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반아 왕립 한림원 Real Academia Española 그리고
민용태/고려대 교수·서반아 문학
서반아에서 “각하”(Excelentísimo Señor)라는 존칭이 가장 정식으로 붙는 어른들이 있다. 바로 왕립 한림원 위원님들이시다. “불멸의”(insigne) 학자니 “고명한”(Ilustrísimo)이라는 수식어가 반드시 따라다니는 이 높은 어른들의 위치는 서반아 문인이나 학자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가장 명예로운 별자리이다. 예로부터 귀족들은 긴 이름을 좋아했다. 또한 귀족인 체하는 양반들도 이름 뒤 자기 고향 이름은 물론 좋아하는 투우사 이름까지 붙여 양반임을 뽐냈다. 그러나 그중 가장 명함이 간단한 사람이 있다. 국왕이다. 국왕은 “왕”(El Rey)이라는 말 하나로 자신을 나타낸다. 문인이나 학자들도 좀 덜된 사람들이 명함에 글자 수가 많다. “문인 협회 이사”, “중남미 작가협 명예 회원”, “소설가 연맹 상임 이사”, “살라밍까대 전 교수” 따위다. 그러나 한림원 위원이 되면 명함이 간단하다. “왕립 한림원(Real Academia)”라고 소속을 표시하든지 아니면 더욱 간단하게 “한림원 의원”(Real Académico)이라고만 적는다.
서반아 사람들은 명예를 무척 존중하는 사람들이다. 헤겔도 서반아 사람들의 성격은 “정직하고 자존심 강하고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들로 규정짓는다. 그들의 말에도 “가난하지만 명예로운”(pobre pero honrado)이라는 표현을 즐긴다. 소위 양반이니, 체모를 잃지 않는 행동거지를 서반아 사람들은 무척 좋아한다. 이미 낡은 명예 개념인 “백작”이니 “공작”보다도 아직 “한림원 의원”이라는 소리는 무섭게 어필하는 명예의 대명사이다. 서반아 신문 중에 보수 성향이 짙은 “아베세”(ABC)라는 신문 맨 앞쪽에는 늘 한림원 의원들의 권두언이 실린다. 그 이름 밑에도 항상 간단하게 “Real Academia”라는 말이 붙는다. 권위가 있다. 아직 가난하지만 영예로운 한림원 의원들의 보수는 그러나 이제 상징에 가깝다. 세기 초의 거마비를 아직도 올리지 않은 것 같은 약소한 금액이다.
유모어 감각이 뛰어난 1989년 노벨상의 까밀로 호세 셀라는 라스 빨마스라는 벽지 섬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림원에 오곤 했다. 한번은 기자가 “어떻게 이렇게 그 먼길을 매번 거르지 않고 회의에 오십니까?”라고 물었다. 셀라는 그 퉁명스러운 얼굴로 방금 받은 만 원짜리 한 장 정도 든 봉투를 내 보이며 “이 사람아, 나도 월급을 받아야 살지!”했다는 것. 왕립 한림원은 파스째르나쓰, 삐께르, 꼬르띠나와 알바 등의 문학상 연구상을 준다. 그 금액은 또 한번 상징적이다. 그러나 그 상의 권위는 하늘을 찌른다.
서반아 왕립 한림원은 프랑스보다 80년 늦게 1713년에 태어난다. 이미 16세기부터 사설 한림원들이 있어 문인들의 모임을 주도한 일이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 왕립 한림원의 모태로 문학과 학문의 공식 전당으로 자리한 것은 1713년 7월 6일이었다. 비에나 백작, 에스깔로나 공작, 환 마누엘 페르난데스 빠체꼬의 사회로 마드리드 “데스깔사스” 광장 저택에서 개행된 회의가 그 시초이다. 그 뒤 1714년 10월 3일 국왕 펠리삐 5세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고 처음에는 총 여덟 명의 회원들로 구성되었으나 곧 11명으로 늘렸다. 그리고 1715년에는 첫 한림원법이 제정되고 의원 수도 서반아어의 알파벳 대문자 수를 따라 24석으로 늘렸다. 1715년에 채택한 문장은 불에 굽는 자기 컵에 “갈고 닦으라, 정하라, 빛나게 하라”(Limpia,fija y da esplendor)이라는 슬로건을 새겼다. 그 뜻은 서반아어를 보존하고 정화하는 것이 한림원의 주된 임무라는 의미이다.
