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갑오경장 100년 기념】

갑오경장 전후의 문자 사용 양상

정 길 남 / 서울 교육 대학교 국어 교육과 교수


Ⅰ. 들머리

  갑오경장을 전후해서 간행된 문헌들에 나타난 문자 사용 앙상은 특이한 일면이 있다. 이는 19세기에 혼기되어 사용되던 문자 양상이 규칙적이고 정연했던 15세기와는 많은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19세기 당시에는 종래의 전통적인 표기법을 고수하려는 보수 성향과 개화기를 맞아 새로운 것을 수용하려는 개신의 기운이 문자 사용에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는 서앙의 새로운 문물의 도입과 더불어 신생어의 대량 출현이 있었고, 그에 따른 차용어의 증가는 다앙하고도 혼란스러운 문자 사용을 불가피하게 했을 것은 말할 여지가 없다.
  또한, 이때는 신식 학교의 설립과 동시에 새로운 교과서의 간행으로 종래의 한문투와는 다른 어휘가 대량으 나타났고, 서양 종교인 기독교의 전래와 더불어 간행된 성서 문헌에는 생경한 어휘들이 쓰이게 되었다. 따라서 교과서와 성서 문헌, 그리고 신문류에 나타난 어휘들은 종래의 우리 글, 언해류와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됨으로써 당시의 문자 사용에 있어 다양성과 혼란성을 더욱 가중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정연성과 규칙성을 깨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하겠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시기에 나타났던 구개음화와 원순 모음화, 움라우트 그히고 /·/ 소멸에 따른 표기 등의 문자 사용의 양상을 살펴 어떤 규칙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여기서 자료로 사용된 문헌은 개화기에 간행된 것으로 성서류와 교과서, 신문 그리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일반 문헌들이다.

문헌명 간행 지역 간행 연대 약호
 셩경직광익 Ⅰ(필사본) 국내 1779 광익필 Ⅰ
 셩경적광익 Ⅱ 국내 1779 광익필 Ⅱ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 만주 1882 82눅
 예수셩교요안복음 만주 1883 83요
 신약마가젼복음셔언 일본 1884 84막
 예수셩교젼셔 만주 1887 로쓰
 성경직해(활판본) 국내 1892 92직
누가복음 국내 1895 95눅
 신약전서 국내 1900 젼셔
 국민소학독본 국내 1895 국민
 신정심상소학 국내 1896 신정
 한불 일본 1880 한불
 한영 일본 1890 한영
 Corean Primer 만주 1877 CP
 Corean Speech 만주 1882 CS
 Grammarie Coreenne 국내 1884 GC
 독립신문 국내 1895 독립
 황성신문 국내 1898 황성
 경향신문 국내 1907 경항
 조선위국자회 자카르타 1835 조선
 三聖訓經 국내 1880 삼성
 過化存神 국내 1880 과화
 敬信錄諺釋 국내 1880 경신
 경석지문 국내 1882 경석
 관성뎨군명셩경언해 국내 1886 명성경



Ⅱ. 구개음화

  개화기 국어의 문자 사용에서 두드러진 현상 중의 하나로 구개음화 표기를 들 수있다. 구개음화라 하면, ㄷㄸㅌ, ㄱㄲㅋ, ㄴ, ㅎ 등이 “ㅣ”나 “y” 앞에서 ㅈㅉㅊ, 구개음 ㄴ, ㅅ 등으로 변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런데 종래 문헌 자료에 수록된 어휘들이 주로 “ㄷㄸㅌ”과 “ㄴ”에 해당되므로 여기서는 이 두 가지에 한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Ⅱ.1. /t/ 구개음화

