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섭 /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머리말
접두사는 어기의 문법적 성질을 바꾸는 일이 없이 어기에 어떤 의미를 더해 주는 기능만을 가지기 때문에 접미사에 비해 성격이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은 이와 관련이 있지만, 또 접두사는 접미사에 비하면 그것이 과연 접두사인가 아닌가부터 분명치 못한 경우가 대단히 많다. 지금까지 접두사가 접미사에 비해 연구자들의 흥미를 덜 끌어 온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사전 편찬에서의 접두사 처리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성격과 규모가 비슷한 국어의 대표적인 세 사전(L, G, U 사전)에서는 총 134개 항목이 고유어 접두사로 올려졌는데, 그 세 사전 모두에서 똑같이 접두사로 올려진 것은 그 중의 80개뿐이다. 한자어의 경우 앞의 세 사전에서 총 137개 항목이 접두사로 올려졌는데, 세 사전에서 똑같이 접두사로 올려진 것은 그 중의 87개뿐이다.(1)
다른 어떤 부류의 항목도 등재나 문법 범주 판단에서부터 이처럼 큰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국어사전에서의 접두사 처리 문제는 일차적으로 표제어 선정의 문제, 즉 접두사 판정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국어의 공시적인 확장형 사전을 염두에 두고 고유어와(제2장) 한자어로(제3장) 나누어 유형별로 전형적인 예들로써 이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접두사로 판정되지 않을 형식들의 처리 문제도 함께 논의될 것인데, 이때 기존의 국어사전들에서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어근’의 개념을 활용할 것이다. ‘어근’은 굴절접사를 붙이지도 못하고 단독으로 단어가 되지도 못하는 형식이 단어의 중심부로 쓰일 때 그것을 가리키는 용어인데(이익섭 1968) 이 글에서는 고유어를 다룰 때나 한자어를 다룰 때나 늘 ‘접두사―어근―단어’의 구별을 초점으로 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접두사 분석에서 이형태 관계를 정확하게 인식하여 그에 따라 파생어 표제어를 선정하고 접두사와 그 파생어의 뜻풀이를 조정하는 문제도 대표적인 한 예를 들어 논의해 보고자 한다(제4장).
2. 고유어 접두사의 판정
일반적으로 복합어(합성어와 파생어)의 앞성분은 사전에 단어나 어근 혹은 접두사로 따로 표제화되어 있을 것이 기대된다. 국어의 접두사가 합성어의 앞성분이 의미 변화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면(유창돈 1980:105), 단어나 어근은 언제든 접두사로 발달할 가능성을 가진다.
다음의 예들로써 관형사나 명사에서 왔을 복합어 앞성분들의 범주를 판단해 보기로 하자.(2)
(1) | 판정 대상 | 뜻 | L사전 | G사전 | U사전 | 변화 | 본고의 처리안 |
ㄱ | 물-병장/과장/대통령… | 무력한 | × | × | × | 없음 | × |
ㄴ | 첫[初]-봄/여름/잠… | 처음 부분 | × | (P) | (P) | 의미변화 | 관형사※ |
ㄷ | 개-꽃/살구/볼락… | 참 것이 아닌 | P | P | P | 의미변화 | P |
ㄹ | 돌-가자미/감/배/팥… | 품질이 낮은 | P | P | P | 의미·형식변화 | P |
ㅁ | 들-기름/깨. | 참 것이 아닌 | P | P | P | 의미·형식변화 | P/× |
ㅂ | 짝-귀/눈/신/사랑… | 짝이 맞지 않는 | × | × | P | 의미변화 | P |
ㅅ | 날-강도/계란/벼락… | 익히지 않은(또, 그 비유) | P | P | P | 원단어 폐어화 | P |
ㅇ | 갖-두루마기/신/옷… | ‘가죽’ | P | P | P | 원단어 폐어화 | 어근/× |
ㅈ | 옹달-샘/솥/시루/우물 | 작고 오목한 | P | P | P | 원단어 폐어화 | 어근/× |
