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산책】

상호(商號) 조사의 뒤안

任洪彬 / 서울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혹시 ‘까슈’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무슨 운동화 가게 같은 데 붙어 있었는데요.”
  간판 상호의 언어를 도저히 알 수 없어 답답하게 되면, 낯익은 사람 누구에게나 염치없이 묻던 말이다. 밖으로 잘 나다니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되는지 몰라도, 그때(1993년)까지만 해도 ‘까슈’는 우리 눈이나 귀에 익은 이름이 아니었다. 주위에는 그런 이름을 처음으로 듣는다는 사람도 있었고, ‘아하’하고 생각이 난다는 표정을 지은 사람도 있었다. 불행하게도 내 눈에 처음 뜨인 것은 “까슈”라고 한글로 까맣게 쓴, 다소 시골풍의 간판이었다. 우유빛 아크릴 둘레를 가진, 옥색 네모 바탕에 “Ka∫u”라고 가늘고 세련된 글씨로 쓴 간판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꽤 나중의 일이다(a에는 악센트까지 붙어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를 사족으로 달았을 리 없다.
  “설마, 운동화를 신고 공과 같은 것을 까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
  이러다가 주위 사람에게 불호령을 맞기도 하였다.
  “그런 식으로 간판의 언어를 다루면 안 되죠. 발 밑에 운동화를 깔라는 뜻일 가능성이 많아요.”
  ‘까슈’를 ‘까다’에 기초하여 그 뜻을 해석하든 ‘깔다’에 기초하여 그 뜻을 해석하든, 그것은 모두 우리말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방법 자체로는, 앞의 것이나 뒤의 것이 차이가 없다. ‘공’과 같은 것을 깐다는 해석이 특별히 뒤의 방법과 달리 여러 사람에서 무안을 당해야 할 만큼 세련되지 못한 것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공과 같은 것을 차는 것을 ‘까다’라고 하는 것은 다소 상스러운 말이고, 발 밑에 어떤 넓이를 가진 물체를 두는 것을 ‘깔다’라고 하는 것은 그런 말이 아니라는 차이가 있기는 있다.
  그 불호령에 의하여 촉발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간판 상호 조사라는 것이 가만히 앉아서 공상만 해 가지고 해결될 일이 아니란 것이 차츰 분명하여졌다. 도대체 모르는 말이 너무나 많았다. 별다른 의식 없이 대할 때에는 다 아는 것 같은 말도, 정작 그 말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면 그것은 순간 모르는 말로 변모해 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당면한 일과 비교하면, 한가하게 한두 개 상호의 뜻을 묻고 하던 때가 오히려 행복한 시기였다고도 할 수 있다. 거대한 문제의 덩치 앞에서 기웃기웃하던 모습이다.
  어떻게 해서든 간판 상호를 본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주어진 과제는 ‘말’이다. 능력도 그것밖에는 없다. 그런데 그 언어 문제가 때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미궁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모르는 말은 직접 상점이나 점포에 가서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계절 이른 썰렁한 바람이 눈을 시리게 하고, 때로는 초겨울의 차가운 비가 치적치적하는 번화한 거리에, 가게 주인이 질겁을 하는 손님이 아닌 손님이 된 것은 이러한 배경에 의한다.
  “Ka∫u”라는 간판을 가진 가게가 비단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며, 지역마다 같은 이름의 가게가 있고, 한 지역에도 같은 이름의 가게가 몇 씩이나 있으며, 다루는 품목이 단지 운동화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러한 환영받지 못하는 방문과 배회의 결과이다. 이번에는 여성 의류를 취급하는 “Ka∫u” 가게에 발을 들여놓고 다소라도 친절을 베풀어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표정의 점원에게 묻는다.
  “저, ‘Ka∫u’라는 말이 무슨 뜻이죠? ”
  이에 대한 반응은 다음의 둘로 요약된다.
  “몰라요.”
  “왜 그러시지요? ”
  이 경우 ‘왜 그러느냐’고 되물은 사람은 이른바 무슨 ‘조사(調査)’라는 것에 대하여 망상에 가까운 피해 의식을 가진 사람이다. ‘간판에 적힌 말을 조사하고 있다’고 하여도 안심을 하지 못한다. 간판에 대해서 약점이 많은가 보다. 그냥 학교에서 조사를 하는 것이니까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도 좀처럼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말을 묻는 태도가 부드럽지 않았다면, 막무가내로 간판에는 잘못이 아무것도 없다느니 요즘은 다 이렇게 한다느니 하고 핑계의 말만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일단 의심이 풀리면 매우 자상한 대답을 해주기도 한다.
