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언어와 문학】

方言과 한국문학
− 文學作品에 나타난 方言의 문제 −

金容稷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Ⅰ. 머 리 말

  방언이란 본래 표준어의 상대 개념이다. 근대적인 민족국가가 형성되면서 그 문화 정책의 일환으로 언어의 공식화가 시도되었다. 그 과정에서 공식 언어로 인정되기에 이르지 못한 말들이 생겨났다. 그들을 사투리 또는 方言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언어학이 가리키는 바에 따르면 方言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그 하나는 지역을 기준으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우리말로 치면 서울 지방의 중류이상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 표준어다. 그에 대해서 평안도 지방에만 쓰이는 말이라든가 제주도, 또는 강릉에서만 쓰이는 말이 있다. 이것이 지역을 기준으로 한 方言이다.
  다음 우리 표준어에도 서울 지방의 서민들 말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 있다. ‘돈’을 ‘둔’이라고 한다든가 ‘몰라’를 ‘물라’라고 하는 것들이 그 보기다. 이것은 계층에 관계되는 문제다. 언어학에서는 이것을 사회방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들 社會方言과 함께 지역방언이 방언의 두 유형이다.1)
  

Ⅱ. 어떤 先行 발언 − “文章講話”

  方言은 본래 언어학에서 다루어야 할 과제이다. 그리하여 문학에서는 오랫동안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이것이 문학의 한 화제로 취급된 것은 李泰俊의 “文章講話”에 이르러서다. “文章講話”의 제일 과제는 문장 자체였다. 이 책은 문장을 ‘언어의 기록’ 또는 ‘언어를 문자로 표현한 것’이란 대전제를 세웠다. 方言 이야기는 이런 이 책의 시각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나온 셈이다.2)
  “文章講話”에는 方言에 대한 그 나름의 정의가 나온다. 그에 따르면 方言이란 ‘한 地方에만 쓰는 特色 있는(말소리로나 말투로나) 말을 가리킨다.3) 그러면서 이 책은 方言의 역기능을 문제 삼았다. 여기서는 方言을 표준어의 시각에서 이야기했다. “文章講話”에서는 표준어가 한반도에서 지배적인 힘을 가지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누구나 쉽게 이해, 수용할 수 있는 언어라는 것이다. 문학 작품은 널리 읽혀져야 한다. 그러니까 표준어가 사용되어야 하고 方言은 부차적 의미밖에 못 갖는다. 또한 표준어는 방언과 달리 품위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시인, 작가는 모름지기 ‘言文의 統一’을 위해서도 일조를 해야 한다. 이것이 方言을 부차적인 것으로 돌려야 하는 세 번째 이유다.4)
  이런 도입부와 함께 “文章講話”는 그럼에도 문학에서 方言이 필요한 때도 있다고 보았다. 본래 작품은 그 제재나 배경, 등장 인물을 생동하게 그려내어야 한다. 그를 위해 등장 인물의 대화같은 것에는 方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보기로 “文章講話”는 金東仁의 ‘감자’의 한 부분을 들었다. 그에 대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했다.5)
여기서 만일 복녀 夫妻의 對話를 標準語로 써 보라. 七星門이 나오고, 箕子墓가 나오는 平壤 背景의 人物들로 얼마나 現實感이 없어질 것인가? 作者 자신이 쓰는 말, 즉 地文은 절대로 標準語일 것이나 表現하는 方法으로 引用하는 것은 어느 地方의 사투리든 상관할 바 아니다. (······) 어느 地方에나 方言이 존재하는 한 또 그 地方 人物이나 風情을 記錄하는 한 擬音의 효과로서 文章은 方言을 묘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李泰俊의 선구적 발언에는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얼마간의 한계 같은 것도 포함되어 있다. 우선 여기서는 方言의 효용, 기능이 地方色을 살리는 쪽으로만 파악되어 있다. 이것은 方言의 지역적 측면만을 생각한 결과다. 그러나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方言에는 사회적 시각에서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 있다. 실제 李泰俊은 “文章講話”의 다른 자리에서 이런 단면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것이 洪命憙의 “林巨正”에서 서림과 뱃사공이 주고 받는 말을 이끌어 들인 부분이다. 여기서 李泰俊은 생활 속어란 말을 썼다.6)
作者의 生活語들이 아니라 글 속에 나오는 人物들의 生活 俗語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人物들, 여기 空氣가 진실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李泰俊은 方言을 문제 삼은 자리에서 方言과 계층사이의 상관관계는 명백히 하지 않았다. 이와 함께 “文章講話”가 갖는 또하나의 한계는 그것이 소설 중심인 점이다. 위의 예로 이미 드러난 바와 같이 李泰俊이 검토·논증의 제재로 택한 것은 金東仁의 ‘감자’, 洪命憙의 ‘林巨正’ 등이다. 이들은 모두가 소설, 그것도 근대적 범주에 드는 소설들이다. 그런데 방언을 사용한 작품에는 이들 이외에도 詩가 있다. 특히 이와 비슷한 시기에 우리 문단에서 등장, 활약한 시인들 곧 金素月, 金永郞, 白石 등의 작품 중 어떤 것은 方言과 분리시켜 그것을 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 역시 “文章講話”에는 명쾌하게 지적된 자리가 없다. 따라서 이제부터 우리가 시도하는 논의는 이런 문제들의 인식을 곁드릴 필요가 있다.
  

Ⅲ. 方言과 한국문학 - 근대화의 도정

  
  범박하게 보면 方言이란 언어의 하위 개념이다. 한 민족의 언어가 형성된 경우 方言의 문제는 부수적으로 제기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이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형성된 역사는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쓰여 온 말은 경기 지방의 한국어다. 그 가운데도 그 시대 시대의 중심지역, 주도권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널리 쓰여져 온 말들이 주류를 이루어 온 것이 우리말이다. 그런데 이런 한국어를 方言과 함께 표준어로 구분·정리한 것은 20세기에 접어들고서의 일이다.
  국어정책론의 시각에 따르면 우리 주변어에서 공용어, 공식어에 대한 의식이 대두된 것이 19세기 말경부터라고 한다. 이때에 정부 각 기관의 공식 문서가 한문 전용에서 국한문 혼용으로 개정되었다.7) 이 부수 현상으로 우리말 가운데서 표준이 될 말이 의식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식은 어느 시기까지 의식으로 멈춘 채였다. 우리 주변에서 본격적으로 공식적인 말, 또는 표준어가 사정된 것은 조선어학회의 발족을 기다리고 나서의 일이다.
  조선어학회가 지향한 것은 민족어의 정리, 체계화 사업인 동시에 그 보급이기도 했다. 그 구체적 방법으로 계획된 것이 표기체계의 정비, 통일과 함께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후자와 같은 사업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이 우리말 어휘 가운데 표준어와 사투리를 구분하고 그 음운, 형태, 의미를 명쾌하게 드러내는 일이었다. 이에 조선 어학회는 ’30년대에 접어들고 나서 朝鮮語標準語査定委員會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1936년에는 그 총괄 업적에 해당되는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8) 이렇게 보면 우리 사회에서 표준어, 방언의 전면적인 구획이 이루어진 것은 30년대 중반기부터다. 그러나 이 이전에도 우리 주변에 이들 언어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 古典文學期의 樣相 - 표준어형과 方言型의 文學 문제