먼저, 단어는 구 형성의 직접적인 재료가 되는 한편 단어 형성에도 직접적인 재료가 된다는 사실이 분명히 인식되어야 한다. 따라서 어떤 합성어 속의 앞성분이 독립된 단어로 쓰일 때와 의미가 같다면 그것은 접두사일 수 없다. 예를 들어 (ㄱ)의 ‘물’은 독립된 명사로서의 그것과 의미가 같기 때문에 따로 언급될 필요가 없다. 명사 ‘물’의 뜻풀이 가운데 예컨대 ‘③무력한 사람이나 기관의 비유. ¶우리 과장은 아주 물이야. // 물과장 / 물병장(-兵長)’이라는 개별의미 설정으로 충분하다((1ㄱ)의 ‘본고 처리안’에 ‘×’라 한 것은 이러한 뜻이다). 아울러 이러한 관점에서 단어 항목 풀이의 용례항에도 구나 문장 예뿐 아니라 합성어나 파생어 예가 들어져야 한다는 것도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든 복합어의 앞성분에 독립된 단어에서와는 다른 뜻이 존재하는 경우, 이 새 뜻을 어떻게 판정하여 사전에 등재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새 뜻으로 새 접두사가 인정되려면 우선 그 독자성이 분명해야 하는데, 독자성의 판단에는 원 단어와의 유연성과 의미의 투명성 혹은 생산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먼저 ‘첫’에 대한 U사전의 처리를 예로 하여 유연성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2) | 첫 [매] |
‘처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
첫- [앞] | 어떤 이름씨 앞에 붙어서 ‘처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ㅂ)~눈. ~사랑. ~아기. ~인상. |
‘첫’은 독립된 단어로 쓰일 때는 언제나 ‘여러 번 가운데 처음, 즉, 첫번째’의 뜻이 되고 합성어 속에서는 ‘첫번째’와 ‘처음 부분’의 두 뜻이 다 가능하다. 이 두 의미는 화자가 대상의 전체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르기 때문에 인지화용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두 뜻의 관계가 유연성이 크다는 말이다. 굳이 접두사를 설정하려면 관형사로 추적해 갈 수 없는 의미의 ‘첫’(예:첫여름[여름의 처음 부분. 초여름])을 대상으로 하여야 하는데 U 사전에서는 정작 이것은 무시하고 관형사로 추적해 갈 수 있는 ‘첫’(예:첫사랑[첫번째 사랑])만을 대상으로 잡아 풀이하고 용례를 들었다.(3)
본고에서는 두 뜻의 유연성을 인정하여 다음 (3)과 같이 ‘처음 부분(初)’이라는 뜻을 관형사 ‘첫’의 새 개별 의미로 등재하고, 접두사 항목은 설정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 때 ‘((합성명사의 앞성분으로 쓰여))’와 같은 조어론적 성격 명세가 필요할 것이다〔(1ㄴ)의 ‘본고의 처리안’에 ‘관형사※’라 한 것은 이러한 뜻이다〕.
(3) | 첫 [관형사] |
ⓛ‘여러 번 가운데 처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대학생이 되고 첫 방학을 맞아 … // 첫눈/ 첫닭 / 첫배 / 첫사랑. |
‘첫’의 경우와 달리 (1ㄷ-ㅁ)의 ‘개-’, ‘돌-’, ‘들-’은 각각 ‘개(犬)’, ‘돌(石)’, ‘들(野)’과의 유연성이 멀면서도 자체의 의미가 투명하다고 여겨진다. 더욱이 ‘돌’과 ‘들’은 원래의 장모음이 단모음화하는 형식의 변화도 겪었다. (ㅂ)의 ‘짝’은 ‘짝이 맞지 않는’의 뜻이니 ‘짝패’나 ‘짝힘(偶力)’에서와 같은 본래의 ‘짝’과는 거의 반대 의미를 가지고 있어 새 의미를 기존 명사 ‘짝’에 추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개’, ‘돌’, ‘짝’을 접두사로 판정한다. ‘들’의 경우, 파생어 예가 새국어생활 제8권 제1호(’98년 봄)둘뿐이기 때문에 과연 접두사로 인정될 수 있는지 문제가 된다. 접두사로 인정된다 하여도 몇 개 이상의 파생어를 가져야 표제어로 등재하느냐는 사전에 따라 다를 것이다. 가령 셋 이상의 파생어를 가진 접두사만을 사전 표제어로 선정한다면 ‘들’은 접두사로 표제화되지 못하게 된다.
