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외래어 표기법】

외래어 표기의 역사

任洪彬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목 적

  이 글은 우리의 외래어1) 표기가 역사적으로 어떠한 모습을 보여 왔는가를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에는 우리 민족이 외래어를 표기하여 온 전 역사가 포함된다. 시간적으로는 우리 민족이 문자 생활을 영위해 온 전 역사가 포괄되며, 공간적으로는 우리 민족이 역사 이래 접촉을 가진 주변의 모든 언어가 포함된다. 그러나 여기서 이 전부를 포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면도 제한되고 필자의 능력도 제약된다. 이 글은 단지 현재 우리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역사적 배경으로서 과거의 외래어 표기는 어떠한 것이었던가를 극히 부분적으로 소개하고, 1933년 혹은 1940년 표기의 원칙이나 표기법이 마련된 이후 현재에 이르는 동안 외래어 표기법이 어떻게 변모해 왔는가를 개략적으로 살피려고 한다.
  외래어 표기의 역사는 표기 수단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 가. 훈민정음 창제 이전
ㄱ. 서기체 표기에서의 외래어
ㄴ. 이두, 구결 표기에서의 외래어
ㄷ. 항찰 표기에서의 외래어
ㄹ. 한문 문맥에서의 외래어
나. 훈민정음 창제 이후~외래어 표기법 제정 이전
ㄱ.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
ㄴ. 외래어의 한자 표기
ㄷ. 서구 외래어에 대한 한자 표기의 몰락
다. 외래어 표기법 제정 이후
ㄱ. 1933년 “한글 마춤법 통일안”의 외래어 표기 규정
ㄴ. 1940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 및 이후의 개정 및 보완
  
  (1)은 외래어 표기의 역사를 조감하는 대체적인 윤곽일 뿐이다. 본 논의의 목적이 시대 구분에 따라 외래어 표기의 역사를 정밀하게 추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기술의 순서가 (1)과 정확하게 대응되는 것은 아니다. (1가)와 (1나)는 훈민정음 창제를 기준으로 한다. 훈민정음 창제는 국어 문맥의 문자적 표현이라는 점에서도 큰 획을 긋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전의 표기는 한자를 이용한 표기이거나 한문 표기였으며, 외래어는 언제나 한자로 적히는 것이었다. 훈민정음 창제는 외래어가 한글로도 적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는 의의를 가지는 것이기도 하다. (1)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해당 부분에서 논의하기로 한다.
  우선 개념적인 문제부터 다루기로 한다.
  

2. 동화와 문맥

  외래어의 개념 중 핵심이 되는 것은 동화이며, 그것은 국어 문맥을 전제로 한다. 우선 외래어 개념의 핵심을 이루는 사항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보기로 한다.
  
(2) 가. 외래어는 다른 언어에서 온 것이다.
나. 외래어는 우리말에 동화된 것이다.
다. 외래어는 단어이다.

  (2가)는 자명하여 더 이상의 언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문제는 도입의 구체적인 양상이다. 어떤 말이 고유어인지 외래어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이른 시기의 언어에 이를수록 이 문제는 더욱 어려워진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몇 가지 예를 보기로 한다.
  (2나)에 대해서 종래에는 한 가지 관점만을 고집해 온 것으로 여겨진다. 외래어는 외국어 단어와 다른 것이며, 외래어는 우리말에 들어와 우리말에 동화된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외래어 도입을 위한 입장이거나 외래어 표기를 위한 입장은 그보다는 더 너그러운 것일 수 있다(졸고(1996) 참조). 외국 원수의 이름이나 새로 생긴 국가의 이름은 당장 표기를 필요로 하는 대상인데, 우리의 음운 구조에 동화되기만을 바란다는 것은 현실을 떠난 이상론이다. 물론 어느 한정된 시기에 어느 한정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쓰이는 외국어 단어는 정착된 외래어로서의 자격을 가질 수 없다. 다만 문제의 대상의 중요성이나 예상되는 동화를 적용하여 받아들이는 경우 동화의 조건은 이론적으로 충족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동화의 정도 문제에 대해서는 졸고(1996)의 기준을 다시 가져오기로 한다.
  
(3) 외래어와 동화의 정도
외래어는 동화의 정도에서 차등을 보인다. 국어 문맥에서 외국어 단어를 우리가 말하거나 우리 글로 적는 것으로 이미 동화의 단계는 시작된다.
  
  본고와 관련되는 것은 오히려 (3)에서 후반부이다. 외국어 단어를 국어 문맥에서 우리가 말하거나 우리 글로 적으면 어떠한 측면에서든 우리말의 특성이 반영될 수 있다는 것은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사실이다. 이를 문맥 조건을 강화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로 한다.
  
(4) 국어 문맥과 외래어
외래어는 국어 문맥에 쓰인 외국어 단어이다. 따라서 과거의 문헌에서 외래어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단어가 국어 문맥에 쓰여 정상적인 의미 단위로 기능하는 것인가 어떤가를 보아야 한다.
  
  가령 영어 단어 boy를 ‘보이’로 적는다고 해 보자. 이 때 ‘보이’가 [boj]를 적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보이’는 기껏 [poj]를 나타낼 수 있다. ‘보이’라는 표기는 우리 발음 습관을 반영한다. 한국인이 boy를 발음하는 것도 거의 이와 같다. (3)은 유효하다. 또 가령 “저기 보이프렌드가 간다”라고 해 보자. 이 문장은 정상적인 국어 문장이다. 국어 문맥이다. “보이프렌드”는 외국어에서 온 단어이면서 국어 문맥에서 정상적인 의미 단위로 기능한다. (3)에 의하여 그것은 외래어의 자격을 가진다. (4)는 역사적 문헌에서의 검증에 유효하다. (4)에서 말하는 “정상적인 의미 단위”에서 인용 문맥에 쓰인 것과 같은 고립된 요소는 제외된다.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기로 하자. 가령 ‘한글 자모’를 국제 음성 기호와 같이 사용하여 boy를 ‘이^’로 적는다고 하여 보자. 이에는 동화의 아무런 흔적도 없다 ‘이^’는 정확하게 한글 표기라고도 할 수 없다. 현행 한글 자모에 ‘’나 ‘이^’와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는 가상적인 예를 보인 것이지만, 전통적인 외국어 표기 예들을 외래어에서 제외하는 효과를 가진다. 노걸대언해나 박통사언해 등에 적힌 중국어, 첩해신어에 적힌 일본어, 청어노걸대나 몽어노걸대 등에 적힌 만주어나 몽고어는 외국어 한글 전사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외래어를 적은 것이 아니다.2) 그것은 국어 문맥에 쓰인 것으로도 볼 수 없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기로 한다.
  
(5) 한글 전사 자료와 외국어 단어
전통적인 외국어 전사 자료에 나타나는 외국어 단어는 국어 문맥에 쓰인 것이 아니므로, 비록 한글로 표기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외래어가 아니다.
  
  이제 (2다)를 보기로 한다. (2다)도 “외래어”의 원리적인 성격의 하나이다. “외래어”의 “어”가 본래 단어를 뜻하므로, 이 조건은 일반적으로 특별한 문제를 가지지 않는다.3) 그러나 어느 경우에나 모든 것이 선명한 것은 아니다. 가령 “스마트하다”를 보기로 하자. 이는 외래어인가? 어근적 요소로서의 “스마트”는 외래적 요소일지 몰라도, “스마트하다” 전체가 외래적 요소는 아니다. 아직 “스마트”를 독립적인 단위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고 해 보자.4) 이 경우, “스마트하다”가 아닌, “스마트”를 외래어라고 할 수 있는가? (2다)를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렇다면 (2다)는 다소 넓게 어휘적 요소의 차용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문법 요소에 대한 차용은 특별히 “문법적 차용”이라는 술어가 쓰이므로, (2다)를 어휘적 차용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로 한다.
  
(6) 어휘적 요소와 외래어
차용은 크게 어휘적 차용과 문법적 차용으로 나뉜다. 차용원 언어에서의 단어적 성격이 차용주 언어에서도 반드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2다)의 ‘단어적 조건’이 엄격하게 지켜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다)는 어휘적 차용을 말하는 것으로, 그 단위는 편의상 다소 확대될 수 있다.
  
  (6)에 의하면, “스마트하다” 전체를 “외래어”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하나, 그것은 편의상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자어의 경우도 이에 준한다. 가령, “결(決)코”는 외래어인가? (6)에 의하면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를 아주 단순화하여 부르는 것일 뿐이다.
  

3. 이른 시기의 가설적 외래어

  지리적인 조건으로 우리가 일찍부터 중국어에 접하게 되고, 문화적으로 선진이었던 중국이 문자와 더불어 문자 생활의 도구인 ‘붓’과 ‘먹’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는 것은 꽤 수긍이 간다. “붓”이나 “먹”이 바로 그 도구와 함께 우리말에 들어온 외래어라는 주장도 상당히 개연성이 있다.5) ‘붓’의 중세어형이 “붇”이므로 “필(筆)”이 입성 t를 가졌던 시기의 상태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먹’에 이르면 ‘묵(墨)’과의 음상 차이가 거의 없어진다. 그러나 정말로 “붓”이 중국어에서 우리말에 들어온 외래어인가? 이는 무엇으로 입증되는 것인가? 왜 우리는 이러한 가설을 그럴듯한 것으로 받아들이는가? “붓”과 “먹”을 중심으로 이 예에 대하여 우리가 보내는 신빙성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보기로 하자.
  
