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결 김윤경 선생의 학문과 인간】

김윤경: 조선문자 급 어학사

김석득 / 연세 대학교 교수


1. 책의 판 수

  김윤경 (1894~1969) 지음인 “조선문자 급 어학사”는 1938년 1월 25일에 “조선 기념도서 출판관” 출판으로 그 초판이 발행된 이래 4판까지 나왔다. 재판은 1938년 2월 28일에, 3판은 1946년 9월 30일에 진학 출판협회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3판까지는 옛 지형을 그대로 썼으며, 다만 3판에서는 중요한 오착의 정오표를 만들고, 권말에는 새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의 전문을 부록으로 붙였다. 또한 원본 발견으로 훈민정음 반포 기념일도 9월 29일을 9월 상한으로 고치었다. 4판은 1954년 12월 25일 동국문화사 발행으로 나왔으며, 옛 지형을 그대로 쓰고 보충만 했다. 보충한 것은 아래와 같다.
(1) “훈민정음” 원본의 사진판과 그 한글 번역, 그 발전 경로
(2) 조선어 학회의 외래어 표기법의 제정과 그 내용 소개
(3) 왜정 말기의 조선어 학회 수난 사건의 소개
(4) “우리말 큰사전” 편찬의 경과와 중단
(5) 해방 뒤 한글 운동-국문, 국어의 부활과 한글 전용의 운동
  또한, 책의 이름 “조선문자 급 어학사”의 “조선”을 “한국”으로 고쳤다. 1963년 3월 15일 날짜로 “새로 지은 국어학사”가 을유문화사 발행으로 나왔다. 이는 앞 책의 내용을 좀 간추리고, 그 대신 현대의 연구 현황과 정책 및 운동 면을 대폭 더한 것이다.


2. 초판이 나오기까지의 과정

  지은이(김윤경: 이하 “지은이”로 통일)가 이 방면을 섭렵하고 저서를 내게 된 까닭은 우리 문자에 대하여 세계 학자도 놀라는 터에, 우리는 그 창제의 유래, 형편, 변천에 대한 저서가 없어 이를 아쉽게 생각한 데 있다고 했다. (초판 “서”에서)
  지은이는 상동에 있던 청년학원에서 1911년부터 주시경 선생에게서 한글 강의를 받고,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취미를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인상 깊은 감화를 받아 이 방면의 연구에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초판 “서”). 그리하여 그 방면의 최초의 논문으로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 재직 중에 “조선어연구의 기초(1917.1.17)를 내었고, 그 뒤 이를 보완하여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에 “우리 글의 예와 이제를 보아 바로잡을 것을 말함”(1922.1.9)을 내었다. 1926년에는 릿쿄대학 사학과에 적을 두었고, 1928년 9월 27일에 졸업 논문으로 탈고한 것이 “조선문자의 역사적 고찰”이요, 이것이 “조선문자 급 어학사”의 첫 번 원고이다.
  1931년 “동광” 편집인 주요한의 청으로, “동광” 잡지에 앞의 졸업 논문을 번역하여 연재하면서 (“동광” 휴간으로 18회에서 중단) 수정 보완한 것이 “조선문자의 역사적 고찰”이니, 이것이 두 번째의 원고이다.
  1934년 7월 4일부터 다시 개고하기 시작하되, 훈민정음 반포 이후의 훈민정음에 대한 연구 학설을 증보했다. 그리하여 1938년에 완료하여 “조선문자 급 어학사”라 했으니 이것이 세 번째의 원고이다.
  이 세 번째 원고가 이 책(조선문자 급 어학사: 이하 “이 책”으로 통일)의 초판으로 간행되었으며, 이는 1938년 1월 25일, 조선 기념 도서 출판관의 제1회 사업인 이인(李仁) 님의 양친 환력 기념 출판을 위하여, 이인 님이 낸 간행비로 간행된 것이다. 이 초판에 글을 준 이를 보면, “출판기”에 김성수, “서”에 조만식, 영문 “FOREWORD”(서문)에 언더우드(元杜尤, H.H. Underwood)이다.
  지은이는 출판 과정에서, “수양 동우회 사건”(1937년 5월에 출판 허가가 나서 인쇄에 붙였으나, 그해 6월 7일에 투옥)으로 투옥되는 바람에 본인이 한번도 교정을 못 보고 발간됨으로써 오착이 많이 난 점, 이러한 옛 지형이 고침 없이 그대로 3판, 4판까지 쓰인 점을 퍽 아쉽게 여겼다. 4판에서는, 특히 내용 수정, 가로 짜기, 한글로 고치기, 그리고 국어학설과 한글 운동 등을 보충하려 했으나 출판사 사정으로 고치지 못한 점, 또한 “한글 파동”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으나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아쉽게 생각하고 있는 점임을 밝혔다. 이와 같이 이 책은 지은이의 아쉬움이 많은 책이다. 그러나 이 아쉬움은 “새로 지은 국어학사”(1963. 3. 15. 을유문화사)에서 씻기었다고 하겠다.


3. 책의 체재와 벼리

  이 책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 4판까지 옛 지형을 그대로 썼다. 다만 3판에서는 새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의 전문을 부록으로 권말에 실었고, 4판에서는 그 원본을 사진판으로 전문 게재하였으며, 또한 보충 부분이 더하여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체재나 내용 소개는 4판을 중심으로 함이 바람직하다.
  이 책은 언더우드(H.H. Underwood, 당시 연희전문학교 교장) 박사의 영문 서문 “FOREWORD”(1937.2.1)1) 1쪽을 비롯하여 차례로, 지은이의 초판 “서”(1937.2.22) 3쪽, “3판을 내면서”(1945.12.11) 2쪽, “넷째판을 내면서”(1954.11.19) 2쪽, 그리고 이 책의 본문 1,015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에는 새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 사진판 66쪽, 그 번역 21쪽, 그리고 새로 보충된,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 “통일안 전문”, “사전 편찬의 진전”, “조선어 학회 수난 사건”, “해방 뒤의 한글 전용”, “국어 교사의 양성”, “한글전용 운동” 등 모두 78쪽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 맨 끝에는 3판부터 붙인 “정오표 27쪽이 더 붙어 있다.
  이 책의 벼리는 편, 장, 절 들로 되어 있다. 편의 상 편, 장만 적으면 아래와 같다.
제1편 서론
    제1장 의사 표시의 방법
    제2장 언어의 종류
    제3장 우랄‧알타이 어족의 특질
    제4장 조선어의 범위
    제5장 문자의 발생
    제6장 문자의 종류
제2편 본론2)
    제1장 훈민정음 창작 이전의 문자
    제2장 훈민정음