(ㅅ-ㅈ)의 ‘날’, ‘갖’, ‘옹달’은 원 단어의 폐어화를 겪은 것들이다. 먼저 ‘갖’과 ‘옹달’은 복합어들로부터 분석되어 나올 뿐, 언중들에게는 의미가 이미 불투명해진, 비생산적인 요소라고 보아 공시적 사전의 등재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갖두루마기’ 등이나 ‘옹달샘’ 등 각각의 합성어 항목에서 어원이 풀이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4)
혹은 이들이 합성어의 중심 요소이면서도 독립해서 쓰이지 못하고 조사나 어미를 가지지도 못한다는 점에서 공시적으로 어근으로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 이들은 접두사가 아니다. 그러나 (ㅅ)의 ‘날’은 비유적 의미로 확장되기도 하면서 공시적으로 언중들에게 투명한 요소로 여겨지기도 하므로 생산성이 있는 접두사로 인정할 수 있다. ‘날로’는 ‘날’이 명사이던 시기에 만들어진 화석으로 보아 따로 부사로 등재하면 될 것이다.
이제 동사나 형용사에서 온 앞성분들을 위에서와 동일한 처리 방식으로 판정해 보기로 하자.
(4) | 판정 대상 | 뜻 | L사전 | G사전 | U사전 | 변화 | 본고의 처리안 |
ㄱ | 나-가다/오다/서다… | 밖으로 이동 | P | P | × | 원 단어 소극화 | × |
ㄴ | 거머(捲)-먹다/잡다/쥐다… | ‘감아’의 큰말 | × | × | P | 원 단어 폐어화 | ×/어근 |
ㄷ | 처-넣다/담다/바르다… | 마구 많이 | P | P | P | 의미 변화 | P |
ㄹ | 된-맛/서방/여울… | 어떤 정도가 아주 심한 | P | P | P | 의미 변화 | 형용사※ |
ㅁ | 희-멀겋다/멀끔하다… | 희- | × | × | × | 규칙의 상실 | × |
ㅂ | 해-맑다/말갛다/말쑥하다… | 희-’의 작은말‘ | × | P | × | 원 단어 폐어화, 규칙 상실 | ×/어근 |
ㅅ | 맞①-바꾸다/걸다/겨루다… 맞②-바둑/고소/담배… |
마주 | P | P | P | 규칙 상실, 의미 변화 | P |
ㅇ | 내-받다/쉬다/쏘다… | 밖으로 (세게) | P | P | P | 〃 | P |
ㅈ | 늦-가을/더위/부지런… | 늦은 | P | P | P | 규칙 상실 | 형용사※/P |
ㅊ | 거머(黑)-멀쑥/번드르… | 거멓고 | × | × | × | 규칙 상실 | 어근 |
ㅋ | 까막-관자/눈/딱따구리 | ‘가막(黑)’의 센말 | P | P | P | 규칙 상실 | 어근 |
(ㄱ)의 ‘나’는 ‘들어-가다/오다/서다…’의 ‘들어’와 대응되므로 기저에서는 어미 ‘-아’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사 ‘나다’의 용법이 소극화하기는 하였지만 아직 살아 있으므로(예:“집에 들고 날 때”) 이 ‘나’를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다.(5)
(ㄴ)의 ‘거머’는 앞에서 본 ‘갖’과 마찬가지로 원 단어가 폐어화한 것으로 의미도 불투명하므로(6) 공시적인 단위로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고, 합성어로부터 분석되기만 하는 어기라는 점을 중시하여 어근으로 처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접두사로 처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ㄷ)의 ‘처’(‘치-+-어’)는 의미 변화를 거쳐 원 단어와의 유연성이 대부분 상실되었고, 생산성과 의미의 투명성이 모두 인정되므로 접두사화한 것으로 본다(졸저 1996:95). (ㄹ)의 ‘된’은 의미 변화는 겪었지만 아직 ‘되다’와의 유연성이 분명히 의식되므로 형용사 ‘되다’의 한 개별 의미로 처리할 수 있다.(7)
(ㅁ-ㅈ)의 앞성분들은 용언 어간이 어미 없이 다른 어간이나 명사를 수식하던, 지금은 사라진 옛 규칙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 가운데 (ㅁ)의 ‘희멀겋다’ 등에서 변화한 것은 그 합성 규칙이 사라졌다는 것뿐이고 성분 형용사들 자체는 변한 것이 없다.(8) 이 ‘희-’가 기존의 어간 ‘희-’와 다른 어떤 자격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수 없으므로 이것을 어떤 형식으로든지 사전에서 따로 언급할 수는 없다(병렬된 뒷성분 ‘말갛-’도 마찬가지이다). (ㅂ)의 ‘해말갛다’ 등도 본래 ‘희멀겋다’와 똑 같은 구조이지만 여기에서는 원 단어가 폐어화하였다는 차이가 있다. ‘해말갛다’ 등 합성어 항목에서 어원 풀이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구태여 분석하여 표제화한다면 원 단어가 폐어화하였으므로 어근으로 처리하여야 할 것이다. (ㅅ)의 ‘맞’은 원 동사로부터의 의미 변화를 겪은 것으로서 전형적인 접두사 ‘헛’과 유사한 방식으로 새 단어를 만들며(졸고 1995), (ㅇ)의 ‘내’는 ‘이동’의 의미를 상실하고 ‘방향’의 의미만 유지할 뿐 아니라 접두사화에 흔히 수반되는 강세 의미를 가지기도 하였으므로 이 둘은 접두사로 보기로 한다.(9) (ㅈ)의 ‘늦’은 의미 변화를 겪지 않았지만 많은 단어형성 예를 가지며 나아가 동식물명, 농작물명 등의 새 말을 만드는 데도 쓰이므로(예:늦-반딧불, 늦-털매미
