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스승 외솔 최현배 선생을 기리며
내가 외솔 최현배 선생을 알게 된 것은 우리말 공부에 뜻을 두고 외솔의 지음인 ‘중등 말본’, ‘고등 말본’, ‘우리말본’책을 차례로 읽어 봤을 때였다.
직접 뵙기로는 연세 대학교 분교가 부산 영도에 있었을 때 외솔이 학술 강연을 했을 적이며 그 강연이 끝난 뒤 외솔이 동래 고등 보통학교 재직 시에 가르친 제자들이 동래 별장으로 모셨을 때 나는 가외 사람으로 끼이게 되어 처음으로 자리를 함께 했다.
외솔이 6·25 동란으로 부산에 피난하였을 때 외솔을 극진히 모시던 제자 (내가 근무하고 있던) 경남 고등학교 추월영 교장댁 2층에 계셨으므로 외솔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뒤에 안 일인데 외솔이 내 처가와 촌수는 멀지만 한집안의 어른이었다. 외솔과 나는 그런저런 인연은 얽혀 있었지마는 내가 직접 외솔의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다.
외솔을 가까이 모시게 된 것은 내가 서울 보성 고등학교에 전근한 뒤부터였다. 한글 학회의 행사와 연구 발표회에 참석하여 가끔씩 만나 뵈었으며 해가 바뀔 때마다 외솔과 한결(김윤경 선생) 두 어른께 세배를 드리러 갔고 외솔이 돌아가신 뒤에도 인천에 있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서울 대흥동 빈소에 가서 세배 드리기를 여섯 해 계속했다. 그것은 외솔에 대한 흠모의 정에서 우러나온 예절이었다.
외솔 생존 시에 외솔의 지음인 중·고등 말본(문교부 검인정) 두 책의 교사 지침서를 나에게 맡겨 주셔서 정리된 원고 뭉치를 가져가서 한 번 훑어보시라고 했을 때 볼 필요가 없다고 바로 정음사로 넘겨주라고 하신 일, 돌아가신 뒤에 외솔 문집 제1호로 내게 된 ‘우리말본’최종의 교정을 유족들의 협의에 의하여 나에게 맡겼을 때, 외솔이 평소에 봐 둔 교정본이 네 책인데 내용이 일치되지 않아서 고심했으나 허웅 선생의 감수로 그런 대로 잘 마친 일, 외솔회 창립까지의 사전 협의와 창립 뒤 각종 행사와 ‘나라 사랑’지 펴냄에 따른 집필 등 주마등처럼 내 머리를 스쳐 간다.
외솔의 생애와 인품, 학문 연구 등에 대하여 한마디로 요약하면 외솔은 개화기에 태어나서 나라의 권리를 빼앗겼던 왜정 때에도 우리 겨레를 위한 굳은 신념을 한 번도 굽힌 일이 없으며 광복 이후 파란 많던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나라를 위한 충정으로 꿋꿋하게, 올곧게 한 평생을 산 큰 인물이며 특히 우리 말글의 연구에 있어서 한힌샘 주시경 선생에 이어 몇몇 봉우리 가운데서도 가장 높이 우뚝 솟은 봉우리를 대하듯 두드러진 업적을 쌓은 큰 선비이시다.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하든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 인성 곧 사람의 됨됨이가 바탕이 된다. 내가 청탁 받은 주제는 외솔에 대한 학문의 분야가 아닌 인간 곧 ‘최현배 선생님의 인간다운 면모’이다. 외솔과 나와의 관계를 앞에서 미리 밝힌 까닭은 ‘인간’을 중점적으로 말하기 위해서이다.
외솔은 1894년 경남 울산 중농 가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명석하여 동네 어른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가르치는 선생이 못 풀던 산수 문제를 척척 풀고 12살 때 동네 서당을 대표하여 바둑 대회에 나갔다고 한다. 14살 때 울산 병영에 신설된 일신 학교에 입학하여 신식 교육을 받았는데 그 당시 구한국 말 대한매일신보에 나라 정사가 날로 글러져 감을 개탄하여 오적, 칠적을 타도하는 기사와 사설 등을 읽고 목놓아 울기를 밤 깊이 했다는 외솔 자신의 글을 볼 때, 철이 들까말까 한 나이에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으니 장하고 놀라운 일이다. 그 싹이 자라 거목이 되듯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마음은 더욱 간절한 경지에 이르렀다.
