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국어에 나타난 일본어의 언어적 간섭】

신문·방송 분야에 쓰인 일본어

朴在陽 /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Ⅰ. 머리말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 가운데는 다른 언어에서 차용한 것이 생각보다는 많다. 그것은 한 언어 집단이 다른 언어 집단과 끊임없이 접촉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때 ‘카메라’처럼 뜻과 소리를 그대로 차용하기도 하고, ‘사진기’처럼 뜻만 차용한 것도 있다.
  한편, 어휘적인 차용은 직접 차용과 간접 차용으로도 나눌 수 있다. 직접 차용은 차용어가 차용한 언어의 토박이말일 경우이며, 간접 차용은 한 언어의 차용어가 다른 언어에 차용되어 쓰이다가 다시 다른 언어로 차용되는 것을 말한다. 일본어에서 직접 차용은 “기스 났다”고 말할 때의 ‘기스’가 그렇고, 간접 차용은 일본어에서 서양어를 차용해서 쓰는 것을 우리말에서 다시 차용해 쓰는 ‘빵’ 같은 말이 그것이다. 직접 차용 가운데는 토박이 일본어도 있고, ‘할증’(割增, 일본어에서는 ‘와리마시’라고 읽기 때문에 한자어라고 할 수 없지만)처럼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도 있다.
  미국의 언어학자 블룸필드는 “언어”라는 책에서 한 언어 공동체에서 다른 언어 공동체로 언어적 특징이 차용되는 것을 문화적 차용(cultural borrowing), 밀접 차용(intimate borrowing), 방언 차용(dialect borrowing)으로 나누었다1).
  문화적 차용은 어떤 집단의 문화나 새로운 개념이나 사물들이 다른 집단에 상호 차용되는 것으로서 이때 언어도 함께 차용된다. 흔히 문화적으로 높은 곳의 언어가 낮은 곳의 언어로 차용된다. 밀접 차용은 정복자의 언어가 피정복자의 언어에 일방적으로 차용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피정복자의 언어가 밑바탕이 되어 기층어(基層語)를 형성하고, 정복자의 언어가 그 위에 덮이어 상층어(上層語)를 형성한다. 드물게는 몽골어나 만주어처럼 중국을 정복하고도 오히려 문화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중국어에 흡수되고 마는 경우도 있다. 방언 차용은 한 언어에서 여러 방언들 사이에 일어나는 차용 현상으로서, 한 방언권이 다른 방언권보다 정치 경제적으로 우세한 위치에 있을 때 일어나며, 일반적으로는 중앙에 있는 수도권 언어가 각 지방으로 퍼져 가는 형식이 되며, 이것도 상호 차용이 이루어진다.
  문화적 차용은 상호 차용의 형식을 띠지만, 보통 문화가 높은 쪽의 언어가 낮은 쪽의 언어에 일방적으로 차용되므로 언어를 통해 문화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한일어의 차용 문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밀접 차용과 문화적 차용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원시 시대로부터 근세(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말이 일본어에 일방적으로 차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일본어는 우리말을 근간으로 하여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밀접 차용(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과 문화적 차용으로 끊임없이 우리말이 차용되었다. 물론 한일어가 동계어라는 경우에도 차용은 계속되었다.
  일본어가 우리말에 차용된 것은, 문헌상으로는, 영조(英祖) 4년(1728년)에 김천택(金天澤)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집인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린 “돌통 기미 퓌여 믈고”에 나오는 ‘기미’(썬 담배)라는 어휘다. 물론 그 이후에도 19세기 말엽 일본을 통해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거의 문헌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개화기 이후 서양의 문물을 주로 일본을 통해 받아들이면서 그 당시에 없었던 새로운 어휘가 문화적 차용으로 우리말에 침투한 일본어 가운데 신문·방송 분야에 쓰인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신문·방송에 쓰인 일본어는 광범위하여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어휘가 대상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가 신문·방송의 보도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보도 내용에 쓰이는 말은 다른 분야와 겹치지 않도록 제한하고, 신문·방송의 제작에 쓰이는 전문 용어는 전에는 썼으나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것은 빼고 몇몇 어휘만을 대상으로 했다. 또한 일본어의 토박이말이 그대로 차용된 것과, 서양어가 일본어에 차용된 것을 다시 차용한 것, 서양어와 일본어가 섞인 것, 한자어와 일본어가 혼용된 것,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 등으로 구분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Ⅱ. 몸말

  차용어와 토박이말의 구별은 매우 어렵다. 머리말에서도 이미 적었지만, 언어는 역사적, 사회적 산물이므로, 모든 언어는 상호 또는 일방 차용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기 때문에 링가 프랑카2) 라고 할 수 있다.
  서정범은 태양을 나타내는 말이 6개의 어휘로 나타난다3) 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곧 우리말도 링가 프랑카라는 뜻이다. 그리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어떤 어휘가 토박이말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어렵다. 따라서 상당수의 어휘는 마치 차용어가 토박이말처럼 인식되어 어원을 밝히기가 어렵다. 요즘 어린이들은 ‘빵’(포르투갈 말 paồ에서 일본어 パソ을 거쳐 들어온 간접 차용어)을 마치 우리말처럼 생각한다. ‘송골매’라는 말이 우리말처럼 생각되지만 이는 몽골 말에서 차용한 것이다. ‘구두’를 우리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도 일본어 ‘구츠’(kutsu)에서 차용한 것이다.
  더구나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한자어-개화기 이전부터 쓰인 것은 제외-는 거의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전문 용어든, 일상생활 용어든 일본인들이 만들어 쓰던 것을 그대로 받아쓰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영화나 비디오의 제목조차 원래의 제목은 무시하고 일본에서 번안해 쓰는 제목을 그대로 쓰고 있다. 조선일보 1995년 4월 12일 문화면에서 실린 기사를 보면, ‘내가 마지막 본 파리’는 원제가 ‘Last time I saw Paris’인데 일본 제목 ‘비 오는 날 아침 파리에서 죽다’가 쓰인다고 한다.


        1. 일본어 토박이말을 그대로 쓰는 것

  토박이말이라 하지만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말이었던 것이 대부분이다. 곧 우리말이 일본에 건너갔다가 다시 우리말에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이제 와서 아직도 우리말이라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쪽에서는 국어 순화 운동으로 북쪽에서는 말다듬기로 우리말이나 한자어 기타 서양어로 바꾸고 있다.