『동아 원색 세계 대백과사전』) 새로 어떤 조어론적 성격을 획득하였다고 판단되는데, 기존 형용사 ‘늦다’가 이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새로 접두사가 성립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조어론적 성격을 ‘늦다’의 것으로 볼 경우, 용언 어간이 명사를 수식하는 합성어 형성법은 공시적으로 일반적인 용언의 성격이 아니므로 이 성격을 기존 형용사 ‘늦다’의 한 개별 의미로 올려야 한다.
(ㅊ)의 ‘거머’와 (ㅋ)의 ‘까막’은 어근 형성 접미사 ‘-어’, ‘-악’에 의해 만들어진 어근인데, 그들을 생성한 형태 규칙은 사라졌어도 그들의 성격은 그대로 유지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 한자어 접두사의 판정
복합적인 한자어는 한자어에만 있는 조어 방식에 따라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고유어의 조어 방식에 따라 만들어지기도 한다. 또, 동일한 조어 방식이 양 언어에 다 존재하여 그 구별이 무의미할 때도 많다. 한자어에만 있는 조어 방식은 엄격히는 국어사전의 기술 대상이 아니지만, 본고에서는 그것도 실용성을 위해 국어사전에 기술될 필요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한자어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어근을 구별하게 된다. 하나는 ‘正’과 ‘確’처럼 국어 문법의 관점에서 파악된 국어 문법 밖의 요소이고(어근1),(10) 하나는 ‘正確’처럼 국어 문법의 지배를 받는 요소(어근2)이다.(11) 어근1은 옥편의 기술 대상이 되고 어근2는 국어 사전의 기술 대상이 될 것이다. 다시 ‘不正確’과 같은 단어에서는 어근2인 ‘正確’이 분석되어 나오므로 결과적으로 ‘不’이 분석되는데, 이 ‘不’의 자격을 국어 문법 안에서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가 바로 한자어 접두사 판정의 핵심 문제가 된다.
(5) | 판정 대상 | 뜻 | L사전 | G사전 | U사전 | 본고의 처리안 |
ㄱ | 無-價値/秩序/表情… | 없다 | P | P | P | 어근 |
ㄴ | 對-日本/이라크/戰車… | -에 대한 | P | 관형사 | P | 어근 |
ㄷ | 亞-大陸/熱帶/黃酸… | 다음가는 | P | P | P | 어근 |
ㄹ | 廢-乾電池/潤滑油/비닐… | 쓰고 버린 | × | × | × | 어근 |
ㅁ | 王-개미/방울/새우… | 아주 큰 | P | P | P | P |
(5ㄱ-ㄹ)의 앞성분들은 ‘어근1+어근1’의 구조에서 앞성분이 승격함으로써 국어 문법에 등장하게 되는 것들이다. (ㄹ)의 ‘廢’는 그러한 승격이 최근에 이루어진 것인데, ‘廢鑛’과 같은 ‘어근1+어근1’의 구조에서 추출되어 ‘廢乾電池’와 같은 ‘어근+단어’의 구조에 쓰이게 된 것이다. ‘廢’의 기능은 두 구조에서 동일하므로 새로운 용법의 ‘廢’도 역시 ‘어근’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국어 문법의 단위인 단어(때로는 어근2)와 결합할 수 있도록 승격된 어근을 어근3으로 구별하기로 하자.(12)
어근3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왼쪽 표제가 되어서 구조적으로 국어 문법에 포괄될 수 없는 것들로 (ㄱ)의 ‘無’, (ㄴ)의 ‘對’가 그 예이다. ‘無’는 ‘無心’에서와 똑같이 ‘無-價値’에서도 표제가 되어 전체 구성을 상태성 어근으로 만들고(김규철 1980:83, 조현숙 1989, 노명희 1997), ‘對’는 ‘對日’에서와 똑같이 ‘對-日本’에서도 표제가 되어 전체 구성을 관형사성 어근(관형사?)으로 만든다(졸고 1992, 노명희 1997). ‘親-韓國’, ‘汎-太平洋’, ‘反-政府’, ‘要-注意’ 등의 앞성분들도 마찬가지이다. 두 번째 종류의 어근3은 뒷성분을 표제로 하고 스스로는 수식 성분이 되어 국어 문법에도 포괄될 수 있는 것들로서, ‘亞聖’ 등에서 승격한 (ㄷ)의 ‘亞’와 같은 것들이다. ‘主-目的’, ‘副-會長’, ‘次-世代’, ‘輕-音樂’ 등의 앞성분들도 마찬가지이다.
