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종합국어대사전 편찬】

-종합국어대사전에 바란다.-

규범성과 충실성의 문제

任洪彬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규범 사전 편찬의 당위성

  국립국어연구원이 ‘종합국어대사전’을 편찬한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국어사전 편찬은 국립국어연구원의 고유 업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업무 중에는 국어의 실태 조사도 있을 것이고 국어의 순화와 발전과 관련되는 업무도 있을 것이고, 남북한 언어 문제와 관련되는 일도 있을 것이며, 나아가 국어학이나 국어 교육의 발전을 위한 사업도 있을 것이나, 국어 정책의 입안과 시행 및 국어의 규범화 사업은 국립국어연구원의 고유 업무 중에서도 고유 업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중에서 국어의 규범화 사업과 직접 관련되는 것이 사전 편찬이다. 따라서 국립국어연구원이 편찬하는 ‘종합국어대사전’은 제1차적으로 규범 사전의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말 규범 사전이 편찬되어야 하는가? 현재 나와 있는 사전에는 규범 사전이 없기 때문이다. 사전에 따라 다른 표기도 있고, 일반 사전에서 확인할 수 없는 규범적인 사항도 있다. 출판이나 방송 관계인은 물론 일반인들도 정확한 국어 생활에 있어 곤경에 처하는 일이 적지 않다. 국어의 어문 규범을 다루는 기관에서 가능한 한 많은 표제항을 수록하여 규범 사전을 편찬한다면, 이러한 고충이나 고통은 어느 정도, 때론 상당한 정도까지 경감될 수 있을 것이다. 혹 규범은 정해진 것이 있으므로 그것을 참고로 하면 될 것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문 규범은 원칙과 약간의 예만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국어의 전면적인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전면적인 현실은 사전을 편찬하면서 부딪히게 된다. 사전 편찬 과정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해결되지 않을 수 없다. 규범적인 국어 대사전 편찬이 왜 중요한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 분명하다.
  기존의 우리 사전이 가지는 고질적인 결함의 하나로 흔히 지적되는 것은 그것이 언어 현실에 대한 반영으로서의 충실성에 결함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를 ‘충실성의 결함’이란 말로 부르기로 하자, 사전은 가능한 한, 언어 현실을 올바르게 또 풍부하게 반영해야 한다. 우리 사전에서 ‘충실성의 결함’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뜻풀이의 결함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 골이 깊은 것이며, 문법 정보의 결함도 적지 않고, 음성이나 음운 정보도 사전에서 제공하는 정보만으로는 국어 생활을 정확하고 원만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해당 표제항의 쓰임을 알려 줄 수 있는 예문의 부족이나 부재(不在)를 치명적인 것으로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이러한 결함은 사전 편찬에 따르는 예산 부족, 전문 인력 부족, 시간 부족에서 연원한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정부 기관에서 편찬하는 사전이라면, 상업 출판이 어쩔 수 없이 가지는 결함들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 것이다. 사전 편찬을 위한 충분한 예산이 주어지고, 정해진 시간 안에 무조건 사전을 편찬해서 내야 하는 한시적인 강박성에 쫓기지 않는다면, 또 전문 인력이 동원되고 편찬 자료의 전산 처리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상업 출판이 가지는 결함은 상당한 정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원리적인 출발점이다. 이 원리의 두 축은 규범성의 원칙과 충실성의 원칙이다. 앞의 것은 사전 편찬의 목적에 해당하는 원칙이며, 뒤의 것은 사전 편찬의 기술적인 지침의 성격을 가진다. 이들은 사전 편찬 과정에서 혹 길을 잃는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언제라도 다시 돌아보고 다시 확인하고 점검해야 할 대전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규범성과 충실성의 원리와 관련하여 필자가 관심을 가지는 몇 가지 문제와 더불어 기타의 문제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제시하기로 한다.