  표준어가 사정되기 전의 우리 사회에도 표준어에 해당되는 말이 있었다. 그것이 정치, 행정, 경제적인 중심 지역의 말인 동시에 지배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쓰는 말이었다. 특히 고려를 거쳐 조선왕조 시대에 이르면 이런 유형의 말이 상당히 확충, 신장될 수 있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조선 왕조는 건국과 함께 수부를 서울로 정했다. 또한 이때부터 文武 兩班制度가 확립되고 그 부수 형태로 문화·교양을 익히고 생활하는 계층의 사람들이 생겼다. 이들은 말부터가 품위 있는 것을 쓰고자 했고 그와 병행해서 부단히 지식 습득에 힘썼다. 그리하여 자연 그 말들이 우리 사회의 표준이 되어 갔다.
  그러나 선비들로 일컬어지는 이들 이외에도 우리 사회에는 農·工·商에 종사하는 다수의 서민이 있었다. 이들은 이들 나름의 세계를 이루어 갔고 그 나머지 그들의 말은 상류, 지배 계층의 것과 다르게 되었다. 그 결과 일반 서민에 기반을 둔 문학 작품과 양반 지배 계층의 詩와 文, 소설, 가사에 쓰여지는 말에 차이가 생겼다. 그 구체적인 보기로 들 수 있는 것이 고시조들이다.
(1) 어저 내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더냐
이시랴 하드면 가랴마는 제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노라
   
(2) 어룬박너출이야 에어룬박너출이야
어인 너출이 담을 너머 손을주노
어룬님 이리로 저리로 갈 적에 손을 쥐려더라
  (1)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黃眞伊의 작품이다. 그리고 (2)는 그 화자가 서민출신의 遊女 정도로 생각될 뿐 작자가 未詳이다. 두 작품은 애정을 노래한 점에서 공통된다. 그럼에도 그 말씨는 상당한 차이를 나타낸다. 우선 (1)은 口語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文語 취향이 짙다. 동시에 감정이 어느 정도 절제된 점으로 보아 그 나름의 品格이 있다. 그에 반해서 (2)는 매우 直情的이며 동시에 口語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또한 조선 중기 이후의 언어로 쓰인 듯 보이는 것이 (2)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어룬’, ‘에어룬’라든가 ‘손을 주노’의 어미부분 ‘-주노’, ‘갈 적에’ 등과 같이 당시의 상류 사회에서는 쓰이지 않았을 말씨들이 나타난다. 이런 점으로 보아 한 가지 판단이 가능하다. 그것이 (1)을 표준어형 작품이라고 보아야 하는 데 반해 (2)가 방언형이라고 볼 수 있겠다는 점이다. 단 이때의 구분 기준은 지역적인 것이 아니라 계층적인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1)이 표준어형 작품이라면 (2)가 社會方言에 속하는 말로 이루어진 것이다.
  고전문학기의 전과정을 통해서 표준어형과 방언형 작품의 공존 양상은 오래 지속되었다. 시조의 경우 3장 6구의 구분이 명쾌하게 가능한 平時調 작품들은 대체로 표준어형이었다. 그에 반해서 엇시조, 사설시조에 속하는 작품들에는 사회방언의 단면을 띤 언어가 사용된 작품들이 지배적이다. 또한 소설의 경우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고전소설 가운데서 “九雲夢”, “謝氏南征記”, “玩月會盟宴” 등 가족사계 장편들은 그 언어가 文語의 성격이 더 강하다. 그 말씨 역시 품격이 느껴지고 점잖은 편이어서 상류 사회의 의식 성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서 ‘춘향전’, ‘심청전’, ‘흥부가’ 등 이른바 판소리 사설계 소설들에는 상당히 강하게 방언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때 香丹이 獄에 갓다오더니 저의 아씨 야단 소래에 가삼이 우둔우둔 精神이 월렁월렁 정처업시 들어가서 가만히 살펴보니 전의 書房님이 와겻구나. 엇지 반갑던지 우루룩 들어가서
“香丹이 問安이요. 大監님 問安이 엇더 하옵시며 大夫人 氣體 安寧하옵시며 書房님께서도 遠路에 平安이 行次하시닛가.”
“오냐 고상이 엇더하냐.”
“小女 몸은 無하옵내다. 아씨 아씨 큰아씨. 마오 마오 그리마오. 멀고 먼 千里길에 뉘보랴고 와겨관듸. 이 괄세가 웬일이요. 애기씨가 알으시면 지리 야단이 날 것이니 너머 괄세 마옵소서”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먹던 밥에 풋고초 저리짐채 양념너코 단간장에 냉수 가득떠서 모반 바쳐듸리면서
“더운 진지 할 동안에 시장하신듸 于先 요기하옵소서”
御史道 반기하며
“밥아 너 본제 오래로구나.”
여러 가지를 한데다가 붓더니 수까락 댈 것 없이 손으로 뒤쳐서 한편으로 몰아치더니 맛파람에 개눈 감추덧 하난구나.9)
  이것은 完板本 春香傳 가운데서 李夢龍이 어사가 되어 春香의 집을 찾아간 부분이다. 이때 李夢龍은 암행어사인 자기 신분을 속이고 걸인 행색을 했다. 그러자 화가 난 月梅가 李夢龍을 문전 박대로 내치려 들었다. 그것을 본 香丹이 당황한 가운데 반겨 하면서 李夢龍에게 우선 시장을 면하게 밥상을 드리면서 말을 주고 받은 것이다. 얼핏 보아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香丹은 李夢龍에 대해 깍듯이 공대말을 쓴다. 그러나 李夢龍은 香丹에게 아주 말을 놓고 있다. 이것은 이 부분에 계층적 단면이 포함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와 아울러 여기에는 ‘와겻관듸’, ‘너머 괄세 마옵소서’, ‘짐채’, ‘시장하신듸’와 같이 전라도 지방 방언도 잇달아 나온다.
  고전문학기의 서민소설과 엇시조·사설시조, 기타 잡가 타령들에 방언이 빈번하게 사용된 사정은 그 설명이 별로 어렵지 않다. 이들 양식을 읽고 즐기는 사람들은 대체로 農·工·商에 종사하는 일반 서민들이었다. 그들이 읽고 즐길 수 있는 인간과 세계가 方言에 직결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과 달라서 조선 왕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지배 계층인 양반, 士大夫들에게 공식적인 세계란 점잖으며 品位를 지키는 일들이었다. 그 나머지 그들은 공식용어에 속하는 표준어형 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文學에서 이런 양분 형태의 언어 사용은 조선왕조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고전문학기는 표준어형 언어와 方言의 병행기, 내지 대립 공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개화기 文學 - 통합형의 成立

