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산책]

우리말·우리글 논틀밭틀로 휘뚜루마뚜루 다녀 보세

兪萬根 / 성균관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우리말·우리글은 우리 겨레한테 금은보화보다 더 귀중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말·글이 정말 잘 익은 열매처럼 탐스럽고 자랑스러운 면과 그 반면 벌레 먹고 그냥 놔두기 창피스러운 점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그 보배스럽고 자랑스러운 면을 일일이 이야기하자고 해도 끝이 없을 테지만, 여기서는 우리말·우리글 동산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 주로 벌레 먹은 데, 부끄러운 곳 예닐곱 군데를 외면하지 말고 잠깐 직시해 보기로 하자.

1. 겨레 힘 뭉치는 표준어
    사람이 딴 짐승과 달리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 놀라운 문명을 꾸미게 된 것은 사람들끼리 협동하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며 이러한 협동이 가능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이 말과 글을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좀 더 나은 나라, 좀더 밝은 문명을 이룩하려는 뜻을 가진 현명한 經世家, 統治者들이 자기 국어 순화·표준화 사업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닫고 오랫동안 그 일에 큰 정성과 힘을 기울여 왔다.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끼리는 생각의 오감이 원활해서 일체감 속에 협동이 잘되지만, 다른 말, 딴 사투리를 쓰는 사람에 대해서는 온갖 편견을 떠올리기 쉽고, 속마음이 如合符節로 척척 맞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당대 사람들끼리 협동이 잘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또한 바람직한 것은 선조와 후손 간에 글을 통해 협동이 계속되는 것이다. 가령 백 년 전 글과 오늘날 글이 아무 차이 없다면 선조의 마음과 가르침을 후손이 잘 읽을 수 있지만, 그것이 아주 딴판이 되어 있는 경우에는 겉보기보다 자못 중대한 문제가 생긴다.
    대개 전쟁을 겪고 나면 어떤 언어든지 큰 변화를 입는데, 이것은 전쟁 통에 부모와 어른이 자식과 어린이의 잘못된 말을 바로잡아 줄 겨를이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말이 크게 달라짐은 通時的 협동을 방해하는 것이라 문화사적으로 심각한 사건인 것이다. 왜냐하면 共時的으로나 通時的으로나 갈가리 갈라진 백성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以夷制夷나 분할 통치(Divide and rule.)의 방법을 쓰는 외세의 밥이 되기 아주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어 순화' 또는 '표준어 확립'이 가진 깊은 속뜻을 알고 난다면, 우리는 지금같이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우리 국어 현실을 이대로 마냥 내버려 두자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2. 사투리 범벅 放送 問題
    오늘날에는 라디오·텔레비전(美: 티비, 英: 텔리/텔레비쉰, 韓: 歸化 定着된 語形은 '테레비') 보급이 잘 되어 있어 정부가 표준어 확립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그 보급 의지만 있다면 쉽게 보급할 수 있다. 가령 BBC 영어, NHK 일본어라 하면 각각 표준어 발음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건만 KBS 한국어(?), 또는 MBC 한국어(?)라 하면 '사투리 범벅'의 대명사라 해서 지나친 말일까? 이를테면 '證券'(jungkwaun)· '政權'(jaungkwaun)·'正權'(jeuhnggwaun), 또는 '節約'(jauryag)·'前略'(jaullyag)·'戰略'(jeuhllyag)의 발음 차이, 혹은 '세 집'(三家, seh jib)·'새집' (鳥巢, saih jib)·'새집' (新屋, sib jib)의 발음 차이를 구별 못하는 사람들도, '放送人'이라니 어이없는 일이다. 이래서 가뜩이나 지역 감정 문제로 불난 집에 공영 방송이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행 중 다행은 수년 전, 뜻있는 방송인들이 KBS 한국어 연구회를 탄생시켜 표준어 보급, 방송 언어 순화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시작이 반이다. 거기에 큰 기대를 걸어 본다.
    마이크 앞에 나서는 사람이 정확한 발음을 해야 함은 물론, 그 뒤에서 제작 책임을 맡고 있는 PD도 정확한 발음을 알아서 녹음할 때 발음상 잘못을 멍하니 그냥 통과시키지 말고 고쳐 주어야 한다. 우리나라 방송국도 직제 편성상 BBC처럼 發音課(Pronunciation Unit)를 두고 음성 언어 훈련을 강화하거나 아예 사투리 쓰는 사람을 방송인으로 채용하지 말 것이다.
    방송국 수뇌부는 물론, 특히 우리나라 같은 데서는 대통령이 친히 言語와 統治와의 관계를 인식하고 방송 언어/표준어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면 좋은 효과가 있을 듯하다. 晩時之歎이 있지만, 그렇게 하면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知性 있는 대통령으로 길이 칭송될 것이다.

