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정책론
1. 언어 정책과 언어 정책론
이 글이 포함되는 전체 주제는 최현배라는 한 인물에 한정되어 있으나 그의 국어 정책론을 논의하기 위하여서는 불가피하게 ‘언어 정책’이라는 개념을 먼저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국어학계에서 큰 고민 없이 이 개념을 다루는 과정에서는 본의든 아니든 개념 규정을 폭이 좁고 눈에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언어 정책의 개념을 일반적인 함의를 중심으로만 생각한다면 교육 정책, 외교 정책 등처럼 일련의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부문별한 각론의 의미만을 남기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자칫 법령이나 행정적인 조치 정도의 한계 안에 시각을 조직 안내 수준에 빠져 버릴 위험성이 있다.1) 곧 언어 정책에 관한 사회사적인 정통성을 오로지 권력 구조에 정통성의 우선을 두는 관료주의적 이해라고 할 수 있겠다.2. 언어 정책과 시대적 의미3)
2.1 현대 사회에서 갖는 민족어의 의미
언어 정책의 문제를 일으키는 대립적인 주체들의 성격은 말할 나위 없이 시대와 지역을 따라 그 속성을 달리 하게 마련이다. 게르만의 대이동 시기에는 로마 문명의 흡수, 기독교로의 개종, 부족 간의 갈등과 통합 등의 사회적 현상이 현대 유럽의 언어 지도를 그려낸 모태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마호메트의 불 같은 포교 활동은 아랍어 글말의 발전을 촉진시켰고 현재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언어적 공통성을 확립하는 주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또 스페인 왕조의 은에 대한 탐욕은 과도한 통화 팽창으로 말미암아 산업 자본주의로의 자기 완결적 발전을 스스로 무너뜨린 반면에 오늘날의 중남미 대부분이 스페인 어 사용 지역이 되어 버린 성과(?)만 남겼다.2.2 식민지 사회와 민족어
산업 국가 건설에 성공한 유럽의 현대 민족 국가들을 ‘민족과 민족 사이의 문제’ 곧 민족 간의(international)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자연스레 강한 민족 국가와 약한 민족 국가로 나뉘게 되어 이른바 ‘열강’이 형성되었다. 열강은 자신들 사이의 혈투(식민지 쟁탈전)를 마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까스로 열강의 대열에 끼어들려는 독일, 이태리, 러시아, 일본 등을 한편으로는 밀어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리 전쟁의 제물로 이용하여 민족 국가들 내부에 힘에 의한 서열을 형성했다. 식민지에서 일찌감치 대립하여 남북 전쟁을 통하여 산업 사회의 기틀을 다진 미국도 열강의 대열에 끼어들었다. 근대 이전까지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스페인, 포르투갈, 터키 등은 공화정으로의 자기 발전을 망설이다가 산업화에 실패하고 열강의 후보에서 탈락하고 말았다.8)3. 최현배의 언어 정책론
최현배의 언어 정책론을 다루기 위하여, 특히 그 사회적, 역사적 면모를 다루기 위하여는 무척 지루한 판세의 해석이 필요했다. 학문적으로나 문화 정책적인 면에서 이 이름 석자처럼 많은 존경과 비아냥거림을 함께 받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11) 대개의 선각자들이 그렇듯이 그도 분업화된 특정 영역에서 전문화된 일꾼으로 일했다기보다 문법론, 교육론, 문자론 등의 학술 분야의 학자로서, 사전과 교과서의 편찬자로서, 또 교육 행정가로서 다양하면서도 일관된 길을 걸었기 때문인지 그에 대한 평가도 거의 예외 없이 단편적이고 획일적이다.3.1 식민지 시대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식민지 조선의 민족 운동은 외세에 대한 안티테제에서 비롯된다. 격렬한 독립 운동 끝에 자주권을 되찾은 제3세계의 공통된 고민은 바로 이 안티테제로서의 민족 운동이 민족이 정치적 힘을 획득해야 한다는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측면과, 자칫 내부 모순을 은폐하고 발전보다는 고립과 자기 만족에 빠지기 쉽다는 이율배반 때문에 현재까지도 전면적인 주권을 자기 완결적으로 행사하는 데에 적잖은 문제가 따르고 있다.3.2 광복 이후
광복 이후 최현배와 그의 동지들은 조국이 분단되듯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이극로와 정열모는 북녘 땅에서 그들의 뜻을 펴기로 결심했고, 최현배와 김윤경, 이희승은 남녘에서 활동하게 되었다.4. 성과와 문제점
최현배는 언어 정책이라는 분야의 저술을 낸 것이 없으면서도 그의 모든 저술은 언어 정책적인 의미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그의 방대한 업적과 크나큰 영향을 이 짤막한 글에 모두 헤쳐 내기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의 재발견과 재해석을 위하여서 그가 행한 언어 정책적 성격을 다시 한번 간추리고 근본적인 문제점이었다고 지적될 만한 사항을 찾아봄으로써 그의 탄신 백 주년을 코앞에 둔 후학들이 자기 위치도 간략하게 점검해 보고자 한다.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