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결 김윤경 선생의 학문과 인간】

나의 스승 김윤경

문효근 / 연세 대학교 명예 교수


1. ‘나의 자랑스런 스승 한결 김윤경’을 말하면서

  여기 이 한정된 지면에서 어찌 ‘나의 자랑스런 스승 한결 김윤경’의 ‘삶’에 대한 말씀을 마음껏 욕심껏 다 할 수야 있을까마는, 평소에 마음에 간직하고 있던 선생님에 대한 추억, 선생님을 그리는 마음에서, 꼭 남에게 알리고 싶었던 선생님의 그 인생 철학, 그 믿음 사랑 소망으로 가득 찬,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한평생의 모습, 그 지조와 성실성, 그 꾸준하고 일관된 학문의 이론과 방법 등에 대한 몇 가지 사실에 대한 기록을 찾아 아래에 제시해 보려 한다.
  우리의 국어학을 말함에는, 우리의 말 글 연구의 큰 별, 애국 애족으로 일관된 국어 수호의 거성이신 위대한 국어학자 한결 김윤경 박사(1894‧6‧9~1969‧2‧3)를 알아야 한다.
  한결이 위대하다 함은 그 학문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한결은 위대한 애국자요, 성실과 박애 자애가 넘쳐흐르는, 뛰어난 교육자요, 만인이 본받을 인격의 소유자셨다. 한결은 지조와 성실의 참된 삶을 살았으며, 티 없이 맑은 양심의 소유자셨다. 직접 가르침을 받은, 어느 대학의 총장은 동창들의 모임에서 “나는 이 세상에 나서 내가 직접 보고, 듣고, 접촉한 사람 가운데서 성인에 가까운, 아니 진짜 성인을 말하라 한다면, 그는 확실히 한결 선생이시다.”고 했다. 모두 박수를 쳤다. 사전에 의하면, “성인(聖人)이란, 지혜와 도덕이 뛰어나고 사물의 이치에 정통하여 만세에 사표가 될 사람”이라 했다. 한결은 과연 성인이다. 한결은 저 아래의 “한결이 제자들에게 남기신 글”에 나오는 “1. 나의 인생관”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느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도 완전하라”(마태 5장 48절), …… “사회 생활의 철측의 하나로 화평을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하자”고 한 말씀과 또, 저 아래에 나오는 “도덕적으로, 지적으로, 건강으로, 거듭나자”고 스스로 말씀하신 것들을 스스로 몸소 실천하시었다. 이로써도, 한결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의 마음, 티 없이 맑은 그 성인 같은 인격은 가히 짐작이 간다.
  나와 한결과의 인연은 연희 대학교 국문과 입학으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연희 대학교 문학원 국문과를 택하게 된 동기는 퍽이나 평범한 데 있다. 단지, 중학 여섯 해 과정에서 성적이 비교적 문과계의 것이 좋았고, 당시만 하더라도 해방이 된 감격이 아직 식지 않았던 때라, 잃었던 국어를 되찾고, 이를 연구 발전시키는 것이 남에게 자랑스럽고 떳떳했기 때문이다. 또, 혹 하필이면 왜 연희 대학교 국문과를 택했느냐고 묻는다면, 이 또한 그 이유는 평범하다. 나는 일정 때, 서울에 있는 모 공업학교를 다녔다. 일제의 전쟁 패망 말년이라 경제적인 궁핍과 정신적인 시달림 속에서, 온갖 고초를 몸으로 마음으로 체험했다. 해방이 되자, 또한 형언할 수 없는 참상과 혼란에 많은 고초도 당했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참으로 견디어 내기 힘들었다. 해방 직전에 사십 원 하던 하숙비가 해방이 되자, 그 혼란통에 곧바로 칠십 원이 되었고, 몇 달 후 고향에 갔다 다시 상경해 보니, 이백 원으로 껑충 뛰었다. 나는 마침내는 부모님과 친지들의 권유도 있고 하여, 얼마 후에 고향에 있는 중학교로 전학했다. 사회적인 혼란이 두려웠고, 경제 문제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학은 했지만 그러나 어린 마음 한 구석에는 늘 서울의 친구들의 모습, 서울의 아련한 갖가지 추억들이 미련 속에 남아 있었다. 일종의 동경심이라고나 할까. 서울을 찾고, 연희 대학교 국문과를 지원한 까닭을 찾는다면 이러한 데에서도 또한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연희 대학교에 입학한 해(1950)에는 이른바 특차라는 것이 있었다. 연대가 특차였다. 십여 일 후에야 서울대니, 고려대니 하는 데서 시험을 봤다. 다른 많은 수험생도 그러했겠지만 시험에는 으레 다소의 요행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또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도 상당수의 수험생들이 특차부터 시험을 봐 보자고 연대로 몰려들었다. 연대 개교 이래의 최고의 수험생이 모였다고 했고, 그래서 경쟁도 꽤 심하였다. 요행이랄까 나는 연대에 붙었다.
  당시의 연대 국문과 교수로는 김윤경(金允經)‧장지영(張志瑛)‧이정호(李正浩) 같은 선생님들이 계셨다. 한결과의 첫 대화는 면접 시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시골 산골에서 어떻게 등록금을 마련하며, 무슨 돈으로 공부하려 하느냐?”는 것이다. 넣어 줄 수 있는 성적은 되는데, 재정 문제가 걱정이라는 것 같았다. 얼씨구나, 약간의 과장을 넣어서, “집에 소가 십여 두 있습니다. 이것을 팔아서……”했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십여 두라니…… 열 마리면 열 마리라 해야지……”하시었다. 불안하였으나, 나중에 보니, 다행히 합격이 되었다. 우리 입학 동기들은 지금도 가끔 농담 삼아 하는 말이지만 특차 대학에 첫 번째 대학 첫 번째 학과에 합격했으니, 기쁘고 자랑스럽지 않느냐고 한다. 요즘에도 연대에서는 우스개 말로 국문과를 수석 대학‧수석 학과라 하는 것과 같다.
  6월 5일에 신입생의 입학식과 개강식이 있었다. 입학 당시의 국문과 정원은 30명이었다. 그 숫자가 그대로 다 등록했는지, 합격하고도 다른 대학, 다른 학과로 진학했는지, 또 다른 사연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6‧25 재학생 명부’(1950년, 교무처, 김길흥 씨 작성)에는 28명만이 등재되어 있다. ‘연세대학교사’(1969)에 의하면, 9‧28 이후 졸업생 학적부는 강만유 씨와 김길흥 씨에 의해 은밀히 숨겨졌으나, 재학생의 학적부는 그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했다.
  우리는 입학한 지 한 달이 채 못 되어 6‧25를 만났다. 이때, 나는 마포구 대흥동에 살았다. 아침 등교길에 목격한 것은 북으로부터 밀려 닥치는 피난민의 행렬이었다. 개성-신촌역으로 이어지는 철길을 따라, 남부여대, 소 등에 짐을 싣고, 어떤 여학생은 치마도 입지 않고 짧은 바지 바람에 헐레벌떡 삶을 찾아 남으로 남으로 피난의 길을 찾아 나선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나, 26일에도 별 다른 동요없이 정상 수업을 마쳤다. 27일, 등교길에서는 북측 비행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김포 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봤다. 학교 노천 극장에서 마지막 예배(3교시)를 봤다. 이때의 설교 목사는 함석헌 선생이었다. 예배를 보는데, 미아리 방면에서는 포성이 2, 3분 간격을 두고, 천지를 진동시켰고, 여의도와 김포 비행장에는 알 수 없는 폭음 소리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였다. 모두 긴장된 모습에 하늘을 쳐다보고, 두리번거리었다. 예배가 끝나자, 당시 총장 일을 보시던 김윤경 선생님께서는 무기 휴교를 선언하시었다. 여러 군데 수소문도 해 보고, 서양 선교사한테도 연락을 취해 보았으나, 온데 간데도 모르겠고, 사태는 긴박해 가는 것 같으므로 일단 무기 휴교를 선언한다는 말씀이었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미아리 쪽에서 들려오는 포성을 들으며, 공중전에 기총 소사 소리에 긴장될 대로 긴장된 몰골을 하고, 그야말로 전전긍긍 산지 사방 제 살 길을 찾아 흩어졌다.
  나는 그 길로 하숙집이 있는 마포 대흥동에도 들리질 않고, 곧바로 책가방을 든 채, 몇몇 친구들과 더불어, 남대문까지 걸어서 거기서 전차를 타고 노량진까지 갔다. 일단은 한강을 건너 놓고 보자는 것이고, 둘째는 대방동에 있는 고향 친구들을 만나 같이 행동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정은 달라졌다. 원래는 노량진에서 전차를 갈아 타고 신길동으로 갈 수 있었으나, 난리통에 이 전차는 끊어졌다. 할 수 없이, 거기서는 걸어서 대방동에 있는 고향 친구들의 하숙집에 갔다. 가는 도중에 인민군의 비행기가 김포 비행장에 폭탄을 투하하려고 날아 갈라치면, 우리는 모두 각자가 자기 머리 위에 떨어지는 줄만 알고, 하도하도 급하여, 길가 플라타나스 나뭇잎 밑에 숨은 일까지 있었다. 27일 밤은 친구네 하숙집에서 자는 둥 마는 둥 지새웠다. 이승만 대통령은 방송으로 안심하고 직장을 지키라고 했다. 국군이 원산을 쳐들어가고, 해주로 쳐들어간다고 했다. 이슬비가 내리는 28일 새벽녘 한강 철교의 폭파의 소리를 들었다. 천지가 캄캄하였다. 조금 후부터 집 앞에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의 소리다. 우리는 아침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남하하기로 하였다. 어떤 친구는 관악산에 올라가 좀 관망하다고 남하 문제를 결정하자고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단 남하하는 것이 상책이라 했다. 새벽 네 시를 기해 우리 모두는 집을 떠났다.
  피난민의 아우성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후퇴하는 국군의 초라하고 허기진 모습을 보며, 남침하는 공산군과 피난민들에 밀려, 들녘으로 달리는 늑대의 무리도 보아 가며(군포), 우리는 걸어서 오후 1시가 조금 넘어 수원까지 갈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기차가 있다고 했다. 한참만에 석탄을 나르는 대전행 화물 열차를 탈 수 있었다. 대전 역에서 밤을 새우고, 대전에서 또 한번 무개-화차를 바꿔 탔고, 얼마 후에 대구에 도착, 곧 바로 나의 고향인 선산-장천-여남(汝南)으로 갔다. 고향에서는 난리 소식을 잘 모르는 듯했다. 들녘에는 아직 모내기가 덜 끝난듯, 지친 모습으로 동리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보며, ‘서울 공부하러 갔다던데, 왜 저렇게 왈까 ?’하는 눈치다.
  나는 서울에서 있었던 9‧28 수복과 1‧4 후퇴 때의 일은 모른다. 그 후 나는 다시 대구로 나와, 처음으로 오는 미 8군 소속의 토이기 여단의 통역-미 8군 제6약품 창고(대구 달성공원 앞 근화여고 자리) 근무를 거쳐, 중부 전선 국군 모부대 6지대 소속으로 경기도 가평을 거쳐 춘천-화천 발전소(구만리)에 이르는 전투에 참가했다. 저 멀리 금화 벌판이 내려다 보이는 대성산 어느 산록에서 중공군의 정신 교란용 피리 소리 꽹과리 소리도 들었다. 우측으로는 북한강을 사이에 두고, 중공군 45사단 병력과 대치했다. 중공군이 차지한 고지에서 쏘아대는 박격포-기관포의 표적이 되어, 죽음 직전의 혼비백산도 체험했다. 찰나적(刹那的)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순간에, 왜 그리도 목이 타는지, 앞서 뛴 병사들이 흐려 놓은 개울의 흙탕물을 본능적으로 움켜쥐고 입에 쑤셔 넣던 일, 그 놈의 카빈(Carbine) 소총이 어찌도 그렇게 무거웠던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다 꿈만 같다. 지금은 다 기억에서 사라져 가 남의 일만 같다.
  다행히 살아 남아, 그 후 나는 대구 남일동에 있는 ‘연대 연락 사무소’에서 등록을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사무소는 한결 선생의 맏사위 되시는 임성의(林成宜) 연대 상과 동문의 집이었다고 한다. 등록에 앞서 등록에 따른 김윤경 선생의 심문이 있었다. “그 간에 학생은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하시었다. 그 간의 사정을 대충 말씀드리고 난 후, “등록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 전방에서 왔습니다.”고 했다. 한결께서는 준비된 무슨 서류를 보시면서, “전방이라니……일선이라 해야지!”하시었다. 제이탄을 맞은 셈이다. 철저하시구나, 고칠 것은 꼭 말씀하시는 분이시구나고 생각했다. 그 난리통에 젊은이들은 모두가 ‘일선’이라는 말 대신 ‘전방’이라는 말이 입에 익어 있었을 때이었다. 생각건대, 온 나라가 전쟁터이었으므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나, 전방에 있지 않으면 후방에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런 말을 쓰게 되었나 보다고 생각해 보았다.
  부산 영도에 있는 천막 연대 임시 교사를 거쳐 서울 본교에 복귀하여 부족하나마, 제대로 제 때에 졸업한 국문과 학생 수는 겨우 5명,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내가 1951년 10월 3일에 부산 영선동에 있는 영도 천막 임시 교사에 복교했을 때에는 김윤경‧이정호 두 선생님이 계셨고, 나중에 허웅 선생님도 부산 대학에서 시간 강사로 출강하셨다. 1952년에 목조 가교사가 섰고, 1953년 8월에 서울로 복귀하여 공부할 수 있었다. 열운 장지영 선생은 서울 환도(1953) 후에 제주도 제주 대학에서 강의하시다가 돌아오셨다.
  나는 학창 시절에는 주로 한결 김윤경 선생의 강의를 많이 들어 그의 학문에 대한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의 인격에 감화받은 바가 크다.
  한결 선생님은 열운 선생과 마찬가지로 조선어 학회 창립(1921) 회원이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신 분이다. 이 두 어른은 국어학의 연구 업적과 국어 운동의 공로로 연희 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의 학위를 받으셨고, 정부로부터는 문화 훈장을 받으신 분들이다. 이 두 어른의 학문은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영향받은 바 크며, 그 민족정신은 일관된 조국의 광복과 민족 운동의 일념에서 찾을 수 있다.
  한결이 나신 101돌을 맞고 광복 50주년의 뜻을 되새기는 오늘의 이 시점에서,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한결 김윤경 선생의 학문과 인간’(10월의 문화 인물)이라는 제목으로, 우리 말글 연구의 큰 별-지조와 양심의 상징인 김윤경 선생을 ‘학문’과 ‘인생’이라는 측면에서, 그 진실된 참 모습을 되돌아보자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2. 간추려 본 한결의 연보

