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말 쓰기 운동】
제멋대로 가는 우리말
- 사전은 사전대로 말은 말대로 간다 -
배우리 / 한국 땅 이름 학회 회장
말글 생활을 ‘교과서적’으로 하라는 주문은 어찌 보면 무리일 수 있다. 말은 들어서 익히고, 그 사회에서 대개 ‘흘러가는 대로’쓰게 마련이어서 한번 잘못된 말이 퍼지면 그것의 쓰임이나 뜻이야 어떻든 간에 뜻만 통하면 된다는 식으로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언어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하나의 약속이므로 그 약속(정해진 법칙)에 따라 써 주어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우리말이 너무 잘못 가고 있고, 또 심하게 거칠어져 가고 있음을 본다.
일일이 지적하면 한이 없지만, 그동안 TV, 라디오 또는 신문 등에서 본 것 중 대표적인 것을 몇 골라 탓해 보고자 한다.
1. 뜻대로 쓰지 않는 말
모든 말은 모두 나름대로 그 고유의 뜻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뜻을 올바로 쓰고 있지 않은 예를 많이 볼 수가 있다. 그런 예는 방송이나 신문 등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몇 예를 들어 본다.
담백
“맛이 담백하고 좋지요?”
요즈음 맛을 표현하는 말 중에 이상한 것이 이 ‘담백하다’는 말이다.
국어사전에서 이 말을 찾아보았다.
대개의 사전에는 이 말이 없다. ‘담백(淡白)’ 또는 ‘담박(淡迫)’이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말도 원래 ‘맛’과는 거리가 먼 것이고, 설사 ‘맛’을 이 말로 표현한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는 그러한 맛의 표현의 것이 아니다.
* 담백(淡白): ‘담박(淡迫)’과 같음.
* 담박(淡迫):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함. 맛이나 빛이 산뜻함.
따라서 ‘담백(담박)’은 명사로서 나 쓸 수 있는 말이지 ‘담백하다’고 형용사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담백하다’는 말이 마구 돌아다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발생 불명의 말을 이렇게 마구 돌아다니고 퍼지게 하는 데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 것은 잡지나 텔레비전 등이다.
“맛이 어떻습니까?” (진행자)
“예, 맛이 담백하고 좋은데요.” (리포터)
“……여기에 기름을 조금 치면 맛이 아주 담백하고 참 좋습니다.” (요리사)
도대체 어떤 맛이 담백하다는 것인가? 시원한 맛이 난다는 것인가, 아니면 고소한 맛이 난다는 것인가?
어떻든 맛이 좋다는 표현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은데, 그 맛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사모님’
‘길을 가다가 사장님하고 불렀더니 열의 열 사람……’
이제는 이 노래의 가사도 바꿔야 할 판이다. 우리 누리에는 ‘사모님’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전에도 그렇긴 했지만 요즘 와서 ‘사모님’이란 말이 부쩍 남발되고 있다. 그만큼 이 세상에는 지체 높으신 분이 많아졌다는 증거인가?
이 ‘사모님’이란 말을 특히 많이 쓰는 곳이 있다. 복덕방이다. 이 집에는 어느 누가 찾아가도 ‘여자’이기만 하면 무조건 ‘사모님’이다. 젊었건 늙었건 직업이 과일 장수건 박사 부인이건 그런 건 관계가 없다.
“아유, 사모님 어서 오십시오. 좋은 집이 하나 나와 있습니다.”
복덕방 문턱을 넘기도 전에 나이 지긋한 복덕방 어른은 새파랗게 젊은 부인한태 ‘사모님’이란다. 집을 사러 가도 ‘사모님’, 팔러 가도 ‘사모님’, 심지어 셋방을 알아 보러 가도 ‘사모님’이다. 참, ‘사모님’ 되기 쉽다.
물론, 전에는 서울 강남 같은 곳에 투기 분위기가 일면서 복덕방에 ‘복부인’이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큼직한 돈 뭉치가 왔다 갔다 하고, 계약서에 도장이 찍히는 순간, 복덕방 어른의 안경 안으로는 자기 앞으로 안겨 올 ‘복비(?)’가 맴돌았다. ‘사모님’이 아니라 ‘사모님의 할애비’ 호칭이라도 써 줄 수 있으면 써 주었을 것이다.
또, ‘사모님’이란 호칭을 많이 써 주는 곳이 있다.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이다. 물건을 사러 가면 매장의 아가씨는 반색을 하며 우선 ‘사모님’ 소리부터 한다. 그래야 물건이 잘 팔리기 때문이다. 이건 손님이 여자의 경우이고, 남자일 때는 ‘사장님’으로 변한다.
‘사장님’ 되기도 쉽고, ‘사모님’ 되기도 이렇게 쉽다.
아파트 경비원도 ‘사모님’ 소리를 잘 한다.
“사모님 안 계신 동안에 어느 분이 왔다 갔습니다.”
세탁소 주인도 잘 쓴다.
“사모님, 내일 찾으러 오시면 됩니다.”
직장이나 모임에서도 이 ‘사모님’이란 말이 남발된다. 이런 곳에서는 존경의 목적보다는 아부와 영리가 목적인 경우가 많다. 또, 마땅히 써 주어야 할 만한 호칭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회사의 윗사람 부인에게는 직위와 관계없이 ‘사모님’이다.
그러나, 어원을 알고 나면 ‘사모님’은 무척 조심스러운 호·지칭이다.
* 사모님: 사모(師母)의 존대말. 또는 웃사람의 아내의 존칭으로 쓰이는 말.
* 사모=스승의 아내.
따라서, 엄격한 의미의 ‘사모님’은 자신을 가르친 스승의 아내일 뿐이다.
그러나, ‘스승의 아내’뿐 아니라 스승에 준하는 인격을 갖춘 웃사람의 아내도 ‘사모님’으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사회적으로 존경할 만한 인격을 갖춘 인사나 자기가 몸담고 있는 회사 사장을 비롯한 중역 중 나이가 10세 이상 연장이면 ‘사모님’으로 부르는 것도 예의라는 의견도 많다.
