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산책】
외래어의 오용과 남용
김용권 /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국어 사전을 떠들어 보면 우리말의 낱말과 함께 수많은 외래어가 들어 있다. 외래어란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나라 말에 들어온 외국 말’이다(한글 학회 지은 큰사전, 1947). 다시 말해서 외국 말인데 우리말이 되었거나 우리말처럼 쓰이는 외국 말이 외래어이다. 국립국어연구원에서 나온 외래어 관계 자료에서는 ‘사회적으로 정착된’ 외국어를 외래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말도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 생활 속에서 우리말처럼 쓰이는 외국어를 가리킨다.
외래어는 외국과 국교를 맺고 교류하는 데 따라서 흘러 들어오기 마련이다. 외국의 국명을 위시하여 주요 인물의 이름과 지명과 같은 고유 명사와 문물제도나 물질문화의 소산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가 알려지게 되고, 그것이 ‘정착’되게 되면 국어 사전에도 오르게 되는 것이다.
국어 사전에는 많은 외래어가 실려 있는데 외국 사전에는 우리말이 얼마나 실려 있을까 궁금하지 않겠는가. 1993년에 나온 미국의 미리엄·웹스터 대학 영어 사전(10판)의 지명란에는 서울을 비롯하여 지방의 주요 도시의 이름이 들어 있다. 인명란에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역대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실려 있다. 그리고 사전의 M항에 Moonie라는 표제어가 나오는데, ‘한국의 통일교 창시자인(이 말 끝의 -ie는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이다.) 문선명 씨의 신봉자’라는 풀이가 붙어있다.
보통 명사로는 한글(hangul), 김치(kimchi), 태권도(taekwondo)의 세 단어가 들어 있다.(일본어는 어림잡아 백 개가 넘어 보인다.)
영국의 유명한 옥스포드 영어 대사전(OED)의 제2판(1989년)에는 한글, 김치, 기생, 고누(전통놀이), 막걸리, 면(面), 온돌, 언문, 시조, 태권도, 원(圓), 양반의 12개의 명사가 들어 있다. 일본어는 343개, 중국어는 289개가 실려 있다. 엄청난 차이다.
또한 옥스포드 대사전보다 훨씬 작은 사전인 롱맨 현대 영어 사전(제3판, 1995년)이나 롱맨 언어·문화 사전(1992년)에는 인명은 하나도 없고, Moonie의 말 풀이에 문선명 씨가 나온다. 보통 명사로는 태권도뿐인데 그나마 ‘동양의 전통 호신술’이라고 풀이되어 있어 한국어라는 표식은 없다. 이보다 안타까운 것은, ‘롱맨 언어·문화 사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표(trade mark)로 캐논, 올림퍼스 같은 일본의 카메라 제조회사, 혼다, 닛산, 토요다 같은 자동차 제조회사와 닌텐도, 세가 같은 컴퓨터 게임 제작회사의 이름이 20개나 넘게 들어 있는데 우리의 현대, 대우, 삼성, 금성, 쌍용은 어느 하나도 올라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직도 우리 기업의 지명도가 일본 기업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일까.
사실상 한 나라의 언어가 다른 나라에 잘 알려지고 못 알려지는 것은 국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앞서 말한 미국의 영어 사전에 실려 있는 세 단어 가운데 ‘김치’는 19세기 말에 미국에 소개되었고, ‘한글’은 1955년에, ‘태권도’는 1970년에 각각 소개된 것이다. 20세기 초에 국권을 빼앗긴 탓으로 국가 간의 외교·통상 관계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우리의 문물을 알리는 언어의 이입을 막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어의 경우가 그 반증이다. 미국 영어 사전에 들어 있는 수백 개 단어의 상당수는 19세기 말까지에 미국에 소개된 것이고, 20세기에 들어와서 일본이 근대화되는 가운데 새로이 생겨난 조직이나 기구, 이를테면 ‘재벌’(zaibatsu)이라든가,2차대전 전후의 ‘신풍’(kamikaze)이나 (원자탄) ‘피폭자’(hibakusha) 같은 극히 소수의 단어가 추가되었다. 최근에는 ‘라면’(ramen), 닌쟈 거북이의 ‘인자’(ninja)와 ‘가라오케’(karaoke)가 영국과 미국 양쪽 사전에 올라 있다.