  19세기 말에 이르자 우리 사회의 언어 생활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 상황이 몰아닥쳤다. 그것이 西歐와 亞西歐 日本의 충격에 의해 이루어진 개항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日本과 수교를 하면서 시작된 우리 나라의 개국은 그 후 곧 英·美·露·獨·佛·伊 등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갖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그에 따라 서구 열강의 문화적 충격이 가해진 것은 널리 알려진 대로다. 이런 사태 속에서 우리 사회는 國語國字問題, 또는 語文政策에도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西歐的 衝擊을 받으면서 우리 사회에 급선무의 과제로 대두된 일이 있었다. 그것이 서구 열강의 침략 의도에 맞서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이었다. 反帝·自主獨立의 의지와 전략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낡은 허울을 벗고 近代化를 이루어 나가야 했다. 反封建의 기능적 수행 없이 反帝·自主富强의 큰 길이 열릴 수 없었던 것이다.10) 그런데 反封建, 近代化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文化的 개혁이 뒤따라야 했다. 그리고 文化的 개혁의 중요 항목 가운데 하나가 言語 文字上의 개혁이었다. 그 무렵까지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은 漢字·漢文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이것을 타파하여 모국어 중심의 언어 문자 생활을 하지 않고는 주체적 문화가 구축될 수 없었다. 주체적 문화, 또는 민족의식에 입각한 文化 政策의 수립 없이 反帝·反封建을 전제로 한 우리 사회의 근대화는 일부 지도자들의 탁상공론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의 요구가 대두되자 우리 주변에서는 곧 두 가지 대응 태세가 마련되었다. 그 하나는 정부가 주도한 국어국자 사용의 공식화이며 그 연구, 보급 기도였다. 널리 알려진 대로 1894년에 이루어진 것이 우리 사회의 근대화를 전면적으로 시도하고자 한 甲午更張이다. 이때에 정부의 공식 문서가 漢文에서 국문 병용 내지 국한문 혼용체제로 바뀌었다.11)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우리 정부가 인정·권장한 각급 학교 곧 신교육 기관은 그 교과서를 국한문을 사용해서 엮도록 했다. 그와 함께 1907년에는 내각의 한 기구인 學部에 國文硏究所를 설치하여 국어국자의 근대적인 연구, 체계화를 기한 바도 있다.12)
  한편 개항 직후부터 일어난 우리 사회의 국어국자 운동은 그 한 갈래로 민간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 있다. 조선 왕조 말기에는 우리 사회 일각에서 외래 종교인 기독교가 상당한 기반을 갖게 되었다. 또한 서민들 사이에는 동학 역시 적지 않은 세력을 이룬 터이다. 그런데 이들 종교는 유교나 불교와 달라서 그 교리서, 또는 경전을 순한글, 또는 국한문으로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후 이런 대세를 더욱 가속화시킨 것이 일부 개화론자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화론자란 근대화를 위해 서구 수용을 주장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정부의 공식적 승인이 없는 시기에 선구적으로 국어국자의 정리·체계화를 시도했고 그를 통해서 민족문화의 표기 체계를 확정케 하려고 노력했다. 그 구체적 보기가 되는 것들이 1895년 兪吉濬에 의한 “朝鮮文典” 편찬, “西遊見聞” 발간, 1896년 周時經이 주도한 國文同式會의 발족이다. 또한 이와 같은 해에는 그 표기가 순한글로 이루어진 “독립신문”이 나왔고 이어 1898년에는 그 역시 한글판이 주가 된 “대한매일신보”도 나왔다.
  이들 일련의 움직임은 우리 사회의 언어 생활을 뿌리채 바꾸어 놓았다. 이 무렵 이전의 우리 사회를 지배한 언어 생활은 漢字 우위 내지 지배형이었다. 그것을 국어 주도형으로 바꾸어 낸 것이다. 그와 아울러 文學 쪽에서는 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즉 그 이전까지 우리 文學 作品은 거의 모두가 文語體 文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이 개항기 이후 口語體 중심 체제로 이행된 것이다. 또한 이때에 비로소 古典文學期를 지배한 언어 사용의 이중 양상 내지 병행 형태가 극복되기 시작했다.
평양성외 모란봉에러지저녁볏은 누엿누엿너머가 져희빗을 붓드러고 시푼 마에 붓드러고 숨이 턱에 단드시 갈팡질팡 부인이 나히 삼심이되락말락고 얼골은 분을고 넌드시 힌 얼골이인졍업시겁게 가을볏에 얼골이 익어셔 션으 빗이 되고 거름거리 허동지동 옷은 흘러려서 젓가슴이 다 드러고 치마락은헤 질질려서 거름을 건넌로 치마가 발피니 그 부인은 아무리 급거름거리를도 멀리 가지도 못고 허동거리기만다.
- “血의 淚”-13)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따린다 부슨다 문허바린다.
泰山 같은 높은 뫼 집채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슨다 문허바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모것도 두려움 업서
陸上에서 아모런 힘과 權을 부리던 者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모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썩, 처-ㄹ썩, 튜르릉, 쏴.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者가
只今까지 있거던 통기하고 나서 보아라.
秦始皇, 나팔륜 너희들이냐
누구누구 누구냐 너희 亦是 내게는 굽히든다.
나허구 겨룰이 잇건 오나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룽, 꽉.
- ‘海에게서 少年에게’-14)
  그 소재들로 보아서 “血의 淚”는 “九雲夢”이나 “謝氏南征記”와는 다르다. 고전문학기의 상류 사회 소설에서 등장 인물은 예외없이 선비이거나 才子佳人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血의 淚”에서는 평균 수준의 생활을 하는 서민으로 바뀌었다. 또한 “血의 淚” 위의 부분에 나오는 등장 인물의 성격도 고전문학기의 상류 사회 소설과는 크게 다르다. 여기서 여자 주인공은 옷매무새가 크게 흐트러져 있다. 특히 젖가슴조차가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작품의 의식이 체면만을 생각하고 品格 유지에 힘쓰는 상류 사회의 그것과는 다름을 뜻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 “血의 淚”가 “春香傳”이나 “沈淸傳”, “興甫歌” 등 판소리 사설계 소설처럼 서민대중의 언어와 말씨에 그쳐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소설 문장은 등장 인물을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밖에 유별나게 그 말씨가 비속하다든가 훤잡스럽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나타나지 않는다. 즉 이 작품은 제재에 있어서 서민적이다. 그러나 그 문장이나 문체, 나아가서는 언어의 쓰임에 있어서는 그 나름의 格式이 갖추어져 있다. 이것은 이 작품이 방언형 소설과 표준어형 표현을 기능적으로 수용, 조화시킨 것임을 뜻한다.
  ‘海에게서 少年에게’에도 위와 같은 이야기가 거의 그대로 되풀이될 수 있다. 律文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엇시조 사설시조나 가사, 잡가 등에 대비될 수 있을 것이다. 엇시조나 사설시조, 장가의 하위 개념인 서민 가사 등에는 한 가지 강한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우선 敍景에 그치거나 아니면 私的인 세계를 읊조린다. 또한 그 말씨가 표준어와는 거리를 가지는 점도 이미 지적된 바와 같다. 그러나 ‘海에게서 少年에게’는 이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소재로 보아서 이 작품이 점잖기를 기했다고 볼 수는 없다. 여기서 작품의 주체가 되고 있는 것은 바다다. 그 바다는 의인화되어서 우리 자신처럼 말을 한다. 그런데 말투는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에 집약되어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일상적이며 서민적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 작품의 의식 가운데 한 가닥이 서민의 편에 그 닻이 내려져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의 골간이 되고 있는 생각은 서민적인데 그치지 않았다. 여기서 바다는 少年의 심상을 지닌 인격적 실체다. 그리고 그 마음 바닥에는 적어도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려는 의욕이 깔려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朝鮮王朝時代에 양산된 서민 시가와는 달리 이 작품이 공변된 언어의 세계를 지향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개항기 이후의 문학, 곧 근대문학기에 접어들면서 우리 문학은 方言型과 標準語型의 대립, 병행 상태를 극복하게 되었다.
  개항기의 한국문학이 재빨리 방언형과 표준어형을 통합, 극복해 간 것은 민족문화사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의의가 매우 큰 일이었다. 본래 올바른 문학이란 지역이나 계층을 통괄하는 감각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개항기의 우리 文學이 그것을 이루어 낸 것이다. 다음 여기에 참여한 人力을 살피면 더욱 재미 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우선 고전문학기의 한국문학이 지닌 편향성을 극복한 文人들은 예외없이 개화론자였다. 또한 그 대부분은 近畿地方이 아니면 西北地方 출신으로 士林階層이 아닌 中人階層, 또는 몰락 양반의 후예였다. 이 경우 우리는 신소설 작가로서 李人稙, 李海朝 등을 들 수 있고, 그 후 우리 문단을 주도한 李光洙, 崔南善, 주요한, 金億, 金東仁, 廉想涉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이들은 대개 서울에서 태어났거나 西北 出身들인 것이다. 더욱이 이들 가운데 保守士林家門에서 태어난 사람은 거의 없다.15)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석은 별로 어렵지 않다. 본래 서구적 충격에 접했을 때 우리 주변의 대부분 士族들은 그것이 오랑캐 문화의 상륙이라고 단죄해 말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오랫동안 漢文만이 글이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왔다. 그 나머지 개항 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국어국자운동 역시 거부·배제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 경우의 좋은 보기가 되는 것이 黃梅泉의 생각이다.16)
요즈음 서울의 관보와 지방의 문서가 모두 전서와 언문을 뒤섞어 쓰고 있다. 대개 일본의 글법을 본뜬 것이다. 우리 나라 방언으로는 예부터 중국 글을 진서라고 일컫고 훈민정음을 언문이라고 하였으며 통틀어 진언이라고 말해 왔다. 갑오경장 후부터 시무자가 성히 언문을 쳐들어 언문을 국문이라 하고 별도로 진서를 멀리하여 가로되 한문이라고 일컬었다. 이에 국한문 석 자가 드디어 방언이 되고, 언문의 일컬음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처럼 保守士林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대두된 言文改革 자체를 배제했다. 그런 이상 개항의 산물인 통합형 문학생산이 가능했을 리가 없다. 다음 근대문학 초창기의 시인·작가가 대부분 近畿와 西方地方에서 나온 사정도 이와 비슷하다. 조선 왕조 말기에 이르기까지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 등은 保守士林들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산 고장이다. 이들은 經學 일변도의 세계를 살고 있었다. 그런 나머지 서구 수용을 뜻하는 신학문과 신문화를 받아들이는 일에도 상당히 지각된 상태에서 참여했다. 그 결과 이때의 文學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Ⅳ. 현대문학과 方言