4. 국어학사의 서술 시각

  이 책을 일컬어 수많은 원 자료를 수록한 방대한 저서라고 말하는가 하면, 일제 때 4대 저서의 하나이요, 영원히 빛나는 대작이라고 한다. 모두 정곡을 맞춘 말들이다. 이에 여기서 더 붙이는 말을 한다면, 이 책은 우리나라 국어학계에서 “국어학사”의 효시가 된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은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체계화한 본격적인 국어학사의 첫 출현이요, 이후 오늘날까지의 많은 국어학사의 책들은 이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은 문자의 역사 및 문자에 대한 학설과 말본(문법)의 연구사를 함께 담고 있다. 또한 이러한 연구와 학설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을 함께 담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 책은 “국어학사”이다.
  생각하건대, 국어학사는 글쓴이(집필자)의 시각에 따라 몇 가지로 특징화될 수 있다.
  첫째, 어학사를 언어 연구 이론의 발전사적 시각에서 본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어학사와 언어 정책 등과는 분명히 금을 그음으로써 어학사는 연구의 사조적 흐름이나 발전사를 파악할 수 있도록 서술해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 어학사는 “언어 연구사”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국어학사는 언어 연구사가 된다.
  여기에서 대두되는 것은 국어 연구사로서의 국어학사의 출발 시점이다. 그것은 삼국 시대인가, 고려 시대인가, 18세기 실학 시대부터인가, 아니면 근대화 과정의 시작부터인가이다. 이 해답은 “연구”의 개념 규정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만일, “연구”의 개념을 순수한 학설적 이론의 차원에 둔다면, 그것은 “훈민정음해례”부터라는 해답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연구사를 사조적 흐름이나 이론의 발전사적 시각에서 볼 때, 잡다한 모든 연구 현황까지를 충실히 수집하여 이를 분석 소개할 것인가, 아니면 당시의 사조적 형성에 이바지하고 뒤에 영향을 준 연구 업적들을 선별적으로 선택하여 분석 소개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앞의 것은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낱낱의 연구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잘못하면 사적 흐름의 특성이 부각되지 않을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뒷 것은 그 선별 과정에서 주관성이 개재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는 반면에, 사조적 흐름이나 이론의 발전사를 부각시킬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객관적인 비판적 자리에서 가능한 이론적으로 가치 있는 자료를 골라, 이를 사조적으로 조명하는 일이 바람직하다. 세계의 어학사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측면에서 서술함을 본으로 한다3).   그러나 위와 같은 국어학사의 서술 방법은 우리나라의 경우, 자칫하면 국어 연구사에 도움이 되는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너무 소홀히 할 염려가 있다.
  둘째, 어학사를, 언어와 직접, 간접의 관계에 있는 모든 현상의 역사적 기술로 보는 시각이다.
  이는 흥미 있는 역사적 다양한 서술이 될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국어학사는 매우 방대한 연구 범위를 차지하게 된다. 여기에는 이론적 연구와 직접 관계가 없는 것도 포함되므로, 이러한 국어학사의 시발점은 필연적으로 우리말의 발생학적인 고대(古代)에 둘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것은 이른바 국어학사 외적인 서술도 포함되거나 “국어학 개론” 의 성격을 함께 띠게도 된다. 이것은 국어에 대한 역사적인 전모를 볼 수 있어 국어학을 연구하는 이나 그 밖의 일반인에게도 참고 자료가 되기도 한다.
  생각하건대,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진정한 국어학사는 언어의 이론의 발전사적 시각에서 엮어야 한다고 본다. 때에 따라서는 각 연구 분야, 곧 음운 연구는 “음운 연구사”로, 말본(문법) 연구는 “말본 연구사”로, …… 각각 엮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이러한 연구들에서도 우리나라 특유의 역사적 배경의 서술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된 연구 내용의 이해를 돕는데 필요한 것이지, 그 자체가 연구사와 혼동을 일으키게 되어서는 안 된다.
  “조선문자 급 어학사”는 대체로 위에서 말한 둘째의 시각에서 엮어진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국어학사의 시발점(비록 이 부분이 서론이라고는 하지만)이 고대로부터 시작하여, 국어와 관계되는 모든 기술을 함으로써 국어학 전반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이 책 전체로 보아 역사적 배경, 정책적, 운동사적 배경들은 연구사와 비교적 혼동됨이 없이 국어 연구의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4).