(7) 가. 우리는 중국어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있을 만큼 중국에 가깝다.
나. 중국은 문화적으로 선진이었고, 붓이나 먹은 그 문화의 상징과 같은 것이다.
다. “붓”은 “필(筆)”의 고대 중국음과, “먹”은 또 그 “묵(墨)”과 음상이 비슷하다.
라. 우리의 “붓”과 “필(筆)” 및 “먹”과 “묵(墨)”은 그 지시 대상이 같다.
마. “붓”과 “먹”은 동일 상황에 등장하는 관련어이다.
바. “붓”은 중세어 “붇”으로 소급하며, “먹”은 중세어 “먹”으로 소급한다.

  (7가)는 지리역사적 조건을 말한 것이며, (7나)는 문화적 조건을 말한 것이고, (7다)는 음상적 조건을 말한 것이며, (7라)는 의미적 조건을 말한 것이고, (7마)는 관련어 조건을 말한 것이며, (7바)는 통시적 조건을 말한 것이다.
  중국과 우리는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었으므로, (7가)는 큰 무리가 없다. 민족 이동의 경로에 다소 문제가 있을 수는 있다. (7나, 다, 라)도 그럴 듯하다. (7마)는 “붓”과 “먹”은 글을 쓰는 같은 상황에서 관련되는 대상임을 말한 것이다. 동일 상황에 나타나는, “먹”이 “묵(墨)”과 관련되므로, “붓”도 “필(筆)”과 관련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6) 상황 관련어 조건을 더 확대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7) 즉, 만약 “먹”에 더하여 동일 상황 관련어인 “죠>종이”가 중국어 “지(紙)”와 관련되는 것이라면, “붓<필(筆)” 관련성은 더 확고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지(紙)”와 “죠>종이”는 지시 대상이 같다. 음상은 비슷하지만 ‘’ 부분에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이것으로는 “붓<필(筆)”을 뒷받침하기 어렵다. “벼로>벼루”는 어떤가? “연(硯)”과의 관련은 눈에 띠지 않는다. 이 또한 “붓<필(筆)”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는 그 신빙성을 약화시키는 정도에 그칠 뿐, 관련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한다. 상황 관련어 전체가 단번에 들어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기문(1980가)에 지적된 ‘글[文]<계(契)’는 ‘붓’의 관련어 조건을 강화시킨다.
  (7)에서 문제된 조건을 다시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일반적인 성격을 부여하도록 하자. 이기문(1986)에서는 음운, 형태, 의미, 어휘적 조건에 주목하고 있다. 이를 포괄하여 더 확대하기로 한다.
  
(8) 가. 지리역사적 조건
나. 문화적 조건
다. 음상적 조건
라. 의미적 조건
마. 관련어 조건
바. 통시적 조건
  
  (8)의 여러 가지 조건이 동시적으로 적용되는 예에 이를수록 그 신빙성은 차츰 높아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8가)만이 성립하는 예보다는 (8가)와 함께 (8나)도 성립하는 예의 신빙성이 더 높은 것이며, 그보다는 (8가, 나, 다)가 함께 성립하는 것이 더 믿을 만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붓<필(筆)”에 적용할 때, (7)에서 드러나는 것은 이 예가 (8가-바)의 조건 전체에 걸쳐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완진(1970)에 제시된 예 중 몇 예만 보기로 한다.
  
(9) 가. 스-[글을 스다] < 서(書)
나. 수[酒] < 수(水)
다. [鷄] < 조(鳥)
라. < 마(馬)
마. 뎔[佛寺] < 저(邸)
바. 적/제 < 시(時)

  (9)는 이른 시기 중국어와의 접촉에서 우리말에 들어온 예로 지적된 것이다. 중국어와의 접촉은 (8가)의 조건을 만족시킨다. (9)는 음상이나 의미에서 유사성을 보이는 예들을 모은 것이므로, (8다, 라)의 음상적 조건이나 의미적 조건도 어느 정도 충족시킨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다. 관련 조건 중 일부 사항을 부분적으로 지적하기로 한다.
  (9가)의 “스-”는 (8나)의 문화적 조건도 충족시킨다. 글쓰기 문화의 도입이다. ‘붓’이나 ‘먹’과 ‘쓰는 것’은 같은 상황에서 문제되는 관련어이므로, (8마)의 관련어 조건도 충족시킨다. 다만, 중세어에는 ‘스-’ 외에도 ‘-’가 있었는데 그 음상적 특이성이 설명되지 않은 채 남는다. (8바)의 ‘통시적 조건’에 다소 미흡하다. (9나)의 ‘술’과 ‘물’은 그 의미가 먼 것이 흠이고, 문화적 조건을 적용하기도 마땅치 않다. 중국어의 ‘주(酒)’가 아니라 ‘물’을 빌어 ‘술’을 표현했다는 가정에 무리가 있다. (9다)도 의미가 다소 멀고, “새”를 그대로 남겨 두는 난점이 있다. 김완진(1970)에서 (9라)의 ‘’은 버마어의 mrang을 기원으로 하는 것으로 본다. 몽고어나 만주어의 morin도 이에서 왔다고 한다. 중국어의 ‘마(馬)’가 끼어드는 것은 그 과정에서이다. 그 과정이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그럴 듯하기는 하다. 그러나, 어형상으로는 ‘마(馬)’가 끼어들 틈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9마)는 ‘뎔[寺]’이 일반적으로 좋은 집이므로, ‘저(邸)’와의 관련도 가정해 볼 수 있다. 다만 의미가 먼 것이 흠이다. 최남선(1946)에서는 ‘찰(刹)’에 주목하고 있다. (9바)의 ‘적/제’에 대해서 최남선(1946)에 제시된 것도 ‘시(時)’이다. 참고로 김완진(1970)의 예 몇 개를 더 들기로 한다.
  
(10) 가. 되-[되로 되다] < 두(斗)
나. 뵈(중세어)/베 < 포(布)
다. 부텨[佛](중세어)/부처 < 불타(佛陀)
라. 작[자갈] < 석(石)
마. 석[짚세기] <사(屣)
  
  최남선(1946)에는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외래어가 제시되어 있다. 그 중 가설적인 것으로 보이는 몇 예를 보기로 한다.
  
(11) 가. 선비어:可汗[군주], 阿粲[아전], 比疎[빗], 木骨閭[뭉우리]8)
나. 몽고어:군[人], [馬], 마라기[冠], 더그레[袍子]
다. 달탄어:적[時], 맘모스[毛象]
라. 사모예드어:텁[爪], 바이[巖], 거플[皮殼]
마. 돌궐어:닥[山],9)부란[風], 駝酪[건우유]
바. 회흘어(回紇語)10):글[文字], 갓[傍, 側], 틀[法度]
사. 마갸르 어11):밸[腸], 버래[蟲], 녀름[夏], 아드[子息]
아. 몬·크메르 어:살라[사랑], 한[一], 닐흣[七], 아우[弟]
자. 지나어:천량[錢糧], 피리[篳篥], 여호[野狐], 사지[茶匙]
차. 잠어12):[米, 原 바술], 모시[苧, 原 머숨], 보름[望], 내[河]
카. 말라카 어13):베[布]
타. 인도어:살[米], 고자[宦者], 카키[泥土色], 걸로[便屋]
파. 범어:佛陀(부텨), 羅漢, 刹[절], 유리(琉璃)
하. 애급어:[國土], 헤[白色], 버틔[麥],14) 얼[大人]

