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국어의 의성어·의태어]

의성어 의태어의 시적 위상과 기능

성기옥 /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 시적 언어로서의 성격과 그 위상

  국민학교 상급생일 때던 50년대 중반 무렵이던가. 선생님께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자랑할 때면 으레껏 먼저 의성어와 의태어를 예로 드시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찰랑찰랑, 촐랑촐랑, 출렁출렁, 철렁철렁 ……. 깡총깡총, 껑충껑충, 깡충깡충 ……. 이들 의성어 의태어의 갖가지 어투와 미묘한 어감 차이는 그 무렵의 어린 내 언어 감각에 비추어서도 무척 신기했던 것 같다. 육이오 전쟁의 쓰라린 비극을 탄피 치기나 전쟁놀이로 껴안고 보냈던 소년기의 우리들은, 잠시 한때나마 거친 놀이에 싫증나 갑자기 무료해질 때면 곧잘 이들 의성어 의태어로 말 잇기 놀이를 하며 새로운 재미로 키득거리곤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의 그 신기함은, 전쟁의 비극을 비극으로 받아들이기에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좀 남다른 무엇이 있었던 것 같다. 안남미, 우유 가루, 옥수수 가루, 헌 옷가지류 등 갖가지 구호 물자에 묻혀 가끔 맛볼 수 있었던 환상적인 초콜릿 맛이나 말랑말랑한 미제 껌의 감칠맛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무조건 미제가 좋았던 그 시절 우리말의 이런 감각적 아름다움은 일종의 경이로움으로 비쳤던 것 같다. 우리 것이면 무조건 초라하고 지저분한 것처럼 여겨지던 그때, 서툰 솜씨로는 손을 베이기 일쑤인 조악한 연필과 몇 자 쓰지 못해 찢어지기 일쑤인 조잡한 공책이 우리 것의 전부이던 그때, 우리 것이면서도 감칠맛 나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이라니. 안남미 밥에 비할 수 없었던 우리 쌀밥의 감칠맛과 함께 우리 것에도 좋은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던 그때 그 시절의 씁쓸한 기억. 지금 생각하면 이런 신기함 자체가 곧 전쟁의 쓰라린 유년기적 상흔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의성어·의태어에 대한 어릴 때의 그 기억은 훨씬 커서 문학에 대한 열기가 내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무렵인 이십대 청년기에도 꺼지지 않고 되살려지곤 했다. 의성어로서의 ‘찰랑찰랑’이 의태어로서의 ‘남실남실’과 조응하는 의태성을 지닐 수도 있다는 사실, 의성어로서의 ‘촐랑촐랑’이 물결 소리로서보다 오히려 의태어로서의 잔망스러운 행동을 나타내는 ‘촐랑거리다’와 더 긴밀히 호응된다는 사실, 그토록 엄격한 범주 틀로 보이던 의성어와 의태어의 구분이 사실은 그렇게 엄정한 것만도 아니라는 깨달음, 말이란 언제나 이처럼 우리가 쳐 놓은 개념 틀에 갇히어 있지 않으려는 자유로움을 누리고 있구나 하는 또 다른 차원의 놀라움 등 의성어·의태어에 대한 이런 생각들은 결국 이십대 젊은 날의 내 문학적 관심과 마주치면서 내쏟을 수 있었던 많은 시적 사유들 가운데의 작은 한 편린이었던 셈이다.
  시의 언어로서 의성어·의태어의 시적 위상을 밝히려는 지금 이 시점에서 보면, 지난날 필자의 이런 경험은 사실 큰 의미를 띨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의성어·의태어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전범이 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우리 시의 아름다움으로 직접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닌 듯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의 자료적 현상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시적 언어로서의 의성어·의태어는 우리 시에서 생각만큼 그렇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이들의 아름다움이 시에서 특별히 주목을 받는다거나 시에서 더욱 생생하게 구현되는 것 같지도 않을 뿐더러, 시라고 해서 무슨 특별한 미학적 장치를 설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고전 시에서든 현대 시에서든, 우리 시에서 자리하고 있는 이들의 시적 비중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으로서 각인되어 있는 그것에 비하여 상당히 작고 가벼운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 주목하고 보면, 의성어·의태어에 대한 지난날 필자의 경험은 그 친연성보다 오히려 이질성에 주목할 때 더 큰 의의를 지닐 수 있을 것 같다. 의성어·의태어를 통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깨닫기 시작한 어린 시절 필자의 경험이 오히려 시의 아름다움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의성어·의태어가 우리 시에서 자리하고 있는 시적 위상을 밝히는 일은 바로 이러한 현실적 간극의 거리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말의 아름다움이 시의 아름다움을 형성하는 원천적 기반이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또한 말의 아름다움을 곧바로 시의 아름다움으로 환원시켜 생각하는 식의 고정된 선입관 역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과 시의 긴밀성에 유념하는 일 못지않게, 말과 시 사이에 놓인 아름다움의 거리에 유념하는 일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 말의 아름다움과 시의 아름다움은 그 인식의 질적 기반이 서로 다른 까닭이다.