  여기에 제시된 의견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2. 규범성과 그 적용의 한계

  규범 사전은 국어 어휘의 전 영역에 걸쳐 어문 규범을 전체적으로 완전하고도 엄격하게 적용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규범 사전 편찬의 기본 목적에 속하는 사항이므로 당연한 일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규범 사전을 편찬하는 분들이 처음부터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은 이 사전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규범적인 것이고, 어디서부터는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는 일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는 온전한 의미의 규범 사전을 가져 본 역사가 없기 때문에, 규범 사전 편찬이 우리의 어문 생활 전반에 걸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예비 지식도 가지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규범 사전이 없는 현재로서는 단지 규범 사전 편찬이 반가울 뿐이며, 그것이 우리 어문 생활의 불편을 제거하는 데 큰 몫을 하게 되리라고 생각할 뿐이다. 다만 규범 사전의 순기능만이 부각되고, 그 역기능은 전혀 생각 밖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
  우선 규범 사전 속의 어떤 사항이 어떠한 성격을 가질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규범 사전이라고 하더라도, 표제항의 크기나 글자체와 같은 것이 규범적인 성격을 띨 리는 없다. 면 배치와 같은 편집 체재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어서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그 외의 사항에 이르면 어느 것이 규범적인 것인지 또는 어느 것이 그렇지 않은지가 매우 분명치 않게 될 가능성이 있다. 현대 국어에 관한 한, 표제항으로서의 등재 여부, 표기 방식, 띄어쓰기, 발음 표시, 표준어와 비표준어에 대한 판정 등은 규범적인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편집 체재를 규범성과 전혀 무관한 사항이라고 한다면, 이들은 규범성과 직접 관련되는 사항이다. 이 둘은 규범성의 양극단을 이루는 두 개의 축이다. 그 중간쯤에 뜻풀이가 있고 문법 사항이 위치한다.
  규범 사전의 뜻풀이는 규범적인 것인가? 표기의 차이가 뜻풀이의 차이와 대응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뜻풀이 자체가 규범이 되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뜻풀이는 대부분의 경우 불완전한 것이 일반적이며, 자칫 잘못될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것까지를 규범으로 받아들인다면, 규범 사항이 너무 많아지는 문제는 차지하고라도, 틀린 사항까지를 일반에게 강요하는 결과를 빚게 된다. 이는 규범 사전 편찬이 가지는 역기능적인 측면이다. 뜻풀이는 본래적으로 완전할 수 없다는 믿음이 뜻풀이의 규범성을 약화시킬 것으로 예상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일이며,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규범 사전이 법정 싸움의 증거로 채택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문법 사항은 어떨 것인가? 뜻풀이보다 더 규범적인 것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다. 규범적인 제약을 덜 받는 출판물에서도 그러한 현상은 나타날 것이지만, 규범적인 제약을 강하게 받는 출판물에서는 규범 사전의 문법 사항은 움직일 수 없는 철칙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교과서는 물론 참고서에서도 규범 사전에 기술된 사항은 단 하나도 어길 수 없는 것으로 볼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학교 문법이 ‘이다’를 ‘서술격 조사’로 못 박고 있는 사실과도 흡사하고 규범을 따른 출판물들이 ‘서술격 조사’설을 무조건적으로 따르고, 다른 논의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도 흡사하다. 예전에는 ‘ㄹ 불규칙 활용’으로 분류되고 또 그렇게 알았던 것이 새로운 문법서 이후, 이것이 대부분의 사전에서 ‘ㄹ 탈락’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도 같다(‘한글 맞춤법’에 의하면 이는 분명히 ‘ㄹ 불규칙을 활용’이다)
  이러한 현상은 규범의 적용이 가지는 역기능적인 측면의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국어 어휘의 전 영역에 걸쳐 이러한 성격의 규범이 확대되는 경우, 그 영향은 결코 미미한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사전 편찬 담당자들은 우선은 무엇이 규범적인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가능한 한 규범 사전에 어떠한 종류의 오류도 포함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규범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빈틈이 없어야 하고, 언어생활의 실제에 있어서 우리가 당면하는 문제들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아주 큰 문제에서부터 사소한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항상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언어생활의 실제에서 부딪히는 사소한 문제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규범 적용에 있어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물론 규범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 있어서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소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큰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규범 사전 편찬의 의의는 크게 손상된다. 가까운 예를 들면 가령, ‘가슴속, 마음속, 머릿속, 몸속, 물속, 바닷속, 뼛속(편의상 모두 붙여 쓰기로 한다)’ 같은 예의 ‘속’을 띄어 써야 할지 붙여 써야 할지에 대하여 일반인은 물론 전문가들조차 당황하는 일이 많은 것이다. 규범을 크게만 문제 삼는다면, 이러한 문제들은 그냥 지나칠 가능성이 있다.