어떻든, 이제는 ‘사모님’의 뜻도 국어사전에 달리 들어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승려’와 ‘스님’
우리말은 전 세계 언어 중에서 가장 경어법이 잘 발달해 있다.
경어법이 발달해 있는 만큼 그 형태도 복잡해 익히기도 쉽질 않고, 웬만큼 알고 있다 해도 실수도 잦을 수 있다. 어떤 대상을 어느 정도의 높낮이를 두어 대접하느냐는 것이 경어법의 체계라 할 수 있는데, 이 체계가 그리 간단치를 않아서 우리 머리를 너무 복잡하게 한다.
이런 면에서 많은 이들이 늘 접하는 방송 언어는 경어법의 체계를 세워 나가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방송 경영-실무자들은 진행자들에게 늘 방송 말의 기본이 우선 시청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은 분이라 해도 그에 관한 보도를 할 때나 그가 직접 방송에 출연했다 해도 지나친 경어나 경칭을 쓸 수 없다는 점을 늘 환기시킨다.
“대통령 각하께서 입장하고 계십니다.”
“□□□ 총장님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
“□□□ 장관님께서 이 자리에 나와 주셨습니다.”
이러한 투의 방송 말은 방송의 주인인 시청자에게 거부감을 줄 수가 있다.
“대통령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 총장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 장관이(-께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런 정도의 말로도 충분한 것이다.
요즘 방송에서는 ‘선생님’이라는 호칭도 무분별하게 사용되는데, 이것도 문제이다.
성인을 상대로 하는 방송에 어느 국민학교 교사가 나왔는데, 진행자는 이런 말을 썼다.
“□□ 국민학교 □□□ 선생님께서 나오셨습니다.”
방송에 출연한 당사자로 보아서는 대단한 예의를 갖춘 것이 되지만, 방송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그만큼 낮춘 꼴이 된다. 여기서는 ‘선생님’보다는 ‘교사’ 정도가 좋았을 것이다.
94년 봄, 조계사 사태가 났을 때의 일이다.
각 방송이나 신문에서는 이에 관한 보도에 열을 올렸는데, ‘승려’에 대한 지칭이 달랐다.
“□ 명의 스님들이 각목을 휘두르며…….”
“일단은 승려들은 이층까지 올라가…….”
중을 이야기할 때 일반적으로 ‘스님’을 쓰긴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이 느끼는 ‘스님’은 모범적이며 훌륭한 중이다. 그런데, 각목을 휘두르며 피가 튀는 난투극을 벌이는 그런 중을 ‘스님’이라 하다니? 만약 이런 식으로 기사를 써야 한다면 신부(천주교의 사제)나 목사에 관한 기사를 써야 할 때도 꼭 ‘신부님-목사님’식으로 꼭 ‘님’자를 붙여야 할 것이다. 처음에는 신문이나 방송 모두 ‘스님’이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일부 신문들이 ‘승려’로 바꿔 쓰는, 웃지 못할 일이 나오기도 했다.
방송에서는 ‘님’자를 붙이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방청석으로 다가간 마이크가 어느 주부 앞으로 다가갔는가 했는데, 진행자의 입에서 떨어진 말,
“주부님은 자녀들을 몇 분이나 두었습니까?”
‘주부’가 아니라 당당히 ‘주부님’을 쓰고 있다. ‘님’자의 남발이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어느 사람에게 나 ‘님’자가 안 붙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선수님, 학생님, 상인님…….
무더위
‘용광로 같은 무더위’
‘가마솥 무더위’
‘찜통 무더위’
‘살인적인 무더위’
‘불볕 무더위’
표현도 시대에 따라 많이 달라지고 있다. 전에는 대개 ‘찌는 듯한 더위’라고 하더니 이제는 ‘살인적’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날씨에 대해 이처럼 심한 말이 더 있을까?
그러나, ‘더위’와 ‘무더위’는 엄밀히 말하면 다르다.
그런데, 신문 같은 데선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마구 쓰고 있는 것 같다. 아니, 구분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더위’보다 큰 느낌의 말이 ‘무더위’인 줄 알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무더위’는 ‘물’과 ‘더위’가 합해서 이루어진 말이다.
물+더위=물더위>무더위
즉, 공기 중에 물기(습기)가 있어 느껴지는 더위가 ‘무더위’인 것이다.
국어사전에도 ‘무더위’에 대한 풀이가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무더위: 찌는 듯한 더위
여기서 ‘찌는 듯이’라는 것은 단순히 ‘뜨겁다’는 의미만이 아니고, ‘뜨거운 김 속에 있는 것과 같은’의 느낌을 보태 주고 있다. 말하자면, 덥기만 한 것이 아니고, 습기까지 ‘더위’에 한몫을 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냥 습기 없이 덥기만 하다고 하면 그건 ‘찌는 듯이’ 더운 것이 아니고, ‘굽는 듯이’ 더운 것이 된다.
안절부절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을 ‘안절부절못하다’라고 한다. ‘좌불안석(坐不安席)’이란 말도 있는데, 이 말처럼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이 바로 ‘안절부절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안절부절못하다’란 말이 지금에 와서는 그냥 ‘안절부절하다’로 쓰이고도 있다.
“너 왜 그렇게 안절부절하고 있니?”
“그 사람이 갑자기 들이닥칠까 봐 안절부절이다.”
“안절부절 말고 가만히 좀 앉아 있거라.”
“시험이 겁나는지 안절부절하는 학생이…….”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다’나 ‘안절부절하다’처럼 ‘안절부절’을 하나의 명사처럼 쓰는 사람도 보게 된다. ‘안절부절’이란 말은 그 뒤에 ‘못하다’는 말을 붙여 써야만 되는 말인데도 이런 변칙적 말투가 판치고 있다.
박태순의 소설에도 ‘안절부절못하다’는 말이 나온다.
‘……병원에 간 어른들은 좀처럼 돌아올 줄을 몰랐기 때문에 태룡이는 이 날 하루종일 안절부절못한 채 집 안팎을 드나들었다.’