두 종류의 어근3은 원래 국어 문법에서는 ‘어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중에서 두 번째 종류의 어근3은 국어에 동화되면서 접두사화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ㅁ)의 ‘王’은 ‘王竹, 王砂, 王山 …’으로부터 승격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지금은 유의어인 고유어 접두사 ‘말-’보다 더 큰 생산성으로 고유어들과 결합하므로 고유어 접두사와 다를 것이 없다. ‘親祖父, 親아버지’의 ‘親’이나 ‘洋菓子, 洋딸기’의 ‘洋’과 같은 것들도 접두사화 과정을 겪은 것으로 여겨진다.
4. 이형태 분석과 뜻풀이:‘새-/샛-/시-/싯-’의 경우
표제항으로서의 접두사는 접두파생어들로부터 분석되어 나오므로, 어떤 파생어들이 독자적인 단어로 인정되고 못 됨에 따라 그로부터의 접두사 분석이 달라질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곳에서 다루려고 하는 접두사 ‘새-/샛-/시-/싯-’과 그 파생어들이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말큰사전』으로 이 문제를 보기로 하자.(13)
(6) | ㄱ. | 새까맣다, 새노랗다, 새말갛다, 새빨갛다, 새뽀얗다, 새카맣다, 새파랗다, 새하얗다 |
ㄴ. | 샛까맣다, 샛노랗다, 샛말갛다, 샛빨갛다, (샛뽀얗다,) (샛카맣다,) 샛파랗다, 샛하얗다 | |
(7) |
새- [앞] ‘빛깔이 산뜻하게 짙음’을 나타냄. (ㅂ)~까맣다. ~하얗다. ~노랗다. ~빨갛다. ~파랗다. <참고>샛-. 시-. |
(6)에서 괄호 안의 예는 등재되어 있지 않은데, 단순한 누락으로 여겨진다. ‘시-’, ‘싯-’의 파생어들도 (6)과 평행하게 처리되어 있다. 이 사전에서는 (6)의 파생어들이 모두 독립된 단어들이고 (7)의 네 접두사가 모두 별개의 형태소인 것으로 처리한 것이다.
이와 달리 <한글 맞춤법>은 ‘ㅅ’ 탈락형과 유지형 가운데 하나씩만을 옳은 표기로 정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희승·안병희(1989:97)에서는 <한글 맞춤법> 제27항에 대한 해설에서 위 접두사들이 어기 모음의 양성, 음성에 따라 선택되는 것을 말하고서, 이어 ‘새-’와 ‘시-’는 된소리나 거센소리 앞에 쓰이고, ‘샛-’과 ‘싯-’은 ‘ㄴ’, ‘ㅎ’ 앞에 쓰인다고 설명하고 있다.(14) 그렇다면 이러한 규정의 옳고 그름을 떠나 ‘샛-’과 ‘새-’의 각 쌍들, ‘시-’와 ‘싯-’의 각쌍들에서 하나씩만이 표기형으로 인정되게 된다.
나아가서 ‘새-’와 ‘시-’의 관계, 그리고 ‘샛-’과 ‘싯-’의 관계도 달리 파악된다. ‘새-’는 양성모음을 가지는 어기의 앞에 붙고, ‘시-’는 음성모음을 가지는 어기의 앞에 붙으므로 서로 대립할 수 없는 자리에 나타난다. 따라서 ‘산뜻하게’와 ‘선뜻하게’의 의미는 이들의 것이 아니라 어기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15) 그렇다면 이들 네 접두사는 사실은 한 형태소의 네 이형태로 해석되므로 국어 사전에서의 풀이는 다음과 같아져야 한다.