5. 내용 분석

  “조선문자 급 어학사”는 크게 제1편 “서론”과 제2편 “본론”으로 이루어졌다.
  제1편의 서론은 순수한 연구사적인 부분은 아니다. 그것은 연구사의 이해를 위하여 전 단계에서 필요로 하는 언어학과 국어학의 예비 지식이다. 곧 제1장 “의사 표시의 방법”, 제2장 “언어의 분류”에서는 일반 언어의 이해와 언어학자의 세계 언어의 계통적 분류와, 형태적 특질을 살핌으로써, 우리말은 계통적으로는 “우랄‧알타이 어족”에 붙일 것인가, 또 그중에도 “알타이 말”에 붙일 것인가, 또 그중에도 “퉁구스 말”에 붙일 것인가가 학자 간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말은 형태적으로는 “부착어”에 속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제3장 “우랄‧알타이 어족의 특질”에서는 그 특질로 홀소리 고룸, 닿소리 규칙, 첫소리 규칙, 끝소리 규칙, 월의 구성 등을 야쿠트 터키 말, 일본 말, 우리말 등을 비교하면서, 우리말은 우랄‧알타이 어족에 속함을 조심스럽게 결론 짓고 있다.
  이제까지 말한 것은 국어를 언어의 일반론과 말겨레(어족)론과 언어 특질의 시각에서 조명하면서 국어 실체 파악에 접근한 것이다.
  제4장 “조선어의 범위”에서는 우리말의 범위를 구체적인 자료의 전거를 들어 설정했다. 곧 우리말의 범위에 대해서, “삼국유사”, “동사강목”, “문헌비고”, “동국통감”, “위지”, “후한서”, “양서”, “구당서”, “신당서” 등의 문헌의 전거를 통하여 우리말의 범위를 “단국 조선”, “부여”, “한족 지배의 조선”, “예”, “옥저”, “진한”, “마한”, “변한”, “신라”,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 “탐라” 등으로 잡았다. 이는 앞에서 말한 일반 언어에서 말겨레의 인식으로, 다시 가까이 국어의 인식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연구사 기술의 한 접근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말 연구사는 우리말의 구조나 말의 본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우리 문자에 대한 연구 역사를 포함한다. 따라서 말에 대한 것뿐 아니라 문자의 문제, 곧 문자의 발생이나 종류들에 대한 관심은 연구사의 예비적 서술로서 불가피하다. 더구나 문자는 음운과 깊은 관계를 가지며, 실제로 우리나라 15세기 문자 창제 이후 조선조 말기에 이르는 연구 역사는 문자음운(graphemes)론이나 운학에 일관하다시피 했다.
  “조선문자 급 어학사”에서는 제1편의 제5장에 “문자의 발생”, 제6장에서는 ‘문자의 종류“를 다루었다. ”문자의 발생에서는 인류 문화 발달에 불가피한 요구로 발생되는 문자 이전의 원시적 기호 혹은 그림이 있었음을 말하고, 기호나 그림으로부터 문자가 발생함을 말했다. “문자의 종류”에서는 이러한 원시적 기호나 그림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자의 여러 종류와 그 발달 과정을 기술하면서, 한글이나 유럽의 알파벳 등의 단음 문자가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고 결론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 글자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를 묻고, 이 해답은 제2편 “본론”에서 하고 있다.
  제2편 “본론”은 크게 제1장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문자”, 제2장 “훈민정음”으로 나누어진다. 여기에서 좀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은 이 방대한 본론이 다만 2개의 장으로만 분류되어 있다는 점과, 또한 제2장의 “훈민정음”에서, 근대 이후의 문전, 문법에 관한 연구를 모두 다룬 점이다.
  본론 제1장 “창제 이전의 문자”는 제1절 “전하지 못한 문자”와, 제2절 “금일까지 전한 문자”로 나누었다. 제1절 전하지 못한 문자에는 여러 가지 전거, 곧 “포박자”(抱朴子), “문헌비고”, “대동운옥”(大東韻玉), “삼국유사”, “세종실록”, “평양지”, “유문화보”(柳文化譜), “양서”, “삼국사기”, “균여대사의 전”, “구당서”, “고려사” 등의 전거를 통하여, “삼황내문”, “신지비사문”, “왕문문”, “각목문”, “고구려 문자”, “백제 문자”, “향찰”, “발해 문자”, “고려 문자” 등이 있음을 밝혔다. “향찰”은 “균여전”의 기사 “범서를 연포한 것과 같은 ”(鄕札似梵書連布) 것으로, 이는 신라의 고유 문자일 것이며, 그것은 한자를 빌어 쓴 “이두”와는 다르므로 이 둘을 혼동하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위에 든 균여전의 기사라든가, 평양지의 “평양 법수교에는 옛 비문이 있는데, 이는 언자도 범자도, 전자도 아니어서 깨칠 수가 없다.”(平壤法首橋有古碑, 非諺, 非梵, 非篆, 人莫能曉)라든가, 남해도의 바위에 새긴 글자(전서와는 판이한) 등으로 볼 때, 확실히 조선 고대의 고유 문자가 있었다고 단언했다.
  금일까지 전한 문자에는 “이두”와 “구결”이 있다 하고 그 내용을 소상히 밝혔다.
  본론 제2장 “훈민정음”에서는, 명칭(제1절), 제정의 이유(제2절), 제정의 고심(제3절)에 대하여 배경과 역사를 서술했다. 그리고 “훈민정음의 본문”(제4절)에서는, 세종실록(28년 9월 조)에 있는 훈민정음 본문과 정인지 서문을 싣고 있으나, 훈민정음 원본이 발견된 (1940)후 3판(1946)에는 책 맨 뒤쪽에 부록으로 “훈민정음” 원본 전문을 추가했다. 그리고 4판(1954)에는, 본론 2장 4절 “훈민정음 본문” 쪽에, 3판까지 있었던 세종실록 훈민정음 본문과 정인지 서문을 빼고 그 자리에 새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을 사진판으로 전문 게재하고, 그 해석을 붙였다(따라서 3판 뒤에 부록으로 붙인 훈민정음은 모두 삭제됨). 그리고 지은이는 그 원본이 발견된 경위를 상세히 기술하고(여기에서는 낙장된 원본의 첫머리 두 장이 실록본을 써 베낀 것임을 밝히고, 이 과정에서 “便於日用耳”의 “耳”가 “矣”로 잘못 쓰여짐을 밝힘), 그 원본 발견이 학계에 알려 준 지식의 요점을 적고 있다.
  “훈민정음의 성질과 가치”(제5절)에서는 지은이가 훈민정음의 조직을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그 성질과 가치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결점도 지적했으니, 가로적기와 세로적기를 뒤섞어 쓰게 마련한 점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문의 영향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는 내외 고금 학자들, 곧 정인지, 신경준, 유희, 이규경, 성현, 홍양호, 주시경, 권덕규, 이윤재, 최현배, 신명균, 휴‧밀러, 포울‧몬로 교수 등의 훈민정음에 대한 찬미의 평설을 소개했다.


