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결 김윤경 선생의 학문과 인간】

김윤경 선생의 일생

허웅 / 한글 학회 이사장


1. 어릴 때의 집안 사정

  한결 김윤경 선생은 1894년(갑오년) 6월 9일에,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고잠리에서 김정민 님의 맏아드님으로 태어났다. 그해는 동학 농민 전쟁이 일어난 해이어서, 선생은 부모님의 품안에서 피난을 다녔다고 한다(전집 6:15).
  할아버지는, 39살 때(1889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자식을 위해서 다시는 장가들지 않고, 74살까지 수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술을 즐기고 역정을 잘 내고, 잔소리를 잘 하는 성격이었다 한다(전집 6:104).
  아버지 정민 님은 광무 8년(1904년) 정월부터 기독교 신자가 되어 -한결 선생의 나이 11살 때- 2년 뒤인 광무 10년에는 세례를 받게 되었고, 선생의 어머니도 세례를 받아 이름을 박나혈이라 하였으니, 선생의 어린 시절은 온통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보내게 되었다(전집 6:104).
  그러나 어머니는, 일찍 홀아비가 되어 장가를 들지 않고 있는 시아버지를 36년 동안이나 모시느라고 무척 고생하였다 한다. 이것은 어머니의 20살 때부터 55살 때까지의 36년 동안의 일이었는데, 그 시절을 돌아보면서 한결은 다음과 같은 술회를 남기고 있다.
아버지는 내가 잘못함이 있을 때에 채찍으로 치심이 있었지마는, 어머니는 나에게 매질을 하거나 발악함과 같은 목소리로 저주하심을 들어 본 기억이 없다. 나에게 대하여만 그러하심이 아 니고, 온 가족 사이에나 이웃과의 사이에도 어느 누구와 말다툼을 해 본 일이 없다…….
그리고, 사욕으로 공익을 해침을 절대로 회피하시는 성격임을 온 이웃이 다 인정하기 때문에, 동리에 혼인이나 환갑 같은 무슨 잔치가 있으면 반드시 어머니를 청하여 숙수 진지를 떠맡긴다(전집 6:105).
  우리는 이 글에서 선생의 성격의 한 모습을 엿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발악함과 같은 목소리로 저주하심’이 없었다는 것, ‘온 가족 사이에나 이웃과의 사이에도 어느 누구와 말다툼을 해 본 일이 없다’는 것은 바로 한결 선생의 생전 모습이 아닌가? 특히 ‘사욕으로 공익을 해침을 절대로 회피하시는 성격’은 바로 한결 선생의 성격 그대로다.
  글쓴이(필자)는 선생의 성낸 표정을 기억해 낼 수가 없다. 선생의 큰 목소리를 기억해 낼 수도 없다. 항상 부드러운 표정과 목소리만이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한평생 변함 없는 그 항일-반독재 투쟁의 정신은 바로 이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에서 가꾸어진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2. 서울 유학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선생은, 그때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이 한문을 배우다가, 1907년에는 열네 살의 나이로 결혼을 하고, 그 다음 해 봄에 서울로 유학을 하게 된다. (‘한글’ 143호에 실린 해적이에 따름)
  선생은 다섯 살 때부터 열다섯 살 때까지의 10년 동안을 한문을 배웠는데, 그 암흑기의 한문 배우던 기억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의 그 때-글쓴이: 주시경 선생의 가르침을 받을 때-까지의 우리 글에 대한 인상은 배울 것 없는 ‘언문’, ‘쉬운 글’, ‘무식한 사람이나 쓰는 글’, ‘일 없는 부녀들이 심심풀이로 이야기 책이나 읽기 위하여 배우는 안글(암클?)’이라는 생각뿐이었다. 15세 때 신학문을 배우러 서울 학교로 올라오기 전까지 10년 동안 사숙에서 한문을 배우는 환경의 분위기에서 얻은 인상의 선입견이었다. ‘천자문’을 배우고, ‘동몽선습’을 배우고, ‘통감’(중국의 편년체 역사)과 ‘경서’를 배우는 동안에 글자 옆에나 구절 옆에 한글로 달아 놓은 ‘토’(입겾, 구결)를 보고서 저절로 알게 된 것이 ‘언문’이었다. 그렇게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쉬운 글이 무슨 가치가 있는 글이냐? 일생을 배워도 잘 알지 못할 한문만이 참글이라는 생각밖에는 앎이 없었다.
  이러한 암흑기의 교육을 벗어나, 새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것을, 선생은 “기적 같은 고마운 일”이라고 하고 있다(전집 6:439).
  그러나 사실은 기적이 아니라, 선생의 아버님이 일찍 1906년부터 ‘천주학의 열교, 곧 신교’를 믿게 된 데 그 원인이 있었으니, 이것은 “예수교의 은혜였다.”(전집 6:439).
