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본

이기문  /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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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년대에 주시경을 비롯한 우리 나라 학자들 사이에 국어 순화(醇化)의 돌개바람이 불었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때의 순화는 문법 술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테두리 안에만 머무르지도 않았다. ‘임’, ‘얻’과 같은 품사명의 경우는 짧게나마 설명이 있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적지 않아서 의문으로 남아 있다. 주시경과 김두봉의 글에서 몇 예를 들어 본다.

  기, 씨:품사. 주시경은 『國語文法』에서 ‘기’라 했던 것을 『朝鮮語文法』에서 ‘씨’로 바꾸었다. 김두봉의 『조선 말본』도 이를 따랐다.
  드, 월:문장. 주시경이 ‘드’라 했던 것을 김두봉이 ‘월’로 바꾸었다.
  넛:대신. 주시경은 처음에는 대명사를 ‘대임’이라 했다가 『朝鮮語文法』(재판)에서 ‘넛임’으로 고쳐 썼다. 『말의 소리』에는 “그 넛에”라 하여 대신의 뜻으로 쓰인 예가 보인다. 김두봉도 『조선 말본』에서는 이를 따랐으나 『깁더 조선 말본』에서는 ‘대임’으로 되돌아갔다.
  고나, 늣:최소 단위. 『말의 소리』에 ‘고나’는 “말의 소리의 늣이니”라 하였고 ‘우리 고나’로서 여섯 단모음과 열 단자음을 들었다. ‘고나’는 음소(音素)를, ‘늣’은 최소 단위를 가리킨 듯하다. ‘늣씨’란 말도 보인다. 김두봉의 글에는 이 말이 보이지 않는다.
  노:공기. 『國語文法』에서 ‘氣波’라 했던 것을 『말의 소리』에서는 ‘노의 결’이라 하였다.
  갈:『國語文法』에서부터 ‘갈’[學]이 쓰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조선 말본』에는 ‘性, 性質’의 뜻으로 또 하나의 ‘갈’이 쓰였음을 본다. “수와 암 두 가지 갈”, “수갈, 암갈”의 ‘갈’에 ‘性’이 첨기되었고 “몬의 갈”에는 ‘性質’이 첨기되었다.


  이들은 어떤 말인가. 도대체 우리 국어에 이런 말이 있을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이 말들에 대해서 주시경과 김두봉의 글이 한마디의 설명도 베풀지 않은 점이 무엇보다도 이상한 느낌을 준다. ‘임’이나 ‘얻’에 대하여 설명을 베푼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들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실은, 문세영의 『朝鮮語辭典』(1938)과 한글학회의 『큰사전』(1947~1957)이 정반대의 태도를 취한 점이다. 문세영의 사전을 펴면 ‘임씨’, ‘이름씨’는 말할 것도 없고 위에 든 이상한 말들이 버젓이 표제어로 실려 있음을 본다. 어쩐 일인지 ‘기’만은 보이지 않는다.


씨:①단어(單語) ②품사(品詞)
드:‘시귀’(詩句)의 옛말.
월:글. 文章
고나:①근본(根本)의 옛말 ②자모(字母)
늣:‘원소’(元素)의 옛말.
넛:‘대신’(代身)의 옛말.
노:‘공기’(空氣)의 옛말.
갈:①학(學), 논(論) ②성질

  주시경이나 김두봉이 스스로 폐기한 ‘드’, ‘넛’까지 있음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그리고 옛말이라 한 것들이 다섯이나 되는데 어떤 근거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와는 반대로, 이 말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으리라고 기대되는 한글학회의 『큰사전』에는 정작 이 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우리를 놀라게 한다. 실상 이 사전에는 ‘임씨’, ‘이름씨’ 같은 품사명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이 사전의 편집 책임자(정인승)의 확고한 방침에 말미암은 것으로 학회 안에서 격렬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위에 든 말들에 국한하여 보면, 이윤재의 『조선말사전』(1947), 이희승의 『국어대사전』(1961)이 ‘씨’와 ‘월’만을 표제어로 택하였고 그 뒤의 사전들도,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나, 대체로 이를 따르고 있다. 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1992)은 이 계통의 문법 술어를 가장 많이 싣고 있으나 위의 말들 중에서는 ‘씨’와 ‘월’만이 표제어로 나타난다. ‘씨갈’[品詞論], ‘월갈’[構文論] 등은 있으나 정작 ‘갈’[論]은 보이지 않음도 주목할 만하다.
  위에 든 말들은 모두 정체불명이라 해도 조금도 지나침이 없다. 그 말을 처음 쓴 분들이 아무런 설명도 베풀지 않아 영원한 의문 속에 묻히고 만 것이다. 아마도 ‘씨’는 『訓民正音 諺解』의 “訓은 칠 씨오” 등에서, ‘월’은 ‘글월’에서, ‘넛’은 ‘넛손자, 넛할미’ 등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국어학자들 사이에 있어 왔으나 어디까지나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주시경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최현배는 ‘씨’에 대하여 스승으로부터 설명을 들은 일이 없음을 전제하고 “말의 씨[語의 種]란 뜻이니 곧 말을 분류하는 선자리[立場]에서 ‘낱말’을 이름이다”라고 하였다」(『우리 말본』 깁고 고침. 1965. 138). 그러나 주시경이 옛 책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최현배의 말을 믿는다 해도 ‘씨’[種]로 보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한 느낌을 준다. 그 보다는 차라리 ‘말씨’에서 취한 것으로 봄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월’을 ‘글월’에서 취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김두봉의 ‘갈’[性]은 ‘성깔’, ‘태깔’, ‘빛깔’ 등의 ‘깔’(갈)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떠오른다. 새 말을 만든 비결의 한 자락을 들춘 듯한 느낌도 없지 않으나, 이 역시 한낱 부질없는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2

