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신문·방송 언어】

한국 신문 기사의 제목

황종인 / 한국 외국어 대학교 독일어과 교수


신문에 나타나는 굵은 줄의 종류

  신문 기사의 머리 부분에 나타나는 굵은 글씨로 된 글줄을 제목1) 이라 부르기로 한다. 큰 기사에는 굵기가 다른 제목이 둘 이상이 나타날 수가 있다. 우리는 이들을 큰 제목, 작은 제목으로 불러 구별하기로 한다. 기사가 길 때에는 또 몇 군데 가는 줄 사이에 굵은 글줄이 나타날 수 있으며, 우리는 이것을 사잇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외국의 신문에서는 제목의 바로 아래 또는 위에 기사의 처음 부분을 굵은 글씨로 써서 눈에 잘 띄도록 하는 수가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돋보기줄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우리는 제목과 사잇줄을 합쳐 굵은 줄이라 부르고, 기사 안의 잔 글씨로 된 부분을 잔줄이라 부르기로 한다. 돋보기줄은 그 성격으로 보아 잔줄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2) 에는 제목 하나짜리 기사가 가장 많이 눈에 띈다. 좀 큰 기사에는 제목 밖에 사잇줄이 두어 개 들어 있고, 때로는 큰 제목 밑에 작은 제목이 하나가 나타날 수 있다. 도이치의 프랑크푸르트 일반 신문3) 에는 큰 제목도 둘이 나타나고, 작은 제목도 여럿이 나타날 수 있다. 프랑스의 르 몽드와 스페인의 엘 빠이스4) 의 큰 기사들에는 제목, 작은 제목 밖에 돋보기줄이 붙을 수 있다.
  순수한 가로쓰기 신문에서는 제목이 반드시 기사의 위에 나타난다. 그런데 세로쓰기 신문에서도 제목만은 가로쓰기가 많이 나타나고, 중앙일보처럼 가로쓰기 신문에서도 제목만은 세로쓰기가 자주 나타난다. 따라서 큰 기사에는 제목이 가로로 몇 줄, 세로로 몇 줄씩 붙어 있다. 때로는 하나의 문장이 가로로 시작하여 세로로 계속되어 긴 제목을 이루기도 한다. 한국 신문의 상자 기사에서는 그 머리에서 시작된 제목이 상자의 가운데 나타나는 굵은 줄로 이어지는 수도 있다.
  한국 신문에서 사잇줄이 나타나는 방식은 외국 신문에서와 같다. 프랑스, 스페인 신문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돋보기줄은 없으나, 기사의 맨 앞의 몇 줄을 상자 속에 넣어 돋보기줄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수가 있다. 예컨대 1995년 10윌 3일 중앙일보 경제 쪽의 머릿기사에는 긁고 보자로 시작해서 큰 제목이 한 줄, 그 밑에 작은 제목이 두 줄이 보이고, 첫째 기둥5) 의 아홉 줄이 상자 속에 들어 있다.
  신문의 제호, 쪽의 이름, 귀의 이름 등은 특정한 기사에 딸리지 않은 굵은 줄들이다. 예컨대 한국일보에는 국제라는 이름이 붙은 쪽이 있고, 그 안에 월드윈도, 뉴스메이커 같은 이름의 귀가 보인다. 여러 기사가 하나의 사슬을 이루면 거기에도 이름이 붙는다. 이 사슬 이름도 특정한 기사에 붙지 않은 굵은 줄이다. 사슬을 이루는 기사들 하나하나는 그 사슬의 고리가 되는 것이다. 이 고리 이름은 특정한 기사에 붙는 굵은 줄이지만, 그것이 제목에 속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1995년 11월 11일 동아일보에는 盧씨 <비자금> 파문이라는 사슬 이름이 붙은 기사가 넷이 실려 있고, 그 하나하나에는 검찰소환 주변, 재벌조사 점검, 姜총장 <발언>이후, 財界의 움직임이 고리의 이름으로 붙어 있다.
  신문에서의 제목의 기능은 무엇보다도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는 데 있다. 따라서 그것은 완전한 문장을 이루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뉴스가 아닌 기사 중에는 소설이나 수필의 제목과 같이 단순한 명사구 하나로 된 굵은 줄이 붙은 것도 있다. 예컨대 1995년 9월 21일 한국일보 30쪽에 어지럽게 자리 잡고 있는 굵은 줄 중에는 비자금파문이란 사슬 이름이 있고 그 바로 밑에 덜 굵은 글씨로 된 검찰·정계 표정이라는 고리 이름이 보이는데, 이것은 원래 뜻의 제목의 성격이 강하다.
  이제 신문 기사의 제목을 살피기에 앞서 제목 밖의 굵은 줄들에 관해 몇 마디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쪽이나 귀의 이름을 영어로, 또는 우리말과 영어로 나란히 붙인 신문이 많다. 한 언어로 된 신문에서 두 언어로 된 부분이 어떻게 어울리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예컨대 동아일보 목요특집에는 Weekly Focus라는 이름의 사슬이 나타나고, 그 각각의 고리에는 다시 영화 Actor & Actress, 오디오 Pop & Classic, 여행 Travel & Sightseeing, 방송 TV & Highlight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사슬 이름은 영어만으로 되어 있고, 고리 하나하나에 나란히 붙은 우리말 이름과 영어 이름은 따로 놀고 있다. 서울신문의 쪽 이름 중소기업 Promising Enterprise, 한국일보의 사회 Nation, TV & Radio TV마당 등도 마찬가지다.
  중앙일보에는 국제 World News라는 이름의 쪽에 외국 텔레비전의 뉴스 프로그램 이름을 그대로 빌려 온 헤드라인뉴스 HEADLINE NEWS라는 이름의 귀가 실리다가 1995년 10월 하순에 없어졌다. 이것이 신문의 귀 이름으로 적당치 않다는 것을 편집자들이 스스로 알아차렸기 때문인 듯하다. 이것은 외국 신문의 머리기사를 소개하는 자리였는데, 외국의 머릿줄 같은 이름으로 바꾸어 계속 실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2. 제목의 크기와 모양새