  최남선(1946)은 도합 50개 언어에서 170개 정도의 외래어를 소개하고 있다. (11)은 비교적 고대의 외래어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14개 언어의 예를 보인 것이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목록뿐이기 때문에, 최남선(1946)이 어떠한 근거에서 이들을 외래어로 판정하고 그 차용원으로 “선비어, 달탄어, 사모예드어” 등과 같은 언어를 제시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국어 외래어에 관한 논의에서 “선비어”나 “달탄어”와 같은 언어 이름이 언급된 것은 아주 희귀한 일에 속한다. (11가)의 “阿粲”을 “아전”이라 본 것, (11나)의 “군”을 “사람”의 몽고어 단어로 본 것은 기억할 만하다.15) 최남선(1946)은 이 많은 자료들을 어디서 찾은 것일까? 알 수 없다.16) 우리로서는 막연한 추측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11)에는 남방계 언어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11가-바)는 북방계 언어들이라고 할 수 있으나, (11사, 아, 차, 카, 타)의 “마갸르어, 몬·크메르어, 잠어, 말라카어, 인도어” 등은 남방계 언어이다. (11하)의 “애급어”와 같이 멀리 떨어진 언어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하기 위해서는, (8가)는 적용될 수 없으므로, 그 외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왕래가 잦았다거나 문화적인 영향력이 컸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11하)의 “”나 “얼17) [大人]”와 같이 거의 기초어에 속하는 단어가 애급과 같이 먼 나라에서 우리말에 차용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11)의 예 중에서는 (11차)의 “, 모시” 및 혹 (11마)의 “부란”이나 (11사)의 “아드” 등 몇 가지 예를 제외하고는 원어와 그 의미가 제시되어 있지 않아 대응 관계를 점검해 보기 어렵다. (11)은 전체적으로 (8나, 다)의 음성적 조건이나 의미적 조건에 지나치게 이끌린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인적 교류나 문화적 접촉을 통한 언어 접촉의 구체적인 양상이 뒷받침되어야 영향 관계는 믿음직한 것이 된다. (11아)의 “한[一], 닐흣[七]”은 극히 부분적으로 관련어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지리적 조건이 맞지 않고 문화적인 관련도 짓기 어렵다. 관련어 조건이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작은 문제로는 “[米]”이 (11차)와 (11타)에 같이 나타나는 것, (11자)의 “여호[野狐]”는 중세어형이 “여”였다는 사실이 고려되지 않은 것이다. (8바)의 “통시적 조건”을 어긴다. (11카)에는 “베”가 말라카어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으나, (10나)에서 이는 중국어 “포(布)”에서 온 것이었다. 실제로 “안동에서 나는 베”를 “안동포(安東布)”라고 한다. 기원어는 말라카어였고, 중국어는 단지 매개 언어였던 것일까?
  남풍현(1985)에는 다음과 같은 예도 나타난다.
  
(12) 가. 살 < 시(矢)
나. 솔 < 쇄(刷)
다. 무늬 < 문(紋)
라. < 대(帶)
마. 배-[亡] < 패(敗)18)
  
  (12가-라)의 “살, 솔, 무늬, ” 등은 물건과 함께 들어온 말일 가능성이 높다. “솔”은 의미상 “붓”의 관련어가 된다. “무늬, ”는 음상에 다소 차이가 난다. (12마)의 “배-”는 한자 어근에 “--”를 붙여 용언을 만드는 규칙이 형성되기 이전에 차용된 것이란 해석이 주어지기도 했으나, 그러한 규칙이 반드시 고대 국어 시기 또는 그 이전에 있었던 것이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며, 또 그것이 “--” 결합법과 시간적인 거리를 두고 따로 있었던 것인가에 대해서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위와 같은 가설적 외래어는 우리 민족의 이동의 경로 및 고대의 언어 접촉이나 문화적 접촉의 매우 오래된 역사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고, 다만 전래 가능성을 가설적으로만 상정해 볼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들의 표기가 당시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한 가지 결함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 표기 수단을 제공받는 것이며, 극히 일부만이 그 전에 한자로 표기되는 행운을 얻었을 뿐이다. 한자로 표기되는 것은 “부텨”나 “붇”과 같은 극히 일부의 예이다.
  

4. 한자 표기와 국어 문맥

  한자, 한문이 언제 이 땅에 전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한사군의 설치가 기원전 1세기 경(B.C. 108-107)이므로,19) 이 시기를 하나의 기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자, 한문이 정착되는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립되는 삼국 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일 것이다. 고구려에서 ‘유기(留記)’를 편찬하고(영양왕 11년), ‘태학’을 세운 것(A.D. 372)은 표기 수단의 정착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20) 이 과정에서 생겨난 표기 방식의 하나가 서기체 표기이다.
  
(13) 가. 壬申年六月十六日二人倂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21)行誓之 又別先辛未年七月卄二日大誓 詩尙書禮傳 倫得誓三年
나. 임신년(壬申年) 유월(六月) 십육일(十六日), 이인(二人) 병(倂) 서기(誓記). 천전(天前) 서(誓). 금자(今自) 삼년(三年) 이후(以後) 충도(忠道) 집지(執持) 과실(過失) 무(无) 서(誓). [···]
다. 임신년 유월 십육일, 두 사람이 나란히 맹서하여 적는다. 하늘 앞에 맹서한다. 이제부터 삼 년 이후 충성의 도를 견고히 가지고 과실이 없기를 맹서한다. 만약 이 일을 잃으면 하늘에 큰 죄를 얻을 것을 맹서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우면, 가히 모름지기 행할 것을 맹서한다. 또 따로 앞서 신미년 칠월 이십이 일 크게 맹서하였다. 시경, 서경, 예기, 좌전을 차례로 배울22) 것을 맹서하기를 삼 년으로 하였다.
  
  (13가)는 원문을 약간의 띄어쓰기를 도입하여 그대로 보인 것이며, (13나)는 (13가)의 앞부분만 한자에 음을 달아 보인 것이며, (13다)는 그 뜻을 풀이한 것이다. 외래어의 도입 및 표기라는 관점에서 이 맹서문은 우리말이 당시 중국의 문자와 언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받고 있는가를 보여 준다. 한번 보아서도 (13가)의 “임신년(壬申年), 신미년(辛未年)”이라는 간지법 세차(歲次) 이름, “유월(六月), 칠월(七月)”이라는 달의 이름, “십육일(十六日)”이라는 날짜의 이름23) 및 “시(詩), 상서(尙書), 예(禮), 전(傳)” 등과 같은 중국 고전의 이름이 눈에 띤다. “죄”나 “과실(過失), 불안(不安), 난세(亂世)”도 외래어일 가능성이 많고, “충도”를 “충성스러운 도”라고 해석해도 “충성”과 “도”가 외래어이며, 그냥 “충도”라고 해도 외래어이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문화적 개념어에 속한다. (13)은 이러한 중국 문화적 개념어가 광범하게 우리말 어휘 체계에 들어와 중요한 일부를 형성하게 되었음을 보인다.
  여기서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은 (13가)에서 해의 이름, 달의 이름 및 “죄”나 “과실” 등등과 같은 말들이 과연 외래어인가 하는 점이다. 이들을 외래어라고 하기 위해서는 (13가)의 문맥이 국어 문맥이어야 한다. 우선 (13가)를 (13나)와 같이 읽었다고 해 보자. 그것은 국어 문맥인가? (13다)와 달리 (13나)가 국어 문맥이라는 데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13나)에서 우리말적인 특징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기로 하자.
  
(14) 가. (13나)는 우리말 어순을 반영한다.
나. (13나)의 한자는 당시 우리의 한자음으로 읽혔을 것이다.
다. (13나)를 듣고 중국인이 무슨 뜻인지 알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라. 충분한 상황 문맥이 주어졌을 경우, 한국인이 (13나)를 듣고 그 뜻을 아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14가-라)는 대체로 인정될 수 있다. 따라서 (13가)가 (13나)와 같이 읽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완전한 중국어 문맥, 즉 외국어 문맥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유사 국어 문맥”으로 부르기로 한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13가)에서 해의 이름 등은 유사 국어 문맥에 쓰인 것이 된다. 유사 국어 문맥에 외국어 기원의 단어가 쓰인 것이므로 이들은 외래어로서의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문맥의 문제와 관련하여 몇 가지 예를 보기로 한다.
  
(15) 가. 辛亥年 二月卄六日 南山新城作節(디) 如法以(로)作 [···] (南山新城碑 A.D. 591)
나. 신해년 2월 26일 남산 신성을 지을 적에 법대로 지으니 [···]
  
  (15가)는 경주 남산 신성비 비문의 일부이다. “南山新城作”은 동사가 뒤에 있어 서기체 표기와 유사하나, “如法”은 서기체 표기와 다르다. 우리 어순이 아니라 중국어 어순이다. 그러나 (15가)의 “節(디)”와 “以(로)”는 국어 문맥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15가)가 (15나)와 유사하게 읽혔다면, 그것은 국어 문맥이다. 이 문맥에 나타나는 “남산, 법” 등은 외래어일 가능성이 많다.24) “남산”은 아마도 간접 차용된 것일 것이다(남풍현(1968가) 참조).
  
