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결 김윤경 선생의 학문과 인간】
한결이 제자들에게 남기신 글
문효근 편·해설 / 연세 대학교 명예 교수
한결은 제자들에게 여러 편의 글을 남기시었다. 다 구슬 같고, 마음에 양식이 될 수 있는 내용을 담으셨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서도 아직 따로 ‘한결 전집’ 등에 실리지 않았거나, 아직 세상에 덜 알려졌다고 생각되는 글들을 모아 보았다. 제한된 지면이라 욕심껏 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여섯 편밖에 싣지 못했으나, 여기 이 여섯 편의 글에도 선생님의 믿음, 자애로움, 지조, 성실성, 애국 애족의 정신 등이 잘 나타나 있다.
1. “나의 인생관”
한결의 이 글은 한결이 직접 쓰신 “4291, 7, 2. 아침 7:20~7:30 제일방송”의 원고를 옮긴 것이다. 한결의 유족들이 필자에게 한결의 ‘스크래프-부크’와 함께 주신 것이다. 10분 동안에 방송할 수 있는 원고이다. 양면 괘지 석 장의 분량이다. 내용을 말하기에 앞서, 첫째로 흥미로운 것은, 그 쪽수 매기는 방법이다. 첫째 장 위편 쪽수 매기는 자리에는 “3/1”, 둘째엔 “2”, 셋째엔 “3”… 여섯째 자리엔 “6”으로 되어 있다. 이로써 보면, 여기 이 “3/1”의 뜻은 ‘이 원고는 석 장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의 이 쪽수는 그 셋 가운데서 첫째에 속한다’는 뜻이다. 이 사람으로서는 처음 봤다. 참 그 치밀성에 놀랐다.
내용을 보면, 한결의 신앙인으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 사랑의 정신, 신의, 진리 탐구에 대한 신앙인으로서의 사고, 화합, 자유 사랑의 신조 등 그 삶의 모습들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한결은 참된 삶을 위해 노력하고 실천하신 티없이 맑은 정신의 소유자이시었음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글은 아직 인쇄물로는 나와 있지 않은 것 같고, 또 매우 한정된 시간의 방송용이라, 그 내용 또한 요약되어 있다. 제한된 분량을 요구하는 이런 글쓰기에는 오히려 매우 적당하다고 생각되었다. 적혀 있는 그대로를 옮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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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관”(4291,7,2. 아침 7:20~7:30 제일방송)
- 아무 준비 없이 갑작이 불리어 왔기 때문에 좀 조직 있고 체계 있는 말은 못하겠읍니다마는 평소에 생각하고 살아온 바를 순서 없이 말씀 드리겠읍니다.
- 나는 열서너 살 때부터 예수교 신자의 가정에 자라 났고 소, 중, 전문대학을 다 예수교 계통의 가정에 자라 났기 때문에 예수의 교훈이 나의 인생관의 토대가 되었읍니다. 그 중에서도 첫째, 내 자신의 인격 발전의 목표를 정하여 준 것은 “하느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도 완전하라”(마태 5장 48절)하신 예수의 교훈이요 둘째, 사회적, 공적 생활의 방법을 정하여 준 것은 “서로 사랑하라”,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하신 교훈이었읍니다. 세째로, 직업을 위한 진리로 나의 인생관의 한 부분을 이루게 한 것은 “하늘 나라는 힘 있는 자가 빼앗는다” 함인데 이는 스마일쓰의 “자조론”에 나타난 정신이라든지 동양 재래의 교훈으로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이를 도우신다”(天助自助)함과도 같은 뜻으로서 맡은 직무에 대하여는 남이 무엇이라거나, 남이야 어떻게 하거나 나의 맡은 일은 어김 없이 충실히 다하여야 한다는 신조를 지키기에 노력하였읍니다. 혹은 나아갈 때에 장애가 가로 놓이어 낙담 실망할 때도 있었읍니다마는 이에 대하여는 “좋은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아라. 때가 이르면 걷우게 될 것이다”하신 성서의 교훈이 나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읍니다. 네째, 사회 생활의 철칙으로 “신의(信義)를 지키어야 된다”는 신조를 가지게 되었읍니다. 왜 이렇게 자신하게 되었는가 하면 남의 사회는 우리 한민족의 사회보다 번영하고 행복스러운데 어찌하여 우리 사회는 가장 가난하고 부끄럽게 살게 되었느냐 함을 생각할 때에 이는 서로 속이고 빼앗으려 하는 악습이 남보다 많은 때문임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천변지재 같은 불가항력의 장애가 막게 됨이 아니면 거짓말을 버리어야겠다, 속이는 버릇을 뿌리째 뽑아버리어야겠다, 남에게 유익되는 일은 못할망정 금성 철벽 같이 믿음성, 곧 신의를 굳게 지키어야 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섯째, 사회 생활의 철칙의 하나로 화평을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하자는 신조입니다. 모욕으로 자존심을 상하게 될 때 참기 어려워서 감정으로 흐르게 되고 그리 되면 다툼이 일어나게 되어 화평은 깨어지게 됩니다. 한 가정에서나 단체에서나 민족 사이에서 화평이 깨어진 때처럼 심한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화평을 이루는 근본은 참음이라 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百忍堂中 有太和”라 하여 백 번 참는 집안에 큰 화평이 있다 한 것입니다. 이 화평을 위하여는 이미 둘째에서 말한 사랑의 정신이 철저하면 화평은 자연 따라 오게 되리라 믿습니다. 여섯째, 자유를 사랑하는 신좁니다. 토마쓰힐 그린이 말하기를 “자기가 원함과 같은 남의 원함을 방해함이 아니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함이 자유라”하였읍니다. 남의 하고저 함을 막음이 있으면 자기의 하고 싶은 일이라도 하지 못하는 제한이 있음을 모르면 자기가 하고 싶다고 다 하는 것은 난포한 이기주의 밖에 못되는 것입니다. 자유는 왜정 때에나 감옥에 살아 본 이라야 자유의 귀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이상은 젊은 때부터 읽고 보고 들은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하나씩 일기 거죽에 적어 넣고 실행하기를 힘쓰려는 신조에서 추린 것입니다.#/
2. “잊혀지지 않는 제자”
이 제목의 글은 ‘한대신문’-‘196호’(1968. 2. 28)에 실려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한 가지를 말하라 한다면, 그것은 한결의 제자들에 대한 자애심-그 애절한 추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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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지지 않는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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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미도’라는 제자는 재학 시대에 나이도 많았거니와 인격상으로서도 원만하였고, 성격상으로도 우수하였고 다정스럽게 때때로 찾아 주어 학생들의 대표격으로 사제 간의 막김의 벽을 터 주었다. 그가 졸업한 뒤의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1937년 8월 어느날이다. 내가 ‘동우회(=흥사단)사건’에 걸리어 종로 경찰서에서 두 달동안 갖은 악형, 야만적 고문을 당하다가 검사국으로 넘어가게 되어 검사국에서 검사의 심문을 받고 연희전문 동기동창인 이묘묵(해방 뒤 하지 중장의 비서로도 있었고 그 뒤 영국 주재 한국 공사로 가 있다가 수 년전에 작고한) 군의 한 팔과 나의 팔이 함께 수갑에 묶이어 마차에 실리어 서대문 감옥 미결감으로 실리어 가는데 배재학교 앞에서 정동 예배당으로 내리어 갈 무렵에 누군지 목메인, 눈물겨운 목소리로 ‘선생님!’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내려다 보니, 그는 곧 김미도란 제자였다. 감옥에 간 지 몇 날 뒤에 그 제자가 감옥은 마루방이고 이불도 얇아서 몹시 추울 것을 염려하여서 푹신한 흰 담뇨를 사서 들여 보내어 주었다. 나는 또 다시 크게 감격되어 눈물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평소에 사회에서 이러한 일을 당하였다면 잠시 뒤에 잊어버리고 말게 됨이 예사스럽지마는 자유가 없이 고통스럽게 지옥 같은 감옥에서 이런 일을 당하니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감개 무량하던 감격의 인상이 사라지지 않고 잊혀지지 않는다.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홍원 경찰서 유치장에서 일 년 동안 왜정의 야만적 악형을 당할 때에도 1943년 1월 1일의 설을 당하여 홍원 유지 도봉수(도상봉 씨 부친), 이봉수, 최춘복(이화전문 졸업생, 이희승 님 제자) 세 분이 경찰서의 허가를 얻어 산해 진미의 진수 성찬을 차려 들여보내어 주어, 우리 피고 일동은 주리던 판에 너무 먹어서 배탈 안 난 이가 별로 없었지마는 그 세 분에게 대한 감사와 감격은 잊히지 않는 것이다. 그 세 분 얼굴도 대하지 못하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건늬지 못하였으므로 이 사건이 해결되면 우리는 홍원으로 가서 그 세 분을 찾아 보고, 한 자리에 앉아 감격의 환담을 나누어 보자고 약속한 일도 있었지마는 해방으로 이 사건이 끝났으나 삼팔선이 가로 막히어 여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말이 곁길로 간 것 같으니 다시 김미도 제자 이야기로 되돌아 가자. 그 제자는 상해로 가서 거거서 결혼하고 ‘임성공사’를 경영하여 유족한 생활을 하면서 자녀를 본국에 보내어 교육을 받게도 하고, 미국으로 유학도 보내었다. 그는 그 곳 산천을 수(繡) 놓아 그린 족자라든지 그밖의 선물을 많이 보내어 주었다. 몇 번 귀국하여 만나기도 하였다. 그러하나, 중국이 빨갱이 세상으로 바뀐 뒤에는 그 재산이 다 파괴되고 홍콩으로 피난하여 산다고 하는 이야기를 귀국하였을 때에 말로도 들었고 서신으로 알았다. 그러하나, 몇해째 소식이 없다. 퍽 그립고 궁금하다.