  광복 50주년을 맞는 오늘날 이 시점에 서서 한결의 참된 한평생을 생각해 본다는 것은 퍽이나 의의가 크다. 구한말에서 일제 침략의 처참했던 격변기에 이르는 소용돌이 속에서, 동족상잔의 민족적 최대 최악의 비극인 6‧25의 전란 속에서, 또한 4‧19의 민주화 운동과 5‧16의 군사 정권에 이르는 혼란했던 과도기에서, 한결은 과연 어떻게 살아왔으며, 우리에게 어떤 무엇을 남겨 놓고 가셨는가, 아래에서 간단히 ‘한결의 연보’라는 측면에서 그 삶의 세계랄 수 있는, 그 연보를 간추려 보기로 하자.

  한결은 1894년(갑오<甲午> 6월 9일 [고종 31년 음력 5월 6일 자정])에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고잠리(高岑里)(고산리<高山里> 삼통일호[三統一戶]) 448번지에서 아버님 김정민(金正民) 씨(경주 김씨-김알지의 후손-계림군파), 어머님 박(밀양)나헐(朴樂恤: 유족의 말씀=‘나헐’은 구약에서 따왔다 함) 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시다. (*필자 주: 연세대의 ‘교직원 카-드’에 있는 한결의 생년월일의 기록은 잘못되어 있음. 한결의 가족들에게 문의하여 위와 같이 바로잡았음.)
  1898년(5세) 고향 가정에서 한문 수학을 시작하시다.
  1904년(11세) 정월 부친이 기독교 신자가 됨에 따라 가족 모두 믿게 되시다.
  (필자 주: 더러 이 사실을 1906년에 적고 있으나, 선생님께서는 친히 이를 1904년 첫머리로 고쳐 주시다.) 김두석(金斗錫) 씨에게서 한문 수학하시다.
  1905년(12세) 김천일(金千一) 씨에게서 한문 수학하시다.
  1906년(13세) 구규회(具奎會) 씨에게서 한문 수학하시다.
붙임: 1955년 4월 23일자 “연희춘추” 4면에 실린 한결 선생의 글, “내가 지금 학생이라면 -뒤를 돌아보면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광무 10년(1906년) 곧 나의 열세 살 되던 해 정월에 가친께서는 근처(廣州郡內)에서 사복음 책(마태, 마가, 누가, 요한)과 찬송가 책들을 얻어 가지고 와서 열심으로 읽으시면서 일요일마다 동내 사람들을 권하여 예배를 보면서 ‘열교(裂敎)’(천주학에서 찢어낸 교회라는 뜻)라고 하였다. 이 ‘열교’ 전도사들은 순회로 집에 오면 나를 보고 가친에게 ‘저 아드님을 서울 신학문 학교에 넣으시오.’라고 권고하였다. 가친께서는 이 ‘열교’를 통하여 구미의 문명을 이해하게 되고 동경하게 된 때문에 나를 서울의 신학문 학교로 보내게 되었다. 이것은 나의 열다섯 살 되던 때의 일이었다.……”고.

  1907년(14세) 12월 8일에 용인군 모현면 개일리 백낙순(白樂舜) 씨의 장녀 백애렬(白愛烈) 씨와 혼인하시다.
  1908년(15세) 4월 21일에 신교육을 받기 위해 상경하여 경성 서부(西部) 서강방(西江坊) 창전리(倉前里) 사립 우산학교(私立牛山學校)에 입학하시다. 10월 16일에 삭발하시다. 12월 14일에 의법학교(懿法學校)에 전입학하시다.
  1909년(16세) 6월 6일에 정동예배당(貞洞禮拜堂)에서 최병헌(崔炳憲) 목사에게 세례받으시다. 7월 9일에 의법학교를 졸업하시다. 9월 1일에 의법학교 고등과 1학년에 입학하시다.
  1910년(17세) 7월 4일에 의법학교 고등과 1학년 수료하시다.
  1911년(18세) 9월 1일(필자 주: 연세대 “교직원 카-드”에 의함)에 경성 남부(南部) 상동(尙洞) 사립 청년학원(私立靑年學院)에 입학하시어 거기서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직접 한글 교수를 받으시다. 그 감화가 크다고 하심.
  1912년(19세) 12월 1일에 장녀 경애(敬愛) 씨 출생.
  1913년(20세) 3월 28일에 청년학원 졸업하시다. 4월 1일 경남 마산 창신학교(昌信學校) 고등과 교사 피임(국어‧역사‧수학 담당).
  1917년(24세) 1월 7일에 ‘조선어 연구의 기초’라는 논문을 쓰시다. 3월 24일에 마산 창신학교를 사임하시고, 26일 마산을 떠나 상경하시다. 4월 6일에 경성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 1학년에 입학하시다. 4월 24일에 장남 학현(學賢) 씨 출생.
  1918년(25세) 3월 ‘청춘(靑春)’지에 시 “행복의 배필”이 당선되시다. 7월 9일에 경애 씨 사망.
  1919년(26세) 3월에 ‘3‧1’운동 사건으로 1년 간 휴학하시다. 휴학 기간중 서강의법학교에서 교수하시다. 11월 24일에 차녀 숙임(淑姙) 씨 출생.
  1921년(28세) 12월 3일에 ‘조선어 연구회(朝鮮語硏究會)’의 창립 회원이 되시다(‘조선어 연구회’는 그 후 ‘조선어 학회→’한글 학회‘로 명칭을 고치다).
  12월 25일에 삼녀 덕임(德姙) 씨 출생.
  1922년(29세) 1월 9일에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우리글의 예와 이제를 보아 바로잡을 것을 말함”이란 논문을 쓰시다. 2월 12일에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 창립 회원이 되시다(‘수양동맹회’는 그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동우회(同友會)’→‘흥사단(興士團)’으로 고치다). 3월 24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시다. 4월 1일에 서울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培花女子高等普通學校) 교원으로 피선되어 교무주임‧훈육주임의 일도 맡아보시다(국어‧역사 담당).
  1923년(30세) 12월 1일에 집을 누하동(樓下洞)에 사고, 가족 일부가 서울로 올라와 살림을 시작하시다.
  1924년(31세) 9월 11일에 사녀 영희(英姬) 씨 출생, 9월 20일에 배화 교장 미쓰 부이(Miss, Hallie Buie)에게서 근무특별상금을 받으시다.
  1925년(32세) 9월 12일에 차남 학신(學信) 씨 출생.
  1926년(33세) 3월에 가족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배화학교를 사임하시다(3년 간의 동경 유학비를 상금으로 받으시다). 4월 16일에 일본 동경(東京) ‘릿쿄대학(立敎大學)’ 문학부 사학과(동양사)에 입학하시다. 이때, 3년 후 졸업 논문을 ‘조선문자사(朝鮮文字史)’에 대한 것으로 쓰기로 결심하시고, 모은 자료 정리하고, 새 자료 얻기에 급급하시다.
  1928년 9월 17일에 동경 릿쿄대학(立敎大學) 졸업 논문으로 “조선 문자의 역사적 고찰”을 탈고하시다.
  1929년(36세) 3월 21일에 릿쿄대학 사학과(동양사 전공)를 졸업하시다(문학사). 4월 1일에 경성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피임되시다.
  1930년(37세) 3월 1일에 비로소 온 가족이 고향에서 상경. 7월 26일에 오녀 순임(順姙) 씨 출생.
  1931년(38세) 1월에 ‘동광(東光)’ 잡지에 졸업 논문이 연재되기 시작하다.
  1933년(40세) 1월에 ‘동광’에 18회까지 연재하다가 휴간으로 중단되다.
  1934년(41세) 7월에 ‘동광’에 발표되다가 중지됨을 본 친우나 동지가 출판하기를 권하여 제3차로 개고의 붓을 드시다(4년 걸림)
  1937년(44세) 6월에 이르러 선생님은 ‘동우회’사건으로 왜정 경찰에 종로서(鐘路署)에 검거되시어 치안 유지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예심에 회부되시다. 이로 인하여 부득이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사임하실 수밖에 없이 되었고, 졸업생 대표 연전 이사직도 해임되시다.
  1938년(45세) 1월 25일에 한결은 옥중에서 저 유명한 “조선문자 급 어학사” 출판하시다. 7월 29일에 보석으로 출옥되시다.
  1939년(46세) 2월 8일에 서울지방법원에서 다시 무죄 판결을 받으셨으나, 검사가 곧 공소(控訴)하였기 때문에 1940년 8월 21일에 서울 복심법원(覆審法院)에서 4년 징역의 판결을 받아 피고측이 상고하시다.
  1941년(48세) 11월 17일에 고등법원에서 다시 무죄 판결을 받아 이 사건으로 5년간 실직하시다.
  1942년(49세) 4월 1일에 ‘성신가정여학교(誠信家政女學校)’ 교사로 피임되시다. 10월 1일에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함남 홍원 경찰서에 검거되시어, 1년 간 심문받으시다가 함흥 검사국으로 넘어가시다. 이 무렵을 회상하시어 선생은 선생이 손수 쓰신 이력서에 다음과 같이 적고 계시다. “1943년 5월 15일에 모친 별세하시다. 그러나 왜경은 연락을 취해 주지 않다. 같은 해, 9월 18일에 기소 유예로 석방되어 귀가하고서야 비로소 모친의 영면을 알고 비통에 빠지다. 두 사건 때 받은 무도한 야만적 고문에 육체적 고통은 물론 정신적‧물질적 고통(9년간 실직)으로 극도의 실망에 빠지게 되다.”라고.
  1945년(52세)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선생님께서는 조선어 학회 상무 이사로 봉직하시면서 ‘국어부흥강습회(國語復興講習會)’ 강사로 활동하시고, 9월 23일에는 학무국장(學務局長)에게 전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접수 위원으로 임명되시는 한편, 이사직도 겸임하시다. 이는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인 1942년 8월 17일, 일제 조선 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연희전문을 적산으로 처분, 일본인 교장(高橋濱吉)을 앉히고, 교명마저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京城工業專門學校)’로 고친 데서 연유한 것이다. 10월 6일에, 한결은 연희 전문 교수로 임명되시다. 또, 선생께서는 곧 그 해 11월 4일 연희 전문 문학부장(그 뒤 문과대학장)으로 피임되시다.
  1946년(53세) 6월 5일에 “어린이 국사”를 출판하시다. 7월 27일 연희에서는 학부와 전문부 신입생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이때 전문부의 문과과장에 피임되시다(1969. 4. 30. 연세대학교사 475-476쪽).
  1947년(54세) 9월 11일에 연희 대학교 총장 대리로 피임되시다.
  1948년(55세) 5월 10일에 “나라말본”, 7월 10일에 “중등말본”을 출판하시다. 이 두 말본은 우리 문법 사상 이른바 분석적 체계로 불리는 것으로 그 체계의 뿌리는 저 개화기 이후의 가장 위대한 국어 교육자, 국어 문법의 개척자이신 한힌샘 주시경 선생의 “국어문법”(1910)의 체계를 이어받아 이를 연구 발전시킨 것이다. 7월 3일에 부친 영면하시다. 9월 6일에 연희 대학교 총장 대리 사임하시다.
  1949년(56세) 10월 25일에 앞서 말한 “조선문자 급 어학사(朝鮮文字 及 語學史)”를 4대 명저의 하나라 하여, 축하의 표창을 받으시다(“우리말본”(최현배)‧“고가연구”(양주동)‧“조선어사전”(문세영)과 함께 ).
  1950년(57세) 4월 20일에 문교부의 중앙 교육 위원회 위원으로 피임되시다. 5월 8일에는 다시 연희 대학교 총장(대리)으로 피임되시다. 6월 25일에 사변으로 인하여 각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논문 다수가 있었으나, 그 목록의 서류와 평생 동안 써 내려온 일기를 전실하시다(필자 주: 확인된 바에 의하면, 그 일기의 상당 부분이 현재 연세대 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유족들의 요청에 의하여, 당분간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함.).
  1952년(59세) 1월 1일 문교부의 사상 지도 전문 위원으로 피임되시다. 2월 23일에 국사 편찬 위원회 위원으로 피임되시다. 5월 15일에 학교 교사 복구 추진 위원회 위원으로 피임되시다. 7월 15일에 교수요목 개정 심의회 국어 위원으로 피임되시다.
  1953년(60세) 3월 26일에 문교부 교과용 도서 활자 개량 위원이 되시다. 3월 31일에 연희 대학교 총장 대리 사임하시다(필자 주: “한결 국어학 논총” 등에 1952년 3월 31일 사임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이라고 한결께서 직접 고쳐 주시었음). 4월 18일에 연희 대학교 대학원장으로 피임되시다. 7월 7일에 국어 심의회 위원으로 피임되시다.
  1954년(61세) 8월 15일에 선생님께서는 대학 교육심의 위원회 위원을 사임하시다. 11월 8일에 교육용 도서 편찬 심의 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시다. 12월 25일에 “한국문자 급 어학사(韓國文字 及 語學史)” 증보 4판을 발행하시다.
  1955년(62세) 4월 22일 연희 대학교 대학원으로부터 명예 문학 박사의 학위를 받으시다. 학위기에 “우리나라 글자 및 말의 역사적 변천을 밝히며 말본갈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나라 학술과 문화 발전에 공헌한 바 크므로 본 대학교 대학원의 의결을 거쳐 이에 명예 문학 박사의 학위를 수여함”이라 했다. 이때 명예 문학 박사를 같이 받으신 분은 한결 회에 외솔 최현배‧무애 양주동 선생이시다. 무애는 이것이 인연이 되어, “천하의 양주동, 국보 양주동을 알아 주는 데는 연희다. 가히 몸담을 곳이며, 학문할 곳이다“하여 동국 대학에서 기꺼이 연희 대학교 문화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1958년 3월 17일-1962년 4월 24일)로 오시어, ‘국문학특강’‧‘상대가요연구’ 등 강의를 맡으시다. 그러나 그후 4‧19를 당하여, 연희 대학교에도 분규의 혼란이 있었으므로, 이로 인해, 양 박사는 다시 동국 대학교 대학원장으로 가시었으나, 연희에는 ‘국어학특강’을 맡아 1966년 8월 30일까지 출강하시다. 필자는 연대에서, 양 박사와 1961년 3월부터 두 사람이 같이 쓰는 같은 연구실을 쓰고 있었으므로, 그간의 정황을 비교적 자상히 알고 있어, 이 같은 사실을 여기서 밝혀 둔다(이 같은 사실 역시 더러 1954년에 적고 있으나, 이 역시 잘못이다. 한결은 이 사실을 1955년에 적음이 옳다고 고치시다). 7월 5일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강의 등 사본이 나오다. 이는 나중에, 연세 대학교 출판부에서 “한결 金允經全集 4 龍飛御天歌” (1985. 2. 20. 발행)로 출판되다. 7월 16일에 선생님께서는 학술원 회원으로 피선되시다.
  1957년(64세) 4월 1일에 “고등 나라말본”과 “중등 나라말본”의 검인정판을 내시다. 9월 20일에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기독교 교육 공로상을 받으시다. 10월 9일에 국어 공로자로 문교부 장관의 표창장을 받으시다.
  1959년(66세) 10월 6일에 30년 이상 교육 근속상을 시교육감과 시교육회장에게서 받으시다.
  1960년(67세) 3월 18일에 학술원 회원으로 재차 피선되시다. 3월 31일에 연세 대학교 대학원장을 사임하시다. 8월 1일에는 학술원 종신 회원으로 피선되시다. 12월 10일에 다시 문교부의 중앙 교육 교육 위원으로 피임되시다.
  1961년 (68세) 5월 19일에 군사혁명정부에 의하여 서대문서에 20일 동안 구금되시다. 이 사건은 당시 ‘4‧19 교수단 데모’에 앞장섰던 권 모 교수 등이 반 군부적인 성격을 띤 ‘민주수호회’를 결성하면서 선생의 말씀도 있기 전에 그 명단에 선생님의 성함을 거기에 넣었기 때문이라고 선생님의 가족들은 전한다. 그 후, 그 일에 관여했던 모 형사는 한결의 인격과 덕망에 감응하여 사죄를 겸하여 새해 아침에는 세배를 왔고, 나중에는 그의 자식과 함께 선생님께 정초 세배를 다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1962년(69세) 2월 28일에 교육 임시 특례법에 의해 연세 대학교를 정년 퇴임하시다. 3월 27일에 국어 심의위원으로 피임되시다. 7월 17일에 학술원에서 학술 문화 발전 공로상을 수상하시다. 9월 14일에 숙명 여자 대학교 대학원 강사로 피임되시다. 10월 9일에 최고회의 의장의 한글 공로 상패를 받으시다. 10월 15일에 한양 대학교 강사로 피임되시다.
  1963년(70세) 3월 2일에 한양 대학교 교수로 피임되시다. 3월 15일에 “새로 지은 국어학사”를 출판하시다. 8월 15일에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정부에서 받으시다.
  1964년(71세) 1월 13일에 한양 대학교 문리대학장으로 피임되시다. 4월 25일에 전국 국어국문학 교수단 이사장으로 피임되시다(이 역시 “5월”은 잘못이라고 한결은 “4월 25일”로 고치셨다). 6월 9일에 ‘한결 國語學論集’(고희 기념 논집)이 나오다.
  1969년(76세) 2월 3일에 산업 시찰 여행 도중 부산에서 별세하시다. 2월 9일에 사회장으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광지원리에 모시다.
  1977년 12월 13일에 건국포장(942호)을 추서받으시다.
  그 후, ‘한결 기념 사업회’‧연세 대학교 출판부‘에서 전집으로 낸 출판물은 다음과 같다.
  1975년 5월 15일에 ‘한결 글모음’(Ⅰ‧Ⅱ-한국자유교육협회 발행, Ⅲ-광문 출판사 발행)을 출판하다. 이는 ‘한결 김윤경 선생 기념 사업회’에서 주관한 것이다. 모두 세 권.
  1979년 9월 5일에 “한결 김윤경 선생”(보성 출판사)을 출판하다. 이는 ‘한결 김윤경 선생 기념 사업회’에서 주관한 것이다.
  1985년 2월 20일에 “한결 金允經 全集”(연세 대학교 출판부). 일곱 권으로 됨.


