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석 이희승 선생의 학문과 인간】

朝鮮語 學會 事件의 實相

任重彬 / 인물 연구소 대표, 문학 평론가


왜정 말 민족 운동 도미(掉尾)의 대사건

  일석(一石)은 일찍이 조선어 학회 사건의 전말(顚末)을 정리하는 글 서두에서 밝힌 일이 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 군항 진주만을 급습하여 무모하게 미국에 도전한 이래 치열한 태평양 전쟁말기에 접어들어서, 국내에서 일어난 한국 민족운동 도미(도미)의 사건이 곧 조선어학회 관계자들의 검거 사건이었다.
(李熙昇 著, “나의 人生觀 - 한 개의 돌이로다” 말미 ‘朝鮮語 學會 事件’(1971), 휘문 출판사. p.376.)
  ‘도미의 사건’이란 마지막 큰 사건을 뜻함인데 서거 5년 전 생애를 회고하는 수 개월에 걸친 녹음 인터뷰 과정에서 일석은 보다 구체적인 해석을 더하였다.
“그때 서울에 있는 웬만한 인텔리는 조선어 학회 사건의 증인으로 관계 안 된 사람이 없었어. 일본은 전쟁의 형세가 점점 불리해지니까 우리 민족의 기를 꺾기 위해서 아주 최후 발악적으로 이것을 큰 사건으로 만들었단 말야, 그래서 일제 말기에 도미의 대사건이야. 그 전에는 백오 인 사건도 있고, 수양동우회 사건도 있고 했지만, 이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제 말기에서는 최종의 대사건이었어. 그런 의미에서 이걸 도미라 그래”.
(1984. 6.15. 일석 구술)
  최종심에서 확정된 선고의 형량으로 볼 때 조선어 학회 사건에는 4주역이 있다.
  1944년 9월 30일 함흥(咸興) 지방법원 판결문과 1945년 8월 13일자 조선 총독부 고등 법원의 판결문에 따르면,
이극로(李克魯) 6년
최현배(崔鉉培) 4년
이희승(李熙昇) 3년 6월
정인승(鄭寅承) 2년
등 실형 선고가 내려진다. 상고를 모두 기각하여 형이 확정되는 약식 공판을 채 통고받기도 전에 8·15 민족 해방으로 17일 네 피고인 모두 함흥 감옥에서 자유의 몸이 되는데 일석은 3위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제 와서 한글날이 있는 10월의 문화 인물로 이희승이 선정되자 경성 제대 출신으로 국한 혼용론을 초지일관했다 하여 친일 학풍으로 몰아 세우려는 일부 국수주의 측의 모함마저 없지 않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도 일석의 학문과 인간상에 대한 바른 조명이 새삼 요청되고 있다.
  조선어 학회 사건에 대한 일석의 체험적 증언은 1969년 12월 호 “신동아” 잡지를 필두로 하여 휘문 출판사 1971년도 간행 “나의 인생관”과 신구 문화사 1974년도 간행 “한국 현대사”ꊵ ‘광복을 찾아서’에서 보완되었고, 한국일보 연재 “나의 이력서”(’75. 11. 7~’76. 1. 20)와 이를 책자로 출판한 한국 능력 개발사 간행 1977년 판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등에 상술되어 있다. 그리고 1988년 인물 연구소에서 펴낸 수필집 “메아리 없는 넋두리” 재판용으로 다시 손질한 사건 기록(未刊)과 원고로 정리하면 2백자 용지 5백 장은 될 육성 녹음 초록이 있기는 하나, 이에 앞서 1982년 9월 3일자 동아일보가 특보하기 시작하여 9월 6일부터 8일까지 연재한 조선어 학회 사건 최종 판결문은 고스란히 제외되어 있어 조선어 학회의 엄정한 역사적 성격 규정에 미진함이 없지 않다.
  부산 지검 문서 보관 창고에서 찾아낸 ‘소화(昭和) 20년 형상(刑上) 제59호 판결’로 시작되는 재판장과 총독부 판사 5인 연명의 최종심 판결문은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피고인들의 상고와 장현식(張鉉植) 피고에 대한 사카모토(坡本一郞) 검사의 상고를 ‘이유 없다’며 ‘모두 기각’하여 형을 확정하는 주문(主文)부터 나온다. 장 피고인만 무죄일 뿐 4피고인 모두에게 실형을 선고하고 있는데 판결 이유서가 대단히 장황할 뿐만 아니라 어문 문화 말살정책과 민족 정기 소멸책의 간교한 논리 장치로 일관하고 있어서 식민 통치 체제의 마지막 진면목을 아낌없이 헤아려 보게 한다.
  판결 이유의 마무리로 아래의 논지가 그 실상을 웅변으로 대변한다.
……피고인 등 지금도 가슴 속 깊이 농후한 민족의식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여러 사항을 종합하면, 피고인 이극로 동 최현배 동 이희승 동 정인승의 본건 범행은 실로 중대 악질이어서 조금도 동정할 만한 정상이 아닐 뿐만 아니라 본건은 10여 년의 장기간에 걸쳐서 일반 사회에 극히 심대한 악영향을 끼친 것이기 때문에 악화의 경향이 엿보이는 반도 현하의 사상 정세에 비추어 일반 타계(他界)의 의미에서도 피고인 등을 엄벌에 처하는 필요가 있음을 통감하는 바로, 당원(當院)이 상 피고인 4명에 대하여 언도한 전기 판결은 형의 양정이 너무 부당하다고 사료되는 현저한 사유가 있다 하여 상고하였다. 하나, 기록을 정사(精査)하고 범정(犯情), 기타 제반 사정을 짐작하여도 원심의 양형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할 만한 현저한 사유를 인정할 수 없고, 따라서 논지는 이유 없다.
…따라서 전시 형사 특별법 제29조에 의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소화(昭和) 20(1945)년 8월 13일
고등 법원 형사부
  이 판결문을 두고 지난날 한반도 강점의 야욕에 젖어 있던 악마 무리들이 획책한 낮도깨비 사냥의 각본쯤으로 단죄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어문 운동의 실체를 간파한 일본이 식민 통치를 합리화한 고차원적 마지막 근거라도 이제 와서 캐낼 수는 없을 것일까?
  이런 물음 앞에서 사건의 실상 파악을 다소나마 시도할 따름이다.


