이다.(2) 그들이 조금만 더 진취적이든가 영어 자료를 더 넓게 뒤졌다면 “불고기”, “냉면”, “갈비”, “소주” 같은 음식과 “재벌” 따위의 말도 올렸음 직하다. 그런데 일본어에서 간 말은 343개나 되니 일본인들은 으쓱하겠다.
  『옥스퍼드 영어 편람』이라는 책도 한국어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영어 편람』이라는 책에 웬 한국어 얘기냐 하겠지만 이 참고서는 영어가 다른 나라말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설명하는 항목들을 포함하고 있다. 한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19세기에는 보통 Corea로 표기되었고 가끔 Korea로 표기되기도 했으나 1910-45년간의 일본 점령 하에서 Korea로 굳어버렸다. 한국어는 중국(1.5백만), 일본(1백만), 소련(0.4백만)에서도 사용되는 교착어로서 우랄 알타이어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고대 한국어는 ‘이두’라는 표기법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중국 문자로 한국어의 소리와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일본의 ‘간지’와 비슷함) 15세기에 11모음과 17자음(후에 10모음, 14자음으로 줄임)을 나타내는 문자가 발명되어 일반 기록에 쓰였고 고전 한자는 공적, 학술적 용도로 계속 쓰였다. 일본 점령의 마지막 10여 년간 ‘한글’(전에는 일반인의 문자라는 뜻으로 ‘언문’이라 했음)은 금지되었었으나 다시 부활되어 전용이 되거나 한국어 단어처럼 읽히는 한자를 섞어 쓰고 있다. 지난 40년 동안 영어는 대체로 12-18세의 한국인 청소년 학생에게 한국어와 같은 수의 학교 수업 시간이 배당되었는데 주로 분석적인 문법 훈련으로서 이는 한국어의 연구와 사용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로 말미암아 한국어 구문을 영어 구문에 가깝게 가져가려는 시도가 생겼다. 예컨대 복수를 나타내는 조사 “-들”이 필수 성분이 아닌데도 전보다 훨씬 더 많이 쓰이고 있다. “-들”은 영어의 복수를 나타내는 굴절인 -s와 아주 같은 것이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생각하든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영어와 기타 서양어의 영향을 받아 각 어절을 따로 띄어 쓰는 관습도 19세기에 채택된 것인데, 이것은 일본어나 중국어에서는 따르지 못한 것이다.(3)


  편저자는 일본이 국명을 로마자로 표기할 때 알파벳 순서에서 Corea가 Japan보다 먼저 쓰이는 것을 싫어해서 Korea로 굳혔다는 설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기록상으로 Korea가 일본 강점 이전에도 혹간 쓰이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일본 강점 후에 Korea로 굳은 것은 사실이다. 한국어가 한국을 벗어나 동북아 일대에서도 약 300만 명이 쓰는 언어라는 언어지리적 사실도 제대로 언급하고 있다. 이두의 사용에 대한 언급도 대체로 정확하며, 한글에 대해서도(일본 문자보다 우위에 있음을 암시하며)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광복 이후 거의 모든 한국 청소년이 중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국어와 거의 같은 수의 수업 시간을 통해 영어를 배우게 되었고 그와 함께 한국어 자체에 상당한 변화가 생겼다는 것은 사실이다. 한 언어가 다른 언어에 끼치는 영향은 주로 어휘 관계이다. 한국어는 중국어에서 아주 많은 어휘를 얻어 왔지만 영어도 그 이상으로 라틴어에서 얻어 쓰고 우리말에서도 조금씩 얻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어휘가 들어오면서 입게 되는 통사 자체에 대한 영향에 대해서는 연구가 무척 모라자는 것 같다. 확실히 오늘의 한국어, 특히 글말에 중학 과정부터 굉장한 세력으로 강조되는 영문법의 영향으로 적지 않은 통사적 변형이 생겼다. 100년 전에는 전혀 쓰이지 않던 “였었겠다” 따위의 인위적으로 분석적인 시제 형식은 영문법 학습에서 싫도록, 죽도록 주입된 이른바 ‘완료형’에서 받은 영향의 일단일 것이다. 편저자의 의견으로는 오늘의 한국어에서, 특히 글말에서 명사와 대명사에 붙이는 “-들”이 영어 명사의 복수형 굴절 -s에서 왔다는 것이다. “-들”은 명사와 대명사뿐 아니라 부사와 동사에도 붙는 것인데 영문법을 배운 사람들은 영문법에 나오지 않는 이런 종류의 “-들”을 간혹 입말에서나 쓰고 명사, 대명사에 붙여 쓰는 “-들”과는 애써 구별하는 경향이 있다. 즉 사과-사과들, 구름-구름들(일기예보에서 늘 듣는 말), 나-우리들, 무엇-무엇들처럼 명사와 대명사의 복수형을 이루는 굴절처럼 쓰고 있으며 “많이들 먹거라” “빨리 뛰어들 갔다”에서처럼 부사나 동사에 붙은 “-들”은 비문법적인 것처럼 들려 기피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편저자의 지적은 아주 적은 부분이지만 깊이 연구할 문제이다.