이처럼 영어 사전에 들어 있는 일본어의 수는 백 단위인데 비하여 일본어가 된 외래어의 수는 엄청나다. 슈에이샤(集英社)라는 출판사에서 펴낸 ‘일본어가 된 외국어 사전’(1994년 제3판, 1,192쪽)을 보면 외국에서 들어와서 일본어로 사용되고 있는 외래어(가다카나 어)와 아직 정착되지 않았으나 앞으로 예상되는 사용 빈도가 높은 외국어는 4만 2천 개가 된다고 한다. 이 가운데 외국의 인명과 지명과 작품명이 2천 개이고, 일상 용어와 전문 용어가 3만 6천 개, 그리고 약자가 4천 개이다. 시대적으로는 일본의 중세 말에서 근세 초기에 외국과 교역이 시작되면서 외국어가 들어오게 되었고 명치 이후의 문명 개화기에 그리고 2차대전 이후에서 최근에 이르는 시기에 일상어와 함께 매스커뮤니케이션, 기업, 정치, 경제, 문화, 문예, 첨단과학의 전문 용어가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외래어의 대다수는 서양 여러 나라의 말이고 동양어는 많지가 않다. 한국어로는 ‘한글’, ‘김치’, ‘양반’ 등이 보이고, ‘새마을 운동’도 들어 있다. 서양어 가운데는 ‘백 미러’, ‘셀 모터’, ‘헬스 센터’, ‘트레이닝 캠프’, ‘커머셜 송’, ‘테마 송’ 같은 일본식 조어가 끼어 있고 외국어와 일어의 합성어도 들어 있다.
그러면 우리말에는 외래어가 얼마나 있는가. 한마디로 알 수 없다. 외래어 사전이 따로 나와 있는 것이 없고, 여러 국어 사전에 적지 않은 외래어와 외국어·한국어의 합성어가 실려 있지만 집계해 놓은 것이 없기 때문에 몇 개, 몇천 몇백 몇십 개라는 정확한 숫자를 구할 수 없다. 이런 것이 외국 사전과 우리 사전과의 질적 차이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국어 사전에서 외래어를 표기할 때 영어를 비롯한 서양어를 두고 외래어라고 부르고, 한자어와 일본어는 따로 다루고 있다. 한자어 곧 중국어를 말하자면 우리말이나 일본어에 수없이 많이 들어 있지만, 예전에 들어온 한자어는 일본 사전에서는 외래어로 다루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우리 사전도 같은 관행을 따르고 있다. 문제는 일본어와 일본식 한자어이다. 일본어는 지난 일제 지배시의 통치 언어였으나 해방된 지 50년이 넘은 지금까지 우리의 언어 생활 속에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더러는 원음 그대로 더러는 발음이 바뀐 상태로 사용되고 있고, 일본식 한자어는 일상생활, 토목, 생산, 교통, 행정, 법률 분야의 전문 용어 또는 관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시국과 관련된 법률 용어 한 두 개를 들어 본다.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은 ‘검찰이 반란죄의 성립 여부에 대해 수사하지 않은 것은 판단유탈(判斷遺脫)의 잘못이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서울신문 ’95. 12. 27). 판단유탈이란 ‘판단을 빠뜨렸다는 의미’라는 풀이가 나온다. 동아출판사의 국어 사전에는 판단유탈이라는 표제어는 보이지 않고, 유탈은 인쇄 조판시 글자가 빠진 것을 뜻한다. 일본어 사전(이와나미)에는 무엇이 빠지거나 새는 것을 뜻한다고 되어 있다. 또 내란죄(內亂罪)는 ‘국토를 참절(僭竊)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죄’라고 되어 있는데, 참절이라는 말은 국어 사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유탈이나 참절은 수많은 지난 시절의 일본의 법률 용어의 일부로 보이는데 한문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젊은 법학도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말이 아닌가. 외래어를 될 수 있으면 우리말로 옮기는 것을 ‘순화한다’고 하던데, 이런 말들이야 말로 쉬운 말로 ‘순화’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해방 이후에도 우리말에 들어온 일본어나 일본식 한자가 적지 않다. 우리가 요새 잘 쓰는 문민정부의 문민(文民)은 일본이 새 헌법을 만들 때 영어의 civilian을 번역한 것이다. 교육 분야에서 잘 쓰는 시행착오(試行錯誤)는 미국 영어의 trial and error를 일본 사람들이 옮겨 놓은 것을 그대로 쓰고 있다. 이 말은 문제 해결에 있어 몇 가지 다른 방법을 시험하고 착오를 통해서 최선의 해결법을 찾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좋은 일 또는 일을 새로 시작하다 보면 착오나 실수가 있기 마련이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중국과 홍콩에서 나온 영중 사전은 이 말을 ‘반복시험(反覆試驗)’ 또는 ‘부단모색(不斷摸索)’으로 옮기고 있는데, 이 쪽이 원 뜻에 훨씬 가깝다. 공산품 등을 여러 곳으로 수송하는 물류(物流), 면세점 같은 데서 사들인 물건을 집에까지 갖다 주는 택배(宅配)는 요새 부쩍 눈에 띠는 일본어인데 다른 말이 없을까.