3. “거듭나자”
이 제목의 글은 한결께서 연세 대학교 대학원장으로 계실 때에 “연세춘추”(1959. 6. 22-9. 21)에 연재하신 것이다. 그 차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도&덕적으로’에는 예절-물욕-성욕; 둘째, ‘지적으로’에는 산청 김모가 독사로 물게 하여 혹떼려다가 죽음-점장이, 관상장이, 무당, 판수-지식이 뒤진 개인이나 민족 국가는 쇠망함; 셋째, ‘건강으로’에는 중고등 학생 체력 검사 결과-덴마크 의사의 한국 사람의 건강 상태 보고-본 대학교 보건 소장의 보고: 넷째, ‘결론’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지면의 제약상, 그 넷째의 ‘결론’의 것만 아래에 소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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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나자”의 ‘결론’
- ‘니고데모’는 바리새 교인이요 관원(공무원)이요 ‘이스라엘’의 선생이어서 언뜻 보기에는 훌륭한, 흠 없는 사람 같아 보이었지마는 예수께서는 그더러 ‘거듭나라’고 하였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건전한 사람을 찾는다면 온 천하 고금에 하나도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건전한 사람이 되도록 거듭나기를 맹서하여야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전일에 어느 기회엔가 건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쓸레이’의 일곱 가지 덕(절제·용기·예지·공정·박애·경건·겸허)을 소개하면서 일생을 통하여 날마다 닦고 훈련하라고 권한 일이 있었거니와 이제도 이것을 되풀이하여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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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 종교를 부인하는 사상을 가진 분은 이 종교적 덕을 거부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곧 자기와 만물을 지배하고 있는 우주에 관통한 진리(眞理) 혹은 ‘로고스(Logos)’를 부인하지 못할 것이요, 이 ‘로고스’를 인정한다면 그 주재자(主宰者)를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 주재자에게 경건과 겸허의 마음으로 순종함이 곧 종교적 덕이다. 또는 사회적 덕으로도 경건과 겸허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 나는 나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종교적 덕은 자기 파괴의 악을 막기에 큰 방패가 되었고, 할 수 있는 대로 ‘이웃’(민족·사회)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는 생활을 하려는 근거가 된 것이다. 이 종교적 덕은 나의 아버지에게 받은 것이다. 그의 37세 때요 나의 11세 되던 광무(光武) 8년 (서기 1904) 정월에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그때부터 독실한 신앙을 쌓아 올리었던 것이다. 내가 15세 때, 서울로 신교육을 받으러 오게 될 때, 그는 나에게 ‘예수의 교회에 좇아 살라’고 하는 교훈을 준 것이었다. 나는 이 교훈으로 술 친구의 유혹, 이성의 유혹, 물욕의 유혹 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이 원고는 ‘대학생의 일상 생활’이란 제목으로 써 달라는 편집자의 부탁에 좇아 쓴 것이나, 5월 15일 ‘채플’에서 학생에게 말하다가 시간 관계로 중단된 재료를 이용했음).
4. “人格의 學理的 解義”
한결의 이 글은 ‘동광(東光)’ 제4호(1926, 8, 1) 6쪽에서 10쪽에 걸쳐 실린 것이다. 한결의 여러 문집을 보았으나 이것이 빠져 있어 특별히 여기에 싣기로 하였다. 이 내용에는 한결의 인생에 대한 전반적인 철학이 깔려 있다고 생각된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기로 하되, 다만 읽는 이의 편의를 위하여, 더러 띄어쓰기를 했을 뿐이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을 끄는 것은, 이 글이 끝나는 바로 그 자리 같은 면의 위쪽 한가운데에다가, “무엇보다도 인격의 소유자인 에부라함·링컨”이라 적고, 링컨의 사진을 실었으며, 또 “社告”라 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어 놓았다.
- 本誌는 아직지 出版法에 依하야 刊行되는 關係上 記事의 範圍가 學術, 技藝, 統計, 廣告의 四種으로 該法에 依하야 制限되어 잇슴으로 其範圍外에 나가는 時事, 政論等은 실릴 수 업슴니다. 讀者되시는 諸位와 投稿하시는 여러분 諒解를 求함니다.
一九二六年 八月一日 東光社白
이 내용에는 “사고”라 하여 “학술, 예술, 통계, 광고”에 해당하는 네 가지만 실을 수 있고, “시사, 정론”은 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퍽이나 암울했던 그 시대적 상황을 짐작하는 데에 퍽이나 참고가 되겠기에 여기에 제시해 둔다. 이 글은 한결이 배화(培花)학교를 사면하고, 동경의 릿쿄대학(立敎大學)에 입학하신(입학은 4월 6일) 4개월 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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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格의 學理的 解義
金允經
- 人格의 定義
- 人格이란 말의 뜻은 哲學者·倫理學者·經濟學者·藝術家……들의 各各 그 見地를 딸아 一定하지 아니함니다마는 쉽게 普通으로 말하면 사람이란 뜻이외다. 그러한데 英語의 “퍼슨”(Person)이나 “퍼슨앨리티”(Personality)의 飜譯된 말이외다. 그러한데 心理學上에서 쓰는 意味로는 이러함니다.
- (甲), 밖에서 본 意味
- 一, 人格性은 “人이 人된 所以”를 이름인데 “人格的 存在가 超人格的 神이나 非人格的 存在(他植物이나 無生物)에서 區別되는 諸種 特性의 綜合”을 이름이고
- 二, 人格은 이러한 個性을 가진 個體를 이름이외다. 그러하나 普通으로는 이 두 말을 混同함니다. 그리하여 前者 原語를 人格이라고 함니다.
- 三, 人格 本質(心理學 또는 哲學上)로 말하면 主知主義의 勢力下에서 “高尙한 智的 또는 道德的 屬性을 가진 個性”을 人格이라 하였음니다. 그러하나 더 똑똑하게 말하면 “人格이 意識 없는 物體애서 區別되는 點은 直接인 意識을 가지고 知情意의 複雜한 精神活動이 統一體를 일우었다는 것이고 人格이 他動物과 區別되는 點은 人格에는 그것들의 活動이 一層 複雜하게 高尙하게 發達되었다는 것이라”할 것이외다.
- (乙), 안에서 본 人格
- 一, 人格과 人格性이 없어지고,
- 二, 人格은 自我 또는 自我의 意識과 同化됨으로
- 三, 結局, 複雜한 精神現象이 自我는 意識 가운데서 渾然融化하여 完全히 統一되어 있는 狀態를 가르침이 됨니다(以下에 詳述하려 함)
- 또한 倫理學上에서 쓰는 意味로는 이러함니다.
- 一, 人格性은 人의 人된 所以의 特性을 이름이외다.
- 二, 人格은 그 主體를 이름이외다. (或 人格者)
- 三, 定義 由來는 보에티우쓰의 “人格은 合理的 個體라”함이 始作되어 中世 스콜라 學者와 近世 哲學者가 多數 採用하였으며 라이푸니쓰의 “人格이란 것은 異時期間 自己 同一의 意識을 確保하는 個人的 存在라”한 것도 이 뜻인데 十八世紀 啓蒙哲學者가 多數 採用한 것이외다. 칸트는 自己 活動的 自己 決定的이란 特性으로써 自己 同一性보다도 一層 本質的인 要素라고 보아서 “人格의 本質은 自律的意志 自由意志로서 그것은 絶對無上의 價値를 가진 目的 自體라”고 하였음니다.
- 그러면 以上에 말한 것으로 人格의 意味는 대강 짐작할 것임니다마는 人格의 正義를 또는 輪廓을 더욱 分明하게 하기 爲하여 人格의 內容을 좀 分析하여 紹介하고저 함니다.
- 人格의 內容
- (甲), 人格의 形式的 方面, 이는 人格된 以上에는 缺하지 못할 本質的 屬性을 이름이외다. 가령 松木에 대하여 말하면 大小老幼의 어떠한 松木임을 勿論하고 다른 草木과 區別될 만한 屬性을 가진 故로 松木이라 하게 됨과 같음니다. 이같이 사람도 萬物中에서 混合되지 아니하고 사람이라고 하게 됨니다. 그러한 즉 이러한 人格의 本質的 屬性은 許多히 枚擧할 수가 있음니다마는 重要한 것만 또는 根本될 것만 들면 自覺과 統一과 理想이외다.
- (一), 自覺, 이는 스스로 覺知함이외다. 다시 말하면 다른 一切에서 區別된 自己를 認知함을 이름이외다. 自己의 身體와 精神(知情意 一切의 活動)을 自己의 것이라고 意識하는 作用은 곳 自覺이외다. 幼兒는 第一人稱 “나”란 말을 쓰지 못하다가 이것이 發達함에 딸아 쓰게 됨니다. 自覺 前에는 흔히 身體를 가르치어 自己라고 함니다. 卽 幼兒가 차차 知하고 感하고 行하는 自己 意識 活動을 自我라 하게 되는 것이외다. 이는 自己 意識을 客觀的으로 觀察함에서 생기는 일이외다. 또 그 自覺이 더 發達됨에 딸아 자기의 社會我란 것을 알아 家庭·國家·社會로써 自我라 보게 됨니다. 이에서 眞自覺에 達하였다 할 것이외다. 그러한데 이에 深淺의 差別이 있어 充分하기에 이르기는 쉽지 아니한 것이외다.