어느 신문엔 이쪽 저쪽에서 사고가 자꾸 터지니까 공무원들이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모른다는 기사를 깔아 놓고 큰 제목으로 이렇게 달기도 했다.
‘부천 세무 공무원들 안절부절’
‘도시가스공사, 사고 수습 놓고 안절부절’
제목까지 이렇게 달아 놓으니 탓을 안 들을 수 있는가.
2. 방송 말 오염
방송 언어는 일반 언어와 달라 그 조심이 크게 요구된다. 방송 언어에 따라 이 시대의 말의 흐름이 크게 달라진다 할 만큼 그 영향은 매우 크다.
따라서, 방송 언어는 가급적이면 ‘교과서적’이어야 하고, 일반 언어생활을 바르게 이끌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거의 매일 대하는 방송, 매일 듣고 보는 이 방송, 여기서 나오는 ‘말’이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그대로 ‘바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보통 주의가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방송 진행자나 출연자는 단순히 진행이나 프로의 충실을 기하는 데서 머물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언어생활을 바르게 이끈다는 책임감도 함께 가져야 한다. 언어 순화의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는 책임 의식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방송에서 새로이 반복되어 나오는 말은 유행어를 곧잘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이것이 건전한 것이면 모르되, 가끔은 너무 저속스러운 것이 튀어나오곤 해서 듣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곤 했다.
방송에서 만들어 내는 유행어
“용 될래?”
“용 돼라. 용 돼.-”
“이게 무슨 송아지 껌 씹는 소리냐?”
“이놈의 지지배.”
“분위기 정말 왕이에요.”
“웃기는 짜장면.”
“웃기는 짬뽕.”
“야리꾸리하게 말도 안 되게…….”
이것은 몇 년 전에 방송 위원회에서 지적한 그 당시의 유행어의 몇 예이다.
어찌 이것뿐이겠는가? 방송에서 만들어 낸 유행어 중 너무 저속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유행어는 잠시 유행했다가 금방 없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이름 그대로 유행하는(흘러가는) 말, ‘유행어’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방송이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사회에서는 그 방송에서 쏟아 내는 정도와 기간에 따라 단순한 유행어가 아닌, 고정어(?)가 되기도 하고 죽은 말이 되기도 한다. 어법도 맞지 않는 유행어가 우리 언어생활 속에서 깊이 뿌리 박히면 우리말의 정화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방송위는 방송 언어 공해의 문제점을
· 국어 문맥에 맞지 않는 무리한 표현
· 자기 비하적 표현
· 뒤틀린 외국어 표현
· 폐쇄적 집단의 말 사용
· 욕설의 빈번한 사용
· 억지 유행어의 사용
· 외설적 표현
등 일곱 가지로 분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로도 방송에선 계속 이상한 새 유행어를 만들어 냈다.
‘돌리도-물리도’
유행 말은 대개 젊은이들이 만들어 낸다. 그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일상 언어생활 중에서 새로운 유행 말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등에서 자료(?)를 얻어 그 말을 적당한 기회에 대화 속에 섞어 씀으로써 유행 말을 퍼뜨리기도 한다.
따라서, 유행 말의 큰 발원지(?)는 바로 방송이라 할 수가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보는 것이 코미디 프로인데, 이러한 프로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은 삽시간에 젊은이들의 입으로 옮겨져서 유행어로 등장시킨다.
몇 년 전 어느 텔레비전 방송의 코미디 프로인 ‘코미디 전망대’에서 ‘모의국회’라는 단막극은 무척 많은 유행어를 낳게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돌리도’와 ‘물리도’였다.
“내 청춘 돌리도.”
“아까 준 것 이리 물리도.”
‘돌리도’는 ‘돌려 줘’의 뜻이고 ‘물리도’는 ‘물려 줘’의 뜻인 모양인데, 이러한 유행어는 바보스런 말투를 이용한 것이다. 이러한 바보스런 말투는 듣는 이들에게 그 자아체로 웃음을 안겨 주는 것이므로 듣는 이에게 금방 기억되어 다른 말보다 더 쉽게 유행 말이 돼 버린다.
“이제 고마해(그만 해)”
이 ‘고마해’라는 말도 그런 예에 속한다.
‘웬…….’이나 ‘왕……’도 당시에 나온 유행어였다. 이 말은 광고 방송에까지 나와 유행어를 만드는 데 또 다른 한몫을 했다.
발음을 이상하게 해서 유행어를 만들기도 하지만, 억양을 이상하게 해서 유행어를 만들기도 한다. 한 개그맨이 애교를 떨면서 하는 인사말인 ‘안녕하시어요?’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금방 유행이 돼 버렸다. 그러나, 이 유행말은 오래 가질 못한다.
이상한 말투가 아닌, 이상한 어법을 써서 유행어를 만들기도 한다.
“안녕하시렵니까?”
“실례하시렵니다.”
유행어는 우리말만 가지고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외국어를 이상하게 발음함으로써 새로운 유행어를 탄생시키기도 한다.
어느 개그우먼이 극중에서 자주 썼던 ‘알라뷰’도 그 보기에 해당된다. ‘아이 러브 유’를 우승꽝스럽게 발음한 것이었다.
별로 재미없는 말도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그것이 재미있고, 또 재미있다 보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올라 유행어가 된다. 코미디로 인해서 새 유행어가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코미디 제작자들은 그 프로를 널리 부각시키기 위해서도 일부러 유행어를 만들어 내려고 애를 쓴다. 그런 효과를 노려 새로운 유행어를 만들어 내려고 애를 쓰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면 성취감을 맛보기도 한다.
어떻든 각 방송국에서 쏟아 내는 코미디 프로나 대사들은 오늘도 유행어를 낳고,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유행어는 얼마 안 있어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이용 가치(?)가 있는 것은 그 수명이 무척 오래 가는 것도 있다. 그런데, 너무 이상한 말투의 유행어가 단순히 유행어에 머물지 않고 우리 언어의 한 부분을 자리 잡게 되면 우리말이 잘못 걸어 갈 우려가 있다.