  한국어의 띄어쓰기에 대한 지적은 국내외 학자들이 대체로 간과하는 점이다. 특히 일본어와 중국어에서는 이루지 못한 것인데 우리는 해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원래 세계의 거의 모든 정서법에서 띄어쓰기란 없었던 것이다. 똑똑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단어들을 연이어 붙인 채 파피루스에 그들의 철학 원고를 썼다. 어절, 또는 단어를 띄어쓰기 시작한 것은 서양에서도 11-12세기 경에 교회의 라틴말 원고에서였다고 한다. 서양 중세의 위대한 발명 중의 하나다. 서양에서 시작된 정서법의 한 중요한 관행을 19세기 말에 서재필이 『독립신문』에서 채택한 것은 얼마나 혁명적이었던가! “우리신문이 한문은 아니 쓰고 다만 국문으로만 쓰 거슨 샹하귀쳔이 다보게 홈이라  국문을 이러케 귀졀을 여 쓴즉 아모라도 이신문 보기가 쉽고 신문속에 잇말을 자세이 알어 보게이라.”(4) 이 띄어쓰기를 때마침 기독교의 국역 성경이 채택하여 한국 천지에 두루 퍼뜨렸던 것이다. 나중에 여기에 구두점의 사용이 더해지고 맞춤법이 확정되고 가로쓰기를 하면서 우리 글은 진짜 글다워졌다.
  데이비드 크리스털의 『케임브리지 언어 백과사전』(5) 에도 한국어 관계 내용이 많이 나온다. 1970년에 미국에서 한국어를 모어로 하는 사람이 10만 미만이었는데 1979년에는 62만 6천명으로 급증했다고 한다.(36) 이는 미국의 이민 소수 민족 중 가장 높은 증가율이며 아시아인 중에는 중국계 다음으로 가장 많은 수이기도 하다. 한국어의 세계화를 나타내는 지표로서 한국어가 국가의 경계를 멀리 벗어나서도 존속할 수 있음을 보인다.
  한국어의 존대법은 일본어, 자바어, 티벳어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상당히 희귀한 현상으로 꼽힌다.(98-99) 그런데 실례는 일본어에서 들고 있다. 한국어의 존대법에 대한 연구가 아직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까닭일 것이다. 다른 언어의 존대법과 비교해 볼 만하다.
  한국에서는 김, 박, 이(Kim, Pak, Yi)가 한국인의 성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는데 물론 틀렸고 순서도 김, 이, 박이라고 해야 옳다. 세 성은 합하여 약 40%를 차지할 뿐이다. 좀 중요한 점은 저자도 ‘박’을 Pak으로 ‘이’를 Yi로 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괜한 멋을 부려 서양 사람들인 양 Park이나 Lee(또는 더 겉멋을 부려 Rhee)니 하는데 앞으로 다들 Pak과 I(Yi는 한국인이 발음할 수도 없는 표기이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어의 흉내말(상징어)은 우리가 느끼기에도 대단히 발달한 것 같다. 이는 세계 학계에서도 알아주는 모양이다. “한국어는 성격상 소리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낱말이 1,000개 이상이라(176)”고 한다. 인도유럽어는 한국어나 일본어의 3분의 1도 못 된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가 실제로 든 예는 일본어이다. 한국어의 상징어에 대한 연구가 세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까닭일 것이다.
