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1. 학습 경험에 대하여
1.1. 들어가며
한국어 실력이 아직도 서툰 단계에 있는 필자로서는 이런 주제로 글을 쓰기가 그저 거북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나는 한국어를 이렇게 배웠다기보다는,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한 일본인 학습자로서 학 습 과정에서 부딪히는 한국어의 어려운 점이 주로 어떤 것들인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써 보고자 한다. 스스로의 경험을 객관적으로 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될 수 있는 대로 객관적·구체적으로 쓸 수 있었으면 한다.
이하에서는 먼저 필자가 한국어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배웠는가를 간단히 소개한 뒤, 2 이하에서는 그 과정에서 부딪히게 된 한국어의 어려운 점들을 각각 발음과 문자, 문법, 어휘, 표현 기타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1.2. 한국어 학습의 동기와 학습 경험
필자가 한국어를 공부해 보려고 생각한 것은 1973년 봄이었다. 그때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던 필자에게는 별로 이렇다 할 명백한 동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재일 교포인 친구가 있었다는 것과, 70년대 초부터 한때 유행하던 '일본 속의 한국 문화 찾기' 붐이 직접·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어서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이 학습의 동기라면 동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당시 주위에 한국어를 가르쳐 줄 사람도 없었고 텔레비전·라디오 등의 방송 교육도 없었기 때문에 '조선어 사주간'(1)이란 책으로 독습해 보았으나, 어린 중학생이 혼자서 공부하기에는 너무나도 힘에 겨운 것이어서 중도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책 중에 나오는 한글로 표기된 한자어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마침 그때 누가 한국에서 만든 수첩을 주었는데 그 수첩 맨 뒷부분에 상용한자 1,800자 즉 가나다라순으로 된 일람표가 붙어 있어, 그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특히 한국 한자음과 일본어의 1946년 이전의 표기법인 역사적 가나 표기법에 의한 한자음 표기 사이에 많은 규칙성이 있는 것을 발견해 더욱더 흥미를 느꼈다. 그렇게 해서 비교적 많은 한자음을 기억하긴 했으나, 그것은 하나하나의 한자를 한글로 어떻게 표기하는가에 대한 지식일 뿐, 실제 발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74년경에 '조선어 사주간'을 다시 보기 시작했지만 발음에 관한 설명 부분은 역시 빼놓고 읽었다. 74년부터 서울에 사는 중학생 2명과 편지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영어로 하다가 75년 들어서 어느 날 갑자기 한국어로 된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서점에서 사 온 '조선어 소사전'(2) 이란 사전으로 해독을 시도해 보았지만 해석이 잘 안 되었다. 그러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마따나 그때부터 서로 한국어로 편지를 써서 보내기 시작했다. '소사전'의 '조선어 문법 대요'와 '사주간'을 참고로, 편지를 쓰거나 해독하거나 하는 데에 편리하게끔 간단한 어미의 일람표 같은 것을 만들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나의 일본어 조사에 대해서 여러 개의 한국어 어미들이 대응하게 되어 (예: ᄂ데, ᄂ바, 거니와, 지마는, 건마는, 나/ga), 그것들을 어떻게 구별해서 써야 할지 잘 몰라 아무렇게나 써서 보냈더니 상대편에서 고쳐서 보내 주었다. 76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계속해서 무모한, 말도 안 되는 한국어로 편지를 1주일에 한두 번씩 써서 보냈다. 고쳐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인지 매번 고쳐 주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고쳐서 답장과 함께 보내 주었다. 돈도 안 내고 통신 교육을 받은 셈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들에게 미안하기만 하다. 그들과는 그 후 10년 이상 편지를 교환하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기초 조선어',(3) '알기 쉬운 조선어',(4) 김소운의 '한일 사전',(5) '조선어 1600, 상'(6) 등을 비롯해 입수할 수 있는 사전, 교재, 독본류를 사서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 3년 후에는 한자어가 많은 책이 라면 어느 정도 해독할 수 있게 되었지만 소설은 전혀 읽지 못했다. 최인호의 '바보들의 행진'을 일어 역과 대조하면서 읽으려다가 포기하고 만 일도 있었다.
