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 선생 역사(*)
주시경 선생은 서기 1876년 병자년 11월 7일(음) 황해도 봉산군 전산방(錢山坊) 무릉(武陵)에서 태어나니, 아버지는 면석(冕錫)이고 어머니는 이 씨(李氏) 부인이며, 형제 네 사람 중 둘째로서, 나중에 그 중부 면진(冕鎭)에게 양자로 가 그 집의 대를 잇게 되었다.
생후 어머니의 젖이 부족하여 암죽을 먹고 자랐는데, 생년인 병자년과 이듬해인 정축년은 드물게 보는 흉년이라, 먹을 쌀이 없어 어떻게 변통해도 때로 이 갓 태어난 아기가 먹을 얼마 안 되는 식량조차 마련하지 못하므로, 세 차례나 배가 고파 기절하였다가 겨우겨우 다시 깨어난 일이 있었으니, 하늘이 위인을 내시매 그 시련이 생의 처음부터 있음을 보겠더라.
여섯 살에 공부를 시작하여 열두 살까지 가정에서 한문을 배우고 익히다가, 서울에 사는 양아버지 집으로 양자를 오게 되어, 열세 살에는 서울에서 서당에 다니며 열일곱 살까지 한문 배우기를 계속하였다.
여덟 살이 되던 해 봄에 문밖에 나가 이웃 아이와 함께 놀다가, 남쪽에 있는 덜렁봉이란 산에 하늘이 닿아 있음을 보고, 하늘이 어떠한가 만져 보자 하고 이웃 아이와 동무하여 산에 오를 때, 이웃 아이는 산허리에서 꽃과 풀을 꺾기에 정신이 팔려 하늘 만질 뜻을 홀연히 잊었으나, 위험을 무릅쓰고 높은 곳을 더위잡고 기어이 산꼭대기에 혼자 올라 보니, 거기서도 하늘이 아주 먼 것은 물론이려니와 집 있는 데를 보니 하늘이 도로 낮음을 보고 하늘이 매우 넓고 커서 한 군데만 덮여 있는 것이 아니요, 높게도 보이고 낮게도 보임은 다 사람 눈의 착각임을 깨닫고, 의혹을 푼 것이 즐거워서 기뻐 뛰어 집에 돌아온 일이 있으니, 지식을 얻고자 하는 마음과 연구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어려서부터 강성하였음을 충분히 짐작하겠도다.
갑오경장 일 년 전, 열여덟 살에 세태의 움직임에 느껴 깨달은 바가 있어, 그 당시 배재 학당 교사 박세양(朴世陽), 정인덕(鄭寅德) 등 두어 분한테 산술이며 국내외의 지리, 역사 등 당시의 이른바 신학문을 배우고 익히니, 이때로부터 정신이 환히 열려, 새롭고 다른 세계가 마음속에 싹터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열아홉 살 되던 해는 갑오년으로 잠시 시골에 돌아가 머물렀으나, 5월에 청일 전쟁이 일어나 나라의 정세가 갑자기 달라져 위태로워지자, 청년 된 이들이 의기소침하여 뒤에 물러나 있을 때가 아니라 생각하고, 새로운 시대를 알고 새로운 기술을 닦고 기르기 위한 목적으로 분발하여 서울에 올라와 배재 학당에 입학하여 공부하니, 생각이 깊고 말이 적어 그 서슬과 같은 날카로움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시대의 어려움에 대한 깊고 절실한 우려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새롭고 예리한 기개를 감추나, 오히려 드러나, 같이 공부하는 이들의 떠받들어 귀히 여김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이에 겪은 일들이 또한 평탄하지 않은 바가 많았으니, 혹은 다른 사람에게 품을 팔기도 하고, 혹은 인쇄소에서 허드렛일을 하기도 하여, 그것으로 학비를 보태고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삼으니, 그 구차하고 곤궁한 생활이란 상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떠한 어려움이나 괴로움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분투하여 그것을 극복해 가면서 한결같이 뜻한 바를 가다듬고 맡은 바 일에 힘쓰니,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감탄하여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후, 잠깐 동안은 배우는 일이나 그가 맡은 바 일 때문에 여러 가지의 경력이 있으나, 번거로움을 피하여 기록하지 아니하고, 바로 선생이 평생 동안 크게 마음에 두고 있었던 국어 연구의 일에 대하여 간략하게 말하기로 한다.