  어린 시절의 필자가 경험했던, 혹은 누구나 한 번쯤은 국어 시간에 들었을 법한 이들 의성어·의태어의 아름다움은 사실상 시적 아름다움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것은 시의 차원이 아닌 언어 일반의 차원에서, 특히 패러다임(paradigm)의 수준에서 경험될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찰랑찰랑’이라는 의성어가 아름답다면, 그것은 오직 ‘찰랑찰랑’이 ‘철렁철렁’, ‘촐랑촐랑’, ‘출렁출렁’과 더불어 하나의 同義的 語群을 형성하는 특정의 패러다임을 상정할 때 경험될 수 있다. ‘깡충깡충’이라는 의태어의 아름다움 역시 ‘깡총깡총’, ‘껑충껑충’으로 이어지는 패러다임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찰랑찰랑’이라는 의성어가 생성해 내는 아름다움은 ‘찰랑찰랑’이라는 단어 자체가 단독으로 생성해 낸, 그 만의 고유한 미적 자질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패러다임의 수준에서 패러다임 자체가 전면에 도드라질 때, 이를 구성하는 여러 어휘들 사이의 미적 상호 작용에 의해 산출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하는 의성어·의태어의 아름다움은 개별 어휘들의 본래적 속성으로서보다 이들 어휘가 이루는 패러다임의 속성으로서, 그 내적 상호 작용의 결과로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러나 시의 아름다움은 이와 사정이 다르다. 패러다임의 수준에서 경험될 수 있는 의성어·의태어의 아름다움이 시적으로도 의미를 지닌다면, 그것은 오직 시의 아름다움을 형성하는 극히 작은 한 부분적 국면으로서일 뿐이다. ‘철렁철렁’, ‘촐랑촐랑’, ‘출렁출렁’과의 상호 관련 속에서 산출되는 ‘찰랑찰랑’의 미묘한 감각적 아름다움은 결코 그 자체로서 시의 아름다움을 대표할 수 없다. 시에서의 그것은 단지 시어 선택의 차원에서 의의를 지니는 시적 아름다움의 작은 한 부분으로서 기능을 할 뿐이다. 시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이러한 시어 선택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곳에서, 선택된 시어들의 배열 관계에 주목하는 결합(syntagm)의 수준에서 경험될 수 있다. ‘찰랑찰랑’의 시적 아름다움은 찰랑거리는 대상으로서의 ‘물결’, ‘햇빛’, ‘희망’, ‘꿈’ 등과 통사적으로 결합될 때 거기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야콥슨의 말을 빌린다면 그러한 아름다움은 곧 ‘등가의 원리를 선택의 축으로부터 결합의 축으로 투사시키는’1) 시적 언어로서의 미학적 기능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말의 아름다움과 시의 아름다움이 그 인식의 기반을 달리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보면, 의성어·의태어가 시에서는 왜 생각만큼 그렇게 주목을 받지 못하는가에 대한 의문 또한 어느 정도는 풀릴 수 있을 것이다. 시의 의미는 어휘의 차원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시의 아름다움 또한 패러다임의 수준에서 감지되는 어휘의 아름다움만으로 형성되지는 않는다. 시는 어휘의 차원을 넘어선 배열의 차원, 곧 결합의 수준에 이를 때 그 진정한 의미와 아름다움이 완성된다. 의성어·의태어를 통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었던 지난날 필자의 경험은 어디까지나 어휘의 차원 , 곧 패러다임의 수준에서였던 데 지나지 않았다. 말의 아름다움으로서 경험되는 의성어·의태어가 시의 아름다움으로 경험될 수 있는 폭은 이처럼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의성어·의태어의 아름다움이 시에서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구체적인 까닭을 하나 더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곧 의성어·의태어가 환기하고 있는 아름다움의 질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과 직결되어 있다. 우리 국어의 경우 다른 언어에 비해 의성어·의태어가 유난히 풍부하게 발달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 의성어·의태어의 수사적 효과가 주로 대상을 현실감 있게 재현해 내는 具象化의 기능에 의존한다는 사실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토끼는 깡총깡총, 노루는 껑충껑충’이라는 진술과 만날 때 , 우리는 토끼와 노루가 뛰는 그 특유의 대조적 모습을 다른 어떤 표현보다 더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 낼 수 있다. 의성어와 의태어는 이처럼 대상의 표현에 활력과 생동감을 부여함으로써,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동적 현장감을 조성해 내는 데 특별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이러한 구상적 표현이 다른 어떤 부류의 어휘들보다 감각적이기 때문에 표현상의 제약 또한 심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곧 이들이 대상에 활력과 생동감을 부여하고 현장감을 조성하는 데 독특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의성어든 의태어든 그 속성이 본질적으로 감각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국어학에서 이들을 ‘象徵語’로 묶어서 다루고 있는 까닭, 이들에 대한 국어학적 관심이 의미론적 자질의 문제로서보다 음성 상징으로서의 ‘語感’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2) 등도 의성어·의태어의 이러한 감각적 특성에 초점을 맞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성어·의태어로서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의 영역은 자연히 대상의 감각적 재현이 주가 되는 세계, 감각적 재현이 보다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세계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 시 또한 그러한 제한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다. 감각적 재현만으로 드러낼 수 없는 다양한 세계가 우리의 언어생활 주변에 무수히 널려 있듯이, 시에도 감각적 재현만으로 드러낼 수 없는 많은 표현의 세계가 있다. 의성어·의태어의 속성이 본질적으로 감각적인 이상, 이들이 드러낼 수 있는 시의 세계 또한 그러한 감각적 재현의 아름다움에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칫 오해받기 쉬운 문제 하나를 분명히 해 두는 데서 마무리짓는 것이 논의에 더 효과적일 것 같다. 