3. “훈육 50년-우리말의 등대수 김윤경 박사”

  여기 이것은 한결께서 돌아가시기 8년 전인 1961년 10월 1일(일요일) ‘동아일보’ 4면에 게재된 것이다. 상당한 부분에 새로운 것이 가급적 내용을 그대로 옮기기로 한다.
  “훈육 50년” -“우리말의 등대수 김윤경 박사”- “일제 사슬에 죽을 고비도 몇 번 평생을 한글 연구에” -“죽을 때까지 학문해야죠”라는 표제를 앞뒤 한가운데에 배치하고, ‘정원의 화초를 가꾸는 김윤경 박사’의 사진을 곁들여 가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싣고 있다.

  칠십 평생 가까이 ‘조선어’ 연구와 이 땅의 아들딸들을 교육하기에 몸을 바친 김윤경 교수를 찾았다. 68세. 나이보다는 훨씬 젊어 보이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매우 정확한 인상을 주었다. 2시간 동안 강의를 하고 나온다고는 하는데, 조금도 피로한 빛을 보이지 않는다(필자 주: 정년으로 연대를 물러나시기 직전의 강의를 두고 말함). 그야 말로 노교수의 관록이 기름한 모습에 잠겨 빛을 띠우고 있는 것 같았다. 교육임시특례법 조치에 따라 정년이 되어 학교를 물러나게 된 감상을 묻자, 김 교수는 입을 꾹 다물고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별로 감상이라고 할 것까지……더욱 내 경운 벌써 60세가 지났고요……”빙긋이 웃고 나서 김 교수는 흰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관립이 65세가 정년이요, 사립은 거의 나이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년이 되면 관립에선 은급을 받고 사립에 가면 특별 대우를 하여 더욱 전문 분야의 연구를 하도록 장려하고 있는 것이 그 실정이라 하였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학교마다 다르나, ‘그레이하우스’라 하여 종신 교육에 바칠 수 있고 연구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명예 교수 제도는요?” 하고, 기자가 묻자, 명예 교수를 둘 수 있는 조건이라면 권위와 그 학교에서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한다. “어쨌든 내 생각엔 그래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선 60세하면 좀 짧다고 봐요. 겨우 체계와 깊이를 알아 이제부터 학문다운 학문을, 가르친다느니보다도 할 수 있는 연령이 60세부터 아닌가 생각해요.……요즘 흔히들 얘기하는데 후진을 위해 문을 열어 준다는 것과 학문하곤 별개 문제니까요. ”하고, 어떤 뜻에서인지 김 교수는 너그러이 웃었다.
  영국 럿셀 교수가 82세인데도 핵 반대 운동에 선봉을 나섰다 하여 일주일 구금형을 받은 얘기를 기자가 퉁겼더니 김 교수는 “그래요! 그래요!”하며 학문과 학자의 신념이란 연령만을 따질 얘기는 아니라는 듯이 수긍하는 것이었다.
  김 교수는 지금으로부터 48년 전, 20세 때에 상동 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중등과 3년을 나와 창신학교(昌信學校) 고등과(高等科)를 거쳐 연희 전문(延禧專門) 문학부(文學部)에 입학하였다. 3‧1운동 때 당시 연전 학생 대표이며, 48인 중의 한 사람인 김원벽(金元壁)과 함께 선봉에 나섰기 때문에 5년만에 연전을 졸업하였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졸업하면서 배화 여고(培花女高) 교사로 갔다. 김 교수가 처음 교육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바로 이때부터라 하였다. 4년 간의 교원 생활 중 교무주임 교감 등 참말 배화에 없어서는 안 될 독실한 교사였었다.
  그때 배화의 교장은 미국 선교사의 한 사람인 미스 ‘부이’였다. 부이 교장은 김 교수의 인품과 그 장래를 위하여 가까운 일본 유학을 권하였다. 그러나 김 교수가 일본 유학을 가는 데는 부이 교장과의 사이에 남모르는 조건이 있었다. 졸업하고 돌아와서는 꼭 배화로 와야 한다는 조건부였었다. 학비를 부이 교장이 부담한 것은 물론이다. 이리하여 김 교수는 일본 릿쿄대학(立敎大學)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게 되었다. 일찍이 부이 교장과의 약속대로 김 교수는 졸업하면서 배화의 중심적인 교사로 재직하였다.
  3‧1 운동이 지난 지 몇 해―그러나 일제의 쇠사슬에서 벗어나려는 사회 사조는 그대로 ‘조선’ 전역에 뻗어 흐르고 있었다. 김 교수가 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피검되어 5년 간을 교육계에서 공백이 있었던 것도 이때였었다. 동우회는 이광수(李光洙), 장이욱(張利郁)을 비롯하여 당시 조선의 젊은 신진들 80여 명이 모여 조직하였다. 그 취지를 말하면, 조국 광복을 하려면 우선 인격 완성이 있어야 한다고 믿어, 무실(務實)(필자 주: 참되도록 함), 역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의 사대 정신과 사람마다 전문 지식을 일생을 두고 하나씩 닦아야 한다는 정신을 고취하려는 데에 있었다. 말하자면 ‘흥사단(興士團)’과 이명 동체이기도 하였다. 김 교수는 1937년 6월에 피검되어 1938년 7월에 보석으로 출옥하였다. 출옥하였으나 동우회 사건이 판결되기까지 5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죄수 아닌 사회의 미결수로서 방안에 들어박혀 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일제의 마수가 중국 대륙에 뻗쳐 소위 일(日)‧지(支)사변이 일어났었다. 그야말로 일제가 전 동양을 침략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때 김 교수는 성신가정여학교(誠信家庭女學校)에 잠시 교사로 나가 가족과 더불어 겨우 연명하고 있을 때였었다.
  그러니까 1942년 일이다. 10월 1일 일제 형사가 김 교수 집 대문을 두들겼다. 함남 홍원 경찰서 형사가 김 교수의 팔목에다 쇠고랑을 잠궜다. 이것이 잔악한 일제의 침략사에서도 유명한 소위 ‘조선어 학회(朝鮮語學會)’ 사건의 발단이었다.
  이때 김 교수와 함께 피검된 중요 인사는 이윤재(李允宰)‧한징(韓澄)‧장지영(張志瑛)‧정인승(鄭寅承)‧최현배(崔鉉培)‧이희승(李熙昇)‧정태진(丁泰鎭) 등 도합 31명의 조선어 학회 간부들이었다.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차에 태우는 대로 이끌려 북으로 북으로 가서 닿은 데가 홍원(洪原)이었다는 것이다. 죄목은 소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제일조 위반 -국토를 분리시켜서 독립하려는 운동- 이라 하였다. ‘한글강습회’를 주최하여 각지로 순회 강습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독립운동을 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 중요 죄목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처음 조선어 학회 사건이라 하여 피검되게 된 중요한 원인은 이 밖에도 있었다. 당시 ‘조선어사전’ 편찬을 육당(六堂, 崔南善)이 경영하던 광문회(光文會)에서 최초로 육당, 김두봉(金枓奉)을 중심하여 시작하였다. 그러나 완결을 보지 못한 채, 광문회가 일제의 압력으로 파산 지경에 빠지고 김두봉은 상해(上海)로 가 버려서 중지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조선어 학회가 뒤를 이어 편찬하려고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때였었다. 당시 조선어 학회 간부의 한 사람인 이윤재는 단신으로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臨時政府)의 한 사람이요, 한글 학자인 김두봉에게 귀국하여 사전 편찬을 함께할 것을 청하였다.
  김두봉은 망명한 사람으로 귀국할 생각도 없다 하며, 원고를 돌려 줄 수 있는데, 난필이어서 알아보기 힘들테니 정리하려면 시일이 필요하니 그동안 생활비가 문제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윤재는 다시 귀국하였다. 안동(安東)에서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던 이중건(李重乾)에게서 200원을 얻어 회원들도 모르는 사이에 김두봉에게 송금한 것이 일제 관헌에게 탄로되었던 것이 그 발단의 실마리였었다. “임정을 원조하여 밖으로는 무력으로 안으로는 문화로 독립하려고 호응한 것이 아니냐”고 일제는 뒤집어 씌웠다. 말하자면 ‘조선말’ 말살을 기도한 일제의 구실이 이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상해 임정은 이미 중경으로 옮겨가고 없을 때였었다. (이때 김두봉은 민족을 배반하고 연안 중공 주구로 전향했음). 일제는 할 수 없이 임정 원조 운운 조항은 빼놓고, 오직 사전 문제와 한글 보급을 하였다는 것을 유일한 죄목으로 삼아 조선어 학회 간부 전원 31명을 취조하였다. 그때 증인 마저 합치면 7,8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김 교수도 동지들과 함께 연일 준엄한 문초를 받았다. 일본인 학자로 당시 성대 교수였던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가 “향가와 이두 연구”라는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예를 김 교수가 취조관에게 말하자 취조관은 김 교수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리고 “오쿠라 교수와 같이 순 학술적 연구라면 몰라도 한글 순회 강습은 왜 하느냐 또, 네 저서에 “조선문자 급 어학사“가 있지? ”고 하면서 몇 차례나 구타하였다는 것이다.
  온갖 고초를 당하던 끝에 김 교수는 1943년 9월에 기소 유예로 출옥하는 몸이 되었다. 이때부터 8‧15해방이 되기까지 김 교수의 삶이란 그대로 동면(冬眠)이요 생존을 위한 생활고의 연속이기도 하였다. “이윤재(李允宰)‧한징(韓澄) 두 분을 옥에서 잃은 일이…….”
  김 교수는 말끝을 잊지 못한 채 멍하니 창문을 내다보고 있었다. 가슴속이 뒤번지는 회억(回憶)의 정이 치밀어 올랐음인지.
  “연희에서 교편을 언제부터 잡았으냐”고 물어 보았다.
  해방 후 군정 학무국장이던 락카드 씨가 연전 졸업생이라 하여 7인 접수 위원의 한 사람으로 임명하면서부터 오늘에 이른다고 하였다. 연희의 노교수만이 아니라, 한국의 노교수인 김윤경 교수는 자애스러운 스승의 면모가 드러나 보이면서도 양심의 전형이라고 모 연대 교수가 알려 주었다.
  부정 입학은 물론이려니와 실행 강의 수의 3분의 1를 결석한 학생에게는 아무리 성적이 우수하여도 낙제점을 준다는 정평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그의 인품을 알 수 있다.
  4‧19 이후 학원 민주화 운동 때에도 연희는 모델 케이스였었고, 그 연희 속에서 동요 없이 고요히 앉아 오직 연희를 위하여 민주화를 외친 것도 교육자인 그의 인간상을 엿볼 수 있다. 취미라면 독서요, 화초 가꾸기라고 하였다. 2남 3녀의 어버이이나 지금은 모두 출가하고 두 자제만 슬하에 있다고 하였다.
  “허나 죽을 때까지 학문을 해야지요.”
  기자와 마주 일어서며 허탈스러이 남겨준 말이다. (Y)


