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자 /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1. 어울려 사는 삶의 詩
“나는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잘 어울려 살까 하여 시를 씁니다.”
시집 『성북동 비둘기』의 출판기념회에서 김광섭 시인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따뜻하고 친근한 정감을 잃지 않으려는 시인의 온화한 시선은, 항상 사람과 사물의 가까운 자리에서 시작되고 또 그곳에 머무른다. 이렇게 ‘어울려 사는 삶’에 대한 희구에서 출발한 김광섭의 시는 늘 넉넉한 품으로 삶과 일상의 진리를 끌어안고 있기에 공감의 울림 또한 넓고 깊다.
봄이다. 봄이야말로 ‘어울려 사는 삶’을 이루어낼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시간이다. 그 싱그러운 힘으로 봄은 겨우내 묵은 것들을 밀어내고 찬란하고 싱싱한 기쁨의 수액을 준비한다. 다가오는 봄의 발걸음은 신비롭고도 놀랍다. 설핏 우리 곁에 다가와 묵은 것과 누추한 것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소박한 모양새로 새 것들을 지어올린다. 우리가 잔뜩 웅크린 몸을 풀지 않고 있는 사이, 양지녘에 진달래 꽃망울을 피우거나 산수유와 개나리의 꽃사태를 이루어내기도 하지 않는가. 긴 시간 동안 춥고 어두운 다락에서 마치 묵은 빨래뭉치처럼 굳어 있던 우리는 마술지팡이와도 같은 봄바람의 향기 앞에 풀려나와 몸과 마음을 녹인다.
그래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꿈꾸는 시인들의 눈에 봄은 한층 예사롭지 않다. 봄은 해마다 돌아오는 자연의 섭리이지만 여전히 만물을 풀어내고 언 것을 녹이고 메마른 것을 적시고 떠난 것을 돌아오게 하는 신비로운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김광섭의 대표시집
『성북동 비둘기』(1967) 맨 첫머리에 실려 있는 시가 <봄>이라는 것은 그래서 다시 한 번 상징적이다. 그의 시에는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과 다정한 태도가 함축되어 있음을 선명하게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2. 만물이 ‘相見禮’하는 봄
얼음을 등에 지고 가는 듯
봄은 멀다
먼저 든 햇빛에
개나리 보실보실 피어서
처음 노란 빛에 정이 들었다
차츰 지붕이 겨울 짐을 부릴 때도 되고
집 사이에 쌓은 울타리를 헐 때도 된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가장 먼 데서부터 시작할 때도 온다
그래서 봄은 사랑의 계절
모든 距離가 풀리면서
멀리 간 것이 다 돌아온다
서운하게 갈라진 것까지도 돌아온다
모든 처음이 그 근원에서 돌아선다
나무는 나무로
꽃은 꽃으로
버들강아지는 버들가지로
사람은 사람에게로
산은 산으로
죽은 것과 산 것이 서로 돌아서서
그 근원에서 相見禮를 이룬다
꽃은 짧은 가을 해에
어디쯤 갔다가
노루꼬리만큼
길어지는 봄해를 따라
몇 천리나 와서
오늘의 어느 주변에서
찬란한 꽃밭을 이루는가
다락에서 묵은 빨래뭉치도 풀려서
봄빛을 따라나와
산골짜기에서 겨울 산 뼈를 씻으며
졸졸 흐르는 시냇가로 간다
시 <봄>은 김광섭 특유의 절제와 균형을 바탕으로 한 미감을 잘 보여 준다. ‘봄’이라는 평범한 주제를 선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계절이면 모든 이가 느끼는 설레임을 시인의 눈을 통해 새로운 풍경으로 재현하고 있기에 보편적인 공감을 얻는다. 봄이 펼치는 정경을 천천히 움직이는 시선으로 펼쳐 보이는 이 시를 읽으며 우리 또한 정서의 수위를 서서히 높여 가게 된다.
