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의견]

우리말, 어떻게 할 것인가
-국립 국어 연구원장께 드리는 글-

김정섭 / 부산 우리말 바로 쓰기 모임 회장
'나의 의견'란은 국어 생활이나 국어 정책에 관하여 연구자 개인이나 독자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쳐 보일 수 있는 '항상 열려 있는 글터'이다. 앞으로 이 난을 통하여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고 논의되어 국어 생활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번에는 '우리말 바로 쓰기 모임' 회장인 김정섭 선생이 국립 국어 연구원 개원에 즈음하여 보내 온 글을 싣는다.
- 편집자 주 -

1. 들어가는 말
    말은 숨탄것(생명체)이다. 태어나고 자라고 병들고 늙고 죽는다. 태어나자마자 죽기도 하고 오랜 삶을 누리기도 한다. 태어난 바탕대로 곱게 자라는 것도 있고 소리와 뜻과 꼴이 바뀌는 것도 있다. 자라면서 저절로 바뀌는 것도 있고 때로는 모진 비바람에 부대껴 몸뚱어리가 뒤틀리고 가지가 찢기고 뿌리가 뽑히는 일도 있다. 말은 사람이 살아가는 삶과 모든 것을 함께 한다.
    말은 그냥 두어도 자란다. 하지만 갈고 닦고 다듬고 손질하고 가꾸어야 크고 바르게 자란다. 남의 말이 들어오면 싸워서 물리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억눌려서 제자리를 빼앗기고 숨거나 죽어 사라지기도 한다.
    훌륭한 말을 가진 겨레라고 해서 처음부터 좋은 말만 만든 것은 아니다. 아끼고 갈고 닦고 다듬어서 비로소 바르고 고운 말을 지니게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말을 다듬는 일에 힘을 기울이기는커녕 남의 말글을 익히는 데만 힘을 쏟았기 때문에 우리말은 자꾸 움츠러들기만 했다.
    게다가 부끄러운 지난날, 중국 말들을 우러르며 살아왔고 일본 말을 나라말이라 한 때도 있었다. 나라를 되찾은 뒤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서양 말의 큰 물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런 속에서 우리말은 한자 말에 임자 자리를 빼앗기고 일본 말에 할퀴고 서양 말에 밀려서 이제는 우리말이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꼴이 되고 말았다. 이제라도 다듬어서 남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우리말 만들기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2. 오늘날 쓰고 있는 우리말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우리말은 본디꼴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만큼 남의 말에 물들었다. 낱말밭은 우리말과 한자 말, 일본 말, 서양 말이 마구 뒤섞여 있고 그나마 우리말은 뒷전에 밀려서 나라말 구실을 못하고 있다. 우리말은 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는 가운데 자꾸만 사라져 가고 그 자리엔 남의 말이 차고 앉아 임자 노릇을 하고 있다.
    낱말뿐만 아니라 익은말, 이은말과 글밭마저 온통 일본 말 서양 말로 물들고 우리 말본은 틀까지 깨어졌다. 일본 말투 서양 말투로 말과 글을 써야 멋진 것으로 여기게 되어 말글의 겉과 속이 모두 뒤친꼴(번역체)로 되어 간다.
    또한 입말이 아주 빠르게 글말로 바뀌어 간다. 말과 글월은 하나일 때가 가장 좋은 것이고 그래서 모든 나라에서는 말글 하나 만들기에 온갖 애를 다 쓰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글말을 입말로 고쳐 나간다. 그런데 우리말은 거꾸로 입말을 버리고 글말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3. 말 다듬기에 앞서 할 일