3. 新聞에 끼여든 非文法
    전쟁이나 사회 혼란은 언어 혼란을 가져오는데 우리나라 같은 데서는 학교 국어 교육도 이런 상태를 내버려 두다시피 하고 입시 준비만 시키기 때문에 이 언어 혼란이 신문에까지 올라온다. '애먹는다' 같은 비표준어가 신문에 버젓이 활자화되는가 하면, 動詞·形容詞 語尾 구별이 잘 안 되는 일부 방언 영향으로, 문법에 안 맞는 활용 어미 사용이 신문에 마냥 되풀이되고 있다.
    이를테면 동사 '접는다'와 형용사 '좁다'(현재 시제)를 가지고 語尾 비교를 해 보자.

접는다 접지 않는다 접지 않느냐
좁다 좁지 않다 좁지 않으냐

이렇게 동사에 오는 '않는다/않느냐'와 형용사에 오는 '않다/않으냐'는 서울말/표준말에서는 혼동되는 일 이 없다. '그렇지 않는다/않느냐'(動)·'그렇지 않다/않으냐'(形)처럼 늘 구별한다. 그러나 동남 방언에서는 이 語尾가 흔히 혼동된다. 즉 '좁으냐/좁지 않으냐'를 '좁느냐/좁지 않느냐'처럼 잘못 쓰는 것이다.
    그리고 '접나/접지 않나,' '좁은가/좁지 않은가' 같은 현재 시제 의문형에서 동사 어미 '-나?'와 형용사 어미 '-은가?'의 혼동도 있다. 예컨대 '괜찮나'(朝鮮日報 '88. 4. 10. 十二면 3단)는 '괜찮은가'의 사투리다.
    그리고 '있다/없다'의 否定形은 '있지 않다/없지 않다'이므로 그 의문형은 '있지/없지 않으냐'건만 마치 '있지/없지 않는다'라는 語形을 자주 쓰기라도 하듯이 이것을 '있지/없지 않으냐'로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아마 딴 신문에도 이런 誤用例가 많겠지만 이제 편의상 任意 抽出式으로 朝鮮日報를 집어 들고 대강 살펴보기로 한다. 그 신문 날짜···을 밝히고 그 誤用例와 고친 것을 적어 놓는다.

'89. 3.25. 三면 聞外聞: ×충분하지 않느냐(않으냐)
5.26. 一면 8단: ×와야 하지 않은가(않느냐/않나/않는가)
5.26. 一면 10단: ×갖고 있지 않는 것(않은 것)
5.26. 五면 7단: ×합당치 않는(않은)
6.17. 五면 左邊 제목: ×서고 싶나(싶은가)
6.20. 四면 6단: ×무겁느니 가볍느니(무거우니 가벼우니/무겁다느니 가볍다느니)
6.26. 十八면 1, 2단 제목: ×왜 잦나(잦은가)
9.30. 十三면 2단: ×어둡지 않느냐(않으냐)
11.23. 四면 2단: ×좋지 않느냐(않으냐)
11.26. 四면 6단: ×원하고 있지 않느냐(않으냐)
'90.  4.  8. 三면 2단: ×빠질 수도 있지 않느냐(않으냐)
4.11. 四면 聞外聞 제목: ×시끄럽나(시끄러운가)
4.11. 四면 2단: ×할 수도 있지 않느냐(않으냐)
5.27. 十八면 4단 '길': ×다르지 않느냐(않으냐)
7.25. 十三면 세로 1단: ×옳나 (옳은가)
8.18. 二면 '기자 수첩': ×없지 않느냐(않으냐)
8.19. 三면 8단: ×없지 않느냐(않으냐)
8.24. 一면 10단 '八面鋒': ×많나(많은가)
10.24. 四면 2단 聞外聞: ×없지 않느냐(않으냐)
'91.  3.24. 三면 社說 1단: ×바람직하지 않는가(않은가) (以下 생략)

