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갑오경장 100년 기념】
갑오경장 전후의 국문 한문 사용 논쟁
-그 논의를 시작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김인선 / 연세 대학교 한국어 학당 강사
1. 머리말
역사는 반복한다고 했던가? 100여 년 전인 갑오경장기를 전후하여 한국인들의 문자 생활에 커다란 문제로 대두됐던 국문과 한문 사용의 문제가 요즘 다시 큰 쟁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과 현재는 그 쟁점이 다르다. 즉 그 당시는 국민1)
본고의 성격상 국문은 문맥에 따라 한글, 한글로 쓰여진 문장, 문체 등을 지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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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한글을 공식적으로 문자 생활에 등장시킴으로써 더 많이 보급시키려고 애쓴 개혁 정신의 선각자들이 위의 문제를 부담으로 여겨야 하는 데서 출발했다면 현재는 한글이 많이 보급된 상황에서 어떻게 다시 한자를 좀 더 많이 부각시켜야 하는가 하는 논의에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본고는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면서 갑오경장기 전후에 국문 한문 사용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 논의가 어떻게 시작됐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오늘날의 논쟁에 참고가 됐으면 한다.
Ⅱ. 개화파 관료들의 한글 사용과 그에 대한 논의
- “한글 전용론이란 문자 생활에서 오로지 한글만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일찌기 17세기 김만중(金萬重)의 “西浦漫筆”이나 18세기 김춘택(金春澤)의 “北軒雜說” 등에서도 제기된 일이 있는데 본격적으로 논의되기는 주시경 시대부터였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문자론이 발표되었으며 그 뒤 최현배와 허웅 등으로 그 전통은 이어졌다.”
위와 같은 김문창(1984)의 기술에서 볼 수 있듯이 본격적으로 한글 전용이 논의된 것은 주시경 시대부터였다. 그리고 주시경 시대가 서재필과 함께 “독립신문”에서 열렸다는 것은 이기문(1989)에서 깊이 있게 다루어진 바 있다.
그런데 서재필의 한글 전용론이 나오기까지에는 갑오경장에서 개혁적인 제도 개혁 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개화파 관료(서재필은 갑오경장기의 관료였음)들에 의해 일찍이 1880년대 초부터 시작된 국문의 자각 시기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순서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갑오경장을 주도한 개화파 관료는 중국 문화 전체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를 함과 동시에 민족주의 정신을 발휘한 인물들로서 한글에 대한 자각을 보여 준 흔적들이 있고 갑오경장기의 한글 개혁을 주도하기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1. 그들 중 박영효, 윤치호, 유길준은 국한문 혼용의 글로써나마 한글의 사용을 다음과 같이 실험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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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또우리 中宮殿下께오셔, 그러한 暴亂을 피셔 復位지시고 맛本大臣이 일본에와셔 日前에中宮殿下千秋節을 지, 慶祝을 측량치 못오며 오날날 자리의 諸公을 뫼와 驩樂 이러 慶事를 아르시게 攢祝오며 우리朝鮮主上과 이왕사괸나라와 장찻 친헐나라 各帝王이 聖壽無彊셔 天下이 집갓치 昇平기를 祝手오며 兼여 우리도 兄弟갓치 萬國에 泰平한 福을누리기 原하노이다…”(약 550자 중에서) |
b. |
“使臣이 이번에 我大朝鮮國大王께옵셰 부리신명을 밧자와 오온後로 大日本大皇殿下聖念으로特別이 款接 허심을입사옵고 속속히批準이되와 兩國에 和睦이 더욱깁사온일을 使臣이 歸朝와 我主上께 奏達오면 聖心이 嘉悅심 응당자별시려니와 이후도 兩國이 交際가 漸漸日新기를 바라오며 洋槍一大隊敎鍊올거슬 보신다난말삼을 外務卿樣의게 드렀사옵나이다 …” (약 300자 중에서) |
c. |
“不關其國法律稅抽之等事를 朝鮮다가 行하고자하면 萬一 그러하게되면 日本가튼나라는 비록 그러하기를 시하더라도 獨不行하면 我人民에 對하아 不利한즉 不得已 終結한 則 假令支那人이라도”(100자 미만의 글) |
d. |
“今我大朝鮮國內에 自今爲始하야 一種을 刊行하니 此는 官費로 成立하는 者이라 可謂 朝家의 盛德이요 人民의 美事니 敎育하는 權이 在此하며 開導하는 功이 在此하야 반다시 後日 廣大한 效益을 成할지라 現今 刊行度數난 遂日 印出하지 못하고 僅一Ꞣ間 幾回로 定하노니 此는 本國文化가 아직 廣開치 못하야 手不執卷 目不識丁하는 者가 衆多한 則 購買讀閱하는 者가 必然 寡少할 曲折을 提察할 緣故라...”(약 2,700자 중에서) |