발음에 대해서는 그전에 빼놓고 읽지 않았던 발음에 관한 설명과, 소리들이 서로 변화하는 규칙들을 공부해 보았지만 정확한 발음을 훈련받을 기회는 없었다. 또 예컨대 '수학여행' '못 읽는다,' '못 알아듣는다' 등이 실제로 어떻게 발음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79년 대학 1학년 때, 도쿄 외국어 대학에서 일반 시민을 위한 한국어 공개 강좌가 열리게 되어 필자도 참석하였다. 교재는 자체 교재를 사용했다. 그 교재를 만드신 간노 히로오미(菅野裕臣) 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이 직접 가르쳐 주셨다. 여기서 굉장히 많은 것을 배웠다. 한마디로 뭔가 가슴이 확 트인 것 같았다. 특히 발음과 문자와의 관계, 용언의 활용 등 그때까지 잘 몰랐던 것, 궁금하던 문제들이 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이 공개 강좌는 기간이 너무 짧았다. 그 후 현대 어학숙,(7) 새로 개설된 한국 문화원 한국어 강좌(8) 등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한편, 집에서 한국어 책도 읽어 보곤 했다.
그러다가 81년에 덴리(천리) 대학 조선학과에 들어가 정식으로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 교재는 주로 자체 교재로 배웠다. 문법을 강의실에서 배운 뒤, 과마다 나오는 연습 문제는 랩 실에서 연습하였다. 그 밖에 역시 자체 교재인 '조선어독본' 등으로 독해도 배웠다. 2학년이 되어서는 랩 수업이 계속되는 한편, '벙어리 삼룡이,' '감자' 등 문학 작품을 모아서 엮은 교재로 독해에도 중점을 두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조선말 사전,'(9)
'조선어 실용 어법'(10) 등을 사용해서 현대 소설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필자가 덴리 대학에 있었던 81년 11월에 '조선어의 입문'(11)이란 획기적인 교재가 나왔다. 책이 나오자마자 사 와서 예문, 설명 등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실제로 이 책을 열심히 공부한 한 사람의 경험으로 이 책의 획기성이라고 하는 것은 강조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책으로 처음으로 현대 한국어의 전체적인 윤곽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책이 나온 후 10년이 지났으나, 그동안 이를 능가하는 교재는 출판되지 않고 있다.
필자는 84년에 도쿄외대 3학년에 편입학 하게 되어, '조선어학의 입문'의 저자이신 간노 선생님의 지도를 직접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도쿄 외대에서 배운 것은 너무나도 많아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나열하다가는 지면이 모자라므로 생략기로 한다.
2. 발음과 문자
2.1. 발음
모음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ᅥ와 ᅩ, ᅮ와 ᅳ의 구별이다. 지금도 특히 문맥에 의지해서 추측할 수 없는 고유 명사에 나오는 ᅥ 와 ᅩ, ᅮ 와 ᅳ를 못 알아들을 때가 많다(예: 송/성, 군/근).
도쿄 방언 화자인 필자의 경우, 모음의 무성화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예: 시사[ʃi@sa]).
또 지금은 그런 일이 없어졌지만 맨 처음에는 가끔 ᅳ가 [e]로 들릴 때가 있었다(예: '하는,''손을 등의 [는], [늘] 등이 [ne]라고 들렸다.).
자음에 있어서는 된소리, 거센소리는 처음에는 어렵지만 연습을 많이 하다 보면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필자의 경우 어두에서 ᄀᄃᄇᄌ 등이 약한 유기음이 되어 버리는 것이 더 문제가 된다. (예: 가다[k'ada], 비[p'i], 지리[ʧ'iri]). 일본어의 무성음이 어두에서 약한 유기음이 되기 때문이다. ᄂ, ᄆ은 비강 파열과 거의 동시에 들리는 약한 구강 파열성 때문에 필자에게는 [n], [m] 보다는 [d], [b]로 들린다(예: 나이[ndai→dai], 물[mbul→bul]). 일본어의 /g/는 제2음절 이하에서 변이음 [ŋ]로 나타날 수가 있다. 필자의 경우도 '이것은'을 [잉어슨]처럼 발음하고 있었다. 이를 고치는 데에 79년부터 1년 이상이 걸렸다.
음절 말 자음 중에서는 역시 ᄂ과 ᄋ을 구별하기가 제일 어렵다. 정신/전신, 정통/전통과 같은 말은 잘못 들을 때가 많다. ᄂᄃᄉᄌᄎ 앞에 ᄋ이 올 때 ᄋ이 ᄂ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어의 비음 /N/은 /tdnc/ 등 앞에서 규칙적으로 [n]이 되기 때문이다.
'굿하다,' '밥하다'를 [kud'ada], [pab'ada]와 같이 유성 유기음으로 발음하는 사람이 더러 있어 알아듣기 힘들다.