            (1) 가라

  ‘가라’는 ‘거짓, 빔(空), 줄기(幹), 껍데기(殼), 나라 이름(韓, 唐, 곧 중국), 찌꺼기, 몸짓, 무늬’ 등 다양하게 쓰이는 말인데, 우리말에서는 주로 ‘거짓, 가짜, 무늬’ 등으로 쓰이고 있다. 합성어(合成語)로도 쓰이는데, 노래방을 ‘가라오케’라고 하는 것이 그 보기다. 요즘은 ‘노래방’이라고 하는 것이 거의 보편화되었지만, 처음에는 ‘가라오케’를 모두 그대로 썼다. ‘가라오케’라는 말을 일본어 ‘가라(空)’와 영어에서 관현악을 뜻하는 ‘오케스트라(orchestra)’의 ‘오케’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말이다.
  일본인들은 이처럼 일본어와 서양어를 합성하여 새로운 말을 만들어 쓰거나, 서양어를 가져다 새로운 말을 만들 때, 음절이 길거나 발음이 어려운 것은 잘라서 쓴다. 원격 조종기를 ‘리모콘(remote control)’, 라디오 카세트를 ‘라지카세’, 빌딩을 ‘비루’(처음에는 비루딩구라 했다. 맥주도 비루라고 하는데, 이 둘을 구별하기 위하여, 빌딩은 길게 맥주는 짧게 발음한다) 등으로 쓰는 것이 그것이다.
  가라오케는 일본에서 처음에 맞벌이 부부가 아이들끼리 집에서 노래 부르며 놀도록 오디오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반주가 녹음된 테이프를 넣어 혼자 노래를 반주에 맞추어 부를 수 있도록 한 것이 그 기원이라 한다. 집으로 돌아온 부모도 아이들이 반주에 맞추어 노래 부르는 것이 재미있게 보여 어른들도 그렇게 해 보았다고 한다. 전자 제품 회사에서 이를 제품화시키고, 나아가 화면에 가사가 나오도록 하고 배경을 깔아 현재의 노래방 기기로 발전시킨 것이다.


            (2) 가미소리

  ‘가미소리(剃刀)’는 우리말로 ‘면도칼, 면도날, 면도기’ 등으로 바꾸어 쓸 수 있다. 지금은 그다지 쓰이지 않지만, 뜻으로는 아직도 많이 쓰이고 있다. 머리가 예민한 사람, 날카로운 사람을 비유하는데 ‘가미소리’가 쓰이고 있다. “그 사람 면도칼이다”에서 처럼 예리한 사람을 가리킬 때 쓰고, 또 “칼 같이 한다”에서 보듯이 틀림없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가미소리’는 ‘가미’와 ‘소리’의 합성어다. ‘가미’는 우리말로는 머리칼인데, 말의 갈기나 머리칼의 칼과 비교된다. 우리말의 ‘사람, 씨름, 구름’이 일본어에서는 ‘사마, 스모, 구모’이기 때문에 갈과 가미의 관계와 어형성 면에서 비교가 된다. 따라서 이들 말은 우리말이 건너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소리’는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가미솔’이라고도 하므로 ‘솔’이 개음절화(開音節化)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은 명사 형태에서 접미사가 붙어 동사나 형용사가 되는 경우가 많다.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품다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띠다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푸르다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붉다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희다
와 같은 어형성으로 보면 썰다의 “썰”은 된소리가 되기 전 곧 18세기 이전에는 “설”이며, 칼의 의미를 지닌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서슬이 퍼렇다’에서 ‘서슬’은 ‘칼날’이다. 또한 싹둑 자르다에서의 ‘싹’과도 같은 어원인 ‘칼’에서 나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소리’도 우리말 ‘솔’에서 건너간 말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3) 가부시키

  ‘가부시키(株式)’는 ‘주식’이라는 우리나라 한자 발음으로 날마다 방송과 신문에 수없이 등장한다. ‘가부시키’라는 발음으로는 주로 ‘추렴’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여러 사람이 조금씩 내어서 하자는 것을 ‘가부시키로 하자’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일본어 ‘가부’와 한자 ‘식(式)’의 일본 발음 ‘시키’의 합성어라고 할 수 있다. 가부는 일본어 ‘키(木)’, 우리말 ‘그루(株), 기둥(柱)’ 등과 어원이 같다고 할 수 있다.


            (4) 가다

  ‘가다’는 어깨(肩), 집(型) 등으로 쓰이는 말이다. 물론 어원이 다른 말이다. 어깨를 뜻하는 ‘가다’는 한자 ‘견(肩)’과 우리말 어깨의 ‘개’와 껴안다의 ‘껴’와 연결된다. ‘집’을 뜻하는 ‘가다’는 우리말 ‘꼴’과 비교된다. ‘가다와쿠(型)’는 ‘틀’ 또는 ‘거푸집’이라고도 한다.


            (5) 구루마

  지금은 시골에서도 ‘달구지’가 그다지 쓰이지 않는다. ‘경운기’나 ‘손수레’ 등이 많이 쓰인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운반 수단의 대부분은 말과 소가 끄는 ‘달구지’였다. 이를 ‘구루마’라고 했다. 덜컹거리며 시골길을 달리는 소달구지를 타고 가면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소가 가면서 길가에 난 풀을 뜯어 먹으려는 것을 막으려고 입에 머거리(일종의 마스크)를 하고 가면 짚으로 엮은 머거리의 구멍으로 소침이 줄줄 흘렀다. 송아지가 딸린 어미소는 장난치며 따르는 송아지를 잇달아 보았다. 묵묵히 걸어가던 소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구루마’라는 말이 많이 쓰인다. 택시나 승용차를 구루마라고 한다. 구루마는 ‘차’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달구지가 때로는 ‘차’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6) 구치

  ‘구치’는 원래 입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거푸집의 아가리나 계좌(計座, 일본에서는 구좌 口座)’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구치는 고구려 지명어에 ‘입(口)’의 뜻으로 나오는 ‘구차(口次)’와 비교된다. 또한 아가리와 아가미의 ‘가리’와 ‘가미’와도 비교된다. ‘가르치다’와 ‘가라사대’와도 어원이 같다고 여겨진다. 또한 ‘꾸중, 꾸지람’은 말로 하는 것이므로 ‘구치’와 관련이 되며, 일본어 ‘구사리(꾸중)’도 원래 입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다고 보면, ‘구치’와 뿌리가 같다고 여겨진다.


            (7) 기렛파시

  ‘기렛파시’는 본래 ‘절단(切端)’이란 말인데, 우리말에서는 동강의 의미로 절단이란 말을 쓰고 있으며, 인쇄, 건설 등에서 흔히 ‘자투리’ 등으로 기렛파시를 쓰고 있다. ‘기레’와 ‘바시’의 합성어다. ‘기레’는 ‘끊다’의 뜻이며, ‘바시’는 우리말 ‘밖’과 연결된다.