의식 고취로 민족 혁명 꾀한 고루

  그동안 조선어 학회 사건을 언급함에 있어서 함흥 영생 여학교 한 학생의 일기가 발단이 되어 일본 제국주의가 몰락하려는 최후 발악으로 우리 민족에 대한 야만적 폭력 탄압이 우발적으로 파급된 양 흔히 체험적 진술이 관련자들로부터 되풀이되어 왔으나, 이 사건의 주역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이극로(李克魯) 박사의 기록을 검증하면 반드시 그렇지 아니함을 알 수 있다.
  1929년 4월 조선어 학회 전신 조선어 연구회(朝鮮語 硏究會)에 입회한 이극로는 언어 문제와 어문 문제가 민족 문제의 중심임을 간파하고 본격적인 어문 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이것으로써 민족 의식을 넣어 주며, 민족 혁명의 기초를 삼고자 함이다.”
  물불 이극로가 회고록 “고투(苦鬪) 40년” (1947. 2. 乙酉 文化社)에 명기한 바로는 민족의식의 고취와 민족 혁명의 기초가 되는 어문 운동이 아닐 수 없었다.
  일제 식민 통치가 말기에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며 조선 어문의 말살 정책으로 민족의식의 뿌리를 뽑으려는 흉계를 미리 간파한 탁견이었다. 이러한 선견지명(先見之明)에 따라 이극로가 주도한 조선어 학회 활동은 그 주지(主旨)와 성향(性向)이 민족정신의 함양을 통하여 민족 혁명 항쟁을 강화하려는 문화 운동의 실천이었음이 자명해진다.
  그리하여 먼저 조선어문을 학술적으로 천명하려면 난마와 같은 불통일의 철자를 통일시키며, 방언적으로만 되어 있는 말을 표준어로 사정하며, 외국어 고유 명사와 외래어의 불통일은 그 표기법을 통일시키지 아니하고는 우리 말 사전을 편찬할 수 없기 때문에 경제적 기초를 세우기 위하여 조선어 사전 편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일면으로는 이 편찬위원회로서 어휘 수집이 착수·진행되고, 타 일면으로는 어학회로서 어문통일 공작을 착수·진행하여 3년만에 백수십 회의 토의로 “조선어 철자법 통일안”을 내고, 2년 간의 토의로 “조선어 표준어집”을 내었으며, 10년을 두고 연구 토의로 “외래어 표기법의 통일안”을 내었다. 그리고 월간 잡지로 “한글”을 내어 조선어 연구의 논문을 내어 재료를 제공하여 조선어문 교육의 지침이 되게 하였다.
  “고투 40” 중 ‘조선어 학회와 나의 반생’에서 구체적으로 밝힌 것처럼 이극로의 어문 운동은 단계적으로 추진되어 복합적인 성과를 거두어 나갔는데, 요컨대 민족 해방 투쟁의 움직일 수 없는 문화 축적 과정이었다.
  고루 이극로는 이어서 이 책에서 언급한다.
  이 한글 운동이야말로 민족적 총동원이 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으므로, 교육계·언론계·종교계·학생계 등을 총망라하여 다년간 한글 강습회를 열며 방법을 조사하며, 한글 토론회를 열며, 조선어문 출판을 활발히 하며, 또 널리 독물(讀物, 읽을거리)을 퍼뜨리기 위하여 조선 기념 도서 출판관(朝鮮記念圖書出版館)을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갖은 방법으로써 조직적으로 어문 운동(語文運動)이 심각화하며 활발하여지게 되매 당시 일제 당국은 탄압을 개시하여 한글 강습회 금지, 한글날 기념 행사 금지, 경찰서 호출……. 결국 1942년 10월에 조선어 학회 검거사건이 발생하였다.
  의식과 정신의 조직적인 어문 통일 정비 작업은 음으로 양으로 식민 통치를 적지 않이 위협한다.
  여기에 강압적인 진화책으로 조선어 학회 사건의 유발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조선어 학회가 펼친 어문 운동이나 한글 운동은 문화 운동으로 비롯되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민족의식을 넣어 주며, 민족 혁명의 기초를 삼고자’ 한 목적의식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를 결코 간과하지 아니한 일제 식민 통치의 억압 구조가 잔악무비한 맹위를 떨친 것으로 손꼽히는 왜정 말기 도미의 대사건이 조선어 학회 사건 자체임은 물론이다.
  피고인 일동이 ‘가슴속 깊이 농후한 민족의식을 품고’ 어문 운동을 열성껏 추진해 온 이상 식민 통치권에서 휘두르는 군국주의의 칼날을 피할 길은 없었다. 그리하여 학술 문화계의 마지막 보루라 할 중견 어문 운동권에 대한 무자비한 철퇴야말로 일제의 씻지 못한 마지막 죄악상이었다.