  외국의 순수한 가로쓰기 신문의 제목에는 변화가 많지 않다. 제목이 둘 이상일 때 큰 것과 작은 것을 구별하기 위해 굵기를 조절하거나 줄을 갈아 쓰는 것밖에 다른 방법을 써서 변화를 주는 일은 흔치 않다. 한국의 신문에서처럼 제목의 한 문장 안에서 글자의 체나 굵기가 바뀌는 일이 없다. 도이치의 프랑크푸르트 일반 신문은 제목의 일부를 아직도 이른바 “도이치 문자”로 쓰고 있지만 그 신문에서도 한 줄 안에서 그것을 라틴 문자와 섞어 쓰는 법은 거의 없다.
  여기서 기사와 거기 딸린 제목을 포함한 굵은 줄의 양을 비교해 보는 것도 뜻이 있을 듯하다. 기사의 양을 줄 수로, 그리고 제목의 양을 낱말 수로 표시하기로 하면, 앞의 것을 뒤의 것으로 나눈 것은 제목 낱말의 기사 부담량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얼핏 보아도 유럽과 미국 신문들에서 이 수치는 상당히 높다. 예컨대 뉴욕 타임스와 프랑크푸르트 일반 신문6) 에서 이것이 열을 밑도는 일이 드물다.
  한국 신문의 제목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변화가 많다는 데 있다. 글자의 굵기도 여러 단계로 조절하고, 가로쓰기줄과 세로쓰기줄을 자유자재로 짜 맞추고 글꼴도 두 가지 이상을 섞어 쓴다. 따라서 제목이 잘 정돈된 미국이나 도이치의 신문과 비교하면 한국의 신문은 매우 어지러운 인상을 준다. 한 문장도 그것을 하나로 알아볼 수 없을 때가 많다. 여기서 몇 가지 실례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1) 6共비자금內査착수
검찰 계좌有無 여부·차명전환의혹 관련
동화銀 수사자료등 정밀검토
(2) 孔외무 “通商교섭 외무부 소관”
“통산부 잘못”
뉴욕서 밝혀 <車협상不和> 계속될 조짐
(3) 애국선열4位 묘소 찾았다
桂奉瑀·崔以鵬·姜鍊翔·姜相震 선생
러·카자흐서 ......봉환 현지단장 검토
  (1)은 1995년 10월 14일 한국일보 머리기사의 제목으로서, 여기에는 글자의 굵기가 세 단계, 모양이 두 가지가 섞여 나타난다. 첫 줄은 가장 굵은 고딕체로, 둘째 줄에서는 첫 낱말 검찰은 잔 고딕체로, 나머지 부분은 가운데 굵기의 바탕체로, 그리고 셋째 줄은 가장 잔 바탕체로 되어 있다. (2)는 1995년 10월 5일 동아일보첫 쪽의 기사의 제목으로서, 첫 줄은 가로로, 나머지 두 줄은 세로로 배열되어 있으며, 여기서도 굵기와 모양이 다른 글자들이 섞여 나타난다. (3)은 1995년 10월 14일 한국일보 둘째 쪽의 상자 기사의 제목으로, 첫 줄은 기사의 머리 부분에, 그리고 나머지 두 줄은 그와 떨어져서 상자의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1)의 석 줄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의 긴 문장이다. 그 주어는 둘째 줄 첫 낱말 검찰이오, 그 술어는 첫째 줄 전체이며, 둘째 줄의 나머지 부분과 셋째 줄은 각각 문법에서 흔히 부사구라고 부르는 것이다. (2)의 석 줄은 두 문장을 이룬다. 첫 줄의 孔외무에서 셋째 줄의 밝혀까지가 완전한 문장을 이루고, 나머지 부분이 동사가 생략된 또 하나의 문장을 이룬다. 이 두 문장은 앞의 문장의 동사가 연결형이어서 형식상 하나로 합쳐져 있다. (3)도 줄은 셋이지만 문장은 둘로 되어 있고, 이들 사이를 점 셋이 갈라놓고 있다. 틀린 부분을 좀 고치고 토를 되살리고 빠진 것을 보충하면 우리는 (1)-(3)을 다음과 같이 다시 쓸 수 있다.
(1') 검찰이 육공의 비자금에 대하여 계좌의 유무 및 차명으로의 전환 여부를 둘러싼 의혹과 관련하여 동화은행 수사 자료를 정밀 검토하는 등 내사에 착수했다.7)
(2') 공 외무가 뉴욕에서 통상 교섭은 외무부 소관이며 통산부가 WT0를 회피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밝혀 車 협상으로 시작된 不和가 계속될 조짐이 보인다 .
(3') 애국선열 4位, 桂奉瑀·崔以鵬·姜鍊翔. 姜相震 선생의 묘소를 러시아와 카자흐서 찾았다. 국가 보훈처는 봉환하거나 현지에서 단장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
  한국 신문 기사의 제목에서는 준말이 많이 나타나고, 띄어쓰기 규칙이 지켜지지 않아서, 낱말의 숫자를 정확히 집어낼 수 없다. 또 문법을 무시하고 마구 낱말을 늘어놓아서 단위의 숫자도 파악하기 힘든다. 너무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완전한 문장이 극히 드물다. 따라서 뜻의 파악도 힘들다.
  한국 신문 기사의 제목의 특징으로 또 눈에 띄는 것은 그 양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아래의 (4)는 1995년 10월 20일 한국일보 머리기사의 제목이오, (5)는 같은 날짜 한겨레신문의 머리기사의 제목이다. (4)는 적어도 네 개의 문장으로, 그리고 (5)는 적어도 세 개의 문장으로 다시 써 볼 수 있다.
(4) “盧씨 비자금 4,000億 있다”
朴啓東의윈 주장 100億씩 40개계좌 분산예치
百億 차명입금된 예금조회표 증거제시
野, 國調權요구 政街파문
供부총리 “실명법의거 현재로는 조치 못 취해”
(5) “노씨, 4천억 분산예치”
대통령 퇴임직전 이원조 씨 시켜 40개 차명계좌로
박계동의윈 1백28억 예금조회표 제시
홍 부총리 “명의인 동의땐 조사 가능”
  적어도 30개의 낱말로 되어 있는 (4)는 87줄로 된 기사에 딸려 있고, 적어도 25개의 낱말로 된 (5)는 75줄로 된 기사에 붙어 있다. 그러니까 이 기사들의 제목 낱말의 기사 부담량은 석 줄을 넘지 않는다.
(6) “신한은행 간부명의 4~5억원씩 실명화”
박계동 의원 주장 (한겨레신문 ’95. 10. 22.)
(7) “기아自 생산 전 차종 / 수출비중 45% 높여”
김선흥 회장 (중앙일보 ’95. 10. 26.)
  한국의 신문에는 일반적으로 아주 작은 기사에도 제목이 길게 붙는다. 위의 (6)은 모두 아홉 줄의 기사에 딸린 제목으로서, 낱말이 적어도 열 개가 들어 있고 (7)은 단 여섯 줄짜리 기사의 제목인데, 낱말이 적어도 열한 개가 들어 있다. 그러니까 제목 낱말 하나의 기사 부담량은 한 줄이 못 되는 것이다.