‘……걸랑요.’
유행어는 그 시대 사회상을 꼬집기도 하고, 풍자하기도 한다. 이 유행어는 그대로 통용어로 굳어 버리면 신조어가 돼 버리기도 한다. 연예계는 이러한 신조어나 유행어의 산실이 되기도 한다.
“지가요…… 했걸랑요.”
어느 연속극에서 한 탤런트가 매일 저녁 읊어 대던 이 말은 당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같은 투의 말을 해 대는 판국을 만들어 놓았다.
“지가요, 오늘 아르바이트를 했걸랑요.”
“지가요, 오늘 부산엘 가걸랑요.”
그 연속극에서 상대역을 맡았던 다른 탤런트도 혀 꼬부라진 소리의 또 다른 유행어를 만들어 놓았다.
“실례합니다……앙.”
이 말을 요상한 콧소리에 얹혀 뭇 남자 시청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었다.
“이게 뭡니까?”
이 유행어도 어느 교수의 말투를 한 개그맨이 평안도 사투리를 얹어 특이한 억양으로 텔레비전 속에서 말 끝마다 해 대는 통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어느 콧수염 가수의
“앗, 나의 실수.”
“아, 응애에요.”
등의 발음과 몸동작이 특이해 유행이 된 예였다.
“띠용.”
놀랐다는 뜻의 이 표현도 젊은이들 사이에서 상당히 오래 유행이 되었다.
어느 텔레비젼 코미디에선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제로 극을 펼쳤는데 여기서의 학생들이 저마다 손을 들고 “저요, 저요.”를 남발해, 이것이 점잖은 회의 석상에서까지 파고들어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고마해.”
“누버 자자.”
“밤낮 눈탱이 벌개 갖고…….”
이 모두 코미디를 좋아하는 층들에게 폭소의 마력을 던져 준 것들이었다.
코미디에서는 일부러 사투리 대사를 많이 넣는데, 그중에서도 충청도 사투리가 더 많이 쓰인다.
“괜찮아유.”
“……했시유.”
사투리는 재미가 담겨 있고, 재치가 넘쳐 있다. 그래서, 우리의 찌든 삶 속에 윤활유를 제공해 주고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칠 때는 우리의 건전한 언어생활을 잘못 이끌어 갈 수도 있다.
아주 오래 전에 라디오에서 한 코미디언이 우리 사회의 좋지 못한 구석을 들추어 설명해 나가다가 그 시간 가장 끝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이거 되겄습니까?”
한동안 크게 유행했던 말이었다.
은어
‘학삐리 깔치 땜에 뿅 갔어.“
방송 언어 오염의 위험 수위는 비속어뿐 아니라 은어 분야에도 예외가 아니다.
“네 사진 보고 뿅 갔어.”
“너한태 학삐리 깔치가 붙을 리는 없고…….”
“골 때니네.”
“……정말 죽여 주는군.”
“……띨띨하다구요.”
“야마가 돌아요.”
“찍 쌌어.”
“……피박이네.”
“못 먹어도 고네.”
“김일성이가 또라이인데, 또라이가 보턴만 누르면…….”
“영계 술집-영계 사냥꾼-영계와 포주의 협의 기구가 생긴다면…….”
“가리지날 매리지날 또라지날 조포카 돌돌카 제안카 열카…….”
이것도 방송 위원회가 몇 해전 전에 은어 사용 실태 발표 때 대표적으로 지적한 것들이었다.
은어는 그 뜻 그대로 ‘숨은 말’이다. 따라서, 그 숨은 뜻을 알아 내려면 따로 공부(?)해야 하거나 그야말로 머리를 번쩍번쩍 굴러야(?) 그 뜻을 간신히 이해할 수 있다. 정 알 수가 없으면 그 앞뒤 말을 살펴서 분위기를 읽어서라도 말하는 이의 숨은 뜻을 짐작해야 한다. ‘그 시대의 은어를 모르면 그 시대의 바보가 된다’고 할 정도로 은어는 시대를 타고 계속 변해 왔고 또 기발하다고 할 만큼 새롭고 깊은 것들이 나오고 빈도도 더 심해지고 있다.
입시를 치르러 가는 재수생에게 그 친구가 말했다.
“바나나 껍질 조심해.”
입시생은 대답했다.
“바나나? 염려 마. 이번엔 나 바나나 안 먹을 거야.”
친구가 답답하고도 우습지 않을 수 없다.
“어휴, 참 머리가 돌이다. 돌. 그러니까 해마다 바나나 껍질을 밟지.”
친구는 상대가 은어를 모른다고 이처럼 그 쪽을 ‘돌머리’ 취급을 했다. 그러나, 누가 돌머리인가? 입시에 미끄러지지 말라고 ‘바나나 껍질 밟으면 안 된다(바나나 껍질은 미끄러우니까)-조심해라-시험 잘 치러라’의 뜻으로 말한 것을 이것을 상대가 진짜 바나나 얘기로 알아듣고 답한 것으로 알고 ‘바나나 껍질을 밟는다(입시에 실패한다)’라고 말한 바로 그 친구가 돌머리가 아닌지? 입시생 친구의 바나나 안 먹을 거란 얘기는 사실 시험을 잘 치르겠다는 뜻이었는데.
은어는 이처럼 어렵다. 그리고, 은어에도 고품질이 있고, 저질이 있다. 그러나, 요즘 방송에서 마구 쏟아내는 그 은어 중엔 고품질이라고 말해 줄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주딩이-눈깔-턱쪼가리
방송 언어 오염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고 걱정들이 많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청소년 프로나 코미디 프로에 많고 드라마나 교양 프로에도 더러더러 나타난다.
몇 해 전에 방송 위원회에서 방송에서의 비속어-은어-유행어 사용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일이 있다.
이 조사에 따르면 비속어나 은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함은 물론, 의도적으로 불건전한 유행어나 신조어를 만들어 내는 사례가 아주 많다는 것이다.
