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이 본 한국어 경어법
1. 외국인과 경어법
외국에서 산다는 것은 흥분도 되고 도전적이기도 하다. 자기가 잘 아는 환경과 일상을 넘어가서 전혀 낯선 곳에 가서 전혀 낯선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흥분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새로 살게 된 나라에 대하여 아주 익숙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무슨 일인가가 생겨서 내 나라가 아닌 줄을 확실히 깨닫게 되는 일이 많아서 외국에서 사는 것은 도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어의 경어법은 한국에서 사는 외국인에게 스스로 외국인임을 느끼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1.1. 경어법이란 존경하여 높이는 말에 관한 문법이다. 문법 책을 보면 경어법이란 말을 높임법으로 밝혀 놓고 있다. "문장의 주체나, 대화의 상대방을 높이는 표현법을 높임법이라고 한다."(이 글에서는 '높임법'이라는 말 대신에 '경어법'이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겠다.) 한국 학자들 자신도 경어법이 "문법에서 가장 까다롭다."고 하는데, 하물며 외국인이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이는 경어법이 언어의 모든 수준 즉 음운론에서 화용론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어법은 의사소통에 있어서 중요한 사회적 양상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그렇다. 어느 나라 말이나 다 상대방을 높이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경어법의 복잡성을 보면 한국어에서는 그 기능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 같다.
오늘날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된 뒤로 조선조 시대에 사용했던 궁중 술어나 용어는 다 없어지고 경어법은 아주 간소화되었다. 다행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시대극을 통하여 옛날의 경어법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렇게 궁중 경어법은 현대 사회에서는 쓰이지 않게 되었으나, 종교와 관계가 있는 의식과 책에서는 아직도 옛날의 경어법을 지켜 쓴다. 성경의 한국어 번역본을 보면 이런 예를 볼 수가 있다. 어떻게 보면 이는 시대착오이다. 그러나 이해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임금이심으로 공경을 받기 때문이다. 의식의 예를 들어 보자. 천주교회에서는 하느님께 말씀을 드릴 때 가끔 궁중 용어를 쓴다. 예컨대, '전당, 왕좌, 어전, 어지(御旨), 듭시다'와 같은 낱말을 쓰는가 하면, 종결 어미도, '-시나이다, -시나이까'처럼 높인다. 더욱이 천주교회에서는 오늘날 편지투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시옵소서, -오사, -사오니'와 같은 겸양법을 일반적으로 지키면서 하느님의 대명사를 '당신'으로 쓰고 있다.
1.2. 경어법에 대한 외국인의 반응은 여러 가지가 있다. 외국인의 국적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다. 동아시아 인은 유럽 인보다 한국어 경어법을 더 쉽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외국인의 성별에 따라서 반응이 다를 수가 있을 것 같다. 서양 여자들은 한국 여자의 지구력과 탄력성에 감탄을 하면서도, 경어법상으로 여성에 대한 대우를 못마땅하게 볼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외국인이 한국에 오는 목적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외국인이 사업가인지, 외교관인지, 학자인지, 선교사인지, 그 밖에 여러 가지 목적에 따라서 입장이 다를 수가 있다. 한국에 대한 선입견이나 느낌에 따라서 외국인 각각의 마음가짐이 다를 수 있다. 그 마음 자세는 한마디로 말하면 "한국인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 바로 그것이다. 한국인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고 판단하는 외국인은 배우기가 아무리 어렵다고 할지라도 경어법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는 것이 보람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1.3.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못 알아들으면 그것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이해하지 못하는 답답한 마음을 스스로 풀기 위하여 그러는 것 같다. 하여튼, 서양 사람들이 중국과 동아시아를 알게 되었을 때 거기서 쓰이는 대우법이나 경어법을 이상히 여기고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예를 들면, 만화책에 나오는 동양인들은 대개 중국인들이었는데 서양인에게 인사를 하고 대접을 할 때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만화는 우습게 하기 위한 것으로서 과장된 이야기이다. 예를 들면, 동양인은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의 집은 '더러운 곳'이고 그의 부인은 '멍청한 여자'이며 자녀들은 '무식한 놈들'일 뿐만 아니라 서양인에게 대접하기 위하여 고심하여 만든 음식은 '맛없는 먹이'라고도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양인들은 자기네가 모르는 경어법을 동양인을 비웃는 특징으로 삼았다.
