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외솔 최현배 선생의 학문과 인간]

외솔 선생은 이러하셨다

남기심 / 연세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내가 외솔 선생을 처음 뵌 것은 연세대 국문학과에 입학한 지 두어 달쯤 되는 때였다. 그때 나는 동아 출판사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해서 내는 ‘필승 국어’라는 국어 학습서의 원고 쓰는 일을 돕고 있었는데 어느 날 띄어쓰기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일이 생겼다. 예컨대, ‘36827’을 한글로 ‘삼만육천팔백이십칠’이라고 쓸 때 어디선가 띄어야 할 텐데 어디서 어떻게 띄어 써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교과서 같은 데서 어떻게 썼는지 한 번 보면 알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랬는지 대뜸 외솔 선생께 여쭈어 볼 생각이 들었다. 그때 외솔 선생은 부총장 일을 보고 계셨는데 나는 다음 날 등교하자마자 부총장실에 가서 무언가를 쓰고 계시던 선생님께 질문을 하였다. 그런데 내 질문을 들으시고도 아무 말이 없으신 채 정신 일만 하고 계시더니 한참 후에야 “한글 맞춤법 통일안 봤나?” 하시는 것이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몇 번 뒤져 보긴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살펴본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잘 보지 못했습니다.”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기다렸다. 응당 거기에 이러이러한 규정이 있다 하는 말씀을 하실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후엔 아무 말씀도 없으실 뿐만 아니라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는 것이었다. 내게 시선을 주지 않으시니 인사도 할 수 없고, 머쓱하게 물러 나오면서 얼마나 무안한지 발길이 제대로 놓이질 않았다.
  삼 학년 때인가 훈민정음 시험을 보았는데 나는 다 정답을 썼으니까 당연히 100점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채점된 답안지를 받고 보니 의외로 성적이 나빴다. 아무리 살펴봐도 틀렸다고 붉은 줄이 그어진 답이 왜 틀렸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예컨대, ‘强’자를 써야 할 자리에 틀림없는 ‘强’자를 썼는데 붉은 줄이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 그 답안지를 들고 가서 이것이 왜 틀렸느냐니까 “문헌을 그렇게 소홀히 봐서 되겠냐?” 하는 꾸중 한 마디뿐 다시는 아무 대꾸도 없으신 것이었다. 이번에도 무안만 당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한창 후에 가서야 훈민정음 당신의 ‘셀 강’자는 ‘마늘 모 ’가 쓰인 ‘’이었고 ㅁ가 쓰인 ‘强’은 후대에 쓰이게 된 것인 줄 알게 되었다.
  이런 일이 그 후에도 한두 번 더 있었거니와 그때마다 좀 자상하게 설명을 해 주실 수도 있었을 텐데 하면서 생각하다가 얻은 결론은, 조심해서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것을 잘 살펴보지도 않고 물을 생각부터 하는 것은 이치에 안 맞다 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외솔 선생은 무슨 얘기든지 이치에 좀 덜 맞거나, 말에 군더더기가 있으면 곧 화가 나신 표정이 되시곤 하셨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조리에 어긋나는 것은 말이고 행동이고 용납하지 않으셨다. 심지어는 공부 못하는 학생이 인사를 하면 잘 받지도 않으시는 터였으니까.
  그 분은 일상생활도 철저하게 계획되어 있고, 과학적 합리성을 주장하시어 조금도 빈틈이 없으셨다. 밥을 오래 저작하여 자시기로는 일석 이희승 선생이 유명하지마는 외솔도 이 일에 있어서는 남이 흉내낼 수 없을 만큼 철저하셨다. 언젠가 외솔 선생이 우리들을 보고 밥은 서른 번 이상(기억이 확실하지 않으나 이 숫자가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씹어 먹어야 한다. 우유도 씹어 먹는 것이 원칙이다 하시는 말씀을 들은 일은 있는데, 언젠가 우리 집에서 모시고 식사를 할 때, 남과 속도를 맞추시기는 해야 하겠고 그러나 오래된 습관이시라 그렇게 되시지는 않고 하여 애쓰시던 것을 뵌 기억이 있다. 나도 그리 해 보려고 했으나 도무지 되지 않았는데, 그래도 밥을 오래 저작하는 일은 할 수가 있지마는 우유를 씹어 먹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른다. 서양 사람들이 아침에 우유에 시리얼이라는 것을 넣어서 먹는데 그것을 보고 외솔 말씀이 생각나서 저것이 우유를 씹어 먹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겨울에 김장을 할 때 배추를 다듬으면서 겉의 잎은 떼어 버린다. 그리고 하얗고 깨끗해진 배추로 김장을 한다. 그러나 외솔은 바로 그 버리는 잎이 푸른색으로 기기에 영양이 모여 있는데 버려서는 안 된다 하여 못 버리게 하셨다 한다.