  규범의 측면에서 보면, 규범 사전의 편찬은 규범을 적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의 범위 안에서 규범을 완성하는 의미를 가진다. 이에는 두 가지 작업이 포함된다. 하나는 규범의 적용 영역을 확대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규범의 미비 영역이나 규범의 충돌 영역에 대해서 올바른 규범을 확립하는 일이다. 얼른 보면, 규범 적용 영역의 확대는 기계적인 적용이 가능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규범의 적용이 유추적인 해석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 두 작업이 원리적으로는 구별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그 성격이 그렇게 다르다고 볼 수는 없다. 실제로 표준어 사정을 국어의 전 영역에 대하여 확대하는 일은 아직 남아 있는 작업이며, 우리의 어문 규범에 의하여 이미 정해진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규범과 규범이 충돌하는 경우 또는 규범의 미비 사항 또는 문제가 있는 규범 사항에 대해서도 차근차근히 그 미비점을 보충하고, 갈등을 해소하고 조정해 나가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규범에 대한 부분적인 개정 작업도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충돌되는 규범을 적용하여 실제로 어느 한 형식을 선택하였다면, 그것은 실제로 규범의 개정 작업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형식적으로만 남아 있는 규범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다.


3. 기술의 충실성 문제

  사전 기술이 최대한 충실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비단 규범 사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규범 사전은 어느 경우 사전적인 기술 모두가 규범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충실성에 대한 요구는 어느 사전에 대해서보다도 크다고 할 수 있다. 단 하나의 기술도 소홀히 할 수 없으며, 단 하나의 사항도 가볍게 흘려 보낼 수 없다. 여기서는 사전 기술과 관련되는 문제 전반을 다룰 수는 없으므로, 뜻풀이와 문법 사항에 관한 몇 가지 문제만을 극히 부분적으로 다루어 보기로 한다.
  사전 뜻풀이가 갖추어야 할 이상은 그 쓰임의 정확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유사한 의미를 가지는 표제항의 뜻풀이 자체가 그 의미 차이를 변별할 수 있게 하는 뜻풀이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방법론의 하나는 유사한 의미를 가지는 표제항을 함께 묶어 뜻풀이를 하는 것이다. 이를 ‘유사어 집필법’ 또는 ‘유사어 점검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뜻풀이를 역으로 적용하여 문제의 대상이 표제항의 지시 대상으로만 환원될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일이다. 이를 ‘역방향 점검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뜻풀이의 기본 원리를 ‘종차+유개념’으로 정하였을 때 이미 분명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뜻풀이의 실제에서 그러한 원칙들이 잘 지켜지지 않은 것이 문제인 것이다. 예시를 위하여 ‘가시’의 뜻풀이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1) 가시2 [명] 음식물에 생긴 구더기.
  국어사전의 일반적인 뜻풀이는 (1)과 같이 되어 있다. 그러나 (1)과 같은 뜻풀이만으로는 ‘가시’의 의미가 정확하게 기술되었다고도 하기 어렵고, ‘가시’와 ‘구더기’의 차이가 정확하게 기술되었다고 하기도 어렵다. 우선 ‘음식물’에 생긴 구더기의 예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음식물’ 중에는 쓰레기통에 버린 것도 있다. 거기에 구더기가 생겼다고 하여 보자, 그것을 우리는 ‘가시’라고 부르는가? 그렇지 않다. 이번에는 밥을 먹다가 남겨 둔 그릇에 구더기가 생겼다고 하여 보자. 그것을 ‘가시’라고 부르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가시’의 뜻풀이로 제시된 ‘음식물에 생긴 구더기’라는 풀이는 정확한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정확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뜻풀이항의 외연이 표제항의 외연보다 큰 것이다. 이러한 비교 접근법이 ‘역방향 점검법’이다. 이러한 점검에 의하여 ‘가시’에 대한 사전 뜻풀이가 가지는 약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우리는 어디에 생긴 구더기를 ‘가시’라고 하는가? 주로 된장이나 고추장에 생긴 구더기를 ‘가시’라고 한다. 이를 뜻풀이에 반영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2) 가시2 [명] 된장이나 고추장과 같은 음식물에 생긴 구더기.
