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석 이희승 선생의 학문과 인간】

一石 先生의 生涯와 學問

田光鉉 / 단국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一石은 1896년 6월 9일(陰歷 4월 28일) 京畿道 廣州郡 儀谷面 浦一里(現在의 儀旺市 浦一洞) 양지편 마을에서 宗植 氏의 5형제 중 長男으로 태어났다. 本貫은 全義이다. 出生地에 대한 一石의 설명을 보면
  이 기회에 나의 출생지에 대해 상세히 해 둘 것이 있다. 포일리 양지편 마을은 내가 출생할 당시에는 광주군 의곡면이었고, 그 후 수원군으로 편입됐다가 수원이 읍이 되면서 화성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최근에와서 다시 시흥군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그러니 광주 태생이라고 할 수도 없고 수원이나 화성태생이랄 수도 없는 일이어서 시흥산이라고 불러 두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겠으나, 그것도 마음이 썩 내키지 않으면 개풍 태생이라 말하곤 한다. 경기도 개풍군은 고려조 이후 나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 온 선향이다. 나의 조부 때 한때 가세가 기울어 광주군으로 이사했던 것이고 그 곳에서 내가 태어난 것이다.(“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라 하였다. 그간에 나온 기사들을 보면 筆者마다 각양각색이어서 出生地를 분명히 하기 위해 一石의 글을 인용하였다. 一石은 5살 때에 母親를 따라 上京, 千子文을 배우고 父親에게서는 童蒙先習를 배웠다. 그리고 私塾에서 5년간 漢文을 修學, 經書까지 마쳤다. 1908년(13살)에 결혼을 하고, 곧 上京하여 官立 漢城 外國語 學校 英語部에 입학하여 申翼&熙, 鄭求瑛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졸업 후 京城 高等 普通學校 2학년에 編入하였다가 外國語 學校에서 온, 日語를 모르는 학생들에게 차별 대우가 심해 3학년 1학기 때 6, 7명의 학생들과 함께 자퇴하였다. 한 해 겨울을 권태와 불만과 울분에 쌓여 소설책만 읽던 一石은 1912년 4월, 17세 되던 해에 부친의 권유로 養正 義塾 夜間 專門學校 法科에 입학했다. 그러나 1913년 10월 養正 義塾이 총독부 교육령에 따라 養正 高等 普通學校로 改編되는 바람에 同校를 自退하였다. 공부할 길도 막히고 家勢도 기울어 전 가족이 豊德 고향으로 落鄕하였다. 시골에서 농사를 거들며 지내는데 당시 徽文 義塾에 다니던 친척이 겨울 방학에 내려와 一石은 그의 교과서들을 빌려 보게 되었다. 그 책들 중의 하나가 교재용 프린트물인 주시경의 ‘국어 문법’이었다.
  처음 호기심에서 책을 읽어 가는 동안, 나는 ‘이런 학문도 있었구나’하는 경이를 맛보았다. 재독, 삼독을 하고 5, 6회를 거듭 읽는 동안, ‘나도 국어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 내 인생의 길은 이렇게 시작이 됐으니 참으로 기연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奇緣이 계기가 되어 국어학을 해야겠다는 일념에 19세 되던 초봄 무작정 상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생활비가 없는 一石은 염천교 밑의 봉놋방(합숙소)에서 한 달 이상을 지내다가 尹 氏라는 사람의 紹介로 金浦郡 高村面 天登里에 있는 新豊 義塾이라는 小學校에 敎員으로 취직이 되었다. 그러나 봉놋방에서 얻은 옴 때문에 교원을 그만두고 講米로 받은 벼 10섬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옴 치료를 위해 白川 온천에서 20일 동안 요양하고 돌아와 다시 학교에 들어갈 결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상경한 一石은 朝鮮 總督府 臨時 土地 調査局 整理課에 雇員으로 취직하여 日給 36錢를 받고 일했다. 그 돈으로 4월부터 中東 學校 야간부에 들어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학생이 되었다. 근 1년 동안 낮에는 土地 調査局, 밤에는 學校, 이렇게 이중 생활을 하던 그는 알뜰하게 저축한 돈으로 야간이 아닌 주간에서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 1916년 4월에 中央 學校(現 中央中·高等學校 前身) 3學年에 編入하였다. 당시 仁村 金性洙가 학교를 경영하면서 학생들에게 民族意識를 일깨워 주었다. 尹致暎은 一石보다 한 학년 위였고, 동급생으로 鄭文基, 徐恒錫, 崔淳周, 玉璿珍 등, 후에 각 분야에서 크게 활동했던 분들이다.
  一石은 1918년 3월, 22세의 나이로 중앙 학교를 졸업하였다. 평균 98점으로 1등을 하였다. 당시 졸업 후 희망란에 ‘언어학’이라고 써 넣었는데, 선생님도 잘 모르는 분야라 ‘문학’으로 바꾸어 적어 놓았다고 한다. 중앙 학교에 다니면서 一石이 후회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 무렵 공부에만 너무 몰두하느라 운동를 하지 못한 점이다. 다시 말하면 신체 단련에는 소홀하였다. 졸업 후 언어학을 공부하려 하였으나 국내에는 가르치는 학과가 없었다. 동경 대학에 유학을 가야 할 텐데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고민하던 중 仁村이 인수한 京城 織紐 株式會社에 書記로 취직하였다. 月給 15원(당시 하숙비 6원, 구두 2원)이어서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숙직실에서 자취를 하면서 돈을 저축하였다. 이 시절 一石은 세계 문학 전집을 비롯해 많은 책을 밤새워 가며 읽었다. 그러다 건강을 잃어 새벽 구보를 열심히 하기도 했다.
  1919년 3월 1일 一石은 이렇게 회고했다.
  … 중앙 1년 후배인 노기정 군에게서 급하게 전화가 걸려 왔다. ‘지금 탑골 공원에서 만세 운동이 터졌다’는 놀라운 뉴우스였다. … 나는 급히 탈골 공원으로 달려 갔다. 수많은 학생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짖으며 공원문을 밀려 나오고 있었다. 콧잔등이 시큰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 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정신 없이 만세를 외쳐댔다. … 2일 밤, 중동 때부터의 친구인 이병직 군의 집에서 태극기를 그렸다. 3일이 되자 밤 새워 만든 태극기 50여 개를 가슴에 품고 아침 일찍 서울역 앞으로 나갔다. … 우리는 품 속에서 태극기를 꺼내어 행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작전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음을 깨닫고 … 숙의를 거듭한 끝에 지하 신문을 만들자는 뜻을 모았다. … 우리는 밤새도록 수천 장을 프린트해서 다음 날 저녁 두루마기에 감추어 집집마다 배달을 했다.(“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
  지하 신문을 만들기 위해 등사기를 회사에서 훔쳐 오고, 4개월 동안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밤에만 지하 신문을 만들어 해외의 독립 운동 소식과 국제 정세를 국민에게 알려 주었다.
