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에 나타난 김윤경 선생
Ⅰ. 인품에 대한 소문과 실제
1960년도 2월에 나는 서울 성동구 군자동 소재 장안평 수리조합 동문 배수장 관리실 방에 비로소 서울 유학의 첫 여장을 풀었다.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에서 장호원 쪽으로 삼십리 상거에 점동면(占東面)이 있고 나는 거기서 다시 오갑산(梧甲山) 밑 쪽으로 십 리 떨어진 당진리(唐辰里) 마을에 살면서 점동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 대학교 문과대 국어국문학과에 겨우 합격해 있었다. 나의 생부(生父)이지만 호적상 삼촌인 아버지가 그곳 장안평 수리조합 동쪽 문배수장께에 살며 거기서 일하셨기 때문에 나의 서울 유학 첫 거주지는 그 곳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장안평은 7~80%가 논이었고 나머지는 밭으로서 근교 농산물 생산지의 큰 몫을 차지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다 알다시피 1960년은 동족전쟁이 끝난 지 십 년이 채 못 되어 사회는 온통 폐허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 채 어수선하고 가난의 시름이 전국을 휩싸고 있던 시기였다. 가난, 굶주림의 고통을 남에게 알리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절망의 어떤 것이다. 60년대 대학에 입학한 세대는 가난이 무엇인지를 좀 아는 세대라고 나는 믿고 있다.2. 김윤경 선생의 수필과 인격 드러냄의 문체론
서양 문학론에서 문체론을 거론할 때 으례히 나오는 말은 프랑스의 박학다식했던 문인 뷔퐁(Buffon)의 ‘문체는 곧 그 사람 자신이다.(Le style C'est I'homme meme.)’라는 명제이다. 서정시나 자전 소설, 수필과 같은 장르에서 이 명제는 금과옥조처럼 여겨져 글 쓰는 사람의 인격이 글의 문체에 드러난다고 많은 사람들은 믿어 왔다. 정말로 오랜 세월을 두고 잊히지 않고 전해 오는 문체론의 하나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막 쇼러(Mark shorer)라는 분에 의해 이 문체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어 사실주의 소설 작품들을 비롯한 객관적인 서술로 주관적인 자기 표출이 억제되곤 하는 작품들을 고색 창연한 위의 문체론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반론이 나왔다. 그에 의하면 ‘문체란 그 주제이지’(The style is the subject.) 결코 쓰는 작가 자신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논의를 길게 보면 여러 이야기들이 딸려 나오겠지만 대강 이 선에서 멈추되 두 명제가 기실은 오십보백보에 속하는 서양식 말 가르기 취미와 관계 깊다고만 나는 밝히고자 한다. 글(혹은 문체)이 그것을 쓰는 사람의 인격을 드러낸다는 말은 사실 꽤 설득력이 있는 말이고, 그 인격뿐만 아니라 그의 재능이나 취미 버릇 입장 등 여러 가지 삶의 흔적을 나타내는 것이 또한 글임을 나는 믿고 있다. 또한 모든 글은 작자의 인격이나 입장만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가 그 글을 쓰는 시대의 풍습과 사회에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현상, 사람들의 유행 감각, 기호 등 여러 가지 시대정신을 드러낸다. 김윤경 선생의 여러 형태의 글을 묶어 수필이라 칭하고 이 수필들을 읽으면서 받는 느낌은 우선 김윤경 선생이 평소에 쌓아 온 덕(德)으로서의 기독교적 인품이다. 그는 열세 살 때부터 부친이 기독교 신자가 됨에 따라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신자가 된 해가 1906년이니까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되어 박해를 면한 초기의 기독교 가족으로서의 기틀을 김윤경 선생 댁은 다진 셈이다.1. |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이를 돕는다. |
2. |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린다. |
3. | 善을 行하다가가 落心하지 말라. 때가 이르면 거둔다. |
4. | 서로 사랑하라. |
5. | 저의 할 일은 제가 하여라. 干涉과 盜賊은 저의 일 못하는 이를 찾아 삼킨다. |
6. | 眞理 안에서는 못 할 것이 없다. |
7. | 아무 새 眞理를 發見하기 전에는 變하지 말아라. |
8. | 人生의 目的은 人格完成이니, 언제든지 온전하여지는 일에 어기어지는 일을 말아라. 이것은 나의 少年時代부터 느끼어짐이 큰 것을 만날 적마다 하나씩 주어 모아 日記 거죽에 적어 모아 오던 것인데, 맨 끝의 것은 그 밖의 모든 것을 包含할 만한 大綱領이 되는 것이외다. |
1. | 애국적 선구자들이 자기 수양에 힘써 역량을 키우고 민중의 모범이 될 것. |
2. | 그러한 동지들이 굳게 단결하여 힘을 더욱 크게 할 것. |
3. | 그 힘으로 교육과 산업 진흥에 전력하여, 전 민족의 역량을 준비할 것. |
4. | 그리하여 앞으로 오는 독립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자주적 역량으로 민족 재생의 큰 사업을 이룩할 것. |
3. 국어학자로서의 생애 엿보기
한 나라 혹은 민족이 그들 모여 사는 인민들로 하여금 서로 막힘 없이 마음과 뜻을 소통할 수 있는 말씀을 지녔고 그 말씀을 적을 수 있는 글자를 가졌다는 것은 복이다. 나라 말씀을 가지고서야 자아라고 하는 개인 존재는 비로소 개인적 자아로부터 역사적 자아 또는 사회적 자아로 존재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 나의 ‘나됨’이 나의 ‘너됨’이나 나의 ‘그됨’이라고 하는 관계고리의 틀을 맺지 않고서는 절대 온전한 자아로 의미화할 수 없다. 그것은 절대이다. 나라를 잃고도 그 나라됨의 연결판이며 고리가 되는 말과 글을 잃지 않는다면 하고 알퐁스 도데는 그의 짧은 소설 ‘마지막 수업’에서 ‘감옥열쇠를 가지고 있는 거나 다름없노라’ 말했다. 이름을 빼앗고 혼을 빼앗기 위해 명산 산정에 쇠막대기를 박고 쇳물을 부었으며, 족보를 없애려고 애썼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악랄한 약탈은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을 말살하려는 기도였다. 지금도 일본 식자들과 만나면 그들은 어째서 자기들은 한문을 반드시 섞어 쓰는데 한국인들은 한글만을 고집하느냐고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묻곤 한다. 자기네들은 한자 없이 독자적인 문자로 의사를 전달할 수 없는데 반해 한민족의 한글은 그것 자체만으로 소통이 가능한 자족을 누리고 있으니 글자의 독창적이며 독자적인 자율성을 그들이 샘내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시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