지금까지 밝히려고 애써 온 의성어·의태어의 시적 위상이 본의 아니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의성어·의태어가 시에서 특별히 주목받거나 비중 큰 의미를 띠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필자는 주로 이들의 시적 위상을 끌어내리려는 쪽에서 논지를 전개해 왔다. 이러한 논법은 자칫 읽는 이로 하여금 이들이 시에서 별로 의미가 없는 하찮은 것들임을 강조하는 쪽으로 해석케 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필자가 말하려는 진정한 뜻이 아니다. 이들의 시적 의의를 애써 축소시키려는 의도가 있어서, 혹은 이들의 시적 비중이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미한 상태여서 그러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와는 달리 우리 시에서 볼 수 있는 의성어·의태어의 쓰임은, 특별히 주목할 만큼 많은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례적이라 할 정도로 적은 것도 아니다. 적어도 일상의 언어생활에서 우리가 쓰고 있는 만큼은 시에서도 쓰이고 있고, 그에 값할 만한 정도의 시적 의의는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말하려는 바는 오히려 의성어·의태어에 대해 품기 쉬운 과도한 시적 기대나 의미 부여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우리시의 실상과 부합되는 바른 위상을 정립하려는 데 그 진정한 뜻이 있었다. 어린 시절 의성어·의태어를 통해 맛본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청년기에 시의 아름다움으로 이어졌던 필자의 경험은 바로 그러한 위험성에의 경종이다. 예컨대 우리는 흔히 ‘시는 말의 아름다움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식의 명제에 압도당하여 , 말의 아름다움과 시의 아름다움을 곧잘 혼동해 버린다. 그리하여 의성어·의태어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대표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은 만큼이나, 시의 아름다움에 기여하는 이들의 시적 비중도 크리라는 기대가 높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처럼 실제 시에서의 현상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말의 아름다움으로서 자리하는 비중에 비해 시의 아름다움으로서 자리하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그만큼 낮다. 시의 말 고르기(poetic diction)에 비추어서나 수사법 체계에 있어서나, 이들의 시적 운용은 말의 아름다움으로서 자리하는 만큼의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2. 두 가지 미학적 기능

  의성어·의태어가 말로서의 아름다움만큼 시의 아름다움으로서 전면에 도드라질 수 없다는 것, 그것도 감각적 재현의 아름다움이라는 특수한 표현 영역에 제한된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다시 주목해야 할 두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들로부터 우리는 다시금 이들이 수행하는 두 가지 중요한 시적 기능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곧 ‘형상적 기능’과 ‘유희적 기능’이 그것이다. 이들은 의성어·의태어가 시에서 수행하는 두 가지 중심되는 미학적 기능으로서, 물론 어느 쪽이나 기본적으로는 위의 두 특성을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들에 관여하는 정도는 서로 달라서, 형상적 기능이 주로 전자와의 관련 속에서 수행되는 기능이라면 유희적 기능은 주로 후자와의 관련 속에서 수행되는 기능이라 할 수 있다.
  形象的 機能은 모든 시의 언어가 본질적으로 시적 형상성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의성어 의태어에만 특별히 한정하여 이야기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시의 언어가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형상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에서, 의성어·의태어로서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이고도 기본적인 미학적 기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의성어·의태어 특유의 감각적 재현에 의한 형상성의 구현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종류의 시적 언어와 구별된다.

冬至ㅅ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春風니블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오신날 밤이여든 구븨구븨 펴리라
----黃眞伊 (심재완, ‘역대시조전서’: 894)
  전통적 기다림의 정서를 가장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황진이의 이 시조는, 의성어·의태어가 수행하는 형상적 기능의 성공적인 예로서도 한 절정에 서 있다. 흔히들 이 시에서 기다림의 애절한 정서가 생생한 현장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탁월한 시적 효과로서, ‘시간의 공간화’를 대표적으로 손꼽는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의 공간화 장치를 통해 창출되는 이러한 시적 효과의 핵심적 기능이 다름 아닌 ‘서리서리’와 ‘구비구비’에 놓여져 있음도 아울러 주목해야 할 것이다. ‘긴 겨울밤을 한 자락 잘라 두었다가 임이 오시는 날 밤에 펴리라’는 이 시의 주지는 곧 ‘기다림’으로 집약될 수 있으며 , 기다림은 또한 시간의 공간화를 통해 고도의 시적 형상성을 획득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기다림이 환기하는 애틋한 정감의 세계, 시간의 공간화에서 감지할 수 있는 서정 자아의 가녀린 사랑의 숨결은, 전적으로 ‘서리서리’와 ‘구비구비’의 몫이다.3) 기나긴 겨울밤을 잘라 ‘서리서리’ 포개어 넣는 모습에서 엿보이는 애틋한 기다림의 정념, 임 오시는 밤에 그것을 ‘구비구비’ 펼쳐 내려는 모습에 내비치는 애틋한 사랑의 소망은 곧 우리로 하여금 잔잔한 감동의 파문에 젖게 하는 시적 정감의 원천인 것이다.
  황진이의 시조가 이처럼 대상의 시각적 재현에 의한 의태어의 형상적 기능에 의존하고 있다면, 아래의 현대시는 대상의 청각적 재현에 의한 의성어의 형상적 기능에 의존하고 있는 좋은 한 예가 될 것이다.