17살 되던 3월에 10 대 1이 넘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한성 고등 보통학교에 최우수 성적으로 입학하여 그렇듯 즐기던 바둑도 두지 않고 큰 뜻을 키워 나가는 학생의 길로 들어섰는데 그 해 8월에 나라를 잃고 학교 운영의 주도권이 일인의 손으로 넘어가 친구 사이에도 서로 눈치를 살펴야 했으므로 학업에 뜻을 잃었다고 한다. 외솔이 실망과 실의에 차 있을 때 고향 친지의 소개로 주시경 선생이 가르치는 조선어 강습소에 나가기 시작하여 그 가르침만이 외솔의 유일한 낙이었으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외솔은 우리 말글을 연구해야겠다는 포부와 우리 겨레에게 우리 말글을 교육하는 것이 장래의 소망이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외솔이 당신의 스승 주시경 선생을 위한 각별한 정성은 내내 변함이 없었다. 왜정 때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주시경 선생의 묘소(수색 공동 묘지)를 살피고 광복 뒤 한글 학회를 이끌어 온 외솔이 주동이 되어 경기도 양주군 장현리 명당 자리를 골라서 이장했으며 외솔 자신도 스승의 곁에 묻히려고 바로 그 묘소 근처에 묘지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외솔은 22살 되던 해에 일본 히로시마 고등 사범학교에 유학했다. 처음 두 해 동안은 우리나라 학생이 없어 내 겨레가 그립고 우리말을 하고 싶어서 수소문하여 우리 교포를 만났으나 우리말을 전혀 못해서 희망과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으며 우리말을 못해서 먹은 것이 제대로 소화가 안 되었는데 고국에 와서 우리말을 실컷 했더니 울적한 심기가 확 트였다고 했다. 외솔이 우리 말글에 쏟은 정성과 진정한 사랑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외솔이 히로시마 고등 사범학교에서 한문과 교육학을 전공했고 26살 때 졸업하여 중등학교 교원 면허증을 받았으나 관립 학교 교원은 일본 통치에 붙좇음이 된다고 병을 핑계하여 쉬다가 총독부의 양해를 얻어서 사립 동래 고등 보통학교 교사로 2년 동안 재직했을 때 우리말본의 뼈대를 세워 가면서 손수 교재를 등사하여 학생들에게 나누어 열성껏 가르쳤다고 한다. 그 당시 동래 한학자들은 그렇게도 가르칠 것이 없어서 언문(한글)을 글이라고 가르치냐면서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먼저 깨친 이들은 외롭게 살았다. 외솔의 호가 바로 그 뜻을 새겨 주는 것만 같다.
외솔이 29살 되던 해에 일본 히로시마 고등 사범학교 연구과에서 공부하다가 그 해 교토 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여 교육학을 전공하고 졸업 논문으로 ‘페스탈로치의 교육 학설’을 발표했다. 이 논문을 인정받아 오사카와 나라 교육 학회의 초청으로 강연한 일이 있었고 다시 교토 대학 대학원에서 한 해 더 수학하면서 나라 외국어 학교에서 우리말을 가르쳤다.
내가 외솔이 돌아가신 뒤에 외솔의 막내 아들 최철해 님과 함께 대흥동 외솔의 서재에 들른 일이 있다. 그때 큰 봉투 속에 들어 있는 히로시마 고등 사범학교 졸업 논문을 보았더니 그 논문 주제가 우리말의 특징으로 꼽는 시늉말에 대한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외솔이 부득이 그와 같은 전공을 했을 뿐 언제나 목표로 삼고 연구한 것은 우리 말글이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외솔은 말과 행동에 한 치의 차이를 두지 않던 실천가였다. 외솔은 항상 무명옷을 즐겨 입었으며 외제품을 쓰는 것을 보면 역정을 내고 자제분들이 어쩌다 외제 물품을 사다 드리면 불호령을 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자시는 것도 구수한 된장찌개를 즐겨 드시고 중국 식당이나 일본 식당에 가시기를 꺼렸다고 한다. 연세 대학교 부총장으로 계셨을 때, 전용차를 내어 드리려 해도 휘발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무슨 자동차냐고 끝내 거절하고 걸어 다니셨고 연세 대학교 부산 분교 학술 강연 뒤 제자들이 동래 별장으로 모실 때 택시로 가자고 권했으나 전차를 타고 가신 일, 연회 석상에서 술은 아예 들지 않아서 콜라를 권했으나, 미제 상표를 보시고 한 모금도 마시지 않던 일 들은 내가 직접 듣고 본 것이다. 외솔은 그토록 국산품을 애용했으나 모자만은 두상이 커서 외제품을 쓰셨다는 말이 퍼뜨려졌다. 외솔이 돌아가신 뒤 당신의 맏아들 최영해 님의 ‘신 한 켤레’란 수필에서 문상객들이 모두 헤어지고 난 뒤 신발장에 뒤축이 닳아 볼품없는 헌 신발 한 켤레가 남아 있어서 어느 시골 양반이 자신의 신발도 챙겨 신지 않고 갔을까 했는데 알고 보니 아버님의 것이었다는 ‘현대 문학’지에 실린 글에서 보듯 외솔의 몸에 밴 검소한 생활을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 사회가 흥청망청 분수 없이 살고 있는 것과 대조가 되어 모두를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좋은 교훈을 남겨 주신 것이다.