4. 한결의 “삼일 운동과 항일 학생 운동”

  ‘연세대학교사’(1969)에 보면 “학생 활동과 항일 운동”(318~320쪽)이란 제목의 글이 나온다. 이것은 3‧1운동을 전후하여 연전 학생들을 비롯한 당시 서울 학생들의 항일 독립운동에 관한 기록이다.
  그 기록에 보면, 첫째는 연전 대표인 김원벽(金元壁)과 역시 연전 학생 부회장인 박희도(朴熙道)의 독립운동 관련 기록이 나오고, 둘째는 ‘조선학생회’의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에 보면, 한결 김윤경(金允經) 선생은 ‘조선학생대회임원’(1922)의 회장의 일을 맡는다.
  여기서는 한결의 “삼일 운동과 항일 학생 운동”의 내막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위에서 말한 연전을 비롯한 당시 학생들의 “학생 운동과 항일 운동”의 내막에 대해 알아보고, 이어 한결이 직접으로 참여한 ‘삼일 운동’의 현황과 그 정신을 알아보기 위해, 그에 관련된 한결의 “삼일 운동과 연희”(연희 춘추)를 소개하려 하다.


  4.1. “학생 운동과 항일 운동”

  ‘연세대학교사’에 나오는 ‘연희 대학교 편’의 ‘제1장 창립기(1915-1922)’에는 ‘5. 학생 운동과 항일 운동’(318-320쪽)이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거기에는 그 운동의 내막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교회와 민족을 위하여 그 사명이 약속되었던 연희의 창립 정신이 그 빛을 보인 것은 3‧1운동 때다. 일본은 우리 겨레에 대하여 철저한 무단 정치를 시행하여 언론 집회의 자유를 박탈하는가 하면, 1911년에 발표한 종래의 사립학교령을 개정하여 1915년 3월 ‘사립학교 규칙’을 공포함으로써 학교를 폐쇄하여 한국 학생들로 하여금 세계의 사상과 진운에 이목을 잃게 하려고 하였다. 이러던 차 1918년 11월에 세계 1차 대전이 끝나며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가 피압박 민족 간에 확대되어 갔다. 당시 이러한 세계의 신조류를 누구보다도 먼저 알게 된 것은 연전이었다. 일제의 ‘고등경찰요사’에 의하면 당시 본교 학생들의 독립운동 참가 동기는 다음과 같다.
1919년 1월 23, 4일경 延禧學生 副會長인 朴熙道는 金元壁과 만나 회원 모집을 협의하고 기독청년학생의 단체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각 전문학교 학생의 대표적 인물을 모으기로 하고 1월 26일 朴熙道 초대로 金元壁(延傳) 李容卨(世專) 朱翼(普專) 尹和鼎(延傳) 康基德(普專) 尹滋英(專修學校) 朱鐘宜(工傳) 金炯璣(京醫專)등 8명이 대관원에 모여 입회를 권유했을 때 朱翼이 독립운동의 절호의 시기라고 역설하고 각자의 심정을 토로하자 朴熙道를 비롯한 일동이 찬동하였다. …(중간 생략)… 2월 3, 4일경에 거사 준비는 쾌속도로 진행되었다.(318~319쪽)
  위의 기록을 대체로 1919년대의 것으로 친다면, 이 내용은 다시 1920년대로 이어지는데, 그때에 일어났던 일을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연전에서는 3‧1 운동으로 말미암아 그 연루자로서 다수의 재학생이 헌병에 검거되거나 혹은 각지로 흩어지게 되어 1918년에 전교생 94명에 이른 것이 1919년에는 학생 총수가 17명에 불과하였다 (Chosun Christian College Historical Data참조). 그리하여 연전은 한 때 폐교 상태에 있었다. 1919년 3월에는 제 1회 졸업생 22명 (문과 8명, 상과 10명, 수물과 4명)이 배출될 예정이었으나, 졸입식도 거행 못하였다.
  다시 1920년 5월 9일에는 연전 학생 청년회가 주동이 되어 시내 고등보통학교와 전문학교의 학생들이 정동 예배당에서 ‘조선학생회’를 조직하였다. 이 때 참석자가 약 1,000명에 이르렀으나 관립 전문학교는 학교의 제재로 불참하였다. 선출된 임원은 아래 표와 같다(1920. 5. 11. 동아일보).

朝鮮學生大會 任員

회  장 …… 김윤경(金允經)(延專)
부회장 …… 김찬두(金瓚斗)(世專)
총  무 …… 김경순(金慶淳)(貞信女)
총  무 …… 신경수(辛景壽)(普中)
의사부장 …… 최정묵(崔鼎黙)(專修)
덕육부장 …… 이의세(李義世)(京女高)
체육부장 …… 박희준(朴熙俊)(醫專)
경리부장 …… 김영숙(金永淑)(貞信女)
사교부장 …… 권철(權鐵)(中央)
  이 ‘조선학생대회’는 1922년까지 조선 학생 상호 간의 친목과 단결을 도모하다가 해산하였다. 이 이후에는 ‘조선학생회’가 조직되었다.”(320쪽)라고.


  4.2. “삼일 운동과 연희”

  3‧1운동을 전후한, 이 무렵의 항일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한 광복 50주년을 맞는 우리로서는, 당시의 학생 운동에 직접으로 참여했던 한결의 “삼일 운동과 연희”(연희춘추, 1955. 3. 15. 4면) 를 읽어 봄이 매우 유익하리라 생각되어 그것을 아래에 제시한다. 한결은, 3‧1 운동이 일어난 동기를 첫째는 일본의 야만적 정책, 둘째는 윌슨의 민족 자결의 제창, 셋째는 일본 침략에 반발한 고종의 서거(독살 소문) 등을 들고 있다. 그 처참했던 그 현장에서 직접으로 겪었던 한결의 체험담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줄까. 이 내용은 한결의 전집류에는 실리지 않은 것이므로 특별히 여기에 싣기로 한다.