푸른 잎 이들대는 잎이 넓은 떡갈나무, 오월에도 치워 떠는 파들대는 사시나무, 키가 큰 물푸레와, 풍, 솔, 밤나무 옷나무와, 머루, 다래, 어름, 칡, 댕댕이 넝쿨들이, 푸른 산 돌 바위 위로 얼크러져 오르는데, 삐이 호이, 비이 호이, 홀로 우는 새의 소리…… 머언 산에는 뻐꾸욱, 뻐꾸욱, 울며 오는 뻐꾹 소리…… 또, 물소리…… 돌을 씻고 돌틈으로, 돌돌돌 쪼로로록 흘러오는 물의 소리……
---박두진, <햇볕살 따실 때에> 셋째 연(‘해’, 1949)
  초기 박두진의 시 특유의 굵고 열정적인 호흡이 4보격 기조의 산문체 리듬 속에 함께 어우러져 있는 시다. 열정적 호흡과 연속적 리듬이 시의 흐름을 더욱 급박하게 몰아치고 있지만, 군데군데 찍힌 쉼표와 말줄임표가 빈번히 이를 차단하고 있어, 시의 리듬이 마치 급격한 소용돌이에 휘말린 듯 얼크러진 모습을 하고 있다. 의성어의 형상적 기능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할 바는 바로 이 리듬에서 보이는 얼크러진 모습이다. ‘얼크러짐’의 문제는 리듬의 차원에서만 아니라 심상의 차원에서도 중요성을 지닌 시 해석의 중심 고리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 전체는 오월의 청산, 푸름으로 약동하는 대자연의 싱싱한 생명력을 온몸으로 껴안으려는 서정자아의 끝없는 열망이 토로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셋째 연은 온몸으로 껴안고자 열망하는 청산 자체, 오월 신록의 약동하는 생명력 자체를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셋째 연에서 노래하는 ‘약동하는 생명력’은 시에 열거된 갖가지 나무나 덩굴류, 갖가지 새소리나 물소리들에서 창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들 자체보다 이들이 함께 덩이져 분출하는 얼크러짐의 역동적 심상에서 나온다. 전반부(처음부터 중간의 ‘……오르는데’까지)는 갖가지 나무와 덩굴류가 서로 ‘얼크러져 오르는’ 시각적 심상을 통해서, 후반부(‘삐이 호이’에서부터 끝까지 )는 갖가지 새소리와 물소리의 배음들로 얼크러진 청각적 심상을 통해서 형상화되는 것이다. ‘삐이 호이’, ‘비이 호이’, ‘뻐꾸욱 뻐꾸욱’, ‘돌돌돌’, ‘쪼로로록’등의 의성어들은 곧 대자연의 소리가 함께 소용돌이치며 분출하는, 약동하는 생명의 소리 그 자체인 것이다.
  이에서 우리는 의성어·의태어의 형상적 기능이 시적 인식이나 주제적 의미의 형상화보다 이들에 활력과 현실성을 부여하는 시적 정조의 조성과 더 유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4) 이런 사실은 형상적 기능이 위의 예들에서처럼 시의 아름다움 조성에 주도적 구실을 맡아 해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은연중 암시해 준다. 대상의 감각적 재현만으로 시적 정조를 환기한다는 것은 극히 제한된 시의 일부분 안에서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형상적 기능이 수행하는 정조의 환기는 시의 전체적 국면으로서보다 부분적 국면으로서, 주도적이기보다 주변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기능이 주도적 구실을 하는 경우는 시의 감각성을 특히 중시하는 童詩나 일부 民謠詩를 제외하고는 대단히 드물다. 대부분은 한두 개의 의성어·의태어로써 특정 부분의 정조 조성에 주변적으로 관여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5)
  遊戱的 機能은 형상적 기능의 경우와 달리, 다른 종류의 시적 언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의성어·의태어 특유의 개별성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져 보이는 기능이다. 다시 말해 유희적 기능은 ‘대상의 감각적 재현’이라는 시적 언어로서의 기본 특성 가운데에서, 대상의 ‘재현’(representation)보다도 차라리 의성어·의태어 특유의 ‘감각성’이 미학적으로 더 전면에 나타나는 기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에는 한두 개의 의성어·의태어보다 여러 개가 집합적으로 --혹은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말놀이 식의 語戱性을 기본적으로 그 배면에 깔고 있다. 가장 전형적인 예는 아마도 아이들의 전래 동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먹으나 입으나 둥-둥-
벗으나 굶으나 둥-둥-
둥그대 당실   둥-둥-
-제주 지방 전래 동요(박두진 편, ‘한국 전래 동요집’:470)
  여럿이서 우는 아이를 놀려댈 때 부르는 제주 지방의 유희요로서, 노래의 초점은 매 행마다 반복되는 의성어 ‘둥-둥-’에 집중되어 있다. 우는 아이를 두고서 행하는 놀림의 동작이나 표정도 여기에서 일어나고, 놀림의 언어 행위 자체도 이에 함축되어 있으며, 놀이로서의 음성 상징 효과 역시 이에서 창출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의 어희성은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엉엉, 앙앙 등)를 둥둥 울리는 북소리로 대치하고, 북소리 또한 아이들 귀에 익숙한 어른들 민요인 ‘둥그레 당실’과의 상호 텍스트성 속에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세겹 네겹의 중층성을 지니기까지 한다. 아이들은 곧 몇 겹으로 교직된 이 ‘둥-둥-’의 어희성 자체, 감각성 자체를 즐긴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어희성이 시의 전면에 부상할 때는 시적 관심도 아울러 이에 놓이기 때문에, 그 성격 또한 자연히 말의 감각성 자체를 즐기는 유흥적인 데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짙다.