펠리삐 5세는 한림원과 한림원 의원들에 대한 몇 가지 특혜를 준다. 그중 하나가 한림원이 출간한 책이나 한림원 의원이 쓴 책은 어떤 경우에도 검열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 1754년 페르난도 6세 왕은 한림원 자리를 국왕 산하의 재무부 청사로 옮긴다. 그리고 1793년에는 까를로스 4세가 다시 지금 문리 화학 수학 한림원이 있는 마드리드의 발베르데 가 건물로 이전하게 한다. 그리고 오늘날 왕립 한림원 건물, 쁘라도 박물관 가까운데 보이는 대청사는 1894년에 새로 지은 건물을 기증받은 것이다. 1847년 3월 12일자 왕명에 의하여 의원 수가 12명이 더 는 36석이 되고 그 의석은 다시 알파벳 소문자로 시작하도록 하다. 그 뒤 한림원법은 몇 번 수정을 거친다. 그중 특기할 만한 것은 수도 마드리드에 살지 않는 의원들을 위하여 24개의 지방 의원 자리를 두게 된 것, 1926년에는 지방 한림원이 생긴 일이 있었으나 1930년에 폐지된다.
현대사에 있어서 왕립 한림원 또한 서반아 내란의 수난을 함께 경험한다 . 1936년 내란이 시작되자 모든 공식 한림원이 폐지된다. 1938년 호세마리아 뻬만이라는 프랑코 파의 극작가의 주도하에 다시 살라망까에서 1월 5일 한림원 회의가 재개된다. 1936년에서 1939년까지 한림원은 산세바시띠안, 세빌라 등 각 도시로 자리를 옮겨 가며 회의를 연다. 마침내 1939년 오늘의 마드리드의 왕립 한림원 자리로 돌아온다. 그와 동시에 “서반아어 용어 사전(Diccionario usual)”, 16판을 출간한다. 1940년 내란 이후 최초로 한림원 선거가 벌어진다. 그리고 새로 다섯 명의 의원이 탄생한다. 여기 재미있었던 일은 1941년 문교부 칙령으로 내란 이후 망명한 공화당파 의원들을 제명했던 사건이다. 고명한 언어학자이며 문학가였던 나바르로 또마스가 차지하고 있던 h석과 철학가 마드리아가의 M석이 공석이라고 정부는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왕립 한림원은 내규로 두 의석을 계속 두 학자의 이름으로 존속시켰다.
1943년 영구 도서관장으로 비센떼 가르시아 디에고가 선출된다. 그리고 1947년에는 현대 서반아어 문학의 가장 위대한 공로자 라몬 메넨데스 삐달이 의장으로 앉는다. 이와 동시에 서반아어 공식 사전이 17판이 나오고 내란 이후 파란 많던 왕립 한림원이 제자리를 잡아 연구에 몰두한다. 그동안 산하에 수많은 연구 기관들의 활동이 활성화된다. “서반아 어휘 세미나”에서는 “까스띨야 어의 역사 사전(Diccionario histórico del idioma castellano), 1946” 등 많은 연구가 쏟아져 나온다. 또한 “리바데네이라 상”을 비롯 언어 문학 연구 및 창작 작품에 대한 상들이 계속 매년마다 수여된다. 특히 1952년에는 1870년에 제정되었던 중남미 및 필리핀 한림원까지 각각의 나라의 한림원을 산하로 받아들이고 각 지방의 서반아어를 그 지방적 특성에 의거 연구하는 업무를 관장에게 한다. 그 두드러진 역할을 보면 1951년 멕시코 한림원에 의하여 주도된 “중남미어 사전”(Diccionario de americanismos) 계획이다. 모든 중남미 대표와 필리핀 대표가 모인 대회에서 서반아 왕립 한림원의 소청으로 대 기획이 이루어지고 이런 “서반아어 한림원들(Academias de la lengua española)”은 매 4년마다 곳곳에서 학회를 개최한다.