한국어의 억양, 특히 서울말의 억양을 습득하는 것은 필자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같이 느껴진다. 몇 마디 말을 하다가 외국인이란 표시가 나는 것도 주로 억양 때문이다. 일본어와 공통되는 한자어의 경우 일본어의 피치, 액센트 형을 따라 심한 높낮이가 생기기 쉽다(예: 국어 연구원 ○●●●○, 국어 연구소 ○ ●●●● ●높음, ○낮음).
2.2. 발음과 문자와의 관계
문자를 먼저 배운 필자에게는 한국어를 굉장히 알아듣기 어려운 언어였다. 예를 들어 '못 읽는다'는 [모딩는다~몬닝는다]라고 발음되는데 이 [딩] 내지 [닝]의 정체가 실은 '읽'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자와 발음의 관계를 깊이 알고 있어야 한다. 또 '꽃이' [꼳치~꼬치~꼬시]와 같이 그 발음이 다양하게 실현되는 것도 어려운 점이다. 이런 문제는 '조선어의 입문'이 나오기 전에는 정확히 배울 길이 없었다.
3. 문법
한국어 문법의 가장 어려운 점은 문법적 형태들이 너무나도 많은 데다가 그것들이 서로 미묘하게 구별된다는 데 있다. 특히 다양한 접속 어미들의 용법에 대해서는 '실용 어법'이 큰 참고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지금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사역·피동은 특히 복합어의 경우 필자에게는 어렵게 느껴진다. 일본어와는 달리 그 구성 요소들을 각각 변화·일치시켜야 하기 때문이다[예: 쫓아내나-쫓겨나다 cf. oi=dasu(쫓아=내다)-oidas=areru(쫓아냄을 당하다)]. '-고 있다'와 '아/어 있다'의 구별도 어렵지만 '코스모스 한·일사전'(12)이 참고가 된다.
한국어는 문장어와 구두어가 서로 크게 다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못 알아듣는 말이 굉장히 많았다. 예를 들어서 '-려고 하다,' '-아/어서'밖에 몰랐을 때 '-ᄅ라고 그러다,' '-아/어 가지고~-아/어 갖구'란 말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구두어와 문장어의 차이를 통일적으로 알기 쉽게 해설해 준 책은 '조선어의 입문'이었다. '무엇으로/뭘로,' '이것이/이게'와 같은 것도 그전에는 나올 때마다 그냥 준말이라는 설명밖에 듣지 못했었다. 처음에 소설책을 전혀 읽지 못했던 것도 "같이 가재," "하랬잖아."와 같은 회화문에 나오는 '-재,' '-랬잖아' 등을 사전으로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사전으로 찾을 수 없는 것이 하도 많아 처음에는 당황하게 된다.
4. 어휘
필자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어휘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명사에서 의외로 어려운 것이 한자어이다. 특히 한일 양 국어에 공통되는 한자어는 그 뜻이 서로 달라진 것들이 많은데도 그러한 의미의 차이를 정확히 기술한 사전이 없기 때문에 한국어다운 표현을 하지 못하게 된다.
형용사는 더욱더 어렵다. 어렵다 못해 절망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렴풋이 짐작은 가지만 정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필자는 주로 '유의어·반의어 사전'(13)과 '조선말 사전'을 동시에 사용해서, 모르는 형용사가 나올 때마다 그것과 의미상 관련되는 형용사들을 찾음으로써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너무나도 많다.
의성 의태어는 솔직히 전혀 모른다. 의성 의태어만 따로 집중적으로 훈련받을 수 있는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의성 의태어 교육 방법을 강구해 주었으면 한다.
부사에서는 양태 부사가 어렵다.
5. 표현
애매하게 표현이라고 하였지만 일차적으로는 마땅한 한국어 단어 결합에 관한 사전이 존재하지 않는 데서 발생되는 문제들이 이에 포함된다.
한국어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 언어인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 우리들이 일본어의 간섭을 배제한 한국어를 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두 나라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철저하게 반영시킨 사전이 아쉽다.
6. 기타
현실에 대한 지식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일이 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람 이름, 사건 이름, 단체 이름 등등을 필자가 모르기 때문이다.
7. 마무리
당연한 일이지만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우려면 한국인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배우지 못한다. 필자 역시 많은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왔고 지금도 받고 있지만 필자의 노력 부족으로 인하여 수박 겉 핥기의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새삼스레 재확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