  1923년 10월 제2회 專門學校 入學者 檢定考試에 무난히 합격한 一石은 1924년에 세워진 京城 帝國 大學 입학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만다. 만 6년 동안 학교와는 거리가 먼 회사일만 한 29세의 한국인으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京城大 입시 준비를 위해’ 延禧 專門 數物科에 우선 입학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3학기에 休學願를 내고 하루 20시간씩 입시 공부를 했다. 1925년 4월, 30세의 나이로 京城 帝國 大學 法文學部 豫科에 입학했다. 文科 B班에 속했는데 이는 入文 系列이었기 때문이다. 1927년 3월 豫科를 수료하고 朝鮮語及文學科에 진학하였다. 2학년에 趙潤濟, 그리고 1학년 一石이었다. 一石은 語學 쪽의 공부를 계속하면서 朝鮮語 學會에서 연구 발표도 하였다. 1930년 4월, 35세의 나이로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논문은 처음 ‘朝鮮語의 音韻 變遷史’를 쓰려고 하였으나 小倉進平 교수가 방대하다고 하여 ‘·音攷’를 썼다. 졸업 후 京城 師範學校에 敎諭로 취직이 되어 朝鮮語를 가르치면서 中東 學校에 출강하였다. 官立 學校 선생이 私立學校에 출강하는 문제로 학교의 경계하는 태도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朝鮮語 學會의 正會員이 되고 곧 幹事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京城 師範 敎諭들의 語學會 活動를 금지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 발표나 원고 게재를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1932년 4월 梨花 女子 專門學校 敎授가 되었다. 一石으로서는 학문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校長은 培材 學堂 설립자의 딸인 아펜젤러 여사였다. 여기서 가르친 제자들은 후에 한국의 여성계를 이끌었던 쟁쟁한 여류 명사들이다. 이 시기에 동료로서 가장 절친하게 지낸 교수는 月坡 金尙鎔이었다. 一石의 隋筆集에 자주 등장되는 것만으로도 입증이 된다. 一石의 별명, 棗核公은 月坡가 지어 준 것이다. 반면에 체구가 땅딸막한 月坡에겐 一石이 ‘地月公’이란 별명을 붙여 주었다.
  1931년 京城 帝國 大學 法文學部 朝鮮語及文學科 出身者들을 중심으로 朝鮮 語文學會를 창립하여 ‘朝鮮語 文學 會報’를 내면서 이미 입회한 朝鮮語 學會와 함께 학회 활동을 하였는데 1932년 4월에는 朝鮮語 學會 幹事로 피선되어 오랫동안 學會 일을 하였으며, 1935년 4월에는 幹事長를 맡아 2년간 대표 간사의 일을 보았다. 朝鮮語 學會는 본래 그 前身이 朝鮮語 硏究會였다. 1921년 張志暎, 李秉岐, 權悳奎, 李常春, 申明均, 金允經, 崔斗善 등 당시 사립학교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였다. 그런데 1931년 일본인 伊藤韓堂이 똑같은 이름하에 기관을 세우고 ‘朝鮮語’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바람에 부득이 朝鮮語 學會로 改稱하게 되었다. 學會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정한 것이 辭典 編纂이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맞춤법 통일,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급선무라는 데에 인식을 같이하고 1930년 12월 총회에서 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 18명을 선출하여 기초 작업에 들어갔다. 제정 위원은 이윤재, 권덕규, 장지영, 이희승, 최현배, 이극로, 정인섭, 김윤경, 김선기, 신명균, 이상춘, 이만규 등이었다. 맞춤법 통일안 제정을 위한 제1독회는 1932년 12월 26일 개성에서 10일간 열렸다. 그 후 제2독회(인천 제일 보통학교), 제3독회(화계사)를 거쳐 만 3년 동안 141차례의 회의 끝에 1933년 10월 29일 한글날을 맞아 明月館 기념식 석상에서 발표되었다. 다음은 1934년 여름 표준어 사정 위원회가 40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제1독회는 1935년 1월 溫陽에서 열렸고, 제2독회는 牛耳洞 鳳凰閣에서 열렸으며 1936년 7월에 가서야 제3회 독회를 마치고 修正 작업에 들어갔다. 京城 女子 商業學校에서 수정 작업을 하다가 日警에 정보가 새어 간사장인 一石이 始末書를 쓰기도 하였다. 外來語 表記法은 1931년 정인섭, 이극로, 이희승 등 3명의 책임 위원이 기초 작업에 착수하여 최종안을 확정한 것은 1938년이었다. 그 동안 최현배, 정인승, 이중화, 김선기 등 위원들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1940년 6월에야 몇 가지 수정을 더하여 외래어 표기법을 세상에 발표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업적들은 단순한 熱情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말을 지키겠다는 투철한 民族精神과 學問的인 體系 수립에 대한 강한 意慾, 그리고 結束된 團結力의 所産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一石은 1940년 4월 30일 뜻하지 않게 1년의 安息年 休暇를 얻어 日本 東京 帝國 大學 大學院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모든 학교의 국어 과목을 폐지하고 수업 시간에는 반드시 日本語로 강의하도록 탄압하는 가운데 한국인 교수들의 일본어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일본 여행(유학)을 강요하고 있었다. 一石도 예외가 아니어서 2년간 일본 유학을 하게 된 것이고, 거기서 본격적인 言語學을 공부하게 된 것은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一石이 귀국하기 약 4개월 전인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 세계 제2차 대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화 여전의 학생들의 생활상을 一石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저들은 군복을 만드는 일에서부터 병사들의 속옷을 세탁하는 일에까지 여학생들을 동원했다.… 공부란 어쩌다 일진이 좋을 때 한두 시간씩 뿐이요, 대개는 그런 전쟁 놀음에 쫓겨야 했다. … 나중에는 학생들까지 이른바 千人針 운동에 동원되어 길거리에 나서야 했다. 센닌바리란, 무명천에 여자 1천 명이 한 땀씩 바느질을 한다는 뜻이었는데, 이것을 출전하는 병사가 배에 두르면 총알을 막아 낸다는 것이었다.(“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日帝는 이와 같이 온 국민을 전쟁의 와중에 넣어 酷使를 시켰다.