삼일 운동과 연희

김윤경
  삼일 운동은 세계 피압박 민족의 독립운동 사상에 무저항 운동으로 용감스럽게 싸운 점으로 독특한 자랑이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이 일본에 합병을 당하게 된 원인은 갑오 중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이김에 비롯하였다 할 것이다. 그 뒤 일본은 한국의 주권을 침탈하여 보호 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고, 군대를 해산하여 무력을 없애 버린 뒤 융희 4년(1910) 8월 29일에는,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 뒤 일본은 민족주의를 품은 자나, 애국 사상이나 독립사상을 가진 지도자를 없애기와 무력 강압 정책(헌병‧경찰 수비대로 인한)을 쓰기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는 소위 합병 다음 해(1911년)에 교회의 중심 인물들과 민족 사상을 가지었다고 보는 지도자를 잡아 족치려고 일으킨 것이 105인 사건이다. 그렇지 않아도 합병을 전후하여 많은 지도자들이 만주나 중국이나 시베리아 미국 등의 해외 각지로 망명한 후에, 이 105인 사건으로 남아 있던 지도적인 인물들도 숙청을 당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허무하게도 소위 총독 암살 음모란 죄명을 뒤집어 쓰이어 잔인무도한 악형으로, 혹은 옥중에서 죽게 하고, 혹은 병신이 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음흉한 허구(虛構)의 무력 탄압의 강압과 박해는 그침이 없었다. 이러한 일본의 야만적 정책은 우리 민족의 호소할 곳 없는 울분과 강개를 날로 기울이게 하였다.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압박이었다. 입이 있어도 말할 자유가 없고, 귀가 있어도 들을 자유가 없고, 눈이 있어도 볼 자유가 없고, 말이 있어도 마음대로 나타낼 자유가 없고, 손이 있어도 의사를 발표할 붓을 들 자유가 없었다. 한국은 전체가 한 감옥이요 지옥이었다. 이러한 감옥살이로 8년 반을 지나는 동안에 하늘에 사무치는 소원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소서 함이 이것이 삼일 운동을 일으키게 된 첫째 원인이다.
  그런데 우리 연희는 합병된 지 다섯 해 뒤에 창립되었다. 그중에도 인류 역사상의 자유사상의 모체요 근원인 그리스도교 주의의 지도적 인물을 기르기를 목적으로 하여 창립되었다. 이러한 창립 정신은 삼일 운동에 명백히 반영되었다. 어느 학교 학생보다도 강력하게 학생 전원이 삼일 운동에 참가하게 되어, 학교는 일 년 동안 휴교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옥에 다수가 갇히게 되거나 사방으로 피하여 망명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그때에 이 학년을 마치게 되었으나 계속하지 못하고 시골 농촌으로 피하여 농군 노릇을 하였다. 이 때문에 4년제를 5년에 졸업하게 된 것이다. 1918년 11월 11일에는 첫 번 세계대전 전쟁이 끝나고, 파리에서 평화 회의를 열기로 되었는데,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골자로 한 14개 조의 평화 방침을 제창하게 되었다. 이는 어느 민족이나 남의 지배를 벗어나서 자유로 자기 운명을 결정하게 함이 영구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기회에 우리도 우리 민족의 자결권을 파리 평화 회의에 호소하자는 운동을 먼저 해외에 망명하여 있던 지도자들이 계획하게 되었다. 눈과 귀의 자유를 빼앗긴 국내 동포가 이러한 소식을 알 수가 있었으랴만 비밀히 일본으로 나라 안으로 연락되었다. 일본에 있는 우리 유학생들은, 나라 안에서 우리 민족이 자유와 독립을 원하는 표시가 없으면 일본의 거짓 선전만 듣는 외국인들이 우리에게 자결권을 주려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이광수 이하 11명의 서명으로 서울보다 먼저 2월 3일에 독립 선언서를 동경에서 발표하였었다. 그리고 이 일이 있기 전에 서울에도 유학생 대표가 연락하러 왔다가 갔던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전국적 연락과 준비의 관계로 20일이 늦은 3월 1일에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이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의 제창은 삼일 운동의 둘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삼일 운동을 터트린 셋째 원인은 고종(高宗)의 돌아감이었다. 고종은 이조 말기의 임금으로서 일본 침략에 꿋꿋이 반항한 고로 왜 정부는 그를 폐위시키고 순종(융희 황제)을 들여세웠던 것이다. 그는 보호 조약 서명을 거부하였으므로 이완용, 송병준은 왜병의 포위와 강압과 함께 고종을 위협하여 보호 조약에 조인한 것이다. 그 뒤 할랜드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이준‧이상설‧이위종들의 밀사를 보내어 일본이 강요한 소위 보호 조약의 억울함을 호소하려 한 때문에 폐위시키었거니와 이번 파리 평화 회의에도, 또 어떠한 계획이나 있지 않을까 하여 일본은 고종을 독살(毒殺)시키었다는 소문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어(일 월) 전 민족은 분개하고 애통하여 말지 않았다.
  그리하여 전 민족은 자발적으로 흰갓(白笠)을 쓰고 다니게 되고, 이런 상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옷갓을 찢게 되었다. 이는 이 민족을 위하여 일본과 싸우던 마지막 임금이 영원히 감을 통탄함이었다. 그리하여 은근히 일본에 대한 반항심을 표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3월 3일에 거행하게 된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하여 전국 각처에서 구름 같이 서울로 모이어 들게 되고, 대궐 문 앞에는 백립에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거적을 펴고 매일 통곡을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3월 1일에 터진 삼일 운동은 더욱 성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연희의 대표로 뽑힌 김원벽(金元壁) 씨는 2월 28일에 전교 학생을 치원관(致遠館, 이는 육‧이오 사변 때 완전히 파괴되어 터만 남게 됨) 이 층 서쪽 교실에 모아 놓고 독립운동의 계획을 발표하는 동시에 태극기와 머리에 동일 붉은 띠를 준비하여 가지고, 다음날(3월 1일) 오후 두 시에 종로 탑골 공원으로 모이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 행진을 하되 지도자의 기를 쫓아 종로 광화문 앞으로 영국 러시아 불란서 기타 각국 영사관 앞으로 돌면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거리거리 목목에서 연설을 하기를 약속하였다. 그리고 3월 5일에는 인산(이는 전에 국장을 이르던 말인데 고종의 장례식을 인산이라 불렀던 것임)에 참가하러 왔던 시골 사람들이 각각 시골로 돌아가는 날인 고로 그들에게 각각 돌아가서 자기의 고향마다 이 같은 운동을 계속하여 일으키라는 뜻을 전하기 위하여 남대문 밖 정거장에서 시위 행진을 거행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김원벽 씨가 제일 차 지도자로 나섰다가 왜정에게 잡히게 되면 그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될 사람의 차례를 작정하였던 것이다.
  첫 날인 3월 1일은 왜정 경찰도 뜻밖의 이런 전국적 운동을 몰랐던 때문에 당황하고 놀라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태화관(지금의 태화 여자관)에서 33인이 서명한 독립 선언서 발표식을 거행하고, 헌병 사령부로 전화를 걸어 33인은 그리로 잡히어 갔지마는 탑골 공원에 모인 학생과 상인과 일반 시민과 시골서 인산에 참가하러 왔던 사람들로 이룬 시위 행진은 서울의 거리를 사람 바다로 메우게 되어 물 흐르듯 질서 정연하게 진행되었고, ‘만세’를 외치는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게 되었으며, 남녀 학생들의 몫몫의 높은 자리에서 부르짖는 연설은 피를 뿜는 듯하였고, 그들의 목은 쉬게 되고 그들의 낯과 콧구멍은 뽀얀 먼지로 화장한 듯하였다. 그러나 왜정의 경찰관과 기마 헌병들은 뒤만 따르고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었다. 3월 5일에는 남대문 밖 정거장 앞에서 인력거를 잡아 탄 김원벽 씨가 태극기를 펼치어 들면서 만세를 높이 부르자 말자 길 좌우 골목에 태극기와 붉은 띠를 품에 감추고 대기하고 있던 학생들은 일시에 좌우 전후에서 막은 보를 터치어 놓은 물결처럼 정거장 넓은 길이 빽빽하도록 모이어 들어 김원벽 씨의 뒤를 따르면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만세를 불렀다. 이 행진은 남대문 안에 이르러 한 끝은 다른 지도자의 기를 따라서 태평로로, 향하고, 한 끝은 남대문 안 시장 앞을 지나 진고개로 향하였다. 이는 총독부(해방 뒤에 과학관으로 쓰게 됨)로 가려 함이었다. 그러나 시장 앞에서 김원벽 씨는 헌병과 경관의 칼에 맞아 유혈이 낭자한 채 인력거 위에 위에 쓸어진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뒤를 따르는 우리는 예정대로 진고개로 밀고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경성 우편국 옆 진고개 골목으로 들어가려 할 때 왜정 기마병들은 그 목장이를 기마대로 꽉 막고 들어가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칼을 빼어 들고 닥치는 대로 휘둘러치고 붙잡고 하였다. 이때 김원벽 씨의 모양은 어디로 끌리어 갔는지 보이지 않고, 다른 지도자도 보이지 않아서 헤어지고 말았다.
  이 뒤로 우리 학생들은 왜정 경찰의 뒤짐으로 인하여 다수가 잡히는 통에 미쳐 잡히지 않은 학생들은 각각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경찰서나 구치감이나 헌병 사령부나 서대문 감옥은 어디나 터지도록 잡히어 들어 가게 되었다. 그 안에서도 만세 소리는 그치지 않았었다. 이 때문에 학교는 일 년 동안 정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제한된 지면이 이미 넘었으니 여기서 붓을 놓겠다(4288. 3. 8. 밤 적음).

  한결의 3‧1 운동 당시의 현장에서의 기록에는 김원벽(金元壁)에 대한 기록이 두드러진다. 여기서는 위의 ‘삼일 운동과 연희’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김원벽과 관련된 당시의 기록 두어 가지를 ‘연희춘추’에서 더 찾아 제시함으로써 김원벽과 당시의 항일 운동의 상황을 더 자세히 알아내는 데에 보탬이 되게 하고자 한다.
  첫째, ‘연희춘추’ 제6호(1953. 10. 15) 6면 기사에 보면, “좌담회 延禧昔今”이란 게 나온다. 거기에 보면, “學生運動의 先鋒”이란 제목이 나오는데, 사회 보는 이(민영규)가 김윤경 선생에게 “己未 운동으로부터 展開된 抗日 學生運動에 對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데 대한 김윤경 선생의 대답은 이렇다.
  “김윤경 先生= 三‧一運動 當時 學校로는 延禧하고 官立이지만 齒醫科大學이 중심이 되었읍니다. 그 때 김원벽氏가 앞에 서서 南大門 驛前에서 人力車를 타고 先頭에 섰는데 學生들은 머리에 太極旗를 두르고 西方 옆골목에 숨었다가 쏟아져 나와서 列를 짓고 南大門 앞을 지나 京城郵便局 앞을 지나가자니까 騎馬 兵丁들이 꼭 막고 앞장선 指導者를 잡어가서 허터지고 말았읍니다.
  또, “司會 = 당시 在學中이던 鄭錫海 先生도 嶺南지방에 그 운동의 일환으로 나가섰는데 완고한 嶺南 선비들과 禮儀 格式이 잘 通하지 않아서 당황했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記憶이 있읍니다마는 金원벽 씨는 獄에 몇 年인가 계시다가……”라는 물음에 대한 한결의 대답은 “金윤경 先生= 한 三년 될 것입니다. 그 뒤 獄에서 나와서 신병으로 돌아갔지요.”했다.
  둘째, ‘연희춘추’ 제34호(1954. 12. 11) 2면 기사에 보면,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라 하고 “金元壁先生”이란 난이 나온다. 여기서는 “……바로 48人中의 1人으로 排日鬪士인 金元壁先生-우리 延禧의 第1回 卒業生이요 初代 同門會長이다.…… 黃海道 中流 家庭 牧師의 아들로 태어난 膽大 豪蕩한 快男이시다. …… 無慈悲한 倭警에게 被逮 ‘48人義士’의 한분으로 3年 言渡를 받아 西大門 刑務所에서 服役하셨고 出獄後 病患으로 呻吟하시는 중에도 最初로 同門를 創立하여 初代 會長으로 일하시다가 祖國 光復을 눈 앞에 보지 못한 채 1923年 아직 젊은 나이로 世上을 떠나시었다. 世上은 先生의 業績을 잊은 것같다.”고 했다.


