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산책]
우리말의 규범적 질서를 위하여
郭光秀 / 서울 대학교 불어 교육과 교수
언어를 두고 그것을 당위적인 것으로 접근하느냐, 사실적인 것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의 큰 언어학적 태도가 있다. 기실 이 두 가지 태도의 대립은 언어학사적으로 볼 때, 혁명적이라고 할 만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를 금 긋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언어는 규범적인 것, 부과된 문법 규칙을 따름으로써 기능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었는데, 금세기에 들어와서 구조 언어학의 창시자인 소쉬르(Saussure)가 그것을 참다운 과학적 연구의 사실(事實)적인 대상으로 정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사상(事象)이란 어떤 것이나 필경 자연 과학적인 사상과는 달리, 엄밀히 사실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필경 순수히 인과율만을 따르는 것은 아니고, 비결정적인 자유로운 인간의 지향에 좌우되기도 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가치이기도 하다. 언어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전통적인 규범 문법은 과학이 아닌 것으로서, 언어학이라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것은 프랑스에서는, 아이러니가 그 주관적인 의미의 가장 큰 부분을 이루고 있는 순수주의(purisme)라는 지칭의 대상이 되어 있다. 순수주의의 비과학성은, 구조주의 언어학 이후의 언어학이 그 엄청난 학적 성과에 의해 모든 인간학들(Sciences Humaines) 가운데, 자연 과학에서도 물리학과 같은 엄정 과학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에 상대적으로 조명되어, 한결 두드러져 보인다. 순수주의의 오류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진상, 근원적인 원리에 대한 궁구(窮究)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규범 문법이 서 있는 입장이 근원적으로 허물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입장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인간적인 사상은 인간의 비결정적인 자유로운 지향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인간적인 진리---- 오늘날 엄청난 인간학 일반의 과학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부정될 때가 기약되지 않은---에 평행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이 말에 의아해 할 것이다. 그들의 자유로운 시어 구사를 규제하려는 것이 규범 문법인데, 어찌 그것이 인간의 자유로운 지향에 배치되지 않는가 하고, 그러나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것은, 규범 문법이 그 당위성으로써 과학적인 인과율적 결정성에서 자유롭다는 사실이며, 따라서 규범 문법이나 시인은 똑같이 가치의 영역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근원적으로는 같은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어쨌든 요약해서 되풀이하자면, 규범 문법 자체에는 오류가 있지만, 그것이 함축하는 언어에 대한 태도는 전적으로 부정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언어 역시 모든 다른 인간적인 사상들과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탐구 대상으로서의 측면과 그 탐구가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지향적인 의지의 지배에 맡겨져야 하는 측면, 사실로서의 측면과 가치로서의 측면, ---이 양 측면이 모두 살아 있어야만, 온전한 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며 온전히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언어의 가치적 측면은 특히 그것의 당위적 측면이다. 언어에 있어서의 사실과 당위의 관계는 거의 전적으로 윤리에 있어서의 그것에 유추하여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윤리에 있어서 인간 사회의 끊임없는 변화에 따라 기존의 윤리 규범에 저촉되는 사회 현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그로써 그 양자의 갈등과 그에 따른 윤리의 변화가 항존하는 것처럼(성도덕의 변화를 생각해 보라), 언어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문법 규칙과 언어 현실의 갈등 관계 및 그에 따른 문법 규칙의 재조정도 항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나 후퇴하는 것은 당위이고 승리하는 것은 사실이니, 규범은 팽개치고 현실을 그것이 가는 대로 내버려 두면 되지 않겠는가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윤리에서도 그렇지 않는 것처럼, 언어에서도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윤리나 언어나 어느 면으로는 사회적인 것, 나와 남들 사이의 화해로운 관계에 토대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분적인 탈선적 사회 현실, 언어 현실이 하나의 사실로서 사회 과학적으로, 언어학적으로 설명될 수는 있을지라도, 사회 전체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용인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의 승리는 바로, 당위에 어긋나는 부분적인 사실이 사회의, 언어의 발전적인 흐름에서 어떤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사회 전체로 확산되어 사회 전체의 합의된 용인을 받게 될 때, 즉 그것이 사회 구성원들 전체 사이의 화해로운 관계를 깨뜨리지 않게 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언어에 있어서 그 화해로운 관계는 본질적으로 바로 의사소통 현상이 뜻하는 바이다. 이 의사소통을 두고 방금 말한 언어에 있어서의 규범과 탈선적 현실 사이의 갈등 및 그에 따른, 전자에 의한 후자의 수용·배척---이러한 발전적 추이를 예를 들어 살펴보자면, 근년 점차적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는 ‘여간’의 오용과, 청소년들 사이에서 흔히 쓰이고 있으나 필경 결정적인 용인을 받을 수 없고 받을 수 없도록 해야 할 ‘뿐’인 오용을 들 수 있다.
