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사랑의 고행, 그 그늘 속에서
―― 아버님 환산 선생 추억 ――
1. '한글'지 간행에 관련된 이야기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일찍 돌아온 날이었다. 아버지가 학회에서 집으로 들어오시다가 곧장 되돌아 학회로 나가시는 모습을 보고 나는 마음이 불안했다. 아버지의 얼굴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어두운 기색이 떠돌았다. 그때 우리 집은 화동이었는데 아버지께서 화동에다 땅을 구하시어 똑같은 양옥 두 채를 짓고 뒤쪽으로 두 집의 통용문을 두었으며, 한 채는 우리가 쓰고 또 한 채는 학회로 썼다. 학회에서 아버지의 뒷바라지는 주로 신영철 씨와 이갑 씨였다. 이 두 분은 우리 집에서 숙식을 같이했다. 학회에서 간행한 '한글'지도 그 첫 창간에서부터 끝까지 아버지의 노고의 결정이 아닌 것이 없었으며, 꾸준한 속간도 아버지의 고료와 판권을 판 돈에서 운영되었었다.
그날은 무슨 일로 그러한 어둡고 우울한 표정을 하셨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한글'지 인쇄비와 송료, 기타 비용 문제로 그러셨던 것 같았다. 나는 한구석에서 할머니와 어머니의 눈치만 살피고 있노라니 이갑 씨가 들어와서 무슨 이야긴지 어머니와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어머니가 걱정스런 얼굴로 이갑 씨에게 무어라 하시니 이갑 씨가 부리나케 나가는 것을 보고, 나는 공부도 하는 둥 마는 둥 불안 속에서 얼마를 지냈다. 잠시 후 이갑 씨와 아버지께서 들어오셨다. 그때의 아버지의 모습에는 아까의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진 대신 이갑 씨는 얼굴이 아주 침울해 보였다.
나는 다들 식사를 하면서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일부러 늦게 나가 보니 이갑 씨는 벌써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셨고, 무궁화 언니는 풀을 쑤고 있었다. 내가 밥을 먹고 있을 때 다시 이갑 씨가 종이를 가지고 들어왔고, 뒤따라 누군가가 학회에서 가져온 '한글'지를 안고 들어왔다. 할머니와 어머니와 나, 그리고 뒤따라 들어온 사람은 봉투를 바르고, 큰언니와 이갑 씨는 봉투에 '한글'지를 넣고 아버지께서는 봉투에 주소를 쓰셨다.
그때의 나의 마음은 심히 불편했다. 불안도 하고 불평스럽기도 했고, 또 풀칠하는 것도 달갑지가 않았다. 무궁화 언니의 손은 재빨리 움직였으며, 할머니의 손은 빠르지가 못하고 떠듬떠듬하였다. 나는 공연히 그날 따라 아버지의 기색만을 살피게 되고 왜 그런지 자꾸만 서글픈 마음만이 오갔다. 그런 이유로 그날의 온 식구의 오고간 이야기는 하나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고, 다만 그날의 모습만이 영영 사라지지 않고 똑똑하게 남아 있다.
오직 '한글'지만을 위하여 살아가시는 듯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온 집안 식구가 한 덩어리가 되어 일로매진, 한글에의 길뿐인 듯하였다. 대문 밖을 오가는 수많은 이웃이나 동족도 그러한 모습은 몰랐을 것이며, '한글'지가 무슨 책인 줄도 모르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왜놈이 봤으면 원수처럼 보였겠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웃음을 버리지 않으시던 아버지께서 왜 그날 따라 그런 어두운 그림자를 버리지 못하시고,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시던 가정에서까지 그런 그림자를 일시나마 버리지 못하셨을까? 초연하신 분이 가지는 그 독특한 고고(孤高) 그대로의 고독을 순간적으로 드러내셨던 것일까? 그러나 온 식구가 한 덩어리가 되어, 한편으로는 풀을 붙이고 한편으로는 봉투에다 '한글'지를 집어넣고 그 봉투 겉봉에다 아버지가 손수 주소를 써넣으실 때에는 아까 그 어두운 그림자는 씻은 듯 없어지고 그저 마냥 즐겁기만 하신 듯 보였다. 오직 '한글'에 살다 '한글'로 가신 아버지의 본연의 모습 그것이었던가?