            (8) 기리카에

  ‘기리카에’는 ‘절체(切替), 절환(切換), 대체(代替)’ 등의 한자어로도 쓰이며, 바꾸기, 바꿔치기 등으로 여러 분야에서 쓰인다. 흔히 ‘기리카이’라고도 한다.


            (9) 기마이

  ‘선심, 호기’의 뜻으로 쓰이는데, 일본어 발음은 ‘기마에(氣前)’다.


            (10) 노코시

  인쇄 시에 ‘나머지 기사’의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11) 다테

  원래는 ‘세로’의 뜻이나, ‘붙이기, 붙임’의 뜻으로도 쓰인다. 미술에서 ‘다테와쿠’(세로틀), 인쇄에서 ‘다테헨케이(縱變形)’ 등이 쓰인다.


            (12) 도메

  인쇄에서 ‘끝, 매듭’ 등의 의미로 쓰인다. ‘도마리짓다’에서처럼 ‘도마리’도 쓰인다. ‘도메, 도마리’는 우리말 그만두다의 ‘두’와 멈추다, 매듭의 ‘멈과 매를 합성한 것처럼 생각된다.


            (13) 도비라

  ‘도비라(扉)’는 인쇄에서 ‘속표지’의 뜻으로 쓰인다. 이곳에 ‘책 이름, 지은이 이름, 출판사 이름’ 등을 적는다. 그러나 원래는 ‘문짝’의 뜻이다. ‘도’와 ‘비라’의 합성어라고 볼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대첩으로 잘 알려진 ‘명량(鳴梁)’은 ‘울돌목’이라 한다. 여기서 ‘돌’은 ‘문(門)’의 뜻이다. 일본어 ‘도(門)’는 우리말 ‘돌’에서 ‘ㄹ’이 떨어진 형이라고 볼 수 있다. 한 책 안에 표제(標題)가 둘 이상 있을 경우 제각각 붙이는 표제지를 ‘나카도비라’라고 한다. 보통 편명(編名), 장명(章名) 등을 넣고 연감 같은 데서는 색종이를 쓰기도 한다. 서적의 표제지와 본문의 종이를 같은 것으로 쓰는 것을 ‘도모가미도비라’라 한다.


            (14) 마에쓰케

  출판물 특히 서적의 본문 앞에 있는 ‘표제지, 머리 그림, 바치는 글, 머리말, 일러두기, 차례’ 등을 말한다. ‘마에’는 ‘앞’이란 뜻이며, ‘쓰케’는 ‘붙임’이다. 우리말로는 ‘앞붙이, 앞붙임(perliminary matter)’이라 한다. ‘마에’는 ‘남풍’을 ‘마파람’이라고 하는 것과 비교된다. 최세진(崔世珍)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앎남 南, 뒤븍 北’으로 나온다. 앞을 남쪽으로 보고 북을 뒤쪽으로 보았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북쪽에서 내려왔다는 뜻이 아닐까.


            (15) 마키

  ‘마지(卷)’는 ‘두루마리’의 뜻이다. 필름이 릴에 감겨 있는 것을 ‘마키’라 한다. 곧 둥글게 감겨 있는 것을 세는 단위 흔히 쓴다. ‘마키’는 우리말 ‘말다’의 ‘말’에서 건너간 어휘라 여겨진다. ‘달(月)’이 ‘츠키’가 되는 것과 같은 음운 변화 현상으로 이루어진 말이다. ‘마키토리’는 ‘필름 감개’라고 한다. ‘마키카에’는 되감기‘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주인공 토토가 두 개 극장을 한 필름으로 상영하려고 빨리 되감아서 자전거를 타고 땀을 콩죽같이 흘리면서 가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16) 모구리

  ‘모구리’는 ‘잠수부, 자맥질’ 등의 뜻을 가진 말이다. 동해안에서는 남자 잠수부를 주로 ‘머구리(모구리)’라 한다. 여자는 ‘해녀’라고 한다. 모구리는 ‘모’와 ‘구리’의 합성어라 할 수 있다. ‘모’는 물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일본어에서 물이 단독으로 쓰일 때는 ‘미즈’지만, 합성어를 이룰 때는 ‘미가사(水量), 미나와(水泡), 모즈(目鳥)’처럼 ‘미, 모’로만 쓰인다. 우리말에서도 ‘ㄹ’은 ‘ㅅ, ㅈ, ㄴ, ㄷ’ 등이 뒤에 오면 탈락한다. ‘무섬(水島), 무좀(물좀), 무넘이(水踰), 무돌이(河回)’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일본어 모구리의 ‘모’는 물(水)의 뜻이다. ‘구리’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4). ‘멍텅구리’의 ‘구리’가 그 보기다.


            (17) 미다시

  ‘미다시(見出し)’는 책을 만들 때나 신문 또는 방송의 기사에서 표제, 제목의 뜻으로 “미다시 뽑다”처럼 흔히 쓰고 있다. ‘오미다시’는 주의를 끌기 위해 첫머리에 넣는 큰 글자 또는 고딕체로 짠 표제다. 요즘은 영어 ‘헤드라인(headline)’을 쓰기도 한다. 또한 ‘견출지(見出紙)’처럼 우리 한자 발음으로 읽으면 ‘찾음표’를 뜻하며, 견출장은 ‘찾음장’이 된다.


            (18) 사시카에

  활판 인쇄가 80년대 중반까지 인쇄의 대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는 컴퓨터로 판짜기부터 인쇄까지 하니 활판 인쇄는 유물로 남게 되었다. 한창 활판 인쇄를 할 때는 문선공이 납활자를 골라 오면 조판공이 판을 짜고 교정을 볼 때 납활자를 갈아 꽂는 일이 매우 번거로웠다. 이를 ‘사시카에’라 한다. 납은 중금속이며, 사람 몸에 중독을 일으켜 매우 해롭다. 그래서 문선공들은 오랫동안 문선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80년대에 노사 분규가 많았는데, 을지로 인쇄 골목의 문선공들도 품삯을 올려 달라고 파업을 자주하였다. 그 당시 일본에서 인건비 때문에 활판 인쇄가 어려워 달력을 비롯하여 상당한 인쇄물을 우리나라에서 찍어 갔다. 파업 때문에 인쇄물이 나오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른 일본 인쇄업자가 허다했다.