6. 연구사의 초기 단계
- 한글의 기원설 -

  이 책에서 연구사는 본론 제2장 제6절 “계통적, 상징적, 기원 제설”5) 부터라 하겠다. 곧 훈민정음의 근원설은 학설의 시초라 하겠다. 여기 학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근본 동기에 대하여, 지은이는 세종실록 28년 9월 조에 있는 정인지 자신이 쓴 “정음의 지음은 조술한 바가 없고 자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다.”(正音之作, 無所祖述而成於自然)와, 균여전의 기사 “범서를 연포한 것과 같다”(似梵書連布)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어느 한 가지만 본받은 것이 아니라는 데서, 각 학자들의 일가견의 기원설을 주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6).   지은이는 여러 기원설에 대하여 계통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으로 나누어 소개 비판하고, 끝으로 자기 단안을 내리고 있다. 소개된 기원설은 다음과 같다.
  계동적 기원설에서,
  고전 기원설: 이는 정인지 서문 중의 “자방고전”(字倣古篆)에 근거를 둔다. 최석정, 이덕무, 게일 박사 등의 주장이나, 가장 유력한 구체적 고증을 보인 이는 게일(“조선 문자”란 논문) 박사이다.
  범자 기원설: 이는 성현, 권상노, 황윤석 등이며 역사적 고증보다 자형의 구조상 또는 배열상의 유사성을 본 주장이라고 평했다.
  몽고전 기원설: 이 주장은 이익, 유희로 대표된다.
  범자와 몽고자의 기원설: 이 주장은 이능화로 대표되며, 훈민정음이 “몽고운회”에 의지하여 만들었고, 몽고자는 범자에 의지하여 만들어졌으니, 우리글의 기원이 범자와 몽고자에 있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소개하면서, 그 확증 없음을 비판했다.
  그 밖의 계통적 기원설에 속하는 “설총 창작설”(전병훈)이나 “요의 창작설”(박은식), “일본 신대문자 기원설”을 소개하면서 그 근거 없음을 비판했다.
  상징적 기원설에서,
  상형 기원설: 이는 다른 문자나 물건 모양에 의지한 것이 아니고, 단순히 사람의 발음기관(아, 설, 순, 치, 후)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는 설이며, 그 주장자는, 신경준, 홍양호, 강위 등이라고 소개했다. 여기에서는 아무런 비판이 없다.
  악리 기원설: 이는 박성원으로 대표되며, 자형이 악리의 7음계(궁, 상, 각, 치, 우, 변치, 변궁)에 상징하여 만들었다는 설임을 소개하면서, 이는 동양 역학의 공상이라고 비판했다. 이 밖에 상형설로 “이십팔수 기원설”(홍양호)을 말하면서 모호한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지은이는 “고대 문자 기원”을 주장했다. 그 근거로는, 첫째, 고대 문자가 있었다는 전거, 둘째, 신경준의 “훈민정음 운해서”에 “동방에는 옛날에 속에서 쓰는 글자가 있었다”(東方舊有俗用文字)라고 한 것, 셋째, 평양 법수교에 있는 옛 비문에 언자도 범자도 아닌 깨칠 수 없는 글자가 있는 것(앞에 인용됨)과, 균여전 기사에 범서를 연포한 것과 같은 향찰이 보이는 점(앞에 인용됨), 넷째, 행지(行智)가 “훈석언문해”(訓釋諺文解)에 “이 글에는 고금 두 개의 체가 있는 데, 고체는 삼국 초에 만들어져 전하는 것이며 금체는 이조 세종 때 고문을 고친 것이다.”(此文有古今二體, 古體則自三韓國初製傳, 今體則李朝世宗時 改削古文,……)라 한 점, 다섯째 최만리 상소 중 “언문은 다 옛 글자에 본을 둔 것이다”(諺文皆本古字)라고 한 점들을 들고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어떤 문자를 참고하여 만들었다 할지라도 세종의 창작 발명의 영광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음은, 과학상 예술상 허다한 발명가, 창작가들은 누구든지 앞사람 혹은 옆사람의 사색이나 고찰에 힘입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 까닭이라고 했다.
  훈민정음 원본 발견 이후, 그 기원은 발성기관 상형과 삼재(三才) 상형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렇다 하더라도 원본은 그 해례가 정인지 등의 하나의 학설일 수 있다는 것, 또한 정인지 서문 중 풀리지 않은 부분이 그대로 있음으로써, 발견 이후에도 이론 제기 없지 아니하다.