이렇게 不知其數로 誤用例가 많지만 그 신문에 正用例가 더 많은 것은 물론이다. 서너 해 전에는 이런 誤用例가 눈에 띌 적마다 신문사 교열부에 전화를 하기도 했지만 어떤 面 담당자는 馬耳東風이거나 오히려 귀찮아하는 기색이 있어 전화는 그만두기로 하고 그 후로 잘못된 예가 다시 눈에 띄면 더러 수첩에 기록해 오고 있다.
    이 글을 쓰다가 금방 배달된 東亞日報(91. 8. 12)를 잠깐 들춰 보니 제5면 왼쪽에 '깨어 있습시다'라는 제목이 눈에 띄는데 이것은 물론 '~있읍시다'의 잘못이다. '먹습니다-먹읍시다, 받습니다-받읍시다, 찾습니 다-찾읍시다'의 예를 보면, '있습시다'가 왜 잘못인지 누구라도 대번에 알 것이다.
    같은 신문 제9면 왼쪽에 '아버지에 첫 편지'라는 제목이 눈에 띄는데 이것은 '아버지에게 첫 편지'라야 옳다. 나중에 이 글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사람·동물 與格(dative)에 '에' 대신 '에게'를 써야 하는 것은 日文法·英文法 등과 다른 우리 국어 문법의 특색이다.
    또, 어제 東亞日報(91. 8. 11) 제四면 바른쪽 꼭대기, 일본 수상이 중국 의장대를 사열하는 장면 사진 설명에서 "중국 의장대의 사열을 받고 있다."고 한 것도 主客顚倒의 어이없는 잘못이며, "중국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고 해야 말이 된다.
    명색 우리나라 대표적 신문들이 요즈음 와서 왜들 이럴까?

4. 단어 허비와 음절 낭비
    漢文이나 英文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 분량이 많이 늘어난다. 우리 국어 자체의 특성 때문에 음절 수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들은 장황하고 번잡한 표현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고 간결하게 줄이는 재주가 없나 보다.
    우리나라 텔레비전(우리가 보통 쓰는 '테레비'는 잘 줄인 것이다. '텔레비전'이나 '텔리비전'보다 훨씬 낫다. ※美:티비, 英:텔리, 日:데레비, 韓:테레비) 일기 예보를 들으면 간단히 '지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을 꼭 '이 시각 현재'라고 길게 늘여 그것을 3~4분 이내에 대여섯 번씩 되풀이한다.
    런던 지하철 어떤 역에서는 승객이 차에서 내리다 넓은 틈에 발이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방송을 하는데 그때 나오는 소리가 마치 [마엔너갑] 그러는 것처럼 들린다, 이것은 "Mind the gap!"(틈 조심!) 이라고 하는 것이다. 겨우 세 음절로 된 문장을 두어 번 되풀이해 방송한다. 이와 똑같은 경우에 런던보다 100년 이상 늦게 최근 건설된 서울 지하철에서는 다음과 같이 수십 음절로 방송을 한다.