그러나 '한글'지를 봉투에 넣는 이갑 씨의 모습은 침울하기만 한 듯했다. 그 모든 원인은 '한글'지를 간행하기 위한 경비를 마련키 위해 판권을 파셨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서야 알았다.
2. 이중의 외로움과 그 고통
아버지께서는 김해(金海)에서 나셔서 일찍 서당엘 다니실 때, 모든 사람이 다달이 해 오는 떡을 장원하는 사람이 혼자 차지하는 상을 남에게 빼앗긴 적이 없었다. 11세에 벌써 '사서삼경'의 대부분을 읽으셨고, 그 후 대구 계성 학교에서 배우셨으며 또 가르치셨다. 일본에 3년 동안 머무르다 오신 후 3·1운동에 가담하시어 3년의 옥고 끝에 중국으로 망명하시어, 거기서 북경 대학을 졸업하시고 4년 만에 귀국하시어 스승의 길을 밟으셨다.
그 시대에 드물게 학문을 닦으셨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 성격의 심도가 깊은 것은 당연하겠으나, 그 학식의 넓은 범위는 가히 짐작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스승의 자리에 서서 비로소 깨달은 바다.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 것은 방앗골[성동구] 집에서였다.
아버지께서 무슨 원고를 정리하다가 영문(英文) 원고가 나오자 옆에 있던 큰형부가 그것을 읽어 드리려고 하니, 아버지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형부가 든 원고를 보지도 않으시고 유창한 발음으로 그 많은 원고를 그대로 암송하실 뿐 아니라, 다 암송하시고 난 후 그 내용을 이야기하시고, 그 영문이 명문이 될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시는 것을 들었었다. 그날 형부가 놀람과 무안을 겪은 것을 여러 번 이야기한 것을 듣고 나 자신 역시 감탄한 것은 물론, 그 후 아버지께서 영어에 대해서 일절 말씀이 없으셨던 것도 또한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의 재주가 영특하면 영특하실수록, 또 집안에서는 언제나 웃으시고 성내심이 없으면 없으실수록 더 곁에 모시고 싶은 마음이 애절했건만, 아버지는 일생의 3분의 1을 옥살이를 하신 까닭으로 언제나 가까우면서 멀었고, 반가우면서 괴로웠고, 기쁘면서 슬펐고 다정하면서 외로웠다. 천재는 정녕 외로웠으며 그 그늘 속에 사는 가족도 또한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31일째 되던 이듬해 4월 18일, 나는 신동으로 이름난 남편과 결혼했다. 무소부지 사통오달의 남편은 주위에서 그 머리를 칭찬하면 코웃음을 치며, "생이지지? 배우지 않고,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어떻게 알지? 정신을 차리지 않고 부지런하지 못한 탓이지." 하며 무표정으로 답할 때에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보아 왔던 그런 외로움이 남편에게서도 느껴졌다.
그럴 적마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 밑에서, 지금은 남편 밑에서 뼈저리게 느껴온 그 희생의 외로움을 어떻게 위로할 길을 찾기에 애를 썼으나 그것은 언제나 비통의 절망에 빠진 자기를 이끌어 내는 데에 급급하는 결과만을 그치고 말았다.
나는 이러한 순간을 겪을 적마다 남편을 12년 간이나 감옥에 앗긴 내 어머니의 마음을 알고도 남아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이중으로 느끼곤 했다.
