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상상력과 언어학적 지식
언어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교양 국어, 특히 문학을 가르쳐 본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언어 전공자들은 언어 현상이 문학 전공자들에 의해서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 또는 설명된다는 사실에 너무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학 전공자들의 언어학 영역 침범, 즉 동물의 세계에서나 있을 법한 영토 싸움을 일으키자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언어학과 문학이 근본적으로는 언어를 다루는 학문이므로 명확한 구분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에 나타난 언어 현상을, 충분한 언어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삼지 않고, 단지 문학적 상상력만으로 분석하고 또는 설명하고 있음을 볼 때 언어학자들은 무색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 글의 첫째 목적은, 지나친 상상력보다는 정확한 언어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문학 작품이 해석되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함이요, 둘째 목적은, 언어 전공자들은 문학 전공자들의 해석에 무관심하지 말고, 문학 작품 해석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분야도 활발히 연구해야 함을 환기하고자 함이다.
먼저 소설의 분석에서 발견되는 문제를 살펴보자. 어디까지나 '발단'이고, 어느 부분이 '절정'이냐 하는 문제에서 문학 전공자들은 이야기의 흐름, 바꾸어 말하면 의미가 어떻게 발전되느냐만을 기준으로 삼는 듯하다. 달리 표현하면 발단이나 절정 부분에만 나타나는 언어적 특징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작자는 마음속의 의도를 언어로 나타낸다. 즉 감정, 태도, 사상 등은 어떤 형태로든 그 특징이 언어에 나타나게 마련이다. 다음에 논하겠지만 먼저 예를 보이면, 긴장된 상태의 표현에는 짧은 문장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격한 감정으로 말다툼을 할 때의 문장을 들어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언어에 나타난 특징을 문학 작품 해석의 근거로 제시하는 문학 전공자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면 소설의 발단 부분의 구별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자. 발단이란 일반적으로 내용상 배경적 설명이 주를 이루는 부분이다. 따라서 긴장이란 있을 수 없다. 즉 빠른 호흡이 필요치 않은 곳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일반적으로 긴 문장이 사용되고, 시제도 과거 진행형이 사용된다. 동화의 예를 보면, "옛날옛날 한 옛날에 강원도 깊숙한 산골에 수염이 덥수룩한 한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습니다."라는 식으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는 발단부분에서는 '살았다'라는 과거형을 쓰지 않는다. 이 과거형은, 담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사건의 전개에 사용되고 있다. 즉 동사 과거형의 담화적 기능(discourse function)은 이야기를 이끌어(event-line)가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과거 진행형에 적용하면, 과거 진행형의 담화적 기능은 주변적 이야기를 이끌어(nonevent-line)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이 부분이 의미상 배경 설명이기 때문에 '발단 부분'이라고 하는 것보다 이렇게 언어의 담화적 특징을 근거로 제시하여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절정 부분에 나타나는 언어적 특성은 어떠한가 보자. 절정이란 긴장이 최고조를 이루는 부분이다. 언어 표현에도 이 최고조를 나타내는 여러 특징이 발견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동사 대(對) 비동사의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이는 문장이 짧아진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나라의 통계는 없지만, 필리핀의 Ga'dang이란 말로 된 이야기를 보면 절정 부분에서는 동사 대 비동사의 비율이 1:3으로 다른 부분의 1:7보다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긴장되고 호흡이 빠른 상태에서는 요점만 표현하는 간단명료한 문장이 요구됨은 당연하다 하겠다. 둘째는 특정 인물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전개 부분에 나타난 여러 인물 중 부인물들은 다른 부분에 나타나고 절정 부분에는 주인공이 주로 나타나고 있다. 셋째는 시제 전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언어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현재형이 많이 나타난다. 넷째는 대화가 많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셋째와도 관련되는 것으로, 절정에서는 생동감을 나타내야 하는 것과 관련된다. 다섯째, 의성 의태어가 많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여러 언어적 특징이 절정 부분에서 나타나지만 지면상 생략하겠다.
아무튼, 담화 문법(discourse grammar)에서 이야기되는 이런 언어학적 지식을 근거로 문학 작품을 분석한다면 훨씬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수사에서 심증만 갖고 있던 차에 물증이 제시되는 것과 같다 하겠다.
다음은 시의 해석에 나타나는 문제를 살펴보자. 먼저 시의 리듬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 지 알아보자. 어느 교수는 '靑노루'의 다음 구절을 문학적 상상력에 기초하여 멋있게 설명하고 있다.