김광섭 시인은 이렇듯 시적 대상들에 대해 늘 평형 상태를 유지한다. 이 태도는 자연을 이상화하고 정신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객관적인 힘의 기반이 된다. 선시나 시조에서 보여지는 동양적이며 전통적인 자연관에 그 맥을 두는 동시에, 서술의 객관화를 통해 대상에 대한 유대감을 친숙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김광섭의 시에서 봄날의 예찬은 영탄조로 흐르지 않고 지극히 담담하고 평명(平明)한 어조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시의 놀라움은 바로 거기에서 온다. 가장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원대한 자연의 모든 것을 끌어안아 생명을 주고 소생시키는 봄, 이런 봄을 맞는 흥분과 달뜬 마음을 지혜롭게 통어해내는 시인의 어조, 성급하게 좁히지 않는 미적 거리, 경탄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열어 보이는 봄의 세계, 이 시의 분위기가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갖는 것은, 처음이 끝이 되고 죽은 것과 산 것이 만나는 ‘근원의식’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라는 원칭 지시대명사로 표현되고 있는 ‘근원’은 가장 뿌리깊은 원천적인 질서를 의미한다. ‘근원’에서는 시작과 종말이 나뉘어 있지 않아 시간이 수평적으로 흐르지 않고 순환한다. 겨울에서 봄이 되는 시간의 순환은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람 사이의 공간적, 심리적 거리까지도 풀리게 함으로써 ‘멀리 간 것이 다 돌아’오게 하고 ‘갈라선 것까지도 돌아’오게 한다. 이런 자연과 우주의 질서에 따라 아주 멀리서부터 천천히 다가오는 봄만큼이나 시인의 시선과 어조 또한 완만하며 진지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면서 서서히 마음을 열어 가고 적셔 갈 수 있게 되며, 시인의 끝내 인내한 격정적인 봄의 ‘찬란한 꽃밭’을 시 맨 끝부분에서 함께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익숙한 봄을 매번 새롭게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얼어있고 굳어 있는 겨울의 일상에 훈풍을 불어넣어 움직이고 살아 있는 사물로 숨쉬게 하는 봄의 힘이다. 이는 맨 첫 행에서 ‘얼음’으로 시작한 시가 맨끝 행에서 ‘시냇물’로 흐르게 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봄은 등에 진 얼음을 내려놓고 겨울 짐을 부려 놓으며 울타리를 헐어내는 시간이다. 또 얼어 붙은 것이 녹고 딱딱한 것이 풀리며 간 것이 돌아오고 죽은 것이 살아나는 시간이다. 봄빛을 따라 나와 풀린 몸으로 마주설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은 멀리 간 것들이 모두 돌아오기를 긴 시간 동안 기꺼이 기다리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 봄의 몫이다. 성큼 다가서지 않고 ‘가장 먼 데서부터’ ‘몇 천리나’ 에둘러 돌고 돌아오는 동안 봄이 품게 된 마력이다. 그래서 ‘봄은 사랑의 계절’이 될 수 있었으리라.
그래서 봄은 사랑의 계절
모든 距離가 풀리면서
멀리 간 것이 다 돌아온다
서운하게 갈라진 것까지도 돌아온다
모든 처음이 그 근원에서 돌아선다
나무는 나무로
꽃은 꽃으로
버들강아지는 버들가지로
사람은 사람에게로
산은 산으로
죽은 것과 산 것이 서로 돌아서서
그 근원에서 相見禮를 이룬다
‘서운하게 갈라’지거나 떠나버린 모든 것은 봄이 지닌 사랑의 힘에 의해 회복되고 회귀한다. 죽은 것과 산 것, 그 어떤 상극적인 것도 봄을 가운데 두고는 나란히 놓여지게 되는 것이다. 화자의 시선은 ‘나무는 나무로’ ‘산은 산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한다. 사물을 그 자체로 존재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자아도 확고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나무를 나무로, 꽃을 꽃으로, 버들강아지를 버들가지로, 사람을 사람으로, 산을 산으로 살아있게 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봄에 다시 ‘산 것’이 되기 위해 겨울 동안 ‘죽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은 것’으로부터 깨어나 ‘산 것’이 되어 서로 ‘相見禮’하게 된 모든 것들에서 시인은 경이로움을 느낀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대해 경건한 애정을 갖는 시인의 마음이 잘 투영된 부분이기도 하다.
‘相見禮’는 시인이 세상을 파악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이 시의 중심 시어이다. 타자의 세계를 외면하거나 시선을 자신 안에만 두는 고립적이고 배타적인 자세가 아니라, 대상을 마주 바라보는 자세, 아무런 감각적 접촉을 하지 않더라도 예의를 지키며 서로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자세이다. 만물이 상견례하고 있는 이 시공을 가득 채우는 것은 온화한 평정이다. 대상을 서로 존중하고 신뢰함으로써 지나치거나 부족함 없이 정화된 상태이다. 사물들이 각자 나란히 섬으로써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고 또 갈 길로 나아가면서 공존하고 조화하는 정신인 것이다.