방송위는 그 무렵의 한 달 동안 라디오나 텔레비전 프로를 대상으로 방송 언어 오염 정도를 조사했는데, 구체적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비속어의 경우이다.
“주딩이다 풀 붙였나?”
“지랄염병이나 해 보자.”
“이 자식이 눈깔 치켜 뜨는 것 좀 봐.”
“너는 가지도 없지만, 싸가지도 없잖아.”
“쪽 팔리시겠지만…….”
“그것도 참 지랄이더라구요.”
“턱쪼가릴 그냥…….”
“이거야말로 웃기는 짬뽕입니다.”
비속어 중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사람 몸 부위에 관한 것이다.
주딩이-눈깔-쪽-턱쪼가리…….
사실, 이런 말은 남과 심한 말다툼을 할 때도 쓰지 않아야 할 말들이다.
그런데, 남을 웃기고 싶어 상대방의 몸 부위를 천스러운 표현으로 일관한다면 이거야말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주딩이’란 말은 ‘주둥이’란 말이 표준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의 몸 부위 이름으로 쓸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주로 짐승에서나 쓰는 말이기 때문에 방송 등에서는 삼갈 말이다.
* 주둥이: ‘주둥아리’의 준말
* 주둥아리: ‘입’의 낮은 말. ‘부리’의 낮은 말.
‘눈깔’ 역시 함부로 써서 안 되고, ‘턱쪼가리(턱주가리)’ 역시 방송에서 함부로 내뱉을 말이 아니다. 인체 부위 중 비속어로 된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더 있으나, 방송에서 이런 말을 마구 내보내는 것은 크게 자제할 일이다.
“임마, 대가리 좀 굴려 봐.”(머리를 잘 써서 생각해 보라는 뜻)
“대갈통 까 버리기 전에…….”
“머리팍이 돌아야 말이지.”
“이눔 그냥 귀싸대기를…….”
아마 우리나라처럼 한 낱말을 가지고도 여러 가지로 바꿔 써 가며 자기의 격한 감정 표현을 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왜 그렇게 됐을까?
너무 못 살아 늘 불만이 많은 민족, 자고 깨면 앞에 보이는 사람이 모두 적처럼 느껴지고, 하루하루 살 맛이 나지 않는 삶을 살다 보니 욕밖에 튀어나오는 것이 없고, 그러다보니 자기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그것을 담는 그릇인 ‘말’에다 가시를 입혀 상대방에게 보내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말이 계속 사회 속에 맴돌게 된다면 삭막해서 어떻게 살겠는가?
3. 엉터리 말들
써 놓은 글을 제대로 읽는 것도 우리말을 잘 다듬어 나가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깨끗이’로 써 놓은 글자를 보고 ‘깨끄치’로 읽는가 하면 ‘닦아’로 써 놓은 글자를 보고는 ‘따까’로 읽기도 한다. ‘6·25’를 ‘육이오’로 읽기도 하지만 ‘육니오’로 읽기도 한다.
십이십이(12·12)
‘십이십이(12·12)’란 말도 잘못 쓰고 있는 예다.
“12·12 공세로 인한 여야의 대립은 마주 달리는 기관차와 같은 것이다.”
“12·12 사건을 대검에서 재조사하는 방안도…….”
“12·12 피해자들은 마지막으로 헌법 재판소에…….”
“12·12 관련자 기소 촉구를 위한 면담을 요청하겠다고…….”
국회에서는 12·12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민주당 12·12 대회를 열고…….”
90년대 초에는 각 신문의 정치면이 온통 12·12 범벅이었다. 뉴스 방송 역시 12·12 이야기가 그 으뜸을 이루었다.
그런데, 모두 ‘십이십이(시비시비)’로 읽고 있는 것이다.
‘12·12’는 ‘십이일이(시비일니)’로 읽어야 옳다.
다음의 예를 들어보자.
* 6·25>육이오
* 4·19>사일구
* 5·16>오일육
* 6·10 만세 운동>육십 만세 운동
* 3·15 부정 선거>삼일오 부정 선거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달(月)’을 나타내는 부분은 그대로 그 달 이름으로 읽지만, 그 뒤에 따르는 날짜 구분은 나타난 숫자를 따로 떼어 읽게 되어 있다. 또 우리는 이것을 지금까지 그대로 잘 지켜 왔다. 예를 들어 ‘6·25’를 읽을 때 우리는 ‘육 이십오’라고 읽지 않고, ‘육 이오’로 읽는다. 또, ‘4·19’를 읽을 때도 ‘사 십구’라고 읽지 않고, ‘사 일구’라고 읽는다.
그런데 12·12는 어떤 어법적 특권(?)을 가졌기에 이처럼 ‘십이십이’인가?
물론, ‘십이십이(시비시비)’가 ‘십이일이(십이일니)’보다 발음이 쉽고 외기도 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말은 어디까지나 법칙에 따라야 한다. 발음이나 외기 같은 것은 법칙 후의 문제다.
토씨 생략
토씨(조사) 하나 잘못 써서 낭패를 보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우리말에 토(토씨)가 없다고 해 보자.
‘갑동 을숙 밥 주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갑동이가 을순에게 밥을 주다’
‘갑동에게 을순이가 밥을 주다’
‘갑동이와 을순에게 (누군가가) 밥을 주다’
‘갑동이와 을순이가 (누군가에게) 밥을 주다’
이쯤 되면 토씨가 우리말에서 얼마나 큰 구실을 하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희극(연극 대본)이나 시나리오 같은 작품에서는 토씨 중에 임자말(주어)을 빼고 쓰는 경우가 많다.
‘……영자, 무대 뒤에서 나온다.’
‘……철수, 상대를 향해 갑자기 총을 겨눈다.’
그러나 이 경우엔 그 임자가 되는 말 뒤에 반드시 쉼표가 붙기 때문에 별로 혼동이 일지 않는다.
토씨를 가장 잘 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스포츠 중계 방송의 담당 아나운서.
“홍명보 잡았습니다. 다음, 서정원, 다시 상대 팀…… 그러나, 다시 서정원 코너쪽, 오른발 슛 골인.”
