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촐하다는 것
옛날 어른들이 많이 쓰시던 표현 중에 '조촐하다'는 말이 있다. 어원을 따져 보면 혹시 한문 표현에 가 닿을는지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지금은 분명 우리 것이 된 말이다. 중복된 'ᅩ'음이 주는 단아한 울림이나 'ㅈ,' 'ㅊ'음이 풍겨 주는 결곡한 맛이 그 뜻과 무척 잘 맞는 말이다. 음감과 뜻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말도 달리 찾기 힘들 것이다. 이 말은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생전에 즐겨 쓰시던 말이어서 내게는 각별히 정이 가는 말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에 어머니께서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실 때면 자주 들려 주시는 말씀이 하나 있었다. 그 어른은 요새 말로 하면 역설을 좋아하셨던 모양이다. 사람의 행색이나 언동이 촌스럽고 메떨어지면 거꾸로 "거참 조촐하디 조촐하고, 양반되디 양반되구나." 하셨다 한다. 어머니께서 이 이야기를 자주 하셨던 것은 할아버지께서 조촐한 것을 무척 찾은 분이셨다는 말씀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어른은 의복과 음식에 대한 기호가 꽤 까다로웠던 모양이다. 한때는 장안에서 알아 주는 부자였을 정도로 재산을 많이 모으셨지만, 평생 비단 옷을 몸에 걸치지 않으셨다 한다. 그러나 워낙 깨끗한 것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집에 침모가 있었어도 어머니는 바느질에서 헤어날 날이 없었다고 한다. 또 사랑에 친구분들이 자주 들르셨는데, 그때마다 즉시 조촐한 주안상을 보아 올려야 했단다. 거기에는 육포와 어란이 언제나 올랐고 게다가 철따라 해물과 채소가 곁들여야 했다 한다. 예컨대 봄이면 동죽에다 미나리강회를, 가을에는 송이 산적에다 낙지 데침을 차려내야 했단다. 외며느리셨던 어머니에게는 일찍이 홀로 되신 그 어른의 수발을 받들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터인데도,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취향을 말씀하실 때면 원망은커녕 언제나 존경과 자부마저 느끼시는 기색이었다.
그것은 두 분이 같은 가치 기준을 가지셨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어머니도 조촐한 것을 매우 좋아하셔서 조촐한 사람을 보시면 꼭 칭찬을 하셨다. 검은 자주 고름을 단 연미색 저고리에 팥죽색 치마를 곱게 받쳐 입고, 화장기 없는 깨끗한 얼굴에 쪽을 똑바로 찐 여인을 보시고 조촐하다 하셨다. 더운 여름날에 풀기가 빳빳한 모시 바지저고리를 단정히 입고 합죽선으로 천천히 더위를 쫓는 점잖은 남자를 보시고 조촐하다 하셨다.
그러나 외모만으로 사람을 조촐하다고 하신 것은 아니었다. 위의 두 예에서도 외양이 깨끗해서 만이 아니라, 그런 외양이 그들의 깔끔한 성품을 나타내 주기에 하신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행동에 대해서도 이 말을 쓰신 것은 물론이다. 예컨대 우리의 언행이 상서러웠을 때에는 "조촐치 못하게 그게 무슨 짓이냐"라고 나무라셨다.
그리하여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조촐하다'는 말의 뜻은 이런 것이다. 물건으로 치면 그것은 양적으로 많거나 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양적인 열세가 오히려 질적인 우수성을 돋보이게 해 주기 때문에 전체 의미에 조금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또 그것은 고급한 것일 수는 있어도 사치스런 것은 아니며, 절대로 야해서는 안 된다. 음식이면 가짓수가 많거나 푸지지는 않되 알차고 맛갈져야 한다. 의복이면 현란해서는 안 되며, 단정하면서 은연중에 세련된 심미안이 풍겨야 한다. 사람의 경우는 괄괄하거나 기걸찬 사람이 아니라 성정이 맑고 차분한 사람을 말한다. 용모도 보는 이의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모이면 오히려 넘고 처지는 격이요, 그냥 깨끗하고 단정해야 맞는다. 중요한 것은 용모건 옷차림이건 거기에 그의 높은 기품과 교양이 내비쳐야 한다는 것이다.