위의 두 말은 일본어의 원 뜻대로 사용되고 있으나 어떤 말은 원어에는 없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거나 원 뜻을 잘 못 알고 쓰이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사꾸라(櫻)’다. 이 말의 뜻은 벚꽃, 벚나무다. 주로 정치 분야에서 쓰이고 있는 이 말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야당 같은 여당, 여당 같은 야당 인사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겹 사꾸라’는 그 정도가 더 심한 경우에 쓰이고 있다. 또 하나는 ‘와이당(猥談)’이다. 이 말은 우리말로는 음담(淫談)이다. 얼마 전의 일인데 KBS1의 ‘아침마당’에 출연한 40대의 모 부장 검사가 여성 청중 앞에서 “여러분 와이당 좋아하시지요, 저도 좋아합니다……”라고 하면서 이 말을 여러 번이나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아마도 그 말이 일본어라는 것을 모르고 있거나 알고 있어도 ‘농담’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아침부터 점잖은 사람이 여성들에게, 그것도 TV로 방송되는 자리에서 음담패설을 좋아한다고 자랑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일본어 사용을 초등 학교때부터 강요 당했던 세대는 지금은 60대가 되었다. 그 다음 세대들은 일본어를 글을 통해서 익힌 것보다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을 얻어들은 경우가 많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국어인지 일본어인지 구별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지금 대학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거나, 일본어·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들 말고 보통 사람들이 일본어나 일본어투 한자를 가려낼 길은 별로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런 것을 모아 놓은 외래어 사전이 없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우리의 언어 생활 속에 들어 있는 적지 않은 수의 일본어와 일본어투 한자는 외래어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외래어는 앞에서 적은 대로 원래는 외국어인데 국어에 들어와서 국어처럼 쓰이거나, 국어로 정착된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외래어는 당연히 국어 사전에 들어가야 할 텐데 일본어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얼마전에 문화체육부에서 ‘일본어투 생활 용어 순화집’이라는 소책자를 냈는데, 여기에는 702개의 단어가 실려 있다. ‘머리말’에 보면, 이 말들이 ‘그동안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생활 전반에 걸쳐 사용’되어 왔으며, ‘우리말 속에 남아’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는 일본식 발음의 서구 외래어와 일본식 외래어(일본식 조어)도 132개가 들어 있다. 이 책자에서도 외래어는 서양어에만 국한시키고 있고, 일본어와 일본어투 한자어는 외래어로 부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일본어와 일본어투 한자어를 외래어라고 보지 않더라도 그것들이 우리 사회에서 ‘널리 사용되어 왔고 우리말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보통 사람이 쉽게 찾아 볼 수 있게 사전의 부록 같은 데에라도 실려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러는 국어 사전에 실리기도 한다. ‘뉴·에이스 국어 사전’(금성출판사)에는 다다미, 우동, 스시가 일본어 발음대로 표제어로 나오고, 일본식 돗자리, 가락국수, 초밥이라는 풀이가 붙어 있다. 