상견례에 함축되어 있는 유대의식과 거리의식의 병존은, 어울려 사는 따뜻한 삶을 위해 시인이 택한 인식의 한 방법이다. 균형감각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 거리의식은 사물들의 자연스런 거리를 인정하는 ‘제자리지킴’ 의식에서 비롯된다. 그의 시에서 사물들은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지나치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균형감을 얻게 되며 자존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죽음의 시간을 이겨내고 자신의 아름다운 자리를 지켜낸 사물들의 ‘제자리지킴’은 자아와 자아 사이에서도 균형잡힌 거리를 유지해야 이룰 수 있는 자세이다. 사물을 비롯한 모든 만물에 대해 이 상견례 의식을 버리지 않는 시인이 훗날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격적 감각을 잃지 않는 좋은 시들을 남기고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굳어 있던 것들을 풀리게 하는 시간의 순환
꽃은 짧은 가을 해에
어디쯤 갔다가
노루꼬리만큼
길어지는 봄해를 따라
몇 천리나 와서
오늘의 어느 주변에서
찬란한 꽃밭을 이루는가
‘가을 해’로부터 ‘봄 해’로 이어지는 시간의 순환 속에서 가을과 겨울에 죽었다가 봄에 다시 살아나 찬란한 꽃밭을 이루는 ‘꽃’, 이 꽃은 가장 완전한 생명체이자 사물이 생존하는 원리의 상징이다. 그것은 서쪽으로 지는 해의 마지막 빛이 사라져도 아침이면 해가 또다시 솟아오르는 질서와 같이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존재하는 자연이 주는 감동이다.
모든 생명에게 봄소식을 전하며 인간의 마음을 환하게 밝히는 ‘꽃’은 침묵의 언어로 우리에게 꿈을 가르친다. ‘어디쯤 갔다가’ ‘몇 천리나 와서’ ‘어느 주변’에선가 꽃밭을 이루고 있는 이 꽃에 대한 생명의 예찬은 ‘어디’ ‘어느’ ‘몇’ 등의 불확정적인 공간개념으로 오히려 공간을 한없이 확대하면서 꽃을 만개시킨다. 앞의 각 연에서 ‘온다’ ‘돌아온다’ ‘돌아선다’ ‘이룬다’ 등의 서술형 종결어미는 사실을 전달하는 듯한 어투로 대상과의 미적 거리를 객관화시켜 왔는데, 6연에 이르러 ‘찬란한 꽃밭을 이루는가’라는 감탄형 어미로 전환됨으로써 화자의 내적 정서를 강하게 표출하고 대상과의 거리를 밀착시키면서 극적 효과를 이루고 있다.
봄은 얼음이나 겨울 짐, 울타리같이 차갑고 폐쇄적인 것들을 다스리고 ‘보실보실’ 피어나는 노란 개나리를 찬란한 꽃밭으로 바꾼다. ‘노루꼬리만큼’ 아주 조금씩 길어지는 봄해의 시간 동안 누추함을 찬란함으로 바꿀 준비를 하기 위해 몇 천리를 마다 않고 온 꽃, 이는 봄의 사령이다. 시인의 마음에 내재한 아름다움도 이 꽃밭에서 자랐으리라.
다락에서 묵은 빨래뭉치도 풀려서
봄빛을 따라나와
산골짜기에서 겨울 산 뼈를 씻으며
졸졸 흐르는 시냇가로 간다
‘봄빛’은 겨울과의 대조, ‘다락’과 ‘산골짜기’의 공간적인 대비, ‘묵은 빨래뭉치’와 그것을 푸는 봄냇물의 대조 속에서 겨울 동안 사느라 굳어버린 뼈를 씻으면서 맑고 청신하게 빛난다. 봄날의 햇빛은 그 따뜻한 해조 속에 사물들의 형상을 서로 풀리게 하고 어울리게 하여 자연이 숨겨두었던 생기를 되찾게 한다. ‘봄빛을 따라나’온 해묵은 겨울의 일상은 물 흐르는 시냇가로 가서 겨울 산 뼈를 씻으며 녹이며 새로운 피돌기를 꿈꾼다. 얼음은 시냇물로 흐르고 겨우내 굳은 몸을 감쌌던 묵은 빨래뭉치가 풀리우는 봄, 이제 만물은 체온과 생명과 활기를 새로 얻는다.
시 <봄>은 비유적인 표현이 없이 직접적인 서술로써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시인은 대상과 대상 사이의 거리의식에서 시종 엄격한 절제와 통어를 보임으로써 시적 응결력을 잃지 않고 있다. 지나치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물들의 제자리 의식에서 생겨진 자연스러운 거리가 그의 시에 절제와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음 - 겨울·짐 - 빨래뭉치-겨울 산 뼈 등 딱딱하게 뭉쳐져 있는 이미지들은 봄날의 ‘찬란한 꽃밭’과 봄빛과 흐르는 시냇물의 풀림에 의해 조화로운 균형을 지키며 한 세계를 이루어낸다.
연둣빛 부드러움으로 시작되는 봄, 모든 경계를 풀어버리기에 알맞은 빛깔로 봄은 시작된다. 너무나 익숙해져버려 소중한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일상을 시인은 전연 새로운 풍경으로 우리 앞에 세운다. 통과의례와도 같은 겨울을 겪어내고 봄이면 새롭게 태어나 자신과 타인에게 상견례하는 지상의 모든 것들! 그들의 숨결을 읽어낸 시인의 시선이 경이롭다. 다시,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