3. 제목의 어휘

  원칙적으로 신문의 어휘가 일반 국민의 어휘와 다를 수가 없고, 제목의 어휘가 기사의 어휘와 다를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말에서는 신문에서만 쓰이는 낱말이 많고, 신문에서도 특히 제목에만 쓰이는 낱말이 많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한국의 편집 기자가 짧은 제목으로 많은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어휘의 규칙을 무시해 왔기 때문이다.


        3.1. 제목에만 쓰이는 준말과 한자 말

  신문 기사의 제목에는 여러 가지 준말이 쓰인다. 특히 나라 이름은 제목에서 한 글자 줄어 나타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예컨대 기사 안에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로 쓰이는 것이 제목에서는 각각 , , , 로 된다. 이탈리아로, 이스라엘로, 프랑스 또는 로 되고, 인도네시아는 두 자로 줄어 印尼로, 크로아티아는 석 자로 줄어 크로아로 된다. 이렇게 길이가 줄어든 낱말은 홀로 떨어져 나타나기도 하지만 예컨대 미장교, 프군, 프제품, 러人, 訪러 같이 합성어를 이루기도 한다. 세르비아 계통은 줄어서 세系 또는 ‘세’계로 되고, 크로아티아 군대크로아軍으로 된다.
  이와 같이 제목에만 나타나고 기사 안에서는 풀어져 버리는 준말 가운데 로마자 하나로 된 V가 있다. 이것은 우리 신문에서 혼자 나타나는 일이 없고, V예감, V일등공신, V投와 같은 합성어에 들어가는데, 영어의 Victory의 첫 자인 듯하며, 승리를 뜻한다.
  긴 낱말을 줄이는 데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와 같이 그 낱말을 맨 앞의 한두 자만 남기고 지워 버리는 방식이다. 내무부장관내무로, 상임위원회상임위로 줄이는 것이다. 이미 있는 두 낱말이 붙어서 된 겹말을 줄이는 방법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은 민간자본, 대통령선거를 각각 민자, 대선으로 줄일 때처럼 그 두 부분의 첫 글자들을 떼어 붙이는 방법이다.
  뇌물증정을 그냥 붙이면 뇌물증정이라는 겹말이 되고, 이 둘을 각각 한자씩으로 줄여서 붙이면 증뢰라는 준말이 된다. 이것이 뇌증이 안 된 것은 이 두 부분을 붙일 때 한문의 어순에 따라 동사를 앞에 놓고 명사를 뒤에 놓았기 때문이다. 정당창립, 내각개조를 각각 창당, 개각으로 줄여 붙인 것도 같은 방식이다.
  긴 겹말을 줄여 붙일 때는 그나마 있는 원칙도 편의에 따라 멋대로 파괴된다. 예컨대 정부·여당을 보통 방식으로 줄이면 정당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이미 있는 낱말과 같아지기 때문에 순서를 바꾸어 당정으로 쓰고 원자력발전소원발로 줄이면 일본 말과 같아지기 때문에 원전으로 줄인 듯하다.
(8) 孔외무 오늘南美향발 (한국일보 ’95. 8. 21.)
(9) “不正은 절대 不容” 안정속 변화 (한국일보 ’95. 8. 2.)
(10) 사업 30代남자 / 차안 燒死體로 (한국일보 ’95. 8. 21.)
  제목에 나타났다가 기사 안에서 풀어지는 낱말에는 즉흥적으로 한자를 짜 맞추어 만든 것도 많다. 예컨대 (8)의 향발, (9)의 不容, (10)의 燒死體는 각각 기사 안에서 순방을 위해…출국한다, 절대 용납않겠으며, 불에 타 숨진채 같은 구절 안에 풀어져 나타난다.
  이와 비슷한 제목 낱말이 얼마든지 있다: 末보호, 未實各, 맹공, 最多, 3李, 빅3, V3 등. 주민등록표 등기주소 틀리면 세임자未보호라는 제목 밑의 잔줄에 보호를 받지 못한다라는 풀이말이 보이고 未實各 고액자금 누가봐도 의심이라는 제목 밑에 실명전환도 하지 않은이라는 풀이말이 보인다(한국일보 ’95. 9. 8./10. 29.). 맹공 하루만에 <정쟁자제>로 선회라는 제목 밑에 강하게 몰아붙이던 민자당이라는 구절이 보이고(동아일보 ’95. 11. 11.), 最多모임 가장 많이 참석하는 회의로 풀린다(중앙일보 ’95. 11. 3.). 여러 신문에 자주 나타나는 3李, 빅3도 기사 안에는 안 보인다. 1995년 8월 30일 한겨레신문의 스포츠 쪽에 여자 핸드볼 ‘V3’ 담금질이라는 제목이 보이고, 그 밑에 올림픽 3연패라는 풀이말이 보인다.
  1988년의 신문을 조사해 보면 1995년 현재 두루 쓰이는 대선이란 준말이 안 보이고 제목에서나 잔줄에서 나 대통령선거8) 만 나타난다. 제목에는 政府與黨과 그 준말 黨政이 섞여 쓰이지만, 잔줄에서 대개의 경우에 정부와 민정당, 정부와 여당, 정부-여당, 정부여당 같이 풀려 나타난다. 그러나 1995년의 신문에는 제목에서는 준말만 쓰이고 잔줄에서는 당정과 정부와 민자당이 섞여 나타난다. 당정이 대선과 같이 잔줄에서도 정부와 민자당, 정부와 여당 같은 긴 표현을 완전히 몰아낼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9)
  1894년 9월의 신문 기사의 제목에는 처음에 세무비리, 세금횡령 등만 나타나다가 차차 세금도둑, 세금도둑질 등이 나타나고, 이것이 같은 해 10월에 들어와서야 盜稅, 稅盜 같은 준말로 바뀌고 있다10) 1995년 현재 이 두 준말은 신문에서 제목에나 잔줄에나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한자 말 가운데는 향발, 不容 같이 아무리 오래 가도 기사 안에 못 들어가는 것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살핀 바와 같이 많은 준말이 제목에 처음 나타나서 나중에 기사 안에서 쓰이고 마지막에 일반 국민의 언어생활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니까 제목은 어휘의 시험장과도 같은 구실을 하는 것이다.
  두 자 길이의 낱말을 한 자로 줄여 쓰는 것도 한국 신문의 제목에서만 보이는 현상이다. 예컨대 은행, 학교, 대학은 각각 줄어 , , 로 되고, 띄어쓰기가 없는 제목에서 이들은 앞의 낱말에 붙어 겹말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이 한 자짜리 준말들은 또 한글로 쓰면 잘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외국銀, 일부校. 3개大 등에서와 같이 한자로만 쓰인다.