그런데 쥬도(Judo)는 유도가 표제어이고 풀이에 ‘일본 고유의 무술임’이라는 풀이가 나와 있다. 일본 고유의 것이라면 일본어 발음대로의 표제어가 나와 있어야 국어 사전에서도 찾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앞에서 언급한 영미의 영어 사전에 실린 일본어들은 사무라이, 야쿠자, 스키야키, 닌쟈, 가라오케처럼 일본 문화에 특유한 것들이고, 일본어 발음대로의 로마자로 적혀 있다. 물론 풀이에 일본의 무엇이라고 나온다. 우리 국어 사전에서는 어떤 원칙에 따라 일본어를 싣는지 알 수 없으나, 우선 그 실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 같고, 그래서 일본어는 널리 사용되고 있으면서 마치 검은 돈처럼 지하에서 떠돌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지난 50, 60년대 이후에 나온 우리 국어 사전들은 일본어 사전을 많이 참고로 하고 있으면서도, 우리 사회에 아직 남아 있는 일본어는 될 수 있는 한 싣지를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어 사전에 실려 있는 서구의 외래어는 말할 것 없고, 일본식 서양어(조어)도 서로 경쟁하다시피 많이 싣고 있다. 올드 미스, 백 미러, 커닝 등은 ‘일본식 조어임’이라는 친절한 풀이까지 곁들여 가면서 표제어로 올리고 있으니, 우리의 언어 생활에 해독을 끼친 일제의 잔재를 말끔히 쓸어 낸다는 다짐은 어디로 갔는지, 일본식 외래어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인가. 기준의 이중성도 문제이고 일본식 외래어를 수용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들처럼 외국어를 본래의 뜻과는 다른 뜻으로 쓰거나, 있는 말을 놔두고 다른 말을 만들거나 하는 버릇을 배우지 않았는지 걱정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례를 소개한다. 금년 봄에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영어국제사전’(Cambridge International Dictionary of English)이라는 외국인을 위한 영어 학습 사전을 냈다. 영어를 정확하게 배울 수 있는 여러 가지 지침과 설명, 도해(그림)가 가득 들어 있는 이 사전의 특색의 하나는 프랑스 어, 독일어를 비롯한 13개의 서양어와 한국어, 일본어, 타이어 세 개의 동양어, 도합 16개(영어에 대한) 외국어의 ‘False friends’의 표이다. 이 말의 뜻은 ‘믿지 못할 친구’이고 영중 사전에서는 ‘不忠實的朋友’라고 옮기고 있다. 영국 영어 사전에서만 쓰는 이 말은 ‘국어의 낱말과 모양이나 발음이 비슷하나 뜻은 다른 외국어의 낱말’을 말한다. 영어는 다른 서양어 가운데 많은 ‘믿지 못할 친구’가 있는데, 그 이유는 이들 서양어의 어원이 원래 영어와 같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뜻이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프랑스 어인 아크튜엘망(actuellment)은 영어인 액추얼리(actually)와 비슷해 보이지만, 프랑스 어의 뜻은 지금, 현재(부사)이고 영어의 뜻은 실제로, 현실로(부사)이다. 또 독일어인 Gift는 영어의 gift와 글자가 똑같지만, 영어의 뜻은 선물, 천부의 재능이고 독일어의 뜻은 독(약)이다. 한국어, 일본어, 타이어 같은 동양어의 경우는 영어 단어를 차용하면서 새로운 뜻이나 다른 뜻을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한 예로 한국어와 일본어는 슈퍼(super)라는 말을 슈퍼마켓(supermarket)라는 뜻의 명사로, 타이어는 유연(有鉛)연료라는 뜻으로 쓰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어의 영어 ‘믿지 못할 친구’는 60개이고, 일본어의 그것은 144개가 되는데 이 가운데는 아파트 アパート(명사)의 apart(형용사, 정확하게는 apartment house), 시험부정의 컨닝, カンニング(정확한 영어는 치팅[cheating]), 자동차의 핸들, ハンドル(영어는 steering wheel), 오버코트의 오버, オーバー 처럼 한국어와 일본어 양쪽 단어표에 실려 있는 것이 있다. 