  주시경은 『國語文法』, 『朝鮮語文法』이라 했었는데 김두봉이 『조선 말본』이라고 했으니 ‘말본’은 김두봉이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말본』의 ‘머리말’에 다음 대목이 있어 우리를 잠시 멈칫거리게 한다.(편의상 띄어쓰기를 한다.)

스승님이 계실 때에 이미 박아낸 『조선말 글본』이 있었으나 이는 짓은 제 넘우 오랜 것이므로 늘 고치어 만드시려다가 가르치시는 일에 넘우 바쁘어서 마츰내 이루지 못하시고 돌아가시엇으므로…


  여기에 주시경의 저서로 든 『조선말 글본』은 지금까지 알려진 일이 없다. 『朝鮮語文法』을 이렇게 고쳐 부른 것으로 짐작이 가기도 하지만, ‘글’이 든 것이 성급한 단정을 삼가게 한다. 그러나 오늘날 볼 수 있는 글들을 놓고 보면 ‘말본’은 김두봉이 처음 썼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본’은 주시경의 『國語文法』에서 본보기의 뜻으로 자주 쓰인 바 있으니 김두봉의 귀와 눈에 익은 말이었을 것이다. 김두봉의 『조선 말본』을 펴면 ‘머리말’ 첫머리부터 말에는 ‘본’이 있음을 강조하였고 이 책의 여기저기서 ‘본’ 옆에 ‘法’ 또는 ‘標準’이 적혀 있음을 본다. 『소리 내는 본 發音法』(5, 8), 『본 標準으로 뽑아서』(6) 등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깁더 조선 말본』의 ‘얽말’[總論]에서는 ‘본’에 “본세, 맘본 하는 그 본”이라는 설명을 붙인 것이 보인다. ‘본세’는 ‘본새’요 ‘맘본’은 ‘마음’에 ‘본’이 붙은 말임에 틀림없다. 이 책(68)에 ‘꼴 없는 임’[無形名詞]의 예로 ‘맘’이 ‘뜻’, ‘슬기’ 등과 함께 적혀 있음을 참고할 것이다. ‘맘본’이나 ‘마음본’은 지금의 국어사전들에서는 표제어로 실려 있지 않으나 이해하기에는 그리 큰 어려움이 없다.
  이 ‘말본’이 최현배의 『우리 말본』(1937)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말본](‘말’의 긴소리 표시는 생략함)이란 발음이 일반화되었다. 이것은 이 ‘말본’을 처음 쓴 김두봉이나 그것을 이어받은 최현배의 발음에 연유한 것으로 믿어진다. 아마도 오늘날 [말뽄]이라 발음하는 국어학자는 한 사람도 없지 않은가 한다. 한글학회의 『큰사전』에는 이 말이 실리지 않았으니 덮어둘 수밖에 없지만, 그 뒤에 간행된 모든 국어 사전들은 다 [말본]이란 발음을 인정하고 있음을 본다.
  대표적인 예로 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에서 표제어 ‘말본’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말:-본 ① ≪언≫ 말의 조직에 관한 법칙. 곧 뜻조각과 꼴조각으로 이루어진 월의 짜임에 관한 법칙. (ㅂ) ~을 공부하다. ~을 밝히다. ~에 어긋나다. 말법, 문법, 엇법. ②=말본새. (ㅂ)~이 좋다. ~이 고약하다. 말 배우는 사람이 말 잘하는 사람의 ~을 본뜨도록 해야지…


  무엇보다도 먼저 지적해야 할 사실은 ‘말본’에 두 뜻을 적은 것은 이 사전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둘째 뜻이 ‘말본새’와 같다고 한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사전에서 표제어 ‘말본새’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말:-본새[-뽄-] 말의 됨됨이나 버릇. (ㅂ) ~가 좋지 않다. ~가 고약하다. ~부터 고쳐야겠다. 말본 ②.