‘여간’은 본디 “여간 곱지 않다.” “여간 열심히 하지 않는다.” “여간 날뛰지 않다.”에서처럼 그 자체로는 ‘보통으로, 조금, 어지간하게’(이회승 편 ‘국어 대사전’)라는 뜻의 부사인데, 그러나 반드시 그다음에 오는 형용사, 부사, 동사는 ‘아니하다’라는 의존 형용사를 불러오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아니하다’가 ‘여간’의 ‘보통으로’라는 본 뜻을 부정하게 되어, 결국 그것이 쓰인 문장의 전체 뜻은 언제나 그 반대의 뜻, 즉 높은 정도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연유되어 ‘여간’은 그 자체만으로 점점 높은 정도를 나타내는 뜻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사람들은 착각하게 되어 갔다. 요즘 “여간 곱다.”, “여간 열심히 한다.”, “여간 날뛴다.”와 같은 쓰임새가 간행물에서도 흔히 눈에 띈다. 이제 ‘여간’의 이, 반대로 변한 뜻은 우리말 규칙에서 용인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리되어도 좋은 것은, 그것이 부정을 통해 높은 정도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만 쓰이며, 즉 ‘보통으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나타내기 위해 단독적으로 쓰이는 법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여간’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에 사람들이 ‘보통으로’라고 오해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 주며, ‘여간’의 이와 같은 의미적 상황은 그것이 ‘보통으로’라는 뜻을 잃어버린 것과도 맞먹는 것이다. 즉 ‘여간’의 이와 같은 쓰임새는 의사소통에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아직 간행물에서는 만나지 못했으나 청소년들 사이의 대화에서는 드물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이것뿐이 없다.”와 같은 표현에서의 ‘뿐’의 오용은, 아마 반대의 사정이다. 이 표현은 “이것밖에 없다.”라는 표현의 대신으로 쓰인 것인데, “이것밖에 없다.”의 뜻이 “이것뿐이다.”이므로, 이 뜻을 표현하려는 의지가 너무 성급히 작용함으로써 ‘밖에’를 ‘뿐이’로 바꿔 놓은 것이다. 그러나 ‘뿐’은 ‘여간’과는 달리 제 홀로 계속 ‘유일’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므로, “이것뿐이 없다.”라는 표현은 말하는 사람이 뜻하고자 하는 바와는 정반대의 뜻을 가지게도 된다. 이것은 의사소통에 중대한 장애를 형성하므로, ‘뿐’의 이 오용은 우리말 규칙에서 엄격히 금지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언어에 있어서의 당위와 사실 사이의 관계는 어느 한쪽에 특별히 유리하게 한 번에 척결될 수 없으며, 원활한 의사소통과 언어의 발전적 흐름을 동시에 고려하여 끊임없이 재조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말이 처한 상황을 살펴보면, 그 당위와 사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전자가 후자에 맞서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 듯하고, 그래서 우리말은 아직 상당한 무질서와 불통일을 내포하고 있다. 흔히 외국인들이 우리말을 배우기 힘든 언어라거나 비논리적인 언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거기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으나, 많은 경우 규범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을 그리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예컨대 ‘한다’와 ‘하는 것이다’의 뉘앙스 차이를 외국인들은 정녕 알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자신도 그 차이를 뚜렷이 의식하고 살려서 그 두 표현을 쓰는 이들은 드물다. 그러나 우리말에 대한 민감한 언어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차이가 있기는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데, 그 직관을 살려 그 차이를 정리해 놓아해 할 것이다(정리되어 있다면, 내 과문을 탓해야 하겠지만).
이와 같은 우리말의 상황을 두고,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논리성의 가능성을 항상 생각하고 있는 한 외국 문학도로서 그 원인을 몇 가지 생각해 본 것을 말해 보기로 한다.
첫째로는, 진부하고 많이 이야기되어 온 것이지만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서, 우리말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아낌의 부족을 들어야 하겠다. 이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징후 하나를 들자. 우리는 국어사전을 애용하지 않는다. 사전에서 정해진 단어의 형태와 묘사된 그 뜻은 그다음에 규범적으로 작용한다. 이것은 사실과 당위로서의 언어가 요구하는 바이다. 그런데 사전을 애용하지 않음으로써 단어에 뜻을 아무렇게나 주어서 그것을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이 경우의 유명한 예인, ‘공갈’을 ‘거짓말’의 뜻으로 쓰는 것은, 사전을 찾아보니, 이젠 속어적인 용법으로 거기에 올라 있다), 단어의 형태마저 틀리는 수도 많다. 큰 나무의 아랫부분을 ‘밑둥’이라고 하는가, ‘밑둥치’라고 하는가? 금방 대답할 수 있는 독자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프랑스 인들은 글을 쓸 때에 언제나 사전을 참조한다. 우리나라 시인·작가·비평가들 가운데 글을 쓸 때에 사전을 참조하는 이들은 더더구나 드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우리말을 가장 잘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다만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 주고 싶다. 폴 발레리가 4년 동안이나 걸려 ‘젊은 파르크’ La Jeune Parque를 완성했을 때, 그 사전이 특별한 것이긴 하나, 클레다 Clédat 편 ‘語源辭典’을 그야말로 닳아 떨어지게 할 정도로 참조했다고 한다.