        3.2. 어휘를 파괴하는 준말

  낱말의 뜻은 그것을 쓰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으로 결정되며, 이 약속을 정리, 기록해 놓는 것이 사전이다. 낱말에는 그것을 이루는 조각의 수에 따라 홑과 겹의 구별이 있는데. 여러 조각으로 된 겹말의 뜻은 그 조각들이 붙어 있는 방식에 의해 겉으로 나타나지만, 한 조각으로 된 홑말에는 그 뜻을 드러내는 장치가 없다. 그러니까 예컨대 같은 홑말의 뜻은 외워야 하지만, 이들을 붙여 만든 밥쌀, 쌀밥 같은 겹말의 뜻은 그 조각들의 뜻만 알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다.
  겹말의 이러한 장점은 그것이 자주 쓰이는, 살아 있는 조각들이 붙어서 만들어졌을 때만 나타나며, 그렇지 않을 때는 이론적으로 겹말이라 하더라도 보통 사람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뜻을 홑말의 경우처럼 외워야 한다.
  한국어 어휘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한자어는 거의 모두가 혼자 쓰이지 않는 말조각들이 붙어서 만들어진 사실상의 홑말이다. 예컨대 가 낱말로 쓰이지 않는 말조각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우유의 뜻을 드러내 줄 수 없으며, 가 낱말로 쓰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이 초가의 뜻을 미루어 짐작하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에게는 우유초가는 두 조각이 아니라 한 조각으로 된 홑말이다.
  한자의 이른바 조어력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뜻이 똑같은 두 낱말 소젖우유의 차이는 다만 그것이 겹맡로 인식되느냐 않느냐, 그 뜻이 드러나느냐 않느냐 하는 데 있다. 흔히 우유가 한자의 조어력이 들어가서 더 좋은 말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러니까 그것이 두 조각을 붙인 이음새가 없이 매끈한 홑말로 보이기 때문이다.11)
  정부, 여당, 대통령, 선거, 뇌물, 증정… 신문에 자주 보이는 낱말 가운데 어느 하나 사실상의 홑말이 아닌 것이 없다. 읽는 이가 이런 어려운 낱말들을 배운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정부여당, 대통령선거, 뇌물증정 같이 그냥 붙여서 겹말을 만들어 써야 한다. 이들을 줄여 붙여 만든 당정, 대선, 증뢰 같은 준말은 사실상의 홑말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새로운 준말이 신문에 나타나서 국민의 부담을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한다. 戰備(전쟁준비), 脫與(여당이탈), 出禁(출국금지), 海沙(바다모래)는 1995년 11월에 한국일보, 경향신문을 통해 새로 나온 제목 낱말이다.
  물론 이미 있는 낱말 둘을 헐어서 그 조각들로 새 낱말을 짓는 것이 한자 말의 경우에만 있는 일은 아니다. 영어의 smog(스모그), brunch(아심), Chunnel(도버 해협의 물밑 터널) 같은 낱말도 있고, 머비(머리가 빈 사람), 까치(까다롭고 치사한 사람), 공순이(공부하는 순진한 여학생)12) 같은 요즈음 한국 청소년들의 은어도 있다.
  한때 아니꼽다, 더럽다, 메시껍다, 치사하다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아더메치라는 준말이 신문에 소개된 일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낱말로 자리를 굳힐 수 없었다. 국민이 이 준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뜻에 관한 국민들 사이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날이 쏟아져 나오는 한자 말은 한자의 이른바 조어력에 힘입어 당당하게 인쇄된 매체에 나타나고, 이것을 재빨리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신문도 못 읽는 한글 세대”로 낙인이 찍혀 버린다.
  홑말이 적고 겹말이 많이 들어 있는 어휘를 가리켜 조직적이라 한다. 조직적이 아닌 어휘는 그 속의 낱말 하나하나를 따로 배워야 하지만 조직적인 어휘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낱말을 웬만큼 알면 평생에 처음 들어 보는 낱말도 사전을 안 찾고 바로 그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의 어휘는 말할 수 없이 비조직적이다. 신문만이 아니라 한국의 모든 기관과 개인이 한자 말, 준말을 마구 만들어 유통시킴으로써 어휘의 조직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유럽이나 미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개념들을 한국인은 자기의 말이 아니라 중국 말로 번역해 쓰는 것이다. 예컨대 달돌, 볕발전소, 가벼운 물 원자로 등으로 될 것이 각각 月石, 태양광발전소, 경수로로 된다.