7. 연구사의 본격 단계
- 음운학 학설 -

  앞에서 본 “훈민정음 기원설”은 학설의 통시적 흐름이 아니라 고금 학자들의 소견을 소개 비판한 것이다.
  이 책에서 본격적인 연구사는 본론의 제7절 “발표 이래의 변천의 개요”부터이다. 이 대목은 필자가 볼 때 네 개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15세기의 세종 세조로부터 16세기 연산 조에 이르는 중세의 문자 정책과, 둘째, 16세기 최세진의 “훈몽자회” 범례로부터 20세기 초의 국문연구소 위원들의 연구 보고서에 이르는 중‧근세 동안의 운학 혹은 문자 음운학의 학설과, 셋째, 최광옥으로부터 주시경을 거쳐, 주시경의 후계학설 및 기타 학자들의 학설에 이르는 근‧현대의 말본(문전, 문법) 학설과, 넷째, 한글의 보급과 발전에 대한 기독교의 공헌으로부터 최근의 한글 운동에 이르는 근‧현대의 언어 정책 및 보급 운동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 제7절은 시대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음운 연구사, 말본 연구사, 그리고 언어 정책들이 각각 독립절로 분류 설정됨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이들을 모두 7절 안에서 29(항)에 걸쳐 기술했다.
  이제 이 책의 차례에 따라 이들을 살펴본다. 1항의 “세종의 실행 장려”에서는 훈민정음의 공문서 사용과, 정음 장려의 일책으로 조선 한자음의 의정을 위하여 신숙주 등으로 하여금 “동국정음”을 간행케 하고, “사성통고”를 편찬케 하였음을 소개했다. 한편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석보상절”을 편찬케 하고, “월인천강지곡”을 지었음을 소개하였으며, 이들은 정음으로 된 가장 오래된 문헌이요, 훈민정음 실행의 장려를 위한 주밀한 노력의 결정체라는 그 역사적 의미를 말했다.
  2항의 “세조 및 그 뒤 역대의 수행 장려”에서는, 세조 조에도 훈민정음을 비상히 존중함으로써, 정음을 과거 과목으로 넣고, 또한 정음으로 경전을 번역케 하였으니 그 역본으로 “법화경”, “원각경”, “금강경”, “능엄경”, “영가집”, “소학”, “지장경” 등이 있음을 소개했다. 또한 성종 조에서도 “두시언해”, “연주시격”, “황산곡시집”, “향약집성방” 등이 번역되었음을 밝혔다.
  이상은 세종으로부터 세조, 성종에 이르는 동안의 문자 정책이 훈민정음의 실행과 장려에 있었고, 그 구체적인 것이 한자음 정리와, 정음 문서 간행과, 경전 번역과 문학 작품, 기타의 언해 사업에 있었음을, 이 책은 소상히 밝혀 주고 있다.
  그러나, 연산주에 오면 정음에 대한 폭압이 일어난다. 이것은 이 책에서, 3항의 “연산주의 폭정”으로 기술된다. 이 책에서는 연산의 폭정의 동기와 그 역사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정음을 쓰는 사람에게는 관계 법률(“棄毁制書律”과 “制書有違律”)의 위반으로 처벌한 폭악한 문자 정책의 상황이 조선 문화의 절멸의 비운으로 몰고 간 원인이 됨을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정음이 민간에게 방임되어 비과학적인 상태로 잔명을 유지케 되고, 드디어 언제인가 정음이 “반절”이란 이름으로 유행되었다는, 지은이의 주장을 이해시키는 배경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은이는 그 근거를 “훈몽자회”의 속에서 이르는 반절 이십칠자(俗所謂反切二十七字)에서 찾는다.
  4항의 “반절과 최세진의 훈몽자회” 범례에서는 범례의 내용을 인용 설명했다. “훈몽자회” 범례에서 중요한 것으로 지적된 점은, 훈민정음 28자 중 “ㆆ”이 삭제된 27자임을 지적한 점, 반절에서는 “ㅿ”이 없어진 26자임을 지적한 점, 8종성법을 지적하고 이를 비판한 점 등이다. 이는 오늘날까지 “ㆆ”이나, “ㅿ”이 음가나 음운론상 학설의 쟁점으로 되어 온 것으로 보나, 맞춤법 통일에서 논쟁의 근원적 배태가 이 8종성법에 있었음을 생각할 때, 그 지적은 옳은 것이었다. “훈몽자회” 범례는 학설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처음으로 한글의 이름을 붙이고, 한글의 배열 순서도 훈민정음과 다른 오늘과 비슷하게 정리된 점으로 보아, 이는 당시 우리말 교육에 기초를 닦아 준 공헌이 인정되며, 그의 정리에서 배태하고 있는 학설 논쟁의 소지도 있어서, “훈몽자회” 범례를 얼마간 학설적 테두리에 넣어도 무방하다고 본다.
  “조선문자 급 어학사”에서, 분명히 학설의 연구적 차원으로 소개된 것은 영조 때 나오는 논저서부터이다. 5항 이하의 문자‧운학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당시 어느 누구도 “훈민정음” 책을 보았다는 말은 없다. 그러므로, 다음 5항 이하와 같은 훈민정음을 벗어난 논지 전개가 자연히 다양한 학설로 나타난다.
  5항의 “박성원의 ‘화동정음 통석운고’ 범례”에서는, 이 책을 음운학자 박성원(1697~1767)이 1747년에 지었음을 밝히고, 그 책의 범례에 나타난 “오음초성”(五音初聲)을 그대로 옮기어, 이에 대한 지은이의 비판을 가하고 있다.