또 우리가 등, 후면이라는 뜻의 백(back)을 ‘뒤를 봐 주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교외의 대 저택인 빌라(villa)를 시내의 호화주택의 뜻으로 쓰고 있는 말도 들어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한국식 영어 60개의 상당수는 일본식 영어인데, 이 단어표를 만든 사람이 한국어 속에 일본식 영어 단어가 얼마나 많은지를 모르고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사전의 표제어로는 한국어 단어를 하나도 싣지 않은 영국의 영어 사전에 우리식 영어와 그 한글 표기가 이처럼 많이 들어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이 사전을 통해서 정확한 영어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는, 우리에게는 다소 낯뜨거운 메시지를 깔고 있으므로 그다지 자랑할 것은 못 된다.
사실 우리는 우리말을 조심성 없이 다루고 외국어도 멋대로 쓰고 있다. 지금 외국어 특히 영어는 각 분야의 용어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 그것을 일일이 우리말로 옮겨 놓거나 풀이하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표기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그 많은 영어 단어가 아직 외국어인지 또는 외래어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운 판국에 멀정한 영어 대신 우리식 영어를 마구 만들어 쓰고 있어 어지럽기만 하다. 비근한 예를 또 하나 들어보자.
자동현금인출기라는 것이 있다. 영국에서는 cash dispenser 또는 cash machine이라 하고 미국에서는 automatic teller machine이라 하며, ATM이 그 약자이다. 이 기계는 대도시의 거리나 지하철역 구내, 학교, 병원 등의 공공건물과 은행의 한 구석에 설치되어 있고, 일상의 경제 생활에 매우 요긴한 시설이다. 그런데 작년 봄엔가 조흥은행에서 그것이 설치된 곳을 365 Cash Lobby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라비(미국식 발음)하면 호텔처럼 큰 건물의 출입문을 들어서면 있는 큰 방 또는 공간이다. 그러나 은행의 Cash Lobby는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365라는 숫자는 일년 365일을 가르키는 것이 분명하지만 보통 영어 어법을 따르자면 이 숫자는 복수임으로 Lobby는 복수형인 Lobbies가 되어야 한다. 1년을 뜻한다면 365 Day Cash Lobby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저러나 Cash Lobby란 말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라비에는 현금을 꺼내고 집어넣는 작동의 기능이 들어있지 않으니 말이다.
다른 시중 은행도 가만히 있지 않고 묘안(?)을 들고 나왔다. 국민은행은 365 auto bank(오토 뱅크)라고 부른다. 오토는 automatic을 줄인 모양인데 오토는 자동차(car)이니까 자동차 은행을 차린 셈이다. 한일은행은 카네이션 365일 코너에 Sunday Banking이라는 영어까지 붙여 놓았다. ‘일요일도 영업함’이라고 알아 달라는 모양이다. 상업은행은 한아름 365 자동 코너로, 신한은행은 365 바로바로 코너로, 제일은행은 365 자동 코너에 First Quick Service라는 영어를 곁들였다. 물론 First는 제일은행의 ‘제일’을 뜻하리라. 보람은행은 24시간 현금인출서비스라고 부른다. 종각 지하도에 설치된 한국컴퓨터주식회사 기계에는 24HRS CASH ADVANCE라는 영어와 현금자동지급기라는 우리말이 붙어 있다. 또 한국신용정보주식회사의 기계에는 은행공동현금(입)출기와 NICE CASHING 라는 영어가 붙어 있다. 이 말은 ‘돈 잘 꺼내세요’라는 뜻일까. 앞의 자동 코너의 코너는 케임브리지 사전의 ‘믿지 못할 친구표’에 올라 있는 대로 길의 모퉁이나 모서리라는 본래의 뜻에서 건물의 한 부분, 잡지의 한 항목, TV 프로그램의 일부라는 우리 식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저러나 자동 코너는 어떤 곳인가. 과거에 ‘가든’이라는 말이 대형 불갈비 식당의 이름 다음에 붙더니 나중에는 국도 연변이나 휴양지나 관광지의 웬만한 식당에도 붙여져서 이제는 식당을 뜻하게 되었다. 또 건물에 둘러쌓인 안 마당인 독일어의 호프(Hof)가 생맥주집의 이름 뒤에 붙여져서 생맥주집을 뜻하다가, 지금은 생맥주 자체가 되고 말았다. 혹시 바로바로 코너도 사방에 퍼지게 되면 현금인출기가 될지 걱정스럽다.