- (二), 統一, 統一은 外面的으로 보아 (1)縱의 融合과 (2)橫의 融合이 있음니다. 前者는 昨日의 我와 今日의 我를 同一我라 보는 것이요 後者는 現在意識(知情意一切)의 活動에 系統 있고 組織 있게 하는 것이외다. 가령 讀書하는 일을 보더라도 손을 움즉이어 冊을 당기고 이것을 열고 눈을 向하여 읽어서 이를 理解하고 그리하여 快味를 느끼는 것은 얼마나 神技하고 巧妙하게 統一되는가를 볼 수 있는 것이외다. 또 內面的으로 보아 (1)知(特히 記憶)의 우에서 (2)情(身體를 中心으로 한 一般 感情)의 우에서 (3)意志의 우에서 統一되는 것이외다.
- 人格 統一의 作用은 人格의 모든 屬性中 가장 重要한 것이외다. 知情意의 活動을 統一하여 能히 一定한 目的을 達成하는 바이외다. 또 이 統一性은 自己의 同一을 認定하는 것임으로 道德上 極히 重要한 것이외다. 만일 昨日의 我와 今日의 我를 不同한 것이라 하면 昨日의 行爲에 對하여 今日의 無責任하게 될 것이외다. 또, 身體 各部分의 作用과 精神 各方面의 作用間에 統一이 없다 하면 同樣으로 責任의 主體됨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외다. 그러한즉 이 統一性은 千萬人이 一定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딸아 크게 差別이 있음니다. 술·담배·鴉片의 害毒을 알고서 이것을 制御할 수 있는 사람은 良心으로 心身을 잘 統一하게 하는 사람이나 그것들의 害毒을 알고서도 그것들의 奴隸 노릇을 하는 사람은 統一性이 不充分하다 할 것이외다. 一般으로 幼少時에는 統一이 不充分한 故로 時時로 突發하는 衝動에 支配됨이 많음니다. 자랄쓰록 敎育과 修養에 딸아 統一力이 늘어서 一貫한 目的으로 繼續 勞力할 수 있게 되는 것이외다. 一言而蔽之하고 이 統一力은 人格 活動의 中心이라 이를 것이외다. 知識도 이것으로 因하여 成立되는 것이외다.
- 三, 理想(目的), 理想을 가지었다 함은 有目的 活動을 함을 이름이외다. 選擇된 欲求를 일컬어서 目的 또는 動機라 이르는데 이 動機로 우리의 行爲가 決定됨니다. 有目的的 活動 自己 決定의 活動을 하는 것은 사람의 特權이요, 다른 動物에는 자못 없는 바이외다. 犬猫 같은 動物은 그때 그때의 衝動에 支配되어 行動할 이지마는 사람은 그러지 아니함니다. 때때로 사람도 衝動에 支配됨이 있으나 多數의 境遇에는 一定의 目的을 가지고 그 遂行에 勞力하며 衝動을 支配함니다. 勿論 이 理想(目的)도 사람에 딸아 高下가 不同함니다. 同一人에 있어서도 終始 同一의 理想을 가짐은 이르기 어렵으나 우리가 더 낫은 善한 情態를 認定하고 그것을 實現하기에 勞力함은 事實이외다.
- 그러한 故로 사람은 누구던지 理想을 가지었다 할 것이외다. 이 理想의 所有가 人格의 한 特色이외다. 이 理想은 向上不己하는 것임으로 “得隴望蜀”은 이것을 가진 證據외다. 人類가 無限히 進步하는 것도 이 理想을 가진 때문이외다. 或은 理想을 自由 또는 自主性이라 함니다.
- (乙), 人格의 實質的 方面, 이는 人格이 包有한 一切의 生活 關係를 가르친 것이외다. 그러한데 이를 大別하면 個人的 生活과 社會的 生活의 兩方面이 됨니다.
- 一, 個人 生活, 個人 生活을 살필찐대 (1)身(體軀)과 (2)心(精神)의 兩面이 있는데 몸 卽 肉體의 生活에는 (1)生命을 保存하며 (2)健康을 維持하고 增進하기에 勞力하는 것이외다. 또 맘 卽 精神의 生活에는 (1)知 (2)情 (3)意의 三方面이 있음니다. 知的 方面은 眞을 追求의 對象으로 삼는데 眞은 宇宙의 無限한 空間과 萬古의 永遠한 時間에 對한 根本的 原理와 原則 곳 眞理를 이름이외다. 사람은 內外 心物에 對한 疑問과 矛盾을 解決하지 아니하고는 不安을 이기도 못하며 滿足을 얻지 못하여 하는 바외다. 그리하여 그 結果는 科學이 發達되고 宗敎가 進步되고 哲學이 鬱興하는 것이외다. 情的 方面은 美를 追求의 對象으로 삼는데 美는 卽 宇宙 萬物이 眞理와 調和되어 있는 狀態를 이름이외다. 이 美에는 自然의 眞理와 融化되어 있는 自然美도 있고 또 이 自然美를 人工的으로 表現한 藝術美도 있음니다. 이는 사람이 自然美를 極히 사랑할 아니라 그것을 永久히 傳하도록 表現도 하여 보고 그러한 것들의 反映으로 일어나는 美感도 永遠히 살아지지 아니 하기를 바라는 맘으로 또는 自己 生活 全體를 美化하려는 맘으로 美로 表現하려는 勞力은 人生 生活의 各 方面에 充溢하여 있음을 보게 됨니다. 그리하여 人生이 있던 곳에 藝術이 있게 된 것임니다. 繪畵·彫刻·建築·工藝·文藝·音樂·其他 人生 生活 自體가 곳 藝術로 보게 된 것이외다. 意的 方面은 善을 追求의 對象으로 삼는데 善은 사람의 行爲가 眞理와 一致되어 矛盾이 없음을 이름이외다. 그리하여 習慣이고 道德이고 善의 標準에 딸아 變化 發達하게 된 것이외다.
- 그것을 因하여 倫理的·法律學이 發達되게 된 것이외다. 그러한데 善의 形式은 不變할나 그 內容 卽 標準은 때와 곳을 딸아 變化 不己하는 것이외다. 또한 善의 標準은 社會의 組織과 形式의 根本이 되고 基礎가 되는 것이외다. 그리하여 善의 標準이 變하면 곳 生活의 方面과 制度가 變하게 되는 것이외다. 以上에 말한 個人 生活을 表解하면 이러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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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 社會生活, 사람은 각각 그 出生붙어 父母라고 하는 簡單한 社會的 生活의 結果외다. 卽 父母의 各異한 生殖 細胞를 받고 그것에 生命을 받아 一個人을 일우게 된 것이외다. 이같이 共同 生活 中에서 生을 받고 또 家庭이라는 小社會에서 保護와 養育을 받으며 또 그러한 家庭이 敵의 防備上 經濟 依賴上 其他의 必要로 集合 團結된 一部落의 社會 中에서 生活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됨니다. 그리하여 이 共同 生活을 營爲하는 곳에는 반듯이 各人의 意識을 統一하는 社會的 意識이란 것이 있게 됨니다. 共通한 言語·風俗·習慣·道德·法律·制度·宗敎·文學·藝術들은 다 이 社會的 意識의 現象임니다. 個人은 이 中에서 나아서 자라는 故로 이 大意識을 構成하는 一細胞 노릇을 함에 不過함니다. 이것이 國家라는 좀더 큰 自我를 일우게 한 것임니다. 國家는 今日로서는 統一한 共同的 意識의 最大한 發見이외다. 그러하나 우리 人格的 發現은 오히려 一層 더 큰 自我를 要求하기 말지 아니함니다. 이는 곳 人類를 一團으로 한 人類的 社會의 團結이외다. 이 理想은 이미 基督敎와 스토익學派에 表現되었으나 所謂 尙武的 平和로 迫害를 當하는 것이외다. 이러한 大自我의 理想을 말하면 偏狹한 軍國主義者는 反國家主義者로 誤解하는 일이 많으나 家庭 生活이 一部 生活에 矛盾이 아니며 一郡生活이 家庭生活에 背馳됨이 아니며 또한 家庭 生活이 國家 生活에 矛盾이 아닌 同時에 國家 生活이 家庭 生活에 矛盾이 아님 같이 全人類 共同 團結 生活이 國家 生活에 矛盾이 아닌 同時에 國家 生活이 또한 人類 共同 生活에 반듯이 背馳될 것은 아니외다. 個人의 健全이 一國의 健全을 일움 같이 一國의 健全이 全人類의 健全이 될 것이외다. 다만 現在 國家 生活을 하는 個人으로서의 그릇된 習慣과 道德을 고치어야만 할 것은 自國 外의 人類를 敵으로 보는 觀念 또는 自國을 爲한 犧牲으로 생각하는 惡習 惡德이외다. 이것이 그릇된 人生觀이요 그릇된 社會哲學이외다. 그러한즉 한 民族이나 國家를 爲하여 個人의 人格을 發展시킴 같이 全 人類의 共同 團結을 爲하여 國家를 發展시킬 것이외다.