위 구절의 둘째 행은 '속잎 피는' 부분의 '속'이 장음이므로 3·2조로 시작하여 단숨에 읽히도록 템포가 빠르다는 것이다. 이 빠른 템포는 이 행의 말뜻을 규정하여 열두 구비에 선 '靑노루'가 올라가고 있기보다는 내려오는 느낌을 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템포가 빠르다고 해서 노루가 내려온다고 보는 것이 언어학적으로 타당한가 하는 것이다. 위 구절을 언어학적으로 문장을 분석해 볼 때, 동사 '피다'의 주체는 노루가 아니라 속잎이며, 따라서 이 빠른 템포는 노루가 내려오는 것보다는 속잎이 빨리 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박목월의 자작시 해설집인 '보랏빛 素描'에도 노루의 움직임은 언급이 없다. "'청운사','자하산' 등, 그 고고하고 우아한 세계로 통하는 속세적인 길에 '느릅나무 속잎 피어 가는 열두 구비'가 있고 그 길 위에서 '청노루 맑은 눈에 노는 구름'을 보았던 것이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작품 해석에 있어서, 그것이 통사론적이든 의미론적이든. 일차적으로는 언어 자체의 분석에 충실해야 한다. 의미론적으로 보더라도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을 보려면 그 '노루'는 정지해 있어야 한다. 만약 움직인다면 여간 눈이 좋지 않고서는 노루 눈에 비친 구름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작품 해석에 있어서 언어학적인 지식이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함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하겠다.
다음은 문학 작품에서의 문장 부호의 사용을 살펴보겠다. 문장 부호란 문자 언어가 갖는 여러 단점을 보완하여 음성 언어에 일치시키고자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만약 음성에서 어떤 감탄을 나타냈다면, 이것을 문자로 표현할 때는 !를 써서 음성 언어에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 작품, 특히 시에서는 시인에 따라 문장 부호를 정확히 사용하는가 하면, 때로는 아주 무시해 버리기도 한다. '시문학' 제180호에 "시에 있어서 쉼표, 마침표 등은 어떻게 처리합니까?"라는 설문에 현역 시인 10명이 답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어느 시인은 다음과 같이 문장 부호 무용론(無用論)을 내세운다.
문장 부호가 언어라고 볼 때, 언어 예술인 시에 대한 위의 발언은 너무 지나친 느낌이 든다. 정확한 표현을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에 만들어 놓은 문장 부호가 필요 없다니 말이다.
한편 문장 부호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시인도 있다. 다음의 주장을 보자.
문학 교육의 목적 중의 하나가 국어 사용 능력의 향상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것이 비록 비논리를 속성으로 하는 시일지라도, 정확한 문장 부호의 사용은 잘 지켜져야 한다고 본다. 치열한 시 의식의 배려도 없이 부호를 마구 생략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점이다.
실제 시에 실현된 문장 부호의 생략에 대한 어느 평론가의 비평을 보자.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장만영 시인의 5연으로 된 '달·포도·잎사귀'의 첫 연을 보자.
보통 생각할 때, '순이' 다음에 쉼표나 느낌표가 오는 것이 정상인데 이 시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 평론가의 설명은 '순이'가 뒤의 정경 묘사에 스며들기를 바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순이에 대한 시인의 그리움과 가을밤에 대한 시인은 서정은 그 사이에 어떤 부호도 표시되지 않음으로써 서로 스며들어 하나로 융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시 낭송을 한다고 가정하면, '순이' 다음에는 어떤 형태든 휴지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벌레 종류로서 '순이버래'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낭송을 할 때는 휴지 때문에 순이에 대한 그리움이 가을밤의 서정에 스며들지 않는다고 봐야 하는데 과연 그럴까? 또한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부호가 생략될 경우 동일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언어학적으로 볼 때 '순이버래'로 혼동할 염려가 없기 때문에 부호가 생략됐다고 설명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장만영 시인의 자작시 해설집인 '里程標'에 보면 순이는 한자로 '順伊'로 되어 있어 혼동의 염려가 없다. 따라서 서로 스며들어 융합시키려는 의도로 부호를 생략했다는 것은 지나친 상상력의 소산이 아닌가 한다. 같은 시의 3연을 보자.
이 연에는 마침표가 찍혀 있지 않다. "이것은 '밤'을 길게 소리나게 함으로써 밤[栗]과의 혼동을 피하고, 또 밤을 무한히 열려 있는 것으로 감각하게 하는 듯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국어 맞춤법에 마침표가 없는 경우 길게 읽으라는 규정은 없다. 또 마침표가 없으면 열려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도 보편성이 없는 설명이다. 열려 있음을 꼭 나타내고 싶다면 다른 문장 부호를 만들어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시에서 필요로 하는 새로운 문장 부호가 요구된다면 언어학자들은 그것을 만들 의무가 있다고 본다. 자의적인 해석으로 혼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이 밖에도, 사동화, 피동화, 부정화, 명사화, 복문화, 주제화, 등의 담화적 기능이 무엇인지 고찰하여 문학 작품의 정확한 해석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도 언어학자의 임무일 것이다. 이 문제는 지면 관계로 줄이고 다음 기회에 피력하겠다.
지금까지 필자는 작품 해석이 문학적 상상력보다는 언어학 지식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함을 피력했다. 그렇다고 위의 몇 분들 해석이 틀렸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작품 해석은 개개인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 예술인 문학 작품을 해석하는 데에 언어 자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문학 전공자는 언어학 지식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언어 전공자는 무관심에서 벗어나 문학 작품 해석에 요구되는 분야에 연구의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