4. 제목의 문법

  신문에서만 아니라 누가 어디서 말을 하고 글을 쓰던 문장이 반듯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미국과 유럽 신문의 제목에는 완전한 문장을 이루는 것도 있고, 문장에서 덜 중요한 부분, 특히 문법적인 낱말 등이 생략된 것도 있으며, 명사구 하나로 된 것도 있으나, 이들은 다 문법에 맞게, 반듯하게 만들어져야 하고, 그 홀로 뜻이 통해야 한다.


        4.1. 제목에서의 문법 파괴

  그러나 한국 신문의 제목에서는 어떤 규칙도 제대로 지켜지는 것이 없다. 완전한 문장이 드물다. 띄어쓰기와 구두점에 관한 규칙들이 지켜지지 않으며, 격토를 비롯하여 문법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요소가 다 빠져 버린다13) 예나 이제나 띄어쓰기 규칙이 지켜지지 않는다. (11), (12)에서 보듯이 제목 한 줄을 한 낱말처럼 다 붙여 쓰기도 하지만, 띄어쓰기는 하되 한글 맞춤법을 무시하고 이따금 아무 데서나 멋대로 띄는 것이 1990년대 제목의 문법이다.
(11) 導入肥料價格改定法案難航不免
兵役法改正案不日通過
國會,來年初休會는決定的 (조선일보 1957. 7. 28.)
(12) “美검사만난것은사실
신중처리요청했을뿐”
玄 전駐美대사 (동아일보 1995. 10. 29.)
  띄어쓰기만이 아니다. 구두점에 관한 규칙들도 안 지켜진다. 쉼표는 엉뚱하게도 격표지로 쓰이고, 따옴표는 직접 인용이 아닐 때만 아니라, 전혀 인용이 아닌 데도 붙는다. ‘심슨’ 무죄석방 같은 제목도 보이고, 예컨대 한자를 쓰는 신문에서 세系로 쓰이는 것이 한겨레신문에서는 ‘세’계로 나타난다.14)
  쌀선박, 쌀수송선에는 안 붙는 따옴표가 쌀배에 붙는 것은 토박이말이 얼마나 심한 차별을 받는가를 실감하게 한다. 1995년 여름 각 신문에 북한에 보내는 쌀에 관한 기사가 많았지만, 제목에 <쌀배>를 쓴 신문은 중앙일보 하나였던 듯하다.15)
  제목에서 원칙적으로 완전한 문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한국 신문의 특징이다. 유럽이나 미국 신문의 제목에도 불완전한 문장이 나타나지만, 빠지는 부분 이 관사나 조동사 같은 문법적인 부분에 한정되어 있어서, 뜻을 잡아내는 데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한국의 기사 제목에서는 아무 것이나 다 빠져 버릴 수가 있다. 따라서 제목은 뜻이 안 통하거나 엉뚱한 뜻을 나타낼 때가 얼마든지 있다.
(13) 급기야 鄧차남도 칼날 (한국일보 ’95. 5. 5.)
(14) “80년 光州 헬기난사” (동아일보 ’95. 4. 1.)
  위의 예문 (13)은 江澤民에 관한 큰 기사에 딸린 많은 굵은 줄 중의 하나로서, 그 하나만 보면 鄧의 차남이 칼을 뺐다는 뜻으로 보인다. 기사의 잔줄들을 읽고 나서야 그것이 그 반대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4)에는 띄어쓰기를 안 한 결과 그 뜻을 짐작할 수도 없는 헬기난사라는 “낱말”이 나타나는데, 잔줄들의 내용을 보아서 이것이 헬리콥터에서 기관총이 난사되었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15) 政局수습案 週初 윤곽 (한국일보 ’95. 7. 30.)
(16) 기업銀-현대에 무릎 2連敗 (동아일보 ’95. 10. 28.)
  위의 (15), (16)은 잔줄을 안 보고도 빠진 말을 쉽게 보충할 수 있다. 우리가 윤곽을 드러내다 같이 자주 쓰이는 낱말 사슬과 무릎을 꿇다 같은 익은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쩍 늘다, 꽁꽁 얼다, 고개를 들다, 가닥을 잡다, 덜미를 잡히다, 도마에 오르다…… 이런 낱말 사슬들은 뜻으로 보아 겹말들과 같고, 거기서 한 부분을 떼어 내는 것은 학교, 은행, 회사 같은 낱말을 줄여서 校, 銀, 社 같이 줄여 쓸 때와 마찬가지로 말 배우는 이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다.
  우리말에서 문장을 이루는 부분들 사이의 관계는 격토로 표시되고, 격토가 없을 때는 낱말들이 배열되는 순서, 즉 어순으로 결정된다. 그런데 신문 기사의 제목에서는 원칙적으로 모든 격토가 떨어져 버리고, 어순도 마구 바뀐다.
  아래의 (17)에서는 격토만 떨어져 버리고 낱말의 배열은 그대로 있다. 다만 원래 이 제목의 첫 줄의 서울大 다음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둘째 줄로 내려가 고딕으로 찍혀 있는 것이 변칙이다. 따라서 (17)은 완전한 문장으로 고치면 서울 대학교의 경영 대학이 97년부터 봉사 활동에 학점을 인정하고 영어 시험 합격자에게만 졸업 자격을 준다와 같이 된다. 그러나 제목만 읽는 이는 (17)의 두 줄을 주어를 따로 가진 두 문장으로 보게 되고, 따라서 이 두 줄을 각각 서울 대학교 전체에 관한 이야기와 (아마도 서울 대학교의) 경영 대학에 관한 이야기로 잘못 파악하게 된다.
(17) 서울大 봉사활동 학점인정 경영대 97년부터 영어시험 합격자만 졸업자격 (한국일보 ’95. 11. 4.)
  제목에서는 격표지도 없는 명사구의 배열을 마구 바꾸면서, 그래도 문장의 뜻을 알아보게 하기 위해 몇 가지 수단이 개발되었다. 예컨대 (18)을 민자가 대선자금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의 뜻으로 쓰기 위해, 주어인 民自의 글자 크기를 조절했다.
18) 大選자금 공개않기로 民自 (동아일보 ’95. 10. 29.)
  제목에서는 격토와 어순의 도움 없이도 주어를 찾아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런 수법 밖에 쉼표(,)도 쓰고, 글꼴을 바꾸거나 줄을 갈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장치는 격토를 대신할 수 없으며, 문장의 뜻은 매우 부정확하다. 쉼표가 주격표지로만 쓰이는 것도 아니고, 둘째 줄의 첫 낱말이 첫째 줄의 주어로 되는 수가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기 때문이다.
  격토만 아니라 그 밖의 문법적인 부분도 다 떨어져 버린다. 예컨대 혐의 있는혐의로, 특혜를 받은특혜로 줄어서 뒤따르는 명사와 한 낱말을 이루며, 중국에서 나포된, 러시아에서 적발된은 각각 中나포, 러적발로 줄어 붙는다.
(19) 아버지와 駐車시비 이웃살해 20대구속 (중앙일보 ’95. 8. 11.)
(20) 의사아내·딸살해 외과醫 남편구속 (중앙일보 ’95. 9. 3.)
  위의 예문들은 주로 문법적인 부분들이 떨어져 나가 뜻 잡아내기가 힘들게 되어 있다. (19), (20)은 각각 駐車 때문에 아버지와 시비를 하던 이웃을 살해한 20대, 의사인 아내와 그 딸을 살해한 외과醫에 관한 기사의 제목이다.
  격토 , 의 뜻으로 한자 對가 쓰이며16), 잔줄에 나타나는 접속사 와/과 대신에 제목에서는 사잇점, 붙임표가 쓰인다. 예컨대 잔줄의 미국과 러시아는 제목에서 미·러, 또는 미-러로 나타난다. 또 여러 이름을 열기하기 위해서 (21), (22)에서처럼 붙임표가 쓰이기도 하고, 아무 부호도 안 쓰이기도 한다.
(21) 한강-금강-영산강-낙동강 水質 수시점검 (조선일보 1995. 11. 11.)
(22) 崔鍾賢 金善弘 朴龍學… 오늘 소환 대상 (조선일보 1995. 11. 11.)