- 이것으로써 人格의 內容을 大綱 論述하였음니다. 그러한데 人格 平等이란 말에 對하여 조금 添附하여 말하고 싶음니다. 形式的 方面으로 보면 누구던지 人格은 平等이라 할 수 있음니다. 웨 그러냐 하면 白痴나 狂人이 아니면 어떠한 사람이던지 同樣으로 人된 特質을 가진 때문이외다. 그러하나 實質的 方面으로 보면 人身 生活과 社會 生活에 深淺이 있고 廣狹이 있는 때문에 人格은 千差萬別이라 할 것이외다. 普通으로 人格에 優劣이 있다 함은 다 이 實質的 方面에 對하여 이름이외다. 그리하여 그 크게 發達한 것은 價値가 큼으로 이를 優越한 人格이라 하여 萬人 敬仰의 的이 되는 것이며 그 發達이 낮은 것은 價値가 적음으로 卑劣한 人格이라 하여 남에게 尊敬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외다.
- 또 한 가지 添附하여 말하고 싶은 것은 個人 理想의 自由와 社會 支配에 대한 關係외다. 或 人格의 自由와 社會의 支配를 矛盾되는 것처럼 誤解함이 있음니다. 이는 自由와 支配의 意味와 關係를 깨닷지 못한 甚한 誤解라 하겠음니다. 果然 칸트의 생각한 바와 같이 自己 決定 卽 自由는 人格의 重要한 本質이라 할 것이외다. 그러한데 前에 말함 같이 人格의 重要한 本質中에는 統一도 있음으로 圓滿한 人格이라 하면 個人과 社會를 自我의 廣大한 或은 延長으로 볼 것이외다. 그러한 故로 個人의 理想과 社會의 理想은 一致될 것이외다. 그러한즉 個人의 自由와 社會의 支配 사이에 矛盾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만일 거긔에 矛盾이 있다면 그 社會는 各個人의 理想으로 綜合된 社會가 아니요 掠奪團에게 個人이 捕獲됨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그 個人이 人格에 缺陷이 있음일 것이외다. 生命 있는 有機體라 할 것 같으면 그 個體의 各 細胞의 自由 理想을 綜合한 것이 곳 그 個體와 理想일 것이며 딸아서 各 細胞의 自由와 그 個體의 支配 사이에는 矛盾을 볼 수 없는 것이외다. 矛盾이 없을 뿐 아니라 各 細胞는 그 個體의 支配를 絶對로 要求함으로야만 生命을 繼續하고 發展하게 되는 것이외다. 生命 잇는 社會를 일우었을 것 같으면 그 社會와 個人의 關係는 이러할 것이외다. 또한 自由는 人格者에게 限하여 쓰는 말이지 幼兒나 白痴나 狂人에게 쓰는 말이 아닌즉 自由는 人格上 矛盾 撞着이 없이 行함을 이름이 됨니다. 그런 故로 미친 놈이 사람을 죽인다던지 도적놈이 도적질을 하는 것은 矛盾이요 撞着이 되는 行動이기 때문에 自由라고 하지 못하는 것이외다. 헐버드·스펜서는 “누구든지 남의 自由를 侵害함이 아니면 自己가 하고저 하는 바를 하는 것이 自由다”하였음니다.
- “Every man is free to do that which he wills, provided he infringes not the equal freedom of any other man.”― Hebert Spencer.
5. “육·이오 다섯 돌을 당하여”
이 글은 ‘연희춘추’의 ‘논단’(1955, 7, 1)에 실린 것으로, 한결의 ‘육·이오’이후의 학생-사회의 타락상에 대한 분노의 심정을 담은 내용이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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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이오” 다섯 돌을 당하야
- 육·이오 사변 다섯 돌을 맞아 보니 몸서리쳐 지고 지긋지긋한 파괴와 죽음 가운데서 살아남은 우리로서는 눈물겹고 가슴 아품을 억제하기 어렵다. 사람이 죽고 잡히어 가고, 피 흘린 것만으로 139만 4,879명 이상에 달하고, 학교 피해만도 4,776 학교에 17,385 교실을 잃었다. 그러하나, 이상 통계는 휴전되기까지(4286. 6. 27) 일 년 이상 더 당한 피해는 여기에 들지 않고도 이처럼 어마어마하다(전란 제삼 년 기록을 손 가깝게 얻지 못하였다). 범위를 좁히어 본교의 손해를 보더라도 재산 손해 외에 사변 전 재적생 1,519명이던 것이 9·28 회복 뒤에 겨우 50명 가량밖에 돌아오지 않았고, 교직원은 사변전 124명이던 것이 59명 가량밖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또다시 중공군의 침입으로 1·4후퇴로 헤어졌다가 부산에서 천막을 치고, 개교하였을 때에도 학생은 222명밖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또 어찌 이러한 눈에 보이는 손해만 손해라 하랴? 그보다 더 크고 넓은 도덕적 파괴라는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이 있다. 과거에도 역사상에 까닭없이 침입한 왜적의 야만적 파괴와 살육을 입힌 임진 왜난이 있어서 공산당 침입의 피해와 비슷한 점이 있지마는 기록이 똑똑하지 않고, 시간으로 363년 전에 일어난 관계로 인함인지 이번 침략전의 피해가 그보다 더 참혹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임진 난에는 전 국민이 의분을 참지 못하여 산중에 묻히어 지나던 중들까지도 의병을 일으키어 금산성 밖에서 최후 한 사람까지 도망감이 없이, 700의사가 함께 순절(殉節)함과 같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고귀한 도의심은 임진난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게 하기에 남음이 있었다 하겠다.
- 이번 사변에도 사변의 초기에는 피끓는 학도병이 군문으로 모이어들어 혁혁한 공을 이루고 목숨을 바친 청년학도가 그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이 기상과 정신이 능히 ‘육이오’사변을 극복하기에 큰 힘이 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 넋 앞에 머리를 숙이어 존경과 감사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염원이요 지상 명령인 남북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휴전은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일천만에 가까운 북한 동포들이 공산 독재 정치 밑에 눌리어 견디다 견디다 못하여 혹은 몰래 삼팔선을 넘고 혹은 비행기로 공중으로 날아 끊임없이 넘어옴을 볼 때, 우리의 탓은 아니건마는 북한 동포에게 죄를 지은 것 같고 언제나 이루어 놓아야 할 큰 책임을 진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뒤 사회 형편은 어떠한지 깊이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학생계를 가장 높은 지식 층이요 지도 층이라 할 학생들이 병역을 피하여 다닌다. 그뿐 아니라 극히 더러운 냄새를 피울 만치 썩어가는 형편이 날마다 들어난다. 요지음 공판정을 통하여 신문에 발표되는 학생 박인수 사건을 보라, 무도장을 무대로 하여 많은 여자(70명) 대학생의 정조를 빼앗고도 떳떳한듯이 낯가죽 두껍게도 자기의 잘못이 없고, 여자가 꼬리치고 따라 덤볐다고 말한다. 물론 여학생들은 잘 하였다는 것은 아니나, 70여명을 탈선적으로 교제하여 여러 명의 정조를 빼앗고도 자기는 잘못이 없노라 함이 뻔뻔스럽다는 말이다. 여학생 편으로 말하여도 썩은 여자요 타락한 여자라 할 것이다. 남녀 학생이 서로 끼어 안고 춤을 춘다면 서경덕이 아닌 수십 년 참선의 도를 닦은 지족 선사라도 황진이에게는 파계를 아니 당할 수 없을 것이다. 황진이는 화류계에 나선 여자니까 여학생의 신분으로서 부모의 땀의 결정인 학비를 받아서 그런 부정한 교제에 쓰면서 학교를 속이고 동무를 속이면서 생명이라고도 할 귀한 정조를 한 품도 못 받고 거저 여러 놈에게 선사하여 돌려줌은 한 푼에 둘씩 팔리는 새 한 마리만도 못한 것이다. 박이란 남자는 말하기를 여섯 학생을 상관하였지마는 그중에 한 여자를 제하고는 다 이미 정조를 몇 번짼지 깨트린 자들이었다고 하였다. 요는 이 여학생들은 이 사건의 폭로로 말미암아 바람난 여자 매음녀 같이 타락한 자가 많음을 증거한 것이라 하겠다. 바람난 여자는 밖으로도 표가 난다. “나일론”이란 엷은 감으로 치마 적삼을 입고 다니기 때문에 옆에서 보면 속치마만 입고 가는 것 같이 속이 다 드려다 보이는데다가 팔뚝은 다 들어내어 놓고 어깨만 걸치어 입었기 때문에 겨드랑이 털까지 다 보이게 차린 복장이라든지 피빨아 먹던 고양이 입술 같이 붉게 새빨갛게 연지를 바르고 얼굴엔 분으로 탈을 만들어 쓴 것 같은 화장이라든지 목과 팔에 금강석(진짠지 아닌지는 모르나)을 물린 목걸이 팔걸이를 걸친 모양이라든지 송곳보다 뾰죽하게 높이 솟은 굽 달린 구두를 신고 병신 같이 절뚝거리고 다니는 모양은 아무가 보아도 양갈보와 구별하기 어려운 바람난 여자라고 아니할 수 없이 보인다. 이러한 바람난 여자의 궁둥이에는 반듯이 불량 남자(학생이건 아니건)가 따르게 됨을 보게 된다. 아름다움을 취함은 사람의 본능의 하나다. 그러나 아름다움(美)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나타냄에 있고 부자연스러움을 억지로(불편을 참아 가면서까지) 꾸밈(假飾)에는 있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답게 꽃은 꽃답게 천부(天賦)의 본성 곧 자연성을 기껏 발휘함이 미(美)다. 만일 사람이 개답고 개가 사람답고 꽃이 썩은 송장다와서는 미가 아니다. 온갖 예술이란 것은 다 자연을 모방하는 기술이다. 금강산을 그리는 화가가 부사산을 그리어 놓고, 금강산이라 한다면 이는 낙제한 미술가라 할 것이다. 금강산 모양에 가까우면 가까와질수록 고명한 미술가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부자연스러운 복장이나 화장을 한다면 이는 그 부자연성으로 남을 자극하여 시선을 끌어당기고 마음을 끌어당기려는 탈선적 심리, 곧 바람난 심리에서 일어난 몸차림이라 할 것이다. 고상하게 우아하게 자연스럽게 깨끗하게 모양을 냄이 좋다고 정상적 심리를 가진 사람은 생각한다.