위에서 a, b는 박영효 일기(使和記略)의 1882년 11월 3일자와 12월 28일자에서, c는 윤치호 일기(壬年日記) 1883년 1월 2일자에서, d는 유길준이 신문 창간을 위해 1883년 2월 28일에서 4월 10일 사이에 ‘창간사’에서 옮겨 적은 것이다(이 날짜들은 모두 양력이다). 즉 아주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국한문체의 글들이다. a, b는 d에 비해서 한글이 더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한자어를 한글로 쓴 것도 있고 고유어를 쓴 것도 발견된다. c의 글, 즉 윤치호의 글은 겨우 100자 미만의 것이지만 a, b에 가깝다. d의 글 즉 유길준의 글은 중세 이래의 전형적 국한문 혼용체에서 벗어나 한문을 풀어서 거기에 토를 단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현토식(懸吐式) 국한문체는 이미 실험기를 지나 정착된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급진파 개화사상가인 박영효와 온건파 개화사상가인 유길준은 새로운 문체의 실험에서도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만약 이때에 유길준의 문체가 a, b, c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소위 개화기식 국한문체의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1883년 10월 18일에 윤치호는 일기에서 미국 공사의 통역관으로 있던 시기에 외무아문이라는 높은 관직에 있는 관료(김만식)가 조선글은 배우지 않았다는 말을 하는 것에 대해 우습게 생각한다며 한글에 대한 자각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역시 통역관 시기에 윤치호는 조선 국문 즉 언문을 보급시킬 생각이 간절하여 나라의 형편을 공사하게 자세히 보고하고 언문을 보급해야 조선 사람이 속히 깨이겠다는 뜻을 누차 진언했다고 한다. 윤치호에 동감하는 공사가 외무독판(김홍집)에게 언문사용을 권고했지만 김홍집이 화를 내고 가 버리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기기도 했다. 그 후 윤치호는 1887년 11월 25일부터 1889년 12월 15일까지 순국문의 일기를 쓰기에 이르렀다.
1888년 2월 24일 박영효는 고종 앞으로 상소문을 쓰게 되는데 14개 조항의 교육에 관한 제안에 종래 가르쳐 오던 청나라의 역사와 문장 대신에 우리나라의 국어 국문을 가르칠 것을 담고 있다.
1889년 “西遊見聞”의 서문에서 유길준이 국한문 혼용의 글로 책을 쓰게 된 뜻을 밝히면서 순 국문만을 사용하지 못했음을 불만스럽게 생각한 처지라고 적은 사실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그때 유길준이 국문을 한자와 섞어 썼다는 사실에 대해 문장가의 궤도를 벗어난 일이라고 하는 친구의 비평을 듣게 된다. 유길준은 세 가지의 이유를 들어 친구에게 설명을 했는데 그중에서 그가 七書諺解의 국문 한문 섞어 쓰기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생각한 것은 잘못인 것 같다. 이 책에서 유길준이 쓴 국한문 혼용의 글은 앞에서 신문의 ‘창간사’를 옮겨 적은 것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것으로 그가 국한문체를 시도해 볼 때부터 개화기식 국한문체의 탄생을 예고한 것이었다.
같은 개화기 국한문체는 정병하의 농사 지도서인 “農政撮要”(1886)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도 역시 갑오경장기의 개화파 관료(농상공부 대신)로서 아관파천의 여파로 친로파에게 살해당했다. 그는 1883년에는 박문국의 회계였으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외무부의 전신) 주사(1886) 등을 거쳐 갑오경장기 후반 김홍집 내각에서는 내무대신이었던 유길준과 같이 일한 바 있다. 그보다 앞서 1882년에는 유길준이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국문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시기에 정병하는 시찰단의 일원으로 그곳에 가서 같이 지내기도 했다. 정병하가 박문국에 있던 시기(1883)는 유길준이 박영효가 주도하던 새로운 국한문체의 신문 ‘창간사’를 준비할 때와 일치하며 신문 발간 사업이 보수파의 반대에 부닥쳐 발간이 중지되고 말았으나 1883년 10월 1일 창간된 “漢城旬報”가 순 한문의 신문으로 나온 것은 본래는 국한문체의 신문을 목표로 하였으나, 활자 준비 관계와 수구파의 반대 때문에 그렇게 된 경위를 정병하는 누구보다도 잘 보고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유길준이 준비한 국한문체의 ‘창간사’를 접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유길준이 그때 좌절하여 내동댕이치고 집으로 은거해 버렸던 통일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직에 1886년 정병하가 임명되고 그 자리에서 국한문체의 단행본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이나 두 사람의 인생 경로를 볼 때 정병하가 유길준의 국한문체 사용의 영향을 받았거나 적어도 유길준의 접촉에서 이 일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2).
이 문제는 그동안 유길준의 “西遊見聞”과 정병하의 “農政撮要”를 놓고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체 단행본이라는 논의가 있었기에 한번 살펴보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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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유길준의 설명을 들은 그의 친구는 “정말로 그대의 이야기가 옳은 듯하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말할지, 차후에 있을 정평 있는 논의를 기다림이 옳은 듯하다.”는 말로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유길준이 순 한문의 문장에 국문을 등장시킨 일은 그 당시로서는 그렇게 쉽게 우리 문자 생활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국문과 한문 사용의 논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고 보여진다.