5. ‘新幹會 東京支會’ 회원의 한 사람인 ‘한결 김윤경’이 수집한 그 지회 활동상의 ‘스크래프-부크’(1926) 내용

  한결의 삶에 대한 지조와 그 성실성 일관성은 모든 분야에 걸쳐 철저하였다. 그 구체적이고도 확실한 보기의 하나를 들라면, 한결의 “일기”를 들 수 있고, 아직까지 세상에 알려 있지 않은 또 하나의 보기를 더 들라면, 한결의 ‘스크래프-부크’를 들 수 있다.
  여기서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먼저 한결의 “일기” 이야기를 통해 그 일관된 성실성을 알아보고, 이어 한결의 ‘스크래프-부크’에 나타난 그 참된 삶의 자취를 알아봄으로써, 한결의 삶에 대한 정성스런 성실성 치밀성을 말해 보려 한다.
  먼저, ‘한국자유교육협회’에서 펴낸 ‘한결 글모음(Ⅰ)’(1975)에 나오는 “선친을 회고하며”라는 맏아드님 되시는 감학현(金學賢) 님의 글에 보면, “돌이켜 보건대 선친께서는 정의 일념으로 일생 동안 일제의 탄압에서 나, 금력과 권력의 유혹에서나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시종일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한결’이라는 아호가 지어진 것입니다. ……”하고는 이어서, 일기에 관해서는 “교육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시어 자신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수범하시고 일기를 쓰시는데도 중학 시절부터 임종하실 때까지 장장 육십 년 간 불가항력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루의 빠짐도 없이 기록하셨고, 동기간 중 금전 출납부에는 일전의 착오도 없이 기록하셨으며, 신문을 모아 두시는 데도 창간 제일호부터 한 장도 빠짐없이 모아 두시었습니다. 그러다가 육‧이오 동란 중 그 대부분을 분실케 되어 단장의 상심을 하시고 여러 서점으로 우왕좌왕 찾아다니시다가 더러는 회수되었읍니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 일기와 장서에 대해 “선친 작고 후에 우리 자손들은 상의 끝에 귀중한 역사의 자료가 될 수 있을까 하여 장서와 함께 연세대학 도서관에 기증하였읍니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결 김윤경 선생 사업회’에 펴낸 ‘한결 김윤경 선생’(보성문화사, 1979) “일기(초)”(42쪽)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한결 선생께서는 평생 하루도 빼지 않고 일기를 적으셨다 한다. 그런데 6·25동란 중 많은 부분이 없어지고 말았다. 선생께서도 이 일기를 잃어버린 것을 늘 한하셨다. 이제 남은 일기는 다음과 같다(숫자는 연도)”하고는 그 남은 것을, “1912, 1913, 1914”에서 시작하여 “1967, 1968, 1969(1/1~1/29)”까지라고 하고 있다. 이 가운데는, “1915, 1916, 1917”에서 “1922, 1923, 1924”까지와 “1947, 1948”의 것이 빠졌다.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는, 그 남은 일기에 대해, “이 일기는 1973년,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하였다고 했다.
  이와 같이, 한결은 일관되고, 변함없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갖가지 사건, 사실들에 대해서는 성실하게 글로 남기시었고,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자료에 대해서는 수집 보관하여 두시었다. 이제 우리는 그 덕분에 일제하 암울했던 그 시대상 그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한 기억과 참모습들을 되살리는 데에 많은 힘입음이 있게 되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는 한결의 동경 유학 시절(1926·4·16~·1929·3·21)의 한결과 우리 유학생들의 삶의 모습, 그 격동 격변기에 한결이 직접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이는 ‘신간회 동경지회’의 진상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당시의 각종의 선전물, 성명서의 인쇄물, 유인물 등을 한결의 ‘스크래프-부크’를 통하여 그 참된 모습을 알아보기로 하자.
  1987년 2월 15일자 ‘조선일보’ 5-6면에 의하면, “60년 전의 오늘 ‘新幹會’ 창립대회”-“日 총독 ‘대변지 朝鮮日報 가만 안 두겠다’”-“左-右-女性 세력 등 1천2백 명 雲集”-“‘自治論’ 배격……民族 연합 투쟁을 선언”-“의장엔 申錫雨-安在鴻 번갈아……방청석 日警 감시”-“당시 創立 위원 李寬求옹-金泉 支社 沈文옹의 증언”(5면), “60년 전의 오늘…新幹會 창립”-“新幹會 활동 日誌”-“複대표대회 새 綱領 原本 발견” 등을 표제로 내세우고 있는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新幹會 연구 현황과 방향”이라 해 놓고, “학계의 신간회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라고 볼 수 있다……‘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한 최초의 운동이었고, 또 좌-우 합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시험무대였다’……”-“理念 제약에 ‘左-右합작’규명 미흡”-“회고록-傳記 풍부……창립 선언 未發見”이라 한 점이다. 또, 1988년 5월 5일자 ‘한국일보’ 14면에는 신용하(愼鏞厦) 교수의 ‘신간회’에 대한 “국내에서의 투쟁”에 대한 글을 싣고 있으며, 1995년 7월 29일자 ‘조선일보’ 10면에서도 양만우(楊萬雨) 교수의 ‘신간회’에 대한 글을 싣고 있다.
  이로써 보면, ‘신간회’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미진한 데가 많은 것 같다. 그것은 그 68년 전인 당시의 좌-우익의 여러 가지 사상적인 흐름에 따른 갈등과 해방으로부터 6.25 전후에 이르는 사상적인 동족 상잔의 처참한 전쟁-반란-사건들이 모두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당시의 진상을 연구하기 위해, 그 당시의 역사적인 실제의 기록들을 대하기란 그 사정이 너무나 어려웠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 ‘조선일보’(1987·2·15) 6면에서는 “신간회가 일제하 최대의 항일 민족협동전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연구 성과가 저조한 이유는 흔히 이데올로기적인 제약이 지적된다. 신간회가 좌-우 합작의 산물이었던만큼 이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계열의 신간회 참여 동기, 활동 방향, 해소론의 근거 등이 파헤쳐져야 하는데 광복 후의 정치 상황에서는 이것이 어려웠다는 것이다”라고 요약하고 있다. 퍽이나 적절한 지적으로 생각된다.
  한결이 남기고 가신 ‘스크래프-부크’ 표지에는 “廣告 其他 參考件”-“大正 十五年”-“1926년 6월 26일 비치”라 적고, 고무도장으로 “金允經”이라 찍었다. 이제, 아래에서 한결의 ‘스크래프-부크’에 나타난 ‘신간회 동경지회(新幹會東京支會)’의 1928년 1월 11일자로 된 “聲明書”(新幹會東京支會 幹事會, 명의) 하나를 그대로 제시하고, 그 밖의 각종의 선전물, 성명서 등의 몇 가지 내용을 아래에 제시해 보이되, 그 글자 활자의 크기와 맞춤법 역시 되도록이면 거기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맞추어 보이기로 한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에서보다는, 그때 그들의 의지-주장-목표의 실제의 세계를 엿보자는 것이다.


聲明書

  最近, 우리 新幹會東京支會에 對하야 “臨時大會召集願”이라는 書式의 印刷物이 徘徊함을 보앗다. 그 臨時大會召集 理由에 잇서서 “去十二月 十八日에 開催한 新幹會 東京支會 第二回 定期大會를 所謂 “新派閥”의 “壟斷”이라는 虛構 莫測한 言詞를 僞造하야 大會를 全的으로 否認하얏다. 이것은 明白히 新幹會東京支會를 分裂식하랴는 一部 意識的分裂主義者, 反動的 派閥主義者의 所爲이거나 그러치 아니하면 買收된 日本帝國主義走狗輩의 所爲인 것을 本幹事會는 明言한다. 저들의 所爲는 確實히 우리 民族 解放 史上에 잇서서 意義 있는 新幹會東京支會 第二大會를 全的으로 否認한 이것은 必然的으로 全國的 組織을 가진 우리 新幹會 全體의 否認 乃至 破壞가 아니면 안된다. 이것이 民族的 單一 戰線의 分裂者, 攪亂者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不辛히 저들 陰謀 分裂主義者에게 一人이라도 誘引된다면 그는 우리 幹事會로서 가쟝 遺憾으로 녁이는 바이다.
  元來 우리 新幹會는 全民族的協同戰線黨이다. 그럼으로 이곳에는 各層의 反帝國主義 要素를 總集中 結成하야 全民族 各層에 利益을 如實히 代表하는 政黨이다.
  라서 主義 主張의 差異가 問題가 아니라 共同의 利害가 問題이다. 換言하면 우리 新幹會는 “意見의 一致”된 者들의 集合場이 아니라 “利害의 一致”에서 協同하야 鬪爭하는 大衆黨이다.
  우리 東京支會는 創立 以來로 이러한 精神에 立脚하야 果敢하게 鬪爭하여 왓스며 한 第二回大會는 더욱 그 精神을 確立식히는데 絶對의 努力을 다하여 온 것은 會員 諸君이 充分히 認識하엿슬 것이다.
  이러한 에 잇서 이와 갓흔 一部 反動的 派閥主義者와 意識的 分裂主義者 “陰謀的”으로 新幹會를 商品化하며 가진 逆宣傳으로써 會員도 아닌 어린 靑年들을 誘導하는 等 가진 卑劣한 手段을 다하는 行動은 到低히 容恕할 수 업다. 그럼으로 本幹事會는 이러한 全民族的 協同戰線黨의 精神을 蹂躪하고 單一 戰線을 分裂식히려는 反動的 派閥主義者, 意識的 分裂主義者의 陰謀를 徹底히 撲滅할 것을 聲明한다.
  會員 諸君은 自重하라! 그리하야
  反動的派閥主義者와 意識的分裂主義者를 撲滅하자!
  우리 新幹會 東京支會를 必死的으로 擁護하자!

  調査의 進行을 라 이 陰謀者의 正體를 滿天下에 曝露식히는 同時에 嚴罰할 것을 다시 聲明하여 둔다.


一九二八年一月十一日
新幹會東京支會幹事會
* 이 종이의 크기는 ‘가로 29센티×세로 21센티’이다. *

  온갖 고난 속에서도, 한결의 만사에 대한 성실성 일관성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유익한 남김을 주시었다. 여기 이 한결의 “스크래프-부크”에 의하면, 위의 ‘성명서’(1928·1·11)의 바로 앞 장에는 ‘新幹會東京支會’로 되어 있는 “全朝鮮被壓迫同胞에게 檄함”(날짜 없이)이라는 크기의 인쇄물이 붙어 있고, 또 그 뒷장부터는 또 다른 ‘新幹會東京支會’의 ‘성명서’(1928년 1월 12일자)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온통 일본 말로 인쇄되어 있다. 여기서 그들은 “全民族的 單一 戰線 破壞 陰謀에 關聯하여 全朝鮮 民衆에게 呼訴한다”-“統一 戰線을 攪亂시키려는 新派閥鬼의 正體를 暴露하여 新幹會東京支會의 臨時大會의 召集을 要求한다.”고 외치고 있다. 그리고는 이어 일본 말로 인쇄하지 않으면 아니 된 그 까닭에 대해 작은 활자체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래의 이 기록 역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내지는 좌익과 우익의 합작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좋은 증거라 할 수 있다.
東京에 있는 唯一의 朝鮮文 印刷所 同聲社는 원래 在外 同胞 慰問金과 其他의 基金으로 마련했는데, 全朝鮮 民衆의 公器로서 設置되었는데도 不拘하고, 新派閥一味의 陰謀的 獨占이 되어, 그들 新派閥輩에 對한 이 聲明書의 印刷를 拒否하였으므로 하는 수 없이 日本文으로 박아 낼 수밖에 없음을 양해하기 바란다.
  그리고는, 이어 “朝鮮 民族 各層의 總力量을 集中한 全民族의 政治的 利益을 代表한 具體的 表現으로서의 新幹會는 昨年 二月 全民衆의 絶對的 支持下에 創立되고부터는 全鮮 各地에 그 組織이 擴大 確立되어 去年 五月 東京에도 그 支會가 創立되었다.”로 시작하여, 그들의 여러 가지의 주장들, 공격조의 성명문이 이어 나온다. 그리하여, 그 끝에 가서는 “全民族的 單一戰線을 死守하라!!”, “新派閥의 傀儡를 打倒하라!!”고 외치고 있다. 날짜는 “一九二八年 一月 十二日”. “新幹會東京支會會員”이라 쓰고, 회원 명단을 제시했다.
  지금 당장의 흥미거리는 그 명단에 있다. 회원 명단에 나타난 수는 “趙憲泳, 咸尙勳, 劉永福, 金三峯, 李瑄根, 金允經, 李軒來, 鄭東弼, 柳漢相” 등 121명이고, 그 명단의 끝에 “(以外 三十二人)”이라 적고 있다. 이로써 그 수를 합쳐 보면 그 회원의 수는 모두가 153명 내외가 된 모양이다. 이 인쇠물의 크기는 ‘가로 45센티×세로 20센티’. 이 ‘성명서’의 종이에는 한결의 잉크로 쓴 펜글씨의 보충 필적이 있다. 명단 위에 “○”표를 하고, “入會員通過前” 두 사람, “∨”표는 “取消者” 두 사람, “∨”표는 “强制取消再取消者” 한 사람. 특히 ‘金三峯’의 이름 위에는 “?”표를 했다.
  이 밖에도, 한결의 1928년 1월 13일자로 된 우리말 인쇄물 “反動的 派閥主義群의 蠶動에 대하야-萬天下 同胞諸君에게 檄함”(新幹會東京支會)(가로 24센티×세로 40센티)과 일어로 된 1928년 1월 19일자의 인쇄물 “聲明書-派閥鬼의 傀儡인 幹事會의 非行에 對해 다시 全民衆에 呼訴한다”(新幹會東京支會臨時大會召集要求會員一同)(가로 45센티×세로 20센티)와 1928년 1월 20일자(단, 이 날짜는 한결이 써 넣은 것임)의 우리말로 된 유인물 “急告!!! 安心하라! 奮鬪하라! 會員諸君!! 우리의 氣勢는 날노 昻場하며 民衆 支持는 더욱 더욱 烈烈해진다. 보라! 派閥의 發惡, 幹事의 非行을!”(가로 32센티×세로 24센티)과 같은 크기 종이로 된 유인물 “急告-第二號”(1928·1·20), “뉴스 第三”(날짜 없음), “뉴스 第四”(1928·1·25), “뉴스 第五”(1928·1·25), “뉴스 六”(1928·2·2), “뉴스 七號”(1928·2·2) 등이 있고, 또 1928년 1월 22일자로 된 ‘新幹會東京支會’의 명의(붉은 인주로 찍은 ‘新幹會東京之印’이 있음)로 된 유인물에는 “貴下의 臨時大會召集願은 左記 理由로 返却함”(가로 17센티×세로 24센티), 1928년 2월 5일자로 된 ‘新幹會東京支會臨時大會’의 유인물에는 “宣言”(가로 32센티×세로 24센티), 그 밖에도 당시의 여러 가지의 인쇄물 유인물들이 있다.
  다만 여기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위에서 말한 “뉴스 六”(1928·2·2)의 제목과 그 내용의 일부를 첨가 제시함으로써 ‘幹事會’의 성격의 일부를 들추어 보기로 한다. 두 대목의 내용을 따옴표로 묶어 보이기로 한다.