    말을 다듬으려면 반드시 잣대가 있어야 한다. 그 잣대는 바르고 곧아야 하고 한결같아야 한다. 비뚠 자로는 곧게 마름질할 수 없다. 틀린 자로는 옳게 가늠할 수 없다. 한결같지 않으면 뒤죽박죽이 될 수밖에 없다.
    첫째, 우리말 뜻매김부터 해야 한다.
    우리는 아직 우리말 뜻매김을 해 놓지 못했다. 무엇이 우리말인지 명토 박아 놓지 않고서는 우리말을 갈라낼 길도 없고 말 다듬기도 할 수 없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우리말 뜻매김이다.
    우리말이란, 우리 겨레가 살아오면서 우리 삶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 써 온 겨레말과, 우리 삶 속에 남의 말이 들어와서 우리말 속에 뿌리내린 들온말,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우리말이란 겨레말과 들온말을 아울러 일컫는다. 이 밖의 말은 우리말이 아니다. 아무리 오래 써 온 말이더라도, 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쓰고 있더라도 우리말이 아니다. 남의 말과 버릴 말이다.
    둘째, 대중말 가늠자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이미 만들어 놓은 '표준말의 기준'이 없는 것은 아니나 두루뭉수리처럼 된 이 가늠자는 아무 쓸모가 없다. 표준말의 기준이란 것이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다. 이런 잣대로 대중말을 가늠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것이다. 대중말의 가늠자는 마땅히 "오늘날, 나라 안 모든 곳에서, 우리 겨레 모두가, 두루 알고 쓰는 우리말"이라야 한다.
    셋째, 숨어 있는 겨레말을 찾아내어야 한다.
    겨레말은 오랫동안 남의 말에 억눌려서 죽든지 숨어 버렸다. 하지만 옛 책을 뒤져 보면 이제라도 되살려 쓸 만한 겨레말이 많다. 글말에서는 쓰지 않으나 입말 속에는 살아 있는 겨레말이 매우 많다. 또한 사투리라고 버려 둔 시골말 가운데도 얼마든지 있다. 숨어 있는 겨레말을 빠짐없이 찾아내어야 한다.
    넷째, 말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대중말은 반드시 나라 안 골골샅샅 모든 곳에서,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사내와 아낙, 어린 사람 나이 든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두루 알고 쓰는 우리말이라야 한다. 따라서 같은 뜻으로 쓰는 여러 말 가운데서 어떤 말이 더 널리 더 많이 쓰이고 있는지 알려면 반드시 말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말지도 없이 대중말을 갈라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4. 말 다듬기
    우리말 사전을 펼쳐 보면 온갖 잡동사니들이 다 표준말로 실려 있다. 또 사전에 실리지 않은 말도 우리 말글살이에서 많이 쓰고 있다. 이들 말을 어떻게 갈래 지어 다듬어야 할 것인가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 겨레말이다.
    겨레말은 대중말과 사투리, 그리고 잘못 만든 말이 있다. 대중말과 사투리는 대중말 잣대로 새롭게 다듬어야 하고 잘못 만든 말은 바르게 고쳐야 한다. 이때는 반드시 말지도를 바탕으로 가려내야 한다.
    먼저, 대중말은 겨레말을 바탕말로 삼아야 한다. 해, 달, 논, 밭, 손, 발, 꿈, 생각, 사랑, 아버지, 가슴, 배, 꿀, 나무, 우물, 구름, 솥, 다리, 하늘 따위이다.
    참치, 곱추, 모밀, 소풀, 멀국, 노고지리, 녹두나물, 낭구, 돌팍, 맨날, 잠투새, 막살하다 같은 사투리는 버릴 것은 버리고 다듬어 쓸 것은 되살린다.
    또한 잘못 만들어 쓰는 말도 바로잡는다. 넓이뛰기(멀리뛰기), 귀속말(귀엣말), 앞바다(갓바다), 귀후비개(귀이개), 말씀이 계시겠습니다(말씀하시겠습니다), 전화 바꿨습니다(제가 ~입니다), 안절부절하다(안절부절못하다) 따위나 동해 바다, 피해 입다, 역전 앞, 박수 치다, 관점에서 본다, 감각을 느낀다, 기간 동안, 남은 여생, 닭도리탕 따위 뜻 겹친 말, 튀기말도 바로잡는다.