2. 앞에서 보았듯이 국문의 자각기 내지 문체 실험기를 거친 박영효와 유길준은 갑오개혁 기간(넓은 뜻의 갑오경장 기간:1894년~1896년간: 즉 음력 갑오년 6월~을미년 12월간) 동안 개혁을 주도하면서 어문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개혁 시도를 완성하지 못한 채 박영효는 1895년 다시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고 그 후 새로운 국문 시책이 마련되지 못한 채 국한문 혼용체가 주류를 이루다가 유길준마저 고종의 아관파천 후 실각하여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갑오경장기의 어문 정책에 따른 각종 칙령, 시행령 등은 개화기의 국어 국문을 다룬 수많은 연구 논문 등에 빠짐없이 기재되어 있어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갑오경장기 동안 봉기한 동학 농민군이 귀순할 것을 권고하는 순 국문의 彦文宣諭榜文(日字 未詳)과 동학당 동도창의쇼에서 일본군을 치기 위하여 창의(倡義)한 것을 인민에게 포고한 告示(갑오 10월 15일자) 등이 있기에 일부를 적어 보고자 한다.
- 우리 셩상니 너의 무리을 각 시되 이의 젹라 웃지 감이 그러 리요 그 본 마음이 아니라 시고 쳑연이 불상히 녀기시고 은혜 은혜 말으로 효유하시고 살길노 인도 시되 너의 무리는 감복지 아니코 악이 일향 극심니 네가 각면 네 죄가 엇더 뇨 너의 무리가 참셔을 쥬장고 요괴을 션동여 우을 미혹고 웃 람을 능범며 군긔을 도절고 공곡을 늑탈 여 골도 치고 원도 회롭게 니 난역이 아니고 무어신뇨……(언문선유방문 중에서)3)
- 무타라 일본과 됴션이 국 이후로 비록 인방이 누 젹국이더니 성상의 인후심을 힘입어 삼항을 허여 통샹이후 갑신십월의 사흉이 협젹야 군부의 위하미 됴셕의 잇더니 중의 홍복으로 간당을 쇼멸고 금년십월의 화잔당이 왜국을 쳐결여 승야입경야 군부를 핍박고 국권을 쳔며 ......(고시 중에서)4)
위의 글이 국문으로 쓰인 것은 동학 농민들이 국문을 이해한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특수한 것이지만 이 글이 쓰여진 지 얼마 안 되어, 즉 4~5개월 후에 창간되는 “독립신문”의 순 국문의 글과 비교될 만하다. “독립신문”의 문장들에 비해 한자어가 철저하게 많이 사용되고 있어서 어떤 부분은 그냥 한자어를 국문으로 옮겨 나열한 것으로 보이는 한문투이다. 뒤에 오는 “독립신문”이 애초부터 언문일치를 목표로 순 국문체의 문투를 택하면서 한글 전용론을 편 일이 획기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하겠다.
한편 1896년 4월 7일 창간된 한국 사상 최초의 민간 신문으로서 19세기 말 순 국문 사용의 기치를 높이 들고 “독립신문”이 출범한 데에는 국문에 대한 자각기를 이미 거친 박영효, 유길준, 윤치호가 서재필과 함께 직접 간접으로 관여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는데, 여기에 실린 국문 전용론에는 역사적인 의의를 갖는 개혁적인 내용들이 들어 있다.
특히 이기문(1989)에 의해 서재필이 쓴 것으로 밝혀진 국문 전용론과 주시경의 국문론 등에는 ‘말과 글은 같아야 하며 이것은 국문으로 달성될 수 있음’과 ‘띄어쓰기’, ‘옥편의 필요성’, ‘국문만으로 우리나라의 문자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음’, ‘문법의 필요성’ 등을 역설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독립신문”이 생긴 지 2년이 조금 지난 1898년 4월 12일자에는
- “근일에 셩에 다른 신문들이 만히 겨 독립신문외에 젼 국문으로 독립 신문의 본을 셔 글를 워가며 출판 신문이 다셧이 잇스니 삼년 젼에는 신문이라 것을 일흠도 모르던 나라에셔 지금은 국문 신문이 다셧이요 영 신문이 나이요…… 국한문 셕근 신문이 나이요 ……”
라고 적혀 있듯이 “독립신문”의 순 국문 쓰기와 띄어쓰기가 가져온 결과를 파악하고 있다. 실제로 1898년 1월 간행된 “협성회회보”(주간)가 4월에 “일신문”(일간 신문)으로 발간된 뒤 4월 14일자 ‘론셜’에서 “독립신문”을 ‘션신문’으로 부름으로써 “독립신문”의 국문에 대한 의식을 이어받은 신문임이 분명함을 밝히고 있다. 6월 17일자에는 ‘국문이 나라 문명 근본’이라는 ‘론셜’이 실려 있는데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이론셜의 전문(全文)이 옮겨 실린 논문은 없는 듯하여 부록으로 실었다. 한문의 폐단을 조선의 개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차원에서 설득력 있게 지적하고 있으며 청나라의 유명한 선비들조차도 그러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1898년 5월 17일자 “독립신문”에서 서재필은 3년 전에 고국에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아서 국문 신문의 필요성을 깨닫고 신문을 창간했으며 외국 친구와 대한 사람의 도움으로 국문과 영문으로 두 신문을 나누어 확장까지 하게 됐다는 ‘고별사’를 쓰고 미국으로 떠났다. 신문 창간때부터 깊이 관련돼 있고 서재필이 도움을 받은 대한 사람인 윤치호는 “독립신문”을 이어받아서 국문 전용의 정신을 충실히 발휘해 나갔다. 그는 “조선서는 조선을 나라로 생각지 아니하고 청국을 나라로 생각하여 배우는 것이 청국사기요 공부하는 것이 청국 글이며 아는 것이 청국 일이라…… 자기 나라 것을 배운 뒤에 남의 나라 것들을 알게하는 근본이라”는 국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설5)을
하고 아래 () 사용법에 대해 탐구하는 등 국문에 대해 끊임없이 진력해 나갔다. 1898년 3월에는 이미 “京城新聞”을 국문 전용으로 창간한 바 있었다.