그동안 서반아 한림원은 수없이 많은 책들을 냈다. 그중 특기할 만한 것은 계간지 성격으로 1941년부터 발간하고 있는 “서반아 왕립 한림원 서지”(Boletín de la Real Academia Española)를 비롯 1713년부터 시작한 “공식 사전”(Diccionario de Autoridades)이 계속 나온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서반아어 용어 사전” 혹은 보통 “한림원 사전”(Diccionario de la Academia)으로 불리는 사전은 1976년까지 20판이 계속 수정되고 재정의되면서 출간되고 있다. “서반아어 철자법”(Ortografía) 1741, “서반아어 문법”(Gramática de la Lengua) 1771, 1780년에는 “돈키호테” 4권으로 출간되고 로삐 데 베가라는 17세기 극작가의 전집 13권이 한림원에 의해 출간되어 나온다. 이들 역사적인 업적 외에도 오늘까지 매년마다 서반아 왕립 한림원은 그 활발한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서반아 왕립 한림원은 언어 문학 연구뿐만 아니라 문학의 원로들에게 주어지는 월계관 같은 명예라는 상징적 의미가 강하다 . 사실 70년대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비센떼 알레익산드레는 법학 석사이다. 그가 한림원 의원이라 함은 한 권위 있는 시인이라는 뜻 이외에 무슨 서반아어 연구라든가 문학 연구에의 공여 따위는 기대할 수 없겠다. 오늘날 갓 한림원 의원이 된 뻬레 짐페레르 경우도 아직 50이 못된 시인이지만 그 명예를 인정하여 한림원 의원에 뽑힌 것이다. 따라서 왕립 한림원은 엄격한 의미에서 연구만 하는 연구소는 아니다. 다만 한 나라의 언어를 창조하고 (정화한 저명한 문인들의 경우) 의원들과 그것을 연구하고 수집하고 재정리하고 표준을 정하는 작업을 함께 수행하고 있는 곳이 한림원이다. 서반아 왕립 한림원의 권위와 명예는 역사적으로 정치와 독립된 순수 문화 기관이었다는 사실이다. 원래 펠리삐 5세가 한림원의 출간물에 일체의 검열을 면제해 준 것부터 시작하여 서반아 한림원은 늘 정치와 무관한 고고성과 독립성을 유지해 왔다. 서반아 내란 때처럼 일부 정치 세력의 몰상식한 횡포에도 꿋꿋이 자신을 지켜 온 보람과 긍지는 오늘도 한림원의 권위를 더욱 빛나게 떠들고 있다.
1976년 40년의 공백 끝에 마침내 프랑코가 죽고 서반아에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귀국한 대 철학자 살바도르 데 마드리아가의 한림원 동원 연설은 감동의 순간이었다. 연설 내용은 늘 자신이 이어받은 선임 의원에 대한 칭송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에 이어 자신의 연구나 문화 이론으로 넘어간다. 여기에서 발표된 강연 내용이나 기타 환경 강연 등은 곧 책으로 출간된다. 여기에는 학문에 대한 학문의 잔치이지 따로 “날씨도 여의치 않는 이렇게 많이 왕림해 주셔서······”라든지 쓸데없는 허드레는 없다. 물론 그 어지러운 리셉션이나 술도 음식도 없다. 그러면서도 그 자리는 모든 사람의 존경과 선망이 한데 모아진 숭엄함이 살아 있다. 학문이, 문학이, 서반아어가 명예가 그 모든 겉치레를 벗고 고고함으로 감동의 물결을 이룬다.
서반아어 권 30여 국에 있어서 서반아 왕립 한림원의 권위는 그대로 학문성의 상징이며 그 명예의 살아있는 표상이다. 오늘 서반아가 중남미 여러 나라에 형제국으로서 혹은 종주국으로서 계속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것은 사실 왕립 한림원의 역할이 크다. 프랑코 정권이 멕시코나 기타 공화국 지원국들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던 상황에서도 “서반어 한림원들” 학회 같은 범미주 연합의 언어를 통한 유대가 끈질기게 이어왔던 것은 언어의 유대의 힘이었을 뿐만 아니라 왕립 한림원의 초정치적 역량이었다. 중남미와의 역사 관계는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서반아어 대제국의 식민 정치의 횡포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서반아어 권의 문학가나 학자 일반인에게도 서반아에 대한 앙심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서반아인들의 인종 혼합 정책의 탓도 있겠지만 (중남미인은 서반아인 피와 원주민의 피의 혼혈이 절대 다수이다.) 그중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언어의 유대이다. 왕립 한림원을 중심으로 그 어느 정치적 혼란 상황 속에서도 고고하게 지켜져 온 정통성이나 명예의 꿋꿋함은 서반아어를 쓰는 한 저버릴 수 없는 위대성의 표상이었다.