짧은 시간에 많은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수긍이 갈까?
그러나, 이를 듣는 이가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다면야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런데, ‘홍명보 잡다’니, 홍명보를 누가 잡는가? ‘다음 서정원’이라니, 서정원이 어떻게 됐다는 이야기인가? ‘오른발 골인’이라니, 공이 골인되지 않고 오른발이 골인됐다는 얘기인가?
이건 보통 실수가 아닌데도 청취자나 시청자가 너그럽게(?) 봐 준다.
“홍명보의 패스를 받은 공, 서정원에게, 그러나, 다시 상대 팀에 빼앗깁니다. 그러나 공은 다시 서정원에게 옵니다. 코너 쪽으로 간 서정원이 오른발로 슛을 합니다. 골인됩니다.”
좀 답답하긴 하다. 그러나, 말은 상대방이 알아듣는 데 우선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고기 냉장고 있음’
이렇게 써 놓은 안내 쪽지가 씌어 있는 어느 푸줏간에 손님이 들어왔다.
고기 두어 근을 사고 난 이 손님,
“고기 냉장고는 얼마 합니까?”
영문을 모른 주인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또 하는 말.
“집에 냉장고가 없어서 작은 ‘고기 냉장고’라도 하나 사두려구요.”
“냉장고 파는 곳이 아닌데요.”
“저기 써 붙였잖습니까? 고기 냉장고가 있다고…….”
이쯤되면 토씨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그 중요한 토씨를 빼놓고 쓰는 사람들이 많아 우리말을 비뚠 길로 내몰고 있다.
“김일성이가-김정일이가”
우리말은 토씨(조사)가 발달한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풍부한 언어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지라도 이 토씨를 잘 쓰지 못하면 우리말에선 멋진 말을 구사할 수가 없다. 또 그 토씨 하나 잘못 써서 낭패를 당하는 수도 얼마쯤이라도 있다.
임자토씨(주격 조사)만 해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토씨는 우선 임자말에 붙는 것이어서 그 토씨를 쓸 때 다른 어느 토씨보다 무척 조심을 요한다. 또 이 토씨에서도 높임과 낮춤이 있어 더욱 그렇다.
“대통령 각하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 경우, ‘각하’ 다음에 따른 ‘가’가 어울리지 않음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앞의 말에 이미 높임을 갖춘 말이 있으면 그 뒤에 따르는 토씨도 당연히 그에 어울리는 높임의 토씨가 따르는 것이 우리말의 버릇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식을 철저하게 익혔다는 어떤 사람이 사회를 볼 때 썼다는 말.
“이제 □□□ 총장님의 말씀께서 계시겠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사람들이 임자토씨의 ‘이’에 ‘가’를 덧붙여 쓰는 이상한 말버릇이 퍼져 가고 있다.
“김일성이가 사망했다.”
“김정일이가 건강이 나쁘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롯데 마운드의 윤학길이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강기웅이가 결국 해냈다.”
이런 말들은 방송말에서 특히 심한데, 출연자뿐 아니라 방송 진행자까지 이런 나쁜 말버릇에 젖어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임자토씨 ‘이’에 또 하나의 임자토씨 ‘가’가 필요없이 덧붙은 이 괴상한 말버릇은 젊은 층에게로 계속 퍼져 가고 있어 더욱 걱정이다.
‘역전(驛前)’이 부족해 ‘역전앞’이 되고, ‘고목(枯木)’이 부족해 ‘고목나무’가 되고, ‘약수(藥水)’가 부족해 ‘약수물’이 되더니만 급기야 토씨까지 ‘역전앞’꼴의 말투로 옮겨 가고 있다.
지금은 우리말에서 앞에 받침이 붙는 말이 올 때는 ‘이’가, 받침이 안 붙는 말이 올 때는 ‘가’가 따르게 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받침이 있건 없건 대개 ‘이’로 주로 씌었다.
‘구롬이 머흐더니’(구름이 머물더니) <송강가사>
‘다른 나라히 와’(다른 나라가 와서) <석보상절>
그렇던 것이 뒤에 와서 지금과 같이 받침이 있고 없음에 따라 ‘이’와 ‘가’로 나뉘어 쓰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이’ 몫이 되어야 할 자리까지 ‘가’가 잡아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경우는 있다.
“영철이가 학교에 갔다.”
이름은 ‘영철’이겠지만, 여기에 ‘이’가 붙고 그 뒤에 또 ‘가’가 붙는다.
그러나, 이것은 ‘이’를 접미사처럼 본 데서 나온 현상이지만, 성과 이름이 함께 붙는 말을 쓸 때는 이렇게 써서는 안 될 것이다.
“김영철이가 학교에 갔다.”(×)
“김영철이 학교에 갔다.”(○)
그런데, 이제는 ‘김일성이가’, ‘김정일이가’ 식으로 ‘이가’가 마구 쓰이고 있질 않은가.
참-진짜
“참말로 아주 진짜 참기름 있습니다.”
어느 참기름 가게에 붙어 있는 쪽지 선전물에 이렇게 써 있었다.
참기름 중에도 가짜가 있다 보니, ‘진짜’가 앞에 붙어야 믿게 되고, 그것도 모자라 그 앞에 ‘참말로 아주’가 또 붙어야 하는 세상.
“참기름 있습니다.”
믿는 세상이라면 이 말로도 충분할 텐데, 그렇지 못한 세상이 되다 보니, ‘진짜’라는 수식어가 몇 번씩 반복되어 나와야 한다. 참 희한한 세상 다 보겠다.
롱다리-숏다리
어느 신문 ‘스포츠란’에서 ‘대학 배구 경기’ 기사 제목을 ‘롱다리 경기, 우승 문턱에’라고 했다. 그런데, ‘롱다리’라는 말은 어느 개그맨이 퍼트린 말로, 영어 단어와 우리말이 어설프게 뒤섞인 말이다. 물론, 이는 젊은 층이 즐겨 보는 스포츠란이기에 재미와 유행어의 민감성을 표현코자 하는 의도에서 사용했겠으나, 좋은 표현이 아니다.