선생이 국어 연구에 뜻을 세운 것은 실로 1895년 임진년, 선생의 나이 열일곱 살 때로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이회종(李會鐘)이란 진사(進士)에게 한문을 배울 때, 스승이 그 한문 문장의 뜻을 풀이할 때에는 반드시 언제나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헤아리되, "글이라는 것은 말을 그대로 적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적는 방법 즉 부호가 이 한문과 같이 복잡하고 어려워서야 어찌 배움이나 지식을 얻기가 지극히 어렵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지금 한문을 우리 한글로 바꾸어 쓴다면, 노력을 조금만 들여도 그 효과는 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한글을 공들여 갈고 닦지 아니하면, 어찌 실효를 거둘 수 있겠는가?" 하고, 이에 크게 분발하여 우리나라 말과 글을 연구하기로 뜻을 세우고 먼저 국어 문법을 궁구하여 밝히는 일에 착수하니, 이는 우리나라에 국어가 있은 이후 처음 있는 일이요, 한국 사람이 스스로 과학적으로 국어를 풀어 밝힌 효시(嚆矢)이다. 이때 이 사람의 자각과 결심은 실로 한국어 부흥의 새로운 기운이었다.
처음에는 자기 나라 말과 글을 자기가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단순한 자각만으로 시작한 것이나, 그 힘찬 발걸음이 점점 앞으로 나아가는 대로, 국어 그것의 본질이 착하고 어질며, 어휘가 풍부하고, 말소리가 우아하고 좋으며, 한글 그것의 형식이 간편하면서도 아름답고 논리가 자세하고도 밝으며, 그것으로 적을 수 있는 소리와 어휘가 넉넉하고도 많음을 알고부터는 더욱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을 밝혀 드러내고, 뒤엉켜 어지러운 것을 바로잡아, 그 가치와 그 효용을 세상에 넓고 크게 펴겠다는 생각조차 맹렬하게 타오르매, 실로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다시피하며 연구에 힘쓰기를 20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다.
그 생애는 결코 이처럼 단순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항해술을 배우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측량술을 연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점의 점원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공장의 직공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시골에 돌아가 집안일을 돕기도 하고, 때로는 스승이나 벗을 따라 학업에 힘쓰고, 때로는 신문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교육자가 되기도 하였으며, 또 한때는 정치적 운동에도 참여하여 서울과 지방을 오르내리는 등 변화가 아주 많았으나, 국어 연구에의 뜻과 마음은 일찍이 한 번도 덜해지거나 줄어드는 일이 없었다.
그 생애는 아주 가난하고 고달픈 편이었으니,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은 거의 없고, 거느린 식솔은 적지 않았는데, 하는 일이라는 것이 또한 보수가 넉넉한 것이 아니므로, 한 집안 살림을 꾸려 가는 것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나, 한 가정을 이루어 따로 살림을 낸 뒤로는 집안일이든 바깥일이든 보살펴 주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살림을 혼자서 꾸려 가면서도 국어 연구의 노력을 일찍이 중도에서 그만두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이 사이의 마음고생과 애씀이 얼마나 지극하였을 것인가는 그 직접 당사자 외의 다른 사람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선생은 국어 연구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할 수 있으니, 자기 몸이나 자기 가정을 생각하는 마음도 없었으며, 명예와 이익을 생각하는 마음도 없었으며, 피곤함을 피곤함으로 느끼지도 않았으며,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느끼지도 않았고, 불가능을 불가능으로 보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이를 위하여 지극한 정성을 쏟았고 최선을 다하였을 뿐이니, 차라리 그는 이를 위하여 받는 지극한 고통과 수고로움을 가장 큰 쾌락으로 알았다고 할 것이다.