3. 스승의 길
스승의 길은 올바른 신조에의 발로요, 그 신조는 하나의 이념의 확립 ―― 곧 개성의 확립이요, 따라서 민족성의 확립이요, 국민성의 확립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의 그 철저한 배일 사상의 고집은 한마디로 하면 그만큼 민족과 국민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나라 말과 또 그 말로 말미암아 창안된 '한글'은 곧 우리 국민의 정신이요 성격으로서, 위대한 성현 세종 대왕의 창조에서 온갖 형로를 거쳐 비로소 아버지의 손에서 마지막 손질이 현실에 맞추어 다듬어졌다 하여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넉넉지 못한 생활에서 온갖 정력과 힘을 다하여 헌신하신 까닭은 오로지 특유한 애국 애족 정신이 그 바탕이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괴벽에 가까우리만큼 철저한 그 예의 하나는, 화동 집에서 연희 전문학교로 출근하시는 데 단 5전의 전차 삯을 왜놈에게 보태 주기 싫으셔서 걸어 다니셨다. 그런데 안국동에서 종로로 빠져 곧바로 서대문으로 가시면 될 것을 안 보려 하면 할수록 곁눈에 들어오는 조선 총독부의 모습이 영상으로라도 떠올라, 일부러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빠져 봉래동을 거쳐 아현 고개를 넘어 학교로 가셨다. 왜놈이 짠 옷감을 입기 싫어 겨울에는 명주, 봄가을에는 무명, 여름에는 모시의 옷차림으로 한결같이 다니신 것은 오로지 학자로서의 규범을 과시하려는 속셈이 아니라 스스로 그 정신적 의무의 수행에서 오는 결과로 나는 본다.
의무의 수행은 공포요, 고통이요, 엄격하게 따져서 죽음마저도 그 하나가 아닐까? 이 말은 나 자신이 교단에 설 때 내 남편이 나에게 일러 준 말이다. 남편 역시 광주 학생 사건 이후 줄곧 일관된 신조로 자기 일개인을 조국에 바치고 살아온 신념에서 첫 강의에 나가는 나에게 곰곰 달래듯 이야기한 바 있은 후 나는 내 아버지의 그 철저하셨던 언행 하나하나가 새롭게 느껴졌고, 우선 자기를 사랑하고 아끼고 가꾸는 데 있어서의 신조로 굳게 결심한 적이 있다. 또 나 자신과 아버지와 남편과 가정과 민족과 조국을 위하여 죽을 것을 맹세했다.
그래서 첫 출근 날서부터 미아리에서 배화 여고까지의 거리가 아버지께서 걸으신 거리보다는 그래도 가깝기에 걸어서 다녔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하시듯 조선 총독부가 아닌 중앙청을 안 보려고 할 필요가 없어졌다. 첫날 중앙청 앞을 지날 때 나는 옆을 스치는 시민의 눈을 피해 저절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출 길이 없었고, 그 중앙청 꼭대기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해가 아버지가 가신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아버지가 걸으신 길이 비록 가시밭길이기는 하나, 아버지 자신으로서는 오히려 거기에 보람을 느끼셨고 오히려 만족하셨으리라. 어떤 달 밝은 한밤 2시 경에 서대문 경찰서 형사들이 아버지를 찾아와서 연행할 때, 형사들이 택시를 타고 가자 하니 아버지께서는 "달도 밝고 시원도 하니 걸어가자."라고 하시며 태연히 가신 후, 나는 2년 간 제대로 웃어 본 적이 없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속에 잠겨 살았다. 2년 후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왜놈이 준 무서운 선물을 가슴속 깊이 안고 오셨다. 주무시다 기침만 하시면 온 방이 피로 물드는 토혈증으로, 온 식구가 총동원되어 먹을 간다, 방을 치운다, 한바탕 난리를 겪어야 하였고, 이 발작은 사흘이 멀다고 일어나 공포와 불안 때문에 어린 마음에도 견딜 수 없는 분노로 나날을 지새웠다.