  
  비단 문학 작품에 국한되지 않았다. 개화기 이후 한국문학은 그 기반이 구축되면서 곧 우리 사회의 언어, 문자 활동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우리 민족은 1900년대 중반기부터 日帝에 의해 주권이 침탈당했다. 日帝는 植民地 體制를 구축하자 그와 함께 우리 민족의 노예화, 말살을 기도했다. 그리고 그 방편으로 우리 민족의 언어 활동에도 갖가지 박해, 탄압을 가했다. 그런 서슬이어서 우리 사회는 공공기구로서 국어국자의 연구, 보급 기관을 가질 수 없었다. 당연한 사태의 귀결로 표준어 사정, 맞춤법의 정리, 체계화 사업도 정돈 상태에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1) 文學語의 의의와 역할

  우리 근대문학은 정치적 역세 속에서 형성·전개된 것이다. 日帝 植民地 체제하에서 문학의 표현 매체를 마음대로 갈고 다듬을 자유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역풍기에 우리 문학은 아주 줄기차게 우리말을 세련, 보급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고대문학 초창기에는 아직 구어체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 고전시가와 소설들은 대체로 文語體였는데 그것으로는 현대소설의 본령인 사실성을 살릴 길이 없었다. 또한 현대시는 外型律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럼에도 詩인 이상 근대 이후의 詩는 가락을 지녀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구투를 벗어난 말씨, 새로운 말과 그 조직으로 가락을 살릴 수밖에 없는 것이 현대시였다. 이것은 개항기 이후의 한국문학이 첫 과제로 새로운 언어를 쓸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출발한 것임을 뜻한다.
  근대문학 초창기의 우리 시인·작가들은 모두 이런 과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金東仁은 훗날 이에 대해서 ‘약한 자의 슬픔’을 쓸 때 일을 들어 다음과 같이 썼다.17)
‘가정교사 강 엘리자벳은 가리킴을 끝내고 자기 방으로 들어왔다’

이것이 나의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의 첫머리인데 거기 계속되는 둘째 구에서부터 벌써 막혀 버렸다.
  金東仁의 이 글은 그가 작품을 쓰기 위해 새로운 어법을 어떻게 개척해 나갔는가를 밝힌 부분으로 이어진다. 그에 따르면 그는 삼인칭 대명사로 ‘그’를 처음 썼고 과거사인 ‘왔다’, ‘-ㅆ다’도 개척해 사용한 공로자이다. 또한 그 무렵까지의 우리 문장에서 종결 어미인 ‘-라’ ‘-러라’를 ‘-다’ ‘이다’로 쓴 것도 그다. 18) 이것을 金東仁은 표준어에 대한 감각으로 설명했다.19)
······ 나는 자라난 가정이 매우 엄격하여 집안의 하인배까지도 막말을 집안에서 못쓰게 하여 어려서 배운 말이 아주 부족한데다 열다섯 살에 외국에 건너가 공부하니만치 조선말의 기초 지식부터 부족하였고 게다가 표준어(경기말)의 지식은 예수교 성경에서 배운 것 뿐이라 어휘에 막히면 그 난관을 뚫기는 아주 곤란하였다. 썩 뒤의 일이지만 그때 독신이던 나더러 廉想涉이 경기도 마누라를 아내 삼으라 권한 일이 있다. 조선어(표준어)를 좀더 능란하게 배울 필요상 스승으로 경기도 출신 아내를 얻으라는 것이다.
  실제 李光洙, 金東仁, 주요한, 金億 등이 작품 활동을 하기 전에는 우리말에서 표준어와 방언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 무렵 우리 주변에는 동시대의 감각을 가지면서 여러 독자 또는 대중에게 신선하게 느껴질 말과 문장도 확립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시인·작가들이 암중 모색으로 대중에게 공식화될 수 있는 말을 골라 쓰고 그런 문장을 만들어 나갔다.
  우리 文人들의 이런 시도는 우리 語文의 근대화 표준화에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李光洙, 金東仁, 주요한, 金億 등이 등장 활약할 때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詩와 小說은 아주 강한 전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는 아직 영화·연극이 일반화되기 전이었고 라디오도 보급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었으므로 일반 대중에게는 문학 작품이 가장 큰 문화 교양의 발전체였고 세계 인식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또한 초창기부터 우리 문학은 거기 동원된 人力의 수준이 단연 다른 분야를 압도했다. 비근한 예로 근대문학의 개척자인 崔南善, 李光洙 등은 당시 우리 사회의 정상급 才士인 동시에 지성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쓰는 시와 소설이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막대했다.
  1910년대 말에서 20년대 초두에 걸친 시인·작가들의 언어를 범박하게 보면 文學語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드러난 바 근대문학 초창기의 우리 文人들은 아직 語文의 표준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작품 활동에 손을 대었다. 그 결과 여러 부분에서 시행착오를 빚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거듭된 노력과 시도의 결과 이들은 우리말의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20) 특히 이들은 낡은 어투를 버리고 근대적 감각을 지니는 말을 쓰기에 힘썼다. 또한 지방색이 짙거나 계층에 국한된 말을 버리고 공변성이 있는 말을 쓰는 데는 더욱 큰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이들에 의한 文學語는 우리말과 글의 근대화와 표준화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기게 된 것이다.21)
  