한자 숙어에 '옥골선풍(玉骨仙風)'이란 말이 탈속한 풍모를 지칭한다는 점에서 '조촐하다'와 통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두 말이 갖는 공통점은 그 부분에서 끝날 뿐이며, 그들이 주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전자에는 '옥'이니 '선'이니 하는 글자에서 볼 수 있듯이 과장이 섞여서 다소 허황된 감을 주는데 반해, 후자에는 전혀 그런 군더더기가 없어서 뜻이 더욱 오롯이 산다. 실은 바로 그 점이 이 말의 묘미이기도 하다. 또 '전아(典雅)하다'나 '청아(淸雅)하다'도 이 말과 뜻이 가깝다 하겠으나, 이들은 어딘지 너무 다듬어지고 규범적인 냄새가 나서 '조촐하다'는 말이 갖는 소탈하고 꾸밈없는 맛하고는 판이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보면 '조촐하다'는 말은 우리의 고유한 미적 감각을 표현해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높은 격조만이 아니라, 옹골차되 되바라지지 않으며, 속됨을 거부하되 오만하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것은 소략(疏略)한 것 같으면서 내실이 있는 것이요, 모자라는 듯하면서 충족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지나친 정교함을 피하고 소박한 조화를 취하여 품위 있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온 우리 민족의 심미감과 잘 어울리는 말이다.
이렇게 좋은 말이건만 옛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나니까 아주 없어진 듯 한동안 들리지 않았다. 하기야 6·25 이후 얼마 동안은 나라 전체가 폐허였고 사람은 모두가 빈민이었으므로 조촐한 것을 찾아보려야 찾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 후 공업화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물질주의, 금전만능주의가 세상을 휩쓸어 조촐한 것은 외화(外華)와 사치에 치어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나 사람이 여유가 생기면 옛것도 돌아보고 전통문화도 다시 찾게 되는 법인가 보다. 우리도 근래에 생활이 조금 나아지면서 젊은이들 사이에 우리 것을 되살리려는 기운이 일고 있다. 그 일환으로 옛말을 다시 쓰는 경향이 생겼고 그 덕분에 요즈음은 '조촐하다'는 말을 여기저기서 제법 자주 듣고 보게 되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많은 경우가 이 말이 잘못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번은 학생들이 선생들을 초청한 자리에서였다. 학생 대표가 일어나 인사말을 하면서, "저희들의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해서 이처럼 조촐한 자리를 마련하였으니......." 하는 것이었다. 또 한번은 어느 대학에서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님의 회갑에 논문집을 증정한다면서 초청장을 보내 왔는데 거기에도 "조촐한 자리를 마련하였사오니 부디 오셔서......."라고 쓰여 있었다. 아마도 이들을 '조촐하다'는 말에 양적으로 풍부하지 않는다는 뜻이 있는 것만 알아서 전체적으로도 미흡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이 점은 사실상 반어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쓸 계제를 가려 보면, 이 말은 상찬할 때 쓸 말이지 결코 겸양할 때 쓸 말이 아니다. 위의 두 예에서도 차린 쪽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어감은 좀 다르지만, "이렇게 훌륭한 자리를 마련하였으니......."라고 말한 바와 다름없어서 우리의 예법으로 보면 심한 망발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말은 대접을 받는 사람이나 하객의 주최측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에서나 쓸 수 있는 말이고, 그런 경우라야 어법에 맞는 것이다.
집안 이야기에다 예문까지 섞어 가며 다소 장황하게 이 말의 뜻과 용법을 설명한 것은 그럼으로써 이 말의 오용을 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 이 말이 자꾸 오용되어 마침내 '초라하다'나 '변변치 못하다' 말의 동의어로 전락한다면 그 손실은 단어 하나가 사멸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 말의 뜻이 변질되면 그것이 본래 뜻했던 내용도 없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것은 우리 민족이 오래 간직해 온 선비다운 멋의 단절뿐 아니라, 밀려오는 천박한 풍조 속에서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켜 줄 전통적 가치의 상실에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요즈음 이상하게 쓰이는 말이 많다. '나름대로'라는 말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 말은 이제 그대로 거의 정착된 것 같다.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라든지 "나름대로 자부합니다." 등의 표현을 우리는 요즈음 방송 매체를 통해 무시로 듣고 있다. 심지어 일회성인 말에서보다는 오류가 많이 걸러진다는 신문, 잡지 등 문자 매체에서도 이런 표현이 교정되지 않고 그대로 쓰이고 있다.