뉴스 六 一九二八年 二月 二日
彼等幹事會 假面的 妥協要求

  昨日에 彼等 幹事會代表者 三人이 우리 臨時大會 召集 準備 事務所에 와서 無誠意한 假面的 妥協을 要求하엿다.…… 이라 했고, 또 “幹事會에 生벼락”이란 표제 아래에서는 “젼일 京城 新幹會本部에셔 東京支會에 뎐보통신이 來하엿는바 其內容은 幹事會에 ‘不法 行動을 不受理하는 同時에 臨時大會를 召集하도록 努力하라”고 하엿다. 至今것 輕擧妄動만을 敢行하든 彼等 幹事會에게는 果然 靑天霹靂이엿다……”

  끝으로, ‘신간회’와 그 모임의 성격을 알아보기 위해, 한결의 ‘스크래프-부크’에 붙여져 있는 당시의 ‘在東京朝鮮人團體協議會’에 명의로 된 두 장의 인쇄물 가운데서, 그 첫째 것 전체를 아래에 들기로 한다. 이것은 분명히 둘째 것과 더불어 ‘신간회’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첫째 것(1972. 12)에는 분명히 그 첫 구호를 “全民族總力量은 新幹會에로!”라 했고, 둘째 것(1928. 1. 16)의 내용은 온통 ‘신간회’의 것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제시된 갖가지 명칭의 인쇄물-유인물들은, 때가 되면 다 세상에 널리 알리라는 것이 아마도 한결의 뜻일지도 모른다.

東亞日報社人物投票에 關한
反對聲明書

海內海外同胞諸君!
  우리 運動은 그 內的 發展의 必然에 依하야 世界金融資本의 現實運動에 對應하야 그 方向을 轉換하고 戰線을 擴大하면서 잇다.
  우리는 발서 派閥主義란 怪物을 어느 程度지 撲滅하고 思想團體란 閨房을 勇敢히 突破하고 中央協議會 常設論을 克服하고 政治鬪爭否定論을 抹殺식힌 同時에 우리의 全民族的總力量을 集中키 爲하야 單一民族的協同戰線體 新幹會를 積極的으로 支持하여 왓다.
  우리는 過去鬪爭史를 回顧하면 그곳에는 一大異彩가 玲瓏하고 잇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滿足할 수는 到底히 업는 것이다. 우리의 歷史的 目的地는 아즉 遙遠하다.
  우리는 現瞬間에 잇서서 만일 우리 單一民族的協同戰線體의 結成을 沮害 愚弄코저 한 者가 잇다면 彼等은 우리 民衆의 敵인 同時에 斷然히 이것을 撲滅하지 안하면 아니된다. 올타! 그것이 아즉 白日下에 露現되지는 안핫다고는 하드래도 우리는 十二分의 注意로써 여기에 極力 警戒하지 안하면 아니 될 것이다. 우리 民衆은 우리 單一民族的協同戰線 幹事會를 어데가든지 擁護하기 爲하야 이것에 對한 些小한 反逆의 兆朕이라도 徹底히 그것과 싸호며 이것에 對한 昭害의 內心을 가진 듯한 모든 者에 對해서는 十分監視치 안하면 아니될 것이다.


海內海外同胞諸君!

  諸君은 東亞日報 二千六百號 第一에 揭載된 “現代人物投票募集”이라는 큰 活字로 박은 廣告를 보앗는가! 이 計劃을 스스로 辯護한 “人物投票募集에 臨하야”라는 長論의 社說을 보앗는가!
  아무렴 우리는 이것이 곳 東亞日報社가 스스로 民衆의 敵이 됨을 暴露한 것이라고 速斷하지는 마자! 東亞日報는 朝鮮民族運動의 現段에 잇서서 偉大한 歷史的 役割을 하야 온 것은 事實이다. 東亞日報는 微少한 反動의 萌芽를 隱然히 暴露하면서도 大體에 잇서서 朝鮮民衆의 利益을 爲하야 싸워온 것을 우리는 굿태여 否認하고 십지 안타. 하기 문에 오늘날지 직혀온 이 東亞日報의 名譽를 爲하야 前者의 計劃-그것이 곳 東亞日報가 民衆의 敵이 됨을 暴露한 것이라고 우리는 速斷하기를 躊躇하는 것이다.
  그러나 諸君! 東亞日報社內에는 幾個時代遲의 不良한 自稱政客이 全然 업다고 누가 斷言하랴! 라서 이번 人物投票의 計劃이 이 計劃에 依하야 朝鮮民衆의 信奉하는 人物이 어느 集團 乃至 어느 集團의 指導者에게 잇는가를 보아서 民族的 協同體를 攪亂하려는 幾個 不良한 自稱政客의 陰謀蠶動에 東亞日報社는 利用된 것이 아니라 누가 敢히 保證하랴!


海內海外同胞諸君!

  우리는 千百步를 讓步하야 多幸히 그것이 幾個不良한 自稱政客들의 民族的 單一協同戰線을 攪亂하려는 意識的 陰謀에 東亞日報가 利用된 것이 아니라고 하자! 아니 우리는 더 讓步하야 차라리 그것이 東亞日報의 意識的 行動이든 無意識的 行動이든 그것을 뭇지 마자! 그러타면 그 計劃이야 말로 何等 無意味한 것이 아니냐! 엇재ㅅ든 우리 民衆을 愚弄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는 東亞日報 ‘人物投票計劃’에 이러케 對答하지 안하면 아니될 것이다. 萬一 그것이 幾個不良政客의 蠶動에 不辛히 그대가 利用된 것이라면 그대는 斷然히 그 者를 逐出하라고! 그리고 그것이 何等 無意識的 行動이라면 하로 速히 그것을 取消하는 것이 조타고!
  指導者는 投票에 依하야 決定될 것이 안이다.
  우리 民衆의 利益을 爲하야 가장 勇敢히 가장 徹底히 가장 正當하게 싸워주는 階級, 集團人物이 우리의 참말로의 指導者일 것이다.
  東亞日報는 人物投票를 하기 前에 가장 우리 民衆을 爲하야 싸워주라! 더구나 우리 勞動者及 農民 靑年과 學生의 利益을 爲하야 싸워주라! 東亞日報여! 그대가 먼첨 中央學校盟休時에 잇서서 盟休學生에게 取한 그 態度를 繙然히 悔改하고 昔日 京城紡織會社職工의 盟罷에 잇어서 盟罷勞動者에 對한 그 態度를 다시는 되푸리하지마는 同時에 何等者 私義私情을 도라보지 말고 어데지든지 民衆의 利益, 그대 所謂 正義와 人道를 爲하야 싸워준다면 우리는 決코 그대를 저바리지 안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그대의 “人物投票計劃”에 對한 決定的 對答이다.


海內海外同胞諸君!

  設使朝鮮民衆이 아즉 愚하야 時代遲의 腐儒 崔南善夫子나 時代遲의 老政客宋錫禹大監의게 多數의 投票를 하엿다하자! 그렇다고해서 彼等이 우리의 本質的 決定的指導者가 될 수 잇슬것인가! 千不當! 萬不當! 千千萬不當이다! 그럼으로 우리들은 東亞日報의 이 計劃이 意識的이든 無意識的이든 何如間 多少反動性을 가진 것이라고 斷言하는 것이다. 우리는 東亞日報를 愛護하는 그만큼 이 計劃에 絶對로 反對하지 안하면 아니된다.


                                          全民族總力量은 新幹會에로!
                                          東亞日報의 人物投票計劃에 絶對反對다!
                                          幾個不良政客의 蠶動에서 東亞日報를 擁護하라!

一九二七年 十二月 일

在東京朝鮮人團體協議會

  그리고, 그 둘째 ‘聲明書’(1928. 1. 16)에도 ‘신간회동격지회’에 대해 논란하면서, 그 끝 마무리에 가서는 “決議文”이라 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내세웠다.

“決議文

本協議會는 新幹會 東京支會에 對한 臨時大會召集要求運動을 反動的派閥鬼,
意識的分裂主義者의 陰謀이며 全民族的單一戰線의 攪亂的行動으로 認함.
一. 反動的派閥鬼와 意識的 分裂主義者를 撲滅하자!!
一. 新幹會東京支會를 死守하자!! ”
  앞에서 말한 대로 여기 이 둘째 ‘성명서’ 것 역시 ‘재동경조선인단체협의회’의 명의로 된 것이다.


6. 한결의 학문에 대하여

  한결의 대표적인 학문적 업적으로는, 그 첫째가 “조선문자 급 어학사”라 할 수 있고, 그 둘째는 “나라말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한결의 명저 “조선문자 급 어학사”를 간단히 소개하되, 그 가운데에 있는 한결의 ‘우리 문자학(정음학)’ 연구에 관련된 문제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 이어 한결의 “나라말본”의 이론 전개의 기조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그리고, 후학의 한 사람으로서, 한결의 학문을 이어 그것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뜻에서 필자의 이에 대한 견해도 아울러 첨부해 나가기로 한다.