갑오경장기 전후 개화파 관료로서는 마지막까지(1899년 1월 21일까지) 한글 전용의 뜻을 지켜 나가던 윤치호도 “독립신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皇城新聞”에서는 국한문 혼용론이 펼쳐지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Ⅲ. 외국인들의 한글 사용과 그에 대한 논의
일찍이 김윤경이 “朝鮮文字 及 語學史”에서 “서양 선교사들은 전도하기 위하여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우민 남녀 노소 노유에게도 그 성경을 읽히기 위하여 한글을 가르치며, 자녀를 모아 교육하되 순한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순한글로 하였다”는 지적을 한 이래로 그들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것은 한글 운동이나 한글에 대한 자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요, 단순히 기독교의 선교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는 이응호(1975)의 평가가 있었다.
비록 그들의 성경 번역 작업 자체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내려질 수 있다 하더라도 위에 언급된 개화파 관료 들과 같이 서양인들 중에도 그들의 한글관과 한자관을 피력하면서 그들이 선교 활동 및 교육 활동을 벌이는 이 나라의 글자에 대한 자각을 뚜렷이 갖고 있던 이들이 있었다.
1. 성경의 번역에 크게 공헌한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이자 신학 박사이며 한국어 학자이기도 했던 J.S.Gale\<육영공원>의 영어 교사로 부임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화, 한국 어학에 관한 연구 논문을 많이 발표한 미국인 선교사 교육자 H.B.Hulbert는 당시의 한국인의 문자 생활 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먼저 탁월한 지식과 문학적 재능으로 한국에 관련된 책을 저술하였고 우리의 고전 등을 번역, 해외에 소개함으로써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한 선교사인 게일이 한국의 유생(儒生)들이 한자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느낌을 기술한 것을 옮겨 보겠다.
- “유생들은…… 신분이 가강 높고 철저히 자유를 누리는 특권층이다. 이들 소수의 특권층은 한자에 대해서 굉장한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이 한자는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라기보다도, 숭배의 대상으로 되어 있는 듯하다. 양반은 한자로 여러 가지의 시문(詩文)을 짓는다. 어린애가 여러 가지 크기의 벽돌로 매혹적인 성(城)을 짓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문장 형태의 변화와 문자의 조합에는 전혀 제한이 없는 만큼, 문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 역시 무한하다. 2명의 유생은 한자 1개에서 하루종일 가지가지 흥미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 현재의 상용 한자는 약 2만자이니까, 그 두 사람은 50여 년간이나 줄곧 이들 한자에서 흥미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 그렇지만, 옛날의 시가나 제구(題句)보다 더 낫게 쓰려는 사람은 없 다. 한자로 옛날 사람들의 작품만한 것을 쓰려 한다는 것은 그리이스어로 호오머를 능가하려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그야말로 일찌기 들어보지 못한 주제넘은 짓이다. 그래서 유생들은 자기네의 목뿐만 아니라 정신, 마음, 영혼까지 휘감은, 영원한 그 표의 문자로 이루어진 미문집(美文集)을 가지고 인생을 헛되이 보낸다.”6)
코리언 스케치, 제임스 게일 著, 張文平譯에서 인용하였음. 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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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한국어 학자답게 언문일치(言文二致)의 당시의 문자 생활을 잘 파악하고 조선의 언어가 두 종류인데 하나는 쉽고 하나는 좀 어렵다고 하면서 우리말과 한문을 비교하고 있다. 우리가 하는 말을 한문으로 적어야 한다는 사실에 조선의 언어는 야수성을 띠고 있다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 “그들의 말 역시 야수성을 띠고 있는데, 종류는 두 가지, 하나는 쉽고 하나는 좀 어렵다. 즉, 하나는 글로 쓰거나 눈으로 보는 언어(文語)이고, 다른 하나는 말로 하거나 귀로 듣는 언어(口語)다. 만약 문어를 소리내서 읽는다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또 구어를 입에서 나오는 대로 쓰려는 사람은 없다. 우리들이 말로 한 것을 노우트 하려면 구어에서 문어로 번역을 해야 하고, 책을 남들한테 읽어 줄 때에는 문어에서 구어로 번역해야 한다. 이 언어들은 생김새로 보나 구조로 보나, 영어가 고대 시리아 언어와 딴판이듯이 우리 영어와 딴판이다. 사실 그들은 다른 계통에 속해 있고, 우리 영어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조선인 전부가 다 이해하는 구어는 학자나 관료계급에게서 문통(文通)의 수단으로 쓰이지 못할 만큼 천대받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문어를 공부하는데 20년을 소비하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배운 것을 제대로 써 먹지도 못하고 만다. 조선의 원어(原語) 사용 문제에는 극단한 혼란이 따르고 있다.”7)
게일은 1895년에 “텬로력뎡”을 국문체로 간행한다. 그가 우리 국문에 대한 자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다는데, 1898년 3월 3일에는 조선의 전권공사(全權公使)로 미국에 파견되어 있던 이범진에게서 조선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개혁의 10가지를 자신의 이름으로 공표해 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는데, ‘한자를 폐지하고 언문을 국문으로 삼을 것’이라는 개혁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게일은 이범진의 개화사상에는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8).
