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자판 논쟁, 과학과 제도의 먼 거리
-표준 자판은 능률적이고 자판 통일이 가능한 방식이어야 한다-
박흥호/한글 문화원 연구원
1. 영문 타자기의 교훈
세계에서 글자는 약 4백가량 된다고 하는데, 이 중에서 기계화에 성공한 몇 안 되는 글자 중에 하나가 우리의 ‘한글’이다. 이웃 일본이나 중국만 하더라도 가나나 한자를 빠르고 간편하게 찍을 수 있는 고성능 타자기 개발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가 ‘문자 기계’하면 떠올리는 것이 로마자(영문) 타자기이나, 서양 사람들이 이 수동 타자기 개발에 성공하기까지는 무려 200년이라는 오랜 시간과 그에 따른 막대한 투자를 하고서야 비로소 성공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한글을 빠른 속도로 찍을 수 있는 속도 타자기가 개발된 것은 1949년이었다는 것도 참고로 알아두자.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서양과 우리의 문자 기계화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지식조차도 없는 상태에서, 막연히 서양은 로마자가 기계화하기에 너무 쉬운 글자이므로 행운이고, 우리는 한글이 기계화하기에 결정적인 어려움과 불편한 점이 많은 글자이므로 불행을 감수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일이다.
이런 인식은 이 글을 읽는 거의 모든 분들이 예외없이 가지고 있는 한글에 대한 그릇된 상식이라고 본다. 그렇게 기계화하기 쉬워 보이는 로마자도 오늘날과 같은 배열을 한 수동식 쿼티(Qwerty) 타자기가 나온 것은, 1873년에 크리스토퍼 라담 쇼울즈가 설계하고 레밍턴 회사가 생산한 타자기가 처음이었다. (<그림1> 참고) 그러나 당시의 기계 제작 기술은 타자기의 엉킴 현상(jam; 글자가 새겨진 쇠막대기끼리 서로 엉키는 현상>이
<그림1> 쇼울즈가 설계하고 레밍턴사가 생산한 최초의 쿼티 자판 배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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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지 않도록 하기에는 부족했으므로, 쇼울즈는 빈도가 높은 글자를 서로 멀리 배열을 했다. 이것이 엉킴을 가장 적게 하면서 타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최초의 판매용 타자기가 되었다.
그 당시 쇼울즈가 빈도가 높은 글자를 서로 멀리 배열한 것은 타자할 때 엉킴을 방지하려고 한 것이었지만, 오늘날의 발달한 기술 수준 아래에서는 수많은 타자수들이 두 손가락만으로 타자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쇼울즈로서는 많이 쓰이는 글자를 멀리 떼어 놓는 것이 인접한 키에 의한 오타의 가능성도 줄이면서 기계적인 style="mso-spacerun: yes"> 엉킴 현상도 방지하는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이 점에서 우리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또한 흔히 컴퓨터 전문 회사로만 생각하는 IBM사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전동 타자기와 볼 타자기를 최초로 각각 계발해서 내놓은 회사였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 분야의 전문 회사인 IBM이 그만큼 새로운 문자 기계에 대한 연구에 일찍부터 많은 투자를 해왔다는 증거이며, 따라서 앞으로도 IBM 같은 회사는 어떤 새로운 첨단의 문자 기계화 제품을 개발, 생산하는 회사로 계속해 가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타자기 회사들의 노력이 아쉽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이미 수많은 사람이 쓰는 글자판이지만 기계 발달 수준에 비추어 시대에 뒤떨어진 배열이 되어 버린 쿼티 자판을 두고, 1982년 11월 19일 과감하게 <그림2>의 드보락 글자판을 미국 표준 자판으로 승인(X4.22-1983)한 것은 그만큼 그들이 문자 생활이 국가 전체의 문화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있으며, 과학적인 연구 결과들을 제도적으로 수용해 나간다는 증거이다. 반면에 우리의
<그림2> 미국 국립 표준국의 드보락 글자판 배열(X4.22-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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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 표준화 정책은 그동안 두 번에 걸쳐 단행되었지만, 그때마다 과학적인 연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무시하는 쪽으로 제도화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비판이다.