  이렇게만 한다고 하더라도, 기존 사전의 ‘가시’에 대한 뜻풀이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이 정도라도, ‘가시’에 관한 한, 이제까지의 어떠한 국어사전보다도 그 수준이 한 차원 높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살펴보기로 하자. 된장이나 고추장도 쓰레기로 버린 것이 있을 수 있다. 거기에 생긴 구더기도 ‘가시’라고 할 것인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뜻풀이도 만족스러운 것이 되지 못한다.
  (2)의 ‘된장이나 고추장’은 독이나 종지 따위의 그릇에 들어 있는 것으로 우리가 먹을 음식물을 뜻하는 것이다. 이를 굳이 뜻풀이에 반영하지 않더라도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람은 사전 뜻풀이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가시’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전에서 ‘가시’를 뜻풀이하는 목적은 그 뜻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가시’의 뜻을 아는 사람을 위하여 사전을 편찬하는 것이라면, ‘가시’에 대한 뜻풀이는 필요 없다. 그러나 ‘가시’의 뜻을 안다고 하는 사람도 그 의미를 명시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다.
  버린 된장이나 고추장에 생긴 구더기를 ‘가시’라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영하여 ‘가시’를 다시 다음과 같이 풀이해 보기로 하자
(3) 가시2 [명] 독이나 종지 따위의 그릇에 담긴 된장이나 고추장과 같은 음식물에 생긴 구더기.
(4) 가시2 [명] 장차 먹을 된장이나 고추장과 같은 음식물에 생긴 구더기.
  (3)의 뜻풀이는 ‘그릇’을 부각시킨 것이고, (4)의 뜻풀이는 사람이 먹을 대상이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거의 먹지 못하게 되어, 내어다 버리려고 하는 된장이나 고추장에 생긴 구더기도 ‘가시’라고 할 가능성이 있기는 하나, 먹을 음식물이라는 의미 관련이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므로, (3)보다는 (4)가 더 적합한 뜻풀이인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
  그러나 (4)로 충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된장이나 고추장에 생긴 가시를 ‘구더기’라고 부르는 일도 있다. 어린아이들이 철없이 말할 때 나 어른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먹는 것과 관련시키지 않을 때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가 쓰는 말인가? 주로 음식을 만드는 주부들이 쓰는 말이다. 음식을 만드는 주부들이 혹시라도 아이들 귀에 들어갈까 혹은 집안 남자들이 들을까 염려하여 작은 소리로 하는 말이다. 물론 남편들도 ‘가시’라는 말을 쓸 수 있고, 들어서 그 뜻을 알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말은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잘 쓰지 않는 말이다. 집안 남자들은 ‘가시’를 걷어내고 들여온 고추장을 군소리 없이 먹어야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의미를 반영하여 ‘가시’를 풀이면 다음과 같이 된다.