  1920년대에 외솔은 ‘조선 민족 갱생의 도’에서 우리가 나라를 되살리려면 어찌어찌해야 한다는 것을 논하셨거니와, 우리말을 연구하고 다듬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시고 그래서 평생 국어의 연구와 실천에 몸을 바치셨던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일이지마는 그중에는 또 물자를 절약해야 한다고 하신 대목도 있다. 그리고 그걸 몸소 철저하게 실천하신 분이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가 가난하기 짝이 없던 때라 석유가 한 방울도 안 나는 나라에서 함부로 차를 타서 되겠느냐 하여 택시를 타지 않으신 일이나, 연하장, 청첩장 등을 모아 두셨다가 원고 정리용 카드로 쓰셨다거나 한 일이 모두 그러한 예다, 작고하시기 전에 우리말의 옛 말본을 집필하시기 위해 자료 정리를 하신 카드가 몇 만 장인가 되는데 그것이 모두 이렇게 오랫동안 모아 두셨던 연하장이나 청첩장의 뒷면을 이용하신 것이어서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일이 있다. 1970년에 작고하실 때까지도 댁 대문에는 초인종 대신에 설렁줄이 있었다. 밖에서 그 설렁줄을 몇 번 잡아당기면 설렁줄 끝에 매달린 깡통에 돌이 들어 있어서 그것이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별로 크지 않아서 잘 들리지 않건마는 한두 번만 잡아당기면 어김없이 나와서 문을 열어 주시곤 했다. 초인종은 전기가 드는 것이고 전기는 우리나라에서 안 나는 석유가 있어야 하는 까닭이었다.
  내가 대학원에 재학하고 있을 때였다. 학생이 나뿐이라 혼자서 강의를 받고 있는데, 내 얼굴을 보시더니 건강이 좋지 않은 모양이니 약을 먹어야 하겠다 하시면서 “내가 좀 사 주지.”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이른 봄이었는데 늦은 가을이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어서, 꼭 그걸 바라서가 아니라 원래 약속하신 일을 잊는 법이 없으신 분이라 이상하다고만 생각하고 고만 그 일을 잊고 있는데 어느 무섭게 추운 겨울 날 “내가 자네 보약을 사 놨는데 자네 집이 어딘가?” 하시는 것이 아닌가! 약을 사놨으니 가져가라는 것이 아니라 집에까지 가져다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약속을 완전히 이행하는 것이라 생각하신 것이었을까, 아무튼 그 날 집으로 모시고 가서 찬 없는 저녁을 지어 드리고 우리 내외가 모시고 앉아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었지마는 그 후에 댁에서 원고 쓰는 일을 거들어 드리던 후배한테 들은 얘기는 참으로 기막힌 것이었다.
  내게 약을 사 주겠다고 하신 것이 미리 계획이 있어서 하신 것이 아니라 내 허약함을 보시고 예정에 없이 갑자기 하신 약속이라 그 돈을 마련하시기 위해 댁의 주 단위의 식단 계획을 재조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매달 생활비가 빈틈없이 계획이 짜져 있어서 예정에 없던 비용을 쓰시자니 그 비용을 식단 계획에서 하루 시금치 두 단을 한 단으로, 배추 세 포기를 두 포기로…… 하는 식으로 줄여서 마련하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자니 이른 봄에 하신 약속을 겨울에 가서야 지키게 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매사가 철두철미하게 논리적인 분이셨다. 그러면서 별로 똑똑치도 못한 제자의 건강을 그렇게 걱정해 주실 만큼 정도 깊으셨다.
  내가 외국에 공부하러 나가 있는 동안 우리 집사람이 정초에 세배를 가면 꼭 땅 속에 묻어 두셨던 고구마를 손수 꺼내서 싸 주시면서 “이게 단 고구마라 맛이 괜찮다.”고 하시면서 버스 정거장까지 들어다 주시곤 하셨다는 것이다. 댁 울안에 채마밭이 있었는데 그 변두리에 여러 가지 화초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중에 하나를 손수 캐서 주시며 꽃이 좋으니 집에 가져가 심으라 하신 일이 있다. 그 화초는 내가 밖에 나가 있는 동안에 집이 팔리고 하여 남의 집 것이 되어 버렸지마는 그때의 그 다정하셨던 일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외솔 선생은 남들이 지나치시다고 할 만큼 이지적이고 의지가 강하셨던 분이다. 그러면서도 그 안쪽으로는 또 그처럼 깊은 정을 함께 지니셨었다. 그 분의 이지적이고 논리적인 면만 본 사람들 중에는 그 두 가지가 어떻게 조화될 수 있었을까 의심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지마는 남에게 보이지 않는 다른 한 쪽에 남보다 몇 배 깊은 정이 있으셨다. 외솔 선생의 나라 사랑이나 우리말 사랑의 열정을 어떻게 뜨거운 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