둘째, 한자 말이다.
    한자 말은 국어사전에 올라 있는 올림말 가운데서 절반이 넘는다. 한자 말도 우리말이고 한문자도 우리 글자라는 사람이 있지만 한자 말은 우리말이 아니라고 못박고 나서 말 다듬기를 해야 한다. 한자 말도 들온말로 다듬어 우리말로 명토 박기까지는 우리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문자로 만든 모든 낱말을 몰밀어 한자 말이라 하지만 그 갈래는 많다.

① 우리 한아비가 중국 책에서 빌려 와 써 온 한자 말
② 우리 한아비가 만들어 써 온 한자 말
③ 요즈음 들어 우리가 새로 만들어 쓰는 한자 말
④ 일본 말을 적은 일본 한자 말
⑤ 일본에서 예부터 중국 책에서 빌려 와 써 온 일본 한자 말
⑥ 일본에서 서양 말을 비슷한 뜻으로 뒤쳐 새로 만든 한자 말
⑦ 일본에서 서양 말을 비슷한 소리를 따 써서 만든 한자 말
⑧ 일본에서 한문자 수를 줄이면서 새로 만든 한자 말
⑨ 중국에서 새로 만든 한자 말
⑩ 중국에서 서양 말을 뒤쳐 새로 만든 한자 말

이런 모든 한자 말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듬어서 들온말과 버릴 말, 남의 말로 갈라내어야 한다. 이때, 한자 말은 중국 한자 말이든 우리 한자 말이든 일본 한자 말이든 굳이 갈래 지을 까닭도 없거니와 따져 볼 것도 없다.
    ① 우리말이 있는 한자 말은 버릴 말과 남의 말로 갈라낸다.
    냉수(찬물), 난황(노른자), 계란(달걀), 전염병(돌림병), 육지(뭍), 온돌(구들), 연돌(굴뚝), 태양(해), 해양(바다), 원양(난바다), 근해(갓바다), 백미(쌀), 홍합(담치), 목단화(모란), 경지(논밭), 암석(바위) 따위
    ② 우리말로 고칠 수 있는 한자 말은 모조리 우리말로 바꾼다.
    청천(푸른 하늘), 월광(달빛), 백지(종이), 성좌(별자리), 각하하다(물리치다), 객토하다(흙 넣다), 경하다(가볍다), 기만하다(속이다), 호도하다(얼버무리다), 부재하다(없다), 초래하다(부르다), 도래하다(다가오다) 따위
    ③ 우리말로 굳어진 한자 말은 들온말로 받아들인다.
    가게(가가), 도둑(도적), 과녁(관혁), 김치(침채), 김장(침장), 금실(금슬), 명질(명절), 천둥(천동), 추렴(출렴), 과일(과실), 짐승(중생), 재미(자미), 서랍(설합)처럼 소리까지 바뀌어 우리말로 뿌리내린 말이나
    두부, 고함, 수염, 심술, 동갑, 고집, 운동, 회사, 석유, 공기, 의사, 판사, 책, 연필, 공책, 칠판, 학교, 은근하다, 이상하다처럼 아주 우리말로 굳어서 한문 자를 쓰지 않아도 뜻을 알 수 있는 말은 들온말로 받아들인다.
    다만, 우리말로 고칠 수 있는 것은 우리말로 새로 만들어 들온말과 아울러 쓰임새에 따라 '겹 대중말'로 함께 쓰도록 한다.
    ④ 서양 말을 비슷한 소리나 꼴을 따서 만든 한자 말은 본디나라 말소리대로 다듬어 들온말로 받아들이든지 우리말을 새로 만든다.
    아세아(아시아), 구라파(유럽), 향항(홍콩), 불란서(프랑스), 화란(네덜란드), 노국(러시아), 서구(서유럽), 동남아(동남아시아), 월남(베트남), 인도(인디아), 중남미(중남아메리카), 나전어(라틴말), 영몽(레몬), 임파선(림프샘), 이해(카스피 바다), 초자(유리), 구락부(모임), 와사(가스), 불(弗-달러), 낭만(로만), 와(瓦-그램), 미(米-미터) 따위
    ⑤ 일본 한자 말은 남김 없이 뽑아낸다.
    흑판(칠판), 백묵(분필), 백조(고니), 고엽(마른잎), 이창(뒷들창), 경기(세월), 일응(먼저), 견송(배웅), 당분간(얼마 동안), 양복 기지(양복감), 일인분(한 사람 몫), 견본(본보기), 건배(축배), 소제(청소), 시합(경기, 내기), 장합(처지, 자리), 낭하(골마루), 가급적(되도록이면), 천기(날씨), 내역(속내), 체념(단념), 행선지(갈곳), 현관(문간), 원금(본전), 공차(빈차), 축제(잔치), 생산고(소출), 애교(아양), 식량(먹거리), 공란(빈칸), 복지(옷감), 활어(산생선), 부지(터), 곤색(진파랑색) 따위