사업상 남들과 경쟁하다 보면 자기를 드러내야 할 말을 써야겠는데 이 때 외국어가 곧잘 등장한다. 여성 미용(조발)은 헤어드레싱(hairdressing)이고 미용사는 헤어드레서(hairdresser)인데, 큰 거리나 주택가 골목길에는 이 말은 보이지 않고, 헤어 아티스트, 헤어 아트, 헤어 컬렉션, 헤어 코디네이터, 헤어 살롱 등 실로 다양한 말이 이어진다. 물론 아티스트, 아트, 컬렉션, 코디네이터, 살롱은 어엿한 영어이지만 머리털에 이어서 쓰는 일은 없다. 헤어 컬렉션을 억지로 풀이하면 가발 가게 쯤은 될지 모르겠다.
서비스 업종의 가게가 영어 낱말을 이렇게 나열하는 데 반하여 대기업은 새 말을 만들어 상표로 내세우고 있다. NEX 라는 이름의 맥주가 있다. 신문 광고에 나온 것을 보면 N은
Natural ingredients(천연 원료), E는 고객이 평가함(Evaluated by customers), 그리고 X는 우수함(Excellence)의 뜻을 담았다고 되어 있다. 참으로 엄청난 주장이지만, 영어의 조어법으로는 말도 안 된다. 가령 언젠가 한국경제신문 1면 상단의 표제로 나온 DVD를 보자. 이것은 디지털 비디오 디스크(Digital Video Disc)의 약어이다. 세 개의 단어가 합쳐져서 하나의 뚜렷한 뜻을 가진 어구를 이루는 것이고 각 단어의 첫 글자만을 모은 것이다. 그래서 약자만으로는 의미를 알 수 없어도 풀어 쓰면 분명한 의미가 나타난다. 가령 NATO하면 북대서양조약기구로 이해하는 것은 이것이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의 약어이기 때문이다. 보스니아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UN평화군의 중재는 무력하기만 하자 아이들은 NATO를
No Action Talk Only(행동은 없고 말 뿐이다)로 고쳐 쓴 피켓을 흔들어 댔다.
혹시 NEX는 Rolex에서 따온 말인지 모른다. 스위스의 유명한 시계 상표인이 말은 그 자체는 아무런 뜻이 없다. 그러나 추측은 Rol은 시계가 돌아가는
(rolling) 작동을, 그리고 ex는 뛰어남(excellence)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그리고 이 말은 접미사인
ex을 처음으로 쓴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 접미사는 지금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선경건설의 신 건설 개념인 supex가 그 한 예이다. 어쨌거나 우리의 NEX의 ‘자연원료’, ‘고객이 평가한’ 처럼 여러 말을 집어넣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의욕이나 욕심이 과한 데가 있다. 또 신문 광고에 나온 세계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는 대우의 홍보 이름인 ECO-Daewoo가 있다. ECO는 경제(Economy)와 환경(Ecology)과 조화(Consonance)를 추구하는 (조직인) 대우(Organization)를 나타낸다(?)고 한다. 이 깊은 뜻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유공에서 새로 내놓은 ‘고순도’ 휘발유인 Enclean은 그 깊은 뜻에서는 NEX나 Eco-Daewoo를 능가한다. 즉 Enclean이란
“engine clean, environment clean, energy clean의 의미를 함축한 고순도 휘발유입니다”라고 한다. 참으로 함축적인 말이지만, 이 말도 영어 조어법으로는 말이 안 된다. 영어에서 명사나 형용사를 동사화할 때 en-rich처럼 접두사인 en-을 쓰거나, sweeten처럼 접미사인 -en을 쓴다.