2. 정부의 자판 통일 과업의 실패 요인
먼저 한글 자판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연구를 하고 있는 분 중의 한 사람인 고려 대학교 심리학과 이만영 교수의 글을 통해서 글자판 통일 사업에 대한 흐름을 알아보자. -‘한글 자판 연구 계획(초안)’, 1990년 6월, 1-2쪽에서.
- 1969년 과학기술처는 3벌식과 5벌식의 절충으로 4벌식을 사무용 타자기 글자판의 표준 자판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연구에서도 4벌식 표준 자판 결정의 객관적 기준 자료가 거의 없었다. 인용한 자료도 3벌식 연구인 장동환 연구를 부분적으로 인용하여 4벌식 연구인 양 위장한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의 구체적 진술 내용의 타당성 여부는 차치하고 2벌식에 대한 연구는 언급도 없이 2벌식 인쇄 전신지용(텔레타이프) 자판도 동시에 표준안으로 제시하였다. 그 근거는 4벌식 숙달자가 숙달하기 쉽도록 배열하는 원칙(만)을 따른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4벌식과 2벌식 자판이 표준안으로 결정되었다. 이와 같이 국가에서 표준 자판을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 이 표준 자판이 실질적으로 표준 자판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자판 문제는 계속되었다. 1952년 민간 단체인 세종 대왕 기념 사업회에서 글자판 통일 작업을 시도하였으며(결과: 3벌식), 1978년 한글 기계화 촉진회가 주동이 되어 민간 통일 자판을 제정하여 발표하였다(결과: 3벌식).
- ··· ···1981년 과학기술처는 KIST에다 용역을 주어 현재의 2벌식 컴퓨터 표준자판(KSC-571)을 결정하였다. 이 표준자판을 위한 KIST 연구는 1969년 2벌식 인쇄 전신기 표준 자판을 컴퓨터 표준 자판으로 선정하기 위한 형식적인 연구였다고 할 수 있다.
- ···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무총리 훈령 제81호(69년 7월 28일)에 의해 이제까지 사용해 온 4벌식 표준 자판을, 국무총리 행정 지시 제21호(1983년 8월 26일)에 의해 폐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과학기술처는 1985년 6월 4벌식과 2벌식의 절충인 기계식 자판을 공포했다.……
- 다시 살펴보면, 85년 기계식 타자기는 컴퓨터 자판 숙달자가 쓰기 쉽게 만들었으며, 82년 컴퓨터 표준 자판은 1969년 2벌식 인쇄 전신기를 약간 변형해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2벌식 인쇄 전신기용 자판에 대한 연구는 없다. 단지 4벌식 타자기 표준 자판에 준하여 4벌식 타자기를 쓰는 사람들이 이용하기 쉽도록 주먹구구식으로 고안된 것일 뿐이다.
- ··· ···따라서 남아 있는 문제는 3벌식이 우수한가, 2벌식이 우수한가, 또는 현행 자판의 표준 자판으로서 적절성 문제를 논쟁으로 삼기보다는, 이들 자판의 장단점에 관한 공학 심리학적(인간 공학적) 기초 연구를 체계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윗 글에서 보면 정부에서 글자판 표준화를 69년과 85년에 단행한 것을 알 수 있다. 85년의 수동 타자기 자판은 82년의 두벌식 컴퓨터 자판에 맞추기 위한 것이었고, 69년의 두벌식 텔레타이프 자판은 네벌식 타자기 자판에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즉 69년에는 타자기에 초점을 맞추어 ‘네벌식’으로 표준을 정했다. 85년에는 컴퓨터에 초점을 맞추어 ‘두벌식’으로 표준을 정했다. 그러나 네벌식을 정할 때 벌써 텔레타이프는 두벌식으로 정함으로써 자판 통일에 실패했고, 두벌식으로 정할 때는 수동 타자기를 ‘가짜 두벌식’(실제는 네벌식)을 정함으로써 자판 통일에 실패했다. 텔레타이프는 키 개수가 적기 때문에 네벌식으로는 불가능했고, 수동 타자기는 메커니즘상 완전 두벌식은 불가능한 방식이다.