  6항의 “신경준의 ‘훈민정음 운해’”에 대해서 지은이(김윤경)는, 신경준(1712~1781)은 성음학의 권위자임을 소개하면서, 그의 “훈민정음 운해”(訓民正音 韻解, 1750)는 “훈민정음 도해”(訓民正音圖解)로 많은 학자가 인용함을 밝혔다. 그리고 그의 문집 “여암유고”에 “韻解序”란 밑에 “訓民正音圖解序”란 전문을 실은 것을 보면 본서의 “圖”자는 “韻”자의 잘못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지은이는 또한 이 운해의 중요한 부분은 매우 자세히 원문으로 옮기고, 이를 일일이 비판했다. 특히 “오음소속”(五音所屬)과 “상형”에 대한 기술은 비과학적 역학설에 토대한 것이라 하여 비평하고, “ㆁ”소리값과 그 쓰임에 대하여는 신랄하게 비판했다. 신경준의 학설 중 “”는 “수”와 “우”의 사잇소리이고, “”는 “부”와 “우”의 사잇소리라고 함을 소개하고 있다. 소개만 했을 뿐 이에 대한 비판은 없다. 사실상 이는 “ㅿ”과 “ㅸ”의 소리값이 유성음임을 주장한 것인 즉, 이에 대한 음운 연구사 상의 자리를 밝혀 주었어야 했다. 지은이는 한편 신경준의 학설 중 초성의 전탁음 표기에서 “心母”(ㅅ)의 부정과 탁음 쌍서(ㄲ, ㄸ,……)의 학설은 탁월하다 하고, 이것은 그 뒤 유희 이하의 학자들이 동일한 학설을 갖게 되었다고 평했다.
  탁음 쌍서설은 우리 글자 정리기에 제기된 문제의 해결에 한 열쇠를 준 것이므로 지은이의 탁음 쌍써설 평가는 옳다고 본다. 그 밖에, 신경준의 “설상음”과 “설두움”에 대한 것을, 문자 구조상의 추리와 음리상 추리로 만든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음운론적 비판이 더 요구되기도 한다.
  7항의 “홍계희(1703~1771)의 ‘삼운성휘’(1751) 범례”에서 “ㅿ”의 “ㅅㅇ”의 사잇소리설과 “ㅚ,ㅐ,…”의 “ㅣ”는 “侵침”의 “ㅣ”와는 다른 중중성이라고 한 데 대한 중요성을 역설한 것은 적절한 평가였다고 본다.
  8항의 “홍양호(1724~1802, 호는 이계)의 ‘정세정운 도설’서”에서, 지은이는 최석정의 “경세정운 도설”에 대한 이계 홍양호 서7) 를 인증하되, 최석정의 심오한 연구가 신경준의 운해를 연상케 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지은이 자신은 본 서를 얻어 보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했다8).   9항의 “‘진언집’의 범례”에 대해서는 이 “진언집”(1777)을 용암선사가 간행함과, 그 내용이 훈민정음과 한자와 범자를 대조한 것임을 비판 없이 소개했다.
  10항의 “황윤석의 ‘자모변’”에서, 지은이는 황윤석(1729~1791)에 대하여, 고금에 짝을 보기 드문 언어 과학적 방법을 구사한 학자라고 크게 평가했다. 지은이는 원자료를 소상히 옮기고, 이를 해설하되, 특히 우리말의 어원 연구나, 범어를 포함한 각국 방언의 비교 연구는 놀랄 만한 것이라고 경탄하고 있다. 특히, 신라 관제 “舒發翰” 또는 “舒弗邯”이 “角干”과 함께 모두 “한”이란 신라의 말인데, 이것은 한자를 절음식으로 적은 것을 증명한 것이라고 하여 크게 주목한다. 그리고 우리말 어원을 한자에서뿐 아니라 범어, 여진어, 몽고어 등에서 찾기도 했음(가령, 우리말의 “伯等加指”(버들가지)는 범어에서, “溱音赤”(줌치)는 여진 말에서, “斗應斤來”(둥글다)는 몽고 말에서,……)을 소개하고 있다9). 지은이는 황윤석의 자모에 대한 학설을 소상히 원문을 인용하고, 별 비판 없이 해설했다.
  황윤석의 연구에서는 15세기 이래 학문의 특수한 배경이었던 동양의 역리학이 배제된다. 이는 국어의 연구가 근대 학문에로의 전환점을 보이는 것으로 주목해야 할 점이라고 본다.
  11항의 “유희의 ‘언문지’(1824)”에서, 지은이는 유희야말로 조선 문자사상에 있어서 대서특필한 권위 있는 학자이요, 음운학(성음학)상에 제1인자라 했다. 지은이는 이어서, 국어학사상의 권위자로 훈민정음 제정 당시의 5사람(세종, 정인지, 최항, 성삼문, 신숙주)를 제하고는 그 뒤로 나타난 가장 권위자로 음운학의 신경준, 유희, 문법학의 주시경을 든다 하고, 이들 석학의 명저가 한 번도 간포되지 못했다 하면서, 이는 우리 학계의 수치요, 빈약성을 보이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신경준, 유희의 학설을 자세히 또는 모두를 인용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면서, “언문지” 전편을 원전 그대로 옮겨 놓았다. 이 원전을 통하여 학설 13개를 소개하면서 더러는 평을 가했다. 소개 평가된 학설 중, 주목되는 두어 개를 보면, 첫째, 초성 중, “설. 순. 치”를 각각 둘씩 나눔(설단, 설상, 순중 순경, 치두 정치)은 잘못이요, 이 둘은 “거이”(擧頤)와 “안이”(按頤)이며, “안이”는 모두 “거이”에 합한다고 한 점을, 혁명적인 빼어난 견해라고 소개 평가한 점10), 둘째, 탁음(ㄲ, ㄸ…)의 회복에 대하여, 이는 신경준과 일치한 점이라고 소개 평한 점이 그것이다.
  생각하건대, 지은이가 언문지의 원전 전편을 소개한 것은 우선 자료 이용상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유희의 빼어난 학설을 자세히 소개 평가함으로써, 유희의 국어학사상의 자리 매김을 분명히 한 것은 지은이의 탁월한 국어학적 해석에 말미암은 것이라 본다11).   12항의 “이규경의 ‘언문 변증설’”에서는, 별 신기한 것이 없다고 한 마디로 비평하고, 13항의 강위의 “동문자 분해”(1869)도, 그 원문을 인용하고, 그 체계의 막연함을 비평하였다.