그런데 Clean은 ‘깨끗이 하다’는 동사이므로 동사를 동사로 만들면(join을 enjoin으로 할 때처럼) 다른 뜻이 된다. 환경 청결을 영어 어순으로 말하면 clean(up) environment로 해야 하는데 environment clean, engine clean은 환경 청결, 엔진 청소(?) 등 우리말 어순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게다가 영어라면 접두사일 뿐인 en-에 그 많은 것을 담았다고 하니 할 말이 없다. NEX나 Enclean이 말이 되든 안 되든 사업이 번창해서 국제적인 상표로 인식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말을 만들 때는 별의 별 뜻을 집어 넣지만, 한편에서는 멀쩡한 말을 줄이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지하철 3호선의 고속 버스 터미널 역의 표지판에 영어로는 Express Bus Terminal, 우리말로는 고속 터미널로 적혀 있다. 차내 방송도 마찬가지다. 고속으로 달리는 것은 분명히 버스이지 터미널이 아니다. 버스의 두 글자를 적을 공간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다음은 고속 터미널역입니다’라는 방송을 들을 때마다 현기증이 난다.
이 보다 더한 것이 있다. 경인 고속도로의 톨게이트를 지나 서울로 향하면 ‘문주식’(도로 양측에 기둥이 세워진) 표지판 세 개가 연이어 나타난다. 넓고 넓은 표지판에 화살 표시와 함께 김포공항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우리말 밑에 적힌 영어는 Kimpo Air이다. 첫 표지판에는 Air.로 두 번째 세 번째 표지판에는 Air로 되어 있다. 공항 airport를 줄인 모양인데, ‘공항’을 ‘공’으로 줄일 수 없듯이 airport에서 air만 떼낼 수는 없다. 나머지 글자를 적을 공간이 없기는 커녕, 서너 배 크기로 적을 수 있는데 말이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는 도로의 표지판에는 Airport로 되어 있다.
이 보다도 더 기막힌 것이 있다. ‘멘트’라는 방송 전문 용어이다. 어나운스멘트(announcement)를 줄인 말이라고 한다. 발표, 고시의 뜻인데 -ment는 동사를 명사로 만들 때 동사형 뒤에 붙이는 접미사이고, 그 자체는 아무 뜻이 없다. 우리말로는 ‘……하기’의 ‘하기’에나 해당될까. 이것을 쓴 지는 꽤 오래 된 모양이다. 지난번 경주 국제 마라톤 대회를 보도한 신문(조선일보)에도 ‘……결국 KBS 팀은 ②번 직후 ③번
멘트를 반복했고……’라는 대목이 있었다. 수개월 전에 KBS의 ‘아침마당’에 출연한 이 모 기술기획부장의 입에서도 ‘오프닝 멘트’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또 지난 11월 17일 KBS 뉴스광장의 안강민 중수부장과의 기자회견 때에도 누군가가 ‘대선자금에 대해서……
멘트가 있었던가요’라고 물었다. 기가 막힌 것은 이 말이 TV 스크린에 황색으로 나오고, ‘……얘기가 있었던가요’라는 번역 아닌 번역은 녹색으로 비쳐진 것이다. 뭣이 잘못되었어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느낌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빠져 있는 극심한 혼란과 갈등은 언어의 오용과 남용에서 비롯된 것이 적지 않다고 본다. 그럴수록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언론과 방송매체가 언어 사용에 정확을 기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