우희 웃둑 션  소나무불젹마다 흔들흔들
올에 셧 버들 무음일 죠셔 흔들흔들
님그려우눈물은 올커니와 닙코어이 무음일 셔 후루룩 빗쥭 니
-작자 미상(심재완, ‘역대시조전서’: 2563)
  사실 이 사설 시조는 초중장과 종장 사이의 느슨한 거리 때문에 무엇을 노래하려 한 것인지 그 뜻을 곧바로 읽어 내기가 어렵다. 잿마루의 소나무와 개울의 버들이 흔들리고 있는 모양(초중장)과 임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 콧물이 뒤범벅된 모양(종장)이, 하나의 시 문맥 속에서 자연스럽게 통합될 만한 시적인 어떤 필연성을 찾기가 매우 힘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는 쌍쌍의 꾀꼬리와 외로운 나를 대립시킨 ‘黃鳥歌’식의 비극성에 대한, 일종의 희극적 패러디임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우선 잿마루의 솔과 개울의 버들이 맞추어 흔들리는 충족(화합)의 세계와, 임 그리는 슬픔에 눈물 콧물로 범벅진 여인의 결핍(이별)된 세계 사이의 대립이 있다. 그러나 시의 초점은 이러한 충족과 결핍, 화합과 이별이라는 세계의 대립성 자체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흔들흔들’과 ‘후루룩 빗쥭’의 어희적 대립에 , 이들의 대립이 만들어 내는 말놀이의 희극성에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초점의 이동은 곧바로 충족과 결핍 사이의 팽팽한 긴장 관계를 풀어 뜨리면서, 긴장된 대립이 불러일으키는 세계의 심각성까지 와해시켜 버린다. 초중장과 종장 사이에서 보이는 의미론적 거리, 종장에서 보이는 인물의 대상화와 희화화, 비극성의 희극적 전치로부터 유발되는 방관적 비웃음 등은 곧 이로 말미암은 현상인 것이다. 세계의 심각성으로부터 벗어나서, 풀어진 눈으로 바라본 세계의 가벼움을 즐기고자 하는 유흥적 성격이 그대로 시에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6)
  이런 예들은 유희적 기능이 작품 전체의 성격을 주도해 나가는 한 극단에 서 있는 경우라 할 수 있지만, 관여의 정도가 크든 작든 기능의 독특함 때문에 유희적 기능은 형상적 기능에 비해 쉽게 눈에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를 선호하는 범위 또한 비교적 분명하여, 전래 동요, 민요, 잡가, 사설 시조, 평민 가사, 판소리 등 주로 기층민 향유의 구술성이 강한 전통 장르에서 빈번히 발견할 수 있다. 대신 문자문학으로서의 창작성이 강한 상층의 사대부 시가나 현대시에서는 형상적 기능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호도가 낮은 편이다. 따라서 의성어·의태어의 유희적 기능은 원천적으로 기층민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적 언어로서의 세련성보다 말 그 자체의 감각적 아름다움을 즐기려는 기층민의 투박하고 소박한 미의식이 이의 미학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의 언어는 늘 어느 한 굴레에 얽매이려 하지 않는 광대무변의 시적 자유를 꿈꾸는 만큼, 형상적 기능과 유희적 기능이라는 이들 두 미학적 기능 또한 언제나 자기 고유의 개별성만을 고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기능을 분별 짓고 경계를 구획하는 것은 정작 이들의 미학적 기능을 좀 더 체계적으로 이해하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몫이지 시가 소망하는 것은 아니다. 시(시인)는 오히려 두 기능의 분별의식을 넘어선 곳에서 끊임없이 두 기능의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한다. 그러한 경계 무너뜨림을 통하여 유희적 기능이 단순한 유흥성을 넘어 형상성까지 획득해 나가는 한 양상을 우리는 다음의 평시조에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金鳥玉兎드라 뉘 너를 나관
九萬里長天에 허위허위 단이다
이후란 十里에 한번식 쉬염쉬염 니거라
-작자 미상(심재완, ‘역대 시조 전서’: 383)
  초장의 金烏와 玉兎가 해와 달의 비유어임은 중장의 九萬里 長天에 미루어 곧바로 유추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일차적으로 우리는 이 작품이 끝없이 떴다가 지는 해와 달의 쉬임 없는 운행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 그것도 대자연의 장엄한 운행을 ‘허위허위’와 ‘쉬엄쉬엄’의 어희적 대립을 통해 희화적으로 비속화하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시 전체가 마치 허튼 농담을 하듯 해와 달을 희롱하는 희극적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는 것 등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이런 해석은 물론 위의 사설 시조에서 보듯 유희적 기능이 주도적 구실을 하고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렇게 간단히 해석될 단순한 허튼 농담만은 아니다. 해와 달의 쉬임없는 운행은 자연의 문제로 해석되기보다 차라리 인간사를 寓意的으로 표현한 인간의 문제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 서면 작품의 성격 또한 달리 규정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그것은 대자연의 장엄한 운행을 희롱하는 허튼 농담이기는커녕, 인간사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거나 인간적 욕망의 해학적 표현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해와 달이 무엇에 쫓기듯 ‘허위허위’ 다닌다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무엇에 쫓기듯 서두름으로 가득 찬 각박해진 인정 세태의 알레고리일 가능성과, 쫓기듯 빠르게 흘러가는 무정한 세월의 알레고리일 가능성이 그것이다.7) 이에 따라 ‘쉬엄쉬엄’ 다닌다는 것 또한 느긋함과 여유로움의 회복을 바라는 강한 현실 의식의 반영일 가능성과 세월이 더디 오기를 바라는 - 따라서 늙음이 더디 오기를 바라는 - 간절한 인간적 욕망의 표현일 가능성이 공존한다. 이런 해석의 문맥에 서면 ‘허위허위’와 ‘쉬엄쉬엄’의 시적 기능 역시 이중적으로 해석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이들의 유희성을 부인할 수 없으나 동시에 이들이 수행하는 형상적 기능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쫓기듯 애써 도망가는 모습을 생생히 재현하고 있는 ‘허위허위’와, 여유의 회복이나 시간의 지체에 대한 화자의 강한 바램까지 함께 투사하고 있는 ‘쉬엄쉬엄’의 형상성은 , 두 모습의 묘한 대비를 통해 불러일으키는 희극적 유희성 못지 않게 시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물론 창작성이 강할수록 더 적극적이다. 형상적 기능과 유희적 기능의 융합을 더욱 적극적으로 밀고 나간 전형적인 한 예를 우리는 다음의 사대부 시조에서 볼 수 있다.