  (2) 현대소설과 방언

  초창기의 한국 근대 문단이 언어와 문장의 표준화에 고심한 점은 이미 밝힌 바와 같다. 이런 상태는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1920년대 초반을 거쳐 중반기에 접어들자 우리 시인, 작가들은 이미 대중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말로 이루어진 작품을 제작·발표하게 되었다. 이에는 물론 유능한 시인·작가들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일찍부터 우리 어문의 정리, 체계화와 교육·보급을 뜻한 조선어학회의 공헌도 있었다. 조선어학회는 周時經의 조선어강습원에 그 뿌리를 둔다. 그 문하에서 조선어문의 이론과 애정을 배운 李秉岐·權悳奎, 任暻宰 등이 1921년 11월에 조선어연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모임은 그후 우리 사회의 조선어문 연구자를 총망라한 조선어학회로 발전되었다.22) 그리고 이 단체는 1920년대 초두부터 여러 학교와 문화단체 출판물들의 자문에 응해서 우리 語文의 교육, 보급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음 우리 문학의 표준 표현매체 개발은 곧 그에 부수된 또하나의 수익을 가져왔다. 그것이 방언의 이용과 그를 통한 예술성의 확충이었다. 이런 성과가 매우 可視的으로 나타난 것이 소설의 경우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근대소설의 중심 과제는 人物의 묘사이며 성격의 창조에 있다. 또한 근대소설의 기본 요체는 그 사실성 추구에 있다. 이런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地文보다 대화가 더 중요하다. 地文은 그 성격상 아무래도 해설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불가피하게 사실성의 전제 조건인 객관성이 침식된다. 그에 반해서 대화는 그 자체가 제3 자의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대화가 근대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런데 대화를 통한 성격 부각을 위해 가장 손쉽게 이용될 수 있는 기법이 있다. 그것이 方言을 이용하는 길이다. 우리 근대작가가 이런 사실을 인식한 자취는 이미 앞에서 보기로 제시된 바와 같다. 다시 한 번 되풀이하면 金東仁은 평양지방의 사투리를 씀으로써 ‘감자’의 여자 주인공 복녀의 인물과 성격을 매우 생생하게 제시했다. 그런가하면 洪命憙는 ‘林巨正’의 한 부분에서 특수 계층이 쓰는 말을 등장 인물이 말하도록 했다. 그것으로 두메산골 출신의 투박한 모습이 기능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런 방언의 이용은 우리 소설사를 살피면 그 시기가 1920년대 초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때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 金東仁이다. 그는 1921년 그가 경영한 “創造”에 ‘배따라기’를 발표했다. ‘배따라기’의 주인공은 배따라기를 구성지게 잘 부르는 평안도 영유 사람이다.
좋은 눈이었다. 바다의 넓고 큼이 유감 없이 그의 눈에 나타나 있다. 그는 뱃사람이라 나는 직감하였다.
“고향이 영유요?”
“예, 머, 영유서 나기는 했디만 한 이십 년 영윤 가보디 않았어요.”
“왜 이십 년씩 고향에 안 가요?”
“사람의 일이라니 마음대로 됩데까?”
그는 왜 그러는지 한숨을 짓는다.
“거저 운명이 데일 힘셉디다.”23)
  
  훗날 金東仁은 자기 자신의 소설을 주로 문장상의 기여로 이야기했다. 그에 따르면 그는 李仁稙과 李海朝가 길을 열고 李光洙가 주추를 놓은 구어체를 완성시켰다는 것이다.24) 이때 그가 예로 든 것은 ‘尹光浩’, ‘少年의 悲哀’ 등 李光洙의 초기 단편들이다. 그들과 그의 초기 단편인 ‘약한 자의 슬픔’, ‘遺書’, ‘明文’, ‘감자’를 대비시킨 것이다. 실제 이들 작품은 ‘尹光浩’나 ‘少年의 悲哀’에 비해 두드러지게 구어체로 쓰여졌다. 그런 점으로 보아 이런 金東仁의 발언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의의를 가지는 것이 초기 작품에서 그가 시도한 인물묘사다. ‘배따라기’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의 작중 인물은 그 말과 행동을 통해 그 이전의 다른 작가가 갖지 못한 성격으로 부조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도 한국현대소설사에 끼친 가장 뚜렷한 그의 공적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케 하는데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한 것이 있다. 그것이 대화에서 상당히 두드러지게 방언을 사용케 한 것이다.
  金東仁에 의해 본격화된 방언 수용은 그 후 여러 작가에 의해 계승·확충되었다. 그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그 다음을 이어 우리 문단에 나타난 작가들은 廉想涉, 玄鎭健, 羅稻香 등이다.25) 그리고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이 金基鎭, 朴英熙 등의 신경향파와 崔曙海, 趙明熙, 李箕永 등의 카프 맹원에 속하는 작가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가 다소간 방언을 이용한 작품을 남겼다.
  한편 여기서는 좀 뜻밖의 현상도 나타난다. 金東仁 이후의 우리 문단에서 주도권을 잡은 사람들은 카프계였다. 이들은 의식적으로 계층 의식을 작품에 살리고자 했다. 그럼에도 작품의 실제에서 카프측 작가의 작품에는 방언, 특히 사회방언이 의도적으로 쓰인 예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예는 도리어 예술파에 속하는 작가들에서 보다 명백하게 검출된다. 그 구체적 보기로 들 수 있는 것이 “川邊風景”이다.
손님이 넥타이 매던 손을 멈추고 그가 가리치는 곳을 내다 보느라면, 따는 낡은 노동복에 때묻은 나이트캪을 쓰고, 아무렇게나 막되어 먹은 놈이 덜렁덜렁 빨래터 사다리를 올라본다.
“저거 땅군 아니냐?”
“땅꾼요?”
“거지 대장 말야.”
“저건 둘째 대장에요. 근데 지금 어딜 가는지 아시겠어요?”
“인석, 그걸 내가 으떻게 아니?······”
그러면 소년은 가장 자랑스러이
“인제 보세요, 저어 다리께로 갈테뇨.”
“어디······ 참, 따는 가게루 들어가는구나. 저눔이 담밸사러 갔을까?”26)
  여기 나오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소년이다. 그가 서울 토박이라는 것은 앞에 제시된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그 증거가 되는 것이 ‘그런데’를 ‘근데’라고 하고 ‘갈테니까?’ 해야 될 말을 ‘갈테뇨’로 한 것들이다. 또한 그와 말을 주고 받는 어른 역시 ‘이녀석’ 할 말을 ‘인석’으로 ‘저놈이’ 할 것을 ‘저눔이’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상당히 의도적인 方言의 사용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이 작품의 작자와 견주어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능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 작품의 작자는 朴泰遠이다. 朴泰遠은 1930년대의 우리 문단에 등장한 작가로 그가 확보한 문학사상 의의는 金東仁, 廉想涉과 카프계에 의해 구축된 사실주의 소설을 지양 극복한 데에 있었다. 또한 사실주의 소설을 지양, 극복한 기법이 독특했다. 사실주의 소설의 기본축이 된 것은 인물, 성격과 플롯을 인과 관계로 묶는 일이었다. 특히 등장 인물의 행동에는 그 동기에 현실성이 있어야 했다. 많은 사실주의 작가의 작품들이 생동하는 인간, 개성적인 인간을 등장 활약시키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0년대의 신세대 작가인 朴泰遠은 소설을 여기에서 탈피시켰다. 그가 작품에서 노린 것은 등장 인물의 성격, 행동의 부조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작품의 무대 배경이나 분위기를 그려 나갔다. 그의 작품 무대, 배경이 된 것은 대개 도시였다. 그리하여 거기 사는 서민들의 일상적 생활이 객관적으로 묘사되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朴泰遠은 카메라로 거리 풍경을 찍어 가는 입장에서 그의 소설을 쓴 것이다. 이런 소설을 세태소설, 또는 배경, 분위기 소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유별나게 등장인물을 부각시킬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런 기법은 카프계 작가들이 써야 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카프가 노린 것은 文學을 통한 계급 타파였다. 계급 타파를 위해서 등장 인물의 계급적 특성이 잘 부각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그런 작품의 독자들이 등장 인물과 자신을 일체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카프계 작가들은 이 분야에 소극적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 반대 입장에서 작품활동을 한 朴泰遠이 方言의 구사를 통해 그런 단면을 드러낸다.
  이에 대한 설명은 창작 태도에 대한 규명으로 가능하다. 카프는 그 강한 속성으로 목적의식 일체의 단면이 강했다. 그들은 文學이 유물변증법적 세계관의 선전판이라는데 급급했다. 그 나머지 기법에 대한 인식이 둔화, 희석화된 것이다. 그런 결과 등장 인물의 개성이나 성격 부각의 한 방편인 方言 使用에도 장님이 된 것이다. 그러나 朴泰遠은 넓은 의미에서 예술파였다. 예술파는 文學的 意匠에 예각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등장 인물의 대화도 개성적이며 참신한 각도에서 써야 했다. “川邊風景”으로 대표되는 30年代의 순수소설에 方言이 기능적으로 쓰인 까닭은 여기에 연유한다.
  