이러한 고역의 거름으로 일구어진 그 신조 속에서 10리를 더 걷고, 20리를 더 걷는 게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극에서 굳어지면 극으로 풀리듯이, 왜놈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면 강할수록 제자를 대하고 가족을 대하고 친지를 대하는 나의 마음과 태도는 그보다 더 따뜻할 수 없고, 보다 더 다정할 수 없었다. 나는 스승의 길을 천직으로 삼고 그것으로 끝을 맺으려 했으나, 지금은 한 평범한 아내요, 어미의 길을 걷고 있다. 이 길로서도 나는 내가 얻었던 그 사명감을 잊지 않고 수행해 나가리라 생각되어서였다.
4. 12월 8일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8일은 소위 왜놈들의 애국일이었다. 이상하게도 아버지께서 일경에 붙잡혀 가신 날도 8일이요, 돌아가신 날도 일제가 대미 선전 포고를 하여 전쟁을 도발한 8일(12월)이었다. 일제가 8일을 애국일로 정한 이유나 그 정신이 벌써 우습기 짝이 없는 일로, 하필이면 한 달 30일 중에 그 하루인 8일을 애국일로 정했을까?
1년이 365일이 아니라 그 몇 십 배가 된다 해도 그 하루인들 애국을 잊어서야 될 일이겠는가? 하기야 사람의 마음이란 때로는 망각의 일순이 천년의 긴 휴식에 비길 수 있어, 그 순간을 파고드는 마(魔)의 요정(妖精)에 사로잡혀 일신을 망치는 예도 간혹 있기는 하나 그게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나는 우리 아버지에게만은 망각의 일순이란 말조차 용납할 수 없는 어휘라 단정한다. 오직 애국 애족이요, 그 상징의 대표인 '한글'을 위하여 돌아가시기 전, 얼마나 철저하시기에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자식의 이름을 나라꽃인 '무궁화'로 지어 호적에 기재하였을까. 오히려 그것은 왜놈에게 미움을 더 받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무궁화 언니는 여학교에 다닐 때 간편한 교복을 입지 못하고 조동식 교장 선생님의 양해를 얻어 천여 학생 중 단 하나의 까만 치마 저고리의 특이한 교복으로 학교를 다녔다. 또한 한 푼의 교통비라도 왜놈에게 줄세라 수학 여행이란 말조차도 해 보지 못하고 여학교를 졸업하였다. 간혹 눈물을 머금으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아버지께서 감옥에 계셔서 집에 안 계실 때도 한 번도 그 교시를 어기는 바 없이 순종한 무궁화 언니의 그 마음의 깊이는 과연 이름 그대로 무궁한 면이 있어 심복한 나머지, 같이 울먹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할머니의 사랑도 특별히 받았지마는 아버지의 사랑도 각별히 받았다. 내가 사내 동생을 본 것도 그 이유의 하나겠으나, 내 외모가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고, 성격도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 이유에서 더 그러했다.
1943년 11월 말 어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한 열흘 전 일이다. 최현배·김윤경·이극로 세 분 선생님들의 부인들과 어머니 등 여덟 분이 함흥 형무소로 면회를 갔을 때, 우리 아버지의 면모를 보신 최현배 선생님의 부인이 아버지께서 살이 찌고 몸이 좋아지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어머니가 보시기에는 목 부근과 얼굴이 부어 움직이시는 데 불편한 듯 보였을 뿐 아니라, 어머니를 보시고 말씀을 못하시더라고 하셨다. 얼마나 심한 고문을 당하셨기에 그토록 붓고 말을 못하셨을까? 육신의 고통에 정비례하여 마음도 그토록 아프셨기에 모처럼 찾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 말문이 막혔을까? 초연한 것만으로는 억제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어머니도 아버지와 같이 말 한마디 못하시고 집에 와서 우셨다. 어머니로서는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상면이었으며, 그리고 열흘 후인 12월 8일, 아버지는 돌보는 이 없이 외로운 독방에서 그 하고픈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시고 외롭고 쓸쓸히 눈보라치는 새벽 5시에 큰 한을 남기신 채 영원한 길을 떠나고 마셨다.
