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결 김윤경 선생의 학문과 인간】

수필에 나타난 김윤경 선생

정현기 / 연세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Ⅰ. 인품에 대한 소문과 실제

  1960년도 2월에 나는 서울 성동구 군자동 소재 장안평 수리조합 동문 배수장 관리실 방에 비로소 서울 유학의 첫 여장을 풀었다.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에서 장호원 쪽으로 삼십리 상거에 점동면(占東面)이 있고 나는 거기서 다시 오갑산(梧甲山) 밑 쪽으로 십 리 떨어진 당진리(唐辰里) 마을에 살면서 점동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 대학교 문과대 국어국문학과에 겨우 합격해 있었다. 나의 생부(生父)이지만 호적상 삼촌인 아버지가 그곳 장안평 수리조합 동쪽 문배수장께에 살며 거기서 일하셨기 때문에 나의 서울 유학 첫 거주지는 그 곳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장안평은 7~80%가 논이었고 나머지는 밭으로서 근교 농산물 생산지의 큰 몫을 차지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다 알다시피 1960년은 동족전쟁이 끝난 지 십 년이 채 못 되어 사회는 온통 폐허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 채 어수선하고 가난의 시름이 전국을 휩싸고 있던 시기였다. 가난, 굶주림의 고통을 남에게 알리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절망의 어떤 것이다. 60년대 대학에 입학한 세대는 가난이 무엇인지를 좀 아는 세대라고 나는 믿고 있다.
  1960년 3월 며칠이었던가? 신입생 등록과 수강 신청 절차가 있고 신입생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고 있던 연세대 노천 강당에서 나는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청량리에서 시내버스를 내린 나는 십 리 길은 족히 될 만한 거리의 둑 길을 터덜거리며 걸어왔다. ‘자랑스런 연세인 여러분! 이제부터 여러분은 연세인의 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로 연결되는 각 처장들의 말을 나는 더 참고 들을 수가 없었다. 그 날은 등록금 납부일이 하루 지난 날이었고 등록금이 마련되면 아버지께서 나를 찾아오겠다고 아침에 약속했었는데 끝내 아버지는 교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벌써 나는 연세인이 되는 희망을 포기해야 한다고 체념하였다. 그래서 나는 더는 그들 연세인 무리 속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모여 사는 존재로서의 개인이 어느 집단에 소속되지 못한 소외감이란 얼마나 끔직한 절망이며 서름인지를 심각하게 확인한 서울살이에서의 첫 경험이었다. 답십리의 청량리 끝자락에서부터 뚝섬 쪽으로 이어지는 길고 구불구불한 배수장께 수로길을 걸으면서 나는 여러 가지 새로운 진로에 대한 생각을 곱씹었다. 이제 나는 내 스스로 선택하여 지망한 대학에 합격이 되었으나 입학금을 낼 수 없어 원하던 대학에 다닐 수 없게 되었다. 나의 능력 가운데 입학금 마련하는 몫은 전무한 상태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몫은 해 내었다. 그러니 여한은 없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길로 나서자! 그 첫 길이 가수가 되는 길이다. 아버지께 기타 한 벌만 사 달래자. 그것으로 등록 못 해 주신 빚을 청산해 드리자. 그러면서 나는 십 리 길이 훨씬 넘는 길을 터덜거리며 걸어와 방에 길게 누워 있었다. 저녁 때가 되자 어머니는 밥상을 차리시고 어째서 아버지가 이렇게 늦는지 모르겠다며 상한 속마음을 다독이며 나를 위로하려 했다. 끊임없이 배가 고팠던 그 시절. 허기증을 그림자처럼 거느리며 하루 종일 굶었음에도, 그리고 이미 대학 생활의 꿈을 일찌감치 끊고 허황하긴 하더라도 가수로 성공해 볼 결심을 굳힌 마음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 나는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밥상을 멀찍이 둔 채 벽에 기대어 시름없이 앉아 있는 나와 내 눈치만 보며 밥을 퍼먹는 어린 동생들, 시름겨운 채 또한 밥상에서 물러앉은 어머니, 30촉짜리 알전구 밑에 흔들리는 설움을 휘저으며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아버지는 귀가하셨다.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내게 먼저 아버지는 말을 거셨다.
  ‘야! 너 어디 있었냐? 아무리 학교 안을 돌아다니며 찾아봐도 네가 있어야지……? ’
  ‘……?’
  아버지는 안주머니에서 뭔가 쪽지를 꺼내어 내게 주시면서 감동한 듯 낮은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야, 연세 대학교 참 좋은 대학이더구나! 거 너의 학과에 김윤경 교수라는 분 참 점잖고 훌륭하시더라. 돈이 늦게 마련되어 수납 창구엘 갔더니 마감기일이 지나서 못 받겠다고 하지 않겠니? 아연해서 어쩔가 망설이다가 문과대학 사무실엘 갔더니 거기 김윤경 교수라는 분이 계시더라. 사정 얘길 했더니 직접 나를 데리고 접수부엘 가시더라. 어른이 어찌나 온화하고 자상한지 ……, 그래 넌 하루 종일 어디 있었냐?”
  침울했던 방안은 금세 화기가 돌고 나는 마치 돌에 얻어맞은 듯 얼얼한 느낌인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나의 인생 설계가 이제 또 다시 전면 개편될 수밖에 없는 전환 시점에서 나는 나의 아버지로부터 김윤경 선생의 인품 이야기를 처음 듣게 되었다. 맞부딪치는 만남의 시작은 이렇게 심상한 인연으로 이루어진다. 김윤경 선생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하고도 범상한 친절을 보이신 것임에 틀림없다. 지금의 나를 당시의 선생과 입장을 바꾸어 놓더라도 그런 친절은 바뀌지 않았을 것으로 나는 감히 생각한다. 나는 어떻든 선생께 문법을 배운 제자이고 비록 전공이 다르다 하더라도 내 머리 속의 스승으로 김윤경 선생님이 살고 계신 터여서 그 정도의 친절은 상식으로 통하는 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은 당시의 나나 내 아버지께는 커다란 희망의 돌파구였고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인상으로 남겨졌다.