(16) 가. 心未筆留 慕呂白乎隱佛體前衣(향가 보현십원가 중 예경제불가)
나.  부드로 그리 부텨 알(김완진(1980) 해독)
  
  (16가)는 향찰 표기의 예를 보인 것이다. 이는 국어 문맥의 표기로 성격 지어진다. 따라서, 향가에 등장하는 한자어는 외래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어떤 것이 한자어이고 어떤 것이 아닌가를 구별하는 것이다. (16가)의 “필(筆)”은 “붇”으로 읽는 것이 우세한 것이지만(김완진(1980:245-7) 참조), “心未(-)”의 경우와 달리 절대적으로 “붇”으로 읽어야 할 단서가 문맥에는 주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이를 “필”로 읽는다면, 그것은 당시의 외래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되고, 그렇지 않고 일반적인 해독과 같이 “붇”으로 읽었다면, 이는 고대 중국어 차용어(위의 (7)을 참조하기 바란다)가 당시의 한자로 적힌 특이한 예가 된다. 표기 관련으로 보아 이와 미묘한 차이를 가지는 것이 (16가)의 문맥에 쓰인 “佛體”이다. 김완진(1970)에 의하면(위의 (10다) 참조), “부텨”는 “佛陀”에서 온 것이다. 이 “부텨”가 한자로 적히면서는 “불타(佛陀)”로 적히지 않고 “부텨[佛體]”로 적힌 것이다. “붇”이 본래의 한자로 적힌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17) 가. 天禧二年 歲次 壬戌 五月 初七日 身病以(으로) 遷世爲去在乙(거견을)25)(정두사 오층 석탑 조성 형지기 1031년)
나. 천희(天禧) 2년 세차 임술 5월 초7일(?) 신병으로/몸의 병으로 세상을 버리거늘(마에마[前間](1926/1974:370), 고노[河野六郞](1957), 이승재(1992) 참조)
(18) 가. 菩薩是(이) 衆生乙(을) 化乎尸(올) 若此多爲多爲示下(구역인왕경 상 14: 13-14)
나.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심이 이 같다 하시어(남풍현·심재기(1976:44) 참조)
(19) 가. 於諸菩薩叱己誓願伊深重爲時尼(지장보살본원경 하 5b)
나. 諸菩薩(제보살)ㅅ게 誓願(서원)이 深重(심중)시니(월인석보 21: 148b)26)
  
  (17)-(19)는 이두 및 구결의 예를 보인 것이다. 이들이 모두 국어 문맥을 이룬다는 데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이다. (17가)에서는 “천희(天禧), 세차(歲次), 임술(壬戌), 오월(五月)” 등이 외래어의 자격을 가진다. “초칠일”은 “초이레”와 같이 읽혔을 수도 있다. 그 경우에도 “초(初)”는 외래어이다. “초”는 어휘적 요소이나 (6)에 의하여 외래어적인 자격을 가지는 것으로 본다. (18가)에서는 “보살(菩薩), 중생(衆生), 화(化)”가 외래어의 자격을 가진 것이며, (19)에서는 “제(諸), 보살(菩薩), 서원(誓願), 심중(深重)”이 외래어의 자격을 가진다.27)
  (18가)는 원문에 표시된 뜻읽기 방식에 따라 원문과는 달리 배열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18가)의 원문도 국어 문맥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국어화의 어떠한 흔적도 가지지 않은, 완전한 한문 원문이 우리말 해독과는 따로 떨어져 별개로 존재하는 경우, 그것은 어떠한 종류의 국어 문맥도 될 수 없다. 그러나 한문 원문에 일단 우리말 해독이 가해지는 경우 그 성격은 달라진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해 보기로 한다.
  
(20) 한문의 해독과 국어 문맥
한문 원문에 일단 우리말 해독이 가해지는 경우 그것은 유사 국어 문맥의 성격을 띤다.
  
  이제 다음 예를 보기로 하자.
  
(21) 가. 雖犯七出 有三不去 而出之者 減二等 追還完娶(대명률직해 권 6: 戶律 婚姻)
나. 必于(비록) 七出乙(을) 犯爲去內(거나) 三不去有去乙(잇거늘) 黜送爲在乙良(건을랑) 減二等遣(고) 婦女還本夫齊(제)
다. 비록 칠출(七出)을 범하거나 삼불출(三不出)이거늘 내치건을랑 감이등(減二等)하고 부녀를 본 지아비한테 돌려보낸다.
(22) 가. 曾子曰 君子以文會友 以友輔仁(논어 안연 24)
나. 曾子ㅣ曰 君子以文會友고 以友輔仁이니라(논어 안연 24)
다. 曾子ㅣ아샤君子文으로 友를 會고 友로仁을 輔니라
(23) 가. 東行萬里堪乘興 須向山陰上小舟(두시언해 7:2)
나. 東녀그로 萬里예 녀가 興을 탐직니 모로매 山陰을 向야 져근예 올오리라
    
 
  (21가)는 한문 원문이며, (21나)는 한문 원문에 대한 이두문이며, (21다)는 (21나)를 알기 쉽게 바꾼 것이다. (21다)는 국어 문맥이며, (21나)는 유사 국어 문맥이다. “칠출(七出), 삼불출(三不出), 부녀(婦女)” 등은 외래어의 자격을 가진다.28) (22가)는 논어 원문이며, (22나)는 해당 부분에 대한 구결문이고, (22다)는 그 언해문이다. (22다)가 국어 문맥이라면, (22나)는 유사 국어 문맥이다. “증자(曾子), 군자(君子), 문(文), 우(友), 인(仁), 보(輔)-” 등이 외래어의 성격을 띤다. 마찬가지로 (23가)는 두시 원문이며, (23나)는 언해문이다. (23나)에서는 “동(東), 만리(萬里), 흥(興), 산음(山陰), 향(向)-” 등이 외래어가 된다.
  (21가), (22가), (23가) 등에 대하여 (20)이 의미하는 것은 이들이, 한문 원문으로 있으면서 한국어에 대한 접근성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 그것은 국어 문맥이나 유사 국어 문맥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것이다.29) 그러나 우리 한자음으로 읽히고 그 의미가 우리말로 해석되는 경우, 그것은 비록 아주 낮은 정도지만 유사 국어 문맥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23가)의 “소주(小舟)”는 외래어의 자격을 가질 수 있는 후보이다. (22가)의 “이문(以文), 보인(輔仁)” 등도 가능한 후보이다.
  한자어 문제에서 완전한 국어 문맥만을 중시한다면, “소주(小舟)”와 같은 한자어는 외래어의 자격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언제라도 단어의 자격을 얻어 쓰일 수 있다. (20)에 의한다. (20)은 “삼고초려(三顧草廬)”와 같은 한자 성어에 의하여 뒷받침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한자 “天”은 “하텬(광주 천자문)”과 같이 읽어 왔다. 이는 “*하늘 스카이(sky)”와 대조된다. 다른 외국어는 이러한 방식으로 학습되는 일이 없다. “*사람 히토(hito 人)”와 같은 구성도 성립하지 않는다. “하텬”에서 “하”은 국어 요소이므로, 그 소리 “텬”은 국어 문맥에 쓰인 것이 된다. 한자 및 그 구성은 잠재적 국어의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4) 가. 將强富者 指作合必赤拔都兒(고려사 권 29:16 충렬왕 6년 10월)
나. 강하고 부유한 자를 합필적 발도아(合必赤 拔都兒)로 지칭하여30)
(25) 가. 元遣萬戶洪波豆兒 來管造船(고려사 권 30:37-8, 충렬왕 19년 8월)
나. 원(元)에서 만호 홍(洪) 파두아(波豆兒)를 보내 와 배 만드는 것을 관장하게 하고
(26) 가. 我軍稱阿其拔都아기바돌爭避之(용비어천가 7:10)31)
나. 아군이 아기 바돌이라고 부르며 다투어 그를 피했다.
 
  (24가)를 문자 그대로 한문 문맥이라고만 한다면, “합필적 발도아(合必赤 拔都兒)”를 우리 외래어라고 하기 어렵다. 그것은 한문에 들어온 몽골어 단어(또는 단어 결합)일 뿐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한문 외에는 달리 표기 방법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24가)는 (24나)와 같은 문맥을 적으려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24가)는 유사 국어 문맥으로 인정될 수 있다. (20)이 적용된다. 이 때 “합필적 발도아(合必赤 拔都兒)”는 우리 외래어로서 인정될 수 있다. (25가)도 (24가)와 성격이 같다. 한문 문맥에 몽골어 단어가 쓰인 것이지만, 유사 국어 문맥이 된다. “홍 파두아(洪 波豆兒)”가 “합필적 발도아(合必赤 拔都兒)”와 다른 것은 후자의 “파두아(洪 波豆兒)”는 바로 이 결합만으로도 외래어의 자격을 가지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홍”은 우리 성(姓)이기 때문이다. “홍 파두아(洪 波豆兒)”는 “홍 영웅(英雄)”이 국어 문맥인 것과 같이 국어 문맥이 된다. (26가)는 시대 상황에 다소의 차이가 인정된다. 훈민정음이라는 표기 수단이 막 만들어진 시대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문이 유사 국어 문맥을 형성한다. (26가)에서 “아기 발도(阿其拔都)”는 인용 문맥 속에 들어 있다. (26가)에서 그것은 우리 군인들이 한 말임을 알 수 있다. 고립된 문맥이 아니다. “아기 바돌”만으로 “바돌”은 외래어의 자격을 가진다. “아기”와 함께 합성어적인 구성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24가)의 “합필적 발도아(合必赤 拔都兒)”의32) “발도아(拔都兒)”, (25가)의 “홍 파두아(洪 波豆兒)”의 “파두아(波豆兒)” 및 (26가)의 “아기 발도(阿其拔都)”의 “발도(拔都)”는 모두 몽골어의 ba'atur(용사/영웅)를 적은 것이다(이기문(1993:60) 참조). (26가)에서 한자 표기를 “拔都”로 하고 그 밑에 “바돌”이라 협주를 단 것은 몽골어를 적는 당시 중국음과 전통 한자음과의 괴리를 보인 것이다. 여진어나 몽골어 기원의 매 이름, 말 이름 등이 고려 시대에 한자로 적힌 것은 모두 이 같은 표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외래어와 관련하여 지적될 수 있는 것은 계림유사에 표제자(標題字)와 역어자(譯語字)가 동일하게 나타나는 예들이다.33)
  
(27) 가. 千曰千, 萬曰萬, 田曰田, 海曰海, 江曰江, 溪曰溪, 泉曰泉, 鶴曰鶴, 羊曰羊, 鹿曰鹿, 毛曰毛, 角曰角, 蛇曰蛇, 蠅曰蠅, 人曰人, 主曰主, 茶曰茶, 絲曰絲, 錦曰錦, 緋曰緋, 牀曰牀, 麻曰麻, 袍曰袍, 裙曰裙, 繡曰繡, 銅曰銅, 靑曰靑, 黑曰黑, 車曰車, 印曰印, 林曰林, 甁曰甁, 墨曰墨, 鞭曰鞭, 旗曰旗, 立曰立, 生曰生, 死曰死
나. 질문자: “茶”는 너희 말로 무엇이라 하느냐?
다. 제보자: 우리말로도 “차(茶)”라고 한다.
    