일제의 재판정에서까지 원고 교정을 쉬지 않고 보시던 그 모습을 ......,
글에 열중한 나머지 출근 시간이 바빠 원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앉으신 자리의 주위를 더듬어 주워 낀 양손의 토시가 색깔이 다른 것도 모르시고 교단에까지 오르셨던 것을 웃기 전에, 먼저 그 의연한 모습에 학생들 스스로 엄숙히 고개를 숙이게 하시던 그 모습을 ......,
강의하시다가 흑판에 쓴 판서를 지우실 때 지우개를 찾기가 바쁘셔서 저고리 자락으로 그대로 뭉개 지우시던 그 모습을 ......,
도수가 심한 근시 안경 속에서 쏘아보시는 눈매의 위엄에 스스로 고개 숙여 무슨 말씀을 기다리게 하시던 그 모습을 ......,
꾸밈도 없고 과장도 없는 담담한 말씀인데도 그 속에서 풍겨 나오는 포근한 훈기로 감싸 주시던 그 모습을 ......,
남이라면 웃지 않고 못 배길 그런 모습마저 웃기는커녕 오히려 숙연함에 돈수 정대케 하시던 그 위풍을 ......,
이제는 다시 대할 수 없는, 영원히 우리 겨레가 잊을 수 없는 12월 8일! 왜놈의 애국일! 우리 겨레로서는 잊을 수 없는 저주의 날, 12월 8일!
5. 비둘기와 종이꽃
어머니께서 함흥에 다녀오신 지 한 열흘 후, 저고리와 바지 한 벌이 이불 한 채만큼이나 되는 보따리를 들고 아우가 함흥엘 가서 면회를 청하니 간수가 머뭇거리다가 아버지의 별세를 전해 주었다. 아버지의 부음을 전해 들은 집안에서는 할머니를 참석시키지 않고 가족 회의를 여는 한편, 밤새워 수의를 만들어 어머니와 딸 삼 형제만 남기고 가족은 모두 함흥으로 떠났다.
위인은 그 전부는 아니라도 흔히 그 자취에 이적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고, 말로가 아니라 실제로 기적에 가까운 현상을 나타내는 경우가 더러 있는 것을 사기(史記)에서도 봤고, 또 구전으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들은 바 있다. 나는 우리 아버지께서 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착실한 아들이요, 남편이며, 아버지였고, 특히 유달리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컸고, 투지가 강했으며, 자기 의무에 대하여는 시간의 여유를 두지 않은 분이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런 아버지에게서 두 가지의 이적이 나타났다.
함흥에 도착한 일행이 이미 가매장한 아버지를 다시 모셔 수의로 갈아입힐 때 처참한 모습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벗겨진 옷 안은 온통 핏자국으로 얼룩졌고 피가 엉겨 맺힌 곳도 있으며 두 눈은 부릅뜬 채이어서 왜놈의 가혹했던 형벌의 현장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가슴 한복판에 빨갛게 맺힌 피멍이 흡사 꽃이 핀 듯이 영롱하여 모두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수의로 모신 다음 염을 모시려 할 때의 모습은 평화로웠으나, 두 손은 따로따로 꼭 쥐어져 있어서 온 가족이 모두 이상하게 여겨 먼저 한 손을 펴 보았다. 그러나 너무 꼭 쥐어져 있어 힘을 주어 풀어 보니, 이 과학 만능 시대에 믿을 수 없는 이적의 하나가 거기서 나타났다.
그 꼭 쥐어진 손에서 하얀 비둘기가 한 마리 날아 올라 사라졌는데,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곳에는 방으로 들어오는 문 하나에 조그만 들창이 하나 있을 뿐이었는데, 창문도 닫혀 있고 문도 닫혀 있었기에 말이다. 확실히 전부가 다 같이 본 비둘기는 온데간데없으니 5, 6명이 제각기 똑같은 환영을 봤다는 사실과, 더구나 손바닥에 비둘기가 감춰질 수 있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이적이 아니겠는가! 모두 이상하여 서로 말없이 잠시 쳐다보다가 또 한 손을 펴 보기로 하였다.