히히 히히 히히 히히
이러도 히히히히 저러도 히히히히
양에 히히히히 니 일일마다 히히히로다
-金得硏, <山中雜曲> 53수 중 제41수 (‘葛峯先生 遺墨’)
  작품의 문면이 온통 ‘히히-’로 뒤덮여 있어 언뜻 보기에 무의미한 언어 유희의 극단적인 한 단면을 보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해서 보면 이것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치밀한 계산에 의해 쓰여진 심상찮은 措辭法임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무수히 반복되는 ‘히히-’가 사실은 중층적 의미를 지닌 語辭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물론 웃음소리를 흉내낸 의성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한자어 ‘喜’의 우리말 음독자이기도 하다.8) 따라서 ‘히히-’는 웃음소리(의성어)로서의 ‘히’와 기쁨(비의성어)으로서의 ‘喜’를 동시에 뜻하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의성어로서의 유희적 기능과 비의성어로서의 형상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이중적 기능까지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러나 ‘히히-’가 이런 이중성을 지녔다고 해서 , 그것이 웃음과 기쁨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문자 그대로의 즐거운 향연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계열의 ‘하하’ ‘허허’ ‘호호’ ‘후후’ 등에 비하여, ‘히히-’는 무언가 짓궂은 음모를 담은 듯한 음험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의 웃음은 기쁨(喜)의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는 즐거움의 정조를 기본적으로 바탕에 깔고 있기는 하되, 그것이 순수한 즐거움을 넘어 무언가를 겨냥한 비판적 어조까지 함께 담고 있는 웃음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이중적 웃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 이 시조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는 점에 있으나, 이 역시 해결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이 53수로 이루어진 연시조 <山中雜曲> 중의 1수이며, <산중잡곡>은 또한 자연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전형적인 江湖時調에 속한다는 사실이 해결의 단서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16,7세기 사대부들의 모든 강호시가가 그러하듯, <산중잡곡>이 반복해서 노래하는 자연 합일의 즐거움 역시 모든 것으로 충만된 진정한 의미의 자족적 즐거움인 것은 아니다. 자연과 사회를 철저히 연속적 관계로 인식하려는 것이 사대부적 자연관의 기본 명제인 만큼, 9) 그러한 자연 합일의 즐거움에는 어떤 형태로든 열악한 사회에의 근심이 끊임없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10) 조화로운 자연과의합일을 구가하는 즐거움에 끼어 들 수밖에 없는 조화롭지 못한 사회에의 근심, ‘히히-’가 던지는 이중적 웃음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이르면 시적인 유희성은 이미 의성어·의태어의 기능을 넘어 드넓은 시적 상상력의 공간으로 비상하면서, 무겁고 진지한 세계의 심각성까지 수용하고 있다.


3. 어학적 관심과 시적 관심의 거리

  한 사건을 놓고 각자가 놓여 있는 처지나 입장에 따라 얼마나 다른 해석이 가능한가를, 우리는 매일의 일상사를 통해 무수히 겪고 보면서 살아간다. 일상사의 일이야 얽힌 이해 관계 때문에 객관적 해석의 시각이 발붙이기 어려워서라고 할 수 있지만, 객관성을 생명으로 하는 학문의 세계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지식의 구조가 복잡해져 학문의 전문성에 대한 요구가 커지는 정도에 맞추어, 대상에 대한 해석 관심과 시각의 차이도 더욱 골이 깊어지고 있다. 이런 사정은 다같이 언어 문제를 중심부에 놓고 다루는 어학과 문학에서 역시 크게 다를 바 없고, 의성어· 의태어를 바라보는 어학적 관심과 문학적 관심에서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이 글 또한 의성어·의태어를 문학적 관심에서 철저히 시의 언어로서 다루어 왔으며, 그런 만큼 시각의 차이 또한 더 깊은 골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셈이다.
  이 깊은 골을 메워야 할 필요성, 상호 대화의 통로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야 물론 어제오늘 제기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골을 메우려는 시도나 상호 대화의 시도 또한 어제오늘부터 있어 온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도가 오히려 더 깊은 골을 만들고 더 높은 벽을 세우는 결과를 빚고 마는 현상, 주변에서 흔히 겪고 접하는 이 아이러니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이라 해야 할 것인가. 의성어·의태어를 문학적 관점에서 철저히 시의 언어로 다루어 온, 따라서 골을 메우는 일과는 상반된 방향에서 논의해 온 셈인 이 시점에서 필자가 강조할 점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이 깊은 학문의 골을 메우는 작업, 대화의 통로를 만드는 일은 도리어 그 골을 더욱 깊이 파는 데서 시작해야 하리라 본다. 골의 깊이를 명확히 인식하는 일은 곧 쌍방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일과 통하는 까닭이다.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지만, 시각의 차이로 말미암아 일어난 잘 알려진 이야기로서 실마리를 풀어 나가기로 하자. 필자도 그러했고 오늘날도 입문기 아이들이면 으레 배우기 마련인 유명한 동요로서 <산토끼>라는 노래가 있다. 1학년 때 학교에서 배웠는지 귀동냥으로 익혔는지 워낙 오래된 일이라 기억조차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그때의 또래들도 이 동요를 다른 어느 노래보다 일찍 익혔던 것 같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를 신나게 불러대던 열기는 만화 영화의 주제가나 시엠송, 유행가에 짓눌린 요즘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뜨거웠다. 더욱이 전쟁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앉고 학교 교육이 제자리를 잡아 나가면서, 이 노래는 귀엽고 깜찍한 산토끼 흉내의 무용곡으로 정착되어 오랫동안 꼬마 아이들의 더욱 큰 사랑을 받아 왔다. 그런데 정확히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나 - 아마도 60년대가 아니었나 생각되긴 하지만-- 이 동요의 노랫말 가운데 단 한 부분이 바뀌었다. 의태어 ‘깡충깡충’이 ‘깡총깡총’으로 고쳐진 것이다.