만화책은 일반인의 사고방식을 보여 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어떤 문화를 올바로 나타내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을 수는 없다. 따라서 서양 학자들 가운데서 어떤 이들은 동양의 대우법과 경어법의 하나인 한국어 경어법을 연구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처음에 가졌던 호기심이 감탄으로 바뀌고 동양 문화의 이 특징을 존중하게 되었다. 그동안 한국에 잠시 머무르면서 사업을 한 외국인 사업가들은 자기네가 모르는 경어법을 수수께끼로 생각하고, 한국인과의 거래에 있어서 오해를 하기도 하고 불만을 품기도 했다.
1.4. 한편, 세계사를 보면 대단한 문명국들이 여럿이 있었다. 그런 나라 사람들은 자기네 문명의 발전에 대하여 자랑을 하면서 그렇지 못하는 나라의 사람들을 멸시하는 뜻으로 'barbarians' 즉 '야만인들'이라고 불렀다. 야만인은 인간으로 인정은 받았지만 못된 인간으로 간주되었다. 그리스 인들과 로마 인들, 그리고 중국인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을 그렇게 생각했다. 스페인 사람들도(당시의 유럽 문명의 입장으로 보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 그곳에 있었던 원주민들을 무조건 야만인으로 대했는데 아마도 종교 관계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왜냐하면 문화 문명적 측면으로만 보면 그들 원주민 가운데는 아즈텍(Aztecs), 잉카 (Incas), 마야(Mayas) 등과 같은 놀라운 문명을 이룬 민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프랑스나 영국도 똑같은 식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보는 소위 문명국들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느 나라건 스스로 문화적 동질성만 있으면, 자기와 같지 않은 문화를 가진 다른 나라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친다. 따라서 야만인은 문명된 사람들의 사회에서 같이 살 자격이 없으니, 만약 꼭 같이 살고 싶다면 그 사회의 맨 밑바닥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실정은 어떤가. 한국어 경어법은 외국인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역사의 흐름에 있어서 중국과 한국은 오랫동안 형제와 같은 밀접한 관계를 누려 왔다. 한국인들에게 중국의 입장은 너무나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세종 대왕의 한글을 천하게 여겼던 지식인들의 논거는 중국이 불쾌히 여긴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보면 외국인에 대한 중국인의 입장을 한국인이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중국에 조공을 온 각국의 외교 사절들에게 야만인들에게나 걸맞을 좋지 않은 거처가 주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더구나 한국의 거친 역사를 읽어 보면 한국인이 외국인을 야만인일 뿐만 아니라 말썽만 일으키는 사람들로 간주하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가 있다. 또한 한국을 은자의 나라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수가 있다. 뒤에 이 은자의 나라에 와서 그 문을 억지로 열게 한 사람들이 바로 외국인들이었으니, 그들에 대한 한국인의 입장이 굳어졌으리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어쨌든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외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대우법을 표현하는 경어법은 무엇인가 미흡한 점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경어법에서 분명하지 않은 것은 수완 좋은 한국인은 눈치로 보탠다.
근래에는 국제적 협력을 통하여 이루어진 발전을 환영하는 한국인은 외국인을 세상을 함께 돌아다니는 동료로 보게 되었기 때문에 경어법도 외국인에게까지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한국인은 그 외국인이 귀빈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면 대단한 관심과 친절을 베풀며 대접을 하게 된다. 그럴 때 그러한 대접을 받은 그 외국인은 쉽게 교만에 빠지게 되거나 혹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외국인이 말을 하는 사람인지, 말을 듣는 사람인지, 또는 이야기의 주제인지 하는 이 세 가지에 따라서 경어법이 다르다.