  한결 선생의 아버님은, 그때 시골에 사는 토반이 남의 땅을 빼앗기도 하고, 남에게 까닭없이 행악을 하는 것을 보고, 저런 못된 행위를 하는 놈을 누르고 억울함을 당하는 가엾은 사람들을 건지기 위해서는 이 종교를 믿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신교를 믿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러던 어느 날 전도인이 선생을 보고서 서울로 가서 공부하게 하라고 권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회가 되어 선생은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선생의 해적이에 따르면, 1908년(15살 되던 해) 봄에 서울 서부 서강방 사립 우산학교에 입학하고, 그 해 10월에 머리를 깎았다고 하였으니, 그때 열다섯이 될 때까지 머리를 땋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2월에는 의법학교로 전입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최광옥의 ‘대한 문전’을 배우기도 했지만, “별로 깊은 인상을 받음이 없었”다는 것이다(전집 6:438). 그리하여 의법학교 고등과를 1910년 7월에 수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나라가 망한 그 다음 해, 1911년 1월에 남부 상동 사립 청년학원에 입학하여, 여기서 주시경 선생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이 선생의 한평생의 나아갈 길을 결정해 주었던 것이다.
  선생은 본디 수학 물리학 같은 자연 과학 방면에 더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방향을 인문 과학 쪽으로 바꾸게 된 것은 주시경 선생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에서이다.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우리 글은 가장 과학적 조직을 가진 글이지마는, 남들은 이를 칭찬하건마는 우리 자신들은 이를 몰라 보고 천대만 하여 왔다(전집 6:440).
  여기에서 선생은 지난날에 가졌던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선입견이 깨어지기 시작한 것인데, 그보다도 결정적인 감명을 받게 된 것은 주시경 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였다고 한다(전집 6:443-4).
외국 글인 한문에는 큰 학자라고 자칭하는 이라도 제 나라 글인 국문은 무식하여도 수치로 여기지 아니함은 사대 사상에 중독된 때문이다.
우리 글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글입니다. 이것은 나의 독단이 아니라 외국인이 우리보다도 먼저 그 가치를 잘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에서 받은 감명을 선생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이 말씀은 나로 하여금 우리 글이 우리의 오직 하나 되는 보배임을 깨닫게 하였다. 나의 일생을 좌우할 큰 감격을 느끼게 한 것이었다.
나의 그 때까지의 우리 글에 대한 그릇된 인상을 정반대로 뒤집게 만들었다. 나는 중학 시대에 자연 과학 방면, 특히 수학에 많은 취미를 가지었었고 성적도 늘 만점이나 만점에 가깝게 받았으므로 이 방면으로 전공하고 싶은 생각도 강하였었다. 그러나 우리말, 우리 글에 대한 주 선생에게 받은 감격은 이 충동을 이기고도 남음이 있어서 결국 부지불식간에 국어 연구의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어 오늘날까지 변하지 않게 되었다(전집 6:441).
  주시경 선생의 교훈은 선생의 한평생의 방향을 바꾸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는데, 그때의 서울 학교의 분위기는 선생에게 민족적 애국 정신을 길러 주었다. 선생은 처음 서울 학교에 온 느낌을 “딴 세상, 새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 있었다.”(전집 6:422) 하고, 또 “전 교육계와 사회 환경이 불타는 듯한 애국 정신으로 차고 넘치는 것이었다.”고도 하고 있다(같은 자리).
  이러한 애국적 분위기가 넘쳐흐르게 된 원인을 선생은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사조의 원인을 찾아 보면 나라를 팔아 먹는 역적과 이들을 매수하거나 위협하여, 우리 나라를 삼키려는 왜적에 대한 증오감과 4,000년 역사를 가진 우리 나라의 자주독립을 확립하려는 애국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학생은 다 국민병을 만들려고, 학교마다 총을 준비하거나 목총을 만들어 병식체조로 훈련을 시키는데, 이를 담임한 선생은 대개 군인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융희 원년(서기 1907)에 군대 해산으로 쫓기어 난 군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의병을 일으키거나, 학교로 들어가 독립군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또 학생에게 가르치는 창가는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나라 사랑의 노래였다(전집 6:422).
  선생은 서울에 와서 주시경 선생에게서 우리말의 소중함과 우리글의 뛰어난 가치를 배웠고, 체육 교관에게서는 체육만이 아니라 장차 이 나라를 짊어지고 재건할 수 있는 잠재력을 훈련받았던 것인데, 그때의 이러한 나라 사랑의 조류는 그때의 정치적인 움직임을 그 밑바닥에 깔고 있었던 것이다.