  6.1. “조선문자‘급 어학사”에 대하여

  “조선문자 급 어학사”의 초판은 1938년 1월 25일에 출판되었다. 이 무렵의 시대적 상황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한민족 말살 정책이 한창 진행되던 때이었다. 한결의 ‘연보’에서도 밝혔듯이, 한결의 “조선문자 급 어학사”는, 한결이 1937년 6월 7일 ‘동우회 사건’으로 왜정 경찰 종로서에 검거되어, 1938년 7월 29일에 보석으로 출옥하는 그동안에 출판된 것이다. 한결이 이러한 절박한 처참한 상황에서도 민족 문화의 계승 발전이라는 역사적 사명감을 자각하고, 그 같은 학문적 업적을 낼 수 있었다는 것은, 저자의 애국 애족의 투철하고도 희생적인 민족 수호, 항일 정신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결의 저서 “조선문자 급 어학사”(초판, 1937)의 출판기 첫머리에 보면, ‘조선기념도서출판관장’ 김성수(金性洙) 선생의 ‘출판기’-조만식(曺晩植) 선생의 ‘서문’-연희전문학교 교장 언더우드(元杜尤, Horace H. Underwood) 박사의 ‘서문’이 나온다. 모두 그 노고와 학문적 업적에 대해 격찬한 내용들이다. 여기서는 그중 맨 앞에 나오는 김성수 선생의 ‘출판기’만을 아래에 보이기로 한다.
  “이인(李仁) 선생이 그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회갑 기념으로 제1호의 출판을 하게 되었다……. 저자 김윤경 선생의 수십 년 전공과 과학적 노력으로 이루어진 값있는 원고라 학술계에 거성으로 나타난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원고가 본관의 제일 호 기념 출판으로 된다는 것은 본관으로서 더욱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고.
  그리고는, 저자의 “조선문자 급 어학사”의 내력”(정축 1월 7일)과 그 “서” (훈민정음 반포 제491주년 정축 2월 22일)가 나온다. 이 저서의 자상한 내력에 대하여는 거기로 미루기로 한다.
  이 저서는 크게는, 제1편 ‘서론’과 제2편 ‘본론’으로 되어 있다. 그 제1편은, 다시 ‘의사 표시의 방법’, ‘언어의 분류’, ‘우랄·알타이어족의 특질’, ‘조선어의 범위’, ‘문자의 발생’, ‘문자의 종류’로 되어 있고, 제2편은, 다시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문자’, ‘훈민정음’으로 짜여져 있는데, 여기서는 그 제2편의 것을 중심으로 간단히 그 내용을 소개하려 한다.
  ‘제2편’‘제1장’의 “훈민정음 창작 이전의 문자”의 ‘제1절’에는 “전하지 못한 문자”, ‘제2절’에는 “금일까지 전한 문자”라 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이 같은 것은 ‘훈민정음’(글자)을 제외한 것임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 전하지 못한 문자: 1, 三皇內文 2, 神誌秘詞文 3, 王文文 4, 刻木文 5, 高句麗文字 6, 百濟文字 7, 鄕札 8, 渤海文字 9, 高麗文字
※ 금일까지 전한 문자: 1, 吏讀. 2, 口訣.
  그리고, ‘제2편’‘제2장’“훈민정음”에는, ‘제1절’“명칭”, ‘제2절’“제정의 이유”, ‘제3절’“제정의 고심”, ‘제4절’“훈민정음의 본문”, ‘제5절’“훈민정음의 성질과 가치”, ‘제6절’“계통적, 상징적 기원 제설” 등을 말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제6절’에는 다음과 같은 열한 가지의 기원설을 제시하고 있다.
- ‘훈민정음’의 여러 기원설 -
1. 古篆 起源說 2. 梵字 起源說 3. 蒙古字 起源說 4. 梵字와 蒙古字의 起源說 5. 薛聰 創作說
6. 了義 創作說 7. 日本 神代文字 起源說 8. 象形 起源說 9. 樂理 起源說 10. 二十八宿 起源說 11. 古代文字 起源說
  그런데, 주목할 것은, ‘훈민정음’의 여러 기원설 가운데서도, 한결은 위의 “11, 고대문자 기원설”을 말하면서 “한글의 기원에 대하여 끝으로 한 마디 붙이고 싶은 것은, 그 기원이 우리의 고대문자(이미 말함)에 있다 함이외다.”라 하여, 그 기원을 고대문자에서 찾으려 한 점이다.
  ‘제7절’에는 또한 ‘발포 이래의 변천의 개요’라 하여, 스물여덟 가지의 항목을 제시하고 각기 그 내용에 대해 풀이했다.
- ‘발포 이래의 변천의 개요’ -
1. 世宗의 實行 獎勵 2. 世祖 및 그 뒤 歷代의 實行 獎勵
3. 燕山主의 暴政 4. 反切과 崔世珍의 訓蒙字會 凡例
·····················································································
18. 崔光玉의 ‘大韓文典’ 19. 兪吉濬의 ‘大韓文典’
20. 金熙詳의 ‘初等國語語典’ 21. 周時經의 ‘國語文法’
22. 周時經의 後繼 學說
金枓奉의 ‘조선말본’, 李奎榮의 ‘現今朝鮮文典’, 金元祐의 ‘朝鮮正音文典’, 李奎昉의 ‘新撰朝鮮語法’, 姜邁·金鎭浩의 ‘잘 뽑은 조선말과 글의 본’, 李常春의 ‘朝鮮語文法’, 鄭烈模의 ‘朝鮮語文法論’, 崔鉉培의 ‘중등조선말본’, 기타 학자들.
23. 李弼秀의 ‘鮮文通解’, 24. 朴勝彬의 ‘朝鮮語學’,
25. 沈宜麟의 ‘中等學校朝鮮語文法’
26. 한글의 普及과 發展에 對한 基督敎의 貢獻
27. 總督府의 綴字法 規定 28. 朝鮮語學會의 “한글마춤법통일안”
  특히, 여기 나오는 ‘제7절’ ‘18. 최광옥의 ‘대한문전’’에서 ‘25. 심의린의 ‘중등학교 조선어문법’’에 이르는 역사적인 말본 연구의 실적과 이에 대한 한결의 학문적인 견해는, 아래에 나오는 “5.2. 한결의 ‘나라말본’의 기조에 대하여”와 관련되어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지금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결의 학문적 업적을 재인식하는 데에 있다. 한결은 확실히 그의 저서를 통하여, ‘우리 문자학(정음학)’의 기초를 닦아, 이로써 우리 후학들로 하여금,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독창적인 ‘우리 문자학(정음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그 창제의 원리에 대한 학구적 열의를 불러일으켰다.
  한결은 위에서 말한대로, 한글의 기원을 우리의 ‘고대 문자에 기원됨’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 후 한결은, ‘동아일보’에 여덟 번에 걸쳐 연재한 ‘문짜 체계의 전통’-그 민족 발상과 고찰-(1959. 9. 14~9. 25)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것은 나중에 “한결 國語學論集”(갑진문화사, 1964)에도 나온다.
  그 차례는, “‘머리말’, Ⅰ. “고나”식 아닌 문짜 Ⅱ. “고나”(알파베트)식 문짜”로 크게 나누고, ‘Ⅰ’의 것은 또한 1. 수메르 문짜, 2. 에집트 문짜…… 10. 한국 고대 문짜로 나누어 언급하고, ‘Ⅱ’의 것은 1. 페니키아 문짜, 아랍 문짜,…… 17. 한국 문짜로 나누어 언급하였는데, 그 ‘17. 한국 문짜’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
끝으로 우리의 문짜를 간단히 소개하고 끝막으려 한다.
이 위에서 잠시 비친 바와 같이 한문을 빌어서 소리글(表音文)인 “이두”(吏讀)와 “입겾(口訣=토)을 만들어 써 왔으나 (서기 4-5세기) 불완전하고 체계가 잘 서지 못하여 불편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이조 네째 임금 세종 대왕(서기 1419-1450)은 서기 1446년에 “훈민정음”(오늘의 “한글”)을 창작하여 선포하였다. 닿소리(그때 “초성”) 17자(ㄱㅋㄷㅌㄴㅂㅍㅁㅈㅊㅅᅙㅎㅇ/ㄹ)와 홀소리(그때 “중성”) 11자(·ㅡㅣㅗㅏㅜㅓㅛㅑㅠㅕ)의 28자로 구성되었다. ……(중간 생략)…… 그 모양은 닿소리는 그 소리를 낼 때의 소리 기관의 모양을 본떴고, 홀소리는 하늘, 땅, 사람의 모양을 본뜻 것이다.
닿소리는 그 내는 자리로 보아 엄소리(牙音), 혓소리(舌音)ㅡ 입술소리(脣音), 잇소리(齒音), 목소리(喉音)의 다섯으로 나누고, 그 각 소리의 대표자를 그 기관의 소리낼 때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서 나는 다른 소리들은 그 자리의 대표 소리에 한 점이나 한 금씩 더하여 만들었다. 엄소리의 대표는 ㄱ인데, 이는 혀뿌리가 솟아 올라서 여린 입천장에 대어 목구멍을 막는 꼴인데, 이 ㄱ에 점진적으로 한 금을 더하여, ㅋ, ㄱ을 거듭하여 ㄲ을 만들고, 혓소리의 대표는 혀끝이 웃니 안 쪽에 닿는 꼴을 본떠서 ㄴ을 만들고, 그 나머지는 한 금을 더하여 ㄷ, 이에 또 한금을 더하여 ㅌ, ㄷ을 거듭하여 ㄸ, ㄷ에 또 두 금을 더하여 ㄹ을 만들고, 입술소리의 대표는 입의 모양을 본떠서 ㅁ을 만들고, ㅁ에 금을 더하여 ㅂ, 혹은 ㅍ, ㅂ을 거듭하여 ㅃ, 이들에 ㅇ을 더하여 입술 가벼운 소리 ㅱ, ㅸ, ㅹ, ㆄ들을 만들고, 잇소리의 대표는 이의 모양을 본떠서 ㅅ을 만들고, 이에 한 금을 더하여 ㅈ, ㅊ에 또 한 점을 더하여 ㅊ, ㅅ을 거듭하여 ㅆ, ㅈ을 거듭하여 ㅉ, ㅅ의 밑을 막아서 ㅿ을 만들고, 목소리의 대표는 목구멍을 본떠서 ㅇ을 만들고, 이에 한 금을 더하여 ᅙ, 이에 또한 점을 더하여 ㅎ, ㅎ을 거듭하여 ㆅ을 만들었다.
홀소리의 대표는 하늘의 둥근 모양을 본떠서·, 땅의 평평한 모양을 본떠서 ㅡ. 사람의 선 모양을 본떠서 ㅣ를 만들고, 나머지는 이 셋을 여러 가지 다른 모양으로 모아 붙이어 여덟(ㅗㅏㅜㅓㅛㅑㅠㅕ)을 만들고, 또 이 열 한 소리들을 여러 다른 모양으로 모아 붙이어 이미 말한 18자를 만든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대표소리”를 말했다는 점이다. 흔히 “기본자(基本字)”라 부르는 것으로, 필자는 이를 “형체소(形體素)”라 한다. 한결은, 닿소리에서는 “ㄱ, ㄴ, ㅁ, ㅅ, ㅇ”의 다섯을, 홀소리에서는 “·, ㅡ, ㅣ”의 셋을 “대표소리”라 했는데, 나머지의 글자들은, 닿소리에서는 “대표소리에 한 점이나 한 금씩을 더하여” 만들고, 홀소리에서는 “다른 모양으로 모아” 글자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결의 위와 같은 기원설에 대해, 필자는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고, 이를 더 발전시켜 보겠다는 생각에서, 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낸 “세종학 연구8”(1993)에서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는 “설문해자(說文解字)” ·“설문계전(說文繫傳)”·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로 이어지는 문자형체학적(文字形體學的)인 이론 방법과 연계성을 가지며, 그 제자의 원리에는 역(易)의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생성론(生成論)과 “노자(老子)”의 유출 사상(流出思想)에 기반을 둔 송학적(宋學的)인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이론이 전개되어 있다.“고 하는 글을 발표해 본 적이 있다.


  6.2. 한결의 ‘나라말본’의 기조에 대하여

  한결의 말본 연구의 시도는 친필(육필)로 된 유인물 원고본 “조선말본”에서 비롯한다. 이것은 1925년 6월 29일에 나온 것이다. 두 번째의 “조선말본”(배화 교우회, ‘한결生’ 게재)은 1932년 7월 13일에, 세 번째의 “나라말본(고급용)”(동명사)은 1948년 5월 15일에, 네 번째의 “중등말본(초급용)”(동명사)은 1948년 7월 10일에, 다섯 번째의 “고등나라말본”(동아출판사)은 1957년 4월 1일에 나왔다.
  한결은 한힌샘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국어학자이며, 그 여러 제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충실히 그리고 꾸준히 그 학적 맥을 이어받아 이를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한결의 ‘나라말본’에 나타난 기본적이고도 일관되게 견지해 온 그의 ‘문법론’의 기조에 대하여 언급하려 한다.
  한결의 말본 연구의 기조에는 보편적인 인식의 과정이라 할 수 있는, 저 “개념 추상의 계층구조(hierarchy)”(“한힌샘 연구”2, 졸고, ‘김윤경의 말본 연구와 ’월‘을 쪼가르는 기준’(1989), 한글 학회, 179~183쪽 참조)와도 같은 것이 깔려 있다고 본다. 이러한 분류의 기준이 되는 그 개념 추상의 계층 구조 이론은 그의 스승인 한힌샘의 말(월)의 분류에서부터 일관성 있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한결에 있어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되는 바와 같이, ‘말은 종합적에서 분석적으로 발전한다’는 논문에 나타난다. “분석할 수 없는 월이 먼저 생기고 나중에 그것을 낱말로 쪼개어 생각하도록 발전되어 온 것이다”한다. 이러한 분류의 과정에서 한결은 “줄기(으뜸)”와 “가지(붙음)”의 따로 섬을 강조하게 되는데, 이는 보편적 인식의 과정이자, 송학적(宋學的)인 체용론(體用論)에서 온 본체(本體)와 작용(作用)에 해당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세종의 “月印千江”(←주자[朱子]의 “月映萬川”)에 비유된다. 체언(體言)-본체(本體)의 것을 하늘에 떠 있는 진월(眞月)에 비유한다면, 용언(用言)-작용(作用)의 것은 강물에 비친 달칭(月映)에 비유할 만하다.
  한결은 “한 월을 감으로 가르고 감을 또 몸과 빛으로 가름을 월의 풀이라 한다”고 했다. 홑월의 보기를 풀이한 것 가운데서 둘만 보인다.
* 사람(임자몸) 은(임자빛) 동물(풀이몸) 이다(풀이빛)
* 달(임자몸) 이(임자빛) 밝(풀이몸) 다(풀이빛)
  이 역시 “몸”과 “빛”으로 갈래되어 있어 우리의 전통 사상에서 말하는 체(體), 용(用), 곧 줄기(으뜸), 가지(붙음)에 맞아 떨어진다고 하겠다.
  ‘하나’의 ‘씨’(種)가 뿌리(根)가 되고, 줄기(幹)가 되어 웅자를 자랑하는 큰 나무가 되었을 때, 그 줄기(幹)가 가지가지의 지엽(枝葉)으로 갈래되는 데서도 인식 분류된다. 한결의 말본의 기조에는 이러한 사고랄까 인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강조해 본다.
  그리고, ‘꽃이 피 나다.’라고 ‘하나’의 월이 갈래 분류되어 ‘꽃-이-피-나다’의 네 낱이 되었을 때, ‘꽃’·‘피’는 줄기(幹)-체(體)-으뜸(元)에 비유되고, ‘이’‘나다’는 가지(枝)-용(用)-붙음(從屬)에 비유될 때, 우리는 ‘꽃이, 꽃은, 꽃을, 꽃만, 꽃도, 꽃뿐…’과 ‘피고, 피니, 피면, 피는, 피며…’에서 나무의 ‘줄기’와 ‘가지’에서 그 통일로의 대타성(待他性)을 생각하면서, 그 갈래를 인식 분류하는 과정을 생각함이 한결 말본의 기조에 접근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된다.
  한결은, “말은 종합적에서 분석적으로 발전한다”라는 논문에 나타난, “분석할 수 없는 월이 먼저 생기고, 나중에 그것을 낱말로 쪼개어 생각하도록 발전되어 온 것이다.” 한다. 한결은 분류의 과정에서 “줄기(으뜸)”와 “가지(붙음)”의 따로 섬을 강조한다. 보편적 인식의 과정이다. 송학적(宋學的)인 체용론(體用論), 세종의 월인천강(月印千江)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보편적 원리라 할 수 있다.
  한결은, 말본의 연구는 그 말이 속해 있는 말의 형태적인 특질에 맞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영어의 ‘be, are, is, was’의 굴절성(屈折性)은 그 굴절성에 맞는 말본이어야 하고, 중국어의 ‘我買書(나는 책을 산다)’, ‘他問我價錢(그는 나에게 값을 묻는다)’, ‘他說我糊塗(그는 나를 바라보고 말한다)’, ‘我家裡沒有底下人(나의 집에는 하인이 없다’, ‘我買的又便宜又結實(내가 산 것은 값도 싸고 그 위에 튼튼하다)’에서처럼, ‘我’가 그 위치에 따라 ‘나는, 나에게, 나를, 나의, 내가’로 바뀌게 되는 이러한 특질을 가진 말은, 또한 그 특질에 맞는 말본이어야 할 것이다. 중국어는 이러한 말본의 특질 때문에 위치어라고 한다. 우리말은 첨가어(添加語)에 속해 있다. 따라서 우리말은 우리말의 특질에 맞는 말본이어야 한다는 것이 한결의 한결같은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