  1942년 10월 1일 새벽은 一石이 3년간의 옥살이를 하게 된 시초였다. 서대문서 고등계 형사 2명에게 연행된 것이다.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갇힌 지 몇 시간 후 최현배, 장지영, 김윤경이 수감되는 것을 보고 조선어 학회에 연루된 사건임을 직감하였다 한다. 같은 날 또다시 이윤재, 이극로, 정인승, 권승욱, 한징, 이중화, 이석린 등 조선어 학회 회원 7명이 연행돼 와 모두 11명이 되었다. 모두 전차를 타고 서울역에 가서 다시 기차를 갈아탔다. 함흥역에서 이극로, 권승욱, 정인승 세 사람을 하차시키고 결국 도착한 곳은 洪原 警察署였다. 유치장에는 잡범들과 함흥 永生 女學校의 여학생들로 가득 찼다. 여학생들이 붙들려 온 내력은 朴炳燁이라는 청년을 불심 검문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明治 大學을 졸업한 그는 반일 감정이 강했는데 꼬투리를 잡지 못한 형사들은 그의 집을 수색하던 중 방학 중 집에 와 있던 조카 朴英玉의 일기장을 한국인 형사 安正黙이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國語를 常用하는 자를 처벌하였다’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를 반국가적 행위로 몰아 박 양, 담임 선생, 박 양의 친구들을 연행하여 협박, 구타, 회유를 하였다. 결국 丁泰鎭 교사의 이름을 대었고 그도 경찰에 연행되었다. 丁泰鎭은 영생 여학교 교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조선어 학회에서 사전 편찬 실무를 맡고 있었다. 교사로 있을 때 학생들에게 세계 정세, 일본의 불안한 장래, 우리 민족의 우수성 등을 설명하기도 했다. 온갖 고문과 협박을 통해 조선어 학회가 민족주의자들의 단체라는 억지 자백을 받고, 어학회 간부, 회원, 사전 편찬 지원자까지도 검거하였다. 이때부터 총독부는 要視察人 중 위험 분자는 모두 검거하여 엄중히 처벌하라는 檢束令이 내렸다. 이에 따라 조선어 학회 회원들에 대한 혹독한 고문이 시작되었고 사건을 조작하였다. 만 1년간 홍원 경찰서에서 갖은 고생을 하였다. 洪原 警察署에서의 고문에는 陸戰, 海戰, 空戰이 있었다고 한다. 一石에 의하면
  육전이란 각목이나 목총이나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집어 아무데나 마구 후려치는 것이었다. 목청이 뎅겅뎅겅 부러져 달아났고, 머리가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 처음 몇 대를 맞을 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나중에는 별 감각이 없어진다. 그러면 그들은 해전이나 공전으로 들어간다. 길다란 나무 판대기 걸상에 반듯하게 뉘고 묶은 뒤에 커다란 주전자로 콧구멍에 물을 붓는 것이 이른바 해전이란 것이다. 콧구멍으로 들어간 물은 기관을 따라 폐부에 스며들고, 입으로 들어간 물은 위로 들어가 삽시간에 만삭의 여자처럼 배가 불러지면 누구든 기절하고 만다. 그러면 감방에다 처넣고 주사를 주고 약을 먹여 정신이 들면 공전에 내보낸다. 두 팔을 뒤로 묶어 팔 사이에 작대기를 지르고는 양쪽 끝을 밧줄로 묶어 천장에 달아맨다. 처음에는 짚단을 발 밑에 괴어 주지만 저들이 지어 낸 물음에 ‘모른다’고 대답하면 짚단을 빼 버린다. 그리고는 달아맨 두 줄을 마치 그네줄 꼬듯 한참 꼬았다간 풀어 놓는다. 팔이 떨어져 나갈 듯한 고통과 심한 어지러움으로 누구든 10분도 못 되어 혀를 빼물고 기절을 하고야 만다.(“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
  라고 하였다. 특히 一石은 가장 악독하기로 이름난 安正黙이라는 한국인 형사에 의해 고문을 당하였다. 그때의 담당 형사들 중 가장 악독한 고문의 명수여서 ‘사람 백정’이라고들 하였다.
  1년간의 조사 결과는 치안 유지법의 내란죄에 저촉된다고 결론지었다. 1943년 9월 12일~13일 조선어 학회 회원들 중 기소가 된 16명, 기소 유예가 된 12명 모두 함흥 형무소로 이감되었다(기소 유예자는 18일 석방). 一石은 미결 번호 646번이었다. 2개월 후 예심이 시작되면서 조선어 연구회를 조선어 학회로 개칭한 이유부터 이윤재의 상해로 金枓奉을 만나러 간 일, 사전 편찬 사업 등이 임시 정부의 지령에 의해 조선 독립을 획책하려 한 것이라는 심문을 받았다. 예심은 1944년 9월 30일에 종결되어 장지영, 정열모는 면소가 됐고, 이윤재, 한징 등은 옥중 원혼이 되었다. 당시 함흥 형무소에서는 270여 명의 凍死者가 났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게다가 전황이 날로 급박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식량난 등 각종 물자난도 심해 갔다. 귀리, 옥수수, 감자, 수수, 피, 기장 등 잡곡을 쪄서 뭉친 주먹밥만으로, 혹은 썩은 콩깻묵 한 덩이씩으로 연명해야 하는 우리는 극도의 영양 실조와 운동 부족으로 건강이 말이 아니었다. 많은 수인들이 죽어 나갔다. 한밤중 나막신 소리가 저벅저벅 울려 오고 옆 감방문이 덜컹 열리는 소리가 들린 뒤 다시 나막신 소리가 멀어져 가는 소리는 예외없이 飢寒으로 죽은 시체를 실어 내는 것이었는데… 1943년 12월 8일 이윤재도 그렇게 죽었고, 1944년 2월 22일 한징 동지도 그렇게 옥중 원혼이 됐던 것이다.
  1945년 1월 18일 함흥 지방 법원은 어학회 사건으로 기소된 12명에 모두 유죄 판결을 내려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4년, 이희승 3년 6개월, 정인승, 정태진 각 2년 등으로 실형이 선고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즉시 석방되었다.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등 4명은 경성 고등 법원에 상고를 했으나 기각되었다. 그러나 혼란기였기 때문에 기각 통지를 받기도 전에 옥중에서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一石은 1945년 8월 17일 오후에야 함흥 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그해 10월 1일 조선어 학회 회원들이 다시 모여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째 정치 운동에 가담하지 말 것, 둘째 철자법을 보급하고 사전 편찬을 계속할 것, 셋째 국어 교과서를 편찬하고 국어 교사를 양성할 것 등이었다.
  사전 편찬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다가 조선어 학회 사건에 휘말려 중단된 상태였는데 어휘 카드를 압수당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9월 8일 서울역 조선 통운 창고에서 우연히 카드를 발견하여 ‘마치 죽었던 자식이 되돌아온 감격’에 힘입어 제1권은 1947년 10월 9일, 제2권은 1949년 5월 5일에 내었다. 1950년 6월에 제3, 4권의 조판, 제본을 끝냈으나 6·25 사변으로 속간이 중단되었다. 또한 1945년 9월 국어 교사 양성을 위한 ‘사범부’ 설치, 1948년 6월 ‘세종 중등 국어 교사 양성소’ 설치 등을 통해 수 차례의 강습, 교수 등을 실시하였다. 교과서 편찬은 미 군정청의 요구도 있어 국어 교과서로서 ‘한글 첫걸음’, ‘초등 국어 교본’, ‘중등 국어 교본’ 등 7종의 교과서와 공민 교과서를 몇 달만에 완성하였다.