    (27가)와 같이 표제자와 역어자가 같이 나타나는 예는 문제의 단어들이 당시 고려어에서 외래어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계림유사에는 전혀 우리말 문맥과 같은 것은 주어져 있지 않으나, (27나)나 (27다)와 같은 고려어 조사 상황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문맥에서 (27가)에 나타난 역어부 한자어는 외래어적인 자격을 가진다.
  

5. 훈민정음 창제와 외래어 표기

  훈민정음 창제의 문자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와 같다. 국어의 완전한 표기를 위한 수단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외래어 표기와 관련해서 훈민정음 창제는 완전한 국어 문맥의 성립이라는 의의를 가진다.
  
(28)  가.  나랏말미 中國(귁)에 달아 文字(문)와로 서르 사디 아니(세종어제 훈민정음 1)
나.  고 간다 道理(링)로 衆生()濟度(졩똥)하야 더 煩惱(뻔)여희에느지오(월인석보 1:18)
다.  菩薩(뽕) 菩提薩埵(뽕똉탕)ㅣ라 혼 마조려 니니 菩提(뽕)는 부텻 道理(링)오 薩埵(탕)衆生()을 일울 씨니 부텻 道理(링)로 衆生() 濟度(졩똥)하시 菩薩(뽕)이시다 하니라(월인석보 1:5)
라.  나라해 出令()호(월인석보 1:9)
  
     
  (28가-다)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나온 초기 문헌의 예로서, 전형적인 국어 문맥이다. 훈민정음으로 적힌 것은 우리말이며, 한자로 적힌 것은 중국에서 온 말이거나 중국을 통해 들어온 말이다. (28가-다)에 쓰인 한자는 외래어인가? 그렇다. 왜 그런가? 국어 문맥에 쓰였기 때문이다. (4)에 의한다. 국어 문맥에 어울려 쓰일 수 있는 것이 외래어라면, (28가-다)의 한자어는 외래어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부딪힌다. (28가)에서 “중국”을 “中國”과 같이 한자로 적은 것이 외래어인가 아니면 “귁”과 같이 동국정운식34) 한자음으로 적은 것이 외래어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경우 자칫 우리는 “귁”과 같은 한자음 표기는 현실음이 아니므로, 외래어가 되는 것은 “中國”이라는 한자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 음을 전제로 하지 않는 “中國”은 단지 중국 문자이거나 중국어 단어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현재의 국어 문맥에 “boyfriend”를 영어 알파벳으로 적는 것과 흡사하다. 그 경우 “boyfriend”는 외래어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영어 단어이다. “보이프렌드”와 같이 적어야 외래어의 자격을 가질 수 있다. 혹 “中國”이란 한자도 “중국”이란 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한자 표기도 외래어로 취급할 수 있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선하는 것은 한자가 아니라 그 음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로 한다.
  
(29) 외래어 표기와 한자음
외래어 표기라는 관점에서 보아 한자어 표기에서 우선하는 것은 그 음에 대한 한글 표기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가 당시의 현실 한자음과 상당한 차이를 가지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때로 동국정운식 표기를 무가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28)에 쓰인 몇 가지 예를 다시 정리하여 보이면 다음과 같다.
  
(30) 한자 표기 동국정운식 한자음 현대 한자음
가. 道理 ····························· ······························ 도리
나. 濟度 ····························· 졩똥 ······························ 제도
다. 煩惱 ····························· ······························ 번뇌
라. 菩薩 ····························· ······························ 보살
마. 出令 ·····························  ······························ 출령

  얼른 보아도 (30)의 동국정운식 한자음과 현대 한자음은 적지 않은 차이를 가진다. 현대의 예사 파열음은 모두 각자 병서로 적히고 있으며, 현대에는 종성 표기가 없는 곳에도 욕모(欲母)를 쓰고 있으며, 순경음 “ᄝ”은 현대음과 비교할 때 매우 불규칙한 양상을 드러낸다. (30마)의 “”에는 “출령”의 “ㄹ” 받침이 반영된 것인지 어떤지조차 확실치 않다.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고 그 결함을 강조하면 할수록 현실 한자음과의 차이가 커진다.
  그러나 지배적인 표기 경향에서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당시의 한자음을 불완전하게나마 반영하는 것이다. 이론이 있을 수 없다. (30)의 둘째 칸은 절대로 일본 한자음과 같은 것을 표기한 것은 아닌 것이다.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는 당시 현실 한자음을 고려한 것이다. 그 증거의 하나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영 보래(以影 補來)”이다. 그러나 이는 아주 지엽적인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동국정운 편찬자들이 중국의 예전 운서를 한자음 표기의 전범으로 삼은 것은 그것이 반영하는 한자음이 우리의 한자음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시 중국음과의 차이를 감수하면서 굳이 지나간 시기의 중국음을 고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國”의 경우 당시 중국음은 입성 -k를 이미 소실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한자음은 -k를 유지하고 있다. 동국정운 편찬자들은 이 -k를 표기한 운서를 찾아 내었고 그에 따라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를 마련한 것이다. 동국정운식 한자음이 우리 한자음을 반영하게 된 것은 이러한 조치의 결과이다.
  
(31) 동국정운식 한자음의 성격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우리 한자음을 반영한 것이다.

  실제로 (30)의 동국정운식 표기에서 현실 한자음을 얻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특별한 경우가 있기는 하나, 각자 병서를 모두 예사 파열음으로 바꾸고, 종성의 “ㅇ”을 모두 제거하고, 순경음 “ᄝ”은 제거하거나 활음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아주 간단한 절차에 의하여 우리는 거의 완벽한 현실 한자음을 얻을 수 있다.
  (28)이나 (30)에서 한자음 표기는 바로 당시의 외래어 표기법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외래어 인식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가 말해 주는 것은 당시 사람들은 외래어 표기가 반드시 우리말 표기에 쓰이는 자모나 자모 결합만을 써야 하고, 음절 구조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실제로 큰 의의를 가지지 못하였다. 대부분 외래어는 한자로 적혔기 때문이다. 거기에 새로운 자모나 자모 결합이 허용된다고 해도 실제로 표기에 반영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음절 구조에 관한 제약도 한자 표기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로 한다.
  
(32) 외래어 표기와 동국정운식 한자음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외래어 표기의 한 방법이었다. 그 표기에는 우리말 표기에 쓰이지 않는 자모나 자모 결합도 쓰였으나, 외래어는 대부분 한자로 적혔기 때문에, 이러한 표기는 실제로 큰 의의를 가지지 못하였다.

  용비어천가의 “닌시”와 같은 표기에 당시인의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생각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주석의 문맥은 다음과 같다.
  
(33) 가. 其地有大澤 産眞珠 其俗謂眞珠爲紉出闊失(닌시)故國名其地焉(용비어천가 7:23)
나. 그 땅에 큰 못이 있어 진주가 나왔는데, 그 풍속에 진주를 “紉出闊失(닌시)”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라에서 그것으로 땅의 이름을 지었다.

  (33가)는 “닌시”에 대한 주석을 보인 것이며, (33나)는 그 뜻을 풀이한 것이다. 어느 예에서든 “닌시”는 인용 문맥에 쓰인 것이다. 내용을 보면 그것이 우리가 쓰는 말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용비어천가 문맥에서 그것은 지명(地名)이므로, 외래어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중요성이나 언급의 필요성에 의하여 동화의 조건이 충족되는 예로 볼 수 있다.
  (28)에서 표기 수단과 표기 언어와의 관계를 보면 고유어는 훈민정음으로 적히고 외래어는 한자로 적힌 것을 알 수 있다. 한자 표기는 문제의 단어가 외래어임을 말해 주는 징표와 같은 역할을 한다. 표기의 지배적인 경향을 다음과 같이 일반화해 보기로 한다.
  
(34) 가. 고유어는 한글로 적힌다.
나. 외래어는 한자로 적힌다.
   