(8) | 샛- | [접사] ((색을 나타내는 형용사 앞에 붙어)) ‘매우’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ㄴ’이나 ‘ㅁ’으로 시작하며 모음 ‘ㅏ’나 ‘ㅗ’를 가지는 어간에 붙는다. ¶~노랗다. ~말갛다. <이형태>새-. 시-. 싯-. |
새- [접사] ((색을 나타내는 형용사 앞에 붙어)) ‘매우’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 |
(8)과 같은 풀이로써 ‘샛-/새-/싯-/시-’의 관계가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나아가 이들의 파생어들도 한결같이 간단하게 풀이될 수 있다. 다음 (9)의 풀이는 역시
『우리말큰사전』에서 관련된 부분만 가져온 것인데, 이것을 (10)처럼 개선할 수 있는 것이다.
(9) | 새-까맣다:아주 까맣다. | → (10) | 매우 까맣다. |
새-노랗다:아주 노랗다. | → | (등재하지 않음) | |
새-빨갛다:아주 짙게 빨갛다. | → | 매우 빨갛다. | |
새-뽀얗다:아주 산뜻하게 뽀얗다. | → | 매우 뽀얗다. | |
새-하얗다:산뜻하게 하얗다. | → | 매우 하얗다. | |
시-꺼멓다:아주 꺼멓다. | → | 매우 꺼멓다. | |
샛-까맣다:매우 새까맣다 | → | (등재하지 않음) | |
샛-노랗다:매우 새노랗다 | → | 매우 노랗다. |
(7)에서는 ‘새-’가 ‘빛깔이 산뜻하게 짙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풀이되었으나 (9)에서는 이 ‘새-’가 어기에 대해 ‘아주’, ‘아주 짙게’, ‘아주 산뜻하게’, ‘산뜻하게’로 제각각 다른 의미를 더해 주는 것으로 풀이되었다. 문제는 접두사 항목에서 제시된 접두사의 의미와 파생어들에서 추출된 접두사의 의미가 다르며 각각의 파생어들의 의미도 일관성이 없이 풀이되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9)의 파생어 뜻풀이가 과연 바른 것이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새하얗다’는 ‘산뜻하게 하얗다’로 풀이되어 있는데, ‘산뜻하게’는 이미 ‘하얗다’가 지니고 있는 의미일 것이기 때문이다.(16)
5. 마무리
이 글에서는 접두사의 사전적 처리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접두사 판정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접두사는 복합어의 앞성분으로서의 단어나 어근과 어떤 분명한 징표로써 구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접두사를 구별해 내기 위해서는 조화되고 통일된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 기준은 어떤 의존적인 형식은 기존 단어의 한 개별 의미로 처리될 수도 없고 어근으로 처리될 수도 없을 때 접두사로 판정될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 새 의미는 원 의미와의 유연성이 작고, 생산성 혹은 의미론적 투명성을 가지고 있어서 독자적인 단위로 인식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고는 기존 국어 사전에서 접두사로 처리한 항목들을 중심으로 유형별로 대표적인 경우들을 골라서 이 기준으로 접두사 판정을 새로이 시도해 본 작업이다.
본고에서는 고유어와 한자어에서 똑같이 ‘어근’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제안하였다. 국어 사전 편찬에서 어근의 개념은 점점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것이 추세라고 여겨지는데 이에 대한 깊은 연구가 요망된다 하겠다.
끝으로 ‘새-/샛-/시-/싯’의 예로써 접두사 분석에서 이형태 관계의 정확한 인식에 따라 파생어 표제어를 선정하고 접두사와 그 파생어들의 뜻풀이를 조정하는 문제도 논의해 보았다.
접두사 판정의 문제와 더불어 접두사의 사전적 처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확한 뜻풀이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파생접사나 파생어를 다룬 기왕의 논문들에서 많이 언급되었으므로 본고에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의 접두사에서 개별 의미들을 합리적으로 설정하고 정의하는 문제, 정확하고 적절한 용례(파생어)를 충분하게 드는 문제의 중요성은 특별히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기존 사전들에서는 정의만 주어지고 용례가 들어지지 않은 개별 의미들도 볼 수 있는데, 접사 항목에서의 용례는 정의보다 중요성이 덜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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