  한편 1945년 9월 경성 제국 대학은 京城 大學으로 문을 열었는데, 12월 一石은 法文學部 校授에 취임하였다. 그 무렵 白樂濬이 경성 대학 재건 문제를 위임받아 一石과 의논 끝에 李相佰, 李丙燾, 趙潤濟, 金庠基 등 5, 6명과 함께 대학의 재건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 군정에 불만을 가졌던 집단이 경성 대학 자치 위원회를 조직하여 1946년 8월 22일 학무국이 발표한 ‘국립 서울 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에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國大案’ 반대 사건이었다. 거기다 좌익 세력이 편승하면서 파괴와 모략이 난무하는 혼란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10월 국립 서울 대학교가 창립되었다. 학제 개편으로 一石은 10월 22일 文理科 大學 校授에 취임하였다. 초대 문리과 대학 李泰圭 학장의 청에 못 이겨 敎務課長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一石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좌익 학생들은 등록 방해 공작, 동맹 휴학 등으로 계속 대학측을 괴롭혔다. 사소한 문제 한 가지로 며칠씩 데모를 했다. 법대의 좌익 학생들은 성대 시절 법문학부 교수들이 사용하던 본부 연구실을 내놓으라고 요구, 분부에 몰려와 연일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대학측은 하는 수 없이 일부 연구실을 내주어야 했다. 이런 분위기였으므로 학사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
  1950년 6월 24일 세종 중등 국어 교사 양성소 제1회 졸업식이 있었다. 다음날 38선에선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一石의 집이 서대문 둥구재(金華山) 중턱에 있었기 때문에 포성이 점점 더 크게 들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6·25 사변이 일어난 것이었다. 6월 30일 학교에 나간 一石은 ‘이제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천하가 됐으니 혁명과 과업을 완수해야 한다.’는 대학책의 연설에 아연실색하였다. 어느 날인가는 一石를 부르더니 ‘동무, 평양으로 가야겠소.’ 하여 치질 칭병으로 겨우 납북을 면하였고, 인민군 징집 신체검사에서 연령(55세)과 신체 허약으로 불합격되기도 하였다. 6·25 사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수많은 고생을 하였듯이 一石도 3개월 동안 교육자, 학자의 위치를 벗어난 많은 고생과 고통을 겪었다.
  9·28 수복 전날 새벽 원인 모를 불이 나 삽시간에 一石의 집이 전소되었다. 一石의 방이 반 방공호 역할을 하리라 믿고 식구들이 모두 그 방에 있었다고 한다. 그때의 정황에 대해
  생후 반 년가량밖에 안 되는 맏손녀 옥경이가 잠을 깨어… 울면서 두 손을 허위적거렸다. 그때 나의 며느리가 이불을 들썩하며 머리를 이불밖으로 내놓은 즉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문밖은 주황색으로 환히 밝았다. 맹렬한 화염이 우리가 잠들었던 방을 향해 뻗쳐 오고 있었다.… 잠든 식구들을 깨워 밖으로 내보내고 큰 사랑에서 잠드셨던 나의 노모와 김활란 여사의 모친을 끌다시피 대피시켰다.… 삽시간에 우리 집은 온통 불길에 뒤덮이더니 한 시간도 채 못되어 폭삭 주저앉았다. 2, 3분만 늦었어도 우리 식구는 물론 김활란 여사의 모친까지 희생될 뻔했다.(“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라고 하였다.
  인민군이 도망하면서 방화한 모양이지만 세간살이도 없이 잠옷 바람에 몸만 빠져나온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때 一石의 藏書가 모두 불에 타 버린 것이다. 중학 시절부터 호떡 한 개 안 사 먹고 빚도 내고 해서 사 모았던 수천 권의 책, 더구나 국내외 어디에도 없는 목판본 內訓諺解 등 귀중본들을 일시에 잃어버린 것이다. 의대에 다니던 長男이 인민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 長湍에 갈 때 가방에 넣어 가지고 갔던 國語學 槪說 강의 노트, 귀중본 阿彌陀經諺解, 觀音經 등만이 그 화를 면하게 되었다.
  망연자실한 가운데 이웃집 사랑채에 기거하면서 張志暎에게서 양복 한 벌 얻고, 다른 사람에게서 구두 한 켤레 얻어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별 수가 없었다. 동생과 친척의 도움, 그리고 제자 李能雨의 도움으로 단팥죽 장사를 시작했다. ‘거처할 곳과 양식과 땔감, 이 세 가지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 때 알았다.… 집사람과 며느리가 단팥죽을 만들었고 나는 떡집에 가서 찹쌀떡을 받아 왔다. 10원을 주면 두 개씩을 더 주었다. 10원어치를 팔면 2원은 남는 장사였다. 제과점에 가서 양과자도 조금씩 받아다 팔았다.’라고 一石은 술회하고 있다.
  1951년 1·4 후퇴 때 一石은 단팥죽 장사로 번 돈 30만 원 중 10만 원을 가지고 피란민 대열에 끼어 거의 걷다시피 해서 과천을 떠난 지 1주일 만에 대전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다시 금산, 옥천, 영동, 추풍령, 김천에 도착하였으나 길이 막혀 성주로 해서 고령을 거쳐 20일 만에 대구에 도착하였다. 그 후 20일간 대구에서 無爲消日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一石은 부산에서 전사 편찬 위원회, 코리아 타임스사 등의 도움을 받다가 해병대 문관 발령을 받아 전사 편수관이 되었다. 長湍에 가 있던 식구들을 어렵게 진해에까지 데려와 6개월간은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1952년 3월 부산에서 전시 연합 대학이 해체되고 서울 대학교가 문을 열어 교수로 근무하게 되었다. 1953년 대학원 尹日善 원장이 와병 중이어서 2월 29일 대학원 부원장을 맡아 실질적으로 원장 직무를 수행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고 정부가 환도하자 서울 대학교도 서울로 돌아왔다. 9월에는 미국 국무성 초청에 의해 1년간 교환 교수로 캘리포니아 대학과 예일 대학에서 언어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一石이 미국 생활을 하면서 실수한 이야기는 직접 여러 글에 썼지만 1년 동안에 미국에서 배운 것은 미국인들의 검소하고 솔직하고 理村에 밝은 생활 태도와 과학적이고 실용적이고 자주적인 생활양식이었다. 一石은 미국 체류 중에 學術院 회원에 피선되었고, 1954년 8월 17일 귀국하였다. 이때가 바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한글 간소화안이 만들어지고, 소위 ‘한글 파동’이 일어나 여론이 들끓던 때였다. 결국 여론에 밀려 유야무야되었다. 一石은 1957년 7월 대학원 부원장을 사임하고 19일자로 문리과 대학장에 취임하였다. 그런데 6개월도 못 된 12월, 문리대 학생 신문 ‘우리의 구상’에 학생이 쓴 ‘모색’이란 글이 실렸다. 내용은 민주 사회주의 사회 체제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것이 말썽이 되어 대학 구내가 어수선한 데다 게시판에 불온 전단이 나붙었다. 동대문 경찰서에서 조서까지 받는 수모를 당하였다. 이 필화 사건으로 一石은 미련없이 학장직을 사임하였다.
