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재 선생이 사전 편찬에 남긴 이야기
건재 선생이 사전 편찬에 바친 정성과 노력은 외솔 선생이 큰사전 뒤에 발문 형식으로 쓴 “큰사전의 완성을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거친 세파 속에서 이 편찬 사무에 관여한 사람들 가운데 천우의 건재(健在)로써 가장 오랫동안 중심적으로 각고 면려하여 오늘의 성과를 이룬 이는 정인승 님이요, 일제 때로부터 오늘까지 한결같이 일한 이는 권승욱 님이요, 해방 후로부터 오늘까지 편찬에 힘쓴 이는 이강로 님이요, 주장 사전 사무를 맡아 본 이는 유제한 님이다.’ 이 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건재 선생님은 한글 학회의 사전 편찬을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20여 년 동안을 편찬 업무에만 힘쓴 분이다. 글쓴이는 해방 직후 편찬실에서 선생을 모시고 일한 때로부터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한 40년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일을 하였다. 특히 사전 편찬실에서 벌어진 여러 가지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해방 직후에 다시 사전 편찬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제일 중요한 원고가 감쪽같이 없어졌다. 각처로 수소문한 결과 이 원고가 불순분자로 낙인 찍힌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증거물로 채택되어 함흥 검찰청에 압수되었었고, 일차 선고에 불복하여 서울 고등법원에 상고하자 이 원고는 다시 서울로 우송되는 도중에 해방이 되어 서울역의 운송회사의 지하 창고에 있었다. 해방 뒤에 이것을 가까스로 찾아서 다시 편찬 업무에 들어갔고, 이때에 건재 선생께서 다시 사전 편찬 위원장이 되시었다. 그때에 건재 선생은 49세시고, 글쓴이는 28세이었다. 이 뒤로는 언제나 한 편찬실에서 사전 업무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 여름이라고 생각된다. 편찬실에서 일대 연극이 벌어졌다. 원인 제공자는 바로 글쓴이이었다. 사연인즉 이러하다. ‘ㄱ’자 줄 올림말에 ‘궁둥이’라는 낱말이 있다. 이 낱말에 관련되는 것을 조사하여 보니 ‘궁둥이, 궁뎅이, 엉덩이, 엉뎅이, 응덩이, 응뎅이, 방둥이, 방뒹이……’ 들이 있었다. 여기에서 궁둥이 계통의 낱말은 ‘ㄱ’자 줄에서, 엉덩이 계통은 ‘ㅏ’자에서 방둥이 계통은 ‘ㅂ’자에서 각각 카드를 찾아 내어 벌여 놓고, 건재 선생께 해결책을 물었다. 건재 선생의 말씀은 정중하였다. 사전의 주석은 낱말의 본질을 규명하여야 하고 낱말의 본질을 규명하자면, 당연히 분석과 종합의 과정을 거쳐 세밀히 연구 검토한 뒤에라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급하게 굴지 말고 각자가 연구 검토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다시 세 개 계통의 서로의 관계에서 진정한 낱말의 본질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궁둥이, 엉덩이, 방둥이 들의 뜻이 백 퍼센트 같다. 그러니까 동일한 낱말로 보고, 그 중에서 표준말을 가려 내야 한다는 주장과, 이 주장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이 3개 낱말 중 어느 것으로 표준말을 삼아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다시 별개로 남아 있었다. 다른 주장은 이 세 개 낱말은 같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그러므로 별개 낱말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서로의 관련성의 특질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의 근거는 ‘엉덩이’보다 ‘궁둥이’가 그 차지하는 범위가 넓고 더 포괄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지를 벗고 실지 검증에 들어갔다. 심부름하는 여자 아이는 편찬실 밖으로 내쫓고 각자 바지를 벗고,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고 열을 올리었고, 이거야 말로 요절할 진풍경이었다. 궁둥이와 엉덩이가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자리에 닿는 부분이 엉덩이이고, 궁둥이는 엉덩이가 닿는 그 언저리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란한 검증을 겪고 나서도 두 주장은 좀처럼 양보하지 않았다. 이러한 어수선한 과정을 거치는 데도 건재 선생은 결정적인 답안을 내리지 않은 채 이 주장은 다음날로 넘기고 다른 낱말의 주석으로 들어갔다. 며칠이 지난 뒤 이 문제는 다시 불거졌다. 이제는 결말을 내려야 할 때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 두 주장은 다시 격돌하게 되었다. 그날도 두 주장이 서로 맞서서 좀처럼 해결이 될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때 편찬실에서 나이 가장 많고, 서울 태생으로 서울의 풍속을 익히 잘 아시는 동운(東芸) 이중화(李重華) 선생께서 방증 자료를 제시하시었다. 