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계승자 주시경 스승(*)
한글의 중흥조인 주시경 스승은 한양 조선 끝 무렵 일본으로 더불어 국교를 트는 조약(병자 수호 조약)이 성립된 병자년에 황해도 봉산(鳳山)에서 났다. 마침 그해 병자(丙子)와 그 이듬해 정축(丁丑)은 무서운 흉년이 들어서, 이 갓난이의 젖도 넉넉하지 못하고 또 암죽거리도 잇대지 못하여 제때에 먹지 못하기를 여러 번에 미치매 세 번이나 기절을 하였다 한다.
스승이 여덟 살 적에 이웃 아이들로 더불어 문밖에 나가 놀다가, 남쪽으로 덜렁봉이란 산봉우리에 하늘이 맞닿은 것을 보고서, 서로 의논하되 우리가 저 산봉우리에 올라가면, 하늘을 만져 볼 수가 있겠다 하고, 서로 동무하여 그 봉우리에 오르기로 하였다. 그 동무 아이들은 산 중턱까지 가다가는, 풀꽃 같은 거나 따고 장난하기에 정신이 팔리어, 하늘을 만져 보려는 생각은 아주 잊어버리었지마는, 스승은 가쁜 숨을 헐떡거리면서 기어코 그 봉우리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막상 올라가 보니, 거기서도 하늘이 더 멀고 큰지라, 이에 하늘이란 것은 손가락이나 산봉우리로써 그 높이를 잴 수 없는 것임을 깨치고, 발길을 돌려 중턱에서 놀던 동무들과 장난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스승의 정신에 알아보겠다는 연구심의 왕성한 싹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스승이 우리말 연구에 뜻하기는 열일곱 살 적이었다.
이때에 서당에서 한문을 배울새, 그 글 뜻을 풀이할 적마다 우리말로 옮김을 보고는, 속으로 헤아리되, 글이란 것은 말을 적으면 그만이로다. 그러나, 적는 방법이 이 한글처럼 거북하고 어려워서야, 이 글로써 온갖 지식을 얻어 내기는 참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만일 우리글로써 이 한문을 갈음할(대신할) 것 같으면 참으로 수고는 적고 거둠은 많을 것이로다. 그러면, 내가 우리글을 공부해 보리라고 은근히 마음으로 작정한 바가 있었다.
열아홉 때에 서울로 올라와, 배재 학당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게 되었다. 국문도 배우고 영어도 배웠다.
스승은 영어를 공부하여 감에 따라 그 글자를 맞춰서 낱말을 적고, 낱말은 또박또박 띄어 써서 한 월[文]을 이루되, 각 낱말에는 일정한 법이 있어서, 그 운용이 정연함을 보고서, "옳다! 글이란 것은 이렇게 규칙스럽게 적어야만 그 뜻이 정확하고 그 보기도 쉬운 것이다. 우리글도 이런 식으로 정리 표기하면 좋겠다." 하고서, 한글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배재 학당은 실로 우리나라에 맨 처음으로 된 새 교육의 학교로서 고종 22년(서기 1885)에 창설되어, 그때에 이미 십 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기는 하였지마는, 우리 국문을 제법 학문적으로 아는 이도 없고 해서, 주 스승의 뜻한 바 우리글 연구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임은 오늘날 우리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오천 년이나 묵은 우리말, 오백 년이나 묵은 우리글의 황무(荒蕪)를 열어 이룩하고자 혼자서 괭이를 잡은 스승의 개척자스런 노고는 무엇으로 비유할손가? 어릴 적에 덜렁봉에 올라가고야 말던 그 정신 기백으로써, 스승은 외로운 가운데에서도 끝내 그 일을 이뤄 내어 주었다. 스승의 공부하는 형편은 그리 순탄하지 못하였다.
어떤 때에는 인쇄소에 고용되어서 인쇄의 일에 골몰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에는 고향에 돌아가 집안일을 돕기도 하였다.
한글 연구를 뜻한 스승은 당시의 갑오경장 이래의 정치 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다. 당시 독립 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서재필, 이승만(대통령), 윤치호, 이상재 무리의 정치 운동에 가담하여 경향을 오르내리면서 활동을 하였으며, 또 서재필이 차린 순 국문 신문 '독립 신문'의 기자가 되어, 민중 사상의 계몽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스승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항상 잊지 아니하는 일은 우리말 연구이었다.
독립 신문사에 일할 적에는 동업자들과 함께 '동문 동식회(同文同式會)'('국문 동식회'를 말함.)를 조직하여서 우리글을 일정한 방식에 따라서 한가지로 쓰기를 힘썼으며, 의학교(醫學校)에 있던 동지 지석영(池錫永)으로 더불어 그 학교 안에 국문 연구소('국어 연구회'일 듯)를 차려 서로 갈고 닦기를 힘썼으며, 뒤에 학부(學部) 안에 국문 연구소가 되매 언제든지 그 연구의 중추가 되어서 일하였다.
스승이 공사립 각 중등학교에 국어 과목의 교수를 담당하여, 커다란 책보를 끼고서 서울 거리를 동분서주하였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주보따리'라 별명 지었다.
스승은 집에서 밥을 먹거나 길을 다니거나, 언제든지 머릿속에는 항상 우리글, 우리말에 관한 문제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래서, 밥을 먹되 그 맛을 모르고, 길을 다니되 그 행방을 잊어버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커다란 책보를 끼고서,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 것이, 웬걸 자기 집은 아니고 남의 집이었다. 스승은 우리말 문제로 들어찬 머리를 수그리고 물론 아무런 기척 없이 자기 집인 양 대문 안에 썩 들어서서 대청으로 오르려 하는 차에 그 집 사람들이 발견하고서, 웬 사람이냐고 소리 질러 물으니까 그제야 스승은 자기가 부지불식 중에 남의 집에 들어온 것임을 깨닫고서, 면구한 안색으로 창황히 물러 나왔다고 한다.
스승은 우리말, 우리글을 연구함에 있어서, 그 법칙을 나타내는 말씨, 그 풀이를 하는 말씨를 순전한 우리말로써 지었으며, 한문 글자를 그대로 씀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그런 까닭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주시경(周時經)'이라 부르지 않고 '두루때글'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승 자신은 '두루때글'이라고 행세한 일도 없고, 다만 '한힌샘'이라고 행하였다. 스승은 한 주간 엿새 동안에 이 학교, 저 학교로 동분서주하면서 국어뿐 아니라 역사, 지리 따위까지 가르치다가 하루의 쉬는 날 일요일에는 박동(磚洞) 보성 중학교에다가 '조선어 강습원'을 차리고서 서울 안 각종 중등학교 생도들 중에서 가장 민족주의, 독립 사상에 기울어진 청년들을 모아 놓고서, 우리말, 우리글을 가르쳤다. 그 강습원의 원장 남형우(南亨祐)는 '솔벗메'라 일컬었다. 내가 보관하고 있는 졸업 증서 '마침 보람'에는 '어른 솔벗메, 스승 한힌샘'의 이름이 가로 풀어 쓴 글씨로 되어 있다. 우리말, 우리글의 연구는 우리말, 우리글의 존중과 항상 동무하였던 것이다.
[신천지(新天地) 제9권 제6호, 1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