            (19) 지라시

  흔히 동네에서 장사를 할 때 널리 알리기 위하여 신문지에 광고지를 끼워 넣는다. 이런 것을 ‘지라시’라고 한다. 쓰레기 종량제가 올해부터 실시되고부터는 이런 선전 광고지가 골칫거리로 되었다. 비디오가 보급되기 전에는 영화는 우리의 대중문화를 이끌어 나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영화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선전지에 야한 장면을 그리거나 찍어서 길거리에서 나누어 주기도 하고 입장객에게 주기도 하여, 어떤 사람은 그것을 고이 간직하여 추억거리로 삼고 있다.


            (20) 하코구미

  테두리 짜기 또는 박스 기사 등에 흔히 쓰이는 말이다. ‘하코’는 상자를 말하며, ‘구미’는 짜기다. 하코로도 흔히 사용하고 있다. 상자라는 말도 일본 한자어다. 우리말 ‘바구니’와 하코는 어원이 같다고 볼 수 있다. 일본어에서 ‘하히후헤호’는 옛말로 거슬러 올라가면 ‘바비부베보’가 된다5). 따라서 하코는 바코로 재구(再構)할 수 있어 우리말 ‘바구니’와 비교된다. 바구니는 지금은 시골에서도 그다지 쓰지 않지만 대바구니가 원래의 바구니다. 우리나라의 노래 도라지 타령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 산천에 백도라지 한두 뿌리만 캐어도 대바구니가 철철 넘치네”에서 대바구니가 나온다. 우리나라의 민요에는 고도한 상징성이 시적 언어로 표출되어 있는데, 백도라지는 남근(男根)을 대바구니는 여음(女陰)을 뜻한다고 한다.


        2. 한자어 및 서양어와의 합성어

  한자로 써 놓고 일부분은 소리로 읽고 일부분은 뜻으로 읽는 어휘와 일본어와 서양어가 섞인 말도 있다. 또한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를 우리나라 발음으로 읽는 것도 있고 일본 발음으로 읽는 것도 있다.


            (1) 가리방

  등사판(騰寫板)이라고도 한다. 등사지를 등사판 위에 올려 놓고 철필로 긁을 때 “가리가리”라는 소리가 난다고 하여 ‘가리방’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가리가리’라는 일본어 의성어는 우리말 ‘긁다’라는 말과 통한다. 인쇄술의 발달은 책을 널리 많이 퍼뜨렸다. 옛날의 목판 인쇄와 금속판 인쇄 그리고 활판 인쇄가 이어졌다. 활판 인쇄가 보편화하였을 때도 작은 양이나 비밀스런 인쇄는 주로 등사판으로 했다. 학교의 시험지나 알림장 등이 대표적이다. 그 뒤 마스타 인쇄가 나오고 컴퓨터와 복사기가 나와 등사판은 마침내 사라지게 되었다. 오돌토돌한 등사판 위에 등사지를 올려 놓고 글씨나 그림 등을 철필로 긁는다. 등사지에 작은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으로 잉크가 스며드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등사지를 얇은 망 위에 올려 놓고 잉크를 묻힌 롤러로 등사지 위를 밀어서 찍는 방법이다. 철필로 잘못 긁으면 등사지가 찢어지고 너무 긁으면 글자나 그림이 시커멓게 나온다. 시험 시간에 문제가 잘 보이지 않아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묻던 정황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2) 가성소다

  ‘가성(苛性)’과 ‘소다(soda)’의 합성어다. 흔히 ‘양잿물’이라 했으며, ‘수산화나트륨’이라고도 한다. 백색 가루로서 빨래하는데 썼으며, 시골 아낙네들이 많이 먹으면 죽기 때문에 자살용으로도 썼다. 요즘은 쥐약이나 농약을 먹고 죽었다는 기사가 가끔 나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양잿물과 청산가리가 자살용으로 많이 쓰였다. 신문에 가성소다를 먹고 죽었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났다. 옛날부터 쓰던 잿물은 나무를 태워서 남는 재를 오지 그릇에 담고 물을 부어서 몇 날 며칠을 두면 위에 물이 고이는데 바로 이것이다. 빨래할 때 쓴 무공해 세제다. ‘가성 조달(苛性曹達)’이라고도 했다.


            (3) 가수

  ‘가수(歌手)’는 날마다 신문과 방송에 나온다. ‘손 수(手)’를 붙여서 사람을 가리키는 ‘운전수(運轉手), 목수(木手)’ 등도 일본에서 만든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리꾼이란 말이 있고 한자어로는 ‘가인(歌人), 가객(歌客), 남창(男唱), 여창(女唱)’ 등이 있었다. 한때는 일본 발음 ‘카슈’라는 말도 썼다. 좋은 우리말을 두고 일본어나 서양어를 쓰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4) 간식

  신문이나 방송에서 ‘간식’을 많이 광고하고 있다. 간식은 식사시간 이외에 먹는 것을 말한다. 우리말로는 ‘새참, 중참’이라고 한다. 이제 이 말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농경 사회에서 도시 사회로 바뀌면서 새참의 개념도 바뀌어 ‘심심할 때 먹는 것’으로 되었다. 그래서 ‘군것질’이란 말이 쓰인다. 농경 사회에서는 힘들게 일을 하다 보면 밥을 많이 먹어도 금방 배가 고프다. 배고프면 힘이 빠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새참을 하루에 여러 번 먹는다. 멀리서 새참 가져오는 모습을 보면 침이 절로 나온다. 모내기를 하다 보면 비를 맞을 때가 많다. 요즘은 비옷이 좋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우장을 쓰고 했다. 온몸이 끈적거리고 허리도 아프고 춥고 배도 고프다. 이때 국수를 새참으로 끓여 오거나 하면 논둑에 앉아 비를 맞으면서도 다들 맛있게 먹는다. 어른들은 막걸리도 한 사발 마신다. 농사철에는 집집마다 술을 담았다. 그런데 지금도 알 수 없는 건 술을 집에서 못 담게 한 것이다. 가끔 누룩을 뒤지러 오기 때문에 몰래 감추어 두고 있었다. 누룩을 만들어 띄우다가 군청에서 나온 사람에게 들켜서 얼굴이 사색이 된 어머니를 보고 그들을 한없이 미워하였다. 그때 누룩이나 밀주가 발각되면 호적에 빨간 줄이 올라 자식들 출셋길을 막는다는 말이 있었다. 아마 그것도 일제 대 왜놈 순사에게 당한 것이 남아 있어서일 것이며, 술을 못 담그게 하는 것도 일제 잔재일 것이다.