  1894년 갑오년, 그러니까 한결 선생이 이 세상에 태어난 해에, 전봉준의 동학 농민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 일을 계기로 하여 청 나라와 일본은 이 나라 안에서 전쟁을 일으켜 일본이 이겼다. 그리하여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오만불손한 강압 정책은 날로 세어져, 미우라란 놈은 군대를 끌고 대궐 안에 들어가 명성 황후를 불태워 죽이는 잔인무도한 짓을 저질렀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도 만만찮아, 드디어 1904-5년에는 러-일 전쟁이 일어나서 이 또한 일본의 승리로 끝나매, 일본은 안하무인격의 행패를 부리게 되었다.
  1905년 11월에 소위 ‘을사 보호조약’이라는 것을 맺게 되었으니, 이에 조인한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을 ‘을사 오적’이라 한다. 다섯 놈의 나라 팔아먹은 도둑놈이란 뜻이다. 그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07년에는 놈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고종 황제를 강제로 양위하도록 하고, 순종이 대를 잇도록 하였는데,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란 놈을 앞세워 다시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의 외교 내정은 전부 일본 통감의 손안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로부터 나라를 완전히 잃은 1910년까지 왕은 이름만 가지고 있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조약을 맞은 이완용, 송병준 들을 나라 팔아먹은 일곱 도둑놈이라 한다. 이 조약이 맺어진 다음 해인 1908년에는 드디어 우리 군대를 해산하기에 이른다.
  이러는 동안에 우리 애국 지사들의 저항 운동은 날로 불타 오르고 있었다.
  일본 군대가 명성 황후를 시해하자, 일본을 국모의 원수라 하여 전국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되고, 1896년에는, 갑신정변(1884)으로 미국으로 망명 가 있던 서재필이 정부의 고문으로 돌아와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 협회를 조직하여 외국 세력을 배척하는 동시에, 정부를 민주주의적으로 혁신하려다가 도리어 정부의 탄압을 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황성신문의 주필 장지연은 이 조약을 상세히 보도하고 ‘이 날에 소리 놓아 울부짖노라’는 사설을 써서 배달하였다. 그리고 그때 일본의 힘이 미치지 못하던 ‘대한 매일 신보’(영국 사람이 내던 신문)에는 그 강압의 진상을 거리낌없이 보도하였다. “국민은 열광적으로 이를 환영하고, 피가 끓어오르는 애국심으로 결사적 투쟁을 맹세하고, 학도는 학교를 닫고 통곡하며, 교인은 하늘을 우러러 흐느끼고, 장사치들은 저자를 닫고 미친듯이 부르짖었고, 유생들은 잇달아 서울로 들어와 글을 올리었다.”(전집 6:426) 분을 이기지 못하여 민영환을 위시하여 여러 사람들이 자결을 하기에까지 이르렸고, 일진회와 같은 역적 단체가 생긴 것에 대항하여 여러 단체들이 생겨나서 일진회를 맹렬히 공격하였고, 우리의, 민중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힘을 기르기 위하여 많은 교육 기관들이 우후죽순처럼 전국 도처에 설립되었는데, “이 교육 기관들은 다 외국 세력을 배격하고, 자주독립을 주장하고 나아가서는 국민병이 되어 싸우겠다는 것이었다.”(전집 6:426)
  고종의 양위 조서가 내리자 “격분한 군중은 일경과 충돌이 일어, 일 순경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부상되매, 일병이 총을 쏘아 한인 두어 명이 맞아 죽었다. 이 날 종로에도 수천 명이 모이어 분개한 연설을 할 때, 일경 50여 명이 달려들어 해산시키려 할 때, 전동 병영에서 한국 군사 수십 명이 탈출하여 일순경 교번소(파출소)를 습격하여 일경 3명을 쏘아 죽이고 6명을 부상시키었다. 군중은 더욱 용기를 얻어, ……이완용 집에 불을 지르고 일인 경찰서를 부수는 일들이 잇달아 일어나매, 이토(이토 히로부미)는 병력으로 군중을 잡아 죽이어 이틀 후에야 진정되었다.”(전집 6:428-9)
  군대가 해산되매 이에 항거하다가 제일대 대장 박성환은 자살하였고, 해산된 군인들은 각처로 흩어져 의병을 일으키고 학교의 체조 교원이 되었다.
  1909년에는 이토록 못되게 우리나라를 괴롭혔던 이등이란 놈이 안중근 의사의 총에 쓰러지고 말았다.
  나라 팔아먹던 큰 도둑들이 있고, 일진회와 같은 매국 단체가 있은 반면에는 이러한 나라 건지려는 의사 열사들이 줄을 잇고 있었던 것이니, 한결 선생이 주시경 선생에게서 우리 말과 글의 소중함을 배우고 체육 교관에게서 나라 사랑의 정신 무장을 받은 밑바닥에는 이러한, 그때의 역사의 흐름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한결 선생은 1913년 봄에 ‘청년학원’을 졸업하고, 바로 마산에 있던 창신학교 고등과 교사로 취임하여,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기까지 4년 동안을 마산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그 마지막 해 이른 봄(1917년 1월 17일 밤)에 ‘조선어 연구의 기초’란 조그마한 논문을 탈고하였으니, 이것이 뒤에 선생의 필생의 명저로 남은 “조선문자 급 어학사”의 전신이다(“조선문자 급 어학사” 앞에 실린 그 내력에 의함).


