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산책]

'無知한 知性人'論

吳東煥 / 경향 신문사 논설 위원

하루에도 수없이 귓구멍을 씻고 싶다. 눈알도 씻고 싶다.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해서 코끝을 씻어 봤자 냄새가 덜 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마찬가지로 못 볼 것을 본 눈, 못 들을 것을 들어 버린 귓구멍을 씻는다고 해서 눈과 귀가 보기 이전과 듣기 이전 상태로 깨끗해지는 것은 아닐 터이지만 ....
    옛날 許由라는 사람은 堯임금이 자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한다는 소리를 듣자 그만 강물로 달려가 그 '고약한 소리'를 들은 귀를 씻어 버렸다지만 요즘은 그럴 만한 깨끗한 강물도 시냇물도 귀하다. 그렇다고 수돗물을 쓰자니 계량기 도수만 올라갈 것이고 자못 난감한 일이다.
    무슨 소린가. 도대체 자고 나면 보지 않을 수 없고 듣지 않을 수 없는 틀린 말, 틀린 소리가 너무나 많다. 이 땅, 이 겨레처럼 제 나라 말에 멍청하고 무식한 特例가 外界 말고 이 지구상에 또 있겠는가 싶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한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나마 다리 하나, 코 하나쯤이라도 만져 보면 다행이다. 아예 '우리말 코끼리'의 뒷다리 하나, 콧구멍 하나 만져 보지 못한 사람들이 4천여 만 명 중 거의 대부분이다.
    市井雜輩, 저자 거리 잡동사니 군상의 언행은 置之度外하자. 화려한 텔레비전 상자 속이나 의젓한 일간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말들도 그러하니 한심할 수밖에 없다.
    신문 제호부터 '한겨레'라는 것도 다 있다. '겨레' 자체가 '한조상, 한핏줄로 태어난 자손의 무리'다. '한'은 군더더기 관형사. '한'을 '하나'라는 뜻으로 썼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하나'의 뜻이 아니고 '크다'는 뜻의 접두어로 썼다면 또 몰라도. 그러니까 '큰 겨레'라는 뜻의 '한겨레'라면 괜찮지만 '하나의 겨레'라는 뜻으로 '한겨레'로 했다면 그 뜻이 겹친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뜻이 모호한 제호는 피하는 게 좋다.
    어느 텔레비전 가요 프로그램 담당 아나운서가 늘 하는 말 '저희들은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도 안 좋다. '저희'와 '들'도 겹치고 '감'과 '느낀다'도 겹친다. '感'이 느낄 감字니까. 그냥 '저희는 책임을 느낀다'고 해야 겹치지 않는 경제적 표현이 된다.
    오랜 일기 예보로 스타가 된 어느 중년 신사는 언필칭 '오늘 밤에서 내일까지'다. '오늘 밤에서'의 '에서'는 안 된다. '에서'란 처소, 즉 장소를 나타내는 부사격 조사다. '집에서', '학교에서', '서울에서'처럼 장소 이름에 붙는 토씨가 '에서'다. '오늘 밤에서'가 아니라 '오늘 밤부터'다. '부터'는 처소격을 초월한 모든 명사, 대명사, 부사 등에 붙을 수가 있으니까. 밤(夜)은 시간 속의 공간 개념이므로 당연히 '밤부터'라야 한다.
    또 그분은 '내일 밤부터서'등 '부터서'도 자주 말한다. '부터'와 '서'는 겹친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를 지적해 주는 기미는 느낄 수 없다.
    군더더기病, 유식한 표현으로 '중복 증후군' 중 하나만 더 들어 보자. 어느 대학 총장께서는 언제나 '했다는 것은'을 '했다라고 하는 것은'으로 말한다. '그가 그렇게 살았다는 것은 놀랄 일이다'를 '그가 그렇게 살았다라고 하는 것은 놀랄 일이다'로 잡아 늘려 표현하는 것은 귀에 거슬린다. 물론 틀린 표현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비경제적인 군더더기 표현이다.
