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외솔 최현배 선생의 학문과 인간]

언어 정책론

김하수 /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언어 정책과 언어 정책론

  이 글이 포함되는 전체 주제는 최현배라는 한 인물에 한정되어 있으나 그의 국어 정책론을 논의하기 위하여서는 불가피하게 ‘언어 정책’이라는 개념을 먼저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국어학계에서 큰 고민 없이 이 개념을 다루는 과정에서는 본의든 아니든 개념 규정을 폭이 좁고 눈에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언어 정책의 개념을 일반적인 함의를 중심으로만 생각한다면 교육 정책, 외교 정책 등처럼 일련의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부문별한 각론의 의미만을 남기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자칫 법령이나 행정적인 조치 정도의 한계 안에 시각을 조직 안내 수준에 빠져 버릴 위험성이 있다.1) 곧 언어 정책에 관한 사회사적인 정통성을 오로지 권력 구조에 정통성의 우선을 두는 관료주의적 이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관료주의적 시각을 강조하는 경우에는 사회사의 인식에서도 자연스럽게 독립 협회나 갑신정변보다 갑오경장의 의미만을 논의의 중심에 놓을 수도 있겠고, 조선어 학회의 ‘한글 마춤법 통일안’보다 조선 총독부의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을 논의 전개의 기본적인 축으로 보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한글 간소화 문제를 정책 집행 기관의 성격과 기능을 우선하여 인식할 때에 얼마나 희극적인 결론도 가능하겠느냐를 가상해 보면 이러한 문제 제기가 갖는 진지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언어 문제와 관련된 제반 현상에는 정치적인 지배 구조가 확연하게 개입되는 경우도 있지만 배후에서 구조적인 역할만 담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2) 따라서 ‘구체적인 사건’으로 떠오르는 여러 언어 정책적 ‘현상’을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빚어 낸 사회 구조와 역사적 인과 관계를 중심으로 관찰을 할 때에만 그 과학적인 모양새를 갖출 수 있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료주의적 시각은 언어 문제를 사회적 측면과 내적 구조의 측면으로 철저하게 구분시키는 관점을 강조함으로써, 언어가 인간의 내면에서 비롯하여 삶의 세계로 이어지는 인식의 고리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언어가 가지는 총체적 성격을 분해시키는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결국 언어 정책을 어떤 관점에서 불 것인가 하는 것은 과학적 정밀성 이전에 또다시 언어관의 문제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 정책의 의미를 과연 어떻게 파악할 때 과학적 엄밀성과 언어 문제에 관한 ‘사회적 실천’의 문제를 이어 주는 고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관한 답변은 어떠한 선험적인 논리보다 구체적으로 언어가 사용되고, 문제를 일으키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하는 언어 현장에서 재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시각이 언어 현장에서 문제되는 현장을 성실하게 추적해 보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주체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이 서로 다른 사회 집단의 대립, 언어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대립이라는 긴장 관계 속에서 발생하며, 이것은 곧 언어에 대한 정책적 또는 정치적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다름 아닌 이러한 문제를 일으키거나 해결하려 하거나 아니면 회피하려는 제반 경향이 적극적인 의미에서나 소극적인 의미에서 구체적인 언어 정책을 실현시킨 주요 주체로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실현의 논리를 제공하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인식이 언어 정책론을 구성하는 뼈대를 이루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라 언어 정책이라는 표어를 걸고 등장한 언어 정책론 못지않게 언어 정책이라는 일언반구의 표현도 없이 언어 정책적 실현을 불러오는 실체들의 역학적 관계도 당연히 관찰의 대상에 포함시키는 철저한 대상화라는 절차를 통하여만 이론다운 언어 정책론이 설 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2. 언어 정책과 시대적 의미3)