            (5) 개소

  군데라는 좋은 우리말을 두고 일본어와 한자어에 익숙한 사람들이 개소(個所)라는 말을 쓰니까 신문, 방송에서도 덩달아서 다투어 쓰고 있다.


            (6) 거래선

  거래(去來)는 원래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한자어로 ‘왕래(往來)가 끊어졌다’에서 처럼 왕래라는 말을 쓴다. 거래는 물건이 오고 가는 뜻으로만 주로 쓴다. ‘거래가 끊어졌다’는 ‘상거래가 끊어졌다’는 말이다. ‘선(先)’은 일본어에서는 사키라고 읽고 ‘곳(處)’ 또는 ‘상대(방)’의 뜻으로 쓰고 있다. 요즘 신문에는 엔고를 이기기 위해 수입선을 다변화한다는 말이 자주 실린다. 또한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거래선을 끊고 동남아로 발길을 돌린다는 기사도 자주 난다.


            (7) 게라구미

  ‘게라(galley)’와 ‘구미(組)’의 합성어다. 교정쇄판(校正刷板)이라고 할 수 있으나, 흔히 인쇄 용어로 ‘게라’를 쓰고 있다. 또한 ‘게라보(galley 棒)’는 교정쇄판 막대이며, 게라즈리(galley 刷)라는 말도 쓰인다. ‘갤리(galley)’는 원래 옛날 노예나 죄수에게 젓게 한 갤리배에서 온 말이다. ‘구미(組)’는 우리말로 하면 짬, 짜개라는 뜻인데, 꾸러미와 꾸리다라는 말과 어원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조(組)라는 말도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고 있다. 소집단(小集團)의 의미이다. 이는 또 요즘은 ‘세트(set)’니 ‘그룹(group)’이니 하는 영어로도 많이 쓰고 있다. ‘오디오 세트, 오디오 몇 조, 스터디 그룹’ 등이 그 보기다. 대학가에서는 국문학과의 어학 모임, 문학 모임처럼 모임이란 우리말을 쓰기도 한다.


            (8) 결하다

  결(缺)하다는 ‘없다, 빠지다’라는 뜻이다. 결(缺)자는 ‘결했다’처럼 단독으로도 쓰이지만 ‘결근(缺勤), 결장(缺場), 결점(缺點), 결석계(缺席屆), 결핍(缺乏)’ 등과 같이 새로운 어휘를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몇 해 전에 대학 입학 예비고사를 칠 때 시험 감독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시험을 보러 오지 않은 수험생의 답안지에는 ‘欠(흠)’으로 적으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글자는 ‘하품 흠’이란 글자이기 때문이다. 시험 치다가 하품을 했다는 것인가. 일본인들이 ‘缺’자와 ‘欠’자가 소리가 같으므로 ‘缺’자 대신 ‘欠’자를 쓰고 있는데, 우리 한자어로는 발음이 다를 뿐만 아니라 뜻도 전혀 다르고 모양조차 다르므로, 일본에서 그렇게 쓴다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다 쓰는 것은 잘못이다. 이와 비슷하게 된 것으로 낭만(浪漫, 서양어 roman을 일본인들이 소리만 따서 浪漫으로 적었다. 일본어 발음은 로망이다), 구라파(歐羅巴, 도이치 말 Europa는 ‘오이로파’로 읽고, 歐羅巴를 일본어에서는 ‘오우로하’로 읽고, 중국어에서는 ‘어우뤄바’로 읽으니 소리가 비슷하나, 구라파는 엉뚱한 말이다) 등이 있다. ‘欠’자는 앞으로 향하여 입을 벌린 상형자(象形字)다. 노래하거나, 말을 하거나 외치는 모습이다. 이 글자는 잘 쓰이지 않는 글자이지만, ‘흠신(欠伸)’하면 ‘하품’, ‘흠거(欠去)’는 ‘나쁜 냄새’를 뜻하는데 쓴다. ‘흠거’는 하품할 때 나오는 입 냄새가 아닐까. 한편 ‘缺’자는 ‘장군 부(缶)’와 ‘깍지 결(夬)’로 이루어 진 글자로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問解字)에는 그릇을 깨뜨리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장군은 액체를 담는 그릇으로 달걀을 눕혀 놓은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날 똥장군으로 유명하다. 곧 똥을 뒷간에서 이곳에 퍼 담아 지게에 올려 지고 논밭에 가서 뿌렸다. 나도 어릴 때 이것을 많이 지고 다녔는데, 오지 그릇으로 된 것도 있고 나무로 된 것도 있다. 뚜껑을 나무로 하기도 하고 짚으로 하기도 했다. 지고 가면 인분이 출렁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잘못하여 뚜껑이라도 빠지면 넘쳐서 온몸에 똥 냄새가 밴다. ‘夬’자는 활을 쏠 때 시위를 잡아당기기 위하여 엄지손가락에 끼우는 뿔로 만든 기구, 또는 물건을 자르는 칼을 잡고 있는 회의자(會意字)다.


            (9) 고수부지

  ‘고수부지(高水敷地)’는 1982년 민중서림에서 펴낸 “국어 대사전”에서 “고수위일 때만 물에 잠기는 하천 부지”라고 나와 있을 뿐 다른 대부분의 국어사전에는 올림말로 올라 있지 않다. 한편 고수공사(高水工事)는 1976년 판 어문각 “국어사전”에는 “홍수를 막기 위한 하천 공사”로 올라 있는 것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전에 올림말로 올라 있다. 1983년에 암파서점(岩波書店)에서 나온 “광사원” 제3판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일본어 국어사전에도 우리 국어사전과 마찬가지로 고수공사만 실려 있고 고수부지는 올림말에 없다. 고수는 ‘고수공사’에서 ‘부지’는 일본어 ‘시키치(敷地)’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고부부지는 새로이 합성한 어휘라고 여겨진다. ‘고수’는 단독으로 그다지 쓰이지 않지만, ‘부지’는 우리말 ‘터’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다. 또한 ‘대지(垈地)’라는 말도 쓰이고 있다. 신문과 방송에 고수부지란 말은 아마도 한강 고수부지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는 것에 한정되어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나마도 현재는 한강 시민 공원이란 말로 바뀌었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경북 영천 지방에서는 ‘갱빈’이란 말을 썼다. 강이나 내에서 물이 흘러가는 곳의 바깥에 모래나 흙이 있는 곳이다. 아마 ‘강변(江邊)’이란 발음이 변한 것이리라, ‘강가, 강기슭, 강턱, 둔치, 냇가’ 등 의미상으로 차이가 조금 있겠지만, 매우 다양하게 쓰는 어휘가 많다.