  1960년 4월,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구호와 데모가 한창이던 때 一石은 교수단 데모에 참가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一石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많은 피가 뿌려지고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25일 상오 10시에 의대 구내 교수 회관에서 모이자’는 통지가 날아 들었다.… 이상은, 정석해, 조윤제 씨 등 몇몇 대학의 교수 5, 6명이 주동이 되어 발의를 했던 것인데… 50, 60명 정도의 교수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는 미리 외신 기자들까지 몰려 와 있었다. 좌중의 의견은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는 쪽으로 쉽게 모아졌다.… 의사 표시방법은 시국 선언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선언문 기초 위원을 뽑았는데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의대 정문을 나서 가두 행진을 시작한 것은 하오 늦게였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종로 5가를 통과할 때 “이 대통령 물러가라”는 구호가 터지자 시민, 학생들도 따라 외치며 모두 합세했다. 모두 총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교수 데모대는 국회 의사당 정문 앞 계단에서 시국 선언문을 이항령 교수가 다시 낭독했다. 이 교수단 데모는 계엄하에서 대규모 데모를 유발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다음날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정권이 무너지자 대학에도 새 바람이 불어왔다.
  一石은 필화 사건으로 중도에 사임했던 문리대 학장직을 1960년 5월 11일 다시 맡게 되었다. 과도 정부 이후 장면 내각 시절 다시 사회가 어수선하였다. 一石은 그해 6월 25일에 學術院 終身 會員이 되었다.
  1961년 9월 30일 一石은 서울 대학교 교수가 된 지 15년 만에 정년 퇴임을 하였다. 동시에 名譽 文學 博士학위를 받았다. 이해 12월 28일에는 1950년 초 작업에 착수한 이래 만 11년 만에 민중 서관에서 “국어 대사전”을 출판하였다. 무려 257,854개의 어휘를 수록한 단권의 방대한 사전이었다. 이 사전은 후에 수정 증보를 두 번이나 거쳐 1994년 3월 25일에 민중 서림에서 간행되었다.
  1962년 6월에는 서울 대학교 名譽 敎授가 되고 7월부터 8월까지 日本 전국 각지에 거주하는 교포를 방문하고 강연 여행을 하였다. 강연 주제는 주로 ‘훈민정음과 한국 문화의 특징’, ‘국어란 무엇인가’, ‘국어와 국가 간의 관계’ 등이었다.
  1963년 8월 1일 一石은 전공과 관계가 없는 外道의 길, 東亞日報 社長職율 맡았다.
  어느 날 동아일보 상임감사 신기창 씨가 찾아와 ‘사장직을 맡아 주어야겠습니다.’ 했다. 정말로 뜻밖의 일이었다.나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사양했다. ‘나이도 나이지만 언론에 대해서는 지식도 경험도 능력도 없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먹고는 못 살아요. 동아일보의 발전을 위해서나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안 될 말이오.’ 내가 워낙 딱 잘라 사양했기 때문에 그는 그대로 돌아갔다. 며칠 후 신 감사는 다시 찾아왔다. 또 거절하여 돌려보냈다. 세 번째로 찾아온 그는 인촌의 아우 김연수 씨의 뜻임을 밝히고 꼭 맡아 주어야겠다고 떼를 쓰다시피 했다. 삼세 번이라는 말에 내 마음은 기울고 말았다. 중학 졸업 후 경성 방직 시절의 은혜를 생각하면 차마 거듭 물리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東亞日報 社長 시절 軍의 亂入 사건 등 매우 어려운 일들이 많았으나 一石은 만 2년간 東亞日報의 言論 精神을 바로 세우고, 正筆, 直筆을 통한 正道의 길을 닦아 놓았다. 1965년 7월 31일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사규에 의해 사장직을 물러난 一石은 그해 9월 大邱 大學 大學院長에 취임하여 일 주일에 3시간씩 대구로 출장 근무를 하였다. 그러다가 대구 대학을 사임하고 1966년 9월 1일 성균관 대학교의 대학원장에 취임하였다. 權五翼 대구 대학 학장이 성균관 대학교의 총장을 겸임하게 된 데 그 연유가 있었다.
  1967년 9월에는 顯正會를 창립하고 理事長에 취임하였다. 一石이 평소 주장하던 ‘민족의 뿌리 찾기’, ‘민족의 정통성 자각’, ‘홍익인간 사상의 확산 운동’, ‘민족 공동체 정신 함양’ 등 우리 민족의 역사적 근원을 단군에 두고, 단군 숭모의 정신이 곧 통일의 원동력이 된다는 정신에 입각한 모임이었다. 종교적 차원을 떠난 민족적 입장에서 모든 사업을 진행하였다. 檀君 聖殿을 짓기 위해 一石은 작고하기 전까지 많은 일을 하였다.
  1968년 7월 16일에는 學術院 副會長에 피선되어 학자로서 큰 영예를 얻었다. 1969년 2월 28일 성균관 대학교에서 정년 퇴임하였다. 일생에 두 번 정년 퇴임을 한 셈이다. 그 이후에도 서울대,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였다.
  1969년 7월 1일 韓國 語文 敎育 硏究會를 창립하고, 그 회장에 취임하였다. 朝鮮語 學會부터 비롯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국어 교육, 국어의 생활화 등을 위한 기초 작업, 국어 정책을 수행하였다. ‘한글 전용’에 반대하고 ‘國漢 混用’의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였다. 1970년~1987년에는 ‘韓國 글짓기 指導會’의 회장직을 맡아 청소년들의 작문력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1971년 1월 1일부터 檀國 大學校 敎授 겸 第2代 東洋學 硏究所長에 취임하였다. 당시 張忠植 總長의 三顧草廬 끝에 수락을 하였다. 一石은 대학원 강의를 하면서 硏究所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81년 1월 31일, 취임 시 10년 근무의 약속을 지키고 퇴임하였다. 재임 시 동양학 학술 회의(1회~10회), 漢韓 大辭典 編纂(1976년 11월 5일 계획 수립), 東洋學 叢書(1집~8집), 東洋學(1집~10집), 韓·中·日 관계 자료집 발간 등 학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一石은 東洋學 硏究所長職을 끝으로 公職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은퇴 후에도 작고할 때까지 각종 회의에 노구를 이끌고 참석하였다.
  1986년 12월 9일에는 美國 言語學會 明譽 會員에 피선되었고, 1988년 3월 19일 韓國 語文 敎育 硏究會 名譽 會長에 추대되었다.
  一石은 일생 동안 주례 많이 서 주신 분으로도 유명하다.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1천 2, 3백 쌍의 주례를 선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주례는 40대 때였고, 해방 후에는 봄, 가을이 되면 하루 평균 2, 3건씩 주례를 섰고 최고 기록은 하루 6건의 주례를 선 것이다.
  一石은
  주례를 청해 오는 층은 제자들이 가장 많다. 역시 한평생을 교단에 몸바쳐 온 덕분이어서 그것도 인생의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주례로서 가장 보람되고 기쁜 것은 역시 그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더구나 대개가 학계나 문화계 등에서 훌륭한 일군이 되었으니 더할 나위가 없는 기쁨이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라고 하여,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봉사와 희생을 통해 행복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 일면을 엿볼 수 있다.