헐버트는 “민필지”(1889 ?)의 ‘셔문’에서
- “즁국글ㅅ로는모든사이니알며널니볼수가업고대한언문은본국글ㅅ더러션와셩과남녀가널니보고알기쉬우니슬프다대한언문이즁국글ㅅ에비교야크게요긴것만은사들이긴줄노아지아니고도로혀업수히녁이니엇지석지아니하리오”
라고 하면서 자기와 같은 외국인이 대한 말과 언문법에 익숙치 못한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잊어버리고 특별히 언문으로 “민필지”를 쓴다고 밝힌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The Passing of Korea”에서 헐버트 역시 어문이치의 실상을 인식하고 중국어가 한국의 지적 발전에 장애물이었다는 기술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 “한국어와 서양의 언어가 다른 또 하나의 중요점은 ‘문어체(文語體)’와 ‘구어체(口語體)’가 다르다는 점다. 두 경우에 있어서 문법상의 형식은 같지만 서로 다른 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을 각기 가지고 있다. 한국어에 있어서는 말을 소리나는 대로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결과는 매우 불행하다. 즉 구어를 문어로 쓸 때에는 모든 문장을 바꾸어서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중국어의 영향을 받은 탓인 듯이 보이며 이것이야말로 중국어가 한국의 지적 발전에 장애물로서의 영향을 미친 것 중의 하나이다.”9)
大韓帝國 滅亡史, H.B.헐버트 지음, 申福龍 옮김에시 번역문을 인용했음. 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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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구체적으로 헐버트가 한자관을 펼친 것을 보면 한자의 사용 문제가 다시 대두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음미해 볼 만한 명문장이어서 좀 긴 부분을 옮겨 보겠다.
- “한자는 그것의 피상적인 지식을 가가지 있는 사람들에게 대하여는 상당히 최면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실질적인 지시를 얻기 위한 수단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한자는 매우 귀찮고도 비과학적인 문자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입증할 수가 있다. 극동에 있어서의 한자란 보통교육의 과정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아직까지도 한자를 약간 이해하고 있는 모든 외국인들은 거의가 그것에 매혹되어 있어서, 극동에 있는 국가의 대중들로 하여금 광범위한 인문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어떤 체제를 위해서 한자를 소할하게 다루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 중국의 문자어를 형성하고 있는 수만 자의 한자는 수천 년 동안에 이룩된 훌륭한 모방문자이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이 한자를 터득하게 되면, 단순히 그 어원(語源)만을 연구하고도 그 문자의 구체적이고도 효율적인 지적 결실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거의 무기력하게 매혹되어 버린다. 이와 같은 한자의 체제가 형성되어 온 과정이 어떤 일반적인 법칙을 따른 듯이 보이는 반면에 아직도 예외와 분기(分岐)가 너무도 지나치게 많아 한자에 관한 지식을 얻는 데에는 오직 기억력만이 필요한 듯이 보인다. 외국인들로 하여금 한자를 쉽사리 습득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가지의 방법이 구성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과거 2~3천년 동안에 한국과 중국에서 사용되어 온 방법, 즉 문자의 음(音)이나 모양에 관계없이 한 자(字)를 외우고 다시 다른 한 자를 외우던 방법보다 더 훌륭한 것인지의 여부는 매우 의심스럽다. ……단순히 한자의 모양을 익히는 데에 지나치리만큼 기억력을 소모한다는 것은 순전히 추리적인 능력에 대하여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함을 의미한다10).
또한 한글 전용의 신문의 발간에 관여하게 되는 헐버트는 가장 유력하게 교육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한글 신문이며 이 언론 기관은 과거 10년 동안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고 교재 문제, 즉 교재에서 한글의 사용 문제를 흥미롭게 기술하고 있다.