(5) 가시2 [명] 주로 집안의 주부들이 장차 먹을 된장이나 고추장과 같은 음식물에 생긴 구더기를 완곡하게 이르는 말
  (5)는 ‘가시’를 ‘구더기’의 완곡어법으로 파악한 것이다. (5)에 이르러서야 ‘가시’와 ‘구더기’의 의미 차이가 어느 정도 변별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결과는 ‘유사어 점검법’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다. 물론 (5)에 대해서도 반성의 여지는 있다. ‘가시’라는 말이 정말로 주로 ‘집안의 주부들’이 쓰는 말인가, 아니면 이미 사회 일반의 공통어의 자격을 획득한 것인가 하는 것. ‘구더기’에 대하여 ‘가시’가 정말로 완곡어법의 성격을 가지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구더기’를 달리 이르는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 또는 그 뜻풀이에 포함되는 주체를 ‘집안의 주부들’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단순히 ‘주부들’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혹은 ‘집안의 여자들’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아낙네들’이라고 하는 것이 적합한가 하는 것 등이 정밀하게 따져져야 한다. 그러나 우선은 사전의 의미 기술에 포함되어야 할 주요한 의미 사항이 대체로는 모두 밝혀졌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작업이 가지는 의의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보다가 궁극에는 결국 (1)과 같은 뜻풀이로 다시 되돌아가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작업이 없이는, 또는 다른 방법으로라도 의미 기술과 관련되는 사항들을 철저하게 점검해 보지 않고는 사전 기술에 있어서의 뜻풀이의 충실성은 기할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다음 예를 보기로 하자.
(6) 같다 [형] ⑦ (‘같아서(는)’의 꼴로, 마음·생각 따위의 명사 또는 일부 시간을 나타내는 명사 뒤에 쓰여)‘~으로는, ~에는’의 뜻으로 실제는 그렇지 않음을 나타낸다.
  ‘같다’의 일곱 번째 뜻을 (6)과 같이 풀이하였다고 하여 보자, (6)이 기술하려고 하는 것을 필자가 이해한 대로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7) 가. 제7의 뜻은 ‘같아서. 같아서는’과 같은 형식이 배타적으로 가지는 의미이다.
나. 제7의 뜻은 ‘같아서, 같아서는’ 앞에 주로 마음·생각 따위의 명사나 일부 시간을 나타내는 명사가 오는 경우에 한하여 생기는 의미이다.
다. 제7의 뜻은 가령 ‘마음 같아서는, 생각 같아서는’과 같은 구성이 가지는 의미이다.
라. ‘마음 같아서는, 생각 같아서는’의 의미의 하나는 ‘마음으로는, 마음에는, 생각으로는, 생각에는’ 등과 같은 구성이 가지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마. 제7의 뜻은 위의 (7라)의 형식이 가지는 의미 전부가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6)은 매우 정밀한 뜻풀이의 형식을 띠고 있으나, 뜻풀이의 충실성이라는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가진다. 먼저 ‘같다’의 일곱 번째 뜻과 관련되는 구성의 예를 보기로 한다.
(8) 가. 내 생각 {*같아서, 같아서는} 그를 한 대 때리고 싶다.
나. 내 생각 {으로는, 에는} 그를 한 대 때리고 싶다.
다. 어제 {*같아서, 같아서는} 그를 한 대 때리고야 말았을 것이다.
라. 어제 {??로는, *에는} 그를 한 대 때리고야 말았을 것이다.
(9) 가. 내 생각 같으면 그를 한 대 때렸을 것이다.
나. 뉴욕 같아서는 하루도 마음 편히 살지 못할 것이다.
다. 그 사람 같아서야 어디 같이 일을 하겠느냐?
라. 그 사람 같아도 그렇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 ?그 사람 같아는 도저히 함께 일을 할 수 없다.
  (8가)를 보면, (7가)는 문제의 뜻을 가지는 형식에 대한 기술이 정확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같아서’는 성립하지 않고, ‘같아서는’과 같이 ‘는’을 가져야만 온전한 의미를 이룰 수 있다. 따라서 적어도 (6)의 ‘같아서(는)’과 같이 ‘는’에 괄호를 해서는 적합한 형식에 대한 제시가 되지 못한다. 이번에는 (9가, 다, 라, 마)를 볼 필요가 있다. ‘같아서는’이라는 형식으로만 그러한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같으면, 같아서야, 같아도, ?같아’도 (6)이 기술하려고 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7나)를 보기로 하자. (6)이 기술하려는 의미를 ‘같다’ 앞에 마음이나 생각이나 일부 시간을 나타내는 명사가 올 때에만 가능한 뜻인가? 그렇지 않다. 이러한 기술이 옳은 것이라면, (9나, 다, 라 마)는 모두 잘못된 어법이거나 (6)의 의미와는 다른 뜻이어야 한다. 그러나 (9마) 정도가 다소 이상할 뿐(아주 이상한 것은 아니다), (9)의 예들은 전체적으로 이상을 가지지 않는 예이며, (6)이 기술하려는 의미와 그렇게 다른 것이라고도 보기 어렵다.