  개화기를 전후해서 나타난 국어의 /t/ 구개음화 현상은 다앙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문헌에 나타난 구개음화는 남부 방언에서 일찍 일어나 북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방언에서는 여기서 논의하고자 하는 “ㄷㄸㅌ”의 구개음화만이 일어났으며 , 그것도 매우 늦게 일어난 것으로, 아직도 서북 방언에서는 이 현상을 모르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그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어 왔다(김형규(1959), 이기문(1961), 장세경(1961), 허웅(1965), 이명규(1974), 송민(1988)). 이들 연구에 따르면, 이 현상은 16세기 말의 문헌인 “신증유합(新增頹合, 1576)”, “언해두창집요(諺漢痘瘡集要, 1608), 연병지남(練兵楷南, 1612)” 등에 나타남으로써 16세기 말에 /t/ 구개음화가 일어났음을 시사하고 있다. 18세기에 이르면, “동문유해(東文類解, 1748), 삼역총해(三譯總解, 1774), 한청문감(漢淸文鑑, 1775년경)” 등에서 이 현상은 매우 활발하게 일어난다. 이로 미루어 보아 구개음화 현상은 16세기에 시작하여 18세기에는 거의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19세기의 특징인, 근대 국어적인 요소와 현대적인 요소를 드러내는 다양성이 여기 /t/ 구개음화 표기에서도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미 바뀐 것까지도 전대의 격식에 따라 예전 것을 그대로 견지하는가 하면, 거의 현대 국어에 다다른 언어 현상도 여기 /t/ 구개음화 현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구개음화 현상은 발간 지역에 따라 그 현장을 매우 달리하고 있으며, 어휘의 성질에, 또는 문헌의 특성에 따라서도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발간 지역에 따른 구개음화 표기 현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ㄱ. 디혜(82눅 2: 40), 딕키넌데(82눅 2: 40)
ㄴ. 디(82눅 4: 7), 닷디(82눅 2: 50)
  (1)의 ㄱ, ㄴ은 어휘 형태소나 문법 형태소를 막론하고 구개음화 현상을 외면한다. (1)이 수록된 문헌은 만주에서 영국 선교사 존 로스가 국역한 최초의 개신교 성서이다. 이 성서의 번역을 도운 한국인들은 모두 평북 의주 출신들이다1). 따라서 (l)처럼 구개음화를 모르는 여기 성서의 어휘에는 서북 방언이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다음의 어휘들은 동일 문헌에서 구개음화 이전, 이후의 표기를 하고 있는 것들이다.
(2) ㄱ. 갓티(관보 l895. 5. 20)
ㄴ. 갓치(관보 1895. 5. 16)
(3) ㄱ. 도흔(경신 3b)
ㄴ. 조혼(경신 5b)
(4) ㄱ. 됴흔 말을 (신정 357)
ㄴ. 조흔 동모요(신정 309)
  (2), (3), (4)의 ㄱ, ㄴ은 동일 문헌 안에 동일어에서 /t/ 구개음화의 이전, 이후의 쌍형을 드러내고 있다. 위의 “관보”, “경신록언식(1880)”, “신정심상소학(l896)”은 모두 한양에서 간행된 문헌들이다. 이처럼 중앙어를 나타내는 문헌들에서 갑오경장을 전후한 19세기의 /t/ 구개음화 표기는 혼란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개화기 교과서에서 특히 혼기를 나타내는 것은 “신정심상소학”이다. 그러나, “국민소학독본”에는 한결같이 구개음화 이후의 표기를 하고 있어 교과서들 간에도 그 표기 현장에 약간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혼기 양상은 19세기 성서 문헌에서도 마찬가지다.
(5) ㄱ. 텬(젼셔눅 2: 21)
ㄴ. 지지(젼셔눅 3: 17)
  (5)의 어휘도 한양에서 제작된“신약젼셔(1900)”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성서에도 앞의 중앙어에서 나타났던 구개음화 이전, 이후의 혼란된 표기 양상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교과서 가운데도 “국민소학독본(1895)”이나, 성서 문헌 가운데도 이수정의 “신약마가젼복음셔언(1884)”에는 구개음화 이후의 표기가 전반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6) ㄱ. 죠흔 利益(국민 98)
ㄴ. 보지못니라(국민 l50)
  (6)의 ㄱ, ㄴ은 어휘 형태소나 문법 형태소를 막론하고 구개음화가 되고 있다. 이는 구개음화 이전, 이후의 혼기된 모습을 드러냈던 “신정심장소학”과는 다른 면모이다. 다시 말하면, 여기 “국민소학독본”에는 “죠화고(국민 125)”, “져에는(국민 22)”, “生지라(국민 14l)”, “갓치(국민 85)” 등 한결같이 구개음화 현상을 겪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현상은 성서 문헌에서도 나타났다.
(7) ㄱ. 형졔(84막 3: 17)
ㄴ. 잇지(84막 2: 21)
  (7)의 문헌은 한문학자였던 이수정이 일본에서 간행한 “신약마가젼복음셔언(1884)”이다2). 여기서도 어휘 형태소와 문법 형태소에서 구개음화를 모두 겪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t/ 구개음화 현상 가운데 특히 “텬(天)”과 “뎨(帝)”와 결합된 어휘는 제외가 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구개음화를 기피하는 두 문자는 음운 외적인 요소가 작용되고 있음을 볼 수 았다. 이에 대해서는 곧 이어 어휘의 성질에 따른 이 현상의 차이를 살피면서 아울러 논의될 것이다.
  이상 ⑴~(7)의 용례들은 문헌의 발간 지역에 따라 구개음화 현상을 달리한 것들이다. 이들 어휘들은 만주 역간(譯刊)들에서는 구개음화를 외면하는 반면에 일본 역간에서는 이 현상을 겪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그에 비해 한양에저 간행된 문헌들에서는 강한 혼기 한상을 드러내고 있어, 지역에 따라 각각의 다른 면모를 보여 주었다. 이는 당시의 지역 방언의 한 단면이 이들 문헌에 각각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다음은 어휘의 성질에 따라 구개음화의 차이를 나타낸 것들이다.
(8) ㄱ. 뎨자(83요 4: 1), 뎌들(83요4: 45)
ㄴ. 주지(83요 3: 18), 갓치(로쓰 막4: 36)
  (8)에서는 어휘 형태소와 문법 형태소에서 구개음화 현상을 달리하고 있다. 이는 어휘 성질에 따라 구개음화 현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정 부사형 어미에서 이 현상은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는 자립성이 어휘 형태소에 비해 결여된 문법 형태소가 먼저 변화를 경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전대의 전통적인 문헌에 나타난 구개음화의 양상은 이것과는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형태소에서 보이는 구개음화에 대해서는 몇 가지 주장이 있어 왔다. /t/ 구개음화는 부정 부사형 어미 “-디”보다 어휘 형태소 내에서 먼저 일어나는 경향을 보였다(이명규(1974: 851)). 그리고, 구개음화는 “ㅣ”보다 “y” 앞에 배분되는 “t”에 먼저 구개음화를 겪기 시작하는데 이는 “y”가 “ㅣ”보다 동화력이 강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사실은 음성학적 근거로나 문법적 실례에서 증명이 된다는 것이다(송민(1988: 65)). 이들의 주장은 성서의 현상과는 상반됨을 보여 준다. 성서 문헌에는 부사형 어미에서 구개음화가 더 쉽게 더 빨리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개화기인 19세기의 다른 문헌에서도 구개음화 현상이 부정 부사형 어미에서 민감하게 나타나고 있어, 성서의 현상과 같은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주시경의 “국문론(1897)”에서도 부사형 어미에서 이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이에 대한 사실을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다.
(9) ㄱ. 디각, 뎨일(독립신문 2, 47)
ㄴ. 될지라, 긔록지(독립신문 2, 47)
  (9)ㄱ, ㄴ은 “t”이 “ㅣ” 앞이라는 동일한 조건인데도 유독 부정 부사형 어미에서만 이처럼 구개음화가 일어난 것은 음운적이 아닌 형태론적인 해석이 요망된다고 하겠다.
  한편, 어휘의 성질과 관련지어진 것으로 앞서 말한 “텬(天)”과 “뎨(帝)”로 조어된 어휘들에서 구개음화의 다른 특질을 발견할 수 있다.
(10) 텬하(독립 1, 2), 텬문(92직 1), 텬문(84막 4: 4)
(11) ㄱ. 뎨군(帝君)(명성경 6a), 황뎨(皇帝)(독립 1, l26), 뎨국(帝國)(황성 1, 3)
ㄴ. 형제(兄弟)(과화 6a), (84막 l: l6), 조석에(국민 4), 심즁(84막 2: 6)
  개화기를 전후한 19세기 문헌에서 나타난 구개음화는 모든 어휘에 걸쳐 철저하지 못하고 혼기가 되고 있다. 그런데 주목이 되는 것은 구개음화의 적용이 가능한 어휘들이 이처럼 어휘의 성질에 따라 수용을 거부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음운론적 현상이기보다는 음운 외적 현상으로 설명이 되어야 할 사항이다. 이를테면, “텬(天)”과 “뎨(帝)” 등의 글자가 지니는 의미의 존엄성과 경외감의 정도가 이 현상에 고려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이 글자와 조어된 어휘들은 대체로 존엄성과 경외심을 전제로 하는 어휘들이다. “텬쥬”, “양텬”, “텬”, “텬하”, “텬지” 등이 그렇고, “뎨군”, “상뎨” 등이 또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어휘들은 한결같이 흐트러짐이 없이 기존의 보수적인 표기를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표기 경항은 엄격한 제도 아래서 정중과 격식을 생활의 신조로 삼고 옛것은 숭상하되 새로운 것의 수용을 꺼리는 심리적인 요인이 은연중에 언어에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어휘가 수록된 것으로 임금의 명에 의해 편찬되었거나, 유교의 윤리를 보급 권장하기 위한 경우 그러한 면은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구개음화 현상을 꺼리는 것도 이를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9세기 성서 가운데는 문헌의 특성에 따라 부정 부사형 어미에서 이 현상이 달리 쓰여짐을 발견할 수 있다.
(l2) ㄱ. 니긔디(광익필 1-, 1) 디(82눅 4: 7)
ㄴ. 이긔지(광익필11-, 10) 주지(83요 3: 18)
  (l2)는 부정 부사형 어미에서의 /t/ 구개음화 현상 전·후 표기로서 (l2)ㄱ은 구개음화 이전 표기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천주교와 개신교에서 최초로 번역된 성서에서 나타났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런 최초의 번역 성서와는 달리 그 뒤에 번역된 성서에서는 (12)ㄴ에서 보여 주듯이 부사형 어미에서만 구개음화 표기를 하고 있다. 이 현상은 초기에 나온 소수의 성서를 제외하고는 일부 어휘에서 또는 전반적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하자면, 어느 경우나 구개음화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광익필 1”과 “82눅” 두 가지에 한정된다. 또 반대로 구개음화가 모든 어휘에 두루 나타난 것은 “84막”뿐이다. 그 밖에는 (12)ㄴ에서처럼 부사형 어미에서 구개음화가 나타났다.
  이처럼 개화기 문헌에 드러난 이 현상에 관한 표기는 혼란된 양상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것의 수의적인 변이로서의 음운론적인 현상은 이미 16세기 말엽부터 그 우발적인 발달이 보이기 시작하여 l7세기에 이르면 점차 음성적인 규칙으로 굳어지고 l8세기 중반에는 국어의 중앙 방언 자료에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송민 1988: 75)3).
  그런데도, 여기 구개음화 현상은 19세기인데도 이처럼 구개음화 이전의 강한 보수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현상은 문헌의 특성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같은 부정 부사형 어미인데도 (l2) ㄱ, ㄴ처럼 구개음화 이전· 이후 표기를 문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낸다는 것이다.