홍원으로 끌려가 고문 취조

  조선어 학회 사건 최종심 판결문에 나오는 일석의 경력 및 사상 동향인즉 이러하다.
피고인 이희승은 보통학교 졸업 후 1925년 4월 29일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하고, 1930년 3월 동 대학 법문학부 조선어학 및 조선문학과 졸업, 동년 4월 관립 경성사범학교 교유가 되었다가 1932년 이를 사임하고, 그 후 1932년 4월 이래 이화여자 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조선어, 조선문학, 한문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조선 독립만세 소요사건 당시부터 자극을 받고 민족 의식을 갖게 되어 조선 역사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면서 조선 통치에 대한 불만을 갖고 경성제국대학 재학 당시부터 조선의 독립을 열망해 온 자다.
  1921년 조직된 조선어 연구회(朝鮮語 硏究會)는 사전 편찬을 논의하다가 1929년 이를 보다 구체화하여 108명으로 조선어 사전 편찬 위원회를 조직하고 맞춤법 통일과 표준어 사전, 외래어 표기법 통일에 박차를 가한다. 이듬해 12월 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 18인으로 이윤재(李允宰), 이극로(李克魯), 권덕규(權悳奎), 장지영(張志暎), 이희승(李熙昇), 최현배(崔鉉培), 정인섭(鄭寅燮), 김윤경(金允經), 김선기(金善琪), 신명균(申明均), 이상춘(李常春), 이만규(李萬珪)등이 총회에서 선출되어 기초 작업에 임한다.
  1931년 1월 조선어 연구회가 조선어 학회로 이름을 바꾸는데 1929년 1월 독일 베를린 대학 유학에서 돌아온 이극로가 간사장을 맡게 된다.
그는 어찌나 학회 일에 열심이었던지 ‘물불’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학회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한다는 뜻에서였다. 혹은 ‘소’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런 별명에 말해 주듯이 경비 조달을 위한 섭외 활동에서부터 학문적인 작업에 이르기까지 극성스러울 정도로 열성이었다.
  일석이 “나의 이력서”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이지만, 1931년 이극로, 정인섭과 외래어 표기법 책임위원이 된 그가 조선어 학회 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것은 실제로 1932년 이화 여전으로 옮겨 간 때부터였다.
  학회와 동아일보 공동 주최 하기 한글 순회 강습에 호남 지방을 담당하였다.
  1933년 한글날 맞춤법 통일안이 발표되고, 다음 작업으로 표준어 사정을 하던 1935년 일석은 학회의 간사장을 맡아 보았다. 1940년 봄 이화 여전 문과 과정도 맡게 된 일석은 1942년 10월 1일 새벽 서대문 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 연행되어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억류되는데 얼마 뒤 장지영, 최현배, 김윤경 등도 연행되어 왔다.
  조선어 학회 사전 편찬 실무 담당 정태진(丁泰鎭)의 함흥 영생 여학교 제자 박영옥(朴英玉) 양이 쓴 일기장에서 발단이 된 조선어 학회 임원 검거 선풍으로 이날 이윤재, 이극로, 정인승, 권승욱(權承昱), 한징(韓澄), 이중화(李重華), 이석린(李錫麟) 등 7인도 본정서와 종로서를 거쳐 1차 검거자 11인이 이튿날 밤 북행 열차 편으로 함흥과 전진(前進)까지 압송되었다. 모두 유치장 직행이었다.
  홍원(洪原) 경찰서 유치장에는 10월 20일을 전후로 2차 검거된 이병기(李秉岐), 이만규(李萬珪), 이강래(李康來), 김선기(金善琪), 정열모(鄭烈模), 김법린(金法麟), 이우식(李祐植)과 그해 12월 하순에서 이듬해 정초 사이에 3차 검거된 안재홍(安在鴻), 이인(李仁), 김양수(金良洙), 장현식(張鉉植), 정인섭(鄭寅燮), 윤병호(尹炳浩), 이은상(李殷相), 김도연(金度演), 서민호(徐珉濠), 서승효(徐承孝)와 3월 초 검거된 신윤국(申允局), 김종철(金鍾哲) 등 피의자 33명이 들어와 초만원을 이루었다.
  권덕규(權悳奎), 안호상(安浩相)만 신병으로 구속을 면했을 뿐 동아일보 인천 지사장 곽상훈(郭尙勳)과 김두봉의 계씨 김두백(金枓白) 등 50명에 이르는 중인들도 연행되어 와 무간지옥에서 시달려야 했다.
  조선어 학회 관련 피의자들은 홍원 경찰서와 함남 경찰부로부터 육·해·공 3전의 갖은 고문으로 조사를 받으며 거듭되는 허위 자백의 강요에 거의 다 초죽음 상태가 되어 갔다.