        4.2. 잔줄에서의 문법 파괴

  제목의 깨진 문법은 잔줄의 문법까지 좀먹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문법 파괴의 여러 유형들은 모두 기사 안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띄어쓰기 규칙이 지켜지지 않는 것도 제목의 영향인 듯하다. 이 규칙이 제목에서만큼 문란하지는 않지만, 학교에서 가르치는 한글 맞춤법의 규정들을 그대로 지키는 신문이 없다. 각 신문사마다 조금씩 서로 다른 원칙이 있는 듯하나, 그나마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 1995년 11월 11일의 신문들에는 다음과 같은 예가 나타난다: 올림픽대로교통개선(동아일보), 柳興洙민자당제2정조위원장(조선일보), 노태우전대통령으로부터받은(경향신문)17) 띄어쓰기를 안 한 것이다.
  구두점에 관한 규칙도 매우 문란하다. 잔줄에서는 와/과를 생략할 때, 또는 이름을 셋 이상 열거할 때 콤마를 찍는 것이 원칙이지만, 제목에서처럼 사잇점, 붙임표가 쓰이거나, 위의 (22)와 같이 이것도 저것도 안 나타나는 잔줄 문장도 얼마든지 있다.
  제목에서와 달리 잔줄에서는 격토와 그 밖의 문법적인 부분이 생략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잔줄에서도 노씨 은닉 부동산, 뇌물제공 기업주, 당보가두배포 계획, 항균물질 검출우유 제조업체 같이 제목의 문법이 그대로 적용된 표현이 얼마든지 발견된다.
(23) 民主黨은 11일 전주고강당에서 ... 脫DJ를 촉구.
(24) 한편 이날 창당대회에는… 당내인사들이 자리를 함께해 눈길.
  1995년 11월 12일 한국일보의 政局往來 귀에는 全州서 “脫DJ” 역설이라는 제목 밑에 (23)과 같은 잔줄이 나타나고, 정계은퇴 공개촉구라는 제목 밑에 (24)와 같은 잔줄이 보인다.
(25) 경기도는 27일 지난 8월의 폭우피해 복구액을… 확정했다.
(26) 한화 장종훈도… 홈런왕 탈환에는 실패했지만…
  잔줄에서는 또 제목에서와 같이 토나 말끝이 아닌, 내용을 표현하는 부분도 생략된다. 예컨대 1995년 10월 28일 동아일보에는 (25)와 같은 잔줄이 보이고, 1995년 10월 1일 한겨레신문에는 (26)과 같은 잔줄이 보인다. (25)의 복구액 복구를 지원하기 위한 보조금이 되어야 하고, (26)의 홈런왕 다음에는 자리가 빠져 있다.