            (10) 기상대

  날씨 등을 담당한 기관으로 고려 시대에는 ‘태복감(太卜監), 사천대(司天臺), 관후서(觀候署)’ 등이 있었으며, 조선 세종 때(1425년)에 ‘관상감(觀象監)’이란 명칭이 생긴 이래 1907년 왜인이 ‘측후소(測候所)’라고 명칭을 고칠 때까지 줄곧 쓰였다. 광복 후 1948년 ‘국립중앙관상대’가 설치되었다. 그러다가 1982년 ‘관상대’라는 명칭을 일본에서 쓰는 명칭인 ‘중앙 기상대’로 바꾸었다가 90년대에는 ‘기상청’으로 바꾸었다. 이처럼 순 우리말뿐만 아니라 한자어조차도 조선 시대까지 썼던 것을 없애고 일본에서 쓰는 한자어로 고칠 필요가 있을 까. 이는 역사 단절뿐만 아니라 남북 언어 이질화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보기를 들면, 남쪽에서는 군 고급 간부를 장교(將校)라고 하지만, 북쪽에서는 군관(軍官)이라고 한다. 70년대 말에 군에 있었는데, 나는 왜 우리는 ‘장교’라고 하는데 북쪽에서는 ‘군관’이라고 하느냐고 원망하였다. 군관은 옛날부터 쓰던 한자어며, 장교는 왜인들이 쓰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이런 게 바로 남북 언어가 다르게 되는 요인 가운데 하나인데 그 잘못은 남쪽에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11) 긴깡

  ‘금감(金柑)’의 일본어 발음이다. 귤의 한 가지로 금귤(金橘) 또는 동귤(童橘)이라고도 하며, 밀감 나무와 비슷하나 과일의 크기가 귤과 비교하면 매우 작다. 일본에서는 젊은이의 특정 집단을 가리킬 때 폭주족 나가라족(두 가지 이상을 동시에 하는 사람. 보기를 들면 라디오를 들으면서 공부를 하는 사람. 학생들이 라디오를 들으면서 공부하는 것을 보고 부모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등과 같이 무슨 족이란 말을 많이 쓰고 있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신세대들이 서울의 강남의 압구정동 거리를 중심으로 젊은이 특유의 풍속도를 만들어 냈는데, 그들을 오렌지족이라고 한다. 북쪽에서는 ‘놀새’라고 한다. 놀새의 ‘놀’은 ‘놀다’의 ‘놀’이며, ‘새’는 ‘사람’을 뜻한다. 사당패에서 우두머리를 ‘꼭두새’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주로 돈이 많은 잘사는 집안의 신세대들이다. 이들을 흉내내나 결코 오렌지족이 될 수 없는 젊은이들을 ‘긴깡족’이라 이른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 가는 것이라고나 할까. 신세대(일본에서는 신인류 新人類라고 하는데 이들을 흉내낸 소리꾼이 ‘신인류의 사랑’이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X세대6) 와 더불어 나타난 어휘들이다. 이들은 주로 일본의 신세대를 무조건 모방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 때문에 그들의 언어도 그대로 받아서 쓰고 있다. 일본어에서는 시절을 시대라는 말로도 쓰고 있다. 70년대 소리꾼은 ‘여고 시절’이란 노래를 불렀는데, 신세대는 ‘소녀 시대’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는 소녀 시절이라고 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시대는 꽤 긴 세월을 가리킬 때 쓴다. 고려 시대, 조선 시대 등이 그 보기다.


            (12) 다마치기

  1970년대까지 시골 동네에서 아이들이 한 놀이 가운데에는, 사내애들은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를 꼽을 수 있으며, 계집애들은 고무줄놀이와 공기놀이를 들 수 있다. 그때는 다마치기란 말도 썼다. 다마(玉)란 말은 현재도 알, 전구 등의 뜻으로 쓰인다. 알반지는 다마반지, 낚시의 구슬 찌는 다마우끼, 방울정을 다마정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양파를 다마네기(玉葱)라 한다. 1960년대 시골 할머니가 5일장에 장 보러 갔다가 다마네기 사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무엇인지 궁금하여 소리 나는 곳으로 갔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영감에게 신기한 것을 맛보게 하려고 양파를 사 갔다. 알을 먹이려고 코가 매운 것도 참으면서 계속 깠으나 끝내 알은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 장사꾼에게 속았다고 생각하고 분한 김에 깐 양파를 가지고 다시 장터로 갔다. 장사꾼에게 내팽개치면서, “이 사기꾼아, 그래 알도 안 밴 것을 팔아.”고 소리 질렀다. 장사꾼은 처음에는 까닭을 모르고 멍하니 있다가, 자초지종을 알고는 빙그레 웃었다고 한다.


            (13) 덴치

  놀이를 할 때 편을 가르거나 짝을 정할 때 쓰는 말이다. 손바닥과 손등을 내밀 때 ‘덴치(天地)’라는 말을 한다. 이는 손바닥과 손등 곧 위아래를 가리키는 말이며, 인쇄 용어로도 쓰이고 있다.


            (14) 만땅

  만(滿)과 탱크(tank)의 합성어다. 탱크를 일본인들은 ‘탕구’ 아니면 ‘탕’으로 발음한다. 주유소에 가면, “만땅요”한다. 그러면 나는 “가득 넣어 주세요”한다. 어떤 주유소의 주유원은 ‘가득 넣어 주세요’하면 오히려 생소한 듯 잘 못 알아듣는다. 우리말을 쓰면 잘 못 알아듣는 세상이 되려나. 한편 어형성으로 보면, 한자어와 서양어가 합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깡통(can+桶), 깡패(gang+패), 전자렌지(電子+rang, 이는 일본에서 만든 말이다. 영어로는 micro wave oven이다), 오시핀(押+pin, 압침, 압핀, 납짝못), 전기고대(電氣+고대. 고대는 鏝에 해당되며, 흙손 및 인두라는 뜻으로 일본어에서 쓰인다), 전기다마(電氣+다마, 電球) 등이 모두 비슷한 어형성을 보이고 있다.