셋째, 일본 말이다.
    구두, 냄비, 가마니같이 우리말로 아주 굳어진 것은 들온말로 받아들이고 다꾸왕, 다마, 사시미, 와사비, 자부동, 사라, 깡기리, 나까마, 시다, 시보리, 시아개, 시푸, 오꼬시, 오봉, 조로, 쿠사리, 아니끼, 기마에, 덴뿌라, 데도리, 도꾸이, 히야시, 신마이, 타마네기, 수루메, 노가다, 앗사리, 단도리, 구루마, 다라이, 곤로, 쿠세, 분빠이, 삼마, 마구로, 아나고, 가도집, 잉꼬, 도리하다, 가라, 와리바시 따위 일본 말은 남김없이 뽑아 버린다.

넷째, 서양 말이다.
    서양 말도 갈래가 많다. 같은 뜻을 가진 말이라도 나라에 따라 다르고 같은 글자로 적은 것도 소리가 다른 것이 많다. 우리는 뜻이 같고 소리가 다른 서양 여러 나라 말을 섞어 쓰고 있다. 한 가지로 다듬어 들온말로 받아들이든지 우리말로 바꾼다. 이때도 우리말로 아주 굳은 것과 나라 이름 땅 이름 사람 이름 같은 것은 본디나라 말소리대로 다듬어서 들온말로 받아들인다.
    또한 우리는 일본에서 들온말로 다듬어 쓰는 서양 말(일본 말)과 일본에서 새로 만든 일본 서양 말(일본 말)까지 그냥 받아 들여 쓰고 있다. 이런 일본식 서양 말도 본디나라말을 바탕으로 새롭게 다듬어 들온말로 받아들이든지 우리말로 고쳐야 한다.
    버스, 택시, 가스, 텔레비전, 커피, 코카콜라 같은 것은 들온말로 받아 들인다.
    토큰(버스표), 와이프(아내), 루우트(길), 트라블(말썽), 미팅(만남), 샘플(본보기), 트릭(속임수), 매너리즘(판박이), 원맨 쇼(혼자굿), 캔(깡통) 같은 것은 우리말이 있거나 우리말로 고칠 수 있다.
    테레비, 오피스 걸, 돈카스, 나이터 게임, 해피 엔드, 하이칼라, 에어걸, 올드미드, 밀크 홀, 사인 북, 테마 송, 캬바레, 매스 콤, 빵구, 마후라, 타이루, 코오롱, 롯데, 아프터 서비스, 골인, 샤프 펜슬, 스프링코트, 하이틴, 카레 라이스, 홈인, 아마, 프로, 에어컨, 맨션, 아파트는 다 일본 서양 말이다.

다섯째, 뒤친 말투(번역체-일본 말투, 서양 말투)다.
    남의 말을 뒤칠 때는 뜻에 맞게 우리 말투로 고쳐야 한다. 글자 풀이를 하든지 그 나라 말투를 그대로 따와서 쓰기 때문에 우리 말밭은 온통 뒤친 말투로 바꿔진다. 어떤 것은 아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말이 된다.
    또한 남의 나라에서 옛날부터 만들어 써 온 익은말, 이은말까지 우리말로 바로 뒤쳐서 우리말처럼 쓰고 있다. 모두 우리 말투로 다듬어야 한다.
    나의 집, 나의 아버지, 나의 살던 고향, 나의 사랑하는 나라, 보다 멀리, 보다 빨리, 웃긴다, 째째하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뽀뽀뽀, 애교가 넘친다, 화를 품다, 의기에 불타다, 원한을 사다, 종말을 고하다, 희망에 불타다, 호감을 사다, 손에 땀을 쥐다, 흥분의 도가니, 도토리 키 재기, 엉덩이에 불 붙다, 종지부를 찍다, 순풍에 돛 달다, 낯가죽이 두껍다, 패색이 짙다, 이야기에 꽃이 피다, 콧대를 꺾다, 반감을 사다, 비밀이 새다, 마각을 드러내다, 폭력을 휘두르다, 새빨간 거짓말, 눈살을 찌푸리다, 귀에 못 박히다, 가슴에 손을 얹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다, 낙인을 찍다, ~일 수 있다, ~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에 다름 아니다, 그녀, 남과 여 따위나
    ~라고 보도한 신문, 생각되고 있다, ~에 의해 ~되다, 자물쇠로 채워져 있는 가방, 서명이 갈겨져 있는 쪽지, 약속하지 말 것을 부탁하다, 결혼하기로 결정짓다, 찾으려 함에 있어서, 불가능함을 인정하다, 그의 아버지가 의사인 그 소년은, 주었음에 틀림없다, ~인 것처럼 보이는 물결, 빵이냐 자유냐, 그들이 온다, 범죄와의 전쟁, 너와의 만남, 먹혔었었다, 손에 잡혀져 있는 것, 저 분이 우리 아버지가 되겠습니다, 국민에 의한 정부, 그 정신을 높이 사다 따위
    이런 말은 얼핏 보기에 우리말 같지만 우리말이 아니다. 다 일본 말, 서양 말투다. 이런 말투나 익은말, 이은말은 우리 말투, 우리말로 다듬어야 한다.