5. 제목과 잔줄

  장꾼이 간판을 보고 가게를 찾아 들어가듯이, 신문을 읽는 이는 제목을 보고 기사를 찾아 읽는다. 그러니까 신문 기사의 제목은 가게의 간판과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편집 기자들은 모든 사람이 모든 기사를 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기사의 내용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노출시키기 위해 제목을 길게 붙이는 것은 바로 그 까닭이다. 시간이 없어서 기사를 못 읽는 이들도 제목을 훑어보고 필요한 정보를 다 찾아낼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제목이 길게, 많이 붙은 기사는 문 앞에 물건을 쌓아 놓고 큰 소리로 손님을 부르는 가게와도 같다. 서비스가 제대로 되기 힘들다. 여기서 비슷한 내용이 어떻게 달리 기사화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자.
(27) 그가 가진 모든 것, 일억 일천오백만 원이 대학으로 들어간다18)
  1995년 여름 뉴욕 타임스에는 (27)과 같은 제목 아래 평생 모은 자기의 재산을 모두 장학기금으로 대학에 내 놓은 빨랫집 할머니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250줄이나 되는 그 기사는 그가 가난한 흑인 여성으로서 어떻게 해서 그렇게 큰 돈을 모았는지, 그것을 왜 특히 흑인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내놓게 되었는지, 그것을 내 놓으면서 학교와 사회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등을 자세히 밝힘으로써 이 할머니의 큰 선물에 대한 사회의 고마움을 잘 대변하고 있다.
  이 기사는 1쪽에 (27)과 같은 제목 아래 50줄쯤, 그리고 22쪽에 같은 내용을 말만 바꾼 제목19) 아래 200줄쯤으로 나뉘어 나타난다. (27)이 아홉 낱말로, 그리고 또 하나의 제목이 열여섯 낱말로 되어 있으니 제목에 나타나는 낱말 하나의 기사 부담량은 정확히 열 줄이다.
(28) “30년간 김밥팔아 모은 50億
제 땀-눈물밴 全財産이에요”
  1990년 11월 29일 조선일보에는 (28)과 같은 제목 밑에 평생 힘들게 일해서 모은 큰 재산을 고스란히 충남대학교에 장학기금으로 낸 김밥집 할머니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위의 미국 노인과 여러 가지로 비슷한, 그러나 그보다 43배나 큰 돈을 사회의 뜻있는 일에 바친 시민에 관한 이 기사는 140줄로서, 위의 뉴욕 타임스 기사와 비교하면 깊이가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인물 묘사도 덜 감동적이고, 사회의 고마움도 적절히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기사에는 굵은 줄이 특히 많이 붙어 있다. 그 위에 가장 굵은 글씨로 (28)이 가로 누워 있고, 그 앞(그러니까 오른 쪽)에 세로로 두 줄, 그 뒤, 왼쪽에 세로로 석 줄, 또 그 밑에 가로로 한 줄, 그리고 또 잔줄 사이에 사잇줄이 세 군데 들어 있다. 이들 굵은 줄은 적어도 일흔다섯 개의 낱말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 하나하나가 부담하는 기사의 양은 두 줄이 채 못 된다.
  이 예에서 보듯이 한국의 편집 기자는 잔줄의 내용을 제목의 언어로 번역해서 또 하나의 기사를 쓰고 있다. 이것은 읽는 이의 주의를 잔줄로 집중시키기보다는 그것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 이런 편집 기자는 간판을 눈에 띄게 잘 붙이고 가게 안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대신, 문 앞에 물건을 쌓아 놓고 행인들을 향해 외치는 종업원과도 같다. 편집 기자를 가리켜 ‘제목으로 기사를 쓰는 기자’라고 부른다는 임준수20) 의 말은 바로 이런 사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국의 신문은 시간이 없는 이들을 위해서 잔줄의 내용을 되도록 많이 요약해서 굵은 글씨로 전달하고자 하지만, 제목과 잔줄 사이의 관계를 자세히 조사해 보면 이 목표도 제대로 달성하는 것 같지 않다.
  1995년 11월 11일 한국일보 2쪽에는 蓄財비리 수사라는 사슬 이름과 그 밑에 재벌총수 소환표정이라는 고리 이름이 붙은 180줄 정도의 큰 기사가 보인다. 이 기사 위에 가로로 누운 정보파악한듯 출두 여유란 제목은 잔줄의 머리 부분(리드)의 끝에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줄인 것이다: 소환된 대기업 총수들은… 수사와 관계된 정보를 파악해서인지… 여유있는 표정을 짓는 경우도 있었다. 제목에서는 모든 출두자가, 잔줄에서는 그들 중의 일부만이 여유 있는 표정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제목이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거나 그 핵심을 두드러지게 하기보다는 그것을 오히려 숨기거나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잔줄들 가운데 또 굵은 줄이 넷이 세로로 늘어서 있지만, 이들도 내용의 중요한 부분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일부기자 회장얼굴 몰라 “어느기업이죠” 라는 굵은 줄은 이 기사에서 가장 덜 중요한 서너 줄을 요약한 것이다.
  같은 날짜 동아일보 3쪽에 盧씨 <비자금> 파문이라는 사슬 이름과 재벌조사 점검이라는 고리 이름이 붙은 백 줄쯤 되는 기사에 돈준 시기 액수 규명에 초점이라는 제목이 가로로 굵게 누워 있고, 세로로 굵은 줄이 둘이 더 붙어 있다. 그러나 이 기사의 20%쯤을 이루는 동방유량의 신 회장에 대한 부분을 대표하는 굵은 줄은 보이지 않는다.
  같은 날짜 경향신문의 5쪽에는 申회장 조사라는 고리 이름이 붙은 100줄이 넘는 기사가 보인다. <盧씨돈 유입>否認 “사돈보호”라는 제목 밖에 세로로 다음과 같은 두 굵은 줄이 보인다: 빌딩 매입자금-돈세탁 끝까지 함구, <부동산 수사> 계좌추적 불가피. 이 기사의 굵은 줄들은 웬만큼 제 기능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29) 2군출신 ‘펄펄’ 억대코 납작 (한겨레신문 ’95. 10. 1.)
  이 제목 밑의 기사에는 2군출신들의 돋보이는 활약 이야기는 들어 있으나, 억대코 납작으로 표현된 내용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잔줄에 억대신인이란 표현이 들어 있지만, 그들의 코가 납작해졌다는 내용이 없는 것이다.
(30) “칼슘 첨가됐다” 선전식품
절반이 평균보다 함량미달 ‘뻥이야’(한겨레신문 ’95. 10. 26.)
  이것은 문법이 맞지 않는 제목이다. 군더더기 평균보다가 빠져야 뜻이 통하고, 품위 없는 ‘뻥이야’는 떼어 버려도 뜻 파악에 지장이 없다. 이 제목 밑의 기사도 뜻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
(31) 도의원에 受賂기도 忠南교육위원 구속 (증앙일보 ’95. 9. 4.)
(31’) 돈을 건네주려 한 혐의로… 충남교육위원 이금수씨를 구속하고…
(32) <노인과 바다> 무대… 수천년 문화유적 곳곳 (한국일보 ’95. 9. 22.)
(32’) 수천년된 유적이나… 현대문명의 산물이 집중돼 있지는 않다.
  굵은 줄과 잔줄의 내용이 서로 틀리는 일도 있다. 제목 (31)에는 충남교육위원이 돈을 받으려 하다가 구속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밑의 잔줄 (31’)는 그 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다. (32)는 레저 쪽에 실린 쿠바를 소개하는 상자 기사의 허리 부분에 나타난 굵은 줄로서, 그 내용은 그 밑의 잔줄 (32’)의 내용과 정면으로 모순된다.
(33) 한국, 캐나다코트 “맹폭” (한국일보 ’95. 11. 17.)
  제목과 잔줄의 수사법이 다른 것도 눈에 띈다. 스포츠 기사의 경우, 잔줄은 담담한 서술이지만 제목은 전쟁 보도를 연상케 하는 수가 있다. 예컨대 배구에 관한 기사의 제목인 (33)의 “맹폭”이 기사 안에서는 공격이 맹위를 떨쳐라는 구절 속에 풀려 나타난다. 1988년의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이러한 전쟁을 연상케 하는 비유가 외국인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을 우려하는 발언이 있었다.21)