          Ⅱ.2. 어두의 /ㄴ/ 구개음 표기

  구개음화와 관련된 것으로 어두에 있어 “ㅣ”, “y”에 선행한 /ㄴ/의 탈락을 들 수 있다. 어두의 구개음 /ㄴ/의 탈락은 이미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이기문 1992: 198). 그런데도, 19세기 문헌의 어두에서 구개음 /ㄴ/ 표기는 혼란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 가운데도 특히 19세기 성서 문헌에서는 어두에서 구개음 /ㄴ/을 기피하지 않고 그대로 쓰는 경향이 있었다.
  본래 l5세기 국어에서는 /ㄴ/이 어두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그 후 근세 국어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탈락되기에 이르렀다. 그 탈락 시기에 관해서는 몇 가지 주장이 있어 왔다. 장세경(1961), 유창돈(l964), 김완진(1967), 남광우(l969), 이기문(l972), 이명규(1962) 등 여러 연구에서 이 문제가 다루어졌다. 이들 에 따르면, 그 탈락 시기는 16세기로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논술되고 있다. 그 탈락 현상이 늦어도 l8세기에는 일단 완성되었다는 데는 이론이 없다. 그런데도, 개화기 문헌에 드러난 어두 구개음 /ㄴ/은 한자 말에서, 고유어에서 각각 나타나는 것과 어두에서 탈락되는 것으로서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되어진다.


              Ⅱ. 2.1. 한자 말에서 어두 /ㄴ/

  한자 말에서의 어두 /ㄴ/은 갑오경장을 전후한 19세기 문헌에 두루 나타난다.
(13) 네(禮)를 좃차(82눅 1: 6), 님하니(臨)니(83눅 1: 27) 뉼법(律法)(83요 1: 17) 냥식(糧食)(83요 4: 34)
(14) 녀인(女人)(84막 14: 3), 녀식(女息)(독립 4, 104), 념려(念慮)(경향 1)
  (13)은 본래 어두음 “ㄹ”인 한자 말이 “ㄴ”으로 표기된 경우이고, (14)는 본래 어두음 “ㄴ”이던 것이다. 앞에 것은 만주에서 발간된 성서들에서 주로 나타난 것인데 이는 서북 방언이 노출된 것으로 여겨진다. 서북 방언에는 “ㄴ”을 어두에 쓰고 있음을 김이협(1981)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한자 말 어두 “ㄹ”이 개화기에 있어 초기와 후기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하고 있는 것도 지역성을 드러내 준다. 이를테면, 만주에서 번역된 성서들에서 어두에 “ㄴ”으로 나타났던 것이 한양에서 번역된 성서에 이르면, 대부분 다시 “ㄹ”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15) 뉵년(83요 2: 20) --륙년(젼셔 요2: 20)
뉼법(83요 1: 17) --률법(젼셔 눅2: 23)
냥식(83요 4: 34) --량식(젼셔 눅3:14, 95눅 3: 14)
네(체)(82눅 1: 6) --례물(95눅 5: 14)
네기더니(82눅 1: 21) --력이더니(젼셔 눅1: 21)
  위의 예에서 보여 주는 “ㄴ”계는 만주에서 번역된 성서들에서, 반면에 “ㄹ”계는 우리나라 한양에서 간행된 성서들에서 나타났다. 이는 서북 방언에서는 한자음 어두 “ㄹ”이 “ㄴ”으로 국내 중앙에서는 본래의 음인 “ㄹ”로 쓰였음을 시사한다고 할수 있다.
  위의 예 가운데 하나인 “네기더니”를 살펴보면,이 어휘가 조선 초기에는 “너기다(想))(龍 50장)”였는데, 16세기에 와서는 /j/의 첨가에 의해서 “너기다(社初上 71)”로 나타났다. 현대 국어에서는 “n → 0 /_{i, j}의 규칙에 의거해서 “여기다”로 되는데 이때의 /i/는 기저 구조가 순정 모음인 경우에 한한다4). 이는 서북 방언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국어 음운 현상이다.
  또한, “네기다”는 전설 자음 다음에서 비전설 모음의 전설 모음화로 평안도 방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사이다.
(16) 네기다, 체네(遞女), 센네(仙女), 네비(旅費), 네펜네(여편네)(김이협, 1981)
  이러한 어두 ‘ㄹ’~‘ㄴ’의 혼란은 17세기 문헌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와 “중간두시언해(1632)”에서도 보이는데(이숭녕, 1971: 8~9), 주로 모음 사이에서 그러했다.
  18세기 후기에 와서는 /i/계 모음에 선행하는 ‘ㄴ’은 이미 그 음적인 자질을 잃어버렸다. “십구사략언해(十九史略諺解(1772))”에는 “임금”이 보이고, 19세기 초의 “윤음”에서도 ‘ㄴ’의 탈락을 볼 수 있다(전광현 1971: 50). 이러한 국어 일반에서의 현상은 성서의 경우와는 대조를 이룬다. 위에서 누누히 지적했듯이 19세기 당시 모든 번역 성서에서는 어두 ‘ㄴ’이 대체로 그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84막”에서만은 일반 국어에서와 같이 어두 ‘ㄴ’이 탈락되었다. 또한, “국민소학독본”, “독립신문” 등에서도 그러한 면이 간혹 보였다.
(17) ㄱ. 여(84막 6: 25), 양식(84막 6:8), 육십(84막 4:8)
(18) ㄱ. 연후에(국민 2)
ㄴ. 여인(독립 2.19)
  그러나, 이상과 같은 현상은 성서와 교과서 가운데 극히 일부에 간혹 나타났을 뿐이다. (18)ㄴ의 “여인”은 같은 문헌에서 “녀인(독립 2.2)”과 더불어 혼기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휘에서 “녀편네들(독립 2.68)”처럼 ㄴ이 어두에 보이고 있어, 어두 ㄴ탈락이 그리 활발한 것은 아닌 듯하다.
  성서에서 볼 수 있었던 어두 ‘ㄴ’의 유지 현상은 당시의 이른바 개화사상과 관련된 일부 문헌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났다. (14)에서 보인 것처럼 “독립신문”, “황성신문”, “경향신문” 등에서도 어두에 ‘ㄴ’을 그대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서울말을 바탕으로 엮어졌다고 하는, 리델 신부의 “Grammaire Coreenne(1884)”에서도 어두 ‘ㄴ’은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그 밖의 “조선위국자휘(1835)”, “한불뎐(1880)”, “한영뎐(1890)”, 그리고 “국민소학독본(1895)”에서도 어두에 ‘ㄴ’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주로 개화 문물, 특히 서양 문물과 관련된 문헌에서 어두음 ‘ㄴ’이 계속 유지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이들 문헌은 번역 성서와 몇 가지 점에서 상통되는 바가 있다. 어떻든, 이런 현상은 앞서 말한 “윤음”, “국민소학독본” 등 전통 문헌에서의 어두음‘ㄴ’이 탈락되어 나타나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Ⅱ.2.2. 고유어에서 어두 /ㄴ/