3. 연희 전문학교와 배화 여고 시절
- 조선어 연구회와 수양동우회 창립에 가담 -

  한결 선생은 1917년 4월에 창신학교를 사임하고, 연희 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니 그때 선생의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다.
  선생이 입학하던 당시의 연희 전문학교는 종로 YMCA회관 밑층을 빌어 수업하던 때였는데, 교수는 모두 18명, 학생이 겨우 89명이었다. 그때 선생보다 한 반 위였던 이원철(우리나라의 첫 천문학자)은 그 한 반 밑인 선생 반에서 수학을 가르쳤다고 하니, 교수할 사람이 무척 모자랐던 시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은 여러 과목에 많은 취미를 가지고 좋은 성적을 올렸는데, 특히 수학에는 거의 만점을 얻었다고 한다.
  그 해 연희 전문학교는 조선 총독부로부터 ‘사립 연희 전문학교’의 허가를 받고, 그 다음 해인 1918년 봄에는 지금의 연세 대학 기지에 새로 교사를 짓고 옮기어 가게 되었으니, “종로의 먼지 많고 캄캄하던 곳에서 복작거리다가 울창한 송림이 우거진, 깨끗한 공기와 향기로운 꽃이 심신을 상쾌하게 하는, 넓은 새 기지로 나오니, 그 때의 즐거움이야 형언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전집 6:418-9).
  그러나 2학년을 마치려던 때에 3‧1 독립 투쟁이 일어나게 되매, 선생은 “일본 경찰이 잡으려는 손아귀를 벗어나기 위하여 시골 산골에 도망하여 일 년을 숨어” 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사 년에 마칠 수 있었던 연희 전문학교를 5년에 마치게 되었다.

  이 5년 동안 학교 공부에도 열중했지마는 사회 참여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1921년 12월 3일에는, 우리 말과 글의 연구 보급을 위하여, 휘문의숙에서 ‘조선어 연구회’가 만들어졌으니, 선생은 그때의 창립 회원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조선어 연구회’는 지금의 ‘한글 학회’이다.   임경재, 최두선, 이승규, 장지영, 권덕규, 이병기, 이상춘, 이규방, 박순뇽, 신명균, 김윤경