  인쇄술에 대한 언급은 흡족하지 않다. 목판 인쇄는 중국에서 7세기에 개발되었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랜 목판본은 868년에 나온 『금강경』이고 목각 활자를 쓰기 시작한 것은 11세기이고, 15세기 초에는 한국에서 금속 활자들이 개발되어 한 개의 활자가 10만 개나 주조된 예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194) 우리는 목판 『다라니경』이 적어도 751년 전에 한국에서 제작되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데 아직 세계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어족별 언어 인구에 있어서는 386 언어가 딸린 인도유럽어가 가장 많고 다음은 중국어를 포함 272 언어가 딸린 시노티벳어인데 한국어는 단일 어족으로서 11찌이며, 언어별 인구로서는 6,600만(1992년 수치)으로서 세계 13찌라고 한다.(289) 한국어가 정확히 어떤 어족에 속하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 없으므로 섣불리 우랄-알타이어의 하나라고 하는 것은 요즘 세계 학계에서 피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한국어를 단일 어족으로 분류한다. 이 점은 아주 특이한 사실로 생각되는지 한국어와 일본어를 특별한 난에서 함께 따로 다루고 있다. 계통을 밝힐 수 없는 독립어족 중에서 한국어와 일본어가 가장 대표적이다. 중국어에서 절반 이상의 어휘를 얻어 왔고, 가장 오래된 기록은 12세기에 중국 문자를 이용한 기록이 있다고 적혀 있다. 우리의 현존 기록으로 안타깝게도 그처럼 늦은 것만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 8세기에 한자를 이용한 역사 기록이 남아 있다는 사실과 비교가 되고 있다.(308) 『유기 100권』, 『신집 5권』, 『백제서기』, 『삼대목』이 그대로 남았더라면! 사실 신라 고분의 황금관 100개보다도 단 한 권의 『삼대목』이 얼마나 더 소중할 것인가? 나는 늘 속상해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콤리, 매슈즈, 폴린스키 편의 ꡔ언어 지도ꡕ라는 책을 뒤져 본다.(6)이 책은 한국어의 언어 인구를 6천만으로 잡고 세계 16찌에 매기고 있다. 앞 책에서 크리스털은 13찌라고 했는데 이 책에서는 벵갈어 등 인도의 여러 중요 방언들을 포함해서 그렇다. 그리고 6천만은 한국어 인구를 좀 줄여 잡은 것이기도 하다.(19)
  세계의 언어들의 기본 통사 구조가 주어-동사-목적어, 주어-목적어-동사, 동사-주어-목적어 등 6가지로 크게 나뉘는데 주어-목적어-동사 구조를 보이는 언어에 한국어가 힌두어, 우르두어, 터키어, 일본어와 더불어 속한다는 당연한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19) 이런 사실이 자꾸 언급되어야 한국어가 세계인의 관심거리가 된다. 그런 문장의 기본 구조와 교착 현상을 들어 한국어는 일본어와 함께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조심스레 말하고 있다.(47) 아주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터키, 우즈벡, 카작, 위구르, 아제르바이잔의 언어들이 우리말과 실상은 정말로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잃었던 친척 찾는 것처럼 괜히 흥분하게 된다. 반면에 중국어의 친척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이 내게는 왜 그리 안심스러운지 모르겠다. 한편 만주어가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은 무척 서운하다. 이런 말들을 진짜로 깊이 연구하는 사람들이 생겨야겠다.
  이 책에서도 한국어와 일본어는 특별한 경우로 다뤄진다. 한국어는 한반도와 제주도와 중국의 흑룡강성에서 사용된다고 적혀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에 나타나는 존대법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특별한 현상인 듯, 여기서도 언급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역시 일본어의 존대법을 예로 들고 있다. 한국어는 유교 전통 때문에 일본어보다 나이의 많고 적음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두 언어는 통사적으로 매우 가깝지만 같은 계통에 속해서라기보다는 문화적 접촉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둘 다 중국어에서 많이 빌려다 썼고 문자도 갖다 썼는데 일본 글은 중국 문자를 그대로, 또는 변형한 음절 문자를 쓰는데 반하여 한국 글은 이제는 거의 다 15세기에 세종 임금이 고안한 ‘한글’로 쓴다고 되어 있다.(55) 한글은 굉장한 발명품이다. 크리스털은 세계의 문자를 다루면서 한글을 언급하지 않았으니 그의 유명하다는 책의 크나큰 결함이다. 누가 서평에서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나?
  이 책에서는 중국 문자가 3세기에 한국에 도입되어 수백 년 동안 문법이 전혀 다른 한국어를 기록하는 데에 억지로 쓰이다가 15세기 초의 한글 발명으로 표기의 문제가 해소되었다고 하고, 현재 40개의 글자로 되어 있는 한글은 “세계의 모든 문자 중에서 음성학적으로 가장 능률적인 것”이라고 한다.(203) 그런데 아직도 중국어에서 온 차용어를 나타내는 데에 중국 문자가 쓰인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북한에서는 이것마저 없앴다고 앞에서 언급했다.) 이 책의 205쪽에는 그 40개의 글자를 아마도 집필자가 어디서 보고 베낀 듯 아주 졸렬한 꼴로 그려 보이고 있다. 게다가 ㅜ자는 완전히 틀리게 그려 놓았다. 최근에 서양에서 나온 다른 책들이 한글의 원리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니 좀 안심이지만, 아직도 한글은 서양 학자들에게 소문만 무성하고 실제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여 안타깝다.
  왜 우리는 한국어와 한글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의견에 대하여 그리도 큰 관심을 가지는가? 한때는 말할 수 없이 가난했다가 형편이 피어서 자존심을 되찾은 사람의 자연스런 반응일 뿐인가? 또는 한국어는 독특하고도 중요하여 세상 사람, 특히 언어학자들의 이목을 끌 만하며 더욱이 한글은 확실히 가장 우수한 문자이기 때문인가? 나는 이 나중 이유가 진짜라고 믿는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한국어를 모르면서 언어란 무엇이라고 떠들기는 위험하며 문자를 논하면서 한글을 모르면 말이 안 된다고 확실히 믿는다. 그러니만큼 국어학자는 잠시라도 한국어와 한글이 세계 학계의 중요 관심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