  나의 대학 생활은 1960년 3월부터 그렇게 이루어졌고 어렵게 시작된 학교생활은 졸업할 때까지 고통의 연속이었는데 그것은 온전히 내 개인이 감당할 생애의 무게일 수밖에 없다. 60년대 작가 김승옥(金承鈺)의 ‘생명연습’이나 ‘乾’, ‘염소는 힘이 세다’, ‘幻想手帖’ 등 작품들이 거느리고 있는 어둡고 앞날에 대한 불안감, 불확실한 미래, 절망적인 분위기가 내게는 아주 철저하게 맞아떨어지는 체험 내용이었고 도처에 깔린 굶주림의 그림자가 곧 나 자신의 허기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실존적 현실이었다. 생애를 일정한 형태의 빛깔이나 꼴로 만드는 요인 가운데 결핍증은 가장 큰 원동력으로 작용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결핍을 채우는 길은 비단 물질적 재부 쌓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의 상상력을 동원하는 원동력으로서의 결핍증은 또한 필수 요건일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해 소진되고 사라진 물질적 자산 못지 않게 그것으로 해서 멸절되거나 없어진 정신적, 전통적 삶의 안정 받침 문제는 그야말로 심각하고도 시급히 해결해 가야 할 결핍증의 한 몫이었다. 이런 사회적 요구에 단단히 한 몫을 담당해야 할 곳은 우선 대학이었다. 곧고 바른 학문적 주장과 판정을 기초로 해서 혼란스럽고 뭔가 함부로 놓여지고 있던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바로잡아야 할 그런 요구가 은연중에 국민들 간에 퍼져 올랐었고 그에 부응한 역사적 사건이 대학생들로부터 크게 혁명의 물결을 이루면서 터져 올랐음도 우리는 이미 확인하였다. 1960년 4월 19일에 전국적인 열기로 피워 올린 4·19 학생 혁명 물결은 내 생애의 또 한 가지 지울 수 없는 체험의 내용을 이루는데 이 체험과 김윤경 선생에 관한 나의 인상 또한 필수 관계로 겹쳐 있다. 4·19 학생 혁명이 일어난 1960년도에 김윤경 선생은 연세 대학교 대학원장직을 7년만에 그만두셨고 내가 입학한 그 해에 나는 선생님의 ‘국어학 개론’을 듣고 있었다.
  가열한 왜제 시대를 살면서 그는 3·1운동 만세 사건과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옥고(獄苦)는 물론이고 실직으로 근 아홉 해를 극도의 실망 속에 보내었다. 45년 조선 광복과 함께 그는 연희 대학교의 접수 위원 및 재단이사, 교수, 문학 부장, 총장 대리(1947년 9월, 1950년 5월, 1952년 3월), 대학원장(1953년 4월) 등의 연세 대학교와 관련된 학사 업무에 관계하고 계셨었다. 그러니까 1960년도에 입학 등록 기간이 하루쯤 지나서 도착한 나의 아버지를 수납 창구에 이끌고 가신 선생님의 처사는 그만큼 불가항력적인 가난의 고통이나 어려움 속에서도 그것을 뚫고 뭔가를 성취해 보려는 인(人)에 대한 자신의 따뜻한 눈돌림과 인정으로 평시에도 몸에 밴 교육자적 인품에 따른 자발적인 반사 행위였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처럼 인생 역전의 용사이며 연륜과 경력으로서도 이미 학계나 교육계에서 선생님의 명성이 절정을 이루고 계실 때 나의 아버지는 우연히도 그 어른을 만나게 되었고, 나는 그렇게 웅장하게 울리는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님들의 신화와 같은 소문과 실제의 부딪힘 속을 어리둥절한 채 둥둥 떠밀려 가고 있었던 형국이다.
  1960년 4·19 학생 혁명과 이승만 대통령. 나는 4·19가 나기 전 달에 입학 시험 면접 시간에 김윤경 선생의 기대에 찬 질문을 여지없이 망쳐 버린 실수를 저절렀다. 당시 연세대 국문과 교수이셨던 권오돈(權五惇) 교수는 나의 고향인 여주군 점동면의 동향분으로 우리 집안과는 세교(世交)가 있었고 연세대 일차 합격을 제일 먼저 나의 양부(養父)께 전하시면서 기뻐해 주신 바 있었다. 권오돈 교수는 왜제 기간 근 15년 간을 영어생활을 하셨던 애국지사였고 김윤경 선생과 각별한 사이였던 관계로 면접 시간 전에 아마도 나에 대한 특별한 언질을 권오돈 선생께선 김윤경 선생께 주셨음에 틀림없다. 그런 면접 시간에 나는 기대를 지니신 김윤경 선생의 질문인 ‘누구를 존경하는고?’에 어물거리다가 ‘이승만!’이라는 회환한 대답을 늘어놓았다. ‘왜?’ 하는 추궁에 나는 구차스럽고도 고식적인 답변을 뻔뻔스럽게 하여 선생들을 실망시킨 바 있었다. 주눅든 시골놈의 음흉한 속셈? 그런 과정을 거친 다음다음 달에 일어난 4·19 학생 혁명!
  서울 시내가 발칵 뒤집혀 도로마다 인파와 인파로 거센 물결을 일으킨 4월 19일 밤을 넘긴 다음 주인 4월 26일, 젊은 희생에 정부는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떨치고 나선 교수 데모대의 앞 장면에서 나는 권오돈 선생과 정석해(鄭錫海) 선생, 김윤경 선생, 그리고 성균관 대학교의 변희용 선생 등이 면면이 기억에 남아 있다. 당시 선생의 연치 예순일곱 살, 8월에 그는 학술원 종신 회원으로 피선된 바 있고 그 다음 해 5·16 군사 쿠데타 직후엔 서대문 경찰서에 보름간 구치되는 수모를 겪은 바 있어서, 되돌아보거니와 선생의 생애란 뭔가 바르지 않은 것을 그대로 보아 넘기지 못하는, 그래서 불의에 끊임없이 맞서 온 그런 생애였던 것으로 내겐 읽힌다.