  (7다)와 같은 풀이법은 그런 대로 전통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풀이가 정말로 효과적인 것인지도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6)의 괄호 속에 들어 있는, 의미 관련 활용이나 문맥 정보(‘기타 문법 정보’이다)에는 ‘일부 시간을 나타내는 명사’라는 것이 들어 있다. ‘사명’이나 ‘생각’은 (8나)에서와 같이 예시된 형식으로의 대치가 가능하나, (8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어제’에 대해서는 ‘~으로는, ~에는’과 같은 형식으로 대치가 불가능함을 보인다. ‘마음’이나 ‘생각’이라는 명사와 시간 관계 명사의 행동 방식이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둘이 하나의 풀이로 묶이기 어려움을 보이거나 의미 관련 활용 정보나 문맥 정보가 지나치게 제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7마)도 (6)에서의 기술만으로는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내 생각 같아서는 무엇이 어떠한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가 하면,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것은 ‘무엇이 어떠한다’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6)에 주어진 풀이만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문제의 풀이항에 포함된 내용을 실제로 적용해 보거나 다른 예들을 점검해 보는 것도 ‘역방향 점검법’의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뜻풀이를 한 뒤에 반드시 이와 같은 점검 과정을 거쳐야 풀이항이 단단하고 오류가 없는 것이 될 수 있다.
  다음 예를 하나 더 보기로 하자.
(10) 강-마르다 [형] ① (주로 관형사형으로 쓰여) 물기가 없이 매우 메마르다.
  (10)에는 우선 표제어의 문제가 있다. ‘강마르다’는 말은 구어에서 실제로 쓰이는 말이 아니다. 문어에서 나 쓰이고 또 그렇게밖에는 쓰일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구어에서 쓰이는 말은 ‘깡마르다’이다. 따라서 우선은 어떤 사전이 ‘강마르다’만 표제어로 올리고, ‘깡마르다’를 올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현대성의 원칙’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다. 둘째는 ‘깡마르다’와 ‘강마르다’를 단순히 센말과 약한말과의 관계로만 파악한다면 그것 역시 현대성에 충실한 사전 기술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동안 우리 사전이 비교적 관심을 덜 기울인 문제의 하나가 구어에만 쓰이는 말과 문어에만 쓰이는 말의 구별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나친 욕심의 하나일지 모르나, 이 구별에도 상당한 정도의 관심을 기울일 것이 요망된다.
  둘째는 품사 구분에 관한 것이다. 특히 동사와 형용사의 구분은 자칫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이에 대해서는 ‘못생기다, 못나다, 못살다, 늙다, 낡다’ 등과 관련하여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한 일이 있으나, 특히 상태성의 의미를 가지는 동사의 경우 형용사와 동사의 구분이 상당한 정도로 혼동을 보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사전이다. (10)의 경우에도 ‘강마르다’는 상태성을 강하게 가지는 말이기 때문에 그 품사를 형용사로 판단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다음 예를 보기로 하자.
(11) 가. 강마른 얼굴/논바닥.
나. 그의 얼굴은/논바닥은 매우 강말라 있었다.
다. 얼굴이/논바닥이 너무나 강말랐다.
라. *얼굴이/논바닥이 너무나 강마르다.
마. ?? 얼굴이/논바닥이 너무나 강마른다.
(12) 가. 목욕을 하였더니 목이 마르다/마른다.
나. 나그네가 손바닥 물로 마른 목을 축인다.
(13) 가. 가뭄으로 논바닥에 물이 마른다/*마르다.
나. 마른 논에 물을 댄다.