자기가 쓰고자 하는 단어에 대해 이렇게 무관심하다면, 구두점에 관해서는 말해 무엇하랴! 우리말의 내재적 구조가 구두점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번역 문학을 통해 서양 언어식의 문장들, 특히 서양 언어의 관계절에 해당하는 긴 관형절이 붙은 문장들이 빈번해진 이제, 구두점을 알맞게 찍지 않으면, 의도한 뜻이 정확히, 빨리 전달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말, 제 글을 아끼지 않으니, 그것을 언어 전문가로 자처하는 언론인·출판인들에게 팽개치고는 교정이고 뭐고 오불관언이고, 언론인·출판인들은 또 그렇게 팽개쳐진 글을 이리저리 뜯어고치고 자르고 덧붙이고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둘째로는, 방금 말한 국어 사랑 부족과 악순환을 이루는 것으로서 국어 학자들 및 말과 글을 전문으로 다루는 인사들이 우리말의 규범을 위해 기울인 노력의 결실이 아직 미진하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하겠다. 즉 우리말을 아끼려고 해도 그럴 수단이 부족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첫째 항에 든 예들에 대구적으로 말하라면, 사전을 참조하려고 해도 아직 충분한 도움이 되지 못하고, 구두점 체계는 언론·출판의 각 사마다 다르다!
사전에는 단어들의 뜻만을 풀이해 놓은 백과사전식 사전과, 그것들의 뜻은 물론 용법, 문법적 기능까지도 묘사해 놓은 언어 사전의 두 종류가 있는데(예컨대 프랑스의 경우, ‘라우스(Larousse) 사전’은 전자에, ‘로베르(Lobert) 사전’은 후자에 속한다), 지금까지 나온 우리말 사전들은 모두 전자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니 어의적으로, 문법적으로 올바른 쓰임새를 알아보려고 해도, 사전이 알려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말을 공부하는 외국인들이 우리말 사전을 가지고도 우리나라 소설들을 쉽게 읽어 내려가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만하다. 우리말의 훌륭한 언어 사전의 출현은 우리말의 규범적 질서와 통일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의 하나이다. 그러니 기타 어원사전, 동의어 사전, 유어 사전, 문법 사전 등등은 말할 계제도 아니다. 최근 유어 사전에 해당되는 분류 어휘 사전이 간행된 바 있으니, 고무적인 현상이다. 어쨌든 이런 사전들도 모두 갖춰져 있어야 뜻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올바르게 글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구두점 불통일의 대표적인 예로는 서명, 잡지명, 잡지 속의 논문명, 인용을 표시하는 방식이 중구난방인 것을 들 수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그들이 읽는 책의 간행처가 달라지면서, 서명인지 무엇인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전반적인 구두점의 기능을 논한 ‘현대 구두점 개론’(Traité Moderne de Ponctuation)이라는 책을 쓴 다무레트(Damourette)라는 언어 학자가 있다.
둘째 항에 언급된 사실들을 결코 국어 학자들에 대한 잘못된 비난의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본격적인 국어학사는 아직 한 세기에 미치지도 못하고, 거기에 비하면 모르긴 해도 국어학계의 업적은 대단하다는 것으로 들린다. 기실 둘째 항에 언급된 사실들은, 이 글의 앞 부분에 개진된 내용으로써 알 수 있겠지만, 우리말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 자체와 곧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셋째로는 우리나라 국어 교육에 있어서의 작문 교육의 등한을 언급해야 하겠다. 이것은 많이 논의되고 있는 바이지만,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뜻하고자 하는 것을 어떻게 올바른 어법을 통해, 즉 정확하고 오해의 여지없이 표현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문학적인 재능의 개발보다는).
마지막으로, 국립 국어 연구원이 설립되기 전이라면, 이상과 같은 우리말의 무질서와 불통일의 직접적인 원인들은 아니지만 그 원인들을 없애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제도적인 기관의 부재를 안타까워했을 터인데, 이제 국립 국어 연구원이라는 훌륭한 기관이 설립되어 있으니,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불어의 규범적인 질서와 통일을 위해 기울이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노력---예컨대 새로운 단어의 뜻을 정확히 규정한다든가, 용인되지 않은 외래어를 추방한다든가 등등---을 국립 국어 연구원에 기대해 보기로 한다.
우리말은 써진[記] 전통이 깊지 않다. 그런데 말의 전통은 대부분 써진 전통이다. 따라서 우리말은 (그냥) 전통이 깊지 않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니까, 모든 면으로 훌륭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에의 희망을 가꿀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말에 규범적인 질서와 통일을 주는 것은 바로 그 희망을 가꾸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