  선생의 수필 작품을 통해 본 인품론을 쓰면서 내가 이처럼 길게, 사소한 보이는 뒤늦은 등록 사건을 자주 반복해 화두로 삼고 있는 이유는 내가 대학 생활을 통해 국문과 선배들로부터 전해 들었던 신화와 같은 선생의 행적 사항과 나의 늦은 등록 사항이 얼핏 보기엔 원리 편차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우리들 스승으로서 김윤경 선생은 연세 대학교 문과대 국문학과의 지워지지 않는 신화적 전설로 남아 있다. 학점 매기는 원칙이 엉뚱한 학생들이 눈물 공세나 과일 사 들고 댁으로 찾아가 사정 늘어놓기 따위에 결코 흔들린 적이 없다든가, 따님 결혼식 날과 겹친 선생의 강의 시간을 휴강하지 않아 아예 결혼식장으로 찾아간 학생들이 결석 처리되고 고지식하게 강의실로 간 한두 명 학생을 놓고 끝까지 강의를 수행했다는 이야기들은 당시 연세대 국문과에 계셨던 또 한 분 국어학의 거인 최현배(崔鉉培) 선생 일화들과 겹치고 넘나들어 딱히 한 분만의 인품 측정에 애로가 없지 않은 바 있다. 나는 일이 학년 동안 선생께 ‘국어학 개론’과 ‘국어 문법’을 수강하여 배우는 동안 인상적인 두 가지 사항을 기억하고 있다.
  하나는 선생의 강의 방법인데, 선생은 시작 종이 울림과 동시에 들어왔다가 끝 종이 울릴 때까지 칠판에 가득하게 강의 내용을 적으면서 풀이해 나가셨다. 요즈음 내 스스로의 서투른 칠판 글씨를 보면서 저절로 웃음이 나는 때가 있는데, 당시에 나는 사실 선생의 칠판 글씨를 따라 적으면서 참 글씨 못 쓰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었다. 글씨 획들이 어찌나 서툴러 보였는지 소학생 글씨나 다름없다고까지 나는 생각했었는데 요즈음 학생들의 눈에 내 칠판 글씨가 꼭 그렇게 보일 거라 생각하니 가끔씩 웃음이 난다. 대저 사람이란 남의 문제만 문제로 읽을 줄 알지 자신의 문제는 볼 수 없는 장님으로 태어난 거는 아닐까? 자아를 못 보는 장님.
  또 하나의 선생에 대한 인상적인 기억을 출석 확인 방법이다. 강의 시간 종소리와 함께 들어오신 선생은 출석을 부르는 시간에 들어오거나 출석 확인이 끝난 다음에 들어온 학생을 반드시 내보낸 다음에야 강의를 시작하였다. 학생은 언제나 선생님보다 먼저 강의실에 입실하여 강의 들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김윤경 선생의 강의 원칙이었다. 이 원칙이 언제인가는 아예 책상을 출석 순서에 맞추어 1, 2, 3, 4번식으로 정한 다음 이름 대신 번호를 불러 확인하는 바람에 대리 대답의 스릴 넘치는 재미를 학생들로부터 선생은 빼앗았다. 나라를 잃은 상태에서 배우는 국어학 공부도 아닌, 엄연한 독립국가의 안일함 속에서 배운 국어학 공부가 지독하게도 재미가 없었음도 나는 솔직하게 밝히겠다. 그러나 그처럼 재미도 없고 융통성도 없었으며 기계처럼 엄격했던 선생님이 어째서 우리들 망둥이 제자들의 마음속에 그처럼 생생한 모습으로 살아 계실까? 그것을 나는 요즈음 와서 점점 더 확연한 깨달음으로 느끼게 된다. 말과 행동의 일관된 일치, 바른 길을 찾아 겸허하게 살며 가르치며 궁구해 온 선생님의 인품 바로 그것이 교육의 산 지표였음을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뚜렷하게 확인한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생애 행보인지 아는 이는 알 일이다.


2. 김윤경 선생의 수필과 인격 드러냄의 문체론

  서양 문학론에서 문체론을 거론할 때 으례히 나오는 말은 프랑스의 박학다식했던 문인 뷔퐁(Buffon)의 ‘문체는 곧 그 사람 자신이다.(Le style C'est I'homme meme.)’라는 명제이다. 서정시나 자전 소설, 수필과 같은 장르에서 이 명제는 금과옥조처럼 여겨져 글 쓰는 사람의 인격이 글의 문체에 드러난다고 많은 사람들은 믿어 왔다. 정말로 오랜 세월을 두고 잊히지 않고 전해 오는 문체론의 하나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막 쇼러(Mark shorer)라는 분에 의해 이 문체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어 사실주의 소설 작품들을 비롯한 객관적인 서술로 주관적인 자기 표출이 억제되곤 하는 작품들을 고색 창연한 위의 문체론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반론이 나왔다. 그에 의하면 ‘문체란 그 주제이지’(The style is the subject.) 결코 쓰는 작가 자신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논의를 길게 보면 여러 이야기들이 딸려 나오겠지만 대강 이 선에서 멈추되 두 명제가 기실은 오십보백보에 속하는 서양식 말 가르기 취미와 관계 깊다고만 나는 밝히고자 한다. 글(혹은 문체)이 그것을 쓰는 사람의 인격을 드러낸다는 말은 사실 꽤 설득력이 있는 말이고, 그 인격뿐만 아니라 그의 재능이나 취미 버릇 입장 등 여러 가지 삶의 흔적을 나타내는 것이 또한 글임을 나는 믿고 있다. 또한 모든 글은 작자의 인격이나 입장만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가 그 글을 쓰는 시대의 풍습과 사회에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현상, 사람들의 유행 감각, 기호 등 여러 가지 시대정신을 드러낸다. 김윤경 선생의 여러 형태의 글을 묶어 수필이라 칭하고 이 수필들을 읽으면서 받는 느낌은 우선 김윤경 선생이 평소에 쌓아 온 덕(德)으로서의 기독교적 인품이다. 그는 열세 살 때부터 부친이 기독교 신자가 됨에 따라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신자가 된 해가 1906년이니까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되어 박해를 면한 초기의 기독교 가족으로서의 기틀을 김윤경 선생 댁은 다진 셈이다.
  1985년에 연세 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전 7권짜리 ‘한결 金允經 全集 6,7’에는 모두 135편의 각종 산문들이 실려 있다. 신국판 482쪽짜리 두 권에 이르는 분량이니 결코 적은 분량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1917년 1월에 ‘朝鮮語硏究의 基礎’라는 최초의 논문을 썼고(한결 金允經 博士 古稀 記念 論文集, 한결 國語學 論集, 甲辰文化社, 1964년 연보 참조) 그 다음 해인 1918년 3월에 ‘靑春’誌에 시 ‘幸福의 配匹이 당선되었으니 문필가로서의 활동은 이 시기인 24~5세 때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김윤경 선생의 생애는 크게 보아 국어학자로서 나라 말씀을 지키기 위해 왜정 폭도들과 싸운 길고도 힘겨운 여로가 그 하나라면, 둘째의 것은 교육자로서 제자들에게 인격 내보이기로 쌓아 온 자기 수련 내용이다. 국어학자로서 쌓은 국어학 관련 논문과 저술 및 논설들을 그의 전집 다섯 권에 모두 수록되어 한 학파를 세운 학자다운 방대하고도 심오한 학문적 향취를 내보이고 있다.