  ‘한글’ 창간 호(1932년 5월)의 일지에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조선말과 글의 과학적 연구와 통일과 보급과의 운동은, 고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서력 1897년에 국문동식회가 조직된 후로 연구회와 강습소와 강연회 등 여러 가지 조직으로 활동하야 오다가, 그 때 몰리어 오는 풍진에, 최후로 1915년에는 조선말글모(조선어문회)도 부득이 해산함에 이르렀다. 그 뒤에 7년 동안은 아무 형식적 조직은 없었으나, 이 운동의 목숨만은 끊임없이 이어온 것이다. 그러다가 1921년 12월에야 다시 조선어 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새 조직이 생기어 이 운동의 중추가 되다.…… 본회의 지난 40년 동안의 긴 역사를 한두 마디로 말할 수가 없는 것이매…….
  이 기록으로 보면 1921년에 재건된 ‘조선어 연구회’는 그 기원을 ‘국문동식회’에다 두고 있는데, 주시경 선생의 ‘국어문전 음학’에 따르면 ‘국문동식회’는 189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앞의 기록의 1897년은 1894년의 잘못인 듯) 이 모임의 명맥이 1908년에 ‘국어 연구회’로 이어지고, 그 뒤에 ‘국어’란 말을 쓸 수 없게 되매, ‘배달말글 모듬’으로, 다시 ‘한글모’(앞 기록의 ‘조선말글모’는 ‘한글모’의 잘못인 듯)로 그 이름을 바꾸어 온 것임을 있을 수 있는데, 한결 선생은, 주시경 선생의 학문의 맥을 이어받아 세워진 ‘조선어 연구회’의 재건 회원이 되었던 것이다.
  선생은 이 무렵에도 계속해서 우리말 연구의 역사와 우리글의 역사를 탐구하고 있었던 모양이니, 1922년 1월 9일 연희 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재학 중에 얻은 자료를 가다듬어, 마산에서 쓴 글을 고쳐 ‘우리 말과 글의 예와 이제를 보아 바로잡을 것을 말함’을 탈고하였다.
  그 뿐 아니라, 선생은 같은 해에 ‘수양동우회’(‘흥사단’의 전신)의 창립 회원이 되기도 하였다.
  1922년 봄에 연희 전문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배화 여학교 교원으로 취임하여, 일본 유학으로 갈 때까지 만 사 년 동안 재직하게 된다.


4. 일본 유학을 마친 뒤 배화 여학교로 되돌아옴
-“조선문자 급 어학사”의 완성-

  선생은 뜻한 바 있어, 1926년 봄에 배화 여고를 그만두고 일본 릿쿄대학 사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연희 전문학교는, 고등보통학교 5년을 마치고 난 뒤에 4년을 수학하도록 되어 있었고, 일본의 대학들은 중학 5년을 마치고 5년(예과 2년, 학부 3년)을 수학하도록 되어 있었으니, 연희 전문은 일본의 대학 학부와 거의 동등한 교육 기관으로 대접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생이 릿쿄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정상 과정의 학부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선과생’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는 것이다(전집 6:446). 그들이 얼마나 우리를 깔보고 있었는지 이 일 하나만으로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그러나 선생은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본과생으로 편입이 되어 학교를 마치게는 되었다.).
  여기에서 공부를 하고 난 뒤, 졸업 논문으로 쓴 것이 “조선 문자의 역사적 고찰”이었다. 이 논문은, 마산 창신학교 재직 중에 쓴 “조선어 연구의 기초”, 연희 전문학교 재학 중에 쓴 “우리 글의 예와 이제를 보아 바로 잡을 것을 말함”을 깁보태어 다시 쓴 것인데, 1928년 여름에 탈고한 것이다.
  이리하여 선생은 1929년 봄에 릿쿄대학 사학과를 졸업한고 난 뒤, 바로 그 전에 있었던 배화 여학교 교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졸업 논문은 그때 우리나라의 국어학계에 좋은 메아리를 일으켰던 모양으로, 1931년에 ‘동광’이란 잡지에 이것을 수정 보완하여 연재하게 되었으나, 동광 잡지가 휴간되매, 연재를 끝내지를 못했다.
  이것을 애석하게 여긴 친구들 가운데는 책으로 내기를 권하는 사람이 많아, 교직의 일로 매우 바쁜 몸이었음에도, 1934년 여름부터 다시 졸업 논문을 깁고 고치어 1937년에 출판을 보게 되었으니, 이것이 우리 국어학의 역사에 불멸의 빛을 던져 준 “조선문자 급 어학사”이다.
조선 민족의 과거의 생활에 있어서는 사적의 인멸로 그 결과를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이 많지마는 이제까지 다행히 그 자취를 남기어 세상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하는 것이 적지 않읍니다. 삼국시대의 고적의 벽화나 불상 같은 조각이나 석조 건축도 그 하나요, 고려 시대의 자기나 금속활자의 발명 기타 공예도 그 하나요, 이씨조선의 귀선 기타 공예미술도 그하나라 하겠읍니다. 그러하나 이것들은 다 쇠퇴하여 남보다 뒤지게 되거나 혹은 자취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읍니다. 이러한 가운데에 오직 홀로 남아서 전세계 학자를 놀라게 하고 기리기를 말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문자외다. 그러하나 그 창제의 유래라든지 형편이라든지 그 변천이라든지에 대하여는 그 일반은 알아볼 만한 저서가 없어서 조선말을 연구하려는 이마다 늘 아쉽게 여기던 것이 사실이었읍니다. 저자가 우리말을 연구하려고 함에 당하여 먼저 이 방면으로 섭렵하게 됨도 이 까닭이요 또 불완전하고 변변하지 못한 이 저술을 내어놓게 됨도 이 까닭입니다(“조선문자 급 어학사”의 서문 첫머리에서).