- 이지음 학생의 몰락 현상의 하나는 목적을 위하여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행동이다. 이것도 이지음 일어난 사건인데 시내 어느 대학 학생이 등록비를 얻기 위하여 자기의 친구요 동창이 가진 돈을 빼앗기 위하여 죽이어 버리었다는 극악한 행동이 들어났다. 또 한 가지 학생의 타락상은 술집에 예사로 출입하는 것이다. 술 먹는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나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분쟁 살인 횡사 기타 범죄의 원인 대부분이 알콜의 흥분에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학생이 육이오 사변 때 순국한 학도의 정신을 잇대어 그들의 못다 이룬 사업을 완성할 책임을 잘 지키리라고 믿어 마음 든든할 수가 있겠는가? ‘웃물이 흐리면 아래 물도 흐린다’는 말과 같이, 선배 지도자 정치가 관공리들이 썩었으니, 이런 환경 속에 있는 학생만이 진흙 가운데 핀 연꽃처럼 깨끗하고 향기롭기는 어렵다고 할는지도 모르나 이는 범인 이하의 사람, 남의 뒤나 슬슬 따르려는 사람, 기회나 엿보아 왜놈의 세력이 강한 때면 왜놈에게 붙고, 해방이 되면 애국자로 제일 선두에 나서며, 공산당이 이길 듯하면 공산당에 붙고, 국군이 이길 듯하면 국군에 아첨하는 기회주의자, 소위 간사한 자, 아첨하는 자의 행동이지 ‘세상 사람이 다 흐리더라도 나는 혼자 맑으리라’하는 자립 자존자, 선구자, 지도자, 용사, 의인, 양심 가진 자, 세상을 건지겠다는 고상한 인격자의 행동은 아니다. (김윤경)
6. “일제 36년 동안의 국내 광복운동을 회고함”
한결이 남기신 이 글은 ‘한대신문, 215호’(9/4)에 실린 것이다. 한결이 직접으로 오려 붙인 이 글은 ‘스크래프-부크’에는 이미 활자로 찍혀 나온 것이지만, 이에 다시 붉은 잉크로 십여 군데를 교정 수정하셨다. 그런데, 이 글에는 “=중국 먹기 위한 노구교 사건 직전에= 흥사단·동우회 사건은 터져, 연애 편지로 발각된 ‘조선어 학회’사건”이란 큰 글씨의 표제어도 보인다.
&hbsp; 이 내용에는, 우리로서는 잘 알지 못하는, 파란만장의 한말에서 일제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사정들을, 한결은 그 현장에서 체험을 통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지금의 우리들로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두고, 이를 의식하고 역사적 체험을 통하여 예리하고도, 비판적으로 기술했다는 점에서 참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항일의 정신 역시 지금의 젊은이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 보이며, 이로써 이 글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적인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hbsp; 이제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거나, 알았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자세히 몰랐던 것을 밝혀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전혀 알지도 못했던 일, 그 현장을 겪지 않고는 기록할 수 없었던 일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참고 삼아,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위에서 말한 “조선어 학회 사건”과 관련된 1982년 8월 1일자 ‘한국일보’의 다음과 같은 기사를 들 수 있다. 이 기사 표제에는 “朝鮮語學會 사건 발단은 나의 日記帳”-“‘40년 恨’……입열다”-“당시 永生高女生 朴英姬씨의 응어리”-“罪責·회환이 새삼 憤怒로”-“國語썼다가 꾸중 들었다’ 귀절 트집”-“日語못쓰게 한 者는 누구냐 拷問……확대”-“40년만의 생생한 證言”과 같은 것이 나오고, 또한 이 기사에 대한 내용을 무엇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일본은 40년 전에도 왜곡을 했다. 그들은 한국을 통치하기 위해 허위 사실을 날조했고 선량한 국민들을 끌어다가 고문을 일삼았다.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일본의 국어 탄압의 대표적 예가 조선어 학회 사건. 이 사건의 발단이 됐던 ’여학생의 일기장‘의 주인공 朴英姬 씨(58. 서울 西大門區 延禧洞 436의 9)가 꼭 40년만에 입을 열었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일제 36년 동안의 국내 광복운동을 회고함
김윤경
(문학박사·문리대학장 교수)
차례
1. 일본 유인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방송함(1945년 8월 15일 정오)…………………………………………
2. 3·1독립운동(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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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흥사단·동우회 사건(1937. 6. 7~1941. 11. 17)
……………………………………………………………
4. 조선어 학회 사건(1942. 10. 1~1945. 8. 15)
………………………………………………………………
※본 원고는 광복절에 ‘동방 아카데미’의 ‘독립기념관’에서 말한 “광복운동 회고담”을 첨삭한 원고다.
1. 일본 ‘유인’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방송함
1945년 8월 15일 정오에는 중대한 발표가 있겠다고 예고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날 정오에 종로로 나가다가 어느 ‘라디오’상점 앞에서 ‘유인’(裕仁)천황이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한다고 방송함을 들었읍니다.
나는 3·1 운동 때 1년, 흥사단 동우회 사건 때 5년, 조선어 학회 사건 때 4년, 모두 10년의 세월을 허송하게 되고, 동우회 사건 때 1년 2개월, 조선어 학회때 1년, 모두 2년 2개월 동안 옥고를 겪은 나로서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여 우리 민족이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된다 함을 들을 때에 일생을 통하여 전무후무한 최대의 기쁨을 느끼게 되었읍니다. 이 때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 나오는 죄수들이 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트럭’에 그득그득 올라 타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서대문 쪽에서 종로 거리로 달려옴을 볼 때, 나는 기쁨의 눈물, 감격의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읍니다. 일본은 미국의 실력을 몰랐기 때문에 진주만을 폭격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 뛰어들었고 미국이 원자탄이란 위대한 무기를 가진 줄을 몰랐기 때문에 무조건 항복하라는 권고를 듣지 않고 끝까지 끌어오다가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까사끼’에 원자탄이 떨어져서 ‘히로시마’에는 순식간에 30만 명이 희생되고 기타 여러 불치의 병신됨에 놀라서 졸지에 부랴부랴 항복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위력의 무기를 쓰게 된 것은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었읍니다. 소련도 그 때에는 이러한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었고, 이제도 이러한 무기를 가진 나라는 3, 4 나라에 불과합니다. 제2차 대전은 연합군이 승리하고, 일본이 패할 것을 자신한 연합군 측은 ‘카이로 선언’(1943. 1. 27)을 발표하여 전후 일본에 대한 처리를 결정했던 것입니다. ‘카이로’에 모인 이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었는데, 그 선언에는 한국의 독립도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 뒤 ‘포스담’ 선언(1947. 7. 26)으로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했고, 9일에는 소련이 일본에 대하여 선전 포고하고 ‘포스담’ 선언이 가담하게 되었읍니다. ‘포스담’ 선언에는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타린’이 회담했던 것입니다. 이 선언보다 앞서 ‘얄타’ 비밀회담(1945. 2. 7)에서는 한국의 38도선을 한계선으로 정하여 그 북쪽은 소련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그 남쪽은 미군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일본이 이보다 먼저 항복했더라면 한국이 두 동가리로 끊어지게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나 38선을 긋게 한 책임을 지게 되었고, 또 미국도 소련이 일본군을 무장 해제만 시킨 뒤에도 38도선을 없애어 통일 한국이 되게 하리라는 착각의 실수도 있읍니다.
해방 당시에는 38선이 생기리라는 것은 꿈에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기쁘기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을 해방하게 하고 통일 한국이 되도록 원조에 가장 큰 힘을 쓴 것이 미국이지마는 실책도 세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소련 공산주의의 본질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 38도선을 정하였음으로 소련으로 하여금 북한을 공산주의 지역이 되게 한 것, 둘째는 ‘맥아더’ 장군이 만주를 폭격하여 공산군의 들어올 길을 막고 북으로 추격하여 북한에 있는 공산군의 세력을 압록강, 두만강 밖으로 몰아내어 한국을 통일하려는 전략을 미국 대통령은 이를 반대하여 그를 해임시켰음으로 통일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한 것, 그 때는 소련도 원자 무기를 발명하지 못하였으므로 두려울 것이 없었읍니다. 세째는 미군이 한국에서 철퇴하기 전에 국군을 설치, 훈련했기 때문에 6·25 공산군 침입의 참혹한 해를 입게 함이 그것입니다.
2. ‘3·1’ 독립 운동(1919년)
3·1 운동은 왜 일어났는가? 나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합병 이래 왜정의 잔인 무도함입니다. 직장을 다 빼앗기고, 산림을 함부로 베어 먹으며 동양척식 회사(이제는 내무부 자리)를 설치하여 농토, 역둔토, 향교 재산을 약탈하고 어장을 빼앗으며 인삼과 담배를 전매하여 민가 이익을 빼앗고 식민지주의 교육으로 역사를 위조하고 고유 문화(말, 글, 국보, 고적 민속……)를 말살하여 동화 정책을 강제로 실시했읍니다.
