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의 유행어 추구 현상에 대하여
◎ 아저씨, 당근 있어요?
최불암 시리즈 중에 당근 시리즈가 있다.
◇ 당근 시리즈 Ⅰ.
최불암이 슈퍼마켓을 경영하고 있는데, 하루는 토끼가 왔다.
토끼 曰, "아저씨, 당근 있어요?"
최불암 曰, "없어!"
그 다음 날 토끼가 다시 왔다.
"아저씨, 당근 있어요?"
"없다니까."
그 다음 날 토끼가 또 왔다.
"아저씨, 당근 있어요?"
"아이참, 없다니까. 한 번만 더 왔단 봐라. 이빨을 다 뽑아 버릴 테다."
그 다음 날, 토끼가 또 와서 "아저씨, 당근 있어요?"라고 묻자, 최불암은 화가 나서 정말 이빨을 다 뽑아 버렸다.
그러자 그 다음 날 찾아온 토끼 曰, (이빨 빠진 소리로) "아저씨, 당근 주스 있어요?"
◇ 당근 시리즈Ⅱ.
이번엔 최불암이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어느 날 토끼가 찾아와서는
"아저씨, 당근 있어요?"
"없어!"
그 다음 날 토끼가 또 찾아와서는
"아저씨, 당근 있어요?"
"없다니까. 아이참, 너 한 번만 더 찾아오면 가위로 네 큰 귀를 싹둑 잘라 버릴 테다."
그러자 그 다음 날 찾아온 토끼 曰,
"아저씨, 가위 있어요?"
"없어."
"그럼, 당근 있어요?"
이쯤하면 요절복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기막힌 반전에 광고적인 요소가 잔뜩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이 얘기를 들은 뒤로 식당에만 갔다 하면 주문 받으러 온 웨이터에게
"아저씨, 당근 있어요?"
"가위 있어요?"
한다. 기가 막히게 재미있다.
내가 왜 최불암 시리즈를 꺼냈냐 하면 광고의 유행어 추구 현상도 이런 최불암 시리즈의 유행 현상과 비슷한 심리일 거라는 생각에서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유행어가 되기 위한 몇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하나는, '반전 다음에 오는 그 기막힘'이다. 써니텐에서 조갑경이 기차역에서 신나게 흔들어 달라면서 춤을 춘다. 그리고 끝 장면, 정신 없이 흔들다가 혼자서만 기차를 놓친 조갑경,
"내가 너무 흔들었나?"
그 외에도 재치, 유머, 당돌함 등이 유행어를 낳는 요소이다.
◎ 변화하는 광고 스타일, 변화하는 광고 언어
광고의 목표는 소비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김으로써 그 제품에 대한 기억률을 높이는 것이 있다. 그래서 때때로 심한 표현, 자극적인 표현, 유치한 표현을 써서라도 소비자의 기억 속에 살아 남는 것이 무덤덤한 반응을 받는 광고보다는 낫다고까지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특히 약 광고에서 두드러진다.
"무신 잘? 펜잘!"
"속청 씨, 아니, 김청 씨! 속 좀 풀어 줘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알마겐!" 등.
일차원적이고 다소 유치하게까지 느껴지는 이들 표현은 제품의 차별점이 거의 없는 약 광고에 있어서는 브랜드 고지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하겠다.
보편적으로 인간은 항상 새롭고 재미있는 글을 읽고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 이로 인해 광고는 점점 더 시끄러워지고, 광고 표현은 날이 갈수록 자극적이 되고, 가능하면 똑같은 의미라도 새로운 표현, 신조어를 만들기 위해 고심하는 것이다. 히트 광고란 다른 말로 하면 유행어를 낳은 광고를 말한다. 우리는 날마다 히트 광고를 만들기 위해, 온 국민이 다 알 만한 '유행어'를 만들기 위해 고심한다. 쉬운 말을 이리 비틀고 저리 꼬면서.......
그러나 유행어를 가만히 살펴보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유행어가 된 말들은 새롭고 생소한 말이 아니라, 지극히 쉽고 평범한 말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사랑해요, 밀키스," "반했어요, 크리미," "엄마, 내 말이 맞죠?(하이-C)" "언젠가 먹고 말 테야(치토스)," "흔들어 주세요(써니텐)." 등등.