- “어떤 사람들은 교재를 순한글로 인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반면에 좀 더 보수적인 사람들은 정부측과 더불어 국한문이 혼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국한문 혼용의 방법에 따른다면 동사, 명사, 형용사 및 부사는 한자로 표기되어야 하고 모든 토씨는 문법적이든, 문장론적이든, 논리적이든 순한글로 표기된다. 그렇게 되면 마치 철자를 암시하는 수수께끼 그림 같이 되어서 글자는 그림으로 점철된다. 이렇게 되면 그 체제가 맵시 없게 되기는 하겠지만 순한문에서 순한글에로 옮겨가는 유용한 기초가 될는지도 모른다. 한자가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는 광범한 보통 교육이란 불가능한 것이다”11).
한편 H.G. AppeʼnzeIIer 선교사의 전기를 쓴 W. M. Griffis에 의하면,
- “민주적인 서양, 그 가운데서 자유의 나라인 미국에서 온 이 아펜젤러를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괴롭혔던 것은 조선어의 복잡하고 정교한 경칭의 세계였다…… 아펜젤러는 한국 문자를 습득하고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처음부터 노력했기 때문에, 일 년이 채 못 되어 그 문자를 쓰고 그것을 사상을 담는 도구로 사용하는데 마치 자신의 일상 언어처럼 익숙해졌다. 그는 언문을 존중하였다.”
고 했다. “그는 언문을 존중하였다.”라는 표현, 그 이상 더 어떤 훌륭한 표현이 이 땅에 머물고 있었던 서양인의 우리나라 문자에 대한 자각을 총체적으로 더 잘 나타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2. 앞에서 서재필이 고별사에서 “독립신문”에 도움을 주었다고 언급한 외국인은 헐버트나 아펠젤러였을 것이다. 1897년 7월 윤치호는 “The Korean Repository” 편집자에게 “서양 선교사들 덕분에 우리 문자의 사용이 나날이 증대되고 있는 것을 감사드린다.”고 하면서 “선교사들이 점점 더 많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추세에 있다.”고 지적한 바도 있지만 아펜젤러는 1899년 1월 1일부터 6월 1일까지 “독립신문”를 이어받아 국문 전용의 정신을 계승했다. 그는 4월 7일, 즉 “독립신문” 창간 4주년 기념일에 ‘독립신문 일’이라는 제목으로 국문 전용의 뜻을 다음과 같이 재천명하고 있다.
- “오은 우리 신문을 시각지 뎨 四회 되이라 우리 신문이 대한의 독립과 진보와 인민의 유권을 위야 셜시지가 우금 四년에 대한이 쳐음으로 경쟝을 지여 인민이 외국규모와 학문에 지 못고로 졍부에셔 셩의게 편리고 나라의 유죠 법규를 반포야도 셩이 그 리를 닷지 못야항샹 아흑 을 바리지 못니 이 인즉 셩들의 질고를 졍부에셔 확실히 아지 못고 졍부의 졍령이 셩의게 확실히 베풀지 못이라 어두은 셩을 인도야 명 디경에 이르게 며 외국 시셰와 형편을 알게며 릉히 하졍을 상달케 고 상의를 하통케 랴면 신문과 이 업나니 그런 고로 우리가 특별히 대한 사들이 죠화아니 한문을 쓰지 안코 국문으로 각 쇼문과 리를 설명야 남겨간 유무식을 물론고 넓히 보게 을 위 야 처음으로 대한에 국문 신문을 셜시엿지라 우리가 양 공의를 쥬장고 졍을 물니쳐 엇던 사이던지 올은 의리와 올은 목젹을 가지고 일을 사은 우리 신문에 친구가 되고 글은 과 글은 실을 가지고 일을 사람은 우리 신문이 반 고로 글은 사은 우리 신문을 미워 것이요 올은 사은 우리 신문을 지니 …… 우리가 신문 일을 당하야 연히 녯 일과 지금 형편을 참호 감동이 잇서 두어 마 셜명야 귀령코져 노라”
또한 4월 25일자에는 ‘사은 일반’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 중에 “동양 션 고로 허문을 슝샹고 실디를 일허버린 이니”라고 동양 선비들의 허문 숭상을 비난한 뒤 5월 20일자에서 ‘타국 글 아니라’는 제목으로 한문의 폐해를 밝히고 국문 전용론을 펼치면서 그때에 이르러 대한 정부에서 법률, 규칙을 한문으로 쓰라고 하였다 하니 어찌 구습을 버리지 못하는지 모른다는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다. 서양인 선교사로서 이렇게 공식적으로 국문 전용론을 편 것은 유일한 것인 듯하여 전문을 부록으로 실었다.
이상에서 성경 번역, 사전 편찬, 문법 책 저술, 인쇄소 경영 등 한글에 대한 그들의 활동 영역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던 외국인들의 한글 전용의 뜻을 살필 수 있었다.