대역 내란죄로 몰아 송치

  갖은 야만죄인 수사가 강행되어 마침내 조선어 학회가 유례없는 범법 행위 단체로 조작 날조된 배경과 경위를 일석은 일일이 열거하였다.
1) 일체통치에 불복하는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회유나 굴복, 또는 말살 제거 정책.
2) 불리한 전세에 직면한 일제가 민족주의 계열인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을 엄중 단호하게 처단하려 한 정책.
3) 대규모 검거 사건을 불기소 처분하는 경우 통치권의 권위와 체면 손상을 크게 우려한 점.
4) 허구 허위 사건임에도 수사진이 건수를 늘린 공로로 승진된다는 맹목적 충동에 기울게 된 점.
  그 결과 합법적인 단체 조선어 학회는 터무니없는 엄청난 범법 단체로 둔갑하여 그 조직과 활동을 대형 사건화하기에 맹위를 떨친 것으로 일석은 아래의 구체적인 사항들을 내세우고 있다.
1) 조선어 연구회가 조선어 학회로 개명한 것은 당시 일본인들이 세운 같은 명칭의 단체와 혼동되는 폐단 탓이었는데도 이 평범한 사실을 두고 개명으로써 조직과 목적이 변경된 것으로 일경은 트집잡은 나머지 “상해 임시정부에서 지령이 올 때 일본인 기관인 조선어 연구회로 잘못 전하여진다면 비밀이 탄로될 큰 위험이 있어서 명칭을 고친 것이 아닌가.”라고 뒤집어 씌워 조선어 학회가 표면으로는 학술 단체임을 가장하고, 실은 민중의 봉기를 유발하여 독립을 절취하려는 비밀 단체임이 틀림없다고 억단하기에 이르렀다.
2) 왜경 당국이 크게 문제 삼아 가장 날카롭게 추궁한 사전 편찬사업에 있어서 편찬 취지문 중 ‘조선 민족의 갱생’이란 문구에 신경 과민이 된데다 사전 편찬 발기인이 무려 108명이나 되는데 그 대부분이 유력한 사회 지명 인사로 소위 요시찰인도 적지 않아 초긴장되었으며, 사전 편찬에 대한 일반 사회의 호응도가 왕성한 점 등에 지나친 반응을 보여 조선어 사전 편찬이야말로 곧 독립 전취의 수단으로 단정하여 관련자의 범죄구성 요건으로 거침없이 밀고 나갔다. 심지어 원고의 카드를 전부 압수하여다가, 그 어휘 주석 중에서 ‘태극기’, ‘대한제국’, ‘이왕가(李王家)’, ‘대궐’, ‘백두산’, ‘단군(檀君)’, ‘이화(梨花)’, ‘무궁화’ 등등의 단어에 대한 주석이 불온무쌍하여 반국가적이라고 강변했다. 그뿐만 아니라, ‘경성(京城)’에 대한 주석이 ‘도쿄(東京)’에 대한 그것보다 몇 배나 길고 자세한 것은 분명히 반국가 사상의 표현이라고 공갈 위협하였다.
3) 일제 경찰 당국은 어디까지나 조선어 학회를 상해 임시정부와 연관시키려는 구실을 만들기에 광분하였다. 그리하여 앞서 1931년 이윤재가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있는 김두봉(金枓奉)에게 사전 편찬 관계를 문의한 데 대해, 경찰에서는 조선어 학회가 곧 상해 임시정부의 지시에 의하여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사전을 편찬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이러한 터무니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서, 왜경은 조선어 학회 관계자들에게 내란죄에 해당하는 치안 유지법 제1조로 얽매어 놓았다.
4) 일제 경찰은 조선어 학회의 자매기관인 ‘조선 기념 도서 출판관’에 대해서도 문화 향상·민족 정신 고취, 따라서 독립 쟁취의 한 수단·방법이라 하여, 범죄 사실의 일환으로 꼽았다. 또한 이극로가 이우식의 희사로 계획하였던 ‘양사원(養士院)’의 설립에 대해서도 그들은 독립투사의 양성기관이라고 억지 단정하여 평시에 이러한 투사들을 양성해 두었다가, 일조 유사시에는 민중을 이끌고 봉기하려는 계획이라고 확대 해석을 하기까지 했다.
이밖에도 조선어 학회가 주동이 되고 몇몇 신문사의 후원을 얻어 3년 동안 하기 한글 강습회를 개최한 일, 조선어 학회 기관지로 “한글”을 간행한 일, 맞춤법을 통일한 일, 표준말을 사정한 일 등등 어느 하나라도 범죄 구성의 재료가 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1969. 12. “新東亞”)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범죄 사실을 날조한 경찰 당국은 치안 유지법 1조에 해당하는 내란죄로 몰아 1943년 3월 중순 검사국에 송치할 것을 결정하였다.
  일단 송국(送局)만 되면 검사국에서 무고한 점을 내세워 경찰의 고문으로 날조된 사건을 밝히려 했지만, 이 또한 뜻과 같이 되지 않았다.
  피고인들이 5개월이나 기다린 뒤 검사 아오야기(靑柳五郞)가 경찰서에 나타나 출장 심문을 하게 되었는데 수사를 맡아 온 경찰들이 입회한 가운데 조작된 사실 그대로를 추인하게 하는 검·경 공모의 합동 작전이 감행되었다.
  가혹한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 범죄 사실로 고착되는 무서운 흉계의 관철이었다. 형사 10명 내외가 검찰의 조사에 배석하였는데, 처음부터 경찰에서 문초에 참여했던 입회 담당자들을 보면 3명의 일본인 경찰 간부에 나머지는 한국인들이었다.
      홍원 경찰서 측
나카지마(中島種藏: 일본인, 고등계 주임)
이토오(伊藤輝元: 尹모, 형사)
야스다(安田稔: 본명 安正黙, 고등계 형사 부장)
쓰네가와(恒川謙: 일본인, 형사)
니히하라(新原東哲: 본명 朴東哲, 고등계 형사)