    전문적인 설명을 덧붙이면 모음 축약(縮約) 현상이라는 게 있다. 영어로 hiatus다. 모음과 모음이 겹칠 때 모음 하나가 생략되는 현상이다. 그래야 혀가 자연스럽고 발음이 부드럽다. '아, 그립던 바다이다'보다는 '아, 그립던 바다다'가, '여보세요, 저입니다'보다는 '여보세요, 접니다'가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모음 하나가 생략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했다는 것은'보다 '했다라고 하는 것은'은 '라고 하'세 자나 군더더기다. 다만 '했다고 모두들 그러는 것은', '했다고 모두들 그렇게 말하는 것은'의 뉘앙스를 살릴 때를 제외하고는 듣기 싫게 늘어지는 표현일 뿐 다른 게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한다 하는 명사들의 텔레비전 좌담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저희 나라'는 또 무엇인가. 유엔 총회 연설이나 외국 사람들 앞의 강연도 아닌데 왜 '저희'라는 겸양어를 써야 하는가. 유엔 총회 연설이라 할지라도 정확히는 우리나라 사람이 몇 사람 함께 있을 경우에 '저희 나라'로 해야 한다. 한국 사람이 한 사람일 때는 '저희 나라'가 아니고 '제 나라', '저의 나라'라야 的確한 표현이다.
    도대체 '저희'와 '우리'도 구별 못해 어떤 장소 어느 경우에 쓰는 줄도 모르는 지성인들이라니, 꿀밤이라 도 한 대씩 안기고 싶은 심정을 누를 길이 없다.
    작년 10월 11일 저녁 '6시 내 고향'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제목은 '짚세기 민예품'이었다. 필자는 깜짝 놀랐다. 대관절 짚세기로 만드는 민예품도 다 있나 싶어서다.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짚세기로 만드는 민예품이 아니라 볏짚으로 엮어 내는 민예품이었다. 둥구미, 삼태기, 멍석, 맷방석, 쇠덕석, 종태기, 멱서리, 오쟁이 등이었다. 아마 젊은 세대는 대관절 이것들이 무엇인가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방송국 담당자가 ' 짚세기 신고 왔네'라는 노래조차 있는데도 짚세기와 볏짚을 구별하지 못한 데서 '짚세기 민예품'이라는 타이틀을 낳은 것이다. 거기다가 '짚세기'란 말 자체도 '짚신'의 함경도 사투리다. 그나마 '짚세기 민예품'도 '짚신 민예품'으로 했어야 했다. 2중 3중으로 오류를 범한 꼴이다.
    현란한 바보상자(텔레비전)로부터 눈꼴사납게 점잖은 체 뽐내는 신문 지면으로 눈길을 옮겨 보자.
    작년부터 모 종교 단체에선 '내 탓이오' 운동을 벌이고 있다. 모든 일을 남의 탓으로만 돌려 그 책임을 남한테만 미룰 게 아니라 내 탓이오, 내 책임임을 먼저 깨달아 개혁하고 혁파해 나가자는 훌륭한 사회 계몽 캠페인이다. 그런데 작년 5월 14일자 모 일간 신문 시사 만평 만화 제목은 '네 탓이오'였다. 그런가 하면 지난 1월 24일자 모 신문 사설 제목도 '네 탓이오의 反省'이었다. 기가 막혀 나동그라질 일이다.