더욱이 네벌식을 표준으로 정한 69년에는 이미 세벌식 수동 타자기는 물론 세벌식 텔레타이프 자판이 개발되어 뉴욕 타임즈에까지 보도가 된 상태였다. 그런데도 정작 자판 통일을 한답시고 단행한 정부의 표준화는 타자기에는 네벌식이고, 텔레타이프에는 두벌식이었다. 일이 이 모양이었으니 자판 통일이 될 리가 없었고, 점점 자판 통일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자 결국 정부에서는 80년대 들어 새로 자판 통일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그동안의 시행착오를 똑같이 되밟는 두벌식과 가짜 두벌식으로 결정해 놓고 말았다. 이 사실을 보면 이 분들이 자판 통일의 원칙을 무시하고 단행한 처사였다고 지탄받아 마땅하며 , 이런 사실은 아는 이라면 어떻게 흥분을 않겠는가? 요즘도 수동 타자기는 없어질 테니까 컴퓨터에만 초점을 맞추어 자판 문제에 대한 주장을 펴는 이들이 많은데, 이제까지 거듭해 온 실패의 값비싼 교훈을 똑바로 알지 못한 데서 나오는 소리라 하겠다.
그럼 정부의 두 번에 걸친 자판 통일 사업이 왜 실패를 거듭했는지 살펴봄으로써, 앞으로의 자판 표준화 과업에 더 이상의 시행착오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첫째, 정부의 한글 자판 정책에는 사공은 많은데, 정작 옳은 사공은 드물었다. 이 말은 전문가 선정에서 잘못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탁구를 예로 들자. 탁구팀 감독이 되려면 반드시 선수 출신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탁구 시합에 많이 참석하고 관계자를 충분히 연구하여 탁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은 가져야 한다. 그런데 정부에서 맡긴 한글 자판 연구진들은 타자 선수 출신도 아니고, 타자 경기 대회에도 참관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이 분들이 가진 학식이나 자기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분들은 ‘탁구 대표팀 감독 자리’에 ‘정구’나 ‘배드민턴’에 뛰어난 감독들만 선정되었다는 데 문제의 초점이 있다. 평소 한글 자판 문제에 대한 연구 논문이 한 편도 없고 또 타자 경기 대회에 참관하여 자료 조사 따위도 전혀 않던 이공계 학자들로 전문 위원을 꾸려 나갔는데, 이들은 자판 문제에 대해서만은 비전문가였다. 몇 가지 근거를 든다.
세벌식은 두벌식보다 키 개수가 많으므로, 배우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시프트 키도 ‘많이’ 누른다고 했다. 글쓴이가 아는 바로는, 정부의 글자판 표준화팀에서는 단 한번도 ‘타자 학습 진도’에 관한 실험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실험 비교조차 해보지 않은 채 어떻게 어느 한쪽이 ‘어렵다’고 확언할 수 있는가? 정말로 어렵다면 학습 진도 실험에서 몇 퍼센트나 낮게 나왔는지 밝혔어야 옳았겠으나, 그러한 수치는 한 구석도 없다. 이것은 배드민턴 감독이 탁구 선수들에게 라켓을 ‘펜홀더’로 쥐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쉐이크핸드’로 바꾸어야 성적이 올라간다고 하는 주장과 다를 것이 없다. 실제로 타자 경기 대회의 객관적인 기록은 세벌식이 거의 휩쓸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이 분들은 과연 무슨 자료를 참고했단 말인가?