  뷔퐁의 문체론에 걸맞게도 김윤경 선생의 수필 종류는 대부분이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잘 사는 삶인가 하는 교육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1920년대부터 발표된 산문들 대부분이 잘 사는 길에 대한 인생론을 얘기하고 있어 지금 읽으면 지극히 나이브해서 소박한 서양 철학자들의 경귀나 성경 말씀 인용으로 마치, 삶의 지표를 찾아 나선 황양의 선지자와 같은 느낌을 받는다. ‘人生論’, ‘座右銘’, ‘人生觀’, ‘배움과 인격 완성’, ‘연애관’, ‘교육의 목적’, ‘독서와 自己 修養을 勸함’, ‘교육의 갈 길’ 등 바르게 사는 방향에 관한 글들이 김윤경 선생에게는 주로 주문된 글 제목들인 것 같고 선생은 기꺼히 이 청탁에 응하여 많은 방향에서 바르게 사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을 줄 글을 쓰던 시대를 우리가 글 읽는 가운데 지워서는 안 된다. 때는 이미 나라를 빼앗겨 하루하루의 삶이 주체성을 잃어 욕되지 않은 바 하나도 없는 시대, 바르게 가는 방향을 식민지 백성 모두가 놓치고 있는 어둠의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배움이 있는 선각자로서 백성들에게 과연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소화 4년(1929년)으로 기록되어 나온 “新生”에 실린 짧은 ‘좌우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1.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이를 돕는다.
2.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린다.
3. 善을 行하다가가 落心하지 말라. 때가 이르면 거둔다.
4. 서로 사랑하라.
5. 저의 할 일은 제가 하여라. 干涉과 盜賊은 저의 일 못하는 이를 찾아 삼킨다.
6. 眞理 안에서는 못 할 것이 없다.
7. 아무 새 眞理를 發見하기 전에는 變하지 말아라.
8. 人生의 目的은 人格完成이니, 언제든지 온전하여지는 일에 어기어지는 일을 말아라. 이것은 나의 少年時代부터 느끼어짐이 큰 것을 만날 적마다 하나씩 주어 모아 日記 거죽에 적어 모아 오던 것인데, 맨 끝의 것은 그 밖의 모든 것을 包含할 만한 大綱領이 되는 것이외다.
  연보에 의하면 1929년에 선생은 日本入敎大學 文學部 史學科(東洋史專攻)를 졸업하고 그해 4월 1일에 培花女子高等普通學校 敎員으로 발령을 받고 있다. 당년 나이 서른여섯, 1922년 3월 24일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난 지 일곱 해만인데 지금 시점에서 보면 상당한 만학(晩學)임에 틀림없다. 열네 살에 결혼하여 그때 이미 선생은 2남 3녀(4녀는 낳은 지 일주일만에 사망하였다. 1924년 9월 17일로 적힘)의 아버지이고 가장으로서 막중한 생활의 무게를 짊어진 장년에 들어섰다. 그런데 선생은 위와 같은 좌우명을 세상에다 거침없이 발표하며 당신 생애의 목표가 ‘人格完成’에 있음을 확고하게 되새기고 있다. 선생을 민족을 위한 독립 투사로 규정짓기에는 어딘가 무리가 있어 보인다. 3·1 만세 운동 사건과 동우회 사건,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왜경에 끌려 다니며 영어 생활과 몹쓸 고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독립 투사로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민족 독립을 위한 교육 철학자이며 사상가라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위에 인용한 선생의 좌우명은 여덟 항목 가운데 여덟 번째를 싸고 있는 1에서 7까지를 우리는 잘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분명 자주정신(自主精神)과 자립(自立), 꺾이지 않는 투혼(鬪魂)이 눈에 띄게 선명한 빛깔로 함축되고 있다. 나라를 빼앗긴 백성에게 자주와 자립정신을 고취하는 교육자란 우선 민족주의의 정신에 투철한 투사나 지사(志士)의 기개가 없이는 설 자리가 없을 터이고 또 그런 표명조차 불가능하다.