            (15) 불란서

  프랑스를 일본에서 ‘불란서(佛蘭西)’라고 적고 ‘후란스’라고 읽는다. 우리는 우리 한자음으로 읽다 보니 불란서가 되고 말았다. 대학의 과는 불어불문학과가 되었다. 우리는 그냥 프랑스라고 적고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한편 중국에서는 ‘법란서(法蘭西)’라고 적고 ‘파란시’라고 읽는다. 한때는 프랑스를 ‘법국(法國)’이라고도 했다. 도이칠란트를 ‘독일(獨逸)’이라 적고 ‘도이츠’로 발음한다. 이탈리아를 ‘이태리(伊太利)’ 또는 ‘이태리아(伊太利亞)’로 적고 ‘이타리’ 또는 ‘이타리아’로 읽는다. 유럽은 ‘구라파(歐羅巴)’라 적고 ‘오우로파(europa 도이치 말로 발음은 오이로파)’라 읽는다. 우리나라에서 굳이 이런 한자어 적기를 할 필요는 없다. 이런 지명 국명 적기는 한글로 원 발음에 비슷하게 적는 것이 바람직하다.


            (16) 선착장

  일본에서는 한자어를 소리로도 읽고(音讀), 새김으로도 읽는다(訓讀), 이는 신라 때의 향가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인명이나 지명 등에서 이렇게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하여 적은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일본에 건너가서 만요가나(萬葉假名) 가 된 뒤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선착장(船着場)은 ‘후나츠키바’라 읽는데, 이는 ‘배 대는 곳’이란 뜻이다. 우리말로는 ‘나루 또는 나루터’라고 하면 된다. 선착장이라고 우리 한자음으로 쓰면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렵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훈독으로 읽기 때문에 쉬운 말이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한 말이 꽤 있다. 보기. 할인(割引, 와리비키, 에누리), 할증(割增, 와리마시, 옷돈 또는 덧얹음), 할당(割當, 와리아테, 벼름), 견출(見出, 미다시, 찾음), 입장(立場, 다치바, 경우 또는 처지).


            (17) 선반공

  물레 또는 맷돌 등은 농경 사회에서 쓰던 갈이틀이다. 산업화와 더불어 기계로 쇠붙이 따위를 가는 연모를 선반(旋盤, 돌판)이라는 말을 들여와 쓰게 되었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선반공이라 한다. 발로 물레를 돌려 질그릇을 만드는 사람을 도공(陶工)이라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글쓴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 가까이에는 “질”이란 마을이 있다. 그곳은 질그릇을 만든 사람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다. 우리의 질그릇이 일본에 전해진 것은 임진왜란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제는 거꾸로 일본의 질그릇이 도자기란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밀려오고 있다. 우리의 질그릇에 담아 먹던 된장 또한 일제가 상품으로 만들어 우리의 밥상을 위협하고 있다. 선반이란 말은 ‘돌판’이나 ‘돌이판’ 아니면 ‘갈이틀’ 또는 ‘갈이 연모’ 등으로 썼으면 좋겠다.


            (18) 쇼부

  장사할 때 흔히 ‘쇼부(勝負) 본다’라는 말을 쓰고 있다. 우리말 ‘흥정을 써야 한다.’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려야 한다’는 말도 이젠 기억 속에 살아질 판이다. 또한 ‘승부’라는 발음으로 운동 경기에서 많이 쓰고 있다. 이 말은 오히려 이기고 진다는 뜻으로 쓸 경우에는 승패(勝敗)라는 쪽이 옳다. ‘무승부’는 말이 되지만, ‘승부수를 띄운다’는 말은 오히려 ‘승리 수’로 해야 바른 말이 된다. 운동 경기 중계 방송에서 많이 쓰는 말이다.


            (19) 수순

  요즘 일본이나 우리나라에 정치적 혼란으로 모였다 헤어지는 철새 정치가들이 많다. 이를 한자어로 ‘이합집산’이란 말을 쓰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더구나 정당도 만들었다가 없애기도 하고 당 이름을 심심하면 바꾼다. 이럴 때 신문이나 방송에서 정당 해체의 ‘수순(手順)’을 밟는다고 한다. ‘수순’은 ‘절차’, ‘순서’, ‘차례’ 등의 말을 쓰는 것이 훨씬 이해하기 쉽다. 일본인들은 수순을 ‘단도리(段取)’라고도 한다. 이도 ‘단도리 잘해라’ 등 흔히 쓰고 있는데 쓰지 말아야 겠다. 그밖에 손 수(手)를 붙여 쓰는 어휘 가운데는 일본어가 매우 많다. 보기를 들면, ‘수갑(手匣), 수공(手工, 손 만들이), 수하(手下, 아래 사람), 수인(手引, 길잡이), 수부(手付, 돈 받는 것), 수배(手配, 찾기), 수하물(手荷物, 손짐), 수완(手腕, 능력), 수지고(手持高, 보유량), 수지품(手持品, 가진 것), 수파(手播, 손뿌림)’ 등이 그것이다.


            (20) 수입

  ‘수입(手入)’은 군대에서 많이 쓰는 말이다. 군에 갔다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낱말에 질려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점호 시간에 “총기 수입 불량”, “군화 수입 불량”이란이 수없이 나온다. 처음에는 수입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기 때문에, 이왕이면 ‘수출’이라 하지 ‘수입’이라 하느냐고 농담을 한 적도 있다. ‘수입’은 일본 한자어로 일본에서는 ‘데이레’라고 발음한다. 우리말로 하면 ‘손질’이다.


            (21) 시로누키

  인쇄소에서는 아직도 꽤 많은 용어를 일본어로 그대로 쓰고 있다. 물론 활판 인쇄에서만 사용하던 용어는 자연 없어졌다. ‘시로누키(白拔)’는 ‘오목 새김(陰刻)’ 또는 ‘오목 새김 글자’를 말한다. 곧 인쇄했을 때 글자가 희게 나오는 것이다. 이처럼 인쇄에 쓰는 용어를 조금 들어 본다. ‘가리초(임시 번호), 가이코(회교쇄), 갸쿠초(역순 쪽), 게시타(밑 여백), 고세이즈리(교정쇄), 교쿠리(항넘기기), 구치에(머리그림), 도메(끝), 도모가이(같은 종이), 돈보(빗줄), 미혼구미(본보기 조판), 오쿠쓰케(판권지), 게시모지(지운 글자), 구로마루(검정 동그라미), 나라비센(기준선)’.


            (22) 하구언

  ‘낙동강 하구언(河口堰)’은 철새가 오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최근에는 무분별한 개발과 오염으로 철새들이 떠나고는 그다지 많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기사가 가끔 신문에 난다. ‘하구언’은 알기 쉽게 ‘강어귀 둑’이라 하는 것이 좋겠다.