8. 말본 학설의 등장

  14항의 “이봉운의 ‘국문정리’”부터는 말본의 연구 역사로 들어간다. 지은이는, “국문정리”(1897)가 나오게 된 동기는, 사회적 배경, 곧 갑오경장 전후의 신흥 사조와 교육입국 정신에 따른 새 교육 기관의 등장으로 보고 있다. 지은이는 이 책의 내용을 옮겨 적고, 이 책이 우리말에 대한 문법적 연구의 최초의 것이라는 역사적 자리를 밝혔다. 지은이는, 이 책의 요점을 여섯 가지로 적었으나, 이것들은 모두 음성에 관한 것이었고 말본의 특성(“어토명목”)은 소개 비판하지 아니했다.
  15항의 “지석영 제안의 신정국문”에서는, 지석영의 학부의 재가를 얻은 “신정국문”을 소개하고, 그 가운데 “‧”를 폐하고 “=”를 창작함이 특이한 점이라고 말하고, 학자 간에 이에 대한 반대가 일어남으로써, 또한 시세의 진운에 자극됨이 큼으로써, 드디어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1907)”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고 하고, “신정국문”의 폐지와 “=” 창작 문제의 부산물로서 국문연구소가 설치되게 한 공적을 인정하고 있다.
  16항의 “권정선의 ‘정음 종훈’(1906)”에서는 그 원본을 보지 못하고, 다만 국문연구소 위원인 주시경의 연구 보고서에 인용된 것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이에 대한 지은이의 해설이나 평은 없다12). 권정선의 “정음 종훈”은 조선조의 전통적 운학의 종말이다.
  17항의 “국문연구소 위원들의 연구 보고서”에서, 지은이는 국문연구소는 과학적 연구를 쌓아 실용 문자의 바로잡음이 그 설립 목적임을 밝히고, 위원들의 23회에 걸친 회의를 통하여 여러 문제가 연구 진행되었음을 말하면서, 여러 위원들의 연구 보고서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소개를 통하여 우리는 국문연구소의 설치 동기, 배경, 목적, 연구 활동의 내용 등의 역사적 사실을 소상히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연구소는 나라의 국어 정책적 차원에서 설치 운영된 연구소임을 알 수 있다.
  18항의 “최광옥의 ‘대한문전’”에서, 지은이는, 내용 여하는 별문제로 하고, “대한문전”(1908)은 “문전”이란 이름으로 나오기는 이것이 최초라고 하면서, 그 내용의 목록과 문법의 내용을 소상히 소개했다. 그리고 자세한 비평은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고 하면서, 다만 이 “문전”은 외국 문법이 번역적임과 음성학 관찰이 깊지 못함과, 씨의 갈음(품사 분류)이 미비함과, 낱말 경계 구분에 혼란을 일으킨 중요한 결점을 가진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문전은 처음 나옴으로써, 어문 연구에 지침이 되고, 소학교에서까지 교과서로 채용하였음을 특별히 밝히고 있다13).
  19항의 “유길준의 ‘대한문전’”(1909)에서, 지은이는 발간된 시기로 보면, 유길준의 “대한문전”은 최광옥 다음의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나 서문의 “제4차 고본이 세간에 나가, 이미 재판까지 되었음” 대로, 본고가 먼저 세상에 출현된 것이라면, 실제에 있어서 본서가 말본 체계를 갖춘 최초의 것이 아닌가고 말하고 있다. 지은이는 이 “대한문전”의 말본 체계에 대하여 상세히 소개했다14). 그런데 과연 말본 체계의 효시는 누구의 무엇이냐의 문제는 이미 “조선문자 급 어학사”에서 제기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20항의 “김희상의 ‘초등국어 어전’과 ‘우리 글틀’”에서, 지은이는 “초등국어 어전”(1909)에 대하여 자세한 목록과 특별한 내용을 소개했다. 그리고 나아가 “울이[우리] 글틀”(1930)을 소개하면서, 이것은 소학교 교과서로 쓰였으나 “초등국어 어전”보다는 더 깊이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책들에 대한 특별한 학문적 논평은 없다.
  21항의 “주시경의 ‘국어문법’”에서, 지은이는 먼저 주시경(1876.11.7~&1914.7.27)의 인적 사항을 설명하면서, 그는 조선어문 연구의 새 기원을 이룬 이요, 어문 운동에 가장 큰 공로자임을 밝혔다. 곧, 지은이는 주시경의 배재학당의 신교육, 신문 기자 생활, 교육자 노릇, 정치 운동, 그런 가운데도 한글 연구에 성실하였음을 기술하고, 나아가서, 학생 시절의 “협성회” 조직, 독립신문 재직 중의 “동문동식회” 조직, “상동 청년학원”의 설립과 교수 담임, “일요 강습소”의 세움과 그 교수, 국문연구소의 중추적 역할, 외국인 사이에 생긴 “조선어 연구회” 강사, 서울 공사립학교의 조선어 과정 교수, “조선광문회”에서의 언문에 관한 교정, 사전 편찬 지도, “조선어 강습원”의 창설과 사범적 교양 보급 등을 상세히 소개했다. 지은이 자신이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상동 청년학원에서 가르침을 받은 터라, 이러한 기록은 정사로 믿어 후학들에게 전한다15).   지은이는, 주시경의 저서에 “국어문전음학”(1908)과 “국어문법”16)(1910),   “말의 소리”(1914)가 있음을 들고, 그 각 저서에 대하여 소개하되, 특히 “국어 문법”에 대한 소개는 “서”로부터 문법의 내용 곧, “소리갈, 기난갈, 짬듬갈”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소리갈”에 대해서는 논평없이 소상히 소개하기만 했다. “기난갈”은 낱말의 연구임을 밝히고, “짬듬갈”은 문장의 조직 법칙을 말한다 하고, 이에 대한 별 비판은 없지만 소상히 소개했다.
  “말의 소리”는 “국어문법”의 소리갈의 내용과 대체로 같다 하고, 다만 부록으로 “우리 글의 가로 쓰는 익힘”이 붙어 있음을 소개하면서, 이는 가로쓰기 주장의 최초가 됨을 밝혔다. 모두에서 지은이가 밝힌 바와 같이, 주시경은 우리말 연구의 새 기원을 이룬 이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17). 지은이는 주시경 이후의 말본 학자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보았다. 한 부류는 주시경 학통을 잇되, 미비한 점을 깁고 빛낸 학자들이요(22항), 또 한 부류는 주시경 학통과는 전혀 관계없는 학자들(23항-25항)이다.
  22항의 “주시경 후계 학설”에서, 지은이는 주시경의 학설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은 이들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김두봉: “조선말본”(1916)
이규영: “현금 조선문전”(1920)
이원우: “조선 정음문전”(1922)
이규방: “신찬 조선어법”(1922)
강매, 김진호: “잘 뽑은 조선 말과 글의 본”(1925)
이상춘: “조선어 문법”(1925)
정열모: “조선어 문법론”(1927, 미완)
최현배: “중등 조선말본”(1934)
  이 가운데 특히 주시경의 후계 학설의 세 큰 학설로, “분석, 종합, 준종합(절충)”으로 나누어짐은 우리가 다 아는 일이다. 이제 이를 중심으로 대표되는 저서에 대하여 지은이가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를 본다.
  김두봉의 “조선말본(1916)”에서,
  지은이는, 이에 대하여, 그때까지 발표된 문법 학설 중 가장 깊고 넓게 연구된 대표적인 것이라 했다. “조선말본”은 그 “머리말”에서 말한 바, “말모이”에 쓰려고 만든 것이라 함을 밝혔다. 이 “조선말본”은 “소리갈, 씨갈, 월갈”로 나누어지고, 특히 씨갈은 아홉 가지로 분류하였음을 보이었다. 그리고 말본의 큰 얽이는 일이나 몬을 바로 이르는 “으뜸씨”와 “으뜸씨” 사이의 관계를 맺는 “토씨”로 크게 나누어짐을 소개하게 있다18). 지은이는, 김두봉의 시간 표시말이 혹은 움직씨(가겠, 가았)에, 혹은 맺씨(“온다”의 “ㄴ다”)에 붙이는 체계적 불일치의 결점을 지적했다. 지은이는 또한 “조선말본(1916)”이 나온 뒤 8년만에, 이를 깁고 더하여 “깁더 조선말본”으로 재판되었음을 소개하기도 했다.
  정열모의 “조선어 문법”에서,
  지은이는 정열모는 체계는 같은 뿌리(주시경 선생의 제자를 뜻한 듯: 필자 주) 다른 가지처럼 아주 다른 것(체계)이라고 했다. 여기 “조선어 문법”은 전체가 다 발표되지는 못했으므로(신명균 편, 동인지 “한글”, 1927년 제1권 3호부터 연재 중 휴간으로 미완) 그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이 소개에 따르면, 언어는 원사(原辭),염사(念辭), 단구(斷句)의 3단계로 이루어지고, 원사는 언어의 최저 계급으로서 염사를 이루는 성분이니, 원사가 배합하면 염사가 되며, 한 덩어리의 단정(단언)의 말은 단구가 된다고 한다. 곧 단안은 단구, 염사는 관념, 관념 재료는 원사라고 함을 소개한다. 그리고 염사론은 단독론(etymology)과 상관론(syntax)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생각하건대, 이 말본의 특징은, 구조의 “성분 분석론”이며, 원사는 낱말(단어)론이다. 낱말인 원사는 “완사 + 불완사”로 이루어진다고 보므로, 이는 정열모 말본의 종합주의 체계를 보이는 것이다. 그의 종합주의 체계의 완성은 “신편 고등문법”(1946)에서 이루어진다19).
  최현배의 “중등조선말본”에서,
  지은이는 최현배의 정력을 다한 저작 “우리 말본”의 전편이 인쇄 중이므로, 이를 볼 수가 없어, “중등 조선말본”의 체계를 소개한다고 하면서, “중등 조선말본”의 “일러두기”에서, 앞사람들의 분석적임과는 다른 종합적임을 내세운 점을 특히 중시하고 있다.
  이 책의 벼리가 “모두풀이, 소리갈, 씨갈, 월갈”로 나누어져 있음을 보이고, 그중 소리갈은 대강만 소개함에 그쳤으며, 논평의 초점은 씨갈(품사론)에 두었다. 씨갈은 독특한 주장으로 10품사로 나누어짐과, 잡음씨의 설정과, 토씨를 임씨 밑에 붙는 겻씨만으로 국한한 점 등을 들었다. 이것은 종합적 문법 체계(정열모의 “종합 체계”에 견주면 “준종합 체계”라 할 만함: 필자 주)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지은이는, 첨가어족으로서의 개념어와 형식어의 분리 유동성을 가지는 국어를, 곡미어족(영어 등)의 특질인 어미 변화 규칙에 토대하여 끝바꿈 체계를 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하면서, 아울러 잡음씨에 대해서도 회의적 견해를 보이었다. 한편, “중등 조선말본”에서, 처음 등장하는 “도움 줄기”, “도움 움직씨” 등의 체계도 관심의 대상으로 소개되었다20).
  이 밖에 주시경 학통과 관계없는 계파에 속하는 학자의 저서로, 이필수의 “선문통해”(1922)와, 박승빈의 “조선어학”(1935), 심의린의 “중등학교 조선어문법” 등을 들어 소개했다. 특히 박승빈의 “조선어학”에 대해서는, “된시옷”의 주장과 겹받침의 불가, 그리고 말본 내용에서, “용언 어미의 활용”이 특색이요, 주안점이 됨을 소개했다. 그러나 이는 일본 문법의 법칙을 조선 문법에 적용하느라고 온갖 부자연과 무리를 크게 범하였다 하고, 특히 원단과 변동단 등을 소개하면서, 이는 막연하여 의문을 일으킴이 많다고 비평했다.