  1927년 일본 동경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는 청년들과 조선국 내에서 일본에 유학의 붓을 지고 도일하는 젊은이들에게 보이기 위한 청탁의 글 ‘가는 분, 오는 분’(“使命” 5호 소재)이라는 좀 긴 글에서 선생이 강조하여 주장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머리에서 그는 우선 근래 일본에서의 조선 유학생들이 착실하게 공부하여 제대로 학점을 다 이수하고 뚜렷한 전문 지식을 습득해 동경에서만, 전문학교 이상 졸업 인력 이백이십 명 정도가 되어 양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기뻐해야 할 성과를 이루었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전례에 비추어 뭔가 일본에서 대단한 거나 배운듯이 귀국하여 ‘기고만장’하고 ‘대기염’, ‘大負抱員’을 토하다가 드디어 ‘高等遊民’이 되고 마는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세워야 할 목표를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로 그는 ‘完全한 人格者가 되자’는 목표를 내세웠다. 이 항목은 이미 앞에서 밝혔듯이 김윤경 선생 자신의 인생 경영을 위한 최고의 수행 목표였다. 이 항목 설명에서 ‘人格完成’의 구체적인 기의(記意)를 볼 수는 없다. 완전하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도무지 없는 것이라 할 지라도 ‘개아(個我)’로부터 사회아(社會我)’, ‘소아(小我)에서 대아(大我)로, 부분아(部分我)에서 전체아(全體我)’로 혹은 ‘비진리 생활에서 진리 생활에, 모순 생활에서 통일 생활에 이르는 노력’을 지닌 사람을 선생은 인격 완성의 도상에 있는 사람이라 규정하고 우리나라가 남달리 불행한 지경에 빠진 것은 바로 이런 인격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앞선 주장 다음에 그는 ‘노동을 신성하게 보아야 할 것과 互助 生活을 배워야 할 것’ 그리고 나서 우리가 ‘朝鮮사람이라는 特別 명칭을 가짐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라는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주장들을 밝히는 글들에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선생의 사상은 앞에서 적시해 보인 바 기독교 가르침에 입각한 眞理 안에서의 공명 정대함과 떳떳한 자기 발현임을 확인할 수 있다. ‘眞理 안에서는 못할 것이 없다’는 참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한 선생의 인품이 약여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김윤경 선생이 결코 불의에 타협하지 않으려는 정신을 말과 실행에서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런 확인의 자리에서 후학은 행복한 감동에 젖지 않을 수 없다. 그때나 이때나 속과 겉이 다르지 않아 공명정대하게 사는 사람들은 희귀하므로 그런 인품을 접할 때 느낌이 없을 수 없다. 때는 민족 전체가 식민지 백성이라는 가장 수치스런 치욕을 견디고 있던 1920~30년대 한복판. ‘眞理生活’(1926년), ‘연애관’(1925년), ‘婦人 운동과 人格 문제’(1925년), ‘婦人問題의 意義와 婦人運動의 由來’(1924년), ‘地方熱 云云하는 者부터 別裁하자’(1934년), ‘女子의 勢力이 얼마나 큰 것을 自覺하라’(1930년) ‘社會의 急務는 形而上學인가 形而下學인가’(1920년), ‘敎育의 目的’(1926년) 등 대사회적 교화를 염두에 두고 쓴 글들의 대부분이 명확하게 일본적(日本賊)을 표면화하지는 않지만 스스로 짊어진 질곡을 벗어날 방책 세우기와 결코 불의한 폭력에 굴복해서 안 된다는 메시지를 꿋꿋하게 내놓고 있다. 2~30년대의 청장년 시기에 선생은 배화여자학교에서 여성 교육을 심혈을 기울였으며, 1926년에 선생은 배화학교로부터 3년치 동경 유학 비용을 상금으로 받은 특별한 분이었다. 특혜와 선택된 임무를 동시에 받은 선생이 특별히 당시 조선 사회의 구성원들 모두를 향해 완전한 인격자 되기를 선양한다는 것은 얼핏 보기보다는 힘겨운 짐 지움 밑에 그가 처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에게는 우리 사회가 적재적소에 맞는 인격자들에 의해 바르게 나아갈 것을 간구할 뿐만 아니라 직접 스스로 그것을 모범으로 보여야 할 사명이 여러 가지 주위 형편에서 주어졌다. 그것은 엄청난 무게를 지닌 짐이고 빚이며 멍에일 수도 있다.
  김윤경 선생의 이런 짐 짐은 광복을 맞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큰 무게로 내리 눌렀으나 선생은 끄떡없이 그 짐을 져 나르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해방이 되고 난 이후의 사회 현실이 어떻게 변해 왔을까 하는 몫에 관해서는 우선 깊고 날카로운 상상력 동원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당시에 벌어졌던 적나라하고 속물적이며 야수처럼 탐욕을 드러내던 무수한 사건들 배후의 음험한 눈빛들을 사회 배경의 밑그림으로 하면서도 지사나 애국자들의 묵묵한 자기 실행 행보를 지속되었다. 선생이 해방 이후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쓴 글(1967년) 가운데 ‘가치 있는 삶을 닦자’는 제목의 글에서 선생은 가치 있는 인격적 삶을 사는 인격자 소개와 함께 그가 만든 비밀 단체 신민회 조직 이야기를 간략히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1878.11.9~1938.3.10)는 본받을 만한 인격자요 애국자였다.――中略
그는 비밀 단체 신민회를 조직하였는데, 그 조직 방법과 계획은
1. 애국적 선구자들이 자기 수양에 힘써 역량을 키우고 민중의 모범이 될 것.
2. 그러한 동지들이 굳게 단결하여 힘을 더욱 크게 할 것.
3. 그 힘으로 교육과 산업 진흥에 전력하여, 전 민족의 역량을 준비할 것.
4. 그리하여 앞으로 오는 독립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자주적 역량으로 민족 재생의 큰 사업을 이룩할 것.
이었다. 도산의 이 정신은 일생의 신조로서 국민회, 상해 임시 정부, 흥사단 운동들에 일관한 것이다.
  민족의 다섯 적(賊) : 박제순 외무, 이완용 학부, 이지용 내무, 이근택 군부, 권중현 농업공무 대신 등과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분개심을 전면에 깔고 마땅히 있어야 할 인물과 있어서는 안 될 인물들에 관한 논의를 거듭하는 선생은 우리들 백성들로 하여금 이 땅에 마땅히 있어야 할 존재(완전한 인격자 되기)로 삶의 거친 마당에 나아갈 것을 부추기고 있다. 나라를 남에게 빼앗겨 본 고통을 아는 이는 자기의 자유정신 유지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아는 법이고 후학들은 그런 선인들에게서 자아를 지키는 지혜를 얻고 늘 경계하는 마음과 근신의 법도를 세워 익히게 된다.
  글이란 무엇인가? 김윤경 그는 이미 가셨지만 그의 글들은 남아 그의 인품과 완전해지려고 애쓴 고매한 인격을 보게 한다. 글이 곧 그 사람이라는 명제를 증거하는 글 내용으로 김윤경 선생 산문을 꼽는 소이가 여기 있다.


3. 국어학자로서의 생애 엿보기

  한 나라 혹은 민족이 그들 모여 사는 인민들로 하여금 서로 막힘 없이 마음과 뜻을 소통할 수 있는 말씀을 지녔고 그 말씀을 적을 수 있는 글자를 가졌다는 것은 복이다. 나라 말씀을 가지고서야 자아라고 하는 개인 존재는 비로소 개인적 자아로부터 역사적 자아 또는 사회적 자아로 존재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 나의 ‘나됨’이 나의 ‘너됨’이나 나의 ‘그됨’이라고 하는 관계고리의 틀을 맺지 않고서는 절대 온전한 자아로 의미화할 수 없다. 그것은 절대이다. 나라를 잃고도 그 나라됨의 연결판이며 고리가 되는 말과 글을 잃지 않는다면 하고 알퐁스 도데는 그의 짧은 소설 ‘마지막 수업’에서 ‘감옥열쇠를 가지고 있는 거나 다름없노라’ 말했다. 이름을 빼앗고 혼을 빼앗기 위해 명산 산정에 쇠막대기를 박고 쇳물을 부었으며, 족보를 없애려고 애썼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악랄한 약탈은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을 말살하려는 기도였다. 지금도 일본 식자들과 만나면 그들은 어째서 자기들은 한문을 반드시 섞어 쓰는데 한국인들은 한글만을 고집하느냐고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묻곤 한다. 자기네들은 한자 없이 독자적인 문자로 의사를 전달할 수 없는데 반해 한민족의 한글은 그것 자체만으로 소통이 가능한 자족을 누리고 있으니 글자의 독창적이며 독자적인 자율성을 그들이 샘내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시 분명하다.