이번에는 모두 정신을 가다듬고 조심하여 손을 펴 보니, 그 안에서 능형(菱形)으로 잘게 썬 종이쪽지가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보였는데 그것도 일순간으로, 떨어져 있어야 할 종이쪽지는 온데간데없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모두 숙연히 말도 없이 묵도를 드렸다는 이야기는 그 자리에 참석했던 가족이 모두 똑같이 하는 말로 오늘까지 우리 가족은 이 이적이 무엇을 상징하며 예고하는 것인지를 아직 풀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후 다시 이상한 이적은 계속되었다. 화장을 모시는 사이 쳐 놓은 차일이 아무도 불 지른 사람도 없었는데 저절로 타 없어졌다.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꿈에 나타나시어 "내가 곧 나갈 테니 책과 원고는 하나도 버리지 말고 그대로 둬 두라."는 간곡한 부탁을 하셨다. 여러 차례 가족의 꿈에 현몽하시어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고 서로 이야기하여 이상하게 여겨 왔는데, 아버지가 별세하신 지 605일 만에 8·15 해방의 민족적 영광의 날은 찾아왔다.
겹겹이 쌓아 둔 원고는 돌아가신 후 그 속에서 박지원의 '도강록(渡江錄)'을 우리말로 새겨 두신 것을 대성 출판사에서 발간하고, '표준 한글 사전'을 엮었다. 그 나머지는 허리띠를 풀지 못하고 반생을 살아오신 어머니께서 그 원고를 볼 적마다 마음이 아프다 하시며 그 많은 귀중한 원고를 모조리 불태워 없애 버리셨으니 안타깝기 한이 없는 노릇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로서 자식된 도리로 죄송하기만 할 뿐이다. 그뿐 아니라 6·25와 더불어 3천여 권의 책과 만여 권의 레코드와 수많은 골동품을 다 버리고 책 세 권, 원고지 300매만 가지고 피란 갔다 오니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다 없어졌으나, 누구에게 한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중에서 제일 아까운 것은 우리나라에서 신문학 이래 발표된 <신문·잡지·단행본 기타> 시라는 시는 모조리 모아 둔 게 없어진 것이다.
오늘까지도 우리는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서 날아가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 능형의 종이쪽지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아직 수수께끼로 남겨 놓고 있다.
6. 메마른 우물 집
방 둘, 마루 하나, 부엌으로 된 초가 사 칸의 오두막집....... 주위에는 집이라고 한 채도 없고 조그만 등 너머에는 방앗골 동네가 있으나 보이지 않고, 큰 길에서 들어오는 어귀에는 왜놈의 초소가 있어 왜병이 총을 들고 서 있는 게 보였다. 그 근처에는 전기가 들어왔으나 우리 집에서는 등잔을 쓰고 지냈다. 6천여 평 가까이 사과나무가 들어섰고, 오얏나무가 세 그루, 배나무가 백여 그루, 겨울이 되어 바람 부는 날에는 사과나무 가지에서 우는 바람 소리 이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
과거에는 드문드문 묘지가 있던 야산이었으나, 아버지께서 사들여 묘지를 이장하고 사과나무를 심고, 집 앞에 우물을 깊게 파고 그 옆에는 닭장을 길게 지었고, 토끼장이 몇 있는 외진 곳, 여기가 우리 집이었다. 그 집에서 광나루 기동차 정거장까지는 십 리가 착실하여 눈보라 치는 겨울에는 이십 리가 무척 멀게 여겨지는 거리였다. 왜냐 하면 강가의 넓은 모래사장을 지나고 백제 때의 토성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푼푼이 모으신 돈으로 학회의 일을 보시면서 쓰이는 비용과 생활 비용을 얻을 길이 없어 마침내 서울 집을 팔아서 이 곳으로 이사하고 과수원을 만드시고, 닭장·토끼장을 만들어 생활의 기틀을 잡으시려고 했다. 손수 심은 과일나무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나 그 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었지만 아버지는 한 알의 과일도 만져 보지 못하셨다. 그토록 애써 만들어 굳건한 터전을 삼으시려 했던, 그 보금자리를 두고, 아버지께서 영영 돌아오시지 못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아버지가 가신 후 우리 집 닭장과 토끼장은 헐어져 가고 우물은 메마르기 시작했다. 닭장·토끼장이야 매만지는 사람이 없으니 헐어져 간다는 게 당연하겠으나 우물은 왜 말라 들어가는지? 까맣게 깊은 우물이 차차 그 바닥이 나기 시작했고 식수도 등을 넘어 방앗골 마을 우물에서 길어다 먹어야 했다. 따라서 물을 길을 사람이 없어 하는 수 없이 마을로 이사했다. 아버지께서 쓰시던 그 방도, 우리가 초야를 지낸 그 방도, 아버지의 손으로 매만져졌던 그 집과 닭장·토끼장도 그대로 다 버리고, 마루 건너 아버지가 쓰시던 방의 책과 원고만을 그대로 옮겨 놓았을 뿐이었다.