20세기의 전진주의, 자본주의의 물결 속에서 왕립 한림원은 더욱 보수적으로만 보여 왔다. 한림원의 사전은 20년 전의 서반아어만 싣고 있다는 비평도 면할 수 없었다. 오늘의 언어학이 언어의 어원이나 역사성보다는 살아있는 언어 체계의 수집이나 구조 연구가 관심을 끌게 되자 한림원도 살아있는 중남미어 연구에 보다 관심을 기울이고 또한 서반아 내의 방언 연구에도 열을 올린다. 비록 한림원의 기능이 표준어, 표준 문법, 표준 철자법을 정하는 역할이 컸지만 이제는 있는 언어를 분류하고 다시 같은 체계 속에 집어넣는 역할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중남미 서반아어의 특징인 “예이스모”(yeísmo)나 “세세오”(seseo)를 그 특징으로 인정하고 설명하기 시작한 것도 한림원이다. 즉 서반아 정식 발음이 “ll”는 “castellano”에서 처럼 “까스뗄야노”로 발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중남미에서는 “까스떼야노”로 발음하고 있는 것을 인정한다. “ll”를 “y”처럼 발음하는 현상을 “예이스모”라 인정한 것이다. 그 외에도 나날이 달라지고 있는 중남미 서반아어의 어휘적 문법적 다양성을 오늘 한림원은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학문은 역시 보수적이다. 골동품도 오래되고 진짜인 것이 값이 나가듯이 학문이나 명예는 보수적인 데가 있다. 그 보수성의 진가를 그 실례로 상징으로 삼고 있는 게 서반아 한림원이다. 1964년 나의 은사 라파엘 라빼사 교수가 그의 “서반아 언어사” 및 기타 혁혁한 연구를 인정받아 영구 비서실장으로 부임한다. 1968년에는 시인이며 어문학자이며 은사인 다마소 알론소 교수가 메넨데스 삐달 박사의 서거와 함께 한림원장으로 추대된다. 1971년에는 알론소 사모라 비센떼 교수가 라빼사의 사퇴의 후임으로 영구 비서실장이 된다. 내가 다니던 마드리드 대학(Universidad Complutense de Madrid)은 교수의 대다수가 한림원 의원인 보수성이 짙은 대학이었다. 학위 논문도 당시에 유행하던 페르디난드 소쉬 계열의 언어학이나 문체론, 구조주의 분석보다는 어문학의 역사 연구 위주이었다. 작가 연구도 작품 활동이 마감된, 즉 죽은 작가가 아니면 연구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작품이 마감되지 않았는데 그런 작품에 대한 완전한 연구가 어찌 가능하느냐의 극히 역사주의적 관점이 한림원식 기준으로 대학 학문의 기저를 이루고 있었다. 필자가 이들 한림원 학자, 혹은 그 아류의 학문 풍토에서 겪었던 조그만 충격과 일화는 서반아의 왕립 한림원의 권위와 명예가 실제 우리에게 어떻게 낯설고 값진 것이었는가를 체감할 수 있는 좋은 예가 되리라 싶어 여기에 적기로 한다.
한 한국 학생이 낙제가 무엇인가를 배운 것은 이들 한림원 의원들에게서였다 . 한림원 의원을 구태여 여기 갖다 붙인 것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당시 한림원 영구 비서실장이었던 라파엘 라빼사 교수의 횡포(?)를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 “서반아 언어사”를 강의하시던 이 분은 그의 전무후무한 명저, 같은 제목의 책을 처음부터 달달 외는 것은 물론 서반아 어문학 잡지(Revista de Filología Hispánica)에 나온 최근의 연구, 기타 구라파 여러 학술지의 논문들을 다 읽어 보지 않으면 강의 내용이 무엇인지 감도 잡을 수 없는 복잡다단(?)한 설명만 그것도 열심히 노트시키듯 열거하고 있었다. 중세 라틴 어에서 서반아어의 형성 과정은 하루가 다르도록 새 학설들이 발표되고 새 자료들이 발굴되곤 했다. 그것을 다 읽고 이해하고 설명을 듣는다는 일은 라틴 어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이 한국 학생에겐 불가능 이상의 무엇이었다. 첫 번 시험은 물론 낙제였다. 나만 아니라 이 ”뼉다귀“(hueso)(낙제 잘 시키는, 무서운 교수에 대한 속어)에게 낙제당한 학생은 절반을 넘었다. 책을 달달 외우고 노트를 다 외우고 다시 시험을 봤다. 그래도 다시 낙제였다. 한 친구가 너는 외국인이니까 직접 가서 말씀드리면 어떻게 봐주지 않겠느냐고 귀뜸을 했다. 나는 수업이 끝나고 복도에서 스승을 뵈었다. 나의 소개를 시작하려고 하자 그는 내 이름까지 기억하며 나의 지난 시험이 썩 좋았다고 칭찬해 주었다. 나는 용기를 얻어 나는 고전 라틴 어도 안 배웠기 때문에 이 과목이 특히 어렵다고 서두를 꺼내자 그는 또 다시 나의에 대하여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 한 너댓 번 부탁 말을 꺼내려다가 나는 끝내 칭찬만 배가 터지도록 얻어듣고 다시 시험을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이야기는 서론이다. 운수가 사나웠던지 나는 라빼사 교수 다음 연구 비서실장인 알론소 사모라 비센떼 박사에게 진짜로 죽을 곤욕을 치뤘다. 그러니까 무슨 운수가 나도 모르게 서반아 한림원의 두 기둥 뿌리에 두 번이나 대갈통을 들이받히는 꼴이 되었단 말인가. 이야기는 이러하다.