      2.1 현대 사회에서 갖는 민족어의 의미

  언어 정책의 문제를 일으키는 대립적인 주체들의 성격은 말할 나위 없이 시대와 지역을 따라 그 속성을 달리 하게 마련이다. 게르만의 대이동 시기에는 로마 문명의 흡수, 기독교로의 개종, 부족 간의 갈등과 통합 등의 사회적 현상이 현대 유럽의 언어 지도를 그려낸 모태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마호메트의 불 같은 포교 활동은 아랍어 글말의 발전을 촉진시켰고 현재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언어적 공통성을 확립하는 주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또 스페인 왕조의 은에 대한 탐욕은 과도한 통화 팽창으로 말미암아 산업 자본주의로의 자기 완결적 발전을 스스로 무너뜨린 반면에 오늘날의 중남미 대부분이 스페인 어 사용 지역이 되어 버린 성과(?)만 남겼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사실들은 언어 문제를 행동 목표로 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언어에 대단히 큰 발자취들을 남겨 놓은 사건들이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우리 역사에서 나타난 이두 사용, 후기 신라 시대의 한자 지명의 공식화, 더 나아가서는 15세기의 훈민정음에 이르기까지 많은 언어적 문제(혹은 언어 정책적 문제)들이 기실 민족 사회 내부의 복잡한 변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는 그 필연성을 언급하기가 지난할 것이라고 추론해 볼 만하다. 다시 말해서 언어 정책이란 어떤 지역에서 어떤 시기에 어떤 집단(또는 세력)에 의해서 언어와 관계된 어떠한 문제가 일어나거나 해결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라고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 정책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뿔뿔이 흩어진 주제와 산만한 문제 의식으로 과연 학문적인 논의의 가치를 가실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다. 이러한 걱정과 한계는 역사에 대한 사회 과학적인 성과를 참고하면서, 한편으로는 흩어진 언어 정책론의 다양한 논지를 사회사적 인과 관계에 따라 엮어 내는 도움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추상 속에서만 맴돌 위험이 있는 역사적 법칙성을 구체화해 주는 보답으로 학제적 기능을 해 내게 되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언어 정책의 지역적인 문제는 거의 예외 없이 종족이나 민족 또는 국가라는 사회적 단위를 중심으로 하여 발생하고 변화한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문제는 해당 시대의 사회적 성격의 영향을 벗어나서는 논의를 전개하기 어렵다. 앞에서 예를 든 게르만의 대 이동 시기는 고대 유럽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의 붕괴기로 이른바 고대 국가 시대에서 봉건 사회로 이행하던 때이다. 로마 제국의 법전과 로마 교회의 교리가 그 광대한 제국을 지배한다고 하였으나 일반 대중이 일상 세계까지 체계화되지는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곧 라틴어는 각종 국가적 장치와 교회 조직의 지배적 부분 안에서 사용되었지 언어 대중의 일상생활은 그리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갈리아와 브리튼은 겔트 어 사용 지역이었고, 라인 강 건너는 게르만의 제 부족들의 거주지였다. 그들은 모두 선진적인 로마 문화의 영향으로 라틴 어의 침투를 막을 수는 없었으나 갈리아 지방의 프랑스 어를 제외하고는 로마 어권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프랑스 어 역시 라틴 어라기보다는 게르만적인 요소를 받아들인 통속 로망 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고대 국가 시대에서 봉건 사회로의 이행기에는 전 제국적(全帝國的) 지배 언어가 봉건 사회의 지정학적 조건에 의해서 해체되고 사회적 통용성이 더욱 한정되었다. 극소수 지배층의 권력 문화를 대변하고 상징하는 데에 그쳤던 것이다.4)
  옛 아랍인(모어인)들의 활발한 무역 활동은 그네들의 독점 이익을 지키기 위한 자기 확대 과정에서 칼리프 제국을 이루고 동서 무역의 중간 이익을 독차지하는 번성기를 구가했다. 이러한 융성은 몽고의 침략과 튀르크의 성장, 마지막으로 서구 제국의 지리상의 발견에 의해 종언을 고한다. 이 시대의 통일성 있는 이념으로 구실한 이슬람교는 고전 아랍어를 지배 계층의 유일한 소통 수단으로 기능하였으나 역시 통속 아랍어의 방언적 분화를 완전히 막지는 못하였다.