    '너, 네'라는 비존칭 대명사와 '-이오'라는 '하오'체의 중간 존칭과는 도무지 어울릴 수가 없는 말이다. '네가 하시오', '네놈이 가 보시오'나 마찬가지 쓰임새다. '네 탓이오'가 아니라 '네 탓이야'라야 맞는 표현이다. '너'에는 '-해라'라는 비존칭 명령체가 어울린다. 이의 시정을 필자는 당시의 편집 책임자에게 일러 주건만 그 다음 인쇄판에도 고쳐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나왔다. 아마도 무슨 소린지 잘 느낌이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시사 만화 제목은 그렇다고 치고 사설 제목까지 '네 탓이오'라니 한심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사설이라면 신문 지면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표적인 글이 아닌가.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86년 2월 7일자 모 신문 사설 제목은 '朱黃이 눈에 시리다'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내용은 환경 미화원(청소부)의 유니폼 얘기였다. 그러니까 아마도 주황 색깔 유니폼에 눈이 부시다는 뜻을 그렇게 옮긴 것 같다. 그렇다면 '주황이 눈에 시다'쯤으로 했어도 또 모른다. '시다'는 강한 빛을 받아 눈이 슴벅슴벅 찔리는 듯한 느낌의 형용사니까. 또 '주황이 눈에 시다'보다는 '주황에 눈이 시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된다. '눈이 부시다'지 '눈에 부시다'는 아니니까.
    그리고 '朱黃이 눈에 시리다'의 '시리다'는 또 무엇인가. '시리다'란 손과 발, 코끝, 귓바퀴 등에 얼음처럼 차가운 느낌이 들었을 때의 표현이다. 결론적으로 이 사설 제목은 '주황이 눈에 시리다'가 아니라 '주황에 눈이 시다'나 '주황에 눈이 부시다'라고 했어야 옳았다. '시다'와 '시리다', '부시다'를 분별하지 못한 所致였다.
    다음 88년 3월 30일자 어느 신문 사설 제목은 '人物보다 제도가 기능하는 改革을'이었다. 여기서 '기능하 는'은 어법 위반이다. '機能'이란 명사는 여 변칙 동사가 될 수 없다. '心理하다', '理致하다' 따위가 성립 불가능한 것처럼 '기능하다' 또한 마찬가지다. 이희승 씨의 '국어 대사전' 등에 '하다'를 붙여 여 변칙 동사라고 표시된 것은 잘못이다.
    그 다음 날인 88년 3월 31일자 또 다른 신문의 사설 제목은 '또 다시 뼈저린 敎訓 얻자'. '뼈저리다'란 동사는 체험적인 어휘지 이렇게 저렇게 하자고 권유하는 성격의 단어는 될 수가 없다. '뼈저린 교훈 얻자'식 표현은 '자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 가슴 속을 조금씩만 저리게 합시다', '모두 모두 눈물겹도록 하시고 가슴 떨리도록 하십시다'와 동격이 된다.
    뼈저린 것은 누구나 같을 수가 없고 강요할 수도 없는 성질의 심리적 사정이다. '뼈저린 교훈 얻자'고 할 게 아니라 '실로 뼈저린 교훈이다' 식으로 사설 필자 자신이 뼈가 저리다는 것만을 표시했어야 옳았다. 그래 서 그 사설을 읽고 뼈가 저려오는 사람이 많도록 유도만을 하는 게 정상이다.
    또 지난 1월 4일자 모 신문 제목 중엔 '아무개 사장 건설 현장 涉獵'이란 제목이 눈에 비쳤다. '섭렵'이 무슨 뜻인가. '섭렵'이란 마치 물고기를 잡으려고 시냇물을 훑어 거슬러 올라가듯이 '많은 책을 읽었다'는 뜻이다. 한데 이 아무개 사장의 경력 소개 기사 내용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책을 많이 읽었다는 소리가 아니고 공장 현장, 생산 현장, 건설 현장 등을 거쳐 현장 경험을 쌓듯이 건설 현장을 두루 거쳤으므로 현장 경험이 많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섭렵'으로 잘못 알고 제목을 붙였던 것이다. 이때는 '섭렵'이 아니라 '跋涉'이다. '발섭'이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길을 가듯 여러 가지 현장의 난관을 거쳐 경험했을 때 쓰인다.
    '일선 행정 기관을 발섭했다', '현장 책임자로 발섭의 폭이 넓다' 등이 알맞은 표현이다. '건설 현장 섭렵'이라면 건설 현장에서 많은 책을 읽었다는 소리가 된다. 건설 현장에서 건설 감독은 하지 않고 한가하게 책만 보고 있었다면 그야말로 속된 말로 모가지감이 아닌가.