6, 맺는말: 평가와 제언

  한국의 신문과 웬만큼 비교가 되는 것은 일본 신문이다. 겉으로는 체재가 거의 같아 보인다. 기사가 짧고 제목이 많이 붙는 것도 그렇고, 한자와 로마자, 아라비아 숫자가 아무 데나 마구 섞여 나타나는 것도 그렇다. 일본 신문에도 제목의 어휘, 제목의 문법이 따로 있다. 제목에서 줄어든 나라 이름이 잔줄에서 원래의 길이로 풀리는 것도, 제목에서 격토나 그 밖의 낱말이 생략되는 것도 우리 신문에서와 같다.22) 그러나 일본 신문의 기사 제목에서는 격토의 생략이 필수적이 아니다. , 도 제목에 자주 나타나며, 는 생략되는 경우가 없는 듯하다.
  한국과 일본의 신문이 겉으로 보아 비슷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이 여러 가지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한자의 사용과 관계된 것이다. 두 나라 신문에서 다 한자가 쓰이지만, 그 밑에 깔린 원칙은 완전히 다르다.
  일본에서는 명사, 형용사, 동사 등의 사전적인 뜻이 있는 부분은 한자로 쓰고 명사의 토, 동사의 말끝 등을 포함하는 문법적인 부분은 가나로 적는 전통이 아직도 살아 있다. 다만 들온 말이나 “당용한자표”에 없는 한자로 된 낱말 가운데 마땅한 “대용한자”도 없는 것만 가나로 쓴다. 그런 예외에 속하는 낱말에 아이사츠(인사)가 있다. 破綻은 綻이 당용한자표에 빠져 있기 때문에 탄으로 쓴다.23)
  다시 말해서, 일본 신문에서는 어떤 낱말이든, 또는 어떤 말조각이든, 맞춤법이 하나밖에 없다. 어떤 것은 반드시 한자로 쓰고, 어떤 것은 반드시 가나로 쓰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신문에서 맞춤법이 하나밖에 없는 것은 토박이말뿐이오, 신문 어휘의 대부분을 이루는 한자 말은 맞춤법이 한자로 하나, 한글로 하나 해서 둘 씩이다. 이것이 한국 신문의 치명적인 약점이오, 일본 신문과의 비교에서 결정적으로 불리한 점이다. 웬만큼의 수준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예컨대 꼿을 나란히 쓸 수 없듯이 학교學校도 나란히 쓸 수 없지 않은가?
  우리 신문을 일본 것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방법으로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마흔 해 전의 신문처럼 한자 말을 반드시 한자로 쓰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다시 1950년대처럼 한자투성이 신문을 사 볼 사람은 없다.24) 따라서 한자를 쓰는 신문이 성공하는 단 하나의 길은 대부분의 한자 말을 없애 버리고 그 대신에 토박이말을 쓰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꼭 써야 할 극소수의 한자 말을 가려내서 그것은 반드시 한자로 쓰고, 나머지는 모두 한글로 써야 할 것이다.
  모든 낱말의 맞춤법을 하나로 굳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한자를 섞지 않고 한글만 쓰는 것이다. 그러나 무절제하게 만들어지는 한자 말, 준말을 한글로만 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內部動搖深刻한自由當(동아일보 1956. 5. 24.)과 같은 마흔 해 전의 제목을 요즈음 신문에 나타남직한 내부동요심각민자당과 비교하면 이것을 꼭 진보로만 볼 수는 없다. 그때의 신문에는 그나마 나타나던 문법적인 요소 한이 지금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때 우리를 힘으로 지배한 일이 있고, 지금도 국제 사회에서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되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면에서 일본에 뒤진다고, 일본을 따라만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신문도 일본 것을 따라가는 것을 목표로 삼을 것이 아니라 세계의 수준에 도전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의 신문은 제목만의 어휘와 문법을 미련 없이 버려야 한다. 편집 기자는 자긍심을 가지고, 고답적으로 될 필요가 있다. 읽는 이의 눈을 끄는 짧은 제목으로 만족하고, “제목 독자”를 위하여 또 하나의 기사를 쓰지 말아야 한다. 이 “굵은 줄 기사”가 어휘와 문법을 파괴하는 가장 큰 요소이기 때문이다.25)
  신문은 잔줄에서도 한국어의 모든 규범을 철저히 지켜야 하며, 경쟁적으로 새로운 낱말을 지어내서 읽는 이에게 부담을 줄 것이 아니라, 절도 있는 표현으로 국민의 언어생활을 앞서서 끌고 나가야 한다.
  대학생이 신문을 못 읽는다고 야단이다. 이것은 대학생의 죄가 아니라 신문의 죄다. 적어도 중학생이 읽는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 어려운 것보다 쉬운 것이 더 좋은, 더 수준 높은 신문이다. 또 신문은 최신의 국어 교과서라 한다.26) 바람직한 일이지만, 오늘의 한국 신문에 관해서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우리는 위에서 한국어의 모든 규범이 제목에서 파괴되고 그 파괴가 잔줄로 이어지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것이 그대로 국민의 언어생활에서의 어휘 파괴, 문법 파괴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국어의 규범 체계를 “맹폭”하는 것이 신문만도 아니오. 또 신문이 퍼붓는 폭탄이 가장 큰 것도 아니다. 같은 대중매체로서의 방송, 행정관서의 공문, 학자들의 연구 논문…… 우리 사회의 어느 바닥에서도 반듯하고 정확한 말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신문 기자, 공무원, 학자, 그 밖의 ‘말로 일하는 이’ 모두가 크게 반성하고 말 바꾸기에 발벗고 나설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