2. 한 외국인의 관견
지금까지 서술한 것은 일반론이다. 사실 경어법에 대한 외국인의 의견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필자는 경어법에 대한 필자 자신의 소견을 서술하려고 한다.
2.1. 우선 필자 자신의 배경을 소개하겠다. 필자는 한국에서 천주교회의 수도자와 사제로서 오랫동안 선교 활용을 해 왔다. 바스크 인(Basque)으로 태어난 스페인 사람이고, 학문은 언어학을 전공했다. 한국말을 할 줄은 알지만 아직도 제대로 잘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스스로를 호되게 꾸짖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아직도 말을 배우는 만년 학생으로 생각하고 있다. 필자의 이런 배경을 알고 나면 독자는 필자가 지금까지 서술한 바와 앞으로 전개할 경어법에 대한 논평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2. 무엇보다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경어법이 처음 보기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다는 점이다. 경어법은 문법상으로는 어렵지 않다고 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는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경어법이 언어의 모든 수준과 관계가 있고, 화용론적으로 볼 때 문법 이외에도 사회적으로 중요한 요소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양인이 보기로는 한국어 자체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경어법이 있어서 엎친 데 덮친 격이 된다. 동사 어간에 선어말 어미인 '-시-'를 붙이거나, 명사에 '-님/-님께/-님께서'를 붙이거나 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지만 음운의 변동도 기억해야 하니까 경어법이 차츰차츰 어려워진다. 더욱이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것들인 '먹고, 자고, 살고, 말하고, 아프고, 늙고' 하는 것들처럼 빈번히 쓰이는 낱말들이 높임말과 낮춤말로 등분되니 야단이다. 뿐만 아니라, 상대 높임법의 덕택으로 상대와의 관계에 따라서 여섯 가지 대우 방식을 구별하는 것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먼저 이야기하기 전에 상태를 살펴서 격식체 아니면 비격식체 가운데 어느 것을 사용해야 할지를 잘 판단해야 할 것이다. 결국 경어법은 외국인으로 하여금 혼동케 만든다. 사실 서양 사람이라면 존경하는 뜻으로 'Mister' 아니면 'Senor/Don'만을 이름 앞에 붙여서 쓰거나, 제2인칭 대명사로 'You/Usted'만을 사용하면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한국어에서 인칭 대명사는 서양식의 보통 대명사가 아니라 상대방의 사회적 지위나 나이 등에 따라서 각각 다른 호칭을 써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차원을 고려해야만 경어법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가 있다.
언어는 언어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회를 위하여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 이 점은 경어법에 있어서 특히 그러하다. 상대방을 존경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말하는 상대와 상황에 따라 마땅한 높임이 무엇인지 또 그것은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무슨 기준으로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참작해야 할 사회적 요인이 많아서 그 질문에 응답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한국어 경어법에 관계된 사회적 중요한 요인은 다섯 가지가 있을 것 같다(Hwang 1975). 이를 중요성에 따라서 차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필자는 경어법을 실천하려고 할 때 위에 든 요인과 그 순위를 고려한다. 그래서 소속, 권력, 친밀, 형편, 의향 등의 다섯 가지 개념을 기억하려고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음운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언급하지 아니했지만, 이것 또한 경어법과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비분절 음운(길이, 높낮이, 세기) 및 어감이 이에 해당된다. 경어법에 따라 존경의 뜻으로 말소리를 연하게 내야 하고 억양도 길고 부드럽게 해야 된다. 한국어에서 경어법의 일부로 음성을 절제하는 것을 보면 스페인이나 지중해권 문화와 관계가 있는 민족들과는 정반대인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나라들에서는 인사를 할 때 감정이 넘쳐흐르는 인사를 해야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뜻이기 때문이다. 국어 경어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부터, 길 건너서 'Hello'라고 소리치는 인사를 들을 경우에 본능적으로 정감이 넘치는 인사로 받아들이려다가도 실제로는 별로 존경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이런 사실을 쉽게 기억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즉, "말소리가 크면 클수록 존경은 더 작다.(The more steam, the less esteem)"