  한편 ‘모른다’고 대답을 한 사람으로 정말로 이 말의 뜻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성 의류와는 전혀 아무런 관련도 없는 듯이 보이는 사람이 노트 쪼가리와 볼펜을 들고 가게 이름의 뜻을 묻는 상황이라면 귀찮아서 ‘모른다’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친절히 대답해 주고 싶어도 가게 일이 너무 바빠서 ‘모른다’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Ka∫u’의 뜻을 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런 일은 ‘Ka∫u’라는 이름의 가게를 서너 번 쯤 들렸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어떤 고급 여성 의류점에 들렸을 때였다. 내가 묻는 것을, 좀 떨어진 위치에서 곁귀로 들은 점원이 나에게 가까이 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에는, 사람이 아는 것과 그것을 묻는 사람에게 알려 주려고 하는 사람의 심리 사이에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하여 거의 신비로운 느낌을 가지게 되기도 하였다.
  “무슨 염료 이름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황갈색의..... .”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그 답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힘이 이 말을 믿게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여점원의 태도일까? 전혀 어설픔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말투가 의심을 품을 수 없게 하였다. ‘꺄슈’와 ‘염료’와의 사이에는 의미 연결의 단단함과 같은 것이 얽혀 있는 것 같이도 느껴졌다. 염료와 의류와의 관계는, 불어 사전을 뒤져 어설프게 찾아낸 cache[ka](감추는 곳, 숨는 곳)와의 관계보다는 훨씬 더 밀접한 것으로 판단되는 것이 었다.
  남은 문제는 이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불어 사전에서 cachou[kaʃu](아선약[阿仙藥], 황갈색의)라는 단어를 찾아낸 것은 집에 와서이며, 그 뒤 우연한 기회에 다시 좀 큰 영어사전에서 그것이 말레이 어에서 기원하는 말로, 프랑스 어에 정착된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선약(阿仙藥)’은 아직도 필자에게는 낯선 말이다.
  나의 첫 번째 잘못은 ‘Ka∫u’라고 적힌 것을‘Ka∫’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 최초의 헛걸음은 방황의 시간만을 길게 했을 뿐이다. ‘Ka∫u’는 분명히 발음 부호를 적은 것인데, 해당 단어를 찾으면서 왜 그것을 곧이곧대로 발음 부호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일까?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ixi:z(exceeds)’나 ‘e.z.up’과 같은 예들이 비록 발음 부호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다른 길로 돌아가지 않으며, ‘Ka∫u’에서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Ka∫u’에 대해서 이러한 접근이 어려웠던 것은 그 의미와의 연결이 그렇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ixi:z’나‘e.z.up’은 발음 부호적인 표기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다른 길로 들어갈 까닭이 없다.
  위와 같은 헛걸음의 근원이 간판 상호의 언어를 얕잡아 본 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기로 한다. 상호 가운데는 외국 철자가 잘못 적힌 것도 있고, 외래어 표기법에 어긋나는 예도 적지 않아, 탐탁지 않은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경우에나 상호는 엄연히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자기 표현을 위해서 내건 구호의 성격을 가진다. 그 근원을 고의적으로 어설픈 것에서 찾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을 소홀히 취급한다는 것은 실제로 당면한 작업의 성격에 비추어 보아서도 생각없는 일이다.


2

  Misope도 사람을 괴롭힌 상호였다. 이전에 이 문제를 다룬 한 조사 결과 보고서에는 Misope를 “뜻 미상”의 상호로 적고 있다. 아무래도 그 뜻을 모른 채 그냥 넘어가기에는 마음 한 구석이 편안치 않다. 문제를 조금 쉽게 생각한다면, 그 뜻을 모드는 대로 그냥 넘어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논리적으로, 아무리 부지런히 조사를 한다고 해 보아야, 모든 간판의 언어를 그 연원까지 확실히 조사할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또 대부분의 경우 점원이나 점주가 하는 말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제약 속에서 조사가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조사 결과에 전혀 오류가 없기를 바라기는 어려운 일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어떤 한두 개 상호의 의미를 더 추구한다고 하여 조사 자체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조사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스스로 깎는 결과밖에 안 된다.