  스페인의 번성과 몰락은 봉건 사회의 저뭄과 현대 산업 사회의 새벽을 동시에 알려 주었다. 그리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사람이 임금님이 없으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말았다. 이 혁명을 주도한 세력은 스스로를 ‘시민(부르주아)’이라고 불렀다. 이 시민 계급은 자신들의 계급적 요소를 위한 민주주의라는 세련된 정치 제도를 형상화시키고 계급의 이익이 아닌 ‘민족(nation)의 이익’을 내세웠다.5) 민족의 종족적 연원은 무척 오래 전의 일이지만, 역사 속에서 ‘민족주의(nationalism)’의 시작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곧 모든 사회적 이익, 덕목, 이상, 삶의 의미 등은 이 이상 하느님이 아닌 민족에 의해서 새로이 규정되게 되었다. 교회도 분열되어 적어도 초기에는 민족 교회적 성격이 강한 개신교가 등장했다. 이 ‘민족’을 상징하며 온 국가 구성원에게 뜨거운 애국심을 불어넣은 상징은 국기 (national flag), 국가(national athem), 각종 ‘국립(national)-’ 기관 들이었고, 더욱 더 모든 사람들에게 민족적 소속감을 강하게 고취시킨 것을 민족어(이른바 국어, national language)의 등장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계급이나 신분을 불문하고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동등한 자격’을 선언하는 징표로 기능하였기 때문이다. 세계의 역사에서 바로 이때부터 이른바 ‘민족 국가 시대’의 문이 열린다. 이 이전에는 민족을 사실상 구성하는 종족적인 실체는 있었으나 그것이 ‘국가’를 조직하는 결정적인 내용이 되지는 못하였다.6)
  이 이전의 민족어는 일반 대중의 일상생활에서 주로 사용되면서도, 글로 적히는 일은 별로 없는, 따라서 자의적인 형태 변화도 쉽게 일어나는 방언 같은 언어였다. 이 같은 어수룩한 민족어 가운데 비교적 일찍이 봉건 왕조에서나마 문예어나 공용어로 기능하기 시작한 영어와 프랑스어는 순풍에 돛단 듯이 언어적 발전을 성취했다. 여기서 언어적 발전이란 각종 공용 문서, 교과서, 학술 서적, 문예물, 법률 등에 기록 수단이 되면서 규범화되어 자의적인 형태 변화가 적어지고, 따라서 문법적 체계가 완성되어 언어 자체가 ‘조직화된 제도’로 기능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뒤늦게 현대 사회로 진입한 독일과 러시아는 각각 18세기와 19세기가 되어서야 괴테, 푸슈킨, 톨스토이 등의 문호들 덕분에 민족어가 글말로 정착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 그래서 이들의 업적을 ‘국민 문학’이라고 불렀다. 곧 민족 문화 그리고 민족어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뜻이다.7)
  현대의 앞머리인 근대 사회의 형성 과정에서 유럽은 이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기초를 닦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기여는 ‘시장의 확대’라는 사회 경제적 토대와 민족어의 사회적 기능 확대라는 문화적 요인에게 둘려야 할 것이다.