한두 가지 보기를 들어 보면 “곡구고 죠요”(國語常用)를 강요하여 어린 소학생들이 저희끼리 놀다가 어머니 무릎에서 배워 온 모어(母語)를 부지 중에 쓰면 그 학생을 잡아다가 깃대에 종일 잡아 매어 두고, 교문에 들어오다가 문 안에 세운 깃대에 달린 일본기에 경례하지 않거나 매일 동쪽을 향하여 천황에게 대한 “규죠요하이”(宮城遙拜)를 아니하면 벼락 같은 책벌이 내렸읍니다. 또 외국 유학은 물론 여행도 일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의 악정과 한국의 고상한 문화를 선전함을 막기 위함이었읍니다. 그 반면에 일본은 한국이 야만 미개의 상태임과 일본의 선정을 서양말로 연보 같이 박은 책자를 각국에 돌리어 각국은 한국이 일본의 선정의 은택으로 행복을 누림 같이 선전했읍니다.
식민지 백성에게는 고등 교육이 필요 없다고 하여 대학 설치를 허가하지 않았읍니다. 이에 대하여는 명확한 산 증거가 있읍니다. 곧 서양인 선교사들이 숭실대학교, 이화대학교, 연희대학교를 허가 받으려고 설립 허가를 청하여도 허가하지 않고 전문학교로 허가했던 것입니다. 해방 뒤에 서부 독일에 유학 간 어느 졸업생에게 편지를 받은 일이 있는데 거기서 지식 계급에게도 한국을 극히 오해 혹은 몰이해하고 있으므로 방송이나 신문에서도 한국말은 일본말의 분파라는 등, 한국 문화는 일본에서 온 것이라는 등, 해괴한 발표가 때때로 나옴으로 한국문화(언어, 문자, 역사, 미술, 기타)에 대하여 깊은 연구가 있는 ‘뮌헨’대학교 한국어 교수 ‘앙드레·에칼트’ 박사는 한국에 대한 오해가 발표될 때마다 그 한국 유학생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그러한 오해를 시정할 원고를 써 오면 방송국이나 신문에 발표하도록 해 주마”하였지만 자기는 법학을 전공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원고를 쓸 능력도, 재료도 없으니 그러한 원고를 좀 써 보내어 달라고 함이었읍니다. 그리하여 나는 국어에 대하여 쓰고 ‘최현배’ 박사더러는 일본 문화가 한국에서 간 것에 대하여 써 보내게 했었읍니다. 이 밖에 김보겸, 전봉덕, 정비석 씨들도 누구의 요청을 받았음인지는 모르나 각각 그 전공 분야의 글을 써 보낸 것이 ‘에칼트’ 박사의 75주년(1950년 9월 21일)기념 논문 ‘Koreanica’에 실리게 된 것을 받은 일이 있읍니다. 또 ‘에킬트’ 박사는 말하기를 해방 뒤 북한에서는 한국어 맞춤법이나 말본을 어떻게 하여 쓴다는 인쇄물을 종종 받아 알게 되었지마는 남한에서는 어찌 되었는지 일체 소식을 모른다 하기에 나는 나의 “한국문자 및 어학사”와 “고등말본”을 보내고 ‘한글 학회’로 하여금 “큰 사전”을 보내게 하였더니 자기가 한국 말본을 쓰는 중인데 마침 큰 참고가 되었다고 감사하다는 글을 받았읍니다. 말이 좀 곁길로 번져간 듯하나 일본은 이처럼 우리 문화를 뒤집어 선전하여 각국으로 오해하게 함이 이러하였음을 증거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둘째는, 제일차 세계대전(1914-1918)뒤 국제 정세의 변화의 영향입니다. 1917년 9월에는 ‘아일랜드’ 이하 24약소 민족 대표자들이 미국의 ‘뉴욕’에 모여(1917. 9) 민족 자결주의에 대하여 토의하고 호소문을 각국 원수에게 보낸 일이 있고 (우리 민족 대표론 박용만 씨가 참석함)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독일에 대한 평화 조건으로 14조문 중 제9조에서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했고, 소련도 제정 ‘러시아’ 때에는 일본을 협조하여 한국 민족의 일본 반항을 눌렀으나 공산주의로 변한 소련은 한 민족의 일본 반항을 조장하게 되었기 때문에 소련 영내에 있는 교포들은 1918년 11월에 여준 이하 39명이 ‘하르빈’에 모여 독립을 선언한 일이 있읍니다.
세째는, 고종 황제의 참살 당함이었읍니다. 1908년에 ‘이등박문’은 고종의 후계로 정한 이은(李垠)을 일본에 유학시킨다고 볼모로 데리고 갔는데, 1919년 3월에 일본 황족 방자(方子)와 결혼시키겠다고 예고함에 대하여 고종은 적국인 일본 황족을 며느리로 삼을 수는 없다고 절대로 반대했읍니다. 이 때 일본 궁내 대신 ‘파다야경직(波多野敬直)은 갑자기 1919년 2월 21일에 고종이 뇌일혈로 위험 상태에 있다고 발표하더니 다음날 오전 6시에 고종이 돌아갔다고 발표하였읍니다. 전 국민은 고종의 암살에 비분강개하여 독립 시대와 같이 국상의 복장 차림으로 덕수궁 앞에 거적을 깔고 엎드리어 철야 통곡하기를 그치지 않았읍니다.(필자 주: 한결이 보관하고 있는, ‘한대신문’에는 여기서 끝나는 이 글에다가, 붉은색 볼펜으로 “이하 450자 탈락”이라 적었다. 아마 인쇄상의 탈락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필자가 ‘한결의 유품’에서 이에 해당하는 원고를 찾아본 즉 한결은 이 내용에 해당하는 원고지의 첫 쪽에다가 붉은색 연필로 “‘한대신문’에 낸 것”이라 적고, 또한 “이 원고를 버리지 말고 돌려 주기 바람”이라 적으셨는데, 이에는 바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것이 이어져 있었다. 탈락의 것을 싣되, 편의상 그 내용의 것을 < >으로 표시해 둔다.)
<이리하여 3·1운동을 격화시키었읍니다. 인산(국장)은 3월 3일로 정하였으므로 전국 각 지방에서 인산에 참예하러 오는 이들이 서울의 거리를 인산 인해로 만들게 되었읍니다.
미리 계획하여 온 독립 운동은 민족 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 선언문을 3월 1일 오후 두 시 탑골 공원에서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면서 시위 행진을 벌이었고 선언서에 서명한 이들은 명월관 지점(인사동 태화 여자관 자리)에서 선언식을 마친 뒤에 총독부에 전화를 걸고 자진하여 잡히었읍니다. 이보다 앞서 일본 동경에서는 2월 8일에 이광수 이하 11명이 서명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읍니다.(재일 조선 기독 청년 회관에서) 3·1 독립 운동 시위로 전국적으로 모인 것이 1,339회, 모인 사람 수가 400여만 명, 피살(왜병에게)된 이가 7,548명, 다친 이가 1,596명, 잡힌 이가 46,948명, 불태운 교회가 47곳, 학교가 둘(2), 민가 715채에 달하였읍니다. 이 3·1 독립 운동은 그 당시에는 일본의 무력 폭압으로 실패한 듯하지마는 이 때에 한국 민족의 독립 갈망과 일본의 잔인 무도한 학정은 세계 각국에 인식시키어 2차 세계 대전 끝에 한반도에서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 한국을 자유 독립의 나라가 되게 한 것입니다. 3·1 독립 운동 때 일본군의 야만적 행동의 한 가지만 보기를 들면 수원(이제는 화성군 향낭면 제암리) 제암리 예배당 학살 사건(1919.4.15)입니다. 일본 군경은 교인들을 예배당에 모아 넣고 총 쏘고 불 질러 29명을 학살시킨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연희전문학교의 선교사 원한경(언더우드) 박사가 조사하고 사진을 찍어 미국 본국에 보고하여 미국 국회에서까지 문제가 되었었고 세계에 널리 알리어지게 되었음을 들은 일이 있읍니다. 이밖에도 정주·강서·맹산·대구·합천·화수리의 학살 사건과 유관순 양 옥사 사건 기타 이루 다 쳐들 수 없을만치 많습니다. “일본 해외 선교회”가 주동이 되어 정계·학계·교육계·문단들에 많은 동조자를 얻고 있는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속죄 운동”은 1965년 10월 동 선교회의 학생 친선단이 미산영인(尾山令仁) 목사의 인솔로 한국에 와서 제암리를 살펴보고 간 뒤의 일입니다. 작년 12월 11일에 “한국 제암 교회 소타(燒打) 사건 사죄 위원회”(500여 명)를 조직하여 미산 목사를 실행 위원장으로 뽑고 50돌이 되는 명년 4월 15일에 약 1천만 원 정도로 새 교회를 세우고 의료원도 설치할 예정이이라고 19일에 왔던 미산 목사는 말하였읍니다.>
3. 흥사단·동우회 사건
1931년 9월 18일에는 만주를 침략하여 허수아비 만주국을 만들어 놓은 뒤 중국을 좀 먹어 보려고 노구교 사건(1937년 7월 7일)을 일으키기 꼭 한 달 전인 6월 7일에 반일 단체를 숙청하기 시작한 것이 흥사단과 동우회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 걸리어 든 이는 150명 내지 200명에 달하지마는 그다지 중대한 활동이 없다고 보이는 이는 혹은 경찰에서 놓아 주고 혹은 검사가 놓아 주고 혹은 예심 판사가 놓아 주었기 때문에 제일 심에 기소된 이는 42명(안창호 님은 공판 전에 작고하고 이용설 님은 추후 귀국하여 기소됨. 또 최윤호 님도 공판 전에 악형 당한 빌미로 1939년 2월 21일이 작고함)인데 다음과 같읍니다.(나이는 1938년 기소 때 표준)
서울 저술가 이광수(李光洙·47), 〃농업 김종덕(金鐘悳, 딴 이름 恒作·52), 〃여관업 박현환(朴賢煥·47), 〃배화여고 교원 김윤경(金允經·45), 〃화신 전무 주요한(朱耀翰·39), 〃광산업 조병옥(趙炳玉·45), 평양〃유기준(劉基峻·45), 선천 상업 이영학(李英學·35), 평양 고무공업 사원 김하현(金夏鉉·42), 서울 서화 골동상 오봉빈(吳鳳彬·46), 안악 농업 김선량(金善亮·40), 평양 평안고무공업 사장 김동원(金東元·55), 〃동아일보 지국장 김성업(金性業·53), 〃조선일보〃김병연(金炳淵·43), 숭인상업 교원 조명식(趙明植·45), 서울 목사 정인과(鄭仁果·52), 〃여관업 이원규(李元奎, 딴 이름 大偉·43), 선천 신성학교장 장리욱(張利郁·44), 〃의사 주현측(朱賢則·56), 〃미곡상 오정은(吳正殷·46), 신의주 전분 제조업 오정수(吳楨洙·40), 서울 농업 신현모(申鉉模, 딴 이름 允局·45), 협성실업 교원 한승인(韓昇寅·36), 〃〃〃허용성(許龍成, 딴 이름 然·43), 평양 숭실전문 교수 최윤호(崔允鎬·45), 선천 목사 백영업(白永燁·47), 평앙 비료상 석봉련(石鳳鍊·50), 〃자동차 대리업 최능진(崔能鎭·41), 〃토지 경영업 문명훤(文明 ·49), 선천 지물 도매상 오익은(吳翊殷·39), 평양 목사 한승곤(韓承坤·58), 〃농업 김배혁(金培赫·52), 부산 목사 송창근(宋昌根·41), 강서 점진학교 교원 김봉성(金鳳性·39), 서울 저술업 이윤재(李允宰·51), 안악농업 김용장(金庸壯·43), 평양 양말 제조업 오경숙(吳敬淑·49), 〃가라쓰 제조업 김찬종(金燦鐘·48), 〃숭인상업 교장 김항복(金恒福·41), 강서 상업 조종완(趙鐘完·48), 평양 기미취인원 백응현(白應賢·49), 서울 의사 이용설(李容卨·44).