  다음은 성서와 교과서 그리고 신문들에서 나타나는 어두 ‘ㄴ’의 고유어인데, 이는 당시의 문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l9) ㄱ. 닐으러(至)(83요 4: 25), 녯적을(로쓰콜 l: 26)
ㄴ. 녯적을(국민 4과), 니러나(신정 235)
ㄷ. 넉이고(독립 l, 114), 닙고(경향 l3), 닐기를(경향 14), 녯적(독립 1, 115)
  (19)ㄱ은 성서 문헌에서, (l6)ㄴ은 개화기 교과서에서, (l9)ㄷ은 신문들에 나타난 어두 “ㄴ”계 어휘들이다. 이러한 어두 ‘ㄴ’은 당시의 성서와 일반 문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났던 현상이다. 이러한 어휘들은 번역 성서에서 매우 흔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어두 ‘ㄴ’의 분포는 번역 성서 전반에 걸쳐 고루 나타나고 있을 뿐 아니라 교과서와 신문들에서 매우 생산적이었다. “국민소학독본”(“녀기사[19]”)에서나 “독립신문”(“닙은[1, 114]”, “녯적 [1, 115]”), “경향신문”(“닙고[13]”), “넉여[15]”) 등에도 나타난다.
  간혹 고유어의 어두 ㄴ탈락이 여기 성서 문헌에서 “여름(로쓰 콜1: 10), “이마(젼셔 눅4: 29)”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것들은 아주 희귀하게 보일 뿐이다.


Ⅲ. 원순 모음화 표기

  개화기 문헌에서 순음 아래의 /ɨ/가 /u/로 바뀌는 원순 모음화는 그 표기에 있어 형태소 내부에서와 형태소 연접에서 각각 특이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 현상은 16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유창돈 1980a: 160). 따라서, 17세기의 “첩해신어(1676)”, “역어유해(1690)”에서 많은 용례가 보이며, 18세기의 윤음에서 매우 활발한 양상을 띠게 된다5). 이와 같은 현상이 성서와 교과서, 일반 문헌에서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형태소 내부와 형태소 연접에서의 경우를 나누어 검토해 보기로 한다.


          Ⅲ.1. 형태소 내부의 경우

  개화기 문헌에 나타난 원순 모음화에 따른 표기는 형태소 내부의 경우, 많은 혼기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20) ㄱ. 믁시(95눅 1: 22), 처음브터(95눅 2: 4)
ㄴ. 슬푸다(84막 11: 29), 허물(84막 l1: 25), 베푸러(83눅 1: 51)
(2l) ㄱ. 이러므로(신정 32, 국민 143), 이블속에(국민 9l), 그燭블이(국민 93)
ㄴ. 이러무로(국민 104), 물에(신정 335), 그릇물속에(국민 30)
  (20)은 성서 문헌에서, (21)은 개화기 교과서에서 원순 모음화 이전, 이후의 표기를 드러낸다. 각 항의 ㄱ 은 원순 모음화 이전의 표기이고, ㄴ은 원순 모음화를 겪은 표기를 하고 있다. 이미 원순 모음화 현상이 전대에 활발한 성격을 띤 데 비하여, 여기 이들 개화기 문헌들에서는 위와 같이 혼기 현상을 나타낸다. 특히 (21)의 “이러므로”와 “이러무로”는 동일 문헌에서 쌍형을 나타내는 등 혼기 현상을 드러냈다. 또한, (21)에서 흥미로운 것은 “블”과 “믈”에서 나타나는 원순 모음화 표기가 다름을 볼 수 있다. 이것도 음운 외적 현상으로 보인다. 이처럼 원순 모음화에 따른 표기가 혼기되고 있다는 것은 문어(文語)의 보수성을 나타낸 것이라 여겨진다. 개화기 당시의 신문들에서도 이러한 용례가 발견되어진다.
(22) ㄱ. 이담브터(독립 l, 2, 황성 l, 2), 더브러(독립 4, 278, 관보 l894. l2. 12)
ㄴ. 붓터(황성 1, 3),(관보 1894. 12. 12), 푸러(독립 4, 278), 드물게(경향 1)
  (22)에서쳐럼 원순 모음화가 신문에서까지 혼기 현상을 보인다는 것도 역시 문어(文語)의 격식성 내지 보수성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현상은 당시의 외국인들이 집필한 사전류들인 “조선위국자휘(1835)”, “한불뎐(1880)”, “한영뎐(1890)”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당시의 교과서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드러났다.
(23) ㄱ. 早믈한(조선위국자휘 2), 暮저믈모(同 5), 飽브를포(同 49), 靑프를쳥(同 67), 張베플쟝(同 107), 水믈슈(同 107), 火블화(同 108)
ㄴ. 問무를문(同 25), 罪허물죄(同 53), 不아닐불(同 108)
(24) ㄱ. 하픔(下品)(한불뎐 80), 믈며(同 86), 믁샹다(黙想)(同 237), 브드럽다(同 324), 믈방울(滴)(同 257)
ㄴ. 물거품(水泡)(同 256), 불(同 347)
  이처럼 각 항의 ㄱ과 ㄴ은 모두 원순 모음화의 이전, 이후로 극심한 혼기 현상을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주시경(쥬샹호)의 “국문론(1897)”에서도 원순 모음화 이전의 표기가 쓰이고 있었다.
(25) 스믈(독립신문 2, 47), 브터(同 2, 47)
  이처럼 기독교 관계 문헌 및 신문들에서 원순 모음화는 많은 혼기 현상을 나타냈던 것이다.
  원순 모음화가 이뤄진 시기에 대한 연구로는 16세기와 17세기의 주장이 있다6). 어쨌든, 17세기 말에는 이 현상이 이미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도, 19세기에 번역된 성서들과 위에 제시한 문헌들에서 원순 모음화 이전의 표기를 하는 등 많은 혼기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문헌적 기술(記述)이 구어보다 한층 더 보수적임을 드러내는 한 단면으로 보인다.
  한편, 만주에서 간행된 국역 성서들에서는 다른 성서와는 달리 이 현상을 대체로 겪고 있다.
(26) 그물(82눅 5: 2), 베푸러(83눅 1:5l), 붓터(로쓰 막 5: 2), 불갓탄혜가(로쓰 뎨 2: 3)
  위의 용례들은 한결같이 원순 모음화를 겪은 표기가 되고 있다. 이것은 그 번역이 앞에서도 나타난 대로 구어 중심의 서북 방언이라는 점에서 문어체와 그 차이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Ⅲ. 2. 형태소 연접의 경우