5. 수난 시대

  1937년은 선생의 나이 44살 되던 때이다. 그러나 이때 선생은 자유의 몸이 아니었다.
  이 시절의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친일 행각을 한 사람이 아닌 한, 다 고초를 겪었지만,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첫 시련이 연희 전문학교 재학 시절에 겪었던 3‧1 독립 투쟁 때(1919년)의 일이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선생은 그때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한 해 동안, 시골 농촌에 숨어 농사를 돕기에 학교를 쉬어야 했다. 그리하여 4년에 마칠 학교를 5년에 마치게 된 것이다.
  그 다음 수난은 바로 “조선문자 급 어학사”가 나올 무렵에 있었다. 선생은 연희 전문학교에 다니던 때에 이미 ‘동우회’의 창립 회원으로 가담하고 있었는데,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바로 배화 여자 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취임한 지 8년 하고 몇 달이 지난 1937년 6월 7일에 ‘동우회’에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검거되었으니, 이때 선생은 제일차로 종로 경찰서에 검거되었다.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회원 150명이 검거되었으리라는 것이다(전집 7:353). 일본 “경찰서의 피의심문 방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야만적 고문법이었다.”는 것인데, 한결 선생 자신이 당한 고문의 한두 가지만 실례로 들어보아도 이러하다.
검거되던 다음날인 6월 8일 오후 두 시의 일이다. 나의 최초 검문 담임 자는 구보다 마사오란 부장이었는데, 그는 나의 입에서 ‘조선 독립이 목적이었다’는 말이 그리 쉽게 ‘자백’되지 않으매, ‘아마 목이 마르지?’ 하고 고문실로 끌고 갔다. 상체만 벗으라고 하여 긴 걸상 위에 하늘을 향하고 반듯이 누우라 하더니, 포승으로 다리를 상에 옭아매고 두 손을 밑으로 제치어 놓고, 김의수라는 부장놈이 배 위에 걸터타고 앉아서 수건인지 걸레로 입을 덮어 두 끝을 두 손으로 쥐어 동요 못하도록 누르더니, 구보다 놈은 ‘빠케쓰’에 물을 담아 가지고 와서 코 위로 남비 물을 줄줄 쏟아 붓는다. 잇대어 붓고 있으니 그 동안 숨을 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물이 숨쉬는 바람에 한없이 폐로 들어가게 되어 생리적으로 숨통을 막고 위로 삼키게 된다. 그리하여 숨은 막히어 질식되고 배는 점점 부르게 된다. 그 고통이란 체험하지 못한 이는 상상하지 못할 노릇이다. 고통이 지나치어 기절하게 된다. 이 때에는 물붓기를 중지하고 의식이 깨어남을 기다리어 목적을 바로 대라는 것이다. 이 때의 심정은 자포자기가 되어 ‘억울하게 10년 징역은 당할지언정 이 고통은 못 견디겠다’고 ‘마음대로 하라’고 하게 된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목을 졸라매어 목이 부어 음식을 삼키기 어렵게 되어 1주일 동안 마음 대로 먹지 못하게 되었던 일도 있고, 뺨을 어찌도 몹시 치는지 귀가 먹먹하게 되어 한편 귀는 듣지 못하게 된 일도 있고,……(전집 7:353-4).
  이리하여 선생은 한 쪽 귀가 먹게 된 것이다. 이 고통, 이 억울함은 정말 당해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실감할 수 없는 일이다.
  옥살이 한 해 두 달 뒤에 비록 보석은 되었으나, 예심 일심 이심 삼심을 거치는 5년 동안 배화에서 물러나서 실직하게 되었는데, 그때 선생은 여러 자녀를 거느리고 있었으니, 그동안의 고초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배화를 물러나 온 지 5년이 지난 1942년 4월에 ‘성신가정여학교’ 교사로 취임하여 생활의 방도가 생겨서 한시름 놓게 되었으나, 하늘은 무심하여 그 해 10월 1일에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또 다시 검거 투옥되기에 이르렀다.