  한힌샘 주시경(周時經) 선생은 세종 임금이나 세종 당시의 집현전 학자들의 정신을 정확히 되살려 낸 근세 조선의 위대한 선각자였다. 1911년 1월에 김윤경 선생은 ‘京城 南部 私立靑年學院’에 입학하여 주시경 선생께 한글을 교수받으면서 그의 큰 인격에 감화를 받는다. 나라나 민족의 동의어는 어쩌면 그들이 공통적으로 주고받는 말씀이기 쉽다. 말씀을 잃으면 잃은 나라를 영원히 되찾기 어렵다. 이 명제는 진리이다. 주시경 선생은 우선 잃은 나라 속에서 마지막 보루인 말씀을 잃지 않는 방책으로 한글 가르치기를 실천하였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별빛 같은 한글 학자들이 나왔다. 월의 성분을 풀이하는 원칙이 이들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로부터 나왔으니, 주시경 선생의 학설인 분석학파에 김윤경 선생이 곧게 뒤를 이었으며, 월북한 정열모, 김두봉 등이 종합학파로, 분석과 종합을 절충한 준분석학파에 외솔 최현배 선생이 발전 계승한 한글학파로 학계엔 알려져 있다. 이들 별빛 같은 학자들이 모두 나라 말씀을 그 말씀의 틀과 기능 쓰임 법칙들을 갈고 닦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이 글의 이번 항목에서 나는 김윤경 선생 자신이 쓴 산문(수필 혹은 논설문들)을 통해 국어 학자로서 걸어온 생애의 몇 발자취를 더듬어 보려고 한다.
  1960년도에 대학에 입학한 나는 대학 국어 책에 실려 있던 김윤경 선생의 ‘환산 이윤재 선생을 그리워 함’이라는 글을 읽고 선생의 다정다감한 우정과 부모님을 향한 지극한 효성을 보았다.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함흥 감옥에 같이 이윤재 선생과 있었던 내용과 자식이 감옥에 있는 동안 이윤재 선생의 어머님이 돌아가신 처절한 애통과 이윤재 선생을 그리는 마음으로 쓴 글이었던 것으로 지금도 선연하게 기억한다. 겨울 감옥소 마루의 찬 날바닥 위에서 2년여 간 감옥 생활을 하던 1943년 5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심조차 몰랐다가 나중에 알게 된 내역은 선생의 글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1959년)에서 선생 본인의 겪음으로 더욱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다. 선생의 체험 내용들은 대체로 교육 마당에서 마주친 인사들과의 관계 고리에서 선명하되 특별히 한글 학자들과, 한글 지키다가 같이 고생한 민족주의 독립 운동가들과의 관련 내용들이 더욱 뚜렷한 흔적으로 드러나 보인다. 선생은 한글 학자일 뿐 아니라 흥사단 요원들이나 동우회 등 민족 독립운동 단체와도 긴밀한 행동 영역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체험 영역이 넓고 또한 깊다. 우선 선생이 국어학을 전공으로 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내역을 쓴 글을 보기로 한다.
  청년 학원에서 만나게 된 주시경 선생에 관한 선생의 술회를 ‘국어 연구와 나’(1958년)에서 보면 이렇다.
…청년 학원에 들어온 뒤로 주시경 스승에게 국어 문법의 강의를 듣게 된 뒤로는 머리 속에 깊은 감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스승은 교수 시간에 외국 글인 한문에는 큰 학자라고 지칭받는 이라도, 제 나라 글인 국문은 무식하면서도 수치로 여기지 않음을 항상 공격함에 인상 깊었었다. 그는 서울 시내 각 중학교의 국어 문법 과목을 담당하여서 등사판으로 박은 교재를 큰 보에 싸서 옆에 늘 끼고 돌아다니었기 때문에, “주(周) 보퉁이”라는 별명까지 듣게 되었거니와 그는 이같이 중등학교 뿐 아니라, 선교사들 사이에 한국 말을 배우기 위하여 조직된 “한어 연구회”까지 지도하였었다.
  열아홉 살의 열의와, 꿈 꾸기를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진행하던 시기에 그처럼 위대하고 훌륭한 선생을 만나 감화를 받는 장면은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감동적인 그림이다. 이 장면은 아마도 선생에게는 생애 앞날을 위한 가장 굵고도 강한 출발 신호였던 것 같다. 1958년 8월 1일 “思潮” 1권 3호에 실린 긴 수필에 해당하는 ‘국어학자로서 밟아 온 길’에서도 위에 인용한 이야기는 다시 하고 있고 이 이야기 다음에 잊지 못할 사항으로 주시경 선생이 게일(J.S.Gale) 박사로부터 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
세종은 동양뿐 아니라 세계에 큰 공헌을 한 갸륵한 임금입니다. 여러 가지 위대한 사적이 많지마는 무엇보다도 문자의 발명은 세계적 자랑입니다.