내가 전에 듣기에는 '저 나름으로,' '그 나름으로,' '그 사람 나름으로' 등과 같이 언제나 명사나 대명사를 붙여 썼지 (동사와 결합하는 경우는 여기서 논외로 한다.) 그런 말 없이 '나름'만을 혼자 떼어 쓰지 않았다. 내가 잘못 알고 있나 해서 '나름'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더니, 이희승 편 '국어 대사전'에는 형식 명사로, 신기철·신용철 편 '새 우리말 큰 사전'에는 불완전 명사로 분류돼 있었다. 이름은 달라도 뜻은 둘 다 독립해서 쓰이는 말이 아니라는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요즈음의 말이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앞에 있어야 할 말은 없애 버리고 뒤에는 '대로'를 꼭 덧붙이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으로 애를 썼다."와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애를 썼다." 사이에 의미의 차이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나름'과 '대'는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나름대로'는 주인은 없고 객만 있는 말인데, 그 객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 몰려 있는 이상한 말이 아닌가.
'나름대로'는 문법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이처럼 얼굴 없는 사람 같아서 그 어감도 좋지 않다. 가령 "저 나름으로 노력했습니다만......." 하면 매우 겸손하고 무게가 있게 들리는데, "나름대로 노력을 했습니다만......." 하면 그런 느낌이 반감해 버린다. 전자에는 '저'라는 말이 정중한 감을 줄 뿐만 아니라 노력한 주체를 확실히 해 줌으로써 그만큼 책임감도 통감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처럼 말하는 사람의 태도가 성실하기 때문에 그 변명도 진실되게 들린다. 그러나 후자에는 노력한 주체가 누구인지 확실히 드러나지 않으니까 책임의 소재 또한 불분명해진다. 이렇게 되면 말하는 사람이 잘못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용의가 있는지도 의심스러워진다. 위의 예문은 일종의 사과의 뜻을 표하기 위한 것인데, 이렇게 내용이 공허해지면 사과는 순전히 형식적인 것이 되어서, 전체적으로 불성실한 감을 주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처럼 말하는 사람의 성실성이 의심되면 '나름대로'라는 말이 주는 음감마저 나쁜 쪽으로 작용한다. 이 말의 두 'ㄹ' 음이 내는 매끄러운 소리가 세련되고 멋있게 들리지 않고, 그럴듯한 말로 입에 바른 말이나 하려는 것 같아 경박하게 느껴진다. 심지어는 혀끝만 날렵히 놀려 잘못을 호도하려는 것 같기도 해서 사기성조차 느끼게 한다. 말 한 마디의 유무가 결과적으로 이렇게 큰 차이를 빚는 것이다. "'아'해서 다르고 '어'해서 다르다."는 우리 속담의 뜻을 새삼 되새기게 하는 경우이다.
또 요새 유행하는 말로 "별 볼 일 없다"는 말이 있다. 원래는 "문안에 볼 일 좀 보러 간다."든지 "볼 일 없는 사람은 나가시오." 하는 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볼 일'은 문자 그대로 '볼 일'이었지만 다른 뜻이 없었다. 그런데 요새는 이런 뜻으로 쓰이는 경우보다는 '별 볼 일 없다'라는 한 개의 관용구로 쓰이는 예가 더 많아졌고, '볼 일'의 뜻도 '효용'이나 '가치' 같은 것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런 뜻이라면 이미 '별 것 아니다'나 '신통치 않다'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구태여 이런 말을 만들어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 말은 그 뒤에 숨은 심리가 탐탁지 않다. 가령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 사람 자신이 할 일이 별로 없는 무능한 사람이라는 뜻보다, 말하는 사람에게 별 소득을 줄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 같다. 그것은 '별 볼 일 없는 곳'이나 '그거 별 볼 일 없어.' 등에서와 같이 사람이 아닌 사물에게도 이 말이 두루 쓰이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의 입장에서 만 보며 자기에게 얼마나 이용 가치가 있나에 따라 그것들의 가치를 매기려는 극히 자기 본위적이고 이기적인 태도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덕이 있는 발상이라고 볼 수 없다.
'조촐하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품위를 지킨다는 뜻이다. '나름대로'같이 내용이 불분명한 말이나 '별 볼 일 없다' 같이 야박한 말을 삼가고, 뜻이 탄탄하고 덕이 담긴 말을 가려 쓰는 것 또한 '조촐함'을 지키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