1939년 12월 8일에 제일심(경성 지방법원) 재판장 부옥영개는 41명 전원에게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선고하였으나, 검사는 곧 공소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제이심 경성 복심법원에서는 1940년 8월 21일에 시본정평(矢本正平) 판사가 다음과 같이 유죄 판결을 내리었읍니다.
이광수(49) 징역 5년, 김종덕(54)〃4년, 박현환(49)〃〃, 김윤경(47)〃〃, 주요한(41)〃〃, 김동원(57)〃3년, 김성엽(55)〃〃, 김병연(45)〃〃, 조명식(47)〃2년반, 오봉빈(48)〃2년, 송창근(43)〃〃, 최능진(43)〃〃, 백영엽(49)〃〃, 조종완(50)〃〃, 김찬종(50)〃〃, 김봉성(41)〃〃[이상 17명은 체형]
정인과(54), 장리욱(46), 이용설(46), 유기준(47), 이영학(37), 김선량(42), 신형모(47), 이원규(45), 김하연(44), 이윤재(53), 김용장(45), 한승인(38), 허용성(44), 김항복(41), 오정은(50), 오익은(41), 주현측(58), 오정수(41), 박응현(51), 석봉현(52), 오경숙(51), 한승곡(60), 김배혁(54), 문명훤(51), (이상 24명은 2년 징역에 3년 간 집행 유예)(형 받게 되지 않은 이 중에는 상고하지 않은 이들도 5명 있음)
이에 대하여 피고 36명은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는데, 이 고등법원의 제3심 판결은 1941년 11월 17일에 고교융이(高橋隆二) 판사가 전부 무죄 판결을 내리어 이 사건이 끝나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사상이 불온하다고 보호 관찰소(서소문 턱에 있는, 현 가족 재판소 자리)에 붙게 되어 한 달에 한 번씩 모아 “황국신민화” 훈련(매일 궁성 요배, 꿇어 앉아 소금 양추절하고 황국신민서사가 읽히기, 남산 신궁 참배시키기) 시키는 것이었읍니다. 여기에 매어 있기도 그 다음 해(1942년)에야 풀어주었읍니다.
4. 조선어 학회 사건(1942. 10. 1-1945. 8. 15)
동우회가 사건이 끝난 다음해인 1942년 10월 1일에는 또 조선어 학회 사건에 걸리어 함경남도 홍원 경찰서로 함흥 지방 법원으로 끌리어 다니게 되었읍니다. 조선어 학회는 1921년 12월 3일에 “조선어연구회”란 이름으로 창립되었는데 나는 그 창립회원의 한 사람이었으며 회의 이름은 그 뒤 조선어 학회, 한글 학회(해방 뒤)로 바뀌게 되었읍니다. 서울에 있는 조선어 학회가 왜 홍원으로 잡히어 가게 되었는지 우리는 몰랐지마는 홍원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읍니다. 그 유치장에는 함흥과 홍원에서 함흥으로 통학가던 학생 또는 졸업생 네 쌍의 남녀가 갇히어 있었는데 같은 방에 있던 남자 청년이 말하기를 “선생님들이 이리 잡히어 오시게 된 것은 저희 때문이라 죄송하기 짝이없읍니다”하기에 “그것은 무슨 말이냐” 물었더니 그 청년의 말이 “옆 방에 있는 여학생에게 함흥에 있는 남학생이 두둑한 연애 편지를 보내었는데 경찰서 형사가 우편국에 출장하여 수상한 편지를 뜯어 보던 중이었으므로 그 여학생에게 온 두둑한 편지를 뜯어 보니 연애 편지였읍니다. 연애 편지뿐이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는데 끝에 가서 인제 일미 전쟁이 일어나게 될 터인데 그 결과는 일본이 패하게 되고 따라서 한국은 독립하게 된다 한 말이었으므로 그 형사는 눈이 뒤집힐 듯이 놀라면서 그 두 학생을 잡아들이는 동시에 그러한 동기를 추궁하여 네 쌍의 남녀가 잡히었는데 경찰이 추궁하는 것은 누가 그러한 민족적 독립 사상을 고취하더냐 함이었읍니다. 남학생은 아무도 배후 선생이 없고 우리 스스로의 생각이라고 하였지마는 여학생들은 악형 고문에 못이기어 영생고보에서 일보다가 조선어 학회로 전임하여 사전 편찬에 종사하고 있는 정태진 선생을 대었으므로 정태진 선생은 곧 증인으로 불려 가게 되었읍니다. 증인 심문 방법은 증인된 사건만 묻는 것이 아니라 증인과 관계된 모든 일을 샅샅이 캐고 고로 어학회의 목적, 그 사업, 그 회원 인물들에 대하여 추궁에 추궁을 더한 결과 학생 사건은 여차가 되고 조선어 학회 회원들을 잡아 오게 된 것입니다.”함이 그 청년의 말한 요지였읍니다. 나를 맡아 심문하는 형사 신원(新原)동철(東哲=朴東哲)은 곧 우편국에서 여학생에게 온 “불온한” 편지를 발견한 장본인입니다. 홍원 경찰서의 악형 고문은 서울 종로 경찰서에서 겪은 동우회 사건 때보다 더 잔인 무도한 것이었읍니다.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겨를이 없읍니다. 주는 음식은 밀곱삶이, 그나마 분량도 부족하여 모두 영양 부족에 걸리게 되매 칼슘 주사를 주더니(경찰서 비용으로 준다고 공언함) 떠날 때에는 그 값을 물라고 호령이었읍니다. 이윤재 님은 주사 값 보내라고 집에 보낸 편지가 간 곳 모르겠다고 되돌아옴에 대하여 “이 자식 네 집 주소도 몰라 되돌아 오게 하였느냐”고 무수한 매를 맞았읍니다. 이같이 음식이 부적당함과 거처가 불결함과 옴장이 잡범이 많이 잡히어 옴과 공기 불결들의 악조건은 유치장의 단골 병인 피부병, 위장병, 호흡기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나도 위장이 약한 병을 얻게 되었지마는 이윤재, 한증 두 분은 함흥에서 이 때문에 옥사하게 된 것입니다. 1년 동안을 홍원 유치장에서 가진 고문으로 소위 자백 받은 죄명은 치안유지법 제1조 위반(일본 영토를 갈라내어 독립하려 한 죄)으로 기소 24명, 기소 유예 6명, 기소 중지 2명(권덕규, 안호상의 병고로) 불기소 1명(안재홍)모두 33명이었읍니다. 함흥검사국에서는 1943년 9월 18일에 기소 유예에 붙인 12명은 다음과 같았읍니다. 검사가 나에게 근신하겠다는 서약서와 도장을 찍으라면서 “그대는 먼저의 동우회 사건으로 면역성을 얻었기에 기소 유예에 붙임으로 무죄란 것이 아니니 조심하라.”하였읍니다.
기소유예된 이―이만규(李萬珪), 이강래(李康來), 김선기(金善琪), 정인섭(鄭寅燮), 이병기(李秉岐), 윤병호(尹炳濠), 서승효(徐承孝), 이은상(李殷相), 서민호(徐珉濠), 권승욱(權承昱), 이석린(李錫麟), 김윤경(金允經), 그리고 기소되어 예심에 붙인 이 16명은 다음과 같읍니다.
