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종합국어대사전 편찬】 |
-사전 편찬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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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에 대한 단상
안상순 / 금성출판사 사전 편찬실 국어부장
내 사무실 책상 위에는 지난 반세기 동안 출간된 국어사전 가운데 주요한 것들이 두루 꽂혀있다. 1940년대의 문세영 사전을 그 첫머리로 하여 요 근래에 나온 一石 선생의 개정판 대사전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사전이 다수 갖춰져 있다. 나의 하루 일과는 이들 사전을 펼치면서 시작되어 그것을 덮으면서 끝이 난다. 내게 부여된 일이 국어사전 편찬이니만큼 선행 사전들은 아주 중요한 지침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그 사전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사전의 행간에서 우리말을 갈고 다듬기 위한 선각들의 고뇌를 읽기도 하고 우리말 사랑에 대한 웅승깊은 咳唾를 접하기도 한다. 우리말을 지어 낸 사전이 아니던가? 그런 뜻에서 국어사전은 한낱 단어의 집합체가 아니라, 민족의 얼과 혼이 깃들인 민족어의 성스런 곳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냉철하게 자문해 본다. 오늘날 간행되고 있는 후발 사전들이 선학의 고귀한 뜻을 얼마만큼 훌륭히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가?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유감스럽게도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나는 극히 제약된 지면을 통해서나마 이에 대한 나의 짧은 생각을 토로하고자 한다. 그것은 기존 사전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내가 참여한 사전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기도 하다.
맨 먼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단어의 정의에 관한 것이다. 의미 주석이 정곡을 찌르지 못하거나 단어의 독자적 의미 자질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나치게 逐字的이거나 유사어끼리 순환적 동어 반복에 빠지기 일쑤다. 가령, ‘양복’을 ‘서양식 의복’이라고 한 정의는 수정되어야 옳다. 이는 ‘洋’은 ‘서양’, ‘腹’은 ‘의복’하는 식의 자구에 얽매인 풀이로서, ‘양복’이 가지는 개념의 범위를 정확히 한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풀이는 마땅히 서양식 옷 가운데서도 남성용 정장이라는 핵심에 도달해야 한다. 또 ‘예쁘다’를 ‘아름답고 귀엽다’, ‘아름답다’를 ‘예쁘고 곱다’, ‘곱다’를 ‘산뜻하고 아름답다’라고 하는 순환 정의 방식도 극복되어야 할 고질적 병폐 중의 하나다. 이들 단어들은 분명 의미 영역에 있어서 상당 부분을 서로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다른 말로 대치할 수 없는 독자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다. 사전은 그것을 족집게처럼 꼬집어 내어야 한다.
아울러 유사어를 완전 동의어 취급을 하여 풀이를 어느 한쪽으로 몰아 버리는 행태도 고쳐져야 한다. 일반 어휘에 있어서 완전 동의어란 거의 없다. 가령, ‘수영’과 ‘헤엄’의 경우, 거의 모든 사전들은 ‘수영’에서 뜻풀이를 하지 않고 ‘헤엄’에서 그 내용을 보도록 하고 있다. 말하자면, ‘수영’을 ‘헤엄’의 완전 동의어로 취급한 셈이다. 그러나 ‘수영 선수’를 ‘헤엄 선수’라 하지 않을 뿐더러 ‘수영을 즐기다’를 ‘헤엄을 즐기다’로 표현하지 않으며, ‘어항 속에서 헤엄치는 열대어’를 ‘수영하는 열대어’로 바꾸어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수영’과 ‘헤엄’은 각기의 의미 특성을 살려 따로따로 풀이를 주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 사전에는 死語 표시가 없다. 기껏해야 고유어에 한정하여 古語 표시가 있을 뿐이다(일부 한자어가 이 대상에 포함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현대어와 한글 표기의 차이가 있을 때에 한한다). 그리하여 經世濟民의 뜻인 ‘경제’가 이코노미(economy)의 뜻인‘경제’와 나란히 동시대의 단어가 되어 버린다. 마찬가지로, 죄인을 풀어 주는 것을 뜻하는 ‘放送’이 브로드캐스팅(broadcasting)을 뜻하는 ‘방송’과 버젓이 현대어의 자격을 누린다. 이는 결코 올바른 정보가 아니다. 사전을 한 시대 전의 어휘에 대해 그것이 사어이거나 사어의 길을 걷고 있음을 밝혀야 하며, 그게 아니라면 철저히 共時的 태도를 견지하여 아예 그런 어휘를 배제해 버려야 한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또 하나의 문제는 표제어에 관련된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표제어 선정에 있어서 그 기준이 모호하고 무원칙함을 알 수 있다. 어떤 말이 사전의 표제어로 오르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단일어이거나 파생어이거나 합성어이어야 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합성어를 運語(collocation)와 구별하는 일이다. 연어는 말 그대로 두 개 이상의 단어가 관습적으로 이어져 나타나는 언어 단위로, 합성어와 구별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우리 사전의 경우 이 구별이 불철저하여 다음과 같은 예에서 논리적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다. 곧, ‘뱃속/머리 속, 어젯밤/ 오늘 밤’과 같은 체언+체언의 형태, ‘베어먹다/씹어 먹다, 건너오다/거슬러 오다’와 같은 용언+용언의 형태, ‘화나다/짜증 나다, 재미있다/흥미 있다’와 같은 체언+용언의 형태에 있어서, / 앞의 것은 표제어로 취하고 / 뒤의 것은 표제어에서 배제함으로써 합리성을 잃고 있다.
한편, 띄어쓰기 규범에 중요한 기준이 되는 하이픈 처리(표제어의 하이픈은 직접 구성 성분의 분석과 같은 또 다른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에 있어서, 사전은 각기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어 극도의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가령, ‘바늘-방석/바늘 방석, 김치-찌개/김치 찌개, 밀짚-모자/밀짚 모자, 국민-학교/국민 학교’ 등의 예에서, 어느 사전은 앞의 것을 택하는가 하면, 다른 사전은 뒤의 것을 취하고 또 다른 사전은 경우에 따라 달리 처리하기도 한다. 사전들의 이러한 차이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띄어쓰기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는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나는 지금까지 국어사전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거칠게나마 몇 가지 훑어보았다(이외에도 많은 문제가 있지만 지면 관계상 차후의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은 사전 편찬자들의 노력만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말할 필요도 없이 학자들의 학문적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동안 국어학자들은 국어사전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고, 사전 편찬자는 학문의 성과를 등한시해 온 경향이 없지 않았다. 양자는 이제 서로 삼투해야만 한다. 편찬자는 학문의 성과를 등한시해 온 경향이 없지 않았다. 양자는 이제 서로 삼투해야만 한다. 편찬자는 새롭고 유익한 이론을 섭렵해야 하고 학자들은 그동안 학문이 미치지 못했던 사전의 사각지대에 눈을 돌려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근자에 들어 학계에 사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고, 사전 편찬자들 역시 환골탈태하려는 자세와 의욕을 보이고 있다. 나는 이런 현상이 머지않은 장래에 국어사전의 중흥을 기약하는 상서로운 조짐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