  一石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돌이켜 보았거니와 一石이 후회하는 두 가지 일이 있다. 6·25 때 노모와 어린것들을 뒤에 두고 홀로 피란을 갔던 일과 무덤덤한 생활 속에서 사모님을 너무나 고생시켰다는 것이다. 1987년 12월 29일에는 사모님이 별세하였고, 1989년 11월 27일 하오 7시 一石은 94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그간에 一石은 1957년 7월 17일 學術院賞(功勞賞), 1960년 10월 10일 서울特別市 敎育 委員會 敎育 功勞賞을 受賞하였으며, 1962년 3월 1일에는 建國 功勞 勳章(單章)을 받았다. 그리고 1986년 3월 29일에 제6회 仁村 文學賞을 수상하였고, 1989년 12월 15일 國民 勳長 無窮花章, 1993년 6월 1일 國家 有功者證을 追敍받았다.
  딸깍발이 선비 정신, 꼿꼿한 지조, 훈훈한 겸허, 자애와 자비, 정직과 정의, 외유내강, 검약하는 생활, 애국애족 등, 이 모든 것을 간직한 분이 一石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은 제 나름대로의 존재 가치가 있고, 또 이루어지는 모든 사실은 주위 환경과 아무 관련도 없는 遊離, 고립된 오직 한 가지만의 현상이 아니요, 과거에 있어 온 모든 사실의 연쇄적인 繼起로서 앞으로 생길 사실의 一環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하여 그 일환에 있어서 고리의 대소나 강약과 같은 것은 다른 면의 문제로 다룰 것이요, 그 일환의 사실이 시간의 흐름, 생명의 교체, 현상의 소멸에 있어서 한 점을 이루고 있다는 데는 아마 아무 이의도 없을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一石의 生涯에 대한 내용은 주로 自敍傳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을 참고하였음.)

2.

  一石에 관한 逸話는 너무나 많다. 여기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주로 쓰고자 한다.
  公와 私를 분명하게 하였던 일은 누구나 본받아야 할 일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一石은 그것을 철저하게 지켰다. 筆者가 대학 다닐 때 學長을 하였는데 學長 車는 公的인 경우에만 사용하였다. 主禮를 맡거나 친구분들을 만날 때 절대로 學長 車를 타지 않았다. 그래서 師母님은 學長 車타를 본 일이 없었다. 東洋學 硏究所長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一石의 忍耐心과 健康에 관한 한 朝鮮語 學會 事件 때 入證된 셈이지만 50年代 末(?)에 脫腸 수술을 받으신 일이 있었다.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셔서 수술을 하시게 되었는데, 의사들이 전신 마취를 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랬더니 一石은 마취를 하면 몸에 해롭다고 완강히 거부를 하여서 의사들을 매우 당혹하게 한 일이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의 경우는 있었어도 정말 처음 겪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一石의 기억력은 참으로 탄복할 만하였다. 많은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공감하는 바이지만 그 많은 제자들의 이름을 알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가족들에 대해서도 한 번 들으시면 잊지 않고 궁금해 하였다. 한 번은 필자의 큰 딸이 공사장에서 무너져 내리는 벽돌에 머리를 맞아 크게 다친 일이 있었는데 그 말씀을 드렸다. 다음 해 세배를 가서 인사를 드리니 그 딸 아이가 어떠냐, 뇌에는 이상이 없느냐 하면서 자상하게 물으셨다. 필자는 전에 말씀드린 것조차 잊고 있었는데 一石의 걱정하는 말씀을 들으니 송구스럽기도 하고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一石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갈 분으로,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매사에 치밀함은 물론 위험스러운 일은 않았다 국어 학회에 장려 기금을 내놓으실 때 현금으로 주지 않고 주식으로 주었다. 그 주식도 일반 기업체의 것이 아니라 거의 은행 주식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제자가 질문을 하니까 ‘은행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 나라가 망해야 그 때 은행이 망하는 것이니 일반 회사 증권보다는 안전하다.’고 하였다. 증권으로 벼락부자가 되려는 일반 사람들의 인식과는 전혀 달랐다.
  단국대 동양학 연구소장 시절 잡지사의 기자가 원고 청탁을 하러 오면 직접·간접적으로 알아보는 내용이 있었다. 그것은 그 잡지사가 정부에서 하는 것인지, 혹은 어느 기관에서 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정부나 기관의 도움을 받아 간행하는 것인지, 불의의 목적을 가진 잡지사인지를 반드시 확인하였다. 직접 간행하거나 도움을 받고 있는 잡지사면 원고 청탁을 거절하였다. 군사 정부에 대해 항상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구소장이 되면서 첫 월급을 받고 一石은 ‘내가 하는 일에 비해 월급이 너무 많다.’고 경리과에 되돌려 보낸 일이 있었다. 액수를 깎아 주지 않으면 안 가져 가겠다고 하여 총장과 직원들이 당황한 적이 있었고, 매일 출근하지 마시고 1주일에 3일만 나와 주십사고 하였더니 一石이 쾌히 응낙하고는 ‘그러면 월급을 15일분만 달라.’고 하여 또 한번 난처하게 되었던 일이 있다. 一石의 이러한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크게 감동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기록하거나 기록물을 보존하는 습관이 매우 부족한데 一石은 그렇지 않았다. 한 번은 남풍현 교수와 함께 一石 댁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一石 전집 이야기도 거론되고 할 때인데 ‘國語 文法論’ 책을 내야 한다는 취지에서 서울대 문리대 시절 ‘國語 文法論’을 강의한 노트를 찾으러 갔었다. 서재에서 첫째 권은 찾았으나(현재 一石 記念館에 보관되어 있음) 둘째 권이 없었다. 혹시 지하실에 섞여 있는지 몰라 처음으로 지하실에 있는 것들을 조사하였다. 결국 찾지는 못했지만 거기에는 학부 학생들의 시험지, 대학원 과제물 등이 잘 보관되어 있었다. 대학원 과제물을 골라 一石의 승낙을 받고 가지고 와서 본인들에게 돌려 준 일이 있다. 어느 국민학교 선생이 정년 후에도 과거 제자들의 시험지를 독 속에 보관하여 오다가 제자들에게 보여 주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지만 이러한 일들은 ‘평범 속의 비법’을 보이는 것이라 여겨진다.
  一石이 제자와 제자가 아닌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 중에서 呼稱에 관한 것이 있다. 제자와 제자 아닌 두 교수가 있으면 제자에는 ‘君’(나이가 들었어도), 제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선생, 교수’(젊었어도) 등 분명하게 구별해서 부른다. 指稱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逸話가 많다는 것은 그것은 나쁜 내용이 아닌 다음에야 그 얼마나 훈훈한 情感과 人間味를 느끼게 하는 것이랴. 또한 一石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머와 위트를 생각하면 至高至純한 人間 關係의 表像이요, 感化的 敎訓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一石에 관한 다음 逸話들은 10월 중에 간행되는 追慕文集을 참조하기 바람.)

3.