  개화기 문헌에 나타난 원순 모음화와 관련된 표기는 형태소 연접일 경우, 체언과 용언에서 그 차이를 드러낸다. 특히, 일반 문헌에서 이 현상은 명사형 어미 “-ㅁ”과 목적격 조사 “-을”의 결합에서 시작된 듯하다(전광현, 1971: 69). 그런데, 국역 성서에서는 기구격 “-으로”와 보조 조사 “-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27) ㄱ. 목숨을(광익필 I-, l9), 사을(92직 二, 1)
ㄴ. 일흠은(83요 l: 6), 을 (젼셔 눅2: 35)
  (27)의 보기에서는 ㅁ 말음을 가진 체언 다음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가 연접되었지만 원순 모음화가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표기되고 있다7). 이러한 현상은 (27)ㄱ의 천주교계나 (27)ㄴ의 개신교계가 모두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이런 현상은 다른 문헌에서도 보편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체언에 비해 용언은 좀 더 다양한 면모를 나타내고 있다.
(28) ㄱ. 믁시심을(92직 二, 1), 득을(95눅 l: 4l), 심을(젼셔 눅2: 47)
ㄴ. 절믈(광익필 Ⅰ-, 3), 됴흐믈(광익필 Ⅰ-, 4), 잇스믈(84막 2: 8), 자약믈(84막 5: 15)
ㄷ. 츅슈물(82눅 1: 42), 이스문(83요 1: 30), 샤무로써(82눅 1: 77)
  위의 (28)의, ㄱ, ㄴ, ㄷ은 형태소 연접에서 용언의 경우 나타난 세 가지 형태이다.
  (28)ㄱ은 분철이 되고 있다. 이것은 앞서 (27) 체언의 경우와 같이 분철이 됨으로써 원순 모음화의 계기가 마련되지 않는다. 이처럼 분철이 되는 성서로는 “광익필 Ⅰ”을 제외한 천주교 성서 전부와 후기 개신교 번역 성서에 속하는 “95눅”과 “젼셔”들이 있다. 이들 성서의 표기는 현대 어법에 비추어 봐도 손색이 없다. 이는 대체로 ‘감쥰’을 받았거나, 위원회에서 번역된 것으로서, 대체로 공인된 번역 성서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반면에, “광익필 Ⅰ”은 개인의 필사본으로 되어 있음이 다른 것과는 대조가 된다. (28)ㄴ, ㄷ은 연철이 되는 가운데 혼기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원순 모음화를 겪는 (28)ㄷ은 구어 중심으로 번역된 성서들이란 점에서 구어에는 이미 이 현상을 겪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여기서 주목이 되는 것은 (28) ㄱ도 원순 모음화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의 표기는 형태만 그러했을 뿐, 소리는 원순 모음화에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Corean Primer”의 음성 표시에서 볼 수 있다8). (28) ㄴ은 형태소 사이에서 연철은 하되 원순 모음화 이전의 표기가 나타난 어휘들이다. 이러한 표기는 “광익필 Ⅰ”과 “84막”에서 주로 나타났다. 여기 두 성서는 한문 성서에서 번역되었다는 공통성을 지닌다. 즉, “광익필 Ⅰ”은 최초로 한문 성서에서 번역 필사된 천주교 성서이고, “84막”은 한문학자가 번역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표기 형태는 “광보”에서도 나타났다.
(29) 進하믄(관보 1895.5.19) , 진급케하믈(관보 1895. 5. 19), 더브러(관보 1895. 5. 19)
  (29)의 용례도 연철은 하되 원순 모음화 이전의 표기가 된 것들이다. 당시 “관보”에 나타난 문체는 대개가 한문투이고 문어체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앞서 (28)ㄴ의 초기 천주교계와 이수정 역의 한문투와도 그 성격이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28)ㄴ과 (29)의 표기는 보수적인 한문투의 문어체를 쓰던 이들에 의해 나타난, 하나의 표기 형태라 할 수 있다.
  한편, (28)ㄷ은 로쓰가 관여한 만주 역간(譯刊)들에서 나타났던 형태들이다. 이런 형태가 쓰인 성서들은 대개 구어를 중심으로 한 번역 성서라는 특징을 지닌다. 이것은 구어에는 이미 원순 모음화가 보편화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구어에서 이뤄진 이 현상이 그런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라 여겨진다. 또한, 이것이 구어체의 성격을 지닌 성서에서나마 확연히 나타났다는 것은 17세기 말에 형성된 원순 모음화가 실제로 문헌에 구현된 것으로서도 볼 수 있다.
  다음은 어간 말음이 “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원순 모음화의 표기가 쓰여진 것이 있다. 이는 전자와 같은 다른 일면이다.
(30) 올운손(82눅 6: 6), 부루게(82녹 1: 53), 됴운(82눅 1: 53)
  위의 보기들은 만주 역간(譯刊) 중 최초로 번역된 성서들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앞의 원순 모음에 영향을 입은 일종의 유추 작용인 듯하며, 또한 방언적인 현상으로 여겨진다9). 이러한 현상도 그 다음 해(1883)에 발간되는 성서들에서는 본래의 형태인 “ㅡ”를 채택하고 있다.
(31) 올은(83눅 1: 6, 83눅 1: 17, 로쓰 눅1: 6), 죠은(83눅 1: 53), 죠흔(로쓰 눅1: 53), 부르게(83눅 1:53)
  짧은 기간에 이처럼 표기가 다르게 나타난 것은 최초의 번역에서 나타났던 방언이 둘째 번부터는 수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9세기에 들어서 순음 다음에서 ɨ>u의 원순 모음화에 반하여 o>ɔ의 비원순 모음화가 나타나고 있음이 이병근(1970)에서 밝혀진 바 있지만, 성서에서는 그러한 현상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앞에서도 거론했듯이 용언의 경우, 순음 아래서 원순 모음화 이후의 표기가 쓰였을 뿐 아니라 그 외의 환경에서도 이 현상을 “82눅”에서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원순 모음화는 형태소 연접의 경우, 체언과 용언에서 차이를 드러냈다. 즉, 체언에선 원순 모음화 이전의 표기를 한 데 비하여, 용언에선 수의적인 양상을 띠고 있었다. 또한, 표기에 있어, 초기 개신교 성서에선 이 현상을 겪은 표기가 나타난 반면에, 천주교계 성서와 후기 개신교 성서에선 이 현상 이전의 표기가 주로 나타났다. 후자의 경우, 이들 표기는 현대 어법에 매우 접근하고 있다(28ㄱ). 그것은 위원회의 ‘감쥰’ 내지 ‘공인’이라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현대 어법에 도달된 것으로 여겨진다.