외솔은 공과 사를 분명히 했다. 편수국장으로 계셨을 때 종이 한 장도 공용과 사용을 구별해서 썼고 서울 사범대학에 강의를 맡아 나갔을 때 나라의 녹을 받는 공무원이 두 군데서 수준을 거둘 수 없다고 강의료를 거절하신 일, 광복 뒤 서울의 대중 교통이 말이 아니어서 지각한 표를 안 내기 위하여 편수국 직원들이 심부름하는 아이이게 미리 도장을 맡겨 놓고 출근부 도장을 찍도록 한 것이 발각되어 직원들 전원을 모아 놓고 독립된 나라의 우리들의 정신 자세가 그래서 되느냐고 긴 시간 설교를 했는데 너무도 엄숙한 꾸지람에 모두들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편수국과 관련된 업자들이 명절에 술 한 병 대접하려는 선물도 돌려 주기에 골몰했다는 일 등 청백리의 본보기를 머릿속 깊이 되새겨야 할 현실이 아니겠는가!
외솔은 남에게 베푸는 일에는 넉넉했으나 신세지는 일에는 지나치리만큼 인색했다. 어려운 살림살이나 병으로 고생하는 제자가 주변 사람들을 돕는 일에는 아무도 모르게 베풀었다는 말이 외솔이 돌아가신 뒤에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외솔이 내 처가와 한집안이라, 부산 피난살이 때 기회가 좋다고 여겨 귀한 손님인 외솔을 모시려고 먹거리를 그득히 준비해 놓고 기다렸는데 당신의 손자와 추 교장님 아들을 데리고 부산 시내에서 약 15리쯤 되는 시골길을 걸어서 오셨다고 한다. 그런데 도시락을 가지고 오셔서 보니 꽁보리밥에 반찬도 말이 아니더라고 했다. 그래서 차려 놓은 것 자시라고 애원하듯 해도 도시락만 챙겨 자시고 떠나서 섭섭하기 이를 데 없었고 한 편은 너무 지나친 처사로 여겨져 괘씸하게 생각했다는 말을 들었다.
외솔의 강한 집념은 아무도 말릴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앞날을 위하여 총칼의 서슬이 퍼렇던 왜정 때에도 목숨을 걸고 우리 말글을 연구했고 사전 편찬의 일을 할 때 이른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많은 분들이 검거되어 곤욕을 당했을 때 일경들의 심문에 “내 나라 사람이 내 나라 말글을 연구하는 게 무엇이 나쁘냐?”는 대답으로 일관하다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요령을 피우고 엄살을 부려 그 자리를 모면하지 아니하였다. 형무소 살이에서도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서 한글 가로 풀어쓰기의 글자를 고안하여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종이 쪽지에 적어 감추어 내어 주었는데 사모님이 모아 두신 그 원고로써 광복 뒤 책자가 나왔으니 자나깨나 우리 말글 연구에 몰두한 정성은 눈물겹다.
자유당 말기에 한글 간소화 파동이 났을 때 왜정 때 죽을 몸이 천우신조로 살아났으니 광복 뒤의 삶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목숨을 걸어도 안 된다는 비장한 각오로 반대했기 때문에 고집이 센 이승만 대통령도 그 이상 더 말하지 않겠다고 끝맺음을 한 평지풍파를 겪기도 했다. 하루 바삐 한글 전용이 이루어져야겠다고 해서 한 때는 국회의원이 되어 투쟁할 양으로 외솔이 울산 지구 국회 의원 후보로 출마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학문 생활로 일관해 온 분이 정치 운동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가짐으로써는 경쟁이 될 수가 없었다. 외솔의 선거 연설장에는 국민학교 어린 학생들만 모여들었다는 말이 퍼지기도 했다.
외솔은 ‘학연, 지연, 혈연’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생전에 동창회 모임에 잘 나가지 않으셨고 고향 사람들의 모임이나 고향 사람들이 펴내는 책자의 원고 청탁에도 응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선조를 드러내어 자랑한다든지 한집안 족보 따위 일에도 관여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지기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분단된 현실을 더욱 진하게 느끼게 한다.
외솔이 그와 같은 인간다운 참모습으로써 만인의 수범이 되셨고 우리 말글 연구에 있어서도 한힌샘 주시경 선생의 알뜰한 후계자로서 큰 봉우리를 이루었으며 후진들에게도 길이 그 학통을 이어 가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