  모르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면서 왜 Misope에 연연하는가? Misope를 가진 가게가 단 하나뿐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Misope점은 꽤 여럿이 있었다. 그것을 모르는 채로 지나치는 것은, 가령, 점포 주인이 아무런 뜻도 없는 소리라고 하는 Mipel를 모르는 채로 지나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또 주인이 틀림없이 사전에 있는 말이라고 하면서 사전을 가지고 와서 필자 앞에서 사전을 펼쳐 가면서 찾기 시작한, 그러나 끝내 사전 속에서는 그 말을 찾지 못한 Ingels라는 상호를 결국은 모르는 채로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Mipel이나 Ingels는 단 일 회적인 것이지만, Misope는 무슨 체인점인지 여러 가게가 같은 이름을 쓰고 있었다. 또 그것은 이전 조사자들이 알 수 없는 말로 젖혀 놓은 것이므로, 이번에는 그 뜻을 알아야 한다는 사명감과 같은 것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아주 부드럽게 열리게 된 문을, 실례가 되지 않도록, 아무쪼록 주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도록 살며시 열고 고개만 안으로 들여놓은 채 묻는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Misope가 무슨 뜻이죠? ”
  실내 한 가운데서 가구 위치를 바꾸던 젊은 점원 비슷한 사람이 대답한다.
  “우리도 그 뜻을 좀 알았으면 합니다. ”
  거절을 하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에게는 이 대답이 절대로 거절을 위한 담화 책략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 뜻을 알고 있으면, 그것을 말해 주는 편이 더 쉽고 간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C.C.Club’이 무슨 뜻이냐는 질문에 ‘Contemporary Concept’라고만 간단히 대답한 점원 아가씨의 표정에 서린 야무짐과 같은 것이었다. EnC에서도 Easy and Chic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고, 점원 아가씨는 그 이상 더 말해 줄 것도 없었고 더 말해 줄 필요도 없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만 하면 되었다. ‘웅가로’에서는 이탈리아 디자이너를 자세하게 소개한 광고물을 건네주었고, Roem에서도 수선화 요정에 관한 전단을 건네주었다. ys’b에서는 묻자마자 ‘yes beatiful’이라고 대답을 하는 바람에 질문을 한 사람이 오히려 한동안 어리둥절한 지경이었다. ‘레스모아’에서는 깔끔하게 생긴 남자 점원이 ‘가격은 더 낮게, 품질은 더 높게’와 같이만 대답하였다. 더 이상의 군더더기가 필요 없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에벤에셀’에서는 자신 있게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라는 대답을 주었다(가까운 사람이 신학을 하는 사람에게 다시 확인해 본 결과는 본래 ‘도움의 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 알면서도 발뺌을 하는 것보다는 그 뜻을 말해 주는 편이 훨씬 더 편하다고 할 수 있다.
  Misope에 대하여 한 가게에서 들은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숲 속의 공간…….”
  홀깃 나를 보고 아주 짤막하게 대답한 말이다. 점원이 한 순간 나를 “홀깃”한 것은 더 이상 자신에게 질문을 하지 말라는 암시였다. 나는 어느 나라 말인지 묻고 싶어 입 속으로 무엇이라고 중얼거렸으나,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나라 말……? ”
  Misope에 대하여 ‘숲 속의 공간’이란 대답을 들은 것만도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완전 무지의 상태에서 한 줄기 빛을 본 것에 비견될 만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Misope가 ‘숲 속의 공간’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는가?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아무리 궁리를 해 보아도 그 관계가 풀리지 않았다. 이 무렵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고민거리 상호들에 대하여 이것저것 많은 것을 묻곤 하였는데, Misope도 그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번에는 단순히 Misope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를 묻는 형식이 아니었다. Misope의 뜻이 ‘숲 속의 공간’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그러한 뜻이 나오게 되는지를 알 수 있느냐를 묻는 방식이 되었는데, 이전의 상태보다는 그래도 나아진 것이었다. 그러나 Misope와 ‘숲 속의 공간’과는 좀처럼 ‘아, 그렇구나! 하는 관계가 맺어지지 않았다.