함경남도 경찰부 측
미나기(皆木善男: 일본인, 사찰계 주임)
오하라(大原炳熏: 본명 朱炳熏, 수사계 주임)
시바타(紫田健治: 金모, 형사 부장)
마쓰야마(松山茂: 李모, 형사)
  만일에 검사 앞에서 경찰 조서와 다른 진술을 하게 되면 그날 밤으로 끌려가 다시 고문을 당하는 판이었다.
  홍원 경찰서가 검사에게 제출한 의견서에 따르면
1) 기소 24명: 이극로(李克魯)·이윤재(李允宰)·최현배(崔鉉培)·이희승(李熙昇)·정인승(鄭寅承)·정태진(丁泰鎭)·김윤경(金允經)·김양수(金良洙)·김도연(金度演)·이우식(李祐植)·이중화(李重華)·김법린(金法麟)·이인(李仁)·한징(韓澄)·정열모(鄭烈模)·장지영(張志暎)·장현식(張鉉植)·이야자(李也自)·이강래(李康來)·김선기(金善琪)·정인섭(鄭寅燮)·이병기(李秉岐)·이은상(李殷相)·서민호(徐珉濠)
2) 기소 유예 6명: 신윤국(申允局)·김종철(金鍾哲)·이석린(李錫麟)·권승욱(權承昱)·서승효(徐承孝)·윤병호(尹炳浩)
3) 불기소 1명: 안재홍(安在鴻)
4) 기소 중지 2명: 권덕규(權悳奎)·안호상(安浩相)
등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조선어 학회 관련 피의자 33인 중 검사 심문 결과 기소 16명, 기소 유예 12명으로 1943년 9월 12일부터 함흥 형무소로 모두 이감되었다.