Ⅳ. 맺음말
위에서 살필 수 있었듯이 갑오경장기를 전후하여 개화파 관료가 1884년대 초부터 한글에 대한 자각기 내지 문체 실험기를 거쳐 어문 정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인 만큼 한글 전용이니 한자와의 혼용이니 하는 논의 자체가 그들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들이 한글 전용의 신문 발간에까지 관련되어 서재필이 주시경과 쌍벽을 이루는 한글 전용론까지 펼칠 수 있었음도 이미 밝혀진 바 있다. 한편 그동안 알려진 그 시대의 한글 사용에 관련된 박영효, 유길준, 서재필, 윤치호 외에 정병하와 이범진도 갑오경장기의 관료들로서 그들도 한글 의식이나 한글 사용의 실천력을 보인 인물들임을 알게 되었다.
위의 인물들이 개혁의 꿈을 다 이루지 못한 것처럼 한글 전용의 꿈도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채 그들의 시대를 마감하고 말았지만, 문자의 보수성과 수구파들의 반대 등을 감안할 때 그들이 국문 한문 사용 논쟁의 초석이 된 것은 평가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또한 한국인들과 더불어 그 시기의 외국인들이 뚜렷한 한글관 한자관 등을 갖고 한글 전용론에 동참함으로써 우리 문자 생활에 공신했음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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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 B. Hulbert(1969), The Passing of Korea, Reprinted, Seoul: Yonsei Univ. Press.
< 부록 >
(1) 일신문 론셜(1898년 4월 14일자)
‘국문이 나라 문명 근본’
“본 국문을 우리 나라 셰죵 대왕옵셔 지으샤 국민 남녀의 편리히 쓰기를 쥬장심이니 후셰를 기리 각신 션왕의 유이 진실노 무궁신지라 셩이 되여 셩은을 사모 도리로만 말여도 이글을 공경야 만드러 쓰 것시 맛당거늘 하물며 이치 편리거슬 지금것 폐엇던 모양이니 엇지 셕지 안으리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 나라 사이 로 헛되고 괴리 거슬 슝상야 실상을 일삼지 아니며 샹 싀긔 마음이 잇셔 내가 아 것은 을 모로게 려 에 셩경 현젼을 이런 쉬운 글노 번역야 무식 셩들을 삽시간에 알아듯게 각들은 아니고 뎌 갓치 어려운 한문을 공부야 십여년을 죵샤 후에야 비로소 문리를 다르면 큰 션라고도 칭며 학라고도 칭나 실상인즉 셩인의 말삼은 궁리치 아니고 한문만 공부니 경셔를 익는 션들도 셩인의 본의는 다 일허 바린지라 만일 그럿치 아니야 셔삼경을 국문으로 번역야 널리 첫스면 국즁 남녀 귀쳔이 교화에 졋져 모도 공님의 뎨갸 되엿슬터이니 오날 유교가 이 치 쇠지는 아니엿슬지라 셰계에 새로 발명 학문으로 말지라도 나라히 명다 칭 것슨 다만 글 일근 사 몃 쳔명 몃만명으로만 인연야 말이 아니라 젼국에 남녀로소와 상하 귀쳔을 통계야
비교 연후에 혹 문명국이라 반화국이라 야만국이라 칭 법이기로 덕국 흔 나라에는 남녀간 오륙셰된 아희가 학교에 다니지 아니면 슌검이 잡아다가 억지로 학교에 넛코 그 부모를 벌 씨우 법이 잇스니 이런 법이 다 그 나라를 문명케 려 이라 지금 우리 나라 에 관민이 다 이치 어두으이 어두은 것슬 열게 자면 교휵이 아니고는 슈 없슬터인즉 만일 한문으로 교휵려다가는 지금 붓터 시작여 부즈런히 공부들을 도 신문이나 볼 만치 공부자면 그즁에 죠유무를 다 통계고 말면 소불하 십년은 여야 될터이니 십년을 글만 공부여 가지고 학문을 새로 호기와 불과 몃시동에 언문을 쳐가지고 만권 셔을 못 볼 것이 업시 즉시 학문을 호기에 더고 속이 엇지 비교리오 국문은 진실노 세계에 드문 글이라 이글을 써스면 글시 못쓰고 못보 사이 온 나라에 몃치되지 안을지라 근자에 쳥국에 유명 션들이 말기를 한문이 과히 어려워셔 이 어두운 셩들을 옷치자면 이 글 가지고셔는 슈업다고 야 로 셔양글자와 우리 나라 국문을 참작야 구차로이 글을 만드러 가지고 국즁에 통용기를 원 사이 여러하니 그 사들은 한문이 긔 나라 글리로되 그 폐단을 각하고 이런 의론을 창론거 물며 국문은 우리 나라 글일더러 이치 쓰고 보기에 쉽고 편지라 엇지 쇼흘히 넉이리오 우리가 상 부러워 던 것은 외국 사들이 길에 혹 고 가던지 거러갈라도 이나