6. 조선어 학회와의 인연
- 조선어 학회 사건 -

  선생은 어린 시절에 상동에 있는 청년학원에 들어가서 주시경 선생의, 나라 사랑의 정신과 그 학문을 이어받았다. 그리하여 한평생의 나아갈 길을 결정하기에 이른 것이니, 연희 전문학교 재학 시절인 1921년 12월 3일에는 ‘조선어 학회’의 전신인 ‘조선어 연구회’의 창립 회원이 되었다(‘조선어 연구회’는 1931년 1월 10일에 그 이름을 ‘조선어 학회’로 고쳤다.).
  그 뒤 일본 유학으로부터 돌아온 1929년부터 1942년 사이는 조선어 학회가 가장 힘찬 일들을 한 시기여서 선생은 이 학회의 일에 중심적인 구실을 맡게 되었다.
  조선어 학회(지금의 ‘한글 학회’)에서는 우리말을 적는 방법을 통일하기 위하여 1930년 12월의 총회에서 맞춤법을 제정하기로 하고, 그 위원 12사람을 뽑았는데, 선생은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2년 동안 초안을 만들어 토의를 거듭한 결과 1932년 12월에 원안이 끝나게 되었고, 수정 위원이 수정을 하고, 정리 위원이 정리를 하여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으로 발표하기에 이른 것인데, 선생은 수정 위원과 정리 위원을 계속 맡았던 것이다(전집 5:8-9).
  20세기 초기까지 우리나라에는 우리말의 뜻을 우리말로 풀이한 사전이 없었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말을 배우기 위하여 만든 사전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을 민족적인 부끄러움으로 여겨 우리말의 말모이(사전)를 만들기로 한 것은 1910년경의 일이다. 이 사업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다가 결국 조선어 학회가 맡게 되었는데, 이 일을 하는 데는 몇 가지 미리 정해 두어야 할 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하나는 맞춤법을 일정히 해야 할 일, 다른 하나는 표준말을 사정해 두어야 할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들온말의 적기 체계를 정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하여 1933년에는 맞춤법의 통일을 위한 ‘안’을 내놓은 것이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내놓은 조선어 학회에서는 표준말 사정의 재료 초안을 만들고, 제일 독회를 1935년 1월에 온양에서 열었고, 이어 제삼 독회까지 열었는데 선생은 처음에서 끝까지 그 위원이었고, 또 독회가 열릴 때마다 수정 위원을 두었는데, 선생은 수정 위원으로도 일을 맡게 되었으니, 이 일에 선생의 공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 1936년 한글날에 발표되었다. 이어 조선어 학회에서는 외래어 적는 법을 일정하게 하는 작업을 끝내었다.
  이러한 일들을 하면서 사전 편찬 작업도 계속하여 1942년에는 조판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 경찰은 이 학회가 단순한 말과 글의 연구 모임에 그치지 않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2년 10월 1일에 학회에 관여한 사람들의 일제 검거가 시작된 것이다.
  선생은 제일차 검거 때에 잡혀갔는데, 그때 같이 잡힌 분들은 모두 학회의 중진들이었다.
  그때도 동우회 사건 때와 같이,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 고문의 목적은 조선 독립을 위한 일이었다는 것을 자백받기 위한 것으로서, 그 자백을 받기만 하면 중형에 처할 작정이었던 것임은 물론이다.
  고문의 방식도 매우 다양하여, 사람을 죽이지 않고 고통을 줄 수 있는 모든 야만적인 방법이 발명된 것이다. “물먹이기, 공중에 달고 치기, 메어치기, 장작불로 지지기, 뺨치기, 몽둥이로 치기, 개처럼 사지로 서게 하기, 먹으로 얼굴에 악마 그리기, 동지끼리 서로 치게 하기, 여러 놈이 뭇매질 하기……”
  이때 여러 번에 걸쳐 잡혀가거나 증인으로 불려 간 사람은 50명에 이르렀다.
  선생은 1943년 9월 18일에 기소 유예로 풀려났으나, 선생의 어머님은 선생이 풀려나오는 것을 보지 못한 채 그 해 5월 15일에 이 세상을 떠나셨던 것이다. 선생은 감옥 안에서 어머니의 별세를 모르고서 풀려나오게 된 것이다. 그때의 선생의 심정을 우리는 다음 글로써 짐작이라도 할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나에 대한 사랑은 어릴 때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변함이 없는 사랑이었다. 나는 불효스럽게도 전후 두 번이나 왜경의 최후 발악에 걸리어 옥에 갇힘으로 말미암아,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는 듯한 아픔을 끼치어 드리게 된 일이 있다. 첫번은 종로 경찰서를 거치어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간 ‘동우회’ 사건으로 인한 감옥살이(1937년 6월 7일~다음해 7월 2일)요, 두 번째는 함경남도 홍원 경찰서를 거치어 함흥 감옥으로 넘어간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인한 감옥살이(1942년 10월 1일~다음해 9월 18일)가 그것이다. …….
그러나 와신상담하듯이 일본 사람을 원망하면서, 하루 속히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느님게 기도하였으나, 내가 옥에서 놓이어 나오기 전인 1943년 5월 15일에 그처럼 그리워하던 아들을 만나지 못하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나라로 가시고 말았다(74세). 가슴이 미어질 이 슬픈 소식을 집에서는 홍원 경찰서로 전하였다고 하나, 웬 일인지 경찰은 나에게 이 슬픈 소식조차 전하여 주지 않았다. 이렇게 되어, 임종은 고사하고,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집에 와서야(9월 18일) 알게 되었다……
이렇듯 사랑하여 주시던 나의 존경하는 어머니를 임종도 못하고 여의게 된 것은 나의 일생을 통하여 잊지 못할 철천의 한이다(전집 6:106-8).