   
  
  이것이 우리 표기법을 지배해 온 큰 원리이다.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34)는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향이다. (34가)는 특별히 문제가 없다. 고유어가 한글로 적히지 않은 것은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일이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고유어가 이두나 구결로 적힌 일이 있으나, (34가)의 원칙은 현대에 올수록 확고해진다. 문제는 (34나)이다.35) 우선 이에 문제가 되는 예들을 보이기로 한다.
  
(35) 가.  草木이어나 부디어나(석보상절 13:52)
나.  나랏쳔 일버 精舍(샹) 디나아 가니(월인석보 1:2)
다.  布施(봉싱)쳔랴펴아내야줄씨라(월인석보 1:12)
라.  샹녜 가까이셔(석보상절 6:10)
마.  婆羅門(빵랑몬)은 조 뎌기라논 마리니(월인석보 1:3)
바.  셩(性)이두곤 더으니[才性過人](번역소학 8:37)
사.  단졍(端正)티 아니고(소학언해 제(題) 4)
아.  능히 쳔거(薦擧)티 몯니(소학언해 6:91)
자.  百姓 홈을 쳐며(소학언해 5:57)
   
  
  
  (35가)의 “붇”은 (7) 및 (16나)에서 본 예로서,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야 현실적인 발음으로 적힌 것이다. (34가)가 옳다면 “붇”은 고유어라야 한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한자로는 ‘붇’의 정확한 어형을 표기할 방법이 없었고, 차츰 외래어 의식을 잃게 된 것이다. (35나)의 “쳔”, (35다)의 “쳔량”, (35라)의 “샹녜”, (35마)의 “뎍” 등은 한자 기원의 단어로 생각되는 것인데 한글로 적힌 예들이다. (35바-자)의 밑줄 친 예들은 특별히 한자음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한글로 적힌 예이다. 한글만을 적을 때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그대로 적기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한자음 표기는 차츰 현실음의 모습을 띠어 가게 되었다.
  근세 중국어 차용어도 한글로 적히는 것이며, 전통 한자음과의 차이가 주목되어 온 것이다. 이들 또한 (34가)에 대하여 예외를 이룬다. 몇 가지 예만 보이기로 한다.36)
  
(36) 가.  자(ㅎ)<척(尺), 요(ㅎ)<욕(褥), 보(ㅎ)<복(襆), 뎌(ㅎ)<적(笛) 등.
나.  후시<호슬(護膝), 비개/비갸<비갑(比甲), 모시<목사(木絲) 등.
다.  채/배추<백채(白菜), 빈대(떡)/져/쟈<병저(餠食者) 등.
라.  모과<목과(木瓜), 모란<목단(牧丹) 등.
마.  대패<퇴포(推鉋), 보배<보패(寶貝) 등.
   
  
  (36라)의 “목단(牧丹)”은 “시월(十月), 유월(六月)”과 같이 한자 표기를 하고도 “모란”이라 읽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한글로 적힌다. 전통적인 한자음의 확립이 이러한 표기를 만든 한 가지 요인이다.
  (34나)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개화기의 외래어이다.
  
(37) 가. 유길준(1885)의 ‘서유견문(西遊見聞)’에 나타난 예······華盛敦/와싱튼(워싱턴), 伯林/벌늰(베를린), 阿富汗/압흐가니스탄, 阿利秀/아뤼스토털(아리스토텔레스), 裵昆/배큰(베이콘), 咸發妬/함볼트(훔볼트) 등.
나. 장지연(1909)에 나타난 예: 新地(일요일), 文地(화요일), 溫時地(수요일), 亞利安(아리안), 兇牙利(헝가리), 巴比倫尼亞(바빌로니아) 등.
다. 개화기의 교과서에 나타난 예······倫敦/론돈/륜돈(런던), 紐約/뉴약(뉴욕), 顯理(헨리), 葛利禮午(갈릴레오), 古倫甫(콜롬보), 拿破崙/나파륜(나폴레옹), 亞歷山大/아력산대(알렉산더), 蘇菲亞/소비아(소비에트), 意太利/의태리(이탈리아) 등37)
다. 최남선(1946)에38)나타난 예······墨西哥(멕시코), 諾威(노르웨이) 希伯來(헤브라이), 芬蘭(핀란드) 등.

  (37가, 다)의 예들은 한글로 적힌 것도 있으나, 대체로는 (34나)의 원칙에 따른 표기를 보인다. 대부분의 예들이 중국을 매개로 하여 우리말에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중국어에서 처음 표기를 얻은 형식이 그대로 수입된 예들이 많다. 나중에는 일본어를 통해 들어왔다. 이러한 표기의 가장 큰 결함은 표기의 불완전성이다. 가령 (37가)의 “阿利秀”를 “아리스토텔레스”를 완전히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글 표기로 그 부족한 점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다른 결함의 하나는 서구어 단어를 한자로 표기함으로써 기억 부담량이 엄청나게 커졌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阿利秀”의 의미와는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사용자는 유연성을 찾기 어려운 한자들을 무조건 외어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되었다. 그것은 그 수효가 비교적 적은, 불교 관계 인물이나 사건과 같은 것일 때나 참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외래어가 점점 더 많이 들어왔다. (34나)는 유지되기 어렵게 되었다.
  한글이 창제되지 않았다면 (37)과 같은 한자 표기의 시기는 더 오래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구어 단어 표기에 아주 적합한 한글을 가지고 있다. (34나)의 전통이 아무리 강력한 것이라고 해도, 이 장점이 눈에 띠지 않을 수 없다. 한글로는 서구어에 대한 거의 완전한 표기가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한자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 한글 표기로는 서구어 단어를 불필요한 의미와 결부시킬 필요도 없다.
  그러나 서구어 단어를 한글로 적게 되면서 새로운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표기법이 너무나 다양하게 나타난 것이다. 한자로 적힐 때에는, 소리적기를 하든 뜻적기를 하든, 하나의 형식으로 고정되었던 것이 한글 표기를 하면서 동일 대상에 대하여 여러 가지 표기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표기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37가, 나)에서도 이미 소개한 바 있다. (38)에 박영섭(1996)에서 다시 몇 가지 예를 가져오고, (39)에 최남선(1946)에서, (40)에 이종극(1937)에서 몇 가지 예를 가져오기로 한다.
  
(38) 가. 말레이지아······馬來, 마래, 말.
나. 멕시코·············墨西哥(묵서가), 묵서, 멕시코, 시코.
다. 워싱턴·············華盛敦, 와싱톤, 워돈, 화셩돈.
라. 알렉산더··········亞歷山大, 아력산대, 아렉산더, 아력산더, 알렉산던.
마. 찰스·················찰스, 촬스, 촬쓰.
바. 커피·················가비, 카피, 커피.
(39) 가.  라크[假家],걸로[便屋], 슷볼(야구), 딍(鉅屋)
나.  스[瓦斯], 릴라[土匪戰法]
다.  팡(麵包)
(40) 가.  무-멘트(movement), 터민(vitamine), ()니싱·크림(vanish- ing cream)
나.  타시-(fantasy), (form), 이스(face)
다.  뻐터(butter), 뻬비-(baby), 바빌론, 바벨탑,
    
    
   
  (38)에서 표제 형식은 현재의 표준형이다. (38가―라)에는 한자 표기도 함께 보였다. 한자 표기도 없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체적으로는 한자 표기, 한자 표기를 그대로 한글로 바꾼 것, 새로운 한글 표기 등이 경쟁 후보로 등장하여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 동일 대상에 대한 네, 다섯 가지의 이표기가 나타나는 (38라)는 다양성의 한 극치이다. (39가, 나)는 유성음 표기에 주목한 것이다. 영어의 b나 g를 모두 된소리로 표기하고 있다. (39다)는 먹는 ‘빵’의 표기이다. 이를 “팡”으로 표기한 것은 일본음에 이끌린 것으로 보인다. ‘빵’은 독립신문에도 “브레드”로 적혔다.39) (40)은 서구어의 v, g, b d음 표기를 보인 것이다. (40가)는 “ᅄ”과 같은 표기를 보이며, (40나)는 “ᅋ”과 같은 표기를 보인다. 새로운 자모의 도입이거나 새로운 자모 결합의 도입이다. (40다)의 앞 두 예는 (39가, 나)와 표기 방식은 다르나 유성음에 된소리 표기를 보이는 점은 같다. 그러나 이종극(1937)에서 유성음이 모두 된소리로 표기된 것은 아니다. (40다)의 “바빌론, 바벨탑”은 그것을 보인 것이다.
  

6. 외래어 표기법의 제정과 변천

  외래어 표기법이 명시적인 규정으로 정해져, 우리의 언어 생활을 규제하게 된 것은 우리 표기법의 역사에서 보면 매우 새로운 일에 속한다. 종래에는 명시적인 규정에 의한 표기보다는 관습적인 표기를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교부(1987:13) 및 국립국어연구원(1995:115)를 참고로 하여 외래어 표기법의 제정과 변천의 연혁을 대략 보이면 다음과 같다.
  