기사 제목을 왜 하필 ‘롱다리’라고 했을까?
이 ‘롱다리’라는 말은 요즘 무척 빠른 속도로 전파되고 있다. 처음엔 젊은 층에서 장난기 섞인 말로 하는 것이니 조금 돌다가 사라질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날이 갈수록 이 말은 사회 어느 층에나 마구 퍼져 가고 있다.
특히, 언론 기관에서마저 이 말을 거침없이 쓰고 있으니 문제 중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오늘 그 경기가 잘 풀린 것은 그 선수들의 롱다리 덕분이다.”
“롱다리라서 어느 옷을 입어도 스타일이 좋다.”
“저는 숏다리라서 롱다리 하고 서 있으면 쪽 팔려요.”
아무 스스럼 없이 ‘롱다리’를 쓰고, 또 이에 상대되는 ‘숏다리’라는 말도 쓴다. 빨리 우리 곁에서 사라져야 할 말이다.
‘왔다’와 ‘끝내 주다’
동사가 명사로 변하는 일은 우리말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말의 자연스런 변화의 흐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즉, 동사가 명사로 변할 때는 그 어간에서 대개 ‘ㅁ’이나 ‘이’ 따위를 취해 변하게 마련이다.
살다 > 삶
죽다 > 죽음
먹다 > 먹이
굽다 > 굽이 > 구이
그런데, 우습게도 현재의 통용 언어 중에는 과거형 어미를 가진 동사가 그대로 명사가 된 말이 있다. 물론, 정식으로 표준말이 된 것도 아니고, 사전에 올라 있는 말도 아니다.
‘왔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야, 그 사람. 얼굴 용모하며, 헌칠한 키하며, 정말 ‘왔다’더라. ”
이처럼 ‘왔다’를 동사가 아닌 명사로 쓰고 있다. 만들어진 명사이고 억지 낱말이다. ‘최고’라는 말 대신에 이 ‘왔다’를 쓰고 있다.
“……이 정도면 이 물건도 ‘왔다’지 뭐. ”
“그 녀석 부지런 하나만큼은 정말로 ‘왔다’인데. ”
이 “왔다’의 비슷한 뜻으로 ‘끝내 준다’가 있는데, 이 말도 요즈음 부쩍 많이 쓰이고 있다.
“그 사람 말솜씨는 끝내 주는 사람이야. ”
“끝내 주게 일 잘 하네. ”
이런 말들에서의 ‘끝내 주다’란 말은 ‘더 이상 기대할 없이 없을 만큼 잘하다’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끝내 줌’은 ‘완료’의 의미가 들어가 있어 우리말을 잘 모르는 외국인이라도 어느 정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으나 ‘왔다’는 우리말의 조어법이나 자연스런 흐름에서 너무도 벗어난 것이어서 이 말에 많이 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아리송하게 한다.
‘왔다’가 이런 정도로 우리말 속에 자리를 잡는다면 앞으로 나올 모든 국어사전에는 이 말이 정식으로 올라가고, 아마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풀이가 곁들여 질지도 모른다.
*왔다: 모든 것을 다 갖춰 그것이 아주 만족스럽게 보일 때 쓰는 말. 또는 좋은 결과를 보고 흡족한 뜻을 나타낼 때 ‘최고다’의 뜻으로 쓰는 말.
‘끝내 주다’ 역시 사전에 올라갈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끝내 주다: 일을 조금도 빈틈 없이 계획대로 제 시간 안에 만족스럽게 잘해 놓다.
우리 국어사전이 이런 식으로 나올리는 없겠지만, 어떻든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우리말이 사전 따로 말 따로 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먹었다’
‘먹었다’는 말 역시 그 원 뜻과는 거리가 먼 쪽으로 가고 있다.
‘한 방 먹었다.’
‘골탕 먹었다.’
‘애 먹었다.’
‘욕 먹었다.’
‘꼴지 먹었다.’
요즘엔 이런 말까지 있다.
“엄마 나 우승 먹었어. ”
집에서 밥을 먹었는데, 축구 경기에서는 골을 먹어, 감독으로부터 욕을 먹고는 분풀이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먹었다. 우승을 먹어야 하는데, 애를 먹으며 연습을 했는데도 달리기에선 꼴찌를 먹어 고배(苦杯)를 마셔야(먹어야) 했다. 그래서, 선생님한테 욕을 먹을까 봐 겁을 먹었다.
‘먹는 것’은 대개 좋은 것인데, 아무 거나 먹다가는 세상 살기가 정말을 어렵게 되었다. ‘엿 먹어라’라는 말은 당해 보라는 뜻으로 돼 버렸는데, 그 좋은 엿이 왜 이렇게 ‘먹다’ 앞에서 푸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그 달디단 엿을 먹으라면서 그것을 먹는 상대방이 안 되길 바라다니!
‘먹다’란 말의 사전적인 뜻 몇 가지는 이러하다.
·물건을 입 속으로 넣어 뱃속으로 들여보내다.
·담배 따위를 피우다.
·어떤 물질을 제 몸 안으로 들어가게 하다.(예: 종이가 물을 먹다)
·자기에게 욕하는 말을 들어 당하다.
·나이를 가지다.
·일부러 하려는 뜻을 품다.(예: 앙심 먹었다.)
·위협을 받아 겁을 품다.(예: 겁 먹었다.)
이런 정도의 뜻으로나 쓰이는 그 ‘먹다’가 왜 그렇게 여러 가지 뜻으로 마구 옮겨 갔을까?
앞으로는 ‘하다’라는 말 대신 이 ‘먹다’가 모든 말을 잡아 나갈지 모른다. 지금 ‘먹다’는 무서운 속도로 다른 말들을 계속 먹어(?) 가고 있다.
4. 된소리의 새 유행 말
‘껀’
지금의 ‘꾀꼬리’라는 말은 그 새가 ‘꾀꼴꾀꼴’하는 울음 소리 때문에 나왔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꾀꼬리’는 ‘곳고리’라는 옛말에서 나왔으니 옛날 사람들은 아마도 꾀꼬리가 ‘곳골곳골’하고 울었다고 생각을 한 모양이다.