  상당한 기간 동안 이러한 상태는 계속되었다. 마음에 쏙 드는 해석을 제시하는 사람도 없었고, 더 나은 뜻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더 좋은 답을 얻는 것을 거의 포기할 단계에 이를 즈음에, 우연히 또 다른 Misope 점이 눈에 띄었다. 넓은 홀에는 젊은 여주인이 혼자 앉아 있었다.
  “도대체 Misope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질문은 거의 신경질적이 되었다. 말투에는 자연 이런 뜻도 알 수 없는 이름을 쓰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느낌이 스며 있었다. 그러면서도 탐탁한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냥 한번 물어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느끼기에도 대답하고 싶으면 대답을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두라고 하는 투였다.
  “그건 ‘아름다운 숲에’라는 말을 변형한 거예요.”
  나는 문간에 엉거주춤한 상태로 서서 한 짝 문을 안으로 들여민 상태였고, 주인은 홀 중앙에 앉아서 벽을 향하여 말을 했기 때문에 그 목소리가 똑똑하게 들렸다고 할 수는 없으나,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것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거짓이나 불완전한 지식일 수 없었다. 여주인이 ‘변형’이라는 술어를 쓴 것도 이미 범상한 일은 아니다. Misope는 ‘미(美)+숲에’라는 말에 연원을 둔 것으로 다시 근사한 외국어 형태로 변형된 것이었다.


3

  ‘까슈’의 예는 상호의 뜻에 대한 공상이 얼마나 어림없는 일인가를 말해 준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실제의 조사에 의하여 확증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니커’에서는 이와 반대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음상은 분명히 ‘많이 커’라는 우리말과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추측이 섣부른 공상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가까이 있는 사람의 도움으로 ‘마니커’ 회사에 전화를 걸어 본 결과, ‘마니커’는 우리말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우리가 개발한, 많이 크는 닭의 품종 하나를 쉬운 우리말로 그렇게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결국은 단순한 추측으로도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었음이 밝혀진 셈이다. 여기서는 그것을 확증하였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투다리’의 경우는 점주를 잘못 만나 고생을 한 예에 속한다. 애초 술을 마실 생각은 아예 없이 단지 술집 이름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술집에 들여가 주인에게 가게 이름에 대하여 질문을 한다는 것이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였다. 간판에는 악수하는 듯한 두 손이 그려져 있기도 하고, ‘구운 새’를 뜻하는 한자가 쓰여져 있기도 하고, 점포 앞에는 붉은색의 둥근 등이 걸려 있기도 하다. 나는 언제나 했던 것과 같이 묻는다.
  “‘투다리’가 무슨 뜻입니까? ”
  “합성어야요. ”
  30대 남자의, 뜻밖의 시원스런 대답이었다.
  “그런데, 무슨 말과 무슨 말의 합성어죠?”
  “영어하고 무슨 다른 말이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 뜻을 알아 주실 수 없습니까?”
  “그러죠.”
  대답은 이렇게 시원스러운 것이었으나, 그의 입을 통하여 나는 ‘투다리’의 뜻을 들을 수 없었다. 2주일이 지나는 동안 두 번 정도를 그 집에 더 들렸으나, 그는 ‘아직 알아 놓지 못했다’는 대답을 되풀이했을 뿐이다. 술 값을 들이지 않은 보복인가? 그렇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단순히 그는 그 말의 뜻을 모르는 것이었다.
  신촌의 어느 ‘투다리집’의 아주머니는 바쁜 일손을 놀리면서도 두 손을 내밀어 보이면서 그것이 영어의 two와 한국어의 ‘다리’가 합해진 말임을 분명히 하였다. 아주머니의 눈에는 ‘이런 답답한 사람 보았나! ’하는 표정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더러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그 연원을 확인하게 된 것도 있다.
  “혹시‘코오롱’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
  “아직 그것도 몰라요? ‘코리아 나일롬’……?”