  

  (3) 方言과 현대시

  한국 현대시와 方言의 상관관계는 소설의 경우보다 더욱 밀착된 상태로 나타난다. 이미 살핀 바와 같이 소설은 方言을 대개 등장 인물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나 무대, 배경,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사용한다. 그에 반해서 詩는 모든 언어를 형태, 구조를 살리는데 동원해야 한다. 특히, 현대시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그 심상이라든가 운율의 기능적인 확보 여부다. 그런데 方言의 효과적인 사용으로 그것이 가능한 사례가 있는 것이다.
  金永郞의 ‘언덕에 바로누어’는 본래 제목이 ‘어덕에 바로누어’였다.27) 여기 나오는 ‘어덕’은 경남과 충남 일부에도 쓰이지만 주로 전라남도 쪽에서 많이 사용되는 方言이다. 본래 金永郞의 초기시는 음악성에 치중했고, 부드러운 가락에 영롱한 심상을 곁드린 것이 특색이다. 그런데 그런 작품을 표준어만으로 쓰면 그 의미 구조가 너무 투명해 버릴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金永郞이 의도적으로 方言을 쓴 까닭이 드러나는 셈이다. 이어 이 작품 2연은 다음과 같다.
이 몸이 서러운줄/ 어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우슴/ 한때라도 업드라냐// 아슬한 하날 아래/ 귀여운맘 질기운맘/ 내눈은 감기엿대 감기엿대
  여기에도 金永郞의 출신지역 方言이 몇 개가 나온다. ‘업드라냐’라든가 ‘질기운맘’과 ‘감기엿대’의 어미인 ‘-엿대’가 그것이다. 이것으로 이 詩는 같은 무렵의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가락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方言과 그에 곁드린 地域語에 근거한 음성 구조 확보다.
  
   ① 金素月의 경우
  金素月은 20년대 초두 우리 시단에 등장해서 활약하다가 1934년에 타계했다. 그러니까 아직 조선어학회의 표준어 사정이 완성되어 일반에게 두루 알려지기 전에 작고한 셈이다. 이 무렵 우리 詩人 가운데는 方言과 표준어의 구분이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작품을 쓴 예도 있었다. 가령 韓龍雲은 그의 “님의 沈黙” 서시에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는 행을 남겼다.28) 여기서 ‘기룬’이란 충청도 방언으로 ‘그리운’의 뜻을 가진다. 이 作品의 文脈으로 보아 특별히 음성 구조를 살릴 의도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런 점으로 보아 이것은 언어감각의 미숙에서 빚어진 方言 사용의 예가 될 것이다.
  또한 李陸史는 그의 作品들 여러 곳에서 安東地方의 方言을 썼다. 특히 ‘曠野’의 허두는 ‘어데 닭우는 소리 있었으랴’로 되어 있다. 여기서 ‘어데’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方言의 예가 된다. 그 하나가 ‘어찌’라는 부정어형 부사이며 하나가 ‘어디에’로 해석이 가능한 의문형 부사일 수 있는 점이다.29) 물론 이런 방언 사용이 이들 시인의 작품들의 질적 수준에 근본적인 파탄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그러나 詩는 범박하게 보아도 고도로 숙련된 상태에서 언어를 사용할 것이 요구되는 예술이다. 그런 이상 이런 오용형 방언 사용이 詩作에서 권장될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역도 또한 참이다. 즉 詩에서 方言은 금기사항은 아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을 사용하는 경우 거기에는 작품의 형태, 구조를 위한 배려가 충분히 검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각도에서 보아 주목에 값하는 것이 金素月이다. 본래 金素月이 우리에게 끼친 詩의 숫자는 약 200여 편 안팎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 생전에 그가 남긴 시집이 “진달래꽃”이다. 이 시집에 모두 127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의 작품은 그의 사후에 金億이 “素月詩抄”를 내면서 “진달래꽃” 이후의 일부가 추가되었다. 그와 아울러 두 시집에서 제외된 것들도 있다. 이들은 그 숫자가 85편에 달한다. 또한 여기에는 번역시가 포함되지 않았다. 素月이 번역한 것은 주로 漢詩다. 그런데 素月은 그 번역에서 상당히 의역의 길을 택했고 아울러 그 말도 창작시 못지않게 개성적으로 사용했다. 그리하여 方言을 문제삼는 자리에서는 그 숫자까지가 계산될 필요가 있다. 최근에 이루어진 한 조사에 의하면 그 숫자가 16편이다.30) 이들을 합하면 素月이 우리에게 끼친 詩의 숫자가 230여편 안팎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들 작품에서 素月이 사용한 方言 내지 방언에 준하는 말들이 800여 개에 달하는 점이다. 이 숫자는 素月詩에 쓰인 어휘 해석을 위해 추출된 것이다. 실제 그는 동일 方言을 다른 작품에도 거듭 쓴 경우가 있다.
  가령 ‘그무리다’, ‘그무러지다’와 같은 方言은 ‘서울밤’, ‘여름의 달밤’, ‘蘇小小의 무덤’ 등에 되풀이해서 썼다. 또한 ‘사무치다’는 ‘밤’,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오는 밤’ 등 작품에 거듭 쓰였다.31) 이로 미루어 보면 素月의 詩에는 작품마다 평균 2개 이상의 方言 내지 준방언이라고 할 말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素月의 詩를 보면 또하나 인상적인 것이 있다. 그것이 方言을 통해 그의 詩가 얻어낸 詩的 效果다. 그의 詩는 단순하게 方言을 쓰는 데 그치지 않았다. 작품의 형태, 구조가 그를 통해서 생동하게 되고 素月詩 나름의 특색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이런 경우의 좋은 보기가 되는 것에 ‘山’이 있다. 이 작품은 그 화자가 ‘三水甲山’으로 나타나는 바 궁벽한 산간에 그 자신을 놓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十五年 정분을 못닛겠네’라고 할 정도로 살뜰한 그리움을 지닌 것이다. 이 작품 전반부는 다음과 같다.
山새도 오리나무
우헤서 운다.
山새는 왜우노, 시메山골
嶺넘어 갈나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나리네 와서 덥피네
오늘도 하롯길
七八十里
도라섯서 六十里는 가기도 햇소. “진달래꽃”32)
  