      2.2 식민지 사회와 민족어

  산업 국가 건설에 성공한 유럽의 현대 민족 국가들을 ‘민족과 민족 사이의 문제’ 곧 민족 간의(international)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자연스레 강한 민족 국가와 약한 민족 국가로 나뉘게 되어 이른바 ‘열강’이 형성되었다. 열강은 자신들 사이의 혈투(식민지 쟁탈전)를 마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까스로 열강의 대열에 끼어들려는 독일, 이태리, 러시아, 일본 등을 한편으로는 밀어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리 전쟁의 제물로 이용하여 민족 국가들 내부에 힘에 의한 서열을 형성했다. 식민지에서 일찌감치 대립하여 남북 전쟁을 통하여 산업 사회의 기틀을 다진 미국도 열강의 대열에 끼어들었다. 근대 이전까지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스페인, 포르투갈, 터키 등은 공화정으로의 자기 발전을 망설이다가 산업화에 실패하고 열강의 후보에서 탈락하고 말았다.8)
  중국과 조선은 근대화를 주도하려는 세력과 반대하는 수구 세력과의 내홍에서 이렇다 할 최소한의 판정승의 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앞질러 민족 국가를 이룩하고 민족 외부에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침략적인 세력, 곧 ‘외세’의 덫에 걸려든다. 중국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천신만고 끝에 식민지 신세는 면했으나 이른바 반(半)식민지 상태에 빠져 열강들에게 안방을 내 주다시피 한다. 우리의 조선 왕조는 19세기 끝무렵 진보냐 보수냐의 갈등을 결국 자체 해결하지 못하고 외세의 힘을 빌다가 1905년에는 반식민지 상태로, 1910년에는 공식적으로 식민지 상태에 들어간다.9)
  아주 오래 전부터 식민지가 되었던 아시아 남부 및 서부, 아프리카, 중남미 등의 식민지 대중들은 제한적이나마 내부의 자체적인 발전과 열강들끼리의 싸움(양차 대전)들을 경험하며 차차 각성의 길로 들어선다. 그래서 자주적인 민족 국가를 가지지 않고는 끊임없는 수탈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주로 민족 부르주아의 주도로 이루어진 이 운동은 이름하여 ‘민족 해방 운동’이라고 한다. 열강들의 민족 국가 형성기에 이념이 되었던 민족주의라는 말은 식민지 대중에게는 대단히 공격적인 개념을 품고 있기 때문에 ‘대항적 민족주의로서의 민족 의식’을 구분하려는 시각에서 비롯되어 나왔다.
  열강들은 결코 권력이나 무력만으로 식민지를 다스리지 않았다. 자신들의 우월성과 식민지 사회의 열등성을 강조하였고, 열강의 문화를 습득하지 않고는 삶의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의식을 끊임없이 주입시켰다.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존중하거나 계승하려는 행위는 쇼비니즘(국수주의)이라는 경멸을 받고, 야만성의 옹호나 비과학적인 아둔함으로 낙인이 찍혔다.10) 그러나 식민지 대중이 식민지 모국의 문화를 누리고 생활 개선을 이루고자 발버둥치면 칠수록 민족 자본은 왜소해질 뿐 지배 민족의 자본만 살찌고, 식민지 내부의 계급적인 양극화가 더욱 첨예해졌다.
  내부적 대립이 극심해지면서 분노한 대중의 폭발적인 저항은 으레 무력에 의하여 진압되고 이러한 위험한 구조를 극복하기 위하여 아주 세련된 통치술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조선 총독부의 문화 정책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보기이다. 인도네시아 인들은 네덜란드에 유학하고 와서 관리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인도의 지식인들은 의사로, 변호사로 출세하면서 고통받는 대중들과는 점점 결별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식민지 모국의 언어를 더욱 유창하게 말하게 되었고, 민족어는 방언처럼 형태와 의미가 잘 고정되지 않는, 따라서 공식 용어나 학술어로는 극히 부적합한 언어나 다름없다는 듯이 소홀히 하게 되었다. 이들은 식민지가 독립할 때까지 또 종종 그 이후에도 매판적 역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민족어를 계발할 능력과 의무를 짊어진 민족 지식인의 이반은 대중이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사회의 공식 세계에서 활동할 자신을 잃게 만들었다.