경어법에 관하여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하면, 그것은 육체 언어(body language)라고 하겠다. 절제된 몸짓이라야 언어의 음운과 어울린다. 그렇기 때문에 인사할 때 합당한 절을 해야 하고, 상대방을 쏘아보지 않고 눈을 내리뜨는 것도 지켜야 하며, 몸을 천천히 움직이는 것 등등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도(茶道)나 제사(祭祀)에서 사소한 규칙까지를 엄격하게 지키는 정신이 경어법에서도 드러난다. 필자는 이것을 잘 기억하기 위하여 다음 원칙을 세웠다. 즉, "높으면 높을수록 힘이 든다.(The more dignity, the more energy spent.)" 이를 반대로 말해도 같은 뜻이 된다. 즉, "낮으면 낮을수록 쉽다.(The less dignity, the less effort)" 예를 들 것도 없이, 말의 허리를 끊어 버리는 낮춤말의 종결 어미를 보면 이 원칙이 옳음을 알 수 있다. 낮춤말을 '반말' 즉 'half speech'라고 하는 낱말 자체가 이런 정신을 잘 나타내는 것 같다.
2.3. 경어법은 필자에게 항상 도전적인 것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어떤 때는 판단이 부족하고, 어떤 때는 반사 작용이 늦다. 따라서 과거에 실수를 했고 앞으로도 또 실수를 할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국에서의 직분이 선교사로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낮춤말을 쓰기가 싫다. 어린이들에게 말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어쩔 수 없이 낮춤말을 쓸 때가 있지만, 그럴 때는 늘 마음이 불안하다. 마음이 약해서 그런 것 같다. 어떻든 겸손한 모습으로 움직이고 싶지만, 그렇게 안 될 때가 너무나 많다. 상대방을 높이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는 것도 한계가 있는 듯하다. 한번은 동료 학자들 앞에서 공손법을 계속해서 사용했더니 자신이 이룩한 연구 업적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음번에는 이를 피하려고 같이 높여 줄 것을 요구했더니 거만하다고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얼마 전에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었다. 생일 차이가 이십 일밖에 되지 않은데도 필자의 형 노릇을 하겠다는 형제 사제가 한 분 있었다. 왜 그렇게 한사코 형 노릇을 하려고 하느냐고 웃으면서 물어보았더니, 자기는 많은 형제 가운데 막내여서 동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즉시 필자가 양보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항상 양보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필자를 만나자마자 대뜸 반말로 이야기하는 어른들과 노인들은 존대하면서도 전혀 양보할 마음이 없다.
한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경어법에 대하여 어떻게 할지 개인적 방침을 마련하게 되었다. 먼저, 경어법을 아는 한 잘 지키는 것이다. 이로써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자격증이나 여권은 얻은 셈이 된다. 사람들은 존경받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응분의 존경을 못 받을 것 같으면, 자신의 나이를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러면 낯선 사람과 같은 조심스런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상대방이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조심을 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자신의 나이 따위를 스스로 밝히지 않았는데도 상대방이 반말을 쓰면 필자 역시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말투를 따라서 한다. 물론 예외의 경우도 있다. 사실 경어법의 정신은 매끈하고 정중한 사회적 관계를 도모하고 유지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4. 한국어 경어법을 생각할 때마다 에스키모(Eskimo)의 눈을 생각하게 된다. 에스키모 사람들은 눈과 얼음으로 가득 찬 나라에서 사니까, 눈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눈'이라고 한 단어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가 식별하는 종류에 따라서 각각 다른 낱말을 사용하여 눈의 이름을 구별하여 부른다고 한다. 이것은 눈 속에서 무사히 살고 번영하며 편안케 지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밀집된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할 한국인이 무사히 지내고 번영하며 편안하게 오래 살려고 한다면 경어법을 꼭 지켜야 할 것 같다. 그러므로 경어법은 한국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며 판단해 주기도 한다. 호프(Whorf)의 가설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유교 사상을 이해하지 않고는 한국어 경어법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조선조 시대에 들어온 공자와 주희의 철학은 1392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이 지대하다. 공자가 가르친 'Li'라는 '예(禮)'는 한국어 경어법과 특별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사회의 안정을 소중히 여기고 이를 실현하려고 노력했던 공자는 서로 존경하는 것을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했고, 각자 자기와 남과의 지위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을 덕행으로 간주했다. 이 모든 것이 아주 좋은 것 같지만 문제점이 있다. 예를 들어서, 상대에게 존경을 드려야 하는데 왜 그래야 하는가? 존경할 것은 무엇인가? 상대방의 존엄성일 것이다. 그러나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존엄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각자가 원래 타고나는 것인가 아니면 각자의 능력과 교육을 통하여 사회적으로 인정받아야만 비로소 존엄성을 갖게 되는가? 이와 유사한 의문들 때문에 외국인인 필자는 경어법을 잘 이해하고 올바로 사용하는 데 있어서는 흔들리는지도 모른다.