(14) 가. 그 사람은 몸이 너무 마른다/*마르다.
나. 마른 사람이 건강하다.
  (10)의 괄호 속에 든 활용 정보는 (11가)와 같은 예의 밑줄 친 부분과 같은 형식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강마르다’가 ‘강마른’과 같은 형식으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11나)의 ‘강말라’나 (11다)의 ‘강말랐다’와 같은 형식도 쓰인다. 그렇다면 (10)의 괄호 속에 든 활용 정보는 정확한 것이 되지 못한다. 비록 거기에 ‘주로’와 같은 양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형식을 배제하게 된다. 이러한 기술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
  품사 구분과 관련되는 것은 (11라)이다. 형용사로 ‘강마르다’와 같은 기본형이 성립에 이상을 보인다는 사실에 의심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형용사와 동사의 구분이 문제될 때에는 우선 기본형이 성립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 보는 것이 유익하다. 물론 (11마)에서와 같이 ‘강마른다’가 성립하지 않는 것도 품사 판단을 흐리게 할 염려가 있는 것이나, ‘-느-’ 연결형을 성립시키지 않는 동사도 많으므로, ‘-느-’ 연결에 의한 검증은 품사 분류의 결정적인 장면에 있어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12), (13), (14)는 ‘마르다’의 예를 보인 것이다. ‘강마르다’의 ‘강-’이 ‘마르다’ 앞에 연결된 것이므로, 본래의 ‘마르다’의 품사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12)는 ‘(목이) 마르다’의 예를 보인 것이고, (14)는 ‘(몸이) 마르다’의 예를 보인 것이다. (12가)에는 ‘마르다’와 ‘마른다’가 다 쓰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13가)와 (14가)에서는 ‘마른다’는 쓰일 수 있어도 ‘마르다’는 쓰일 수 없다. (12)와, (13) 및 (14)의 ‘마르다’가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지는 용언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0)의 ‘강마르다’의 ‘마르다’는 어떤 ‘마르다’인가? 적어도 ‘강마르다’의 ‘마르다’는 (12)의 ‘(목이) 마르다’와는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목이) 마르다’는 유일하게 ‘마르다’ 형을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활용을 허용하지 않는 ‘강마르다’가 그와 동질적인 것일 리 없다. 그 관련은 일차적으로 배제된다. 이는 ‘강마르다’가 형용사가 아님을 말해 준다. 실제로 우리말에 ‘*강마른 목을 축인다’와 같은 표현이 쓰이는 일은 없다. (10)의 뜻풀이는 ‘물’에 대한 것이므로, (13)이나 (14)의 예와 가까운 것이고, 그것이 ‘-느-’ 연결형을 허용하는 것이므로, 적어도 (10)의 ‘강마르다’는 동사라고 해야 한다. ‘(논바닥이) 강마른 것’과 ‘(얼굴이) 강마른 것’을 다의로 파악하느냐 동음이의로 파악하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4. 기타의 문제

  위에서 몇 가지 예를 중심으로 규범성과 충실성의 문제를 살펴보았으나, 여기서는 위에서 언급되지 않은 사항들을 단편적으로 지적해 보기로 한다.
  2절에서는 규범의 적용 문제를 주로 다루었다. 그러나, 규범은 때로 표현을 해치고, 어휘를 해친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규범에 의하여 언어 현실에 왜곡되지 않기를 바라며, 규범의 편협한 적용에 의하여 국어의 어휘들이 희생되지 않기를 바란다. ‘빌다(借)’를 ‘빌리다’로 대치한 결과 우리는 ‘빌어 표현하면’과 같은 어법을 잃게 되었다. 아직도 필자는 왜 이럴 필요가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아무런 이해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 구체적인 물건에 대해서는 ‘빌리다’를 쓰건 ‘빌다’를 쓰건 그 표현 가치가 그렇게 다르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인용을 하는 일에 대하여 ‘빌리다’를 쓰는 데에는 아직도 필자는 상당한 거부감을 느낀다.