우리 집은 메말라 가는 우물인 양 한 가지가 두 가지로, 두 가지가 다시 세 가지로 우물의 물이 마르듯 마음도 몸도 메말라 갔고, 우리 집을 드나들던 그 많던 손님조차도 발이 끊기고 나중에는 찾아오는 이조차 없게 되었다. 메말라 가는 인심 ―― 당시의 우리 민족 전체도 몇몇 매국노 이외에는 별다를 바가 없었겠으나, 그래도 우리 집 같지는 않았으리라.
8·15 이후부터 친정집과 시집은 어제가 옛날같이, 10년 가뭄에 비에 젖어 해갈한 들판같이 푸른 하늘 밝은 햇빛을 온통 내 것인 양 우러러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해방 이듬해 봄엔 김윤경 선생님의 비문에 이각경 선생님의 글씨로 아버지의 한글 비석이 성대하게 세워졌고, 묘소 이장식도 아울러 가졌다. 이 무렵 남편도 아침에 나가면 바쁜 일에 몰려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라도 아무리 늦어도 반드시 돌아온다는 사실에는 어김이 없었다. 내 일생에 가장 행복했던 시기랄까?
그러던 5년은 빨리 지나갔다. 1950년 6월 25일 소위 6·25 때 다시 우리는 빈털터리가 됐다. 6·25 동란 이듬해인 1951년 1월 3일 대구로 내려와서, 아버지가 이룩해 놓은 사전 재판을 찍기 위해 남편은 일을 시작했다. 혼자서 보조원 9명을 데리고 2년이 걸려 완성한 재판을 어떤 악질 출판사와 계약했다가 배반당하여 이젠 절판(絶版)마저 당하고 말았다.
대구 와서 산 지 벌써 23년, 그 사이 어떻게 알고 이은상 선생님이 한 번 찾아오셨을 뿐 아무도 찾는 이 없다.
그래도 남부럽지 않게 지내다 1967년 이후 어머니의 노환과 고혈압으로 막대한 비용을 들여 장만했던 집도 없어지고, 기울어지는 가세를 막으려고 몸부림치다 급기야는 서울에 아버지의 묘소를 모신 대지 660평마저 저당해도 부족했다. 저당한 땅은 돈을 갚지 못해 넘어가고 곧 이어 산소를 이장하라는 내용 증명이 날아들어 왔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의 묘소를 대구로 옮겨 모실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우리 부부만이 알게 소리도 없고 말도 없이..... 그러나 비석은 아직까지 세우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지금 84세가 된 어머니는 워낙 키가 작아 아랫목에 자그마하게 누워 계시고, 우리 부부와 외손자 외손녀들 네 식구의 흐뭇한 바라지 속에 지내신다. 떠오르는 추억을 귀중하고 아름답고 소담한 꽃송이인 양 어루만지듯 어머니는 옛이야기를 눈물도 섞고 웃음도 섞어 가며 이야기하시는 게 유일한 낙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