더욱이, 이 분들이 “두벌식은 키 개수가 적으니 시프트 키를 적게 누르고, 세벌식은 키 개수가 많으므로 시프트를 많이 누른다.”고 기록한 부분에 이르면, 한 나라의 글자판 표준화 연구를 담당했던 전문가들이 이토록 기초적인 것조차 검토해 않았는가 하는 의아심을 갖게 만든다. 간단한 분석 프로그램 하나만 만들어 같은 한글 문서를 두벌식과 세벌식에 대하여 통계를 내어 보면, 세벌식이 두벌식보다 시프트를 누르는 횟수가 적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인데도, 최근까지 줄기차게 이런 그릇된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글쓴이가 조사한 바로는 <표 1>과 <표 2>에서 와 같이, 시프트 키는 분명히 세벌식이 적게 누르는 것으로 나왔으며, 명색이 정부에서 자판 통일을 했다고 하는 ‘두벌식’ 자판끼리는 컴퓨터 자판과 수동 타자기 자판이 입력할 때 15배가 넘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왔다. 따라서 두벌식은 이름만 두벌식으로 지었을 뿐, 기종간 자판 통일은 전혀 이루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결코 통일할 수 없는 결점투성이의 구조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표 1> 두벌식과 세벌식 한글 자판의 구조적인 차이점
‘국민교육헌장’전문을 칠 때 |
두벌식 |
세벌식 |
타자기 |
컴퓨터 |
타자기 |
컴퓨터 |
윗글쇠 횟수 |
186번 |
12번 |
6번 |
6번 |
치는 방식 |
두 기종 간 서로 다름 |
당연히 꼭 같음 |
컴퓨터 만능 시대인 만큼 컴퓨터에만 국한시켜 보더라도, 세벌식에 비해 두벌식 컴퓨터 자판이 시프트율이 높게 나왔다. 한 손가락으로 계속 타자하는 연타율은 5배가 넘었으며, 한 손가락으로 곁에 있는 다른 키를 연속적으로 타자해야 하는 경우는 무려 8배 가까이 높게 나와 두벌식이 타자 능률을 크게 떨어뜨리는 배열인 것으로 나타났다. (<표 2> 참고)
<표 2> 타자하는데 속도를 떨어뜨리는 주요 요인들 비교
(입력 자료: 무작위 추출-‘한겨레 신문’ 90년 8월 30일 사설)
‘일간 신문’ 사설 하나를 쳤을 때 |
컴퓨터 글자판 두벌식 |
컴퓨터 글자판 세벌식 |
윗글쇠를 누르고 치는 횟수 |
44번(1.37% ) |
30번(0.94% ) |
같은 손가락으로 연타 |
155번(4.24% ) |
29번(0.79% ) |
같은 손가락 다른 키 연타 |
79번(2.16% ) |
11번(0.30% ) |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현재 표준 두벌식 자판은 그야말로 엉터리이므로 새로이 연구를 해서 과학적으로 배열을 하면 아주 이상적인 두벌식 자판이 나올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 즉 현재 두벌식 자판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두벌식 자체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고, 두벌식을 과학적으로 배열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는 이들이다. 이것은 현행 표준 자판의 비효율성을 들어 그 개선을 주장하면서도, 역시 두벌식이라야 이상적인 한글 자판이 나올 수 있다는 논리다.