(41) 외래어 표기법의 연혁
가. 1933년:조선어 학회 ‘한글 마춤법 통일안’의 한 항목으로 외래어 표기 방법 규정.
나. 1940년:조선어 학회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
다. 1948년:학술용어 제정위원회 “외래어 표기법” 제정.
라. 1958년:“로마자의 한글화 표기법” 제정.
마. 1959년:편수 자료 제1집, 제2집 발간.
제1집:“로마자의 한글화 표기법” 및 일부 세칙, 표기 예 제시.
제2집:외국 지명 표기 세칙 제시.
바. 1960년:편수 자료 제3집 발간.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중국어, 표기 방법 제시.
사. 1963년:편수 자료 제4집 발간.
인명, 지명 표기 세칙 보완, 중국어 및 일본어 표기 일람표 제시.
아. 1972년:편수 자료 제3, 4, 5, 6집 합본 발행.40)
자. 1986년:문교부 고시 제85-11호 “외래어 표기법” 제정.
차. 1992년:문화부 고시 제1992-31호
동구권의 폴란드어, 세르보크로아트어, 루마니아어, 헝가리어 자모와 한글 대조표 제시.
카. 1995년:문화 체육부 고시 제1995-8호
북구권의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자모와 한글 대조표 및 표기 세칙 제시.

  외래어 표기법은 처음 정해진 이후 상당한 변모와 보완을 거듭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항에 대해서만 부분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41가)는 “한글 마춤법 통일안” 제60항을 말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42) 가. 새 문자나 부호를 쓰지 아니한다.
나. 표음주의를 취한다.

  이는 우리 외래어 표기의 큰 원칙을 천명한 것으로, 아직 살아 있는 규정이다. (42가)는 표기 자체에서 동화의 조건을 충족시키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외래어를 다른 문자나 글자체로 표기하거나 특별한 기호를 부가하면 표기 자체가 이질적이 된다. (42나)는 이희승(1949/1959)에서 외래어에 대해서는 어원 표시를 할 필요가 없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 것이며, 김세중(1990:119)에서는 외래어는 원어의 “철자”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발음”을 따라 적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 것이다. 두 해석 모두 표기의 실제와 일치한다. 어원 표시는 우리 맞춤법에서 받침 표기와 관련되는 것이므로, 어원 표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외래어 표기에 까다로운 받침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외래어 표기에 “ㄳ, ㄵ, ㄺ, ㄻ, ㄼ, ㄽ, ㄾ, ㄿ, ㅀ, ㅄ” 등과 같은 받침이 쓰인 일은 없거나 드물다.41)
  외래어 표기의 역사에서 볼 때, (42나)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위에서 검토한 예들을 보면, 개화기 이전까지 외래어의 주종을 이루는 것은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것이다. 중국어를 매개 언어로 하는 외래어까지를 포함시킨다면, 외래어는 대부분 중국어를 차용원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외래어는 (34나)와 같이 한자로 적히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우리 맞춤법에서 한자어는 절대로 소리대로 적는 것이 아니다. 한자 하나하나의 어형을 고정시켜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은 표음주의가 아니라 형태주의이다. (42나)는 그 의미가 무엇이건, 기본적으로 한자어를 외래어에서 제외한 것이다. 실제로 1933년의 “한글 마춤법 통일안”에서 “한자어”는 맞춤법에 포함되어 있다. 한자어가 우리말에서 차지하는 특수성에 기인한 조치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자어가 고유어가 되는 것도 아니며, 외래어적인 성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42)
  (41나)는 1931년부터 9년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친 것이다. 조선어 학회는 1938년 시안 작성을 완료하고 2년여의 시험 적용 기간을 거친 뒤, 1940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확정하였다. 2장 3절 17항으로 된 이 통일안은 “한글 마춤법 통일안” 제60항에 따라 세부적인 규정을 마련한 것이다. 이를 조선어 학회(1940)으로 나타내기로 한다.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총칙을 아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43) 가. 외래어를 한글로 표기함에는 원어의 철자나 어법적 형태의 어떠함을 묻지 아니하고 모두 표음주의로 하되, 현재 사용하는 한글의 자모와 자형만으로써 적는다.
나. 표음은 원어의 발음을 정확히 표시한 만국 음성 기호를 표준으로 하여, 아래의 대조표에 의하여 적음을 원칙으로 한다.
다. 만국 음성 기호와 한글과의 대조표(만국 음성학협회 1938년도 수정 기호에 의함)

자 음43)

p ph p‘ f b p’
t’ v Ɵ ð s z
ʃ l r h

모 음

e ɛ æ ʌ ɔ
ø y

  (43가)는 (42가, 나)를 하나로 통합한 것이다. (43나)는 (43가)에서 말하는 “표음”의 개념과 적용 방법을 명시한 것으로, (43다)는 (43나)에 이어지는 것이다. (43나, 다)는 여기서 편의상 분리한 것일 뿐이다.
  (43다)의 대조표는 전체 중 극히 일부만을 보인 것이다. 원 대조표에 나타난 국제 음성 기호는 자음이 105개(내파음화 기호를 포함시키면 106개)나 되며, 모음이 31개(비음화 기호를 포함시키면 32개)나 된다. 정밀 음성 표기의 기초 위에서 국제 음성 기호와 한글과의 대조표를 마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외래어 표기는 결코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43)의 전체적인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기로 한다.
  
(44) 가. 한글 자모 외의 자모나 자형이 쓰인 예가 없다.
나. 파열음의 무성음과 유성음을 한글 자모로는 모두 예사소리 글자로 적었다.
다. (43)이 된소리 글자의 사용을 금한 것은 아니나, 그 예시어가 특이한 언어에 국한되어 실제로 된소리 글자를 쓰는 일이 극히 드물게 되었다.

  (44가)는 (43가)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44나)는 (39가, 나)와 같이 파열음의 유성음을 된소리로 적는 방식을 택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44다) 또한 외래어 표기에서 된소리 글자의 쓰임을 극력 피하게 되는 계기를 이룬다. (41나)에 따른 표기의 몇 가지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45) 가. smooth 스무드
나. pulp 팔프
다. salade 살라드
라. Hamlet 하믈레트
마. goodbye 굿바이
바. cognac 코냐크

  (41다)는 1948년 문교부 학술용어 제정위원회 제20분과 언어과학위원회에서
  
  
  정한 “들온말 적는 법”을 말한다.44) 이를 학술용어 제정위원회(1948)로 나타내기로 한다.45) 이 표기법의 가장 큰 특징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46) 가. 현행 한글 자모 외에도 ㅿ, ᅄ,46)ᅋ, 47)48) 등과 같은 자모를 더 썼다.
나. 파열음의 유성음을 된소리 글자로 썼다.

  (46)은 표기법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기본 원칙으로 자리잡은 원칙들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46가)는 (43가)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며, (46나)는 (44나)의 방식을 뒤집는 것이었다. 학술용어 제정위원회(1948) 안은 한글을 음성 기호로 쓰려는 시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외래어 표기는 음성적 표기와는 다른 것이다. 표기의 몇 가지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47) 가. cognac 고냑
나. Tolstoy 돌스또이
다. Peru 베루
라. alkali 알깔리49)
마. umlaut
바. 孔子
    
    
   학술용어 제정위원회(1948)의 “들온말 적는 법”이 일반의 호응을 받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41라)의 문교부(1958) “로마자의 한글화 표기법”이 만들어진 것은 이 같은 배경에 의한다. 문교부(1958)은 외래어 표기의 혼란을 막고, 정부의 공식적인 표기법을 마련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로마자의 한글화 표기법”이 정식으로 공표된 것은 1958년 10월 29일이다.50) 문교부(1958)의 “표기의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다.
  
(48) 문교부(1958)의 “표기의 기본 원칙”
가. 외래어 표기에는 한글 정자법(正字法)에 따른 현용 24자모만을 쓴다.
나. 외래어의 1음운은 원칙적으로 1기호로 표기한다. 곧 이음(異音, allophone)이 여럿이 있을 경우라도 주음(主音, principal member)만을 표기함을 원칙으로 한다.
다. 받침은 파열음에서는 ‘ㅂ, ㅅ, ㄱ’, 비음에서는 ‘ㅁ, ㄴ, ㅇ’, 유음에서는 ‘ㄹ’만을 쓴다.
라. 영어, 미어(美語)가 서로 달리 발음될 경우에는 그것을 구별하여 적는다.
마. 이미 관용된 외래어는 관용대로 표기한다.
   