  식민지 지역의 민족 해방 운동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 방향으로 펼쳐졌다. 하나는 비합법적인 무력 투쟁이요, 다른 하나는 합법적인 문화 운동이었다. 물론 무력 투쟁에도 숱한 노선과 이념이 혼재하였고, 문화 운동에도 잡다한 입장과 견해가 뒤섞여 있었다. 무장 투쟁 세력은 대중 속에 파고 들어가 지하 운동을 하면서 ‘문맹 퇴치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온건한 노선으로서 민족 엘리트들이 많이 모인 문화 운동에는 소박해 보이면서도 민족적 정서와 반 외세 의식을 일거에 퍼뜨릴 수 있는 수단인 언어, 즉 민족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민족 해방 운동의 어떠한 노선에서 있든지 민족의 언어는 회복의 대상인 동시에 모든 것을 회복하는 수단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조선어 학회의 활동은 이 점에서 단순히 괴팍한 고집의 인사들이 모여 언성만 높인 조직이 아니라 세계사적인 보편성을 증명한 ‘역사의 필연’이었을 뿐이다.


3. 최현배의 언어 정책론

  최현배의 언어 정책론을 다루기 위하여, 특히 그 사회적, 역사적 면모를 다루기 위하여는 무척 지루한 판세의 해석이 필요했다. 학문적으로나 문화 정책적인 면에서 이 이름 석자처럼 많은 존경과 비아냥거림을 함께 받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11) 대개의 선각자들이 그렇듯이 그도 분업화된 특정 영역에서 전문화된 일꾼으로 일했다기보다 문법론, 교육론, 문자론 등의 학술 분야의 학자로서, 사전과 교과서의 편찬자로서, 또 교육 행정가로서 다양하면서도 일관된 길을 걸었기 때문인지 그에 대한 평가도 거의 예외 없이 단편적이고 획일적이다.
  최현배의 입장과 시각은 사실 평생을 두고 어느 면을 보아도 시종일관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하다고 할 정도로 관점과 자세의 동요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 정책론이라는 것은 문법론 분야와는 달리 시대적 조건과 정치 구조의 차이와 매우 밀접히 맞물려 있는 성질도 가지고 있으므로, 더 나아가 통속적으로 구성된 최현배론을 더 분화시켜 볼 필요도 있기 때문에 그의 활동기를 크게 둘로 나누어 평가해 본다.


      3.1 식민지 시대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식민지 조선의 민족 운동은 외세에 대한 안티테제에서 비롯된다. 격렬한 독립 운동 끝에 자주권을 되찾은 제3세계의 공통된 고민은 바로 이 안티테제로서의 민족 운동이 민족이 정치적 힘을 획득해야 한다는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측면과, 자칫 내부 모순을 은폐하고 발전보다는 고립과 자기 만족에 빠지기 쉽다는 이율배반 때문에 현재까지도 전면적인 주권을 자기 완결적으로 행사하는 데에 적잖은 문제가 따르고 있다.
  근대화 운동이 동아시아 세 나라를 흔들기 시작했을 때, 그 폭발적 서막은 농민들의 저항이 폭동 형태로 저급한 조직과 규모에서 터져 나갔다. 전근대적인 지주 집단은 왕조 사회의 수구 세력을 업고 새로운 시대와 사조를 배격했으나 비교적 깨어난 지배 지식인들은 기존의 토지 제도를 개혁하여 토지 자본으로의 전환을,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로의 발전을 꿈꾸었다. 이른바 개화파라는 일컬음을 듣는 사람들이다.
  이들도 서구의 시민 계급의 이념이었던 ‘nation’에 상당하는 ‘國’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곧 부국강병이라는 이념으로 천자의 정통성 따위와는 정신적 이별을 고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신들을 넘보는 서구의 외세는 ‘洋’이라는 개념으로 인식을 하였다. 민족 문제를 확고한 근대 시민 사회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을 주저하는 인식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서구와는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혁명적 부르주아의 운동은 미미하거나 실패를 거듭했고 구체제와 타협적인 온건한 개명 인사들에 의해서 전면적이지 못한 근대화가 시도되었다. 이들의 타협적인 구호가 바로 동도 서기론(東道西器論)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철저한 자기 인식에 기반을 둔 이념으로는 이 시대의 벽을 순탄하게 넘을 수 없었다.