  이와 꼭 같은 사연을 가진 다른 한 사례를 우리는 또 <학교 종>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또한 예나 지금이나 입문기 아이들이면 으레 배우기 마련인 노래로서, 선후를 따진다면 <산토끼>와는 버금을 서러워할 만큼 일찍 배우는 동요이다. 지금은 시골이나 도시나 거의 鍾이 사라져 아이들에게 큰 실감을 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70년대까지 국민학교에 다녔던 사람이면 교무실 앞에 매달린 종에 대한 감회는 남다를 것이다. 처음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그것도 지금처럼 유치원 교육이 일반화되지 않은 시절에 첫 공적인 학교 생활을 경험하는 코흘리개 아이들에게 울리는 종소리의 위력을 유감 없이 잘 들러내 주고 있기에 더욱 널리 애창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산토끼>와 비슷한 시기에 노랫말이 바뀌었다. ‘학교 종이 땡땡 친다.’가 언제부터인가 ‘학교 종이 땡땡땡.’으로 바뀐 것이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 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두 동요의 노랫말을 바꾸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몇몇 국어 학자들의 드센 항의 때문이었다고 한다. ‘깡충깡충’은 모음조화에 어긋나고, ‘학교종이 땡땡 친다’는 ‘치다’라는 타동사의 주어로 無情物이 올 수 없다는 것이 항의의 주된 내용이었다고 한다. 항의를 한 분들이 국어 학자이든 국어 교사이든 또는 국어 애호가이든 간에, 어쨌든 그러한 내용의 항의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로 말미암아 노랫말이 고쳐지게 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던 것 같다. 1988년에 개정된 표준어 규정에는 모음조화에 어긋나는 ‘깡충깡충’이 오히려 표준어로 복권되고, ‘학교 종이 땡땡 친다’도 能格이나 제로접사의 이론에 의해 엄연한 문법적 문장으로 인정받는 오늘날 국어학의 현실에서 보면 , 지난날의 이러한 수정 소동은 한 때의 웃지 못할 난센스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가 새삼스레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것은 지난날의 아픈 상처를 다시 들추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필자가 문제 삼는 것은 어학적 타당성 문제가 아니라 문학적 타당성의 문제다. 적어도 어학 교육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런 항의도 어느 정도 나름대로의 타당성은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가 된 대상이 모든 언어 사실을 다 수용할 수 없는 학교 문법이고, 그조차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입문기 어린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국민학교 1학년에 이런 글이 나온다는 것이 오늘날이라고 해서 어학적으로 문제되지 않을 이유가 없겠기 때문이다.11)   그러나 국민학교 1학년 교과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언어 교육을 어학 교육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이런 논법이 안고 있는 오류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도 명백히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산토끼>와 <학교 종>은 일상어가 아니라 노래이며 산문이 아니라 시(동요)다. 따라서 미적 상상력의 논리가 중심인 시를 문법적 논리에 따라 일방적으로 재단해 버릴 때 일어날 현상은 뻔하다. 그것은 시가 불러일으키는 미적 상상력을 봉쇄하여 결과적으로 시를 非詩的으로 몰아가는 현상을 초래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깡충깡충’을 모음조화의 논리에 따라 ‘깡총깡총’으로 고친 데서 제기되는 문제점이 바로 이러한 사정을 잘 설명해 준다. 물론 현실 음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어법의 논리만 따르려 한 것을 반성하는 입장의 현행 표준어 사정 원칙12) 도 문제점 해결의 한 대응 방안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역시 문제 해결의 핵심을 비껴 가기는 마찬가지다. ‘깡충깡충’이 모음조화의 원리를 벗어나서 현실 음으로 굳어진 ‘깡총깡총’의 변형이라고 보는 것 역시 일방적인 어학적 관점의 해석으로 흐를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깡충깡충’을 ‘깡총깡총’의 변형으로 보기 이전에, 우리는 그것이 작고 밝은 느낌의 ‘깡총깡총’과 크고 어두운 느낌의 ‘껑충껑충’이 합성되어 ‘깡총깡총’과 다른 어감을 창출해 낸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토끼는 앞다리가 짧고 뒷다리는 긴 데다가 이례적으로 큰 귀를 가진 신체적 불균형성이 유난히 눈에 돋보여 더욱 깜찍한 동물이다. 따라서 그 뛰는 모습 역시 작고 아담한 느낌의 ‘깡총깡총’ 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한 감이 있다. 곧 작게 크게 뛰는 변화의 모습과 장난기를 느낄 수 있는 앙증스러운 뜀박질의 표현에는 ‘깡충깡충’이 훨씬 더 큰 생동감을 준다. ‘깡충깡충’이 불러일으키는 이런 어감을 무용으로 實演하면서 가르친다면, 넘치는 언어의 생동감과 시적 상상력의 세계에 아이들은 무한한 즐거움을 느끼며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 종이 땡땡 친다’를 ‘학교 종이 땡땡땡’으로 고친 것 역시 사정은 다를 바 없다. 고친 문장이 ‘학교 종이 땡땡 친다’를 非文으로 보고, ‘학교 종이 땡땡 울린다’를 운율에 맞도록 서술어를 생략한 형태라 할 수 있지만, 이 역시 어법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학교 종이 땡땡 친다’는 말이 ‘기차가 달린다’는 예에서와 같이 적어도 우리들의 언어 직관에 비추어 별로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에 유념하도록 하자. 