여섯째, 글말이다.
    말과 글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말밭은 입말이어야 한다. 글말은 반드시 입말로 바꾸어야 한다. 여기서는 글말과 입말을 똑똑히 갈래 지어 말할 수 없지만 대충 한자 말이나 서양 말을 섞어 쓰는 말, 귀로 말소리를 듣고서도 뜻을 알기 어렵고 글자를 보아야만 비로소 뜻을 짐작할 수 있는 어려운 말을 글말이라 해 두자.
    몇몇 난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 많이 배운 사람들이 제 잘난 티를 내느라고 쓰던 글말을 요즘은 입말로도 자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말과 글이 하나가 되어야 하지만 이렇게 거꾸로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수면이 부족하다, 백반으로 식사한다, 안전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다, 가계 운영에 만전을 기하다, 기만하여 호도하다, 첨예하게 대두되다, 차한에 부재하다, 응집된 총체력을 발휘하다, ~미비 내지 상실로 초래되다, 전대미문의 간교한, 최대 현안으로 대두되다, 현하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어떤 시련에 봉착하더라도,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포괄하고 있지 못하다, 취락 구조를 지칭하다, 새날의 도래를 기원하다, 화재가 났으니 대피하십시오, 승용차가 대기하다 따위

일곱째, 부름말이다.
    가까운 이웃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우리는 촌수에 따른 부름말을 어려움 없이 써 왔지만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고 자주 만날 수도 없어서 우리말로 된 부름말은 거의 잊어 버렸거나 시골말로 내몰려서 입과 귀에 설게 되었다. 옛 한자 말을 되살려 쓰기도 어렵다. 옛 부름말을 다듬어 쓰든지 새로 만들어야 한다. 제 서방을 가리켜 '아빠, 아저씨' 하는 것도 어이없고 이름을 부를 수도 없다. 아주버님을 삼촌이라 하는 것도 틀린 말이다. 가시아비, 가시어미를 아버지, 어머니하는 것도 잘못이다.

여덟째, 전문말(학술말, 기술말, 직업말 따위)이다.
    우리가 쓰는 전문말은 열에 아홉이 일본 한자 말이다. 요즈음 들어 서양 말도 끼어들고 있다. 전문말이나 나날말이나 다를 것이 없다. 전문말이라고 우리말을 못 만들 까닭이 없다. 만들려 하지 않을 뿐이다. 만들어 쓰던 것까지 다시 일본 한자 말로 바꾸고 있다. 새로 만들거나 다듬어서 우리말로 써야 한다. 전문말은 덮어놓고 한자 말이나 서양 말이라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음악'에서는 진작부터 우리말로 학술말을 만들어 써 왔으며 '미술,' '법률,' '낚시,' 말도 우리말로 다듬고 있다. '의학'에서도 요즘 '해부학 사전'에 '의학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거나 새로 만들어 싣고 있다. 다른 학문, 기술, 직업에 쓰는 말도 하루빨리 다듬어 우리말로 자리잡게 해야 한다.
    삼각형, 사각형, 원추, 대장, 두개골, 척추, 행성, 성좌, 화청소, 엽록소 같은 말은 우리말로 자리잡아 가던 것을 억지로 다시 한자 말로 바꾼 것이다.