최후의 12인 기소 재판 회부

  치안 유지법 1조에 저촉된 대역죄(大逆罪)의 사상범 피의자 28인은 함흥 감옥 구치감 독방에 수감되었다.
  9월 13일부터 피의자들은 함흥 지방 검사국으로 불려가 다시 심문을 받게 되는데 4, 5일 만에 이 절차가 끝나 검사의 기소 유예 처분을 받은 12인, 곧 이강래, 김윤경, 김선기, 정인섭, 이병기, 윤병호, 서승효, 이은상, 서민호, 이만규, 권승욱, 이석린 등은 9월 18일 석방되었다.
  나머지 16인 피의자들에 대해서는 검사의 기소로 예심(豫審)에 회부되어 헤아리기 어려운 고초를 계속 감내해야 했는데 이극로·이윤재·최현배·이희승·정인승·정태진·김양수·김도연·이우식·이중화· 김법린·이인·한징·정열모·장지영·장현식 등이었다.
  그해 1943년 겨울의 혹한은 유례없는 한파로 뒤덮여 함흥 감옥에서 350명 이상이 동사하는 기록을 남겼다.
  특히 잔혹한 경찰의 고문과 혹한에 기아까지 겹쳐 이윤재가 그해 12월 8일 옥사하고, 이듬해 한징도 그 뒤를 따르게 되어 예심 중인 조선어 학회 사건 관련 인사는 14명으로 줄게 되고, 이들 기소자들 가운데 예심 과정에서 장지영, 정열모, 양인이 면소 처분을 받게 됨으로써 만 1년 20일 가까이나 지나 예심이 종결되어 정식 재판에 회부된 피고인은 12명이었다.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김양수, 김도연, 이우식, 이중화, 김법린, 이인, 장현식 피고인의 공소 유지는 예심 판사 나카노(中野虎雄)의 예심 조서가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이 조서를 토대로 하여 예심 종결 결정서가 작성되었다. 예심에서 결정서로 작성한 아래의 판결문은 1944년 9월 30일 공판에서 선고된 바 기소 이유의 핵심 부분은
……본건 조선어 학회는 대정 8년(1919년) 만세 소요 사건의 실패에 비추어, 조선의 독립을 장래에 기약하는 데는 문화 운동에 의하여 민족 정신의 환기와 실력 양성을 급무로 삼아서 대두된 소위 실력 양성 운동이 그 출발의 봉오리였음에 불구하고 드디어 용두사미에 그쳐서 그 본령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였더니, 그 뒤를 받들어 소화 6년(1931년) 이래로, 피고인 이극로를 중심으로 하여 문화 운동 중 그 기초적 중심이 되는 위에서 말한 바 어문 운동의 방법을 취하여 그 이념으로써, 지도 이념을 삼아가지고 겉으로 문화 운동의 가면을 쓰고 조선 독립을 목적한 실력 양성 단체로서, 본건이 검거되기까지 10여 년이나 오랫 동안, 조선 민족에 대하여 조선의 어문 운동을 전개하여 온 것이니, 시종일관 진지하고 변치 않은 그 활동은 조선 어문에 쏠리는 조선 인심의 기민(機敏)에 부딪쳐서 깊이 그 마음 속에 파고 들어, 조선 어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일으키고, 여러 해를 거듭해 내려오며 편협한 민족 관념을 북돋아서 민족 문화의 향상, 민족 의식의 앙양 등 그 기도하는 바 조선 독립을 위한 실력 신장의 수단을 다하지 아니한 바가 없다.
로 되어 있다.
  이제 조선어 학회는 독립 운동 단체로 규정되었고, 그 임원과 관련자들은 민족 운동가 대열에 편입되었다.
  어찌되었든 민족 관념을 북돋는 ‘민족 문화의 향상’, ‘민족의식의 앙양’을 기도하는 ‘독립을 위한 실력 신장의 수단’무로 꿰뚫어 본 것은 조선어 학회와 그 관련 피고인들의 심중에 와 닿는 것이 없지 않았다. 예심 종결서에서의 개별 죄상을 본다.
피고인 이극로 동 최현배 동 이희승이 조선 독립의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고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행위를 한 점은 개정 치안 유지법 제1조 전단(前段)에, 피고인 정인승이 동 결사에 가입하여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점과, 동 김법린이 이 결사에 가입한 점과 피고인 이중화 동 이우식 동 김양수 동 장현식 동 김도연 동 이인 및 동 정태진이 이 결사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행위를 한 점은 각각 개정 치안 유지법 제1조로 후단에, 피고인 이극로 동 이우식 동 이인이 마찬가지 목적으로 그 목적되는 사항을 실행하는 데 관하여 협의하고, 피고인 김법린 및 동 정태진이 마찬가지 목적으로 그 목적되는 사항을 실행하도록 선동한 점은 개정 치안유지법 제5조에 각각 해당하고, 피고인 이극로 동 이우식 동 이인 동 김법린 동 정태진의 각 소행은 모두 연속에 걸리는 것이므로, 각각 형법 제59조를 적용하여, 피고인 이극로에게는 결사 조직죄, 동 이우식 동 이인 및 동 정태진에게는 각각 결사 목적 수행 행위죄, 피고인 김법린에게는 결사 가입죄의 일죄(一罪)로 하고, 피고인 김양수 동 장현식 동 김도연 및 동 이인의 전기 결사 목적 수행 행위죄는 모두 개정규정에 정한 형에 가중이 있는 경우에 걸리므로, 개정 치안 유지법 부칙 제 10조에 의하여 개정 전의 치안 유지법 제1조 제1항 후단의 각형에 따라 각각 처단할 범죄라고 생각되므로, 형사 소송법 제312조에 의하여 공판에 붙인다.