물론 그것 역시 이를 비문으로 보지 않고 문법적 문장으로 보려는 최근의 어학적 논리를 원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문학적 논리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학교 종이 땡땡 친다’의 자연스러움을 형태론적 자질의 문제로서 따지기 이전에, 우리는 그것이 일종의 물활론적 사고가 투사된 ‘鍾의 인격화 현상’(personification)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의 사고는 기본적으로 사물에 인간적 속성을 부여하는 인격화 성향이 강하다. 세계의 사물 현상을 마치 생명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인 것처럼 지각하려는 것이 童心的 思考의 기본 특성인 것이다. 그리하여 종은 언제나 땡땡 울리기만 하는 무정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땡땡 치기도 하는 유정물로서도 존재할 수 있다. 첫 학교 생활에서 경험하는 종의 위력, ‘땡땡’ 치는 종소리 한번에 수백 명이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 그 마력적인 힘의 시적 상상력이 바로 이 짧은 한 구절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논의가 좀 장황하게 길어졌지만, 필자가 말하고자 한 논점은 두 사례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이미 거의 다 드러난 셈이다. 한 대상을 놓고 이를 바라보는 시각이 문학과 어학 사이에 얼마나 크게 다른가, 쌍방의 학문적 특성에 무관심할 때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이 어떤 성질의 것인가, 관심의 차이로 패인 골의 깊이를 안다는 것이 논리적 객관성을 확보하는 데 오히려 얼마나 더 유리한가 등의 문제를 문학적 시각에서 헤쳐 보려 한 것이 필자의 주된 의도였기 때문이다. 어학적 관심이 주로 언어 현상의 배후에 놓인 랑그의 문제에 두어지는 것과 달리 시적 관심은 오히려 빠롤의 문제에 두어진다. 따라서 어학이 의성어·의태어의 언어적 자질이나 법칙성에 관심을 두어 이를 엄정한 층위에 따라 체계화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반면, 시는 이들의 심상이나 감각적 재현의 기능에 관심을 두어 살아있는 언어로서의 미적 상호 작용 효과를 탐색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이런 까닭으로 이들에 대한 시적 관심은 의성어·의태어 자체보다 오히려 이들의 미적 효과에 놓여지므로, 경우에 따라 그 개념이나 범주 틀까지도 서슴없이 뛰어 넘어 버린다.
  의성어·의태어를 비교적 즐겨 사용하는 시인으로 알려진 김억의 아래 시가 그러한 사정을 잘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봄바람 하늘하늘 넘노는 길에
연분홍 살구꽃이 눈을 틉니다.
 
연분홍 송이송이 못내 반가워
나비는 너흘너흘 춤을 춤니다.
 
봄바람 하늘하늘 넘노는 길에
연분홍 살구꽃이 나부낍니다.
 
연분홍 송이송이 바람에 지니
나비는 울며울며 반겨 듭니다.
-金億, <연분홍 송이송이> (‘詩歌集’,1939)
  아마도 처음 읽는 분들에게는 이 시가 의성어·의태어를 유난히 많이 사용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될 것이다. 1연과 3연의 둘째 행에서 거듭 반복되는 ‘구꽃이’를 제외하고는 작품 전체에 걸쳐 둘째 음보를 고정적으로 의태어로 채우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논리적으로 따져 들면 그러한 첫 인상과는 달리 의태어의 사용이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과 더불어, 도대체 의태어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의문까지도 품게 될 것이다. ‘하늘하늘’(1,3연의 첫째 행)과 ‘너흘너흘’(2연의 둘째 행)이 의태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송이송이’(2,4연의 첫째 행)와 ‘울며울며’(4연의 마지막 행)까지도 의태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시를 읽으면서 의태어에 대한 생각을 주로 이런 방향으로 진행시켜 나간다면, 그의 관심은 분명히 시적인 데서 출발하여 어학적인 데로 넘어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어학적으로 본다면 ‘송이송이’와 ‘울며울며’는 명백히 상징어도 의태어도 아니다. 전자는 ‘송이’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부사이고 후자는 ‘울다’라는 동사의 부사형이다. 양자가 모두 부사어의 기능을 가진 疊用語의 형태를 띤다는 점, 동작이나 모양을 본 뜬 시각적 재현의 기능이 강하다는 점에서는 의태어인 ‘하늘하늘’‘너흘너흘’과 유사하나 그 어학적 기저는 이처럼 질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적어도 어학적 관점에서라면 이들은 결코 동렬에 두고 논의할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문학적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들의 사용이 주로 개별적 심상의 시각적 재현을 돕는 단순한 장식적 수사 효과에 머물고 있다는, 시적 형상성의 수준이 문제가 될 수는 있을지라도 의태어냐 아니냐는 식의 개념 범주나 자질은 아무런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상징어이든 아니든, ‘송이송이’와 ‘하늘하늘’이 동일한 시각적 심상의 재현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한 그들은 전적으로 동렬에 서 있다. 이 시를 처음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의태어가 유난히 많다는 인상은 이런 의미에서 전적으로 시적인 것이다.
  시는 늘 이처럼 의성어·의태어의 영역을 확장하거나 파괴하면서 스스로의 독자적 세계를 키워 나가려 한다. 기존의 틀에 묶이지 않고 어디에나 자유롭게 비상하고자 하는 이러한 시의 꿈, 이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늘 새로운 탄력으로 살아 움직이는 언어의 풍요로움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