세상의 온갖 다른 일이나 재물 따위를 모두 국어 연구 앞에 희생한 것과 같이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국어 연구에 힘쓰니, 이 때문에 정신적인 피로와 육체적인 피로가 무한히 증대하였으나, 이를 돌보지 않고 그가 그대로 분발하여 나아가니, 이는 그의 일상을 아는 사람이 특별히 경탄하는 점이다.
어떻게 하면 이상을 실현할까 궁리하매, 그 노력이 예사로운 것일 수 없었다. 늘 무엇이든지 계획을 세우고 늘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실행하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배재 학당에 다닐 때에는 같은 학교 학생들과 같이 의논하여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였으며, 독립 신문사의 일을 맡았을 때에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마음을 합하여 국문 동식회를 이끌어 갔으며, 상동에 사설 학원이 설립되매 국어 문법과를 따로 설치하게 하고, 당시 의학교에 뜻이 통하는 벗이 있으매 그 안에 국어 연구회를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밤에는 야학 강습소를, 그리고 일요일에는 일요 강습소를 설립 운영하였고, 학부 안에 국문 연구소가 개설되었을 때는 그 연구의 핵심이 되었으며, 외국인들 사이에 한어 연구회가 생겼을 때에는 그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문제에 대하여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표준이 되었고, 공사립 학교에 국어과 과정을 가르치게 함과 동시에 그 일을 스스로 맡아 뿌리를 기르고 근원을 키우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조선 광문회가 설립되자 한국의 말과 글에 관한 문서 교정의 일이나 사전을 편찬하는 일에 힘을 쏟았으며, 자신이 평생 연구해 온 것을 뿌리 내리기 위한 운동으로는 조선어 강습원을 창립하여 뛰어난 인재들을 모아 그 가르쳐 이끄는 일에 정성을 다하니, 배움에 싫증을 느끼지 않고 가르침에 권태를 느끼지 않는 그 지극한 정성이 한 몸의 처지를 이렇듯 수고롭게 하였던 것이다.
교육계나 학문계에 있어서 선생의 지금까지의 공적과, 지금 선생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앞으로의 기대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잘 아는 바이니, 다시 무슨 말로 기리며, 어떠한 글로 칭송하리오마는, 선생으로 말하면 여러 해 동안 남몰래 쌓아 온 것을 거리낌없이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이미 무르익고, 우리가 당면한 처지로 말하면 우리가 선생을 믿고 우러러 바라는 것이 아주 깊고 아주 절실한 이때에, 올 갑인년 7월 27일 오전 6시 30분, 천만뜻밖에 서른아홉의 아직 할 일이 많은 장년의 나이로 이 세상을 영원히 버리시니, 이 우리 모두의 큰 슬픔과 공적이거나 사적인 크나큰 손실을 어떻게 메꿀 수 있을지? 아아, 어떻게 위로할 말이 없도다.
그러나, 선생에게 마음속으로 흠모할 것과 칭송할 것은 그 학문만이 아니라, 특별히 마음속 깊이 우러를 것은 그 하늘에서 타고난 숭고한 인격이니, 한평생 동안 마음속으로 생각한 일이나 실제로 행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자랑할 만하면서도 스스로에게는 부끄럽지 아니한 점에 있어서 선생과 같은 사람은 진실로 우리 시대의 모범이요, 모든 사람의 사표라고 할 것이다. 여러 가지 고상한 미덕이 현재의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작용하여 우리를 감화케 함이 큰 것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유풍이 영원히 뒤에 오는 사람들을 감동케 하고 분발하게 할 것이니, 국어가 존속하는 한, 선생의 공훈과 업적이 광명 성대할 것과 같이 그 인격의 감화는 영원히 우리 사이에 생명이 있을 것이다. 이 영세적 생명의 시작으로써 작으나마 현세적 생명을 작별한 설움을 위안할까 하노라.
선생이 남기신 일에는 조선어 강습원이 있으며, 남기신 저서에는 '국문 초학(國文 初學),' '국어 문전 음학(國語 文典 音學),' '국어 문법(國語 文法),' '말의 소리' 등이 이미 간행한 것과 원고 상태로 남아 있는 책 몇 종류가 있다.
[청춘(靑春) 제1호, 1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