Ⅳ. 움라우트 표기

  개화기 문헌에 나타난 움라우트와 관련된 표기는 많은 혼기 현상을 보이고 있다. 움라우트는 후부 모음이 전부 모음으로 바뀌는 음운 현상인데, 이는 /e/, /ɛ/, /ø/, /wj/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즉 이중 모음의 단모음화가 이뤄진 다음에 형성된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설명될 수 있다(이기문 1961: 167).
(32) 근원을 좃차 레로써 귀이 데오비노의 존젼에(82눅 1: 3)
사카랴를 기려(82눅 1: 21)
물메기지 으랴(로쓰 눅13: 15)
목숨을 기는 쟈(로쓰 요12: 25)
불상이 예기 숀을 펴서(84막 1: 41)
  위의 용례들은 초기 개신교의 국역된 성서들에서 나타난, 움라우트와 관련된 표기 현상들이다. 여기서는 “·>”, “ㅏ>ㅐ”, “ㅓ〉ㅔ”가 많이 보이고 았다. 반면에, 만주에서 국역된 성서들에는 “ㅗ>ㅚ”, “ㅜ〉ㅟ”도 또한 적잖게 나타난다.
(33) 쇠경이 능히 쇠경을 인도너냐(82눅 6: 39)
쇠경을 발게며(82눅 4: 18)
명을 쥐기 거세(로쓰 막3: 4)
듀다가 쥐기물 닙으(83데 5: 36)
너의 눈에 슁길이니(로쓰 눅19: 34)
쇠기지 안앗노라(로쓰 고후 72)
  위의 용례는 국역 성서에 보이는 “ㅗ, ㅜ”가 “ㅚ, ㅟ”로 나타난 어휘들이다. 19세기 후반에 쓰인 일반 문헌에서는 용례(33)과 같은 현상이 드물었다(이병근 1970: 378). 반면에 국역 성서에서는 이들 현상이 대량으로 나타나서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ㅚ, ㅟ”의 단모음화가 19세기에 와서 상당한 변화를 일으킨 점과 그 시기를 이들 성서 문헌들이 다소 시사해 준다고 할 수 있다10). 한편으로 “쥐기”, “쇠기-” 등이 아래와 같이 “주기”, “소기”로도 동시에 쓰이고 있어, 움라우트가 그렇게 강력한 음운 현상은 아닌 듯하다(최태영 1983: 99).
(34) ㄱ. 명을 쥐기 거세(로쓰 막3: 4) ~돌노 쳐 죽인자(로쓰 막23: 47)
ㄴ. 사을 쇠기지 안앗노라(로쓰 코7: 2) ~스사로 소기지 말나(로쓰 가6: 7)
  (34)는 동일 문헌에서 이처럼 두 가지 표기를 나타낸다. 이런 현상은 주로 서북 방언권에 속한 이들이 번역한 성서들에서 보였다. 따라서, 방언의 특징이 간헐적으로 성서에 나타난 것으로 보여진다.
  그 외에도, 이 현상이 교과서를 비롯한 개화기 문헌들에서 두루 혼기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35) ㄱ. 부평외양도 뵈이니(국민소학독본 3과)
ㄴ. 그집으로 다리고(同 9과), 冊板 삭이 法이 不便다(同 5과)
(36)
ㄱ. 犢야지독(조선위국자휘 78), 저귀뎌기져(同 83)
ㄴ. 鷗며기구(同 76), 燕져비연(同 77)
(37) ㄱ. 멕이(饗)(한불뎐 230), 졔비燕(同 543), 귀덕이(同 202)
ㄴ. 다리다(率)(同 461), 달팡이(蝸)(同 462)
  (35), (36), (37)의 ㄱ, ㄴ은 움라우트 현상의 이전, 이후 표기를 하고 있다. 개화기 당시 문헌들에서 이와 같은 혼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음운론적인 것과 함께 형태론적인 것이 제약 조건으로 작용되고 있기도 했다(김완진 1981: 131). 이 현상이 국어에 있어 일어난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있어 왔다. 이기문(1961: 167)에서 19세기에 이 현상이 일어난 것으로, 김완진(1981: 17)에서는 18세기로 보고 있다. 그런데도, 성서는 그와는 다르다. 즉 성서의 경우, 18세기 말에는 이 현상이 발견되지 않고, 19세기 성서에서 위의 용례처럼 혼기가 되어 표기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19세기에 있어 여러 문헌을 통한 당시의 모음 체계를 8모음 체계로 가정한 견해에 대하여(이병근 1970: 379), 국역 성서 및 이와 관련 문헌들에서는 10모음 체계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ㅗ>ㅚ, ㅜ>ㅟ”가 “ㅏ>ㅐ, ㅓ>ㅔ”와 별반 차이가 없이 성서에 두루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는 성서 문헌들이 19세기의 모음 체계를 10모음 체계로 인정할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거리가 된다. 현재도 이 현상이 형태소 연접에서 보편화된 것이 아니며, 특히 “ㅜ>ㅟ”는 지금도 중모음에서 단모음으로 진행 중임을 감안할 때 이것의 단모음 체계의 포함 여부조차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음을 부언해 둔다.