신문을 보며 다니고 진고 일본 사의 가가를 지나가며 보면 남녀간에 로방에 안져 신문을 가지고 보며 긔 나라 시셰와 외국 형편을 서로 의론여 혹 나라 일을 걱졍도 며 남의 나라를 론란도 거 우리 나라 사들은 길에 가며 젼후좌우를 돌나보아도 모도 일업시 늘어 안졋스되 글쓴 죠희 죠각 들고 보 사은 업고 혹 고담책이나 볼 름이더니 지금은 그만 여도 길에 지나가며 보자면 슌검막과 가로상 젼방에셔 신문을 보 만하셔 이젼에는 쳥국이 무삼 나라인지 모로고 대국이라면 비로소 셰상에 뎨일부강 나라 흐로만 넉이던 사들이 지금은 신문지를 들고 안져 말기를 쳥국이 말못 되얏스며 우리 나리이 우 위급 라고들 의론 셩이 잇스니 이는 이 대한에 국문이 잇 이라 이런 요긴 글을 실시야 써셔 우부 우이라도 명 학문을 화 젼국이 어셔 문명에 나아가기를 우리는 간졀히 위노라”
(2) 독립신문(1899년 5월 20일자)
‘타국 글 아니라’
“나라마다 방언 다를 아니라 각기 국문이 잇 고로 어느 나라 사이던지 몬져 본국 말을 다 안 연후에 타국 말을 호고 본국 글을 다 사리에 통달 연후에 타국 글을 호 것은 사의 샹졍이요 당연 바다 대한 디방이 쳥국과 심히 갓갑고 상관되 일이 만 고로 몃 千년 이로 한문을 슝상 엿거니와 대한국에 와셔 셰죵 대왕셔 세계 각국은 다 국문이 잇스되 대한이 홀노 업것을 민망이 넉이샤 특별히 훈민졍음을 지으샤 민간에 광포 심은 비록 향곡에 사 녀와 하예 지라도 다 알고 닷기 쉬게 심이니 후셰에 신민된 이가 맛당히 그 셩의를 봉야 국문을 슝샹 것이여 그젼에 대한젼국이 엇지 야 다만 한문 슝샹 고 본국글은 등기 엿던지 우리가 죡히 말 것이 업거니와 갑오경쟝 이후로 대한 졍부에셔 황연히 다른 고로 한문을 급작이 폐지 못되 국문을 얼만큼 소즁이 알어셔 관보와 각항 공문을 다 국문과 한문을 통용야 들고 학부에셔도 셔을 혹 슌젼이 국문으로 번력 야 셩이 유무식 간에 다 보고 알게 엿스니 이것은 젼국 인민을 명 식히 크게 유익 일이라 대한에 와셔 잇 외국사 지라도 속 에 얼마큼 칭찬 엿더니 근일에 드른즉 대한졍부에셔 뎐쟝 법률 교셩 각항 쟝뎡 규칙에 온젼히 한문으로 쓰라고 였다니 지금 대한졍부에 당국신 졔공은 고명 식견으로 이를
당야 아무죠록 명에 진보코져 터인 엇지 구습을 바리지 못 고 졈졈 뒤로 물너가 일을 리가 잇스리요 한문의 리허 대한 사이 우리보다 더 알터인즉 반다시 셜명것이 업스되 대뎌 한문이란 글은 심히 어렵고 넘어 호번 야 죠와 춍명이 아모리 월등 사이라도 슈十년을 힘써 공부여야 계오 셰상에 셰듯 다 칭것이요 만약 죠가 로둔 고 춍명이 업 람이면 평을 공부 여도 릉히 통달치 못 니 그런 고로 대한에 글다 션를 보면 무졍 셰월을 상 압헤셔 다 보고 셩셩 발이 거울 속에 빗최이 평에 가지 업도 것이 업슬더러 일편 졍선을 다 한문공부에 허비 고 다른 물셩에 젼혀 몽 야 뎨 집안 처도 엇더케 졉대 경영이 업시 다 안지면 고담쥰론 말이 한당에 아모의 츙졀이 굉장며 송나라에 와셔 누가 문쟝이요 명나라에 와셔 누가 군라 야 쳥국을 대국이니 즁원이니 칭찬 (
)이 고 본국에 엇더 명현의 젹과 아모 츙신의 절개 도모지 알 각도 아니 고 본밧을 도 업스니 진소위 남의집 보학은 다 알되 기의 죠샹 력을 누가 물으면 릉히 답지 못 과 도다 그 아니라 한문에는 릉동 이가
국문을 면 닙을 벌이지못니 말노 션왕의 례법을 칭송 면서 뎡작 션왕셔 신 글은 이지 등기 나뇨 불가 문어린( )이로다 그 즁에도 대한 사 명을 모하 놋코 보면 한문 아이가 열명 되기가 어려온즉 이 무식 셩의 어두온 을 어느 하가에 한문으로 골처 쇽히 명케 리오 대한국문은 진소위 로 아 글이라 오 몰으다가 일 아 슈가 잇슬 아니라 국문으로 못 들 말이 업고 못 번력 글이 업스니 과연 쉽고도 긔묘 글이로다 대한 졍부에셔 엇지 쉽고 편 국문은 쓰지 안코 어렵고 다론 한문을 슝샹 고져 지 우리 밋지 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