공업화와 민주화가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런 사회적 변화에 따라서 한국어 전체와 특히 경어법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높임말이 천천히 사회의 낮다고 생각되어 온 계층에까지 미치고 있다. 택시 운전수에게 '기사님'이라고 높여 부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반대로 '반말'은 사회 계층을 거슬러 올라가서 확장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회사의 여러 계급의 직원들이 퇴근 시간에 스스럼없이 서로 반말을 쓰는 것이 보통인 것 같다. 한국 사회에 이런 면에서 평등하게 되어 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현대화의 문이 활짝 열렸으니 어쩔 수 없겠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하나 있다. 현대 생활에 있어서 피하지 못할 자동차 교통을 두고 이를 겪지 못한 공자가(그리고 경어법이) 무어라고 말할는지 의문이다.
과학 기술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어와 경어법은 반드시 변할 것이다. 이는 새로운 전달 수단과 매체 때문이다. 경어법의 간소화를 피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미 그 경향을 볼 수 있다. 한 예로, 인쇄물에 보이는 '해라'체에서 높임과 낮춤의 중화를 보면 이를 예측할 수 있다. 경어법에는 앞으로 더 많은 그리고 더 빠른 변화가 생길 것이다. 사회적으로 변화의 바탕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바뀌고 있다. 과학 기술 시대의 사회적 안정을 위해서는 각자의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세계의 지식과 정보를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빠르게 나누어 갖는 것이 중요하다.
3. 맺음말
지금까지 서술한 바는 필자 개인의 소견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정직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무지와 선입견 때문에 잘못 이해했을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한국에 대하여 느낀 바로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문화적 동질성이 몹시 강하다는 것이다. 경어법이 좋은 예이다. 필자와 같은 외국인이 한국에서 배울 것이 많다. 상대방의 마음 상태에 대한 인식 또 상대방이 스스로 느끼는 존엄성에 대한 감수성 등 '눈치'라는 개념에 내포된 그 귀한 지식이 그 가운데 한 가지이다. 또한 경어법이 가르치는 사회에 대한 책임감도 배울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이 거울을 보듯이 참으로 서로 터놓고 볼 수 있다면 서로 자기의 빛과 어두움을 보게 될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덕(德) 즉 인(仁)이다. 또한 인간을 아는 것이 학(學)(과학 /학문)이다."라고 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하여 덕행과 과학을 함께 실천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필자는 스페인 철학자인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의 말을 오랫동안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 말은 "Cultura es tolerancia." 즉 "문화는 관대함이다."라는 귀한 말이다.
4.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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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 Juck-Ryoon(1975), Role of Sociolinguistics in Foreign Language Education with Reference to Korean and English Terms of Address and Levels of Deference. Ph. D. Dissertation.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Doeblin, A. (1965), The Living Thoughts of Confucius. New York:David McKay.
Lee, O-Young(1967), In This Earth and in That Wind; This is Korea. Seoul:Hollym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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