7. 해방! 해방!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본의 그 악독한 쇠사슬에서 풀려났다. 온 겨레는 그 기쁨을 참을 수 없어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그 기쁨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달랐다. 일제에 의해 고초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그 기쁨은 그만큼 컸었고, 일본의 덕을 받고 산 사람의 기쁨은 그만큼 작았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슬펐을지도 모른다. 속으로 눈물을 머금은 놈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해방 뒤 선생은 6‧25의 단 한 번의 고초를 당한 이외에는 돌아가시던 1969년까지 특별한 어려운 일 없이, 광복된 우리나라 민족 교육과 민주주의 발달에 큰 이바지를 하면서 24년 동안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여기 그 공적을 다 적을 수가 없으매, 다만 24년 동안의 해적이를 들어 둠에 그치려 한다.
45년 8월: 조선어 학회 상무 이사가 되어 국어 부흥 강습회 강사로 활동
45년 9월: 연희 전문학교 접수 위원이 되고, 이사직을 겸함
45년 10월: 연희 전문학교 교수로 임명됨
45년 11월: 연희 대학교 문과대 학장으로 임명됨
47년 9월~
48년 9월:
연희 대학교 총장 대리 맡음
49년 10월: “조선문자 급 어학사”가 4대 명저의 하나로 뽑히어 표창을 받음
50년 5월: 연희 대학교 총장 대리가 됨
52년 2월: 국사 편찬 위원회 위원이 됨
53년 4월~
60년 3월:
연희 대학교 대학원장이 됨
54년 4월: 연희 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음
55년 7월: 학술원 회원이 됨
60년 8월: 학술원 종신 회원이 됨
62년 2월: 연세 대학교에서 정년 퇴직함
63년 3월: 한양 대학교 교수가 됨
63년 8월: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음
64년 1월: 한양 대학교 문리과대 학장이 됨
64년 4월: 전국 국어-국문학 교수단 이사장이 됨
69년 2월 3일: 대학 교수 울산 공업 단지 시찰단의 일원으로 시찰 도중 심장병을 일으켜 부산 제일 병원에서 눈감으시다.
  ‘전집’이라 함은 연세 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한결 김윤경 전집’(모두 7권)을 가리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