꾀꼴+이=꾀꼴이>꾀꼬리
곳골+이=곳골이>곳고리
요즘 꾀꼬리들도 사람을 닮아 된소리를 좋아하는가? 아니면, ‘곳골곳골’하고 울면 사람들이 알아 주질 않으니까 ‘꾀꼴꾀꼴’하고 강하게 울어 대는 것일까?
우리말은 된소리로 변한 것이 너무도 많다.
* 사호다>싸호다>싸우다
* (머리에 모자를) 스다>쓰다
* (총을) 소다>쏘다
* 구짖다>꾸짖다
* 불휘>부뤼>부리>뿌리
* (머리를) 갓다>각다>깎다
* (얼굴을) 싯다>씻다
* 곶>꽃
* (고기를) 십다>씹다
이것은 이미 과거에 변한 말들이지만, 지금도 우리말은 계속 된소리로 바뀌고 있다.
* “잘 좀 따까라(닦아라).”
* “쪼끔(조금)만 주세요.”
요즘에 많이 쓰는 말의 ‘껀’도 ‘건(件)’이 된소리로 변한 경우이다.
* “한 껀 했냐? ”
* “큰 껀이 하나 터져서 그것 막느라고 바쁘지. ”
* “사사 껀껀 트집이냐? ”
이런 식이다.
이러다간 우리말 사전에도 이 새 말을 올려 줘야 할 판이다. 우리말을 배우는 외국인이 우리 국어사전에 올라 있는 말과 실제 쓰는 말이 다른 것이 너무도 많고, 또 흔히 쓰는 말조차 사전에 없는 것을 보고 애먹었다는 이야기는 우리말이 얼마나 ‘사전 따로 말 따로’인지를 깊이 새겨 보게 한다.
실제 ‘껀’이란 말들은 많이 쓰고 있고, 누구나 그것이 뜻하는 바를 잘 알지만 이 말은 어느 사전에서도 볼 수가 없다.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의 의식도 문제다. 사전에도 없는 말을 그렇게 마구 써도 좋은 것인지? ‘건’이라는 말을 쓸 수 있겠지만 ‘건’이라는 사람은 전혀 없다. ‘건’은 싱겁게 들리고, ‘껀’은 강하게 들려 그런가? 이야기 껀껀(?)‘껀’이다. 하도 ‘껀껀’하니까 ‘건’이라고 하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건’은 약한 것이고 ‘껀’은 강한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쩌다 우리말이 어렇게 모두 강한 옷을 입어야 제 맛을 내게 되었는가?
하긴, ‘소주’를 먹어서는 안 취하고 ‘쐬주’를 먹어야 취하는 세상이라니. 모두들 하나같이 ‘쑬’이 ‘쎈’이 사람들이 돼 버렸으니까.
우리말들이 자꾸 주책없이 ‘쎈 쑬’를 먹고 있어 걱정이다.
‘꺼리’
요즘 ‘식량’이란 말 대신에 많이 쓰고 있는 말이 있다. 바로 ‘먹거리’라는 말이다. 이 말은 아직 웬만한 사전에는 올라 있지 않은 말이다.
‘먹거리’라는 말은 ‘먹+거리’의 조어이다.
그런데, 이 말은 많은 학자들이 어법상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말은 옛날에도 없었고, 지금의 방언 중에도 이러한 말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먹거리’에서 ‘먹’은 ‘먹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이니, 당연히 ‘먹’ 다음에 ‘-을’이라는 관형형 어미가 따라 붙고 나서 ‘-거리’가 붙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동사에 ‘-거리’가 들어간 말은 꽤 많다.
‘볼거리-읽을거리-쓸거리-땔거리’ 등이 모두 그러한 말들이다. 이런 말들도 ‘먹거리’ 식으로 써도 된다고 하면 ‘읽을거리’는 ‘읽거리’가 돼야하고, ‘입을거리’는 ‘입거리’가 돼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 ‘먹거리’란 말의 사용을 반대하는 이들의 중장이다. 따라서, ‘먹거리’가 아닌, ‘먹을거리’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거리’나 ‘거리’는 국어사전에 다음과 같은 풀이로 나와 있다.
① 일정한 내용이 될 만한 요소.
② 일정한 행동의 대상이 될 만한 밑감.
③ 무엇을 만드는 데 밑감으로 되는 것.
‘굿거리-김칫거리-웃음거리-이야깃거리-글거리-반찬거리’ 식으로 쓰는 것은 위 ③의 경우이고 ‘읽을거리-땔거리’식으로 쓰는 것은 위 ②의 경우이다.
위 ①의 다음과 같은 식으로 쓰는 말이다.
·글을 써야 하겠는데 쓸 만한 ‘거리’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일을 하다가 좋은 ‘거리’ 하나가 얼른 생각났다.
그런데, 지금은 ‘거리’라고 쓰는 사람이 별로 없다. 모두가 ‘꺼리’로 발음을 하고, 또 그렇게 말해야 쉽게 알아듣는다.
·“심심한데 좀 좋은 ‘꺼리’ 하나 없냐? ”
·“오늘 방송할 만한 ‘꺼리’가 하나 들어왔다. ”
돈을 ‘쩐’으로, ‘과(학과)’를 ‘꽈’로 쓰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된소리의 엉터리 새 말들은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걱정이 든다.
우리말은 지금에 이르러 심하게 앓고 있는 느낌을 준다.
거친 말, 일본어, 서구어, 거기에 은어-비어까지 판을 쳐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광복 50년인 올해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정부대로, 민간은 민간인대로 모두 노력을 해 온 것 같기는 하지만, 오늘의 우리 언어 현실은 너무도 심각하다. 문법이나 어법에 크게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써 대는 방송이나 출판물-신문 등도 책임이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이라도 정부나 국민이 함께 힘을 써서 우리말의 새 자리를 마련해 주고,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우리말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