  一石이 국어학에 뜻을 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18세 때 周時經의 프린트로 된 교재 ‘國語 文法’을 읽어 본 이후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때는 하나의 호기심과 그저 국어 공부를 하여야겠다는 학문 이전의 단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廷禧 專門 數物科를 1년만 다니고 자퇴한 사실은 적성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中央 學校를 졸업할 때 장래 ‘언어학’을 공부하겠다는 의지를 가졌던 것과 상통한다. 본격적인 길로 들어선 것은 아무래도 京城 帝大 豫科에 입학한 후, 朝鮮語及文學科에 다니면서부터였다. 國語學에 대한 認識이 달라지면서 재학 중에도 朝鮮語 學會에 참석하여 연구 발표도 하고, 졸업 후에는 ‘朝鮮 語文學 會報’를 발간하기도 한 점은 이미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졸업 후 朝鮮語 學會에 입회하여, 사전 편찬, 맞춤법, 표준어, 외래어 표기법 문제 등에 적극 간여하면서 그것과 관련된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年譜 참조) ‘조선 말과 글의 바로잡을 것’(1926), ‘조선 말과 글’(1928), ‘이제 쓰는 말과 글의 그릇된 것’(1928)‘‘·’音攷’(1930, 졸업 논문), ‘新綴字에 關하여 바라는 몇 가지’(1930) 등을 제외하더라도 朝鮮語 學會 事件으로 洪原 警察署와 成興 刑務所에 收監되기까지 국어학에 관한 논문을 27편이나 썼다. 이들 중에서 선별하여 엮은 것이 ‘朝鮮 語學 論攷’(1947)이다. 1938년 1월~12월, 1939년 1월~9월, 1940년 2월~4월에 걸쳐 ‘한글’지에 연재했던 글을 정리하여 ”한글 맞춤법 통일안 강의”(1946)를 출간하였다. 一石의 名著 “國語學 槪說”(1955)은 광복 이후 서울 대학교 국문과에서 ‘국어학 개론’ 시간에 강의한 노트를 6·25 사변 때 피란시켜 그 講義案을 수정하여 간행한 것이다. 一石 필생의 업적 중 하나는 “국어 대사전”(1961)의 간행이다. 一石이 사전 편찬을 위해 카드를 만들기 시작한 지 11년, 본격적으로 작업에 임한 지 6년 만의 결실이었다. 해방 이후 國語學 硏究 論文으로서 주목할 만한 것은 ‘國語의 유포니’(1954), ‘揷腰語(音)에 對하여’(1955), ‘存在詞 ‘있다’에 對하여’(1956), ‘體言의 活用에 對하여’(1959), ‘國語의 유포니(續)’(1962), ‘단어의 정의와 조사·어미의 처리문제’(1975) 등을 들 수 있다. 一石의 國語學에 대한 생각, 國語에 대한 認識은 ‘朝鮮 語學 論攷’ 序文에 잘 반영되어 있다.
  國語란 것은, 그 硏究 檢討와 料理 按排를 반드시 專門學者 손에만 一任할 것이 아니라, 國語 속에 나서, 國語 속에서 살다가, 그 國語를 子孫에게 물려주고 가는 一般 國民에게 國語에 對한 知識을 供給하고, 國語에 對한 認識을 促求하고, 國語에 對한 愛護心을 觸發하여, 우리 國民의 生存繁榮과 國語와의 不可分의 緊密한 關係를 理解시키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는 간절한 徹衷을 참지 못한 탓도 決코 적지 않다.
  一石 國語學의 범위는 ‘순수 국어학·응용 국어학’으로 대별할 수 있는바, 해방 전이나 해방 후의 태도에 변화가 없다. 다만 국어 교육을 위한 실천적 노력이 一石에게는 돋보이지만, 그것은 결국 순수 국어학과의 接脈을 염두에 둔 것이요, 國家·國民·國語의 三肢的 相關性을 전제로 한 民族主義的 思想에 있다고 이해된다.
  一石의 國語學的 業績을 일일이 구체적으로 소개·검토하여야겠지만, 다른 筆者들이 主題에 따라 細論하게 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몇 가지 간략히 소개하는 데 그치겠다.
  흔히 一石이 공시적 방법에 집착한 듯이 이해를 하지만 역사적, 통시적 관점을 인정하고 방법론적 특성을 중요시한 사실은 그의 ‘地名 硏究의 必要’(1932), ‘言語의 發達’(1946), ‘古代 言語에서 새로 얻을 몇 가지’(1937), ‘各 方言과 標準語’(1936), ‘朝鮮 語學의 方法論 序說’(1939) 등 일련의 논문에서 발견된다.
  ‘하나는 垂直的이니, 卽 時間的으로 言語가 發達 變遷한 過程을 考察하는 歷史的 硏究를 이름이요, 둘째는 水平的이니, 卽 空間的으로 現存하는 言語의 性質 乃至 方言을 考究하는 것과, 또는 二種 以上의 언어를 比較·硏究하는 일 等일 것이다.… 그러므로, 朝鮮語에 있어서도 歷史的 硏究를 輕視하여서는 안 된다. (地名 硏究의 必要)
“國語學 槪說”에서도 通時的 硏究와 共時的 硏究를 분명하게 分離 記述하고 이 共時的 硏究와 通時的 硏究는 全然 別個의 行動으로 저의 갈 길을 걸어가면 能事가 마치는 것이 아니오, 共時·通時는 相互 輔佐가 되고 彼此 協同이 되어야 비로소 所期의 目的을 比較的 完全히 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一方에 重點을 두는 것은 無妨하니… (第二章 國語 硏究의 方法)
  라고 하였다.
  一石의 졸업 논문은 音韻論적인 主題였지만, 대부분의 논문은 形態論 내지 形態 音素論的 性格을 띤다.
  ‘ᇐ 받침의 誣妄을 論함’(1931)은 ‘흘러, 불러, 말러’ 등에 있어 그 어간을 ‘흘-, 불-, 말-’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흘르-, 불르-, 말르-’로 하고 규칙 활용을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ㅆ 받침의 可否를 論함’(1932)은 ‘이시→잇→있-’의 변화를 전제로 할 때 ㅆ 받침의 사용을 주장한 논문으로 ‘있으니’식으로 표기해야 어간과 어미를 구별할 수 있는 맞춤법 규정에도 맞는다고 하였다.
  ‘ㅎ 받침 問題’(1933)는 朴勝彬이 ㅎ 받침을 반대한 데 대해 그 타당성을 논증한 論文이다. 즉 音理上으로, 語法上으로, 歷史的으로 보아 ㅎ 받침의 설정이 합리적이라고 하였다.
  기타 맞춤법과 관련된 대부분의 논지는 標準語를 중심으로 語幹과 語尾의 구분을 분명하게 하자는 주장으로서 이 정신은 맞춤법 통일안의 기본 원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 강의’나 ‘표준어’, ‘외래어’, ‘국어 순화’, ‘사전 편찬’ 등에 대한 소개는 생략한다.