  이 ‘본새’는 ‘본’에 접미사 ‘새’가 붙은 것이다. 이 접미사는 됨됨이, 상태, 정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거의 모든 사전에 실려 있다. 구김새, 꾸밈새, 먹음새, 모양새, 생김새 등 참고. 따라서 ‘말본’과 ‘말본새’의 의미는 비슷한 점은 있지만 같다고 할 수는 없다.
  ‘본’은 본보기의 뜻으로도 쓰이지만, ‘버선본, 그림본, 옷본’과 같이 모형(模型)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 ‘본’은 후기 중세 국어 문헌에 보이는데, 모두 한글로 표기되었고 그 성조가 ‘本’의 거성과는 다른 평성인 점이 주목된다. 현대 국어사전들은 예외없이 ‘본’을 ‘本’으로 인정하고 있으나 좀더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이미 중세 국어 문헌에 ‘본받다’, ‘본보다’의 예가 보이며 오늘날 쓰이는 ‘본(을) 뜨다’도 역사가 오랜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인용한 『우리말큰사전』의 ‘말본’에 대한 뜻풀이에서 “말본을 본뜨도록”이라 한 것은 잘못임을 지적해 둔다. 그저 “말본을 뜨도록”이라 함이 옳다.
  여기까지 글을 쓰는 동안에 줄곧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생각은 ‘말본새’의 ‘본’을 된소리로 발음함에 비추어 ‘말본’의 ‘본’도 된소리로 발음함이 옳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옷본’은 말할 것도 없고 ‘버선본, 그림본’ 등의 ‘본’이 모두 된소리로 발음됨을 확인하기에 이르러 ‘말본’도 예외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우연히 손에 든 현진건의 소설 『赤道』(1968, 三中堂)에서 ‘말뽄’으로 적힌 예를 보기에 이르러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아까 여해 말뽄으로 ‘경이지’ 하려다가 말이 상스러운 것을 고쳐서…(33)
이게 무슨 사나운 말뽄이요. 전에는 안 그러시더니.(269)


  지난 10년대나 20년대의 간행물들을 뒤적이면 이런 예가 더 많이 나올 것으로 짐작된다. 한글 맞춤법이 정해지기 전의 단행본이나 잡지들의 표기는 그 무렵의 언어 현실을 숨김없이 보여 주는 점에서 국어학자들에게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있는 사실을 덧붙여 둔다. 그것은 ‘본’이 ‘뽄’으로 발음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말큰사전』에도 비표준어로 ‘뽄’이 있음을 본다. ‘본새’에 대한 ‘뽄새’도 보인다. 이것은 ‘본’이나 ‘본새’가 복합어에서 된소리로 발음됨이 예사여서 그것이 단독 발음으로까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요즈음 학생들이 대학의 학과를 ‘꽈’라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니, 예와 이제가 다르지 않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위의 논술로 ‘말’과 ‘본’이 합한 복합어의 발음은 [말뽄]임이 어느 정도 밝혀진 것으로 믿지만, 이것은 실상 사이시옷과 관련된 것이다.(달리 적당한 것이 없어, 본래 문자론의 술어인 ‘사이시옷’을 그대로 쓰기로 한다.) 종래 현대 국어의 사이시옷을 단순한 음운론적 현상으로 다루려는 시도들이 있었으나, 이것은 다음과 같은 몇 예만 들어도 곧 잘못임을 깨닫게 된다.


나무집(나무로 지은 집) ─ 나뭇집(나무를 파는 집. 木材商)
기와집(기와를 이은 집) ─ 기왓집(기와를 파는 집)
나무배(나무로 만든 배) ─ 나뭇배(나무를 실어 나르는 배)


  중세 국어에서 사이시옷은 하나의 문법 형태(속격조사)였는데 그 흔적이 현대 국어에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위에 든 몇 예를 보면, 무엇으로 만든 물건을 나타낼 때에는 사이시옷이 쓰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오래 전 일이지만, 문장의 매력에 끌려서 마해송의 동화(소년 소설)를 탐독한 일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소년이 바다에 빠졌을 때 큰 고기가 나타나 그 고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게 되는 대목에서 저자가 그 소년이 탄 고기를 ‘고기배’라 부른 것을 보고 무릎을 친 일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고깃배’[漁船]와 구별하여 ‘고기배’라는 새말을 만들어 쓴 마해송의 언어 감각에 탄복한 것이다.
  ‘말본’의 경우는 말의 본, 즉 말을 할 때 떠야 할 본이므로 여기에는 의당 사이시옷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복합어는 예전부터 [말뽄]으로 존재해 왔다. 이런 사실을 몰랐는지 무시했는지, ‘문법’을 대신하는 말로 ‘말본’을 새로 만들고 그것을 [말본]이라고 발음한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문법을 가리키는 말 자체가 문법 규칙에 어긋나고 만 것이다. 이것이 아무런 비판도 받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되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3

  새말을 만드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국어 전반에 대한 넓고 깊은 지식의 토대 위에서 조심스럽게 신중하게 해야 한다.
  지난 10년대에 문법학자들이 한 일은 순수한 뜻과는 어긋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우리는 이것을 좋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근년에도 새말을 마구잡이로 만드는 일이 없지 않아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기를, 우리 국어학이 바른 길을 가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