4단 논법의 공판으로 실형 선고

  이러한 예심 결정으로 기소되어 정식 재판에 회부된 피고들은 그해 11월 말경부터 함흥 지방법원의 공판에 임하였다.
  당시 주심 판사는 일본인 니시다(西田)였고, 배심 판사 2명으로 합의부 재판이었는데 피고인들의 법정 진술과 한격만(韓格晩), 박원삼(朴元三), 유태설(劉泰卨) 변호사와 일본인 나가시마(永島雄藏) 변호사의 열띤 변론에도 불구하고 검사 측의 완강한 주장이나 억지 논고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요컨대 조선어 사전 편찬의 목적은 조선어 보존으로 민족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있고, 민족 문화의 발전은 곧 민족정신 함양으로 직결된다. 민족정신이 고조되면 궁극적으로 조선 독립을 기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조선어 사전의 편찬 작업은 곧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행동에 귀결된다.
  조선어 학회 사건은 이러한 4단 논법의 그물에서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하였다. 여러 차례의 공판 끝에 결심(結審)을 보아 1945년 1월 18일 함흥 지법에서 선고 공판이 열렸다. 이날 선고된 12인 피고에 대한 형량은 이러하다.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4년
이희승 3년 6월
정인승 2년
정태진 2년
김법린 2년, 집행 유예 3년.
이중화 2년, 3년.
이우식 2년, 3년.
김양수 2년, 3년
김도연 2년, 3년
이인 2년, 3년
장현식 무죄
  기소자 거의 전원에 대한 어김없는 중형 선고였다. 이날로 무죄와 집행 유예로 7인은 풀려나고, 기결수로 옥고를 치르느냐 상급심에 상고하느냐 하는 문제로 5피고인이 변호인과 의견을 나눈 결과 정태진만 상고를 포기하고, 4, 5개월 더 복역 후 만기 출옥하기로 했다.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4인만이 이해 1월 21일 고등 법원에 상고를 제기했다.
  원래는 3심제이나 전쟁 중이라 하여 복심원 절차는 생략하는 간소화 방침에 따라 지법에서 고법으로 상고하여 형을 확정 짓게 되어 있었다. 조선어 학회 사건의 최종심은 경성 고법에서 맡게 되었다.
  함흥 지법 니시다 재판장의 공소 취하 권유도 있었지만 4인은 끝까지 이를 물리친 결과 5월이 거의 다 가서야 고법으로부터 사건 서류 접수 통지가 피고인들에게 왔다.
  한편 무죄로 석방된 장현식 피고에 대해서도 검사의 상고로 최종심에 오른 인사는 모두 5인이었다.
  고등 법원 재판이면 경성 감옥으로 이감 조치가 있어야 하는데 종래 무소식이었다. 전쟁 말이어서 서류 심사만의 약식 재판으로 8월 12, 13일경 최종 판결이 내릴 것이라는 소문만 떠돌 뿐 서울과의 연락마저 두절된 상태였다.
  마침내 8·15 광복의 희소식이 함흥 감옥에도 들려왔고, 피고들은 오후에야 출감하여 2년 10개월에 걸친 피수 생활 끝에 19일 서울에 개선할 수 있었다.
  조선어 학회 사건의 십자가를 진 인사들 주동으로 8·15 민족 해방 후 사전 편찬이 재개되어 11년 만의 각고로 “우리말 큰사전” 전 6권이 1957년에 완간되고 4반세기가 지나도록 이 사건의 최종심 판결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망각에 묻혀 있을 즈음 1982년 9월 3일에야 1945년 8월 13일자 경성 고등 법원 판결문이 한 일간지에 특보되었다. 해방 37년 만에 부산 지검 문서 보관 창고에서 최종심 판결문이 발견됨으로써 일제가 마지막으로 획책한 도미의 대사건 조선어 학회 사건에 대한 숨겨진 이면의 전모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때는 4피고인 중 이희승, 정인승만 생존해 있었으며 마침 재북 중인 이극로가 85세로 타계한 해이기도 하였다.
  이 판결문은 4피고인의 변호사들이 낸 상고 이유서를 빈틈없이 반박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3년 6월, 정인승 징역 2년, 그리고 장현식 무죄를 각각 확정 짓는 상고 기각 판결로 함흥 지법에서의 4단 논법식 실형 선고 논거는 더욱 생동한다.
  일석은 한격만, 박원삼, 유태설 변호사와 일인 나가시마 변호사와 함께 항소심에는 일인 변호사 이케다(池田) 등 두어 사람이 증원된 것으로 기억한 적이 있는데 최종 판결문에서 보이는 변호사인으로 이극로, 정인승 변호 마루야마(丸山敬次郞)와 최현배, 이희승 공동 변호 야스다(安田幹太) 및 최현배 변호 히라가와(平川元三:朴元三) 변호사들이 거명되어 있으며, 이(李) 최(崔) 이(李) 정(鄭) 4피고인 또한 요시모토(義本) 쓰키시로(月城) 기노시타(木下) 하나야마(華山) 등 창씨개명된 성으로 각각 나와 있기도 하다.