이극로(李克魯), 이윤재(李允宰), 최현배(崔鉉培), 이희승(李熙昇), 정인승(鄭寅承), 정태진(丁泰鎭), 김양수(金良洙), 김도연(金度演), 이우식(李祐植), 이중화(李重華), 김법린(金法麟), 이인(李仁), 한징(韓澄), 정열모(鄭烈模), 장지영(張志瑛), 장현식(張鉉植).
같은 해(1944년) 9월 30일에 예심 판결이 끝났는데 전기 16명 중 이윤재 님이 56세로 1943년 12월 8일에 옥사하고, 한징 님이 그 다음 해(1944) 2월 22일에 옥사하고, 정열모, 장지영 두 분이 면소되어 옥에서 나오게 되었으므로, 12명만 이 공판에 붙게 되었는데 1945년 1월 16일에 함흥지방법원에서 서전승오(西田勝吾) 판사는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읍니다.
- 이극로 징역 6년(구류 통산 600일)
- 최현배 〃 4년(〃〃 750일)
- 이희승 징역 3년반(〃〃)
- 정인승 〃 2년 (〃〃 440년)
- 정태진 〃 〃 (〃〃 570년)
이상 5명은 체형을 받게 되었으나 김량수, 김도연, 이우식, 이중화, 김법린, 이인 6명은 각각 2년 징역에 4년간 집행 유예를 선고 받게 되고, 장현식은 무죄를 선고 받게 되었읍니다. 이 판결에 대하여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네 분은 1월 18일에 고등 법원에 상고하고, 정태진 님은 복역하고 나감이 더 빠르다고 (7월 1일에 먼저 나옴) 상고권을 포기하였는데 검사 판본일랑(坂本一郞)도 21일에 전기 상고한 네 피고와 무죄된 장현식 님을 상고하였읍니다. 그러한데 고등법원에서는 8월 13일(해방 2일 전)에 상고를 기각하였읍니다.
그리하여 함흥 지방법원의 판결대로 복역하라고 확정되었지마는 해방의 은택으로 자유의 몸이 되어 옥에서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7. 우리 말글 연구의 큰 별·지조와 양심의 상징인 ‘나의 스승 김윤경’을 마무리하면서
한결이 나신 101돌을 맞으며, 광복 50주년을 맞는 오늘날, 우리들은 한결이 사시던 그 무렵 그 시대에 있었던 갖가지 사건들과 역사의 주인공들을 회고함으로써 오늘을 사는 우리들로서는 무엇이 참된 것이고, 무엇이 거짓으로 위장된 것이냐 하는 것을 판단함으로써, 그 참된 뜻을 이어받아 영원 무궁토록 다시는 그러한 수치스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민족의 수난기에 누가 정복자의 혹독한 고문과 학대에 죽어 갔고, 누가 그 수치와 모욕을 견디며 오늘의 우리를 있게 했는가 하는 문제, 누가 흔히 일컬어지는 친일파, 회색분자, 방관자가 되어, 안일 무사하다가 변신하여 오늘에 이르렀는가 하는 문제, 이러한 문제는 따지고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애국 애족’을 말하고, ‘한국의 학보’, ‘국어학의 맥락’을 말할 수 있는 양식 있고, 지각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이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한결은 우리 말글 연구의 큰 별이요, 애국 애족으로 일관된 지조와 티없이 맑은 양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한결은 직접으로 쓰신 ‘나의 인생관’(‘신세계’ 1963. 3. 20)에서 “사람은 무엇하러 이 세상에 났느냐? 무엇하려고 사느냐? 죽는다는 것은 어찌되는 것이냐? 이러한 의문을 일으켜 본 사람은 드물다고 생각한다.”하고는, 그 세 가지의 의문-물음의 내용을 소크라테스(희랍 철학자), 쇼펜하우어(독일 철학자), 솔로몬(이스라엘 임금), 석가모니(인도의 가비라 성주 정반왕의 아들), 톨스토이(러시아의 작가) 등의 인생관을 결부시켜 가면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도 완전하여라’함을 나의 일생의 목적으로 삼고, 불완전한 나의 인격을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결점을 덜고 비뚤어짐을 바로잡기에 힘써서, 하나님과 같도록, 적어도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가깝게 되도록, 일생 동안 노력하여 인격의 탑을 높이 쌓아 올리기로 하였다. 나뿐 아니라 이웃 사람에게도 나와 같이 인격의 탑을 쌓도록 함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한 길이 될 것이다. ‘나에게 은과 금은 없으되 나에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일어서라’ 한 성도(聖徒)의 교훈의 실현도 될 것이라 믿는다.”고 하셨다.
저 앞에서 말했듯이, 한결은 “‘육·이오’다섯 돌을 당하여”에서 말씀하시기를, “……기회나 엿보아 왜놈의 세력이 강한 때면 왜놈에게 붙고, 해방이 되면 애국자로 제일 선두에 나서며, 공산당이 이길 듯하면 공산당에 붙고, 국군이 이길 듯하면 국군에 아첨하는 기회주의자, 소위 간사한 자, 아첨하는 자”, 이러한 사람의 행동은 “……‘세상 사람이 다 흐리더라도 나는 혼자 맑으리라’하는 자립 자존자, 선구자, 지도자, 용사, 의인, 양심 가진 자, 세상을 건지겠다는 고상한 인격자의 행동은 아니다.”라 지적하신 바 있다. 울분이 터져서 하시는 한결의 말씀이 참뜻을 우리는 다시금 되새겨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고난의 역사에서 죽음·압제·수치·모욕을 감수하며 내 겨레를 감싸 안았던 우리의 은인, 거룩한 참사람을 드러내어 길이 높이 받들고, 널리 그 공적 업적을 펼쳐 후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러한 망국의 수치, 망국의 서러움을 겪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나라와 겨레를 위해 바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민족적 암흑기에 있었던 역기능의 반역·회색·방관자는 마땅히 응분의 대접을 받아야 민족적 정기가 흐려지지 않는다는 것도 또한 명심해야 할 것이다.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누구나 광복 50년을 말하면서, ‘애국 애족’을 말하고, ‘한국의 학보’, ‘국어학의 맥락’을 말할 때, 우리는 편견에서 오는 편파와 과장, 오만과 질시, 태만과 무성의는 참된 것에 대한 반역임을 알아야 한다. 민족적 고질인 파당적 편파는 경계해야 한다. 이에 더하여, 양식 있는 사람이면 분격할 일이 또한 있다. 예속적인 일제 식민 사관에 물든 민족 반역 집단의 찌꺼기들에 의해, 참된 것이 거짓에 가리워져 결과적으로는 민족 정기를 희석시키게 되는 것과 같은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에 이런 것이 있다. “그 사람이 과연 저런 대접, 저런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고. 예속에 협력한 무리와 그 배후 세력과 그들에 영향 받은 자들의 집단과 그들 집단의 구성원들의 내뱉는 언동에 대해서는 각별히 유의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는 민족적 은인에 대한 무례요, 배신이요, 망조다.
한결의 우리 말글 연구 실적에서 그 대표적인 것을 들라면, 첫째는 “조선문자급 어학사”이고, 둘째는 “나라말본”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저서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학문적 업적 말고도, 그 밑바탕에는 꺼져 가는 우리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려는 보이지 않는 의식에 수반된 노력이 갈무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광복 50주년을 맞고, 그 참뜻을 되새기며, 한국의 학보, 국어학의 맥락을 말하면서, 우리는 흔히 저 나무의 열매(결과)만을 쳐다보고, 그것이 어떤 토양(환경)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렸고, 그것이 어떠한 풍상을 겪으며 자랐는가에 대해서는 도무지 생각해 보지도 않거나, 말하려 하지도 않으려는 부류의 언동을 자주 대하게 된다. 그러한 언동은 그 이유야 무지에 있건, 반역의 희석에 있건, 경계해야 한다. 개탄할 일이다. 뿌리 찾기가 없는, 지엽만을 내세우는 일과성의 위장된 애국자, 학보 학맥의 글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는 ‘애국 애족’을 말하고, ‘국어학의 학보’, ‘한국학의 맥락’을 말하려면, 먼저 그 뿌리를 찾아야 한다. 모든 학문의 역사는 뿌리 찾기다. 가지만 보는 것은 학문적인 태도가 아니다. 뿌리 없는 열매가 어디 있는가. 처참했던 일제하에서 저작된 명저, 한결의 “조선문자 급 어학사”와 주시경 선생의 정신과 학맥을 이어 받은 한결의 “나라말본”에 대한 참값을 인식하지 못하고서는 ‘애국 애족’, ‘한국의 학보’, ‘국어학의 맥락’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결이 나신 101돌, 광복 50주년을 맞는 오늘의 시점 이 자리에서 생각해 보면, 일제하 암울했던 당시의 한결의 애국 애족의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과 그 무렵에 저작된 우리 말글에 대한 명저, 한결의 “조선문자 급 어학사”-“나라말본”의 연구 업적에서, 우리는 그 시대적인 상황의 특수성으로 하여, 겉으로 나타난 학문적 업적 말고도,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저자의 역사 의식, 애국 애족의 실천적인 자주의 정신을 감득할 수 있는 것 같아, 한없이 자랑스럽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바이다(이 글은 원래 앞의 “나의 스승 김윤경”과 뒤의 “한결이 제자들에게 남기신 글”이 합쳐진 한 편의 글이었으나, 주관하는 쪽의 요청에 의해 두 편의 글로 가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