  ‘國語의 유포니’(1954, 續 1962)에서는 언어의 論理性과 表現性 중에 表現性을 중심으로 그 가치와 현상을 다루었다. 표현적인 면은 표현 주체, 표현 작용, 표현 대상의 세 요소가 있는데 이들이 語感과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표현적 가치는 형식과 내용의 면에서 볼 때 형식은 ‘강약, 장단, 고저, 모음의 명암, 자음의 銳鈍, 접미음, 접두음’과 관여되고 내용은 ‘계급성, 친밀성’ 등과 관여된다. 그리하여 語感은 계기적, 근접적 음성의 영향으로 조화를 이루는 음 변화인데 ‘모음조화’, ‘자음 동화’, ‘모음 충돌의 회피’, ‘3자음 연속 발음 불가능’, ‘어두 자음군 회피’ 등이 이에 속한다. 이 중에서 母音 衝突의 회피를 유포니에 의한 것으로 상세히 다루고, 流音 및 流音化도 음악적으로 효과를 높이는 측면에서 유포니로 취급하였다. 이 논문은 ‘思想 表現과 語感’(1937), ‘言語와 文學家’(1953), ‘詩와 言語’(1948), ‘國語의 藝術性’(1960) 등과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이제 “國語學 槪說”의 소개로 끝을 맺으려 하거니와 國語에 대한 연구가 科學的이고 實證的이어야 한다는 一石의 정신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國語學 槪說”은 본문만 무려 410페이지에 달하는 개설서로서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序文 대신으로, 凡例, 第一編 序說, 第一章 國語의 建設, 第二章 國語 硏究의 方法, 第三章 國語學의 部門, 第四章 硏究 資料와 參考 學術, 第二編 音韻論, 第一章 音의 生態와 그 種類, 第二章 國語의 音韻 組織, 第三編 語彙編, 第一章 單語, 第二章 語義의 硏究(語義論), 第三章 單語의 構成(語形論), 第四章 音相과 語意·語感, 第五章 語意의 階級性(敬語와 卑語), 第四編 文法論, 第一章 國文法 發達의 槪觀, 第二章 品詞의 分類.
  ‘序說’에서는 국어의 개념을 언어와 연관시켜 규범적인 면을 강조하고(언어일 것, 구체적 언어일 것, 국가를 배경으로 할 것, 표준어가 되어야 할 것) 국어학은 언어학적인 연구 방법에 의해 연구되어야 하며 국어의 특징을 밝혀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國語에 대한 自覺에서는 訓民正音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국어에 대한 인식과 표기 등에 대해 기술하고, 이봉운의 ‘國文正理’부터를 國語學 成立의 시기로 보았다. 國語 硏究 方法으로는 共時的 硏究와 通時的 硏究를 제시하고 상호 보좌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第二編 ‘音韻論’에서는 音의 生態와 種類를 발음 기관과 음성 실험을 통한 생리적, 물리적 특성에 의해 제시하고 具體 音聲과 抽象 音聲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리고 話音(speech sound), 語音(phone), 通音(phoneme)의 설명과 音表에 대한 정의, 음성학과 음운론의 차이점 등에 대해 기술하였다. 國語의 音韻 組織에서는 母音의 경우와 子音의 경우를 나누어 단모음, 복모음, 모음 삼각형, 조음 위치와 조음 방식에 따른 자음의 종류를 제시하면서 그 성질에 대해 설명하였다. 音의 連結에서는 音節을 단위로 한 超分節 音表에 대해 기술하였다. 音의 同化에는 모음과 모음 사이, 자음과 자음 사이, 모음과 자음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同化를 다루었고 同化의 종류도 5개의 기준을 세워 분류하였다. 끝으로 사이ㅅ 소리, 받침 법칙에 대해서도 논하였다.
  第三編의 語彙論은 單語, 語義의 硏究, 單語의 形成, 音相과 語意·語感, 語意의 階級性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單語가 일정한 음성에 일정한 의미가 결합된 언어의 한 단위임을 확인하고, 여러 각도에서 단어를 분류하고 있다. “國語學 槪說”의 한 특징이기도 하지만 音韻의 變化나 語義의 변화, 語形論 등이 포함된 것은 一石에게 있어 語彙論의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그리고 語義, 語感 문제, 敬語와 卑語까지 語彙編에 넣은 것은 音韻論, 形態論, 意味論 등을 다 포괄한다는 의미가 있다. 결국 單語가 지니고 있는 모든 屬性을 전체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一石의 言語觀에 기인한다 하겠다.
  第四編 文法論은 國文法 發達의 槪觀, 品詞의 分類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文法 意識의 발달에서부터 개화기 이후의 文法書들을 細述하고 品詞의 分類에서는 12種의 歷代 文法書들을 대상으로 品詞의 種類, 문제점들을 상세히 검토하고 그것을 통계적으로 제시하였다. 동시에 一石의 品詞 分類의 기준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第三章 序頭에 1.意義的 範疇에 依하여야 할 일, 2. 機能的 範疇에 依하여야 할 일 등 2가지 원리에 의해 品詞가 설정되어야 하며, 현대적으로 말하면 形態論的, 統辭論的으로 볼 때 그 제약 조건이 동일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機能的 範疇에 의한 文法性을 중시한 것 같다. 끝으로 品詞 分類에 對한 批判 數種에서는 여러 文法書들을 통해 數詞, 存在詞, 指定詞, 助動詞, 助用詞, 終止詞, 禁止詞, 否定詞, 呼應詞 등에 대해 검토 비판하였다.
  結語에서는 ‘槪說’의 범위는 다각적으로 여러 분야를 다루어야 함에도 系統論, 形態論, 國語 地理學, 文字論 등을 취급치 못한 점을 아쉬워하였다. 그러나 모든 학설에 대해 비교적 공정하게 설명, 비판한 점을 강조하였다.
  李秉根(1992)의 지적처럼 單語 중심의 서술로 音韻論的, 語彙論的, 文法論的 記述을 한 점, 共時的 記述을 위주로 하되, 通時的 考慮를 한 점, 풍부한 參考 文獻의 섭렵 등은 이 책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一石의 學問은 그의 뚜렷한 言語觀 내지 國語觀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학문적 論理性과 科學性, 그리고 實證性과 實踐性의 集合體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國語學 硏究의 方向과 그 精神을 正道로 잡을 수 있도록 직·간접적으로 준 영향은 一石이 말씀한 단순한 里程標와는 거리가 멀다.
  나무와 숲을 구별하지 못하는 처지의 필자가 존경하는 스승이요, 한국의 巨人에 대해 그 높고 깊은 생애와 학문을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주제넘는 일인가, 이제 새삼 뉘우쳐진다. 10월이 文化의 달이요, 一石 李熙昇 先生님의 달이기에, 그리고 5周忌를 앞둔 때이기에 非禮를 무릅쓰고 이 글을 썼다.


참고 문헌

姜信沆(1990), “一石 先生의 學問 世界”, 顯正 봄 호.
高永根(1985), “一石 선생의 國語學 硏究”, 語文 硏究 46·47 합병호.
南廣祐(1978), “李熙昇과 韓國語”, 隨筆 文學 68.
南豊鉉(1990), “一石 李熙昇 선생님의 學問과 人間”, 東洋學(檀國大) 20.
李秉根(1992), “李熙昇: 一石 國語學의 性格과 時代的 意義”, 周時經 學報 9.
李翊燮(1987), “國語學 槪說”, 서울대 국문과 동창 회보 새 소식 2.
李熙昇·金完鎭(1976), “國語學 半世紀(對談)”, 韓國 學報 5.
李熙昇(1975~1976), “나의 履歷書”, 한국일보.
李熙昇(1977),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능력 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