    
  
  (48가)는 (42가)나 (43가)의 다른 표현이다. “한글 정자법”이라는 술어가 처음 쓰인 것이 눈에 띤다. 여기서는 공식적인 명칭에 따라 “한글 맞춤법”이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라고 했어야 한다. (48나)는 (43나)의 결함을 보충한 것이다. 지나친 음성적인 표기가 가진 부작용을 막기 위한 조치이다. (48나)에 “음운”이란 말이 쓰였음은 주의를 요한다. 음운은 언어에 따라 다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개별 언어에 따른 표기법이 따로 정해질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48마)는 동화를 표기에 반영함을 원칙으로 세운 것이다.
  문교부(1958)의 “표기 일람표” 중 일부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49) 가. d Ɵ ð
나. z
다. ʃ
       
   
  (49가)와 같은 표기 방식은 원칙적으로 (48나)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는 1음운 1기호의 원칙이 지켜졌다고 할 수 있다. 그 대가는 “말음 파열 자음 다음에는 ‘으’ 모음을 붙여서 표기함을 원칙으로 한다”와 같은 규정을 관련 조항에 일일이 써 넣는 것이다.
  문교부(1958)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장음 표기에 있다. “장모음은 동일 모음을 거듭하여 표기함을 원칙으로 하되, 안 적을 수도 있”는 것으로 규정하였으나, 중모음 표기까지 포함하여 실제로는 엄청난 양의 장음 표기가 쓰였다. 몇 가지 예만을 보인다.
  
(50) 가. form 포옴(폼)
나. concert 콘서트(콘섯)
다. post 포우스트
    
    
    
  
  외래어 표기의 세칙이 마련된 것은 문교부(1959가, 1959나, 1960, 1963)에 의해서이다. 문교부(1959가)에 의하여 “관용된 외래어”의 표기에 관한 몇 가지 기준이 마련되고,51) 문교부(1959나)에 의해서는 외국 지명의 한글 표기 세칙이 마련되었으며, 또 문교부(1960)에 의해서는 영어, 도이치어, 프랑스어, 이탈리아 어, 일본어 표기 세칙과 중국음 한글화 세칙이 마련되었다. 이어 문교부(1963)에 의해서는 인명 지명 표기의 원칙이 세워졌다. 교과서 편찬을 위해서는 인명, 지명 등의 외래어 표기법이 시급히 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41자)는 이와 같은 외래어 표기법이 다시 개정된 것이다. 문교부(1958)이 (51)과 같이 고유어에 대해서는 하지 않는 장음 표기를 하는 것, 중모음 [auə] 같은 것을 ‘아우어’로 적는 것(‘아워’가 더 합리적인 것으로 본다), “zigzag 지그잭, 직잭, plat 플랫, cat 캐트” 등과 같이 파열음 받침 표기 규정이 모호한 것, [ʃ]는 “시”로 적게 되어 있으나, “슈”에 가깝고, [ʒ]는 뒤의 모음과 함께 “쟈, 져” 등으로 적게 되어 있으나 현실음은 “자, 저”에 가깝다는 것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이와 더불어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인명, 지명 등의 외래어 표기법을 정비할 필요성이 생겨, 1958년 이후 쓰여 오던 외래어 표기법을 개정하게 된 것이 문교부(1986)이다.52) 이것이 현행 외래어 표기법이다. 이 “표기의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다.
  
(51) 가. 외래어는 국어의 현용 24자모만으로 적는다.
나. 외래어의 1음운은 원칙적으로 1기호로 적는다.
다. 받침에는 “ㄱ, ㄴ, ㄹ, ㅁ, ㅂ, ㅅ, ㅇ”만을 쓴다.
라. 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마.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을 존중하되, 그 범위와 용례는 따로 정한다.
    
    
  (51가)는 (48가)를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며, (51나)는 (48나)에서 군더더기를 제거한 것이며, (51다)는 (48다)와 내용상 동일하고, (51마)는 (48마)와 같은 내용을 정한 것이나, 관용 표기에 대한 오해의 여지를 없앤 것이다. (48라)가 없어지고, (51라)가 새로 정해진 것이 다르다. 전체적으로는 문교부(1958)의 골격을 유지하면서 부분적인 결함을 고친 것이다.
  다소 문제가 되는 것은 (51나)이다. (51나)는 (48나)와 동일한 것이나, 다소 성격이 다르다. 문교부(1986)에서는 문교부(1958)과 달리 관련항마다 “으” 삽입 규정을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교부(1958)을 예시한 (49)에 대해서는 (48나)와 같이 말할 수 있을지라도, 문교부(1986)의 대조표에 대해서는 같은 말을 하기 어렵다. 한 음운에 대하여 거의 체계적으로는 2기호가 대응되는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다. [b]에 대하여 “ㅂ”과 “브”가 대응되는 식이다.
  (51마)는 외래어 표기라는 것이 따로 정해지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것은 외래어 표기가 표기 원칙과 세칙 및 대조 일람표만을 가지고 그 정확한 표기 형식에 도달할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미 굳어진 외래어라도 그 범위와 용례는 따로 정하게 되어 있으므로, 굳어진 형식을 아는 것만으로 족하지 않다. 그렇다면, 원지음을 아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원지음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일 수 있고, 제3국을 통하여 들어와 익은 말이 그것을 대신할 수 있다. 따라서 원지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그 정확한 표기 형식을 얻을 수 없다.
  이는 우리 외래어 표기법이 물샐틈없는 원리로 존재하여, 외래어의 발음이 주어지면 자동적으로 그 표기 형식을 결정하는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한 항목 한 항목 사정되어야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7. 맺음말

  본고는 우리 외래어 표기의 역사를 대강이나마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무엇보다도 중시한 것은 외래어의 개념이었으며, 그 개념 적용을 위한 국어 문맥이라는 개념이었다. 아주 당연한 것이지만, 외래어는 외국어에서 우리말에 들어온 단어이다. 그냥 들어온 것 아니라 우리말에 동화되어 쓰이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과거의 문헌에서 우리말에 동화되어 쓰인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제1차적으로 문제의 요소가 국어 문맥에 쓰이는 것을 가리킨다.
  이 개념 자체는 아주 간단하고 쉽다. 그러나 이 개념의 적용이 언제나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무엇이 외국에서 들어온 것인가? 그것이 다른 언어에서 들어왔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른 시기의 가설적인 외래어에 대하여, 우리는 지리 역사적 조건, 문화적 조건, 음상적 조건, 의미적 조건, 관련어 조건, 역사적 조건을 설정하여 그 개연성을 검토하였다. 음상과 의미의 유사성만으로는 문제의 단어가 다른 언어에서 왔다고 믿기는 어렵다. 지리적 조건이나 문화적 조건이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우리는 “관련어 조건”을 중시하였다. 지리적 조건이나 문화적 조건이 쉽사리 검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 우리의 외래어는 한자를 표기 수단으로 하는 것이었다. 한자 외의 다른 표기 수단이 없었으므로 이는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어떻게 동화의 조건이 충족되었음을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때 우리가 중시한 것이 “국어 문맥”이다. 서기체 표기가 우리말을 적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하게 국어 문맥인가? 적어도 우리는 그것이 “유사 국어 문맥”을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정확하게 국어 문맥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것에 근접한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확대에 의하여 우리는 한문 문맥도, 우리말로 번역되어 이해되는 한에 있어 “유사 국어 문맥”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았다. “삼고초려(三顧草廬)”와 같은 말이 우리말 어휘 체계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은 이 같은 유사 국어 문맥의 성립을 전제로 한다.
  훈민정음 창제는 국어 문맥의 문자적 표현이라는 점에서도 큰 획을 긋는 사건이다. 그 이전의 표기는 한자를 이용한 표기이거나 한문 표기였으며, 외래어는 언제나 한자로 적히는 것이었다. 훈민정음 창제는 외래어가 한글로 적힐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 사건으로 큰 의의를 지닌다. 훈민정음이 외래어에 적용된 것은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를 통해서이다.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나, 외래어 표기로서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것은 외래어가 한자가 아닌 문자로 적힌 최초의 사건이다.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당시 우리 한자음을 적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가령 일본 한자음과 같은 것을 적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중국음을 적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훈민정음 당사자들은 중국 과거의 운서를 기준으로 한자음을 표기한 것일까? 그것이 우리의 한자음과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는 한글로 이루어진 최초의 외래어 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외래어 한자 표기의 전통이 이러한 표기의 의의를 무색하게 하였다.
  외래어 한자 표기의 전통은 수많은 서구 외래어가 들어옴으로써 붕괴되었다. 서구어에 대한 한자 표기는 너무나 불편하였고 불완전하였고 불필요하게 기억에 부담을 주는 것이었다. 한글 표기의 편리가 눈에 띠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표기의 다양성은 곧 혼란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이 외래어 표기 규정 또는 외래어 표기법을 제정하게 된 배경이다. 외래어 표기의 기본 원칙은 현용 24자모 외에 다른 글자나 부호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제1원칙으로 한다. 표기 형식에서 동화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제2의 원칙은 표음주의이다. 외래어는 소리를 적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채택된 것이 원지음주의이다. 또 다른 원칙에는 관용주의가 있다. 외래어는 우리말에 동화된 대로 적음을 뜻한다. 이러한 원칙들이 어떻게 기술적으로 배합되는가? 개인이 자의적으로 이를 정할 수는 없다. 우리 외래어는 표기법 당국에 의하여 일일이 사정되는 것이다.
  외래어 표기의 역사에서 볼 때, 우리의 외래어 중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것은 한자어이다. 이 사실이 외래어 표기법을 제정하면서는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외래어 표기는 서구어 중심으로 된 것이다. 그러나 한자어가 외래어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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