Ⅴ. /·/의 소멸에 따른 표기

  개화기에 간행된 문헌들과 초기에 국역된 성서들에서는 /·/와 관련된 표기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의 소멸은 어두 음절에서보다 비어두 음절에서 먼저 일어나서 제 1단계 소멸이 이루어졌다. 비어두 음절에서 “·>ㅡ”, “·>ㅏ”, “·>ㅗ”는 16세기에 완성되었고 어두 음절에서는 18세기에 완성되었다.
  /·/의 소멸은 모음조화와 관련을 가지는데, 국어의 모음조화는 15세기의 경우, 의미부 내부와 어휘, 문법 형태소 간의 연접에서 엄격히 지켜지던 현상이다. 그러나 /·/의 소멸과 더불어 이것은 허물어지게 되며, 이미 그 음가 소실 시기 등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어 왔다(최현배(1976), 허웅(1965), 이병근(1982), 이기문(1982)).
  다음의 용례들은 /·/와 관련된 어휘들인데, 여기 문헌 자료들에서는 어두 음절과 비어두 음절에서 /·/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38) ㄱ. 하(광익필 1一, 16)
ㄴ. 나흔(광익필 1一, 23)
  (38)ㄱ은 비어두 음절에서 (38)ㄴ은 어두 음절에서 각각 /·/음이 그대로 나타난 것의 용례들이다. 이와 같이 초기 천주교계 성서에는 대체로 /·/음이 그대로 쓰이고 있었다.
  한편, “82눅”을 비롯한 만주 역간 성서들에서는 위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39) ㄱ. 아들(82눅 1: 5), 하느님(82눅 1: 37), 사람(82눅 4: 4)
ㄴ. 한나토(82눅 1: 6), 갓트물(82눅 1: 20), 팔(82눅 1: 51)
  (39)ㄱ은 비어두 음절의 /·/가 소멸된 것이고 (39)ㄴ은 어두 음절의 /·/가 소멸된 것의 어휘들이다. 이와 같이, 이 성서에는 /·/의 소멸이 대량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어휘에서 /·/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 다만, 앞의 초기 필사본 천주교계 성서들보다는 “82눅”에서 /·/의 소멸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82 눅”에는 한 어휘에 /·/의 소멸로 인한 쌍형어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나름대로 어휘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음을 드러낸다고 하겠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83요”나 “84막”과 대조가 되기도 한다. 즉 이들 성서에는 동일 어휘에서 /·/로 인한 쌍형어가 대량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40) ㄱ. 날(83요 1: 5l)~하날(83요 1: 32)
물(83요 2: 17)~하물(83요 1: 50)
쟈(83요 3: 6)~쟈난(83요 3: 6)
ㄴ. (84막 1: 10, 11: 25)~늘(84막 12: 25)~하(84막 10: 21)
아들(84막 3: 11, 9: 7)~아(84막 1: 11)
야금(84막 8: 3)~여금(84막 7: 36)~하야금(84막 12: 3)~여곰(84막 15: 32)
마(84막 14: 31)~맛(84막 12: 6, 15: 4)~맛츰(84막 15: 5)
가로되(84막 2: 27, 3: 11, 5: 31)~가로(84막 5: 36)~갈오(84막 6: 14)~갈오되(84막 2: 25)~로되(84막 3: 21, 3: 33, 4: 41)~로되(84막 3: 32)~로되(84막 4: 30, 5: 9, 5: 39, 6: 10)~갈오되(84막 3: 3, 3: 5)~오되(84막 1: 25, 3: 17)
치(84막 1: 2)~갓치(84막 1: 10)
람(84막 1: 3)~름(84막 2: 15)
(84막 14: 37)~잠(84막 14: 40, 14: 41)
말(84막 14: 31, 5: 36)~말슴(84막 14: 16)
  (40)ㄱ의 성서 “83요”는 (39)의 “82눅”보다 l년 뒤에 간행된 성서이다. 그 간행 차가 불과 1년인데도 /·/의 모습이 여기 두 문헌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구어체의 문장을 1년 후에 격식에 맞춘 문어체로 바꾸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11). (40)ㄴ은 “84막”에 나타난 혼기의 보기들이다. “84막”의 혼기 현상은 앞에서도 누누이 지적되어 왔다.
  이와 같이 /·/의 소멸에 따라 일어난 표기 양상은 자유 변이를 일으키나 그것은 비시차적(非示差的)인 대립이 된다. 다시 말하면, “·>ㅏ”, “·>ㅡ”가 상통을 이루며, 제l 음절보다는 제2 음절에서 더욱 활발하게 소멸된 표기를 보인다. 어쨌든, 적잖은 어휘에 이러한 혼기가 보이고 쌍형어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가 소멸하면서 그에 따라 일어난 증상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92직”을 비롯한, 그 후에 간행된 성서들에는 오히려 어두 음절과 비어두 음절에 /·/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41) ㄱ. 사(92직 2, 5), 하님(95눅 1: 15), 말(97직 1, 5), 하(젼셔 눅2: 15)
ㄴ. 나흔(92직 2, 1), (95눅 1: 50), 공(97직 1, 2), 손(젼셔 눅 3: 8)
  (41) ㄱ의 비어두 음절이나 (41)ㄴ의 어두 음절에 /·/가 표기되고 있다. 이것은 후기 성서에서 /·/가 아직 강력하게 쓰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당시의 신문들에서도 나타났다.
(42) ㄱ. 공(독립 2, 48), 무(독립 2, 10, 경향 28), 하님(독립 2, 10), 국(황성 1, 26), 평(황성 1, 4), 사(황성 1, 26, 경향 18), 녀(황성 1, 4),동(경향 24)
ㄴ. 기(독립 2, 9), 치(독럽 2, 10), 야(황성 l, 27), 력(황성 1, l), 셩(경향 18), 방(경향 22).
  (42)ㄱ 은 비어두 음절에서, (42)ㄴ은 어두 음절에서 /·/가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이와 같이 앞서 위원회에서 번역된 성서와 여타 신문들에서 /·/가 소멸되지 않고 있다. 이런 사실은 앞서 (39)의 용례들이 당시의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음을 나타내 준다. 결국, 일부 성서들에서 /·/가 소멸되고 있는 것은 다만 한 부류에 속할 뿐,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던 듯하다.
  /·/의 분포 상황을 보아, /·/가 소멸된 표기가 주로 나타난 성서들은 대체로 구어(口語) 중심의 만주 역간(譯刊)들이다. 반면에, /·/를 유지한 성서들은 대체로 문어(文語) 중심의 성서들이었다. 언중들은 구어에서는 이미 /·/를 의식하지 않은 채 /·/가 소멸된 어휘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문헌에 이것을 기록할 때는 문헌적 격식성 때문에 /·/를 표기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비어두 음절에서 “·>ㅡ”는 이미 15세기에 산발적이던 것이 16세기에 들어서면 /&·/의 변화가 갑자기 늘어난다(이기문 198O: 1l8). 국역 성서류에는 앞서 본 대로 만주 간행 성서류에서 /·/의 변천은 매우 왕성했다. 반면에, 그 외 성서류와 신문들에서는 /·/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어두 음절의 경우, 18세기 후반의 “한청문감(1775년경)” 등 당시의 문헌에서 /·/가 그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것의 변화는 16세기 말에는 소수의 어사가 대상이 되었으나, 순수 국어의 경우, 문헌상에서 18세기가 가장 현저히 나타났던 때이다(전광현, 1978:21). 그런데도, 18세기 말의 성서 자료인 “광익필 1”에서 보기 (38)ㄴ에서와 같이 /·/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19세기 말의 성서와 신문들에서도 마찬가지였음을 앞서 용례 (41)ㄴ, (42)ㄴ에서 보아 왔다. 이것 역시 비어두 음절과 마찬가지로 문어의 격식성을 보여 준 것이라 하겠다.
  그러면, /·/의 변화로 인한 어휘는 성서에서 어떤 특징을 지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선 단적인 면으로, 모음조화에 상당한 배려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43) 모단촌에(로쓰 막8: 27) cf. 모(月二, 54)
하날(83요 1: 37) cf.(석六, 35)
다삿(83요 4: 18) cf. 다(小언二, 33)
오날(83요 5: 10) cf. 오(석六, 28)
  위의 용례들은 현대 어법과는 다소 다르게 표기되었다. 이런 경향은 “국민소학독본”을 비롯한 다른 문헌들에서도 나타났다.
(44) ㄱ. 軍士 모다 降服바드며(국민 66) cf, 모(月二, 54)
今日에 반다시 富營터이라(국민 77) cf. 반드시(杜초 二四, 32)
ㄴ. <아자먼이(한불뎐 10) cf. 아미(龍 99장) /td>
아참(朝)(한불 11) cf. 아(月釋 1: 45)
ㄷ. 보롬망(조선 4a) cf. 보(樂範 9: 19)
指손가락지(조선 l2a) cf. 손락(東三網, 孝子 三, 3l)
  위의 용례들이 나타난 문헌들은 개화기에 출간된 것들로서 대체로 서구의 영향을 받고 있고, 또한 국민의 개화사상과도 관련되고 있다. 이 점은 성서와 닮은 점이라 할 수 있다. 이들 문헌들에서 이미 18세기에 허물어진 모음조화 현상이 이와 같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것이 당시의 음운 현상이라기보다는 성서 특유의 보수성 내지 관련 문헌들이 지닌 문헌적 격식성, 복고성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Ⅵ. 마무리