  이런 내용의 이야기는 지금도 서양의 일부 학자들에 의해 계속 이어져 오고 있고 ‘세계 한글의 날’까지 저쪽 서양 사람들에 의해 제정되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자기 자신, 아니 우리들 자신 속에 있다. 아놀드 하우저가 현대인의 고질적인 질병으로 규정한(A.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나를 직접 보지 않고 늘 남의 시선에 비친 자기를 진짜 자기라고 믿으려 하는 미신(하우저는 이를 보바리즘이라 불렀다)은 언제나 우리 자신을 위축시키곤 하는 병폐였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한때 우리는 왜놈들에게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긴 다음 우리 민족이 옛부터 지녀 온 웅혼하고 바르며 귀한 문화의 덕목은 모두 왜인이나 양인들이 내세워 보이는 힘과 문명의 이기들 앞에 보잘것없는 무용지물로 여겨 스스로를 비하하고 저들 앞에 함부로 넙죽넙죽 무릎을 꿇어 치욕을 치욕으로 여기지 않는 만크루트(Mankurt-가장 쓸모 있는 노예)로 머리를 깎인 형편에 놓였다. 언제부터였나? 깊이 상고해 볼 일이다. 나라를 온통 빼앗긴 상태에서 말도 빼앗기고 성도 빼앗기며 송두리째 혼을 빼앗겨 가고 있는 때 외롭게 눈뜨고 이들 만쿠르트들을 치욕 불감증과 기억력 상실로부터 자기 존재 근원을 확인시켜 주려고 했던 지사들의 고뇌와 절망감이 얼마나 절실했겠는지, 생각할수록 가슴이 미어진다. 존재하는 ‘나’란 언제나 ‘남’에 의해 의미화하고 사회화로 확대되는 것이지만 나의 나됨 정신을 잃고 너의 나됨만을 바랄 때 ‘너’라고 하는 남이 사악하면 할수록 나의 나됨은 그 존재의 영역을 완벽하게 잃을 수밖에 없다. 게일 박사가 외롭게 눈 떠 있던 주시경 선생에게 그가 하는 일에 깊고 무게 있는 의미를 부여해 준 것은 진실하게 고마워 해야 할 일의 하나이다.
  김윤경 선생은 연희전문학교를 오 년만에(3·1 만세 사건으로 피신했던 관계로 일 년을 늦음) 졸업하고 동경 릿쿄대학에 가서 사학과를 졸업하는 동안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받은 감격과 충동을 내내 잊지 않고 ‘국어 연구의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어’ 필생을 두고 국어학자로서의 뜻 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국어학자로서 쌓아 올린 업적에 관한 논의는 아마 나의 몫이 아닐 터이다. 그의 방대한 저술인 ‘朝鮮文字及語學史’(뒤에 ‘韓國文字及語學史’로 바꿈)와 ‘나라말본’이 선생의 주저(主著)라는 정도로만 이 분야에 대해서 언급해 놓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그가 당신이 일관되게 세워 놓은 생애 목표(선생의 좌우명 이야기는 앞에서 언급한 것 말고도 ‘사랑·자유·평등-나의 좌우명(1958년)’이라는 상세하게 쓴 글이 있다.)를 향해 살았기 때문에 그 방향에서 겪은 체험 내용의 수필들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앞에서 논급했던 대로 선생의 인생 목표는 ‘완전한 인격 쌓기’로 요약된다. 이런 목표 설정에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몫은 선생의 품격이 지닌 높낮이와 그 격조에 대해서다. 이 품격과 격조 듯보기란 그가 평생 살아오면서 온전히 쌓아 올린 생활 내용의 총체와 관련되어 있다. 학생들 앞에서나 또는 각 일간지, 잡지, 저술 등에서 표명해 보인 많은 말씀들은 그것 자체가 표명 주체를 묶는 올무일 수 있다. 가령 ‘정직하게 살라!’고 도처에서 쓰고 말했다면 그것은 그렇게 말씀 한 사람이 동시에 스스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구속력을 지니고 있다.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도처에서 역설한 사람이 성적 불량한 학생으로부터 과일 한 바구니나 쇠고기 한두 근을 받고 성적을 올려 준 사실이 밝혀진다면 어떤 누구도 그 사람이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거나 정직하라고 권하는 말씀을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공공 석상이거나 공공 매체를 통해 도덕인 윤리 규범을 얘기하면서 강한 어조로 부도덕한 사람의 행실을 비난하거나 타매하는 일은 일단 자신의 행실에 관한 자기 족쇄를 채우는 거나 다름없다. 그런 일은 성인(聖人)이거나 그와 가까워지려는 정결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김윤경 선생의 산문들을 통독하면서 받는 느낌은 왜정시와 해방 시기, 그리고 6·25 전쟁을 치르는 동안 끊임없이 올곧거나 바르지 않은 일에 연루되기를 거부해 왔으며 이런 실행과 함께 끊임없이 말씀으로 쓰거나 얘기함으로써 스스로 나쁜 길로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 왔던 것으로 읽힌다. 그것은 선생이 국어학자의 길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 일에 평생을 종사하여 왔기 때문에 가능한 생애의 궤적이기도 하다. 그가 겪은 동우회 사건과 조선어 학회 사건에 관한 얘기를 술회하는 과정에서 밝힌 바 국어를 연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나게 어렵고 위험한 선택인지를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서기 1937년 6월에는 “동우회”를, 그 다음 해(서기 1938)에는 “흥업구락부”를, 서기 1942년 10월 1일에는 “조선어 학회”(앞에 든 “조선어 연구회”의 후신) 회원들을 잡아 가두고 악형하고 해산시키었던 것이다.
이러한 환경과 분위기 속에서 국어를 연구한다는 것은 “화약을 지고 불로 들어감”과 같은 모험이었다. 패가망신(敗家亡身)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하나 국어 학자들은 이러한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계속하여 “맞춤법 통일안”(서기 1933년 10월 29일), “표준말 모음”(서기 1936년 10월 28일),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서기 1940년 6월) 들을 공동 연구하여 발표하였는데, 이들은 우리말의 생명을 보하게 되어 해방 뒤 군정청에서와 한국 정부에서 이를 채용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윗 글은 ‘국어학자로서 밟아 온 길’(1958년)의 일부인데, 선생은 위와 같은 일들을 진행하는 동안 동료 학자 이윤재 선생과 한징 선생이 함흥 감옥에서 옥사한 사실을 두고 내내 한에 맺힌 듯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나라 말씀 지키기를 위해 억울하게 돌아간 벗에 대한 애틋하고 그리운 선생의 정표가 글의 구석마다 배어 있어 후학들 보기에 아름답다.