  적어도 당시 조선에서 민족 문제에 대해 옳던 그르던 가장 확고하고 뚜렷하게 드러낸 인식은 신채호가 대표할 수 있다. 아(我)와 비아(非我)를 단호하게 구분한 그의 관점은 당시의 민족 운동을 평가할 때에 그것이 타협적이었는가 투쟁적이었는가를 가르는 가장 분명한 잣대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이 시기에 민족 문제에 관한 최현배의 견해는 일단 ‘朝鮮民族更生의 道’를 검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 책도 아와 비아를 확연하게 갈라놓는 시각을 분명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이 책은 언어 정책에 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의 민족 상황을 여러 부문에 걸쳐 비판적이고도 반성적으로 따져 보는 논지가 큰 줄기를 이루면서 언어 문제는 그 가운데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전반적으로 민족 상황에 관한 계몽주의적인 성격의 줄거리를 가지고 있으며 지극히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서술과, 반대로 영탄조의 비분강개가 매우 적절히 배합되어 있어서 마치 독일의 피히테(Fichte)가 쓴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연상시키는 대목들이 이곳저곳에서 눈에 뜨인다.12)
  이 책에서 지은이는 우리 민족의 여러 가지 병폐와 개선 대상을 지적하며 ‘갱생의 길’을 부르짖는다. 우선 첫째로 당시의 민족 상황을 대단히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부정적인 현실의 원인을 외부적 영향보다 내부적 원인에서 찾으려는 시각은 주목할 만하다. 전형적인 민족 운동가들이 식민지화의 근본 원인을 외세에서 찾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둘째로 그는 과거 봉건 사회에 대해서는 중국과 조선을 막론하고 가혹한 비판의 화살을 거침없이 토하고 있다.13) 분명히 그는 근대화론자로 이론적인 무장을 단단히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단지 그의 근대화론에 동반할 가능성이 있는 유물론과는 분명하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도처에서 보인다.
  셋째로 민족 문화나 전통 속에서도 저급한 것이나 발전에 장애가 될 만한 요소들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 물론 그 근거가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 역시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다. 이 점에서도 그 쇼비니스트의 대표적인 인물로 거론하는 통속적인 견해는 그 근거의 한 귀퉁이를 잃고 있다.
  넷째로 갱생의 길로 나아가는 방법으로 교육을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보고 있다. 계몽 운동가들의 일반적인 자세이다. 단지 그 구체적인 방법은 확실하게 제시하지 않고 있다. 매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기술이 주조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식민지 사회에서 페스탈로치 교육이 사실상 구체적으로 성취할 것이 없다는 것을 말 없이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끝으로, 한글에 대해 대단히 높은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 이 땅에서 소중하게 다룰 만한 거의 유일한 대상인 듯이 서술하고 있다. 한자에 대해 봉건 왕조나 별반 다름없다는 듯이 격렬하게 비판하는 것과 극명한 대조가 생긴다.