            (23) 역할

  ‘역할 분담’이란 말이 자주 신문에 오르내린다. ‘할 일 나누기’로 했으면 한다. ‘역할(役割)’은 ‘아쿠와리’라고 하는데, 일본에서 역을 나누어 맡기는 뜻으로 쓰인다. 구실이나 할 일로 쓰면 된다.


            (24) 연면적

  연면적(延面積)은 ‘전체 넓이’로, 연인원(延人員)은 ‘사람 모두’로 쓰면 무슨 말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새로운 건물이 완성되면, 연면적 몇 십만 평에 연인원 몇 십만을 동원하여 동양 최대의 건물을 준공하였다고 한다.


            (25) 일부

  직장에서 발령을 받으면 며칠 부냐고 묻는다. 무슨 장관이 25일부(日附)로 발령이 났다고 한다. 우리말 ‘날 또는 날짜’로 하면 좋겠다. 군대에 가면 신고를 많이 한다. ‘전입, 전출, 외출, 외박, 휴가, 제대, 교육’ 등 신고로 시작하여 신고로 끝나는 곳이 군대다. 이때 어김없이 ‘일부’를 쓴다. ‘이병 ○○○는 1995년 5월 1일부로 제1소대 전입을 명 받았습니다. 단결.’ 처음 군대에 가서 언 나머지 신고를 제대로 하지 못해 수십 번을 되풀이하는 이들이 많다.


            (26) 저인망 어선

  저인망 어선(底引網漁船)은 밑에서 그물로 후리치는 고깃배다. 고정되어 있지 않은 그물은 ‘유자망(流刺網)’이라 하며, 고정되어 있는 붙박이 그물 또는 자리 그물은 ‘정치망(定置網)’이라 한다. 방송이나 신문에서 가끔 이런 말을 기사에서 쓰고 있으나 일반인들은 알아듣기 힘들다. 알맞은 우리말을 써야 하겠다.


            (27) 제본

  제본(製本)은 ‘책매기’라고 할 수 있다. 인쇄소에서 종이 등에 내용물을 인쇄하여 제본소에 넘겨 책을 맨다. 조선 시대까지는 우리나라에서 5매듭을, 중국에서 6매듭을 썼기 때문에 이를 보고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서양의 책매기 기술이 일본을 통해 들어온 뒤로는 펄프로 된 책을 매었다. 이는 종이 가루가 심하여 심지어는 입마개를 하고 일을 했으며, 70년대까지도 종이 질도 나쁘고 책매기 기술도 좋지 않아 어떤 책은 펼치면, 몇 장씩 떨어지는 책도 있었다.


            (28) 진검 승부

  1995년 4월 15일 아침 조선일보를 보다가 아직도 이런 일본어가 신문 기사에까지 나오나 하고 놀란 어휘가 바로 ‘진검 승부’다. 대중음악 평론가가 쓴 글 가운데에, “라이브 콘서트는 모든 음악가에게 최초의 자기 인식의 장(場)이자 최후의 진검(眞劍) 승부의 무대다.”라는 말이 있었다. 일본은 옛날 칼로 이기고 지는 다시 말해서 칼부림을 많이 한 겨레라서인지 칼에 대한 비유 표현이 많다. 진검 승부는 “목숨을 건” 등의 우리말로 써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Ⅲ. 마무리

  한일어의 계통 문제에 대한 논란이 여전한 가운데, 단순히 차용 곧 언어적인 간섭의 차원에서 보면, 형성기에서부터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말이 일방적으로 일본어에 침투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현재 남아 있는 문헌적인 면에서나 비교 언어학적인 면에서도 증명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높은 문화가 상대적으로 낮았던 일본 문화에 거의 일방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역사적인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문화적 차용으로 또는 밀접 차용으로도 볼 수 있다.
  개화기에 이르러서는 서양의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이 중국을 통해서도 들어왔지만, 일본을 통해 집중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에는 거의 일방적으로 일본을 통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신문과 방송이라는 새로운 전달 매체가 서양에서 일본을 거쳐 들어오면서 기술적인 용어와 보도 용어에도 상당수의 언어적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일본어 및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 그리고 서양어가 일본을 거쳐 우리말에 들어왔다.
  8.15 광복과 더불어 일본인들이 물러가고 그 자리에 미국인들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동안 써 오던 언어는 끊임없이 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소수의 영어가 우리말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60년대에 한일 국교 정상화와 더불어 다시 일본으로부터 서양의 문화 및 문명이 들어오면서 일본에서 유행하던 것은 금새 우리나라에도 유행하게 되고 말도 다시 들어왔다. 그것은 서양으로부터 곧바로 그런 것을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겉으로는 일제 잔재를 없앤다고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거의 모든 것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는 많은 것을 일본에 기대다 보니까 자연 그들의 언어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신문과 방송은 일본 것을 흉내내기에 바빴기 때문에 우리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남쪽에서는 국어 순화 운동이 북쪽에서는 말 다듬기 운동이 펼쳐져 일본어를 우리말로 고치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말 깊숙이 들어와 버젓이 우리말 국어사전에까지 올림말로 올라 있는 말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감정적인 차원에서 하루아침에 일본어를 버릴 수도 있지만, 마땅히 우리말로 옮기기가 어려운 한자어 등은 문화적인 차용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아직도 신문과 방송에 자주 쓰이는 말 가운데, 일본어 토박이말 20개와 일본어와 서양어가 합성된 어휘, 일본 한자어 등을 28개 골라 합성 원리 및 어원 그리고 그에 얽힌 이야기 등으로 적었다. 일본어 토박이말은 주로 신문 방송의 제작 용어로 아직도 쓰이고 있으며, 기사 등 보도에는 그다지 쓰이지 않고 있다.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일본에서 서양어를 한자어로 만든 것이다. 이것을 우리말에 그냥 우리 한자 발음으로 쓰고 있다. 또한 서양어를 일본식 발음으로 쓰는 것도 있고, ‘주식(株式)’처럼 우리 한자 발음으로도 쓰고 ‘가부시키’처럼 일본어 발음으로도 쓰는 것이 있다. ‘리모콘’처럼 일본에서 만든 서양어도 있으며, ‘전자렌지’처럼 서양어와 다르게 일본에서 한자어와 서양어를 합성한 것도 우리들은 그대로 받아쓰고 있다.
  오늘날 신문과 방송의 위력은 대단하다. 특히 텔레비전은 우리의 언어생활을 좌우하고 있다. 세계화라는 깃발을 내걸면서 마치 외국어를 많이 써야 세계화인 양 착각하지 말고 우리말을 살려 쓰는데 신문과 방송이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언어생활을 보람되게 하고 나아가 진정한 세계화를 이룩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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