여기에 어디에 유별난 단어가 있는가? 어디에 어려운 단어가 있는가? 그저 우리의 생활 언어일 뿐이다. 80년대를 청산하면서 우리 광고가 보여 주고 있는 변화의 핵심은, 오히려 '탈언어'에 있다고 보인다. 즉 도식적인 광고, 광고다운 광고에서 벗어난 광고 스타일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알고 보면 저도 부드러운 여자예요," "커피와 여자는 부드러울수록 좋은 거 아니에요?"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
이런 광고들이 소비자들에게 광범위한 공감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우격다짐으로 억지로 제품을 자랑하는 광고 스타일은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광고, 삶 속에 제품이 녹아들어 있는 광고 스타일이 소비자들로부터 "자연스럽다," "그 광고를 보면 왠지 기분이 좋다," "마치 나를 보는 것 같다."로 이어지면서 오히려 더욱 잘 기억되고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이다.
◎ 죽은 언어와 산 언어
광고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산 언어여야 한다. 괴어 있는 언어가 아니라 시대의 물결을 따라 흐르는 언어여야 하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광고가 자리 잡게 됨에 따라 사용되는 언어들도 관념적인 의미의 박제화된 언어에서 탈피하여 인간성을 회복한, 팔팔하게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말이라는 의미에서의 언어로 돌아가고 있다.
"남편 귀가 시간은 여자 하기 나름이라구요," "남편 사랑은 가끔 확인해 봐야 한다구요," "트라이, 편안합니다," "그래서 오백 원입니다(구구콘)," "무슨 아이스바가 이렇게 생겼어?(울퉁불퉁바)" 등등.
반면 "나만의 개성 추구"라는 패션 광고를 보자. 패션이라는 것은 당연히 개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또 개성이라는 것은 남의 개성이 아니라 나의 개성이라는 것도 또한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왜 아무런 느낌도 줄 수 없을까? 관념이기 때문이다. 생활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활이 아니기 때문에 느낌을 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품위, 품격, 격조, 명가, 명품, 행복, 꿈....... 이런 단어들이 그 생명력을 잃은 지는 오래다.
생활인의 언어는 말하자면 고정관념,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 감정을 가진, 희로애락을 가진 살아 있는 인간의 언어인 것이며, 생생하게 살아 있는 광고를 위해서는 이런 언어 사용이 필수적이다.
◎ 광고의 유행어 추구 현상과 그 영향
앞에서도 말했듯이 광고의 목적은 소비자의 뇌리 속에 '우리 브랜드의 이미지'를 명확히 기억시키는 것이다. 광고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손쉬운 수단으로 우린 자주 다음의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첫째, 방송이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이미 유행하고 있는 말이나 어투, 동작 등을 활용한 '업어 가기 광고 스타일'이다. 예를 들자면 요즘 '사랑이 뭐길래'가 폭발적인 시청 효과를 얻고 있는 데 힘입어 이 프로그램과 어투를 흉내 낸 광고가 8건이나 제작되었다고 한다(빨래 박사, 바로크 가구, 해태 티라미스 쵸코렛 등).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초콜릿'임. -편집자 주]
둘째로는 이미 인기를 얻고 있는 대중가요를 변형시켜 시엠송(CM-SONG)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델몬트 따봉 쥬스는 최진희의 '카페에서'를 "모두가 좋아하는 따봉입니다. 델몬트 따봉 쥬스 아~ 반해요. 홀딱 반해요. 델몬트 따봉 쥬스"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주스'임. -편집자 주]라고 개사하여 불렀으며 일설에 의하면 이 텔레비전 광고가 나간 후 사람들 사이에서는 '카페에서' 노래가 원래의 가사보다도 이 시엠송 가사로 더 많이 불렸다고 한다.
챠밍 샴푸는 민해경의 '그대 모습은 장미'를 '그대 모습은 챠밍'으로 개사하여 시엠송을 만들었다.