동운 선생께서는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문과를 전공하시고 배재학교에서 27년 동안 영어 교사로 계시면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시는 중 서울 풍속과 고전(古典)에 밝으신 까닭에 조선어학회에서 이 방면을 맡으신 전문가이시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수난 시대에 함흥 감옥에서 영어의 고생을 하시다가 풀려 나오신 뒤에 다시 조선어학회에서 편찬 업무를 보시었고, 육이오 동란 때 이북으로 납치되시어 생사를 모르고 이제까지 지내는 중이다. 이 어른의 방증 사실을 소개한다. 조선조에서는 유교사상이 정신사의 주류를 이루었고, 이 중에서도 남녀에 관한 예절은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였다. 그리하여 ‘남자와 여자가 일곱 살 이상이 되면서부터는 서로 함께 앉거나 대면하지 않는다[男女七歲不同席]’라는 원칙을 철저히 지키었다. 이런 연유에서 양반의 집안에서는 아무리 재정적으로 어려워도 남녀 하인(下人) 한 사람씩은 당연히 두게 되어 있었다. 이런 사회에서 같은 양반이 다른 양반의 집에를 찾아가서는 으례 ‘이리 오너라’하고 부른다. 그러면 이쪽 하인이 ‘예!’하고 나간다. 그러면 어디 사는 아무개 어른이 오셨다고 여쭈워라 하면 하인이 이 말을 받아 그대로 시행하고, 비로소 주인과 손이 대면하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 하인들이 모두 집에 없고 주인의 부인이 혼자 있을 때 손님이 찾아 와서 ‘이리 오너라’하고 불렀을 경우에는, 부인으로서는 난감한 처지에 놓인다. 이럴 경우에는 주인 부인이 하인으로 변신하여 ‘안 계시다고 여쭈워라’하고 대답한다. 이것은 주인의 양반 부인이 동시에 양반집 여자 하인이 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진풍경의 하나이겠으나 당시에는 이런 경우가 흔히 있었다. 당시는 ‘내외(內外)한다’하여 양반집 부인이 외간 남자와 말을 주고 받거나 한 자리에 앉거나 하면 큰 변고로 알던 때이므로 이런 풍습은 필연적으로 생기게 마련이었다. 조선조 후기로 접어들면서 이 풍습이 약간 발전하였다. 부녀자들이 외간 남자와 얼굴을 마주 대해서는 안 될 처지에 혹시 마주치게 되면 슬쩍 돌아서서 요긴한 대화를 한다. 이런 경우 멀리 피하여 정식 내외를 하는 것이 아니고 궁둥이만 돌린다는 뜻에서 ‘궁둥이 내외’란 말이 생기었는데, 이럴 경우에는 반드시 ‘궁둥이 내외’라고만 말하고, ‘엉덩이 내외’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의 속뜻에서는 은연히 ‘궁둥이’와 ‘엉덩이’가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건재 선생께서 판단할 차례가 된 것이다. 건재 선생께서는 이 ‘궁둥이 내외’란 말은 실지로 사용하되 ‘엉덩이 내외’란 말은 쓰지 않는다는 데 근거하여 ‘궁둥이’와 ‘엉덩이’가 다른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다음은 다르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여야 이 설명을 바탕으로 사전 주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건재 선생께서는 ‘궁둥이’는 ‘엉덩이’ 아래로서 앉으면 바닥에 닿는 부분이라 하고, ‘엉덩이’는 ‘볼기의 위에 있는 부분’이라고 하였다. 이쯤 되면 ‘궁둥이’와 ‘엉덩이’ 문제는 그런 대로 해결되었으나 느닷없이 등장한 ‘볼기’와 ‘궁둥이’와의 관계가 또 문제가 되었다. 여러 시간의 논란 끝에 결국 ‘볼기’는 ‘뒤쪽 허리 아래로 허벅다리 위의 좌우쪽으로 살이 두둑한 부분’이라고 결말을 지었다. 이상은 긴 사전 편찬 동안에 일어났던 한 가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사전 편찬에서는 이와 같은 토론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로서는 사전 편찬의 수준이 일반적으로 얕은 데다가 참고할 만한 자료도 거의 없는, 거친 땅을 개간하는 작업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럴 경우 건재 선생께서는 정연한 논리와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판단으로 하나하나를 해결하여 나갔다. 건재 선생께서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한문 서숙에서 한문을 배울 때, 15세 무렵에 서경(書經)의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읽으시었는데, 한문 선생이 풀지 못하는 그 심원한 이론을 똑똑하게 풀어서 그의 고향에서 천재(天才)란 칭찬을 듣던 분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연희전문학교(현재의 연세대학) 1기 출신으로 영어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그 학교를 졸업하시고, 전라도에 있는 고창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계시다가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업무를 맡게 되시었다. 그만큼 한문 영어 수학들에 능통하신 데다 천부적인 논리적 사고와 넘치는 재치로써 그 어려운 사전 편찬의 얽히고 설킨 문제를 빈틈없이 풀어 나가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