민족 운동 사상 불멸의 초석

  상고 이유로 변호인들은 거의 한결같이 어문 운동은 문화 운동일 뿐 정치적 독립 운동이 아니고, 사전 편찬이란 단순히 어휘를 수록하여 주석하는 작업에 불과하며, 소극적이거나 간접적인 독립의 희망이나 희구, 임원 또는 회원들의 민족주의 사상 포지만으로 독립운동을 목적하는 조직 범행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적극적인 논지를 펼쳐 나간다.
  그러나 재판부의 판단은 이를 전혀 수용하지 않고 있다.
  조선 총독부 요다(依田克己) 검사의 의견 청취도 이미 거친 재판부는 먼저 원심의 판결대로
민족 고유의 어문의 정리 통일 보급을 기도하는 소위 어문 운동은 문화적 민족 운동임과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를 함축하는 민족 독립 운동이다.
라는 단정을 고수한다. 이 논지는 사건의 주범인 이극로의 자서 회고록 “고투 40년”에서 밝혀진 어문 운동 전개의 취지와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 말하자면 조선어 학회 어문 운동의 본의 (本意)를 관통하는 면이 있는 셈이다.
  이로서 혹심한 탄압의 흉계가 전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독부의 제도 장치가 끝까지 형식적인 것만은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조선어 학회는 마침내 어문 운동의 이념을 가지고 표면 문화 운동의 가면 아래 조선 어문 운동으로 조선 독립 운동의 목적 수행 행위를 한 것으로 간주된다. 원심 판결에서
“조선어문 운동 자체는 표면상 합법적 문화 운동이나 그 이면에 있어서 조선 독립의 목적을 가진 비합법 운동이다.”
라고 했으나, 어문 운동의 관념 내지 이념이 민족의 정치적 독립 운동의 형태가 아님이 명백하건만, 조선 어문 운동도 표리 일체 합법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는 논거가 성립된다.
  특히 본건 운동의 중심 인물인 이극로는 이미 조선 독립 운동가로 세계적인 활약을 한 경력을 가진 저명한 인물로서 독립 운동가의 거두임을 고법 재판부에서는 지목하였다. 귀국 후 학구적 생활을 희망하여 한 학자로서 사전 편찬 사업에나 전념하기로 한 심경을 예심 법정에서 공술했다 하더라도 김두봉과의 접선을 염두에 둘 때 그가 시사해 온 어문 운동을 내세운 표면상의 문화 운동은 부지불식간 숨은 정치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 결사로 떨어지는 것이 필연적인 귀결임을 판별하였다.
  그리고 원심에서 피고인 외술 최현배, 일석 이희승이 조선어 사전 편찬회 또는 조선어 학회를 조직하여 사전 편찬 또는 어문 운동을 행한 것은 이것으로 조선인의 실력을 배양하고 조선인의 민족의식의 앙양을 도모하여 조선 독립의 실현을 기도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는 취지가 일단 인정된 이상, 그 경력 및 성격에 있어서 하등의 정치적 색채가 없고, 오직 학구로서 그 본분을 지키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피고인 최현배, 이희승 양인까지도 조선 독립의 목적을 가진 것으로 인정함은 중대한 사실 오인으로 의심할 만한 현저한 사유가 되므로 원 판결 파훼를 주장한 상고 이유에 대해서도 “고유 언어의 보급 통일과 같은 간접적 소극적 문화 운동이라 할지라도 국체 변혁의 위험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라면서 조선어 학회의 사전 편찬을 비롯한 실례를 들어 가며 “피고인 등의 행위가 위법인 이유는 그 수록 어휘의 종류, 주해의 당부(當否) 여하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국체 변혁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 실현의 수단으로 사전의 편찬, 기타 문화 운동을 한 점에 있다고 생각 아니 할 수 없다. 행위 자체가 위법이 아닐지라도 어떤 위법적 목적과 결합되어 범죄를 구성하게 되는 것은 반드시 이상하다고 할 수 없다.”라는 오묘한 논리가 등장된다.
  ‘중대 악질’급의 범행은 끝내 엄벌에 처하여 마땅하기에 상고 이유의 논지(論旨)는 추호인들 인정될 수 없다는 마무리로 8·13 판결문은 실형 선고를 확정 짓는다.
  8·15 해방 이틀 전에 선고된 독립 운동 사상 주요 자료인 이 최종 판결문을 통하여 줄기차게 한글 운동 내지 어문 운동 전개에서 보인 암흑 시대 조선어 학회의 위상은 오히려 확고해짐을 인식하게 한다.
  반세기 전의 조선어 학회 사건은 결과적으로 중대한 민족 운동사의 초석이 되어 준다. 외세의 우리 어문 말살로 민족 문화와 민족 정기가 위협받으며 식민 정책의 탄압이 극도로 혹심한 시기에 조선어 학회 핵심 트로이카라 할 고루, 외솔, 일석이 몸 전체로 감당한 수난과 시련의 역정이란 최후까지 어문을 갈고 다듬어 지켜 온 민족 얼의 승리로 불멸의 가치를 지닌다. 무엇보다 암흑기에 민족정신의 결정체인 어문의 사무로써 민족의 투혼이 더욱 고양될 수 있었으며, 갖은 압제 속에서도 어문의 연구와 실천을 통한 행동 문화의 역사적인 계기가 이 사건으로 마련될 수 있었던 점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