  이 책에서 논의한 이상의 다섯 가지 논조는 그가 언어와 글자를 통하여 무엇을 행하려 했는지가 이미 반 이상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는 식민지 사회의 문제를 보면서 외부적 원인보다 내부적 원인을 중시했다. 이것만으로는 제국주의자들의 시각이나 매판분자들의 시각과 외형상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둘째로 거론한 그의 반봉건 의식을 감안하면 좀 더 합리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그는 사실상 식민지화의 내부적 원인과 봉건적 잔재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 발전에 도움은커녕 방해가 된다고 여겨지는 전통 문화와 제도 역시 부정의 대상으로 삼았다. 결국 그는 이 책에서 식민지 조선의 발전은 정신적 각성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고, 이를 위하여 교육과 계몽 운동이 필수적인데, 그것을 위하여는 민족어와 높은 수준의 글자 체계라는 역사적 산물을 중시해야 할 것이라는 확신이 저술의 정신적인 기초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려 하고 있다. 비록 그가 전통 문화와 인습을 과감하게 비판하면서도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과 분명히 구분되는 것은 이와 같은 민족적 실천의 구도가 또렷하기 때문이다.14)
  이 책에서 불분명한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중요한 교육의 프로그램이 전혀 제시되지 않고 있는 점이다. 더 나아가서 민족의 앞날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구상하는지 뚜렷한 교시를 하지 않고 있다. 단지 마지막 부분에 조직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아, 이미 조선어 학회 활동을 하던 그는 단순한 제도 교육보다 사회 활동을 통한 실천 교육을 더욱 중시했으리라 하는 추론만 해 볼 따름이다.
  이 책에 대한 이상의 평가는 식민지 조선에서 그가 남긴 자취를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는다. 그는 민족의 현실을 개선, 발전시키려는 계몽주의적인 역할을 자임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위한 사회적 실천 교육의 가장 광범위한 기본 매체인 언어를, 한편으로는 학술적 대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실천의 수단으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조선어 학회는 이러한 활동을 이어가는 조직적 기반으로, 그리고 동지들의 규합 지점으로 구실했다.
  그는 ‘우리말본’이라는 대단히 큰 저술을 통하여 민족어의 구조적 체계를 정비하였고 이것은 곧 ‘마춤법 통일안’과 ‘표준말 모음’이라는 언어 규범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이 규범화는 비록 구속력이 강한 사회적 관철은 어려웠고 선언적 의미와 계몽 운동과의 연계를 도모할 수 있는 정도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현대 한국어에 관한 모두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나가다시피 할 수밖에 없는 --그리하여 뒷날 적지 않은 독선과 고집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이게도 된 원인일 수도 있는 -- 조건이 이렇게 이루어졌다.


      3.2 광복 이후

  광복 이후 최현배와 그의 동지들은 조국이 분단되듯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이극로와 정열모는 북녘 땅에서 그들의 뜻을 펴기로 결심했고, 최현배와 김윤경, 이희승은 남녘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나라 사랑의 길’에서 최현배는 민족의 문제에 국가와 문제를 포개어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휠씬 낙관적인 신념으로 미래의 희망을 그리고 있다. 광복 이후 그의 업적은 무엇보다 국어 교육 부문에서 크게 빛났다. 광복 이전에 이루어 낸 민족어의 규범화라는 성과를 실천적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교과서 편찬과 문법 교과서 저술에서 성취해 냈다. 또한 규범화를 무너뜨리려는 보수 세력의 ‘간소화안’을 불퇴의 의지로 막아냈다. 그리고 사전 편찬을 통하여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못 박아 버린 것이다.
  혹자는 그의 이름 뒤에다가 어색하게 급조한 토착 어휘를 늘어놓고 그의 모든 것을 해석하려 한다. 그런 어휘가 그의 작품이든 아니든 그런 것으로 그의 정신과 시대적 의미를 왜소화하기에는 그가 짊어졌던 민족이라는 짐이 너무 컸고, 그의 공작을 경멸하려는 이들의 시각은 지나치게 비좁았다. 아니 그가 급하게, 그렇기 때문에 종종 어설프게 만들 수도 있었던 어휘를 고집스럽게 방어만 함으로써 그를 계승하려는 후계자들의 자세가 한 선구자의 언어 정책적 의미를 빈곤한 듯이 보이게 만든 면이 있지나 않았는지 반성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4. 성과와 문제점

  최현배는 언어 정책이라는 분야의 저술을 낸 것이 없으면서도 그의 모든 저술은 언어 정책적인 의미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그의 방대한 업적과 크나큰 영향을 이 짤막한 글에 모두 헤쳐 내기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의 재발견과 재해석을 위하여서 그가 행한 언어 정책적 성격을 다시 한번 간추리고 근본적인 문제점이었다고 지적될 만한 사항을 찾아봄으로써 그의 탄신 백 주년을 코앞에 둔 후학들이 자기 위치도 간략하게 점검해 보고자 한다.