  이상으로 개화기의 문자 사용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이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개화기의 /t/ 구개음화 현상은 그 문헌의 발간 지역에 따라 표기 현상을 달리하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중앙에서 간행된 문헌은 구개음화 현상을 매우 혼기된 모습으로 나타낸다. 반면에 만주에서 간행된 성서 문헌들에서는 구개음화 현상이 주로 외면되고 있는 데 비해, 일본에서 간행된 문헌에는 대체로 구개음화를 겪고 있다. 한편, 어휘에 따라서도 이 현상은 그 모습을 달리한다. 이는 어휘 형태소와 문법 형태소인 부정 부사형 어미에서 구개음화의 이전, 이후의 표기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텬(天)”, “데(帝)”로 조어된 어휘들에서 구개음화 현상이 외면당하고 있다. 이것은 음운 외적인 현상으로 19세기 표기의 한 특징이라 할 만하다. 한편, 문헌의 특성에 따라서도 구개음화 현상은 다르게 나타났다. 즉, 동일한 부정 부사형 어미인데도 문헌의 특성에 따라 구개음화 이전·이후 표기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2. 어두의 /ㄴ/ 구개음 표기를 들 수 있다. 어두 ㄴ 출현은 개화기 문헌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서 문헌의 경우, 만주 역간에서 어두 ㄴ 탈락은 매우 생산적이다. 즉 다른 문헌에서는 간혹 어두 ㄴ탈락이 희귀하게 나타나는 데 비해, 만주 역간 성서들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어두 ㄴ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서북 방언의 지역성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일본에서 간행된 “84막”에는 어두 ㄴ이 전면적으로 탈락되고 있어 앞의 만주 역간 성서들과는 대조를 이룬다.
  3. 개화기 문헌에서 원순 모음화 표기는 형태소 내부와 형태소 연접에서 그 양상을 달리한다. 형태소 내부의 경우, 이미 18세기에 완성된 현상인데도 개화기에 와서 동일 문헌의 동일 어휘에서도 이 현상의 이전, 이후 표기를 드러낸다는 것은 문어의 격식성과 보수성 탓이라 하겠다. 그리고, 형태소 연접에서는 연철 표기와 비연철 표기에서 원순 모음화는 차이를 나타낸다. 이를테면, 연철이 일어나는 용언에서 이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 문헌에서는 명사형 어미 “-ㅁ”과 목적격 조사 “-을”의 결합에서 발생하지만, 성서 문헌에서는 기구격 “-으로”와 보조 조사 “-은”에서도 나타났다.
  4. 개화기 문헌에 드러난 움라우트는 일반 문헌과 성서 문헌에서 차이를 보인다. 개화기 당시의 일반 문헌에서는 “·>”, “ㅏ>ㅐ”, “ㅓ>ㅔ”가 많이 나타나는 데 비해, 성서 문헌에서는 앞의 것 외에도 “ㅗ>ㅚ”, “ㅜ>ㅟ”가 상당량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ㅗ>ㅚ”, “ㅜ>ㅟ”가 “ㅏ>ㅐ”, “ㅓ>ㅔ”와 별반 차이가 없이 성서 문헌에 두루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는 성서 문헌들이 19세기의 모음 체계를 10모음 체계로 인정할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5. 개화기 문헌에는 대체로 /·/가 어두 음절과 비어두 음절에서 두루 나타났다. 이는 /·/의 비어두 음절과 어두 음절에서의 탈락이 1세기의 차를 두고 이미 탈락되었는데도 여기 개화기 문헌에서는 /·/가 동시에 두루 나타나고 있다. 다만, 구어 중심의 만주 역간 성서들에서는 /·/의 전면적인 탈락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언중들이 구어에서는 /·/를 의식하지 않은 채 /·/가 소멸된 어휘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막상 문헌에 이것을 기록할 때는 문헌적 격식성 때문에 /·/를 표기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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