  여기 方言에 해당되는 말은 ‘시메山골’이다. 실제로 이 말은 ‘두메 山골’과 함께 현재에 이르기까지 定州地方에서 사용된다는 것이다.33) 두메 산골은 방언이 아니라 표준어다. 표준어를 두고 방언을 쓴 것이 金素月의 金素月다운 점이다. 여기서 화자가 지닌 감정은 그리움이며 그와 같은 짝을 이룬 고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노래하기 위해 素月은 대체로 두 음보를 한 행으로 하는 詩를 썼다. 뿐만 아니라 이 詩의 허두에는 객관적 상관물에 해당되는 것도 나타난다. 오리나무 위에서 우는 산새가 그것이다. 그 산새를 영넘어 갈려고 우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이 작품은 화자의 그리움을 하나의 객체, 그것도 선명한 윤곽으로 잡히는 객관적 상관물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개개의 의장, 곧 二步格과 객관적 상관물을 통한 선명한 심상 제시는 이 詩를 지나치게 명증스러운 것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素月의 詩에는 그 이상의 것, 곧 고독이나 그리움을 바닥에 깐 토속적 정조와 가락이 빚어진 것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限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세계를 빚어내기 위해서는 표준어인 ‘두메 山골’이 쓰일 수 없었다. 그럴 경우 우리는 향토색이나 土俗性을 전혀 느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메 山골’이란 方言은 그것을 보완케 하면서 동시에 素月의 詩만이 갖는 어조와 가락을 빚어 내게 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가능한 작품에 ‘접동새’가 있다.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津頭江 가람에 살든 누나는
津頭江 압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 나라
먼 뒤쪽의
津頭江 가람에 살든 누나는
이붓어미 싀샘에 죽엇습니다.

누나라고 불너보랴
오오 불설워
싀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엇습니다.

아웁이나 남아되든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니저 참아못니저
夜三更 남다자는 밤이 깁프면
이山 저山 올마가며 슬피웁니다.34)
  이 작품은 素月의 것으로 보아서는 특이하다고 할 일로 배경 설화를 지닌다. 여기서 접동새는 원통하게 죽은 소녀와 일체화되어 있다. 그런 소녀는 계모의 학대 속에서 원통하게 목숨을 잃은 우리 민담의 주인공이다. 한편 방언이란 시각에서 보면 가장 주목되어야 할 것이 ‘아우래비’다. 이 말 자체는 方言이라고 보기 보다는 素月 나름의 造語에 해당되는 언어의 사용이다. 그럼에도 이 말이 方言에 직결된 점은 5연에 나오는 ‘오랩동생’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랩동생’은 ‘접동새’, ‘이붓어미’, ‘싀샘’, ‘아웁’, ‘불설워’ 등과 함께 平北地方 方言으로 판정된 말들이다.35) 그리고 ‘아우래비’는 ‘아홉’과 ‘오래비’ 곧 오빠의 합성 형태라는 것이다.36)   본래 서정시는 私的인 감정에서 출발한다. 私的인 세계를 직정적으로 노래하면 그것은 개인의 넋두리에 떨어질 뿐 詩가 되지 않는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시인들은 그의 작품에 독자를 이끌어들일 수 있는 의장 내지 기법을 구사한다. 그것이 심상의 제시라든가 언어의 상징적 기능 확충일 수도 있고 음성구조에 대한 전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素月은 어느 편인가 하면 후자에서 본령을 발휘한 시인이다.
  한편 서정시에서 사건이라든가 이야기를 등장시키는 일은 대체로 禁忌事項이다. 서정시는 그 이전에 음악적 의장, 곧 가락이나 그 심상 제시로 가능한 분위기를 통해 작품성을 살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접동새’는 배경설화, 곧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중화시키지 않을 경우 ‘접동새’는 그 역점이 이야기 쪽에 쏠릴 수 있다. 그리하여 서정시가 요구하는 가락을 빚어낼 수 없을 가능성도 있다. 素月은 이것을 중화시키기 위해서 매우 독특한 기법을 구사했다. 즉 작품 허두에 ‘접동’, ‘접동’과 같은 의성음을 되풀이시켰다. 그리고 그에 이어 아홉 오빠의 방언형 조어인 ‘아우래비 접동’을 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이 작품은 구성진 가락을 십분 살려 내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접동새가 민담, 설화의 분위기를 거느리는 매우 독창적 객체로 살아나게 된 것이다. 물론 金素月이 金素月인 점은 보다 종합적인 안목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그 중요한 항목 가운데 하나가 方言 원용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에 대한 확인은 한국시의 기능적인 이해를 위해서 무의미한 일일 수 없다.
  