"이 역의 승강장은 복선입니다.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어서 발이 빠질 염려가 있사오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내용 45음절에다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말까지 붙여 50음절이 되는데 3 對 50이라는 비율은 대단한 것이다. 가령 "내릴 때 틈 조심: 발밑 틈 조심하십시오."쯤으로 줄이면 어떨는지?
    영어에서는 옛날 로마 詩人 오비디우스(Ovidius)를 두 음절로 줄여 '오빋'(Ovid), 이렇게 부르고 원명 Ovidius는 영어 사전에 싣지도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우리는 '칼 막스'라는 사람 이름을 원음 음절 수대로 두 음절 '칼 막'쯤으로 줄이기는커녕 심지어 일본식인지 '카를 마르크스'처럼 기다랗게 잡아 늘여, 독일어나 영어 발음 2음절을 6음절로 만들어 쓰기도 하니, 발음할 때나 글로 쓸 때나 그 불편이 말이 아니다. 이것은 설익은 외국어 지식, 언어학적 무식이 불러온 자승자박의 불편이다.
    영어로 New York은 두 음절인데 한때 우리가 '뉴우 요오크'로 적다가 지금 '뉴욕'으로 定着되었으니 이것은 事必歸正, 아니, 語必歸正이 된 것이다. 우리는 외래어 표기에서 음절 수 증가 억제를 늘 염두에 두면 좋을 것이다.

5. 끊임없는 일본 말 영향
    항일 시대에 우리가 일본 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더라도 광복 이후에까지 그 올가미에 새록새록 얽매이고 있는 것은 어쩐 일인가? 가령 '좀 더 빨리, 좀 더 높이, 좀 더 세게' 그래야 할 것을 '보다 빨리, 보다 높이, 보다 세게' 그러는 것도 일본식 말투라고 하지만, '참작한다/고려한다'를 '감안한다'로, '절차/과정/순서'라 할 것을 '手順'으로 쓰는 것은 새로운 일본 말 영향이다. '手' 字든 일본 말을 그대로 우리말에 쓰면 이상하게 되는 것은 '手順' 말고도 많다. 가령, 편지-手紙, 장갑-手袋, 손질-手入, 솜씨-手際 같은 '手' 字 돌림 일본 말을 국어에다 어떻게 섞어 쓸 수 있겠는가?
    가장 어이없는 것으로는 '戰斗·七才·死体' 같은 일본식 약자 표기가 있는데 여기서 '斗··死'는 각각 '鬪··屍의 일본식 약자이기 때문에 발음상 결코 *[전두·칠재·사체]가 아닌 것이다. 우리말로는 각각 '전투·칠세·시체'인 것인데 특히 '시체'의 경우는 屍와 死가 의미상 가깝기 때문에 잘못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가장 크다. 아닌게 아니라 요즈음 신문이나 방송에까지 일본식 shitai(屍體 대용 표기 死体)가 '사체'로 둔갑하여 쓰이고 있으니 일본 常用 漢字에 '屍' 字가 드느냐 안 드느냐에 따라 우리말이 '시체'도 되었다가 '사체'도 되었다가 이리 펄럭 저리 펄럭 흔들린다면 나라 있고 국어 있는 백성으로서 우리 체면이 도무지 말이 아닌 것이다.
    신문이나 방송은 取材源이 되는 딴 기관(특히 官廳)으로부터 혹시 일본식 '死体'(shitai)로 표기된 자료를 제공받더라도 그것이 국어로서 아주 잘못된 말임을 깨닫고 우리말 '시체'로 고쳐서 보도해야 될 것이다.

6. 'of·の' 탓에 남용하는 '의' 字
    개화기 신소설 제목에 '血의 淚'(1906)·'鬼의 聲'(1907) 같은 것이 있는데 이것은 血淚·鬼聲의 일본식 말이다. 당시에 일본식 말투 '의' 字 넣기는 큰 유행이었던 듯, 심지어 周時經 선생의 저서 이름으로 '말의 소리'(1914)까지 있다. 실은 그것이 '말[馬]의 소리'가 아니라 ':말소리'(speech sounds)를 나타낸 것이니 그 당시 유행 물결에 주시경 선생도 빠지고 만 것이 아닌가 한다.
    '훈민정음' 序文에는 첫머리에 '國之語音......'이라 하여 '之'字가 한 번 나오는데 諺解에서는 이것을 '나랏말미......'로 솜씨 좋게 옮겼기 때문에 그 諺解 序文에는 결국 '의' 字 토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서문을 미국의 '훈민정음' 연구가 레드야드(Ledyard, 李杜也)가 영어로 옮긴 것을 보면 of가 네 번 나온다. 이 英文을 오늘날 영어 잘하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주고 번역시켜 보면 아마 십중팔구 '의' 字 토를 서너 번 쓸 것이다. 이런 추세에서 '콰이江 다리'가 '콰이江의 다리'가 되고 '예술 전당'이 그만 '예술의 전당'이 된 것이다.
    지금도 助詞 '의'가 서울말에서 [에]로 발음되지만 옛글에서는 표기상으로도 '의'와 '에'가 혼동되었다. 與格 '에게'도 '의게'로 적힌 것이 많았다. 그래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所有格 '의/에'는 사람·동물에 주로 쓰고 事物에 별로 쓰지 않으며, 事物에 '의/에'를 쓰면 處格이 되는데 사람·동물의 與格에는 '의/에' 대신 반드시 '의게/에게'를 써서 정연하게 구별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동물> 사람의/에 다리[人脚] 사람의게/에게 보낸다
소의/에(:쇠) 다리[牛脚] 소의게/에게 보낸다
말의/에 다리[馬脚] 말의게/에게 보낸다
<事物> 漢江 다리[橋] 漢江의/에 간다
밥상 다리[脚] 밥상의/에 놓는다
학교 대문 학교의/에 간다.