  최현배의 언어 정책은 근본적으로 민족 국가 건설에 실패하고 주권 회복 운동을 하던 제3세계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곧 조직적인 사회 운동을 통하여 민족 사회의 성립을 의식적으로 추구해야만 하는 조건을 말한다. 그러나 그의 주요 저작과 업적은 -- 물론 선진국에서 배워 온 까닭이었겠으나 -- ‘우리말본’에서부터 ‘마춤법 통일안’과 ‘문장 부호’, 그리고 ‘글자의 혁명’에 이르기까지 유럽 모델이 그 이상형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우리 사회를 식민지적 또는 제3세계적 특수성으로만 파악하지 않고 보편적인 발전 법칙 안에 편입될 가능성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가설을 가능하게 한다.
  어떻든 그와 그의 동지들은 민족 국가 형성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민족어의 규범화에 성공한다. 이로써 광복 이전에는 민족 내부의 전면적 의사 소통의 그물이, 광복 이후에는 국가적 의사 소통 체계가 이 사회의 공식 부문에서 가능해졌다. 그래서 식민지 출신의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모국어의 사회적 관찰이 즉각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의 언어 정책적 업적에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식민지 시대에 그와 그의 동지들의 노력과 희생은 진정 값진 것이었고 불후의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광복 이후 그의 앞에서는 갑자기 투쟁의 대상, 즉 적이 없어져 버렸다.
  그러자 그는 관료 행정 체계를 매개로 하여 뜻을 펴고자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는 광복 이전의 대중적기반보다 지배 엘리트의 기반에 의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민족어 논리는 오히려 누구보다 대중의 지지와 뒤따름이 필요했음에도 대중과 고립된 정부 기구를 선택했다. 그러나 몇 해 후 겨우 일구어 놓은 언어 규범화를 자신이 몸담았던 부처가 주동이 되어 송두리째 뽑아버리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 악전고투를 해야 하는 아이러니를 겪어야 했다. 곧 그가 신뢰하던 지배 엘리트들에게 포위당한 형국이 되고 만다.
  그 이후 그의 문법론은 아직도 고전적인 의미를 전혀 잃지 않고 있으나, 그의 한글 전용론은 그가 몸담았던 학계에서는 굳이 다시 논쟁의 초점으로 삼가조차 기피하고 있는데, 오히려 의외의 공간에서 이것이 이루어져 가고 있다. 1960년대 대중을 의식하는 진보적인 문예지 ‘창작과 비평’이 한글 가로쓰기를 실시한 이래 그러한 성향의 잡지와 신문은 으레 이러한 틀을 따라 가고 있고, 또 전혀 다른 쪽에서 대중에 대한 홍보를 중요시하는 정부의 기관지나 군대의 간행물 역시 한글 전용을 직접 실천하고 있다. 그가 펼치려던 언어 정책론이 종국에 가서 누가 이루어 내고 말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 주는 실마리이다.
  결론적으로 최현배는 그의 국어 연구와 국어 운동을 통하여 민족 국가의 정치 경제적 토대의 사회 문화적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언어 정책적 시각을 그의 모든 활동 분야에서 시종일관 추구하였다고 하겠다. 그의 이념적 시각은 초기에는 계몽주의에 바탕을 둔 비판적 낭만주의(그 자신도 ‘실천적 이상주의’라는 말을 쓰고 있다)의 경향을 보이고 있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이 이념이 소시민적 주관주의에 압도되어 가는 현상을 보임으로써 그의 이상과 꿈이 퇴색되거나 지연되게 되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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