  세상 돌아가는 일에 어둡다는 것이 결코 자랑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일에 대한 무지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질문을 삼갔다면, 아마 아직도 ‘코오롱’의 연원은 알지 못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나는 ‘코리아 나일론’이라는 말을 듣고서도 한참 동안이나 영문을 몰라하였다. 옆 사람이 Korea의 Ko와 Nylon의 lon을 합하여 Kolon이 된 것이라고 설명을 해 준 뒤에야 ‘아하’하고 깨닫게 된 것이다. 절단 합성의 방법론이 동원된 예의 하나이다. 이것이 한글로 ‘코오롱’으로 적히게 된 것은 ‘나일론’의 발음이 ‘나이롱’과 같이 발음되고 또 적히던 때의 표기 방식을 반영한 것이다.
  ‘코오롱’에 대한 이만 한 정도의 지식을 상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전문적인 지식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분명히 일반적인 지식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Kores Nylon사가 Kolon사가 되는 과정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이것은 특별한 지식일 수 없다. 그러나 한때는 그랬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렇지 않게 된다. 당시 사정을 아는 사람의 수효가 적어지면, 그 연원은 기억에서 멀어지게 되고, 나중에는 기억을 더듬을 수조차 없게 된다. 때로는 회사의 관계자조차 다음과 같이 말하는 단계가 있게 된다.
  “그건 그냥 운동 용품의 이름입니다. ”
  이런 대답을 듣게 되면, 질문을 한 사람이 오히려 멋쩍어진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고등학교 동창한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혹시나 싶어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호(?)의 연원을 아는가 하고 물은 것이다. 혹시 그가 알고 있으면 좋은 일이고, 모르고 있어도 그만이다. 가까운 사이이니까, 다소 괴상한 질문을 한다고 하여 크게 흉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너 혹시 말야 TOTO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니? 변기 같은 데 써 있는데 혹시 본 일이 있어? ”
  “동양 토기(東洋土器)라고 하더라. ”
  아주 뜻밖에 고민거리 하나가 해결된 셈이다. 조금만 쭈삣쭈삣하고 나 혼자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끙끙거리고 있었다가는 아마도 미해결의 것으로 남겨 두고 말았을 것이었다.


4

  미진한 것도 많고, 잘못된 부분도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간판 상호 조사 연구를 아쉬운 대로 마무리하고 나니(내가 맡은 부분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무슨 큰 열병을 앓고 난 느낌이었다. 비록 짧은 동안이었으나 조사를 하면서 우리 문화의 현주소가 어디인가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고, 그동안의 국어 공부라는 것이 혹시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반성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간판 상호가 엄청나게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유행의 첨단을 가는 지역의 간판 상호를 보고 있으면, 온갖 외래어, 온갖 외국어의 전시장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좋은 의미로 보면, 우리가 그만큼 세계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으나, 나쁜 의미로 보면, 우리 시장의 외국 상품에 의한 시장화가 그만큼 광범하게 진행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 고유의 상품과 브랜드는 드물고, 외국 상품과 브랜드가 우리 시장을 뒤덮고 있다.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의 결핍 속에 간판 상호는 외국어의 모습을 띠어 가는 경향을 확연히 드러내기도 한다. ‘커즐리’가‘커피를 즐기는 마을’을 줄여 만든 것이라고 하나, 축어법이 전통적인 조어법과는 상당한 거리에 있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도달한 것은 영어 단어와 유사한 모습이다. 가죽을 다루는 ‘갗바치’를 변형한 ‘카파치’에 경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이탈리아 어 단어를 닮았다. 상품의 우수성, 유행의 첨단성, 형식의 세련성 등을 외래어나 외국어에 의하여 보증받으려는 심리적인 동기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할 것이다.
  간판 상호의 고유 명칭은 분명히 특이해야 하고, 다른 것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유성을 갖춘 것이어야 한다. 특이성과 고유성의 추구가 한편으로는 성서와 같은 데서 유서 깊은 이름을 찾게도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절단과 합성의 수법을 과감하게 적용하여 전혀 새로운 명칭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그 결과가 아무도 그 뜻을 알 수 없는 것이라면, 해득성의 측면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상호의 이상은 고유성 못지 않게 보편성을 갖춘 것이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보편성은 우선은 뜻을 가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만약 아직은 우리 상표의 개발이 안 되고 늦어지는 것이라면, 상호의 이름이라도 친절하게 간판 어디엔가 또는 전단의 형식으로 소개하는 일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