  ‘웬지’를 잃게 된 것도 필자는 매우 애석하게 생각한다. ‘왠지’로 써야 한다고만 한다면, ‘웬지’로 말해야 하는 것도 모두 ‘왠지’로 말해야 한다. 필자의 직관으로 ‘웬지’는 ‘이유 없이’의 뜻을 가지는 부사이다. 이에 대하여 ‘왠지’는 명확하게 의문의 뜻을 가진 형식으로 인식된다. ‘왠지’가 ‘왜인지’라고 한다면 굳이 줄여서 써야 할 이유도 없다. ‘왜인지’가 더 정확하며 원리적인 형식이다. ‘나는 왜인지 슬프다’가 말해 보라. 그 의미가 ‘나는 웬지 슬프다’와는 다른 것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간 것은 왜인지 말하라’라고는 할 수 있어도 ‘그가 간 것은 웬지 말하라’와 같이는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웬지’가 독립적인 의미 영역과 쓰임을 가지는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왜’를 ‘어이하여’의 축약형에서 기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왠지’는 ‘어이하여인지’에 해당한다. 이와 달리 우리는 ‘어인지’와 같은 형식을 알고 있다. 그 축약형이 혹 ‘웬지’는 아닐까 의심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어휘는 그 형성이 전적으로 투명한 것이 아니다.
  ‘멀겋다-멀게지다’와 같은 형식에서 필자는 ‘ㅎ불규칙 용언’의 어간 뒤에 ‘-어지다’가 연결될 때의 형식은 ‘멀게지다’가 아닌 ‘멀개지다’로 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뿌옇다-뿌예지다’에서의 ‘뿌예지다’도 ‘뿌얘지다’로 해야 할 것이며 ‘허옇다-허예지다’에서의 ‘허예지다’도 ‘허얘지다’로 해야 것이다. 여기에 모음 조화가 적용된다면, ‘그렇다-그래’나 ‘저렇다-저래’에서도 ‘그래, 저래’가 ‘그레, 저레’와 같이 표기되어야 하나, 실제로 이들을 그렇게 쓰는 일은 없다. 여기서만 모음 조화를 어겨야 하는 이유를 필자는 모르고 있다.
  ‘섣달, 숟가락/숟갈, 이튿날’ 등을 ‘설달, 술가락, 이틀날’ 등에서 ‘ㄹ’이 ‘ㄷ’으로 바뀌었다는 식의 설명은 분명히 잘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분명 ‘설+(사이시옷)+달, 술+ㅅ(사이시옷)+가락/갈, 이틀+ㅅ(사이시옷)+날’과 같은 결합에서 ‘ㄹ’이 탈락하고 사이시옷이 연결된 것이다. 사이시옷이 언제나 ‘ㄷ’으로 발음되는 것일 뿐이다.
  이중 주어 구성을 현행 학교 문법에서는 서술절을 가진 구성으로 처리한다. 이는 편의적인 처리의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학생들에게 불필요하게 복잡한 문법 현상을 가리킬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배경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학교 문법도 준 규범적인 사항이므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사전도 학교 문법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잘못을 가진 문법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다른 장치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서술절 분석으로 고등학교 문법책은 쓸 수 있어도 그것으로 대사전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 문법은 예외적인 문법 현상을 제외할 수 있으나 사전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이 밖에도 뜻풀이의 구분 문제, 순환된 말의 문제, 예문의 문제, 북한말의 문제, 외래어의 문제, 표준어와 방언의 문제, 옛말의 문제, 이두의 문제 등 허다한 문제가 있으나, 여기서는 줄이기로 한다.


5. 맺음말

  사전학이나 사전 편찬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전은 문제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전 편찬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사전은 엄청난 고통의 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전 편찬을 하는 사람들은 이 고통의 짐을 지고 한없는 문제와 싸워야 하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여기서는 규범성의 문제와 충실성의 문제 및 기타의 문제를 단편적으로 살펴보았다.
  사전이 충실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두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야 한다. 좋은 사전은 절대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규범이든 기술이든 세월의 어떠한 시련에도 견디어 낼 수 있는 사전을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