이러한 助詞 용법 전통을 오늘날 100% 지킬 수는 없지만 외국어 번역에서 of··de가 나올 적마다 번번이 '의'字 토로 번역해 놓는 것은 너무 번잡하고 곤란한 일이다. 만약 '의'字를 생략해도 의미상 혼란이 없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말이 된다면 事物 다음에 오는 助詞 '의'를 애써 생략하는 것이 좋다.

7. '동경·북경'과 '도오꾜·베이징'
    "사람 이름, 땅 이름 같은 고유 명사 발음은 세계 공통일 것이니 고유 명사는 현지 원음을 쓰자." 하는 생각은 언어학을 모르는 참으로 소박한 생각이다. 이것은 수탉 우는 소리가 발음상 세계 공통일 것이라는 망상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수탉 우는 소리가 '꼬끼오(韓)·고께꼬꼬(日)·코꺼두들두(英)·키케리키 (獨)·꼬꼬리꼬(佛)......'처럼 언어마다 마냥 다르듯이 땅 이름만 해도 '런던'은 '론드라(伊)·롱드르(佛) ......'도 되며 '빠리'는 '패리스(英)·빠리지(伊)......'도 되고, '베네찌아'는 '베니스(英)·브니즈(佛)......'도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이징'(中)은 '북경'(韓)이 되고 '도오꾜'(日)는 '동경'(韓)이 된다. 일본 사람조차도 서울에서는 동경을 '동경'이라 한다. 서울 시청 뒤 東京 銀行 서울 지점에 일본 사람들이 내건 한글 간판은 그 지점이 처음 생길 때부터 '동경 은행'이었다.
    광복 전 항일 시대에도 우리는 '동경·대판·풍신수길......'처럼 우리 漢字音으로 일본 고유 명사를 말했다. 外國語와 外來語를 제대로 구별한 것이다. 그 당시 京城 조선어 방송에서도 줄곧 그렇게 발음해 왔었는데 어느 날 날벼락이 떨어졌다. 일본 제국 패망 직전, 발악적으로 우리나라를 일본화하려 할 때 고유 명사 현지 원음식이라 하여 조선어 뉴스 방송에 '도오꾜·오오사까......' 같은 일본 말을 섞어 넣으라는 벼락 지시를 내린 것이다. 動機가 불순하고 입 놀리기 부자연스럽게 하는 이 부당한 지시에 반발하여, 당시 放送 課長 沈友燮은 사표를 던지고 방송국을 떠나기까지 했다('아나운서' '91년 3·4월 호. 노정팔 氏 증언). 이런 경위로 '동경·대판......'이 '도요꼬·오오사까......'로 강제 변경된 것인데 그때부터 50년, 광복 50년이 가까운 지금, 공영 방송이 아직도 '동경·대판·공동 통신·일본 경제 신문......'을 앵무새처럼 '도오꾜·오오사까·교도 통신·니혼 게이자이 신문......'하고 있으니 우리는(특히 방송인은) 도대체 정신이 있는가,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