   ② 白石의 경우
  한국 현대 시인으로 方言을 작품에 사용한 예가 金素月이나, 金永郞 등 한두 사람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素月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 활약한 洪思容이나 金東煥, 李相和 등도 모두가 다소간은 方言에 의거한 작품을 남겼다. 가령 李相和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는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민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라는 부분이 나온다. 여기서 ‘민드라미’는 표준어의 그것이 아니라 경상도에서 方言으로 ‘맨드래미’를 가리킨다. 또한 ‘깝치지 마라’도 까불지 마라는 방언식 표현이다. 이것으로 李相和는 일제 식민지 체제하의 수탈에 허덕이는 우리 땅에 대한 화자의 짙은 국토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인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이런 단면은 3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굵은 선으로 이어졌다. 그 무렵으로 보면 매우 전위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 李箱이다. 그런데 그에게도 남달리 강한 方言감각이 있었다. 다음은 1936년 9월호 “中央”의 한 설문에 답한 그의 말이다. 이때의 설문은 ‘아름다운 조선말’이라는 제목의 것이었다. 이에 답해서 李箱은 ‘나가네’라는 成川地方의 말이 그렇다고 답했다. 그에 따르면 표준어로 ‘나그네’라고 할 이 말은 ‘표표한 旅客’의 심상에 딱 맞는다는 것이다. 37)
  우리 시인의 이런 단면은 그 후 徐廷柱·李庸岳 등의 신세대들에 의해서도 강한 줄기로 계승되었다. 특히 徐廷柱의 초기 시인 ‘花蛇’나 ‘自畵像’에서 전라도 쪽의 方言 감각을 제거한다거나 李庸岳의 몇몇 작품에서 함경도 지방의 사투리와 거기서 빚어진 말씨를 떼어 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경우 이들 詩人들을 뒷전에 돌리고 단연 화제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사람이 있다. 그가 곧 白石이다. 그 이전 다른 시인들의 경우에는 方言이 작품을 효과적으로 살리기 위한 기법 내지 방편인 데 머물렀다. 말을 바꾸면 그들의 작품에 方言은 부분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서 白石의 詩에는 애초부터 方言이 주로 된 것이 있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新里고무 고무의 딸 李女 작은李女
열여섯에 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土山 고무 고무의 딸
承女 아들 承동이
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山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洪女 아들 洪동이 작은 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려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
-‘여우난골族’- 38)
  이 작품 허두에 나오는 ‘엄매’ ‘아배’부터가 方言이다. 그와 아울러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역시 평북 정주 지방에서 주로 쓰는 方言이다. 이 말은 표준어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다.39) 또한 다음 행의 ‘하로’, ‘고무’, ‘매감탕’, ‘오리치’, ‘반디젓’, ‘삼춘’, ‘사춘’ 등 말들도 모두가 방언이다. 白石의 이런 詩에서 더욱 주목되는 것이 한 方言을 같은 작품에서 의도적으로 거듭 쓴 점이다. 그 단적인 보기로 들 수 있는 것이 ‘고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물론 표준어로 ‘고모’다. 고모는 姑母라는 한자어에서 온 것으로 국내와 동경에서 신교육을 받은 白石이 그것에 맹목이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의도적으로 그는 그것을 方言으로 썼다. 또한 필요 이상으로 남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白石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일단 그의 詩를 李箱의 것과 대비할 필요가 있다. 넓은 의미에서 白石의 詩는 통사적이기 보다 解辭的인 문장으로 되어 있다. 그 이전에 해사적인 문장을 즐겨 쓴 시인이 李箱이다. 구체적으로 ‘詩 第二號’는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와 같이 되어 있다.40)
  詩는 물론 일상적인 말씨에서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詩에는 그나름의 말씨, 곧 文法이 있다. 그것이 가능한 한 집약적으로 그 말들을 쓰는 점이다. 말을 바꾸면 詩는 산문과 달라서 말을 축약해서 쓰고 그를 통해서 작품을 언어의 단단한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李箱은 위와 같은 작품에서 그와 반대되는 각도에서 언어를 썼다. 그의 작품에서 말은 축약적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헤푸게 쓰여 있다. 그 결과 그의 詩는 의미구조의 농도가 확보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가 된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는 그의 언어가 解辭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白石 역시 그런 것이다. 구체적으로 위에 든 작품에서 우리는 견고한 의미구조를 느낄 수 없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방만한 언어 사용을 발견할 뿐이다.
  그러나 解辭的인 점이 같다고 해서 白石의 詩가 李箱의 것과 아주 같은 유형으로 파악될 것은 아니다. 李箱의 詩에는 강한 현대성, 곧 서구의 모더니즘에 그 선이 닿은 현대성이 느껴진다. 그에 반해서 白石의 詩는 그와 근본적으로 다른 유형에 속한다. 土俗的인 언어, 方言을 그의 詩에 즐겨 씀으로써 白石의 詩는 향토 정조를 지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詩는 어떤 작품에서 매우 현대적인 감성도 지녔다. 가령 ‘비’는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었나/어데서 물쿤 개비린네가 온다.’로 되어 있다. 이것은 정지용이나 김기림의 어떤 작품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그 언어감각이 현대적인 경우다. 결국 白石은 현대적인 감각과 함께 토속성도 지니는 詩를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 방편으로 그는 方言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셈이다. 그가 우리 현대시사에서 차지하게 된 위상은 그것으로 확보가 가능했다. 이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런 자리에서 그의 이름은 뚜렷이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Ⅴ. 끝자리 요약과 添言

  여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문학과 방언의 상관관계를 한국문학의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그 양상은 크게 보아 몇 가지 단계로 나뉘어진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고전문학기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명백하게 구분되는 두 유형으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지배 계층의 것으로 거기에는 方言에 해당되는 말이 잘 쓰이지 않았다. 그에 반해서 서민 계층의 詩歌와 산문들은 매우 흔하게 方言에 해당하는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다음 19세기 말에 이루어진 개항과 함께 이런 양상이 극복되었다. 이때부터 우리 시가와 소설들은 서민이 쓰는 일상어를 전면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와 아울러 사설시조나, 잡가 일부 서민소설에 나타난 조잡한 언어 문장이 극복되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개항기의 어문 활동에는 또 하나의 획기적 양상이 전개된 것이다. 한편 현대문학의 단계에 이르러 方言은 詩와 小說 두 분야에서 아울러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小說에서는 주로 方言이 등장 인물의 성격 부각을 위해 사용되었다. 또한 무대, 배경의 생생한 제시를 위해서도 方言이 쓰인 예가 있다. 그런가 하면 詩에서 方言은 더욱 기능적으로 이용되었다. 이 경우에 특히 주목되는 詩人이 金素月과 白石이다. 金素月은 方言을 통해서 그의 詩가 독특한 가락을 지니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의 詩는 향토 정조를 성공적으로 노래할 수 있었다. 白石은 좀더 기법에 대한 인식을 가진 詩人이다. 그는 현대적인 감각의 詩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쪽의 말을 택할 경우 그의 詩는 그에 앞선 세대의 한국시-곧 모더니스트들의 亞流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을 지양하기 위해 白石은 의도적으로 方言, 특히 定州地方의 말들을 그의 작품에 많이 썼다. 그 결과 그의 詩는 모더니즘의 바탕 위에 진한 토속성도 가지는 독특한 풍모의 것이 되었다.
  이 작업은 표제를 좁게 다룬 나머지 편향적이 된 점도 있다. 한국문학과 方言의 상관관계 고찰이라면 그 범위는 60년대와 70년대, 80년대 등의 詩와 小說, 희곡 등을 고루 살펴야 할 작업이다. 그럼에도 이 작업은 그 범위가 고전문학기에서 日帝 時代에 이르기까지의 우리 문학을 살피는데 그쳤다. 또한 앞에서 이미 드러난 바와 같이 작품에 방언을 기능적으로 이용한 사람들은 주로 金東仁이나 金素月, 白石 등 서북지방 출신자들이다. 이 지역 출신자들의 이런 단면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사회, 특히 근대 사회의 어떤 성격에 관계되는 것인가. 이렇게 제기되는 의문에 대해 해답을 마련하는 일은 언어사회학의 과제인 동시에 文學의 사회적 연구와도 상관관계를 가지는 일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기능적으로 그에 대한 해답을 마련하지 못했다. 앞으로 이루어질 작업들에 기대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