9. 근대의 한글 보급과 국어 정책

  “조선문자 급 어학사”의 26항부터 29항까지는 일반적으로 말하여 한글 보급과 국어 정책에 관한 부분이다.
  26항 “한글의 보급과 발전에 대한 기독교의 공헌”에서, 지은이는, 기독교의 보급 전파가 한글 보급 발전과 한글을 구미 학계에 소개한 공적이 크다고 했다. 선교사의 최초의 사전 편찬(한불자전, 1880), 성경의 최초의 한글 번역(누가 복음, 요한 복음 번역, 1881;신약 전서 완역, 1900;구약 전서 완역, 1910)을 비롯하여, 한글에 대한 말본, 사전 등 저술(언더우드: 한영문법, 1889;한어자전, 1890;제임스‧스콧: 영한자전, 1891;게일: 사과지남, 1893;한영자전, 1897;…)이 그것이다21).
  27항의 “총독부의 철자법 규정”에서는, 철자법 규정의 목적과 규정 만드는 과정과 규정 내용을 소개했다. 보통학교 독본의 철자법의 평이성을 위하여 총독부 학무국에서 만든 것이 이 규정이며, 1911년부터 1912년에 이르러 된 것이 제1회 “총독부 철자법 규정”임을 밝히고, 1921년과 1930년에 각각 개정 규정이 나왔음을 밝히면서, 그 내용들을 소개했다.
  28항 “조선어 학회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 지은이는 1933년에 발표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조선어 철자법 통일안) 제정의 내력이 “한글” 제10호 (1934)에 특집으로 실려 있음과, 1930년부터 1933년에 걸친 제정 경과를 밝히고, 통일안 전모를 옮겨 놓았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관한 참고 자료는 이 항목에서 충분히 얻을 수 있다.
  29항 “최근의 한글 운동”에서, 여기 “최근”이란 1920년대에서 1938년, 이 책이 나오기 바로 전까지를 말한다. 지은이는 이 동안의 한글 운동을 학회의 발족과 발전, 학회지 창간, 사전 편찬, 언론 기관의 보급 운동, 기독교의 활동, 잡지들의 협력, 강연 활동 등으로 자세히 기술했다. 이를 간단히 다음에 소개한다. 지은이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살피면서, 1921년 12월 3일 “조선어 연구회”의 발족(1931년에 “조선어 학회”로 고침)과 1926년 11월 4일(음 9월 29일) 정음 기념 축하식을 올리고, 이 날을 매년 “가갸날”로 지키도록 결정함과, 1927년에는 “한글”이 신명균 명의의 “동인지”로 창간됨과, 이 “한글”이 휴간(1928년 9호로) 되었다가 1932년에 조선어 학회 기관지로 부활(기관지로 창간)되면서 “한글”이 한글 운동의 중추가 됨을 밝혔다. 사전 편찬에 대해서는, 1910년 “조선 광문회”에서 시작한 “말모이”(주시경, 김두봉들이 편찬, 사전 편찬의 효시)를 1927년 계명 구락부에서 넘겨받아 조선어 사전 편찬을 시작하다가 그 뒤 중지되었고, 1929년에는 108명의 발기로“조선어 사전 편찬회”가 조직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한글의 보급 운동에 직접 관계가 되는 기독교의 “하기 아동 성경 학교”가 1922년에 시작, 1933년까지 한글을 깨친 이가 13~4만 명에 이른다는 통계를 제시했다. 문자 보급(새 맞춤법 보급)에 가장 관계가 깊은 것은 언론과 잡지이다. 지은이는 “조선일보”의 문맹 퇴치 운동을 위한 하기 강습, 및 “문자 보급반”의 “한글 원본” 만들기,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민중으로 들어간다는 뜻, 계몽 운동), 및 “하기 계몽대”의 “한글 공부” 만들기 등을 소개하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의 한글 맞춤법 시행에 대한 사설을 하나하나 모두 그대로 옮겨 놓았다. 한편, 한글의 대중적 시행기를 맞으면서, “동광”, “진생”, “신생”, “기독신보”, “한빛” 등 잡지를 비롯한 소설류에서 새 맞춤법을 썼음을 소개하는 한편, 전국을 누비는 강사들의 순회 강연의 현황을 이름, 때, 장소 등까지 자세히 소개하였으며, 강연자들이 그때에 방언 조사도 벌였음을 밝혔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글의 과학적 가치와 새 “맞춤법” 및 “말본”의 기초적 지식이 민중에게 상당히 파고들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한글 운동사에 뚜렷한 가치가 있는 것의 하나로 지적된 것이 있다. 그것은 1934년에 열린 제1회 “조선어학 도서 전람회”이다. 그때 진열된 서적의 전 목록은 이 책에 그대로 옮겨 있으며 이것은 후학들에게 큰 참고 자료가 된다.
  그러나, 새 일에는 반드시 방해가 있기 마련이다. 당시에 새 맞춤법에 대한 반대가 일부에 있어, 그 논전이 심했음을 이 책은 상세히 알리고 있다. 그 반대 세력의 대표되는 이는 박승빈이요, 그가 조직한 “조선어문 연구회”와 그 기관지 “정음”(1934)은 반론의 반려자이며, “조선문 기사정리회”는 반대 음모의 당사자임을 이 책에서는 낱낱이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조선어 학회의 회원들의 활동은 이미 국제 무대로 옮기고 있었으니, 1935년의 김선기 교수의 파리 “만국 음성학회” 참가와, 1936년의 정인섭 교수의 코펜하겐 “세계 언어학회” 참가 등의 소개로 이를 알 수 있다.
  29항의 “최근의 한글 운동”에는, 1940년 이후의 한글 정리와 수난과 정책 등이 4판부터 보충되어 있다. 그 보충된 내용은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1940)의 제정 과정과 그 전모의 소개, “사전 편찬회”가 1936년에 조선어 학회로 넘어오기까지의 역사적 과정과, “조선어 학회의 수난 사건”의 과정과 판결 결과 및 석방 과정과, 광복 뒤의 한글 운동(교육, 교재, 사전 편찬)과, 1953년부터의 한글 파동, 국어 교사 양성(1948년 문교부 위촉으로 한글 학회에 설치된 “세종 중등 교사 양성소”. 6‧25로 정지), 그리고 한글 전용 운동(1945년부터 공용 문서에 한글 전용 지시) 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하여 광복 전후의 한글의 정리와 수난과 정책의 전모를 알 수 있다.
  30항 “한글 연구 재료의 문헌”에서, 지은이는 수많은 한글 본위의 서류를 소개해 놓았다. 이 자료는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이 책은 맨 마지막으로, 주와 정오표를 붙였다.


10. 맺음

  이 책은 학설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과, 충실한 원자료 인용을 통한 우리 말글의 학설의 내용 소개와 아울러 이에 대한 자가 비판에 의한 자기 학설을 제시하는 한편, 우리 말글의 정리 보급 발전 및 정책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일체를 다루고 있다. 우리는 이 방대한 책을 통해서, 우리말에 대한 역사적 현실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우리 말글에 대한 학설의 통시적 발전 과정과, 우리 말글의 수난, 발전 및 정책의 역사를 통괄할 수 있다. 우리는 지은이의 민족정신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우리 말글의 현실에 대한 역사적 조명 능력을 얻음으로써, 미래에 대한 연구와 정리 보급에 새로운 이론과 방법을 모색해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