  나는 60년대 연세 대학교 교정에서 국어학자는 물론이고 교육자로서 두 거인이셨던 김윤경 선생과 최현배 선생의 발걸음을 여러 번 유심히 지켜보았었다. 몸피가 가늘고 키도 작으며 머리만 커 보이던 최현배 선생은 늘 보자기에 책을 싸서 옆구리에 끼고 땅이 꺼질세라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셨는데, 그 몸짓은 마치 머릿속에 가득 들어 있는 지식이 행여 넘칠세라 조신하는 발걸음처럼 내겐 보였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발걸음도 크게 떼어 놓았다고 기억되는 김윤경 선생의 발걸음도 역시 머리 부분을 보호하는 조신한 걸음새로서 늘 깊은 생각과 근신하는 듯한 몸짓이어서 언제나 범접하기 어려운 기품이 넘쳐 보였다. 1963년도에 한양 대학교로 선생께선 자리를 옮기셨는데 그때 선생의 연세 일흔이셨다. 가끔씩 연세 대학교 교정에서 뵐 때면 쫓아가 인사드리고 근황을 여쭐라치면 한양 대학교 연구실로 이르는 높은 여러 층의 계단을 오르기가 힘드시다는 말씀 끝에 곱게 미소 띄우시던 노안이 그립게 떠오른다.
  이제 마지막으로 김윤경 선생의 인품에 관한 전설 몇 가지를 적을 차례이다.
  모두 알다시피 선생은 6·25 사변 당시에 연세대 총장 대리로서 정부 문서(문교부 훈령)와 이승만 대통령의 녹음된 서울 사수 애기를 믿고 있다가 피난하지 못하여 큰 마음 고생을 하셨다. 고향인 광주(廣州)에 와 있는 동안 내무 서원들에게 시달림을 받았고, 전쟁이 끝난 후 4·19 학생 혁명이 일어나자 분연히 학생들의 희생을 갚으라고 4월 26일 교수 신분으로 분기하여 스승으로서의 모범을 보인 바 있다. 이때의 사정에 관해서는 ‘사필귀정’(1962년), ‘6·25와 나의 피난-지옥의 나라, 적치하의 회상-’, ‘4·19 학생 의거의 뜻’(1960.4.29.“동아일보” 3회 연재), ‘4·26 민주 혁명의 위력’(1960년 5.18) 등의 글에 자세하게 밝혀지고 있다. 선생의 글 특징 가운데 하나가 치밀한 사실 묘사에 있음을 밝혀야 하겠는데, 이런 사실 묘사는 선생이 평생 꼼꼼하게 일기를 써 온 분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특징의 이유가 잘 이해될 수 있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잘 정리된 몇 십 권의 일기 노트가 유품 정리 가운데서 발견되어 출판 여부를 놓고 후인들이 고심하고 있는 사정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선생께서 가까이 접한 저명한 분들의 인격적 약점들이 분명 적혀 있을 일기를 관계된 분들의 가족들이 생존하는 중에 발간 공개하기엔 동양적 풍토에선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선생은 문교부의 교육 정책이라든지 학원 정화 운동 문제, 일본 지도층 인사들을 향한 성명, 농촌 지도자들을 향한 자격 요건 문제, 입학 시험 제도 문제 등에 대한 폭넓은 사회적 발언을 산문으로 발표하였다. 그가 스물다섯 살 때 시 ‘행복의 배필’이 “靑春”지에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렇게 시적 감수성이 있었음에도 선생은 평생을 논설문과 논문, 비평적 에세이를 발표하면서 시작(詩作)에는 더 손을 대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해석의 실마리 풀기가 그렇게 간단치는 않다.
  마지막으로 전하겠다고 전제한 선생에 관한 전설 이야기는 우선 선생이 비평적 수필인 ‘거듭나자’(1959년)라는 긴 글의 ‘뇌물’ 항목부터 풀어야 할 것 같다. “연세춘추”에 아홉 차례에 걸쳐 실은 글의 윗 항목에서 선생은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 뭔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 불쑥 찾아와 뇌물성 선물을 받았다가 불쾌하게 되돌려 준 여러 건의 사례를 술회하고 있다. 대학에 합격시켜 달라는 부탁의 뇌물(옛 제자로부터) 얘기, 또 같은 내용의 뇌물(대학 교목 출신으로부터) 얘기, 대학 설립 인가를 위한 뇌물 얘기(중앙 교육 위원으로 있을 때)에는 금팔찌로부터, 20만 환, 구제품 양복과 금반지, 쌀 두 가마니 등의 뇌물성 선물 품목이 적혀 있다. 본인이 적은 이런 사례들에 겹쳐 국문학과에 전수되어 온 전설은 대강 이런 내용이다. 선생의 과목이 낙제점이 나온 고로 진급이 위태로운 학생이 물어물어 선생 댁을 찾아간다. 비가 오는 날이었던가? 과일 바구니를 들고 선생 댁엘 들렀더니 마침 계셔서 대문을 통해 방문 앞에 서서 과일 바구니 처치를 놓고 엉거주춤 하고 있다. 선생 가로되 ‘그 과일 바구니는 문 밖에 놔두고 우선 들어오시오.’ 그래서 들어가 사정 이야기를 엄살 섞어 말씀드리고 점수를 부탁드리니 왈 그럴 수는 없다는 대답. 여러 교육적인 말씀을 얻어듣고 문 밖으로 나서는 학생에게 ‘학생! 그 과일 바구니는 들고 가요!’. 여러 정황으로 보아 학생은 꼼짝 못하고 바구니와 우산을 챙겨 들고 선생 댁을 나왔을 것이다. 나와서 과일 바구니를 팽개쳤는지 아닌지는 전해 들은 바가 없다. 그러나 이 장면에 관한 전설에 대한 보충 설명 또한 ‘거듭나기’의 ‘인사’ 항목에 적혀 있음을 밝혀야 하겠다. 급히 찾오는 학생들 대부분이 소개장 혹은 추천장을 써 달라거나 점수를 올려 달라는 부탁을 들고 있는데 선생이 기록한 글에 의하면 ‘전혀 모르는 학생이니 교무처나 학생처나 담임 선생에게 조사하여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음이 보통’이라는 것이다. 평소에 스승과 제자가 서로 알리고 알아야 할 것인데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선생은 결코 무자비하거나 무정해서 기계적으로 원칙에 얽매인 분은 아니었다는 내용이 위 전설에 보충되어야 한다는 게 나의 의견이다. 삼십육 년 전 3월 어느날 나의 아버지를 감동시켰고 그래서 오늘날 내가 있게 된 그런 만남들을 되돌아보며 나는 생각한다. 내가 그런 훌륭한 스승을 마음속에 갖게 된 인연은 나의 큰 복이며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 그것이 나의 현재 선생으로서의 짐이며 무수한 제자들에 대한 무거운 부채라는 생각이다. 그것 또한 복된 생각들이 아닐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