아홉째, 이름이다.
    사람 이름, 가게 이름, 물건 이름, 직업 이름, 땅 이름 들도 우리말 이름으로 바꾸고, 지어야 한다. 이미 쓰는 이름까지 고치기 어렵다면 새로 짓는 이름은 반드시 우리말 이름이라야 한다. 요즈음, 사람 이름과 가게 이름, 물건 이름 같은 것은 우리말 이름이 늘어나고 있지만, 직업 이름과 땅 이름만은 오히려 한자 말 이름으로 바꾸거나 한자 말 이름으로 짓는다. 또 서양 말로 짓기도 한다.
    우리나라 땅 이름 가운데 우리말 이름은 오직 '서울'이 하나 있을 뿐이다. 이제 땅 이름도 본디 우리말 이름을 되찾아 주든지 우리말 이름으로 다듬고 새로 지어 써야 할 때가 되었다. 길 이름, 다리 이름, 굴 이름도 마찬가지다.

5. 맺음말
    우리말을 쓰자고 하면 우리말을 쓰고 싶어도 없어서 못 쓴다고 한다. 한자 말을 우리말로 고치자고 하면 그 많은 한자 말을 어떻게 다 고칠 수 있는가 묻는다. 이화 여자 대학교를 우리말로 고치면 '배꽃 큰 계집 오로지 배움터'처럼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한다. '공처가'는 '아내무섬장이'처럼 우스갯거리가 된다고 한다. '비행기'를 '날틀'로 하면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한자 말을 없애면 학문을 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다. 한문자를 안 쓰면 '전통문화'가 송두리째 사라진다고도 한다.
    우리말을 쓰려야 없어서 못 쓴다 말이나 한자 말을 우리말로 고칠 수 없다는 것은 트레바리다. 있는 우리말까지 한자 말로 바꾸어 쓰면서 굳이 우리말이 없는 것과 이미 우리말이 된 한자 말을 골라 우리말로 고칠 수 없다느니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억지다. 나날말에는 우리말이 얼마든지 있다. 몰라서 못 쓰고 알면서 안 쓴다. 한자 말에 홀려서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화 여자 대학교는 학교 이름이다. 사람 이름, 땅 이름 같은 이름에 쓴 한문자를 한자한자 뜻풀이하는 것은 일부러 트집잡으려고 하는 것이거나 몰라서 하는 소리다. '아내무섬장이' 같은 말을 만든 사람은 '자볼기' 맞아 싸다.
    또 일본에서는 '비행기,' 중국에선 '비기'라 하는데 우리라고 '날틀'이 안 될 까닭이 없다. 한문자로 만든 말은 '안전사고, 가스 주의, 소주밀식, 노견, 오륜 공식 업체, 지대미, 주비 위원회, 미화원, 구서 운동, 구중, 검근이라 해도 아무 소리 없이 쓰면서 겨레말로 만든 '날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나를 깔보고 내 것을 업신여기는 마음 바탕에서 빚어진 잘못된 생각이다.
    한자 말을 없애면 학문을 할 수 없다는 것도 터무니없다. 학문은 반드시 한자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마다 다 제 나라말글로 학문을 한다. 학문을 하는 데는 말글을 따지지 않지만 우리말글로 할 때 우리 학문이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뛰어난 우리 '철학과 사상'이 나오지 못하는 것도 우리말로 생각하지 않고 남의 말글을 빌려서 학문을 하는 까닭이다.
    한문자를 없애면 '전통문화'가 사라진다지만 문화란 글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과 생각과 삶의 갈피 속에 있음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한문자야말로 우리말과 '전통문화'를 없애는 데 무엇보다 큰 힘을 끼쳤고 오늘날 우리 문화를 세우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어쨌거나 우리말을 버려 두고 남의 말을 쓸 터무니가 없다. 남의 말글로써 내 생각과 느낌을 바르게 나타낼 수도 없거니와 내 생각을 깊고 넓고 가멸케 만들고 펼칠 수도 없다. 우리 학문을 갈고 닦지도 못한다. 우리 문화를 이어받고 만들고 담아 둘 수도 없고 물려줄 수도 없다.
    마지막으로, 새해엔 모든 문화가 들어오는 문이 열린다고 한다. 어떤 문화든 말과 함께 들어온다. 오늘날 우리말이 잘못된 것은 일찍이 남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따른 말을 다듬지 않고 그냥 들여온 까닭이다. 이미 들어온 말도 다듬어야 하지만 이제부터 들어올 모든 말은 반드시 우리말로 고치든지 들온말로 다듬은 뒤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