1970년 경 나는 석사 학위 논문 등록을 하러 학교 교무처에 갔다. 여송연을 입에서 떼지 않고 서류만 뒤척이던 늙은 사무 직원은 나를 괴물 쳐다보듯이 한참 바라보더니 논문 지도 교수 등록은 이미 10일 전에 끝났다고 말했다. 다음 등록은 물론 1년 뒤인 다음 학기에 해야 된다는 말이었다. 학비는커녕 먹을 것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던 나의 심정으로서는 가슴이 내려앉는 절망이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차마 그 자리를 떠나지도 못하고 서성이고만 있었다. 그 여송연은 한참 뒤에도 그 자리에 서 있는 내 모습이 딱했던지 문득 나를 불렀다. 그는 대뜸, “어려우신 지도 교수여도 돼?”라고 물었다. 내가 지금 식은 밥 더운 밥 가릴 처지였겠는가. 그래서 모시게 된 교수가 사모라 비센떼 박사였다. 학위 지도 교수가 이미 모두 결정이 난 그때까지도 그분에게 지도를 받겠다는 학생은 하나밖에 없었다는 뒷 이야기.
사모라 비센떼 박사는 소설가에다 방언학 전문이었으며 발예 인끌란을 비롯해 문학 연구에도 많은 저서를 가진 대학자였다 . 풍모가 크고 서글서글하셔서 그때 내 생각에는 왜 이런 위대하시고 좋은 분을 남들이 지도 교수로 꺼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당시 문체론에 심취해 있던 터라 현대 시인으로 마차도의 문체를 분석 해 볼 시안을 가지고 있었다. 말씀드렸더니 마누엘 마차도는 좋은 테마라고 선뜻 받아들이셨다. 그래서 연구는 시작되었다. 가끔씩 논문에 대해서 상의를 드리면 그 분은 농담 겸 나의 노력을 칭찬하고 격려해 주셨다. 많이 발로 기고 찾고 쓰다 보면 좋은 논문이 된다고 껄껄 웃으시곤 했다. 1년 반이 지나 한 2~3백 페이지 석사 학위 논문이 완성되었다. 나는 잔뜩 기대를 걸고 그 분에게 그 두툼한 논문을 가지고 갔다. 그 분은 그것을 집에 가 읽어보겠노라고 하시고 노고를 치하했다 . 그 뒤 2개월이 지나도 3개월이 지나도 기다리던 전화 한 번이 없었다. 마침내 어느 아침 그 분에게서 한림원으로 자기를 찾아오라는 전화가 왔다. 고색창연한 주홍빛 융단 저 쪽에 그 분이 앉아 계셨다. 나는 왠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걸 느꼈다. 현대에서 갑자기 고대로 빠진 듯한 공포가 느껴졌다. 사모라 비센떼 박사는 여느 때처럼 친절한 웃음으로 나를 반겼다. 그리고 새로운 문체론의 논리나 용어가 놀랍다고 칭찬했다. 논리 전개도 대단히 우수하다고 했다. 나는 황송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떠나려고 하자 그 분은 내 논문을 들고 나오시면서 “다만 서반아 문장이 아직 덜 닦아진 데가 있으니 다시 써 가지고 오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리고 그런 김에 역사적 전개도 잊지 말라고 덧붙였다. 나는 엉겁결에 “예, 예, 물론입니다!”하고 밖으로 나왔다. 정오의 햇살이 눈부시게 이마를 내리쳤다. 그제야 나는 선생님의 말이 무슨 뜻임을 알아차렸다. 낙제였다. 다시 써서 1년 뒤에 다시 가져오라는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내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창피해서 진정을 하려고 해도 눈물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다음 이야기는 모두 다 사설이다. 나는 그날 집에 돌아갈 용기가 없었다. 신부이면서 동급생인 에스떼반 까르로 셀라다(아, 이미 교통 사고로 고인이 된 내 교수 친구!)의 수도원에서 며칠을 보내고 다시 용기를 회복했다. 1년 뒤 내 논문 결과는 전 심사원 만장일치 최고 성적이었다. 한림원은 내게 무서운 고뇌와 영광의 불가사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