    다음엔 작년 10월 3일자 모 신문 칼럼. 내로라하고 뽐내는 칼럼니스트 작품이다. 언뜻 눈에 잡힌 것은 '모과송'. 한데 그 괄호 안의 한문 글자를 보니 분명히 '木爪頌'이었다. 爪는 손톱 조字. 그러면 '나무로 된 손톱 찬송'이라는 뜻인가. 살펴보니 그게 아니라 모과라는 과일을 뜻함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손톱 '爪'가 아니라 오이 '瓜'자를 썼어야 했다. 그 유명한 칼럼니스트가 '爪'와 '瓜'를 구별 못한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콩인지 보리인지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물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숙맥불변(菽麥不辨)이라 하거늘....
    지난 2월 6일자 어느 신문 칼럼 제목 '여야의 공천자 여러분'도 따지고 보면 우습기 짝이 없는 소리다. '공천자'란 공천한 사람, 공천 위원회 위원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물론 공천을 받은 사람을 향한 외침이겠지만 그게 아니다. '부양자'가 있으면 '被부양자'가 있고 '加害者'가 있으면 '被害者'가 있다. '受惠者'가 있으면 혜택을 준 '受惠者'도 있어야 한다. 따라서 공천을 한 공천자와 공천을 받은 공천자는 구별돼야 한다. 공천을 받은 공천자는 '피공천자'지 '공천자'가 아니다. 그냥 뜻으로는 통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이렇게 우리말의 올바른 쓰임새를 살피고 돌아보면 그 잘못된 점, 엉터리 상태는 끝도 없고 한도 없다.
    필자는 일요일마다 북한산에 오른다. 그런데 등산로 입구를 보면 '쓰레기를 되가져옵시다'란 커다란 플래카드가 펄럭인다. 되가져오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가져갔다가 버리지 않고 도로 가져오는 게 되가져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올라갈 때부터 쓰레기를 한 짐씩 지고 올라간다는 말씀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따질 것도 없이 올라갈 때부터 쓰레기를 가져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쓰레기가 되기 이전의 음식물과 포장지 따위를 가져가는 것이지 등산 시작부터 쓰레기를 짊어지고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먹고 남으면 쓰레기가 되는 쓰레기감을 가져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쓰레기를 되가져옵시다'라고 하면 큰 실례요 망발이다. '되가져'는 빼고 그냥 '쓰레기는 가지고 내려옵시다'라고 해도 무슨 뜻인지 안다.
    국어사전들까지도 엉망이요 막말로 개판이다. 그 오류를 지적하자면 날 새는 줄 모른다. 지금 곁에 이희승 씨의 최신 증보 수정판 '국어 대사전'이 있는 분은 그 머리말인 '수정 증보판 간행사'를 한번 펼쳐 봐 달라고 권하고 싶다. 첫줄 '언어가 호흡(呼吸)을 하고'로부터 10째 줄 '뒷받침하게 된다'까지가 모두 한 문장임을 아시고 계셨는지 모르겠다. 이 한 문장이 도대체 몇 자나 되는지 한번 세어 보려 해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최신 개정 헌법의 前文도 마찬가지다. 참으로 창피스런 노릇이다.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갖고 다른 나라에 가 살아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나라 국민처럼, 특히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처럼 제 나라 국어에 무지몽매한 사람들은 없지 않겠는가 싶다. 그들의 육필 원고를 보면 기가 차 까무러칠 정도를 넘고도 남는다. 그런 주제에 외국어는 잘한답시고 나불나불.... 실로 目不忍見이다.
    자고 나면 못 볼 것, 안 봤어야 했을 것을 보는 통에 죽을 때까지 귓구멍과 눈구멍이나 씻어 대야 하는 필자의 신세가 차라리 가엾다고 생각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러나 씻고 싶다. 또 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