그 외에도 주현미의 '짝사랑'을 '맛이라면 이라면~'으로, 현철의 '싫다 싫어'를 '좋다 좋아, 뉴 파워크린'으로 부른 것 등등. 이런 현상들은 광고의 독창성 면에서 볼 때 바람직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짧은 시간 내에 최대한의 브랜드 기억 효과를 얻으려는 목적을 위해서는 다소간은 불가피한 현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둘의 경우와는 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델몬트 오렌지 쥬스 '따봉' 광고 편 같은 경우는 광고에서 사용된 새로운 말이 방송, 코미디는 물론 각종 스포츠 신문을 장식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일종의 일반 명사화되기도 했으며 더 나아가 '따따봉,' '히로뽕' 등 이를 응용한 또 하나의 은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러한 유행어 추구 현상의 핵심은 첫째, 쉽다는 것, 둘째, 생활 언어라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은 쉽게 공감을 얻을 수 있으며 또 쉽게 확산되어 유행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행어 추구 현상은 매우 부정적인 측면까지 공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30초의 예술'이라고 불리는 텔레비전 광고는 화면의 전환이 빠르고 화려하며, 또한 성조(聲調:VOICE TONE)도 드라마나 다른 프로그램보다 높기 때문에 언어를 한창 배우는 단계에 있는 유아들이나 어린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광고만 나왔다 하면 밥을 먹다가도, 또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도 멍하니 텔레비전 앞에 서서 열중하거나, 심지어 흉내 내는 현상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 의사 전달 수단으로서의 광고 언어
언어는 가장 기본적인 의사 전달 수단이다. 물론 인간의 의사 전달 수단이 언어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몸짓을 비롯해서 그림, 음악, 춤 등 다양하다. 그러나 그림이나 음악, 무용, 팬터마임같이 언어가 들어 있지 않은 예술과, 언어가 포함되어 있는 예술 즉 문학이나 연극을 비교할 때, 의사 전달을 더욱 쉽고 명확하게 하는 것이 어느 것이냐 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말할 필요 없이 역사 전달 광고에 있어서 언어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설득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 설득이다. 그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의사 전달의 가장 유용한 수단인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데, 언어란 무엇인가 하면 궁극적으로는 '의미'와 '사고'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설득하기 위해서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광고는 의미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지만, 그 감각조차도 어디까지나 의미를 수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광고에 있어서는 '언어,' 즉 카피 이전에 '의미'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디어 발상이라는 것은 그 '의미'를 찾는 작업인 것이다. 따라서 카피가 우선이 아니다. 그 의미 내용이 우선인 것이다.
◎ 다시 생각해 보는 광고 언어
좋은 말 또는 좋은 글이란 바로 적절한 지식을 기억에서 쉽게 찾게 하고 또 이를 좋은 구조의 이해 내용으로 조직화할 수 있게 하는 글이라고 볼 수 있다.
유행어를 낳은 광고가 반드시 제품 판매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유행어를 낳지 않은 광고보다는 성공할 확률이 높겠지만....... 그러므로 주의할 점은 유행어를 만드는 데 너무 치중한 나머지 브랜드나 제품을 기억시키는 것을 잊어버리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광고에 있어서 언어의 선택은 득과 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30초라는 짧은 시간 속에 제품 판매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는 말들은 가능하면 축약되고, 삭제되어야 한다. 즉 광고 메시지는 신뢰와 이익을 약속해야 함은 물론, 정보와 지식을 명확하고 쉽게 전달해야 한다.
광고에서 사용된 말들을 보면 희한하고 재미있는 의성어들, 감각적인 단어들이 많다. 이 새로운 신조어들은 우리 언어를 풍부하게 한다는 장점과 함께, 우리 고유의 말을 파괴하고 비어·은어를 무분별하게 전파하는 역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자극적인 표현, 기억률을 높이기 위한 재미 요소에만 너무 치중한 나머지 발음을 격음화시키는 경우도 있고, 30초라는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메시지를 전하려다 보니 잘못된 생략법을 쓰는 경우도 있다.
광고와 관련된 언어생활로는 유행어 추구 현상 외에 의미도 알 수 없는 무분별한 외래어의 남용과 사대적인 표현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광고는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화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언어를 요리하는 카피라이터의 한 사람으로서 새삼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