표준 자판을 연구한 당시의 연구팀들이 들으면 매우 섭섭하게 생각할지도 모를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한글 자판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나 안목이 거의 없는 이들로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들의 주장은 정부의 한글 자판 표준화 사업이 20여 년이 넘도록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까닭이 근본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데서 나온 주장이며 두벌식이 갖는 구조적인 문제점은 결코 과학적인 배열로는 해결될 수 없는 두벌식 자체의 문제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글은 음절 구성상 종성이 18% 정도의 비율로 꼬박꼬박 나타나는데, 두벌식으로 하면 어떻게 배열을 하든 관계없이, 받침 글자 다음에 나오는 초성은 같은 닿소리 키로 타자하게 되므로 연타 요인을 없앨 수 없게 된다. 영문 자판처럼 닿소리와 홀소리 글자를 왼손 오른손에 섞어 배열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연타를 줄여 배열할 수 있겠지만, <표 2>에서 보듯이 그 해결은 끝자리 수치를 줄이는 정도에 그칠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두벌식 체제 아래서는 현재 전자 타자기가 안고 있는 문제는 한 가지도 해결할 수 없다. 즉 아무리 두벌식 체제로 새로운 배열을 만들다 해도, 기종 간 자판 통일은 결국 불가능한 배열이 되며, 수동 타자기에서는 역시 입력 방식과 배열이 다를 것이고 점차 타자기나 한영 겸용 타자기 개발이 불가능하고, 전자 타자기에서는 치는 대로 찍히지 않고 한글이 낱글자만 찍히지도 않게 되어, 현재 수동 타자기와 전자 타자기가 가지고 있는 유치한 문제점들을 그대로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문제가 이런 지경인데 누가 이 새로운 두벌식 자판으로 표준을 바꾸는 혼란을 감수하려고 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연구를 해보면 두벌식 자판도 이상적인 형태가 나올 것이라”는 일부의 주장은, 따지고 보면 자신이 한번 내놓은 주장을 합리화하는 데 지나지 않는 탁상공론일 뿐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특히 이런 이상론을 펴는 이들의 대부분이 자신의 주장을 반영한 개선된 자판 배열을 전혀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글자판 문제의 특수성과 중요성에 비추어 그 무책임함을 면할 길이 없다고 본다.
둘째, 자판 문제를 담당하는 정부 관리들이 자판 통일의 중요성과 문자 생활의 기계화에 대한 전문 식견이 크게 부족했다. 이 말은 정부 관리의 비전문성으로 전문가 선정을 잘못하게 되었고, 심각하게 얽힌 자판 통일 문제를 하루빨리 개선해야 한다는 사명감조차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자기 한몸 돌보는 데 급급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썩는 곳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치명상이 된다. 어느 정도 손실은 감수하고서 빨리 과감한 수술을 단행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것을 해야 할 곳과 할 사람은 분명하다. 정부 부처에는 모두 일에 따라 담당자가 있기 때문이다. 뜻만 있다면 전문가의 도움은 언제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정부 기관에서는 이제라도 한글 기계화 문제에 근본적인 수술을 단행하는 정책을 공개적으로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받아 추진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셋째, 민간 분야의 연구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 이 말은 네벌식을 표준 자판으로 선정할 때는 세벌식과 다섯벌식 타자기에 대한 올바른 연구를 수행하지 않았고, 두벌식을 표준 자판으로 선정할 때는 세벌식과 네벌식, 두벌식에 대한 비교 연구를 전혀 해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곧 정부 예산을 들여 만들어 낸 4벌식 타자기 자판(1969년)은 전문가들로부터 “세벌식과 다섯벌식의 단점만 모은 졸작이다”, 2벌식 타자기 자판(1985)은 “네벌식보다 못한 엉터리 자판이다”라고 각각 호된 비판을 받았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
네벌식을 표준화할 때는, 당시 널리 쓰이고 있던 세벌식과 다섯벌식 타자기의 민간 연구 성과를 흡수하지 않은 채, 정부가 충분한 연구 검토 없이 네벌식 타자기 자판을 하나 더 추가해 놓은 셈이었고, 텔레타이프용으로는 한장의 연구 보고서도 없이 현재 쓰고 있는 두벌식을 표준으로 발표함으로써, 처음부터 자판 통일에 대한 의식이 없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두벌식을 표준화할 때는, 이미 15년 동안의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아예 자판 통일이 불가능한 두벌식 자판을, 마치 기종 간 통일을 이룬 것처럼 위장하여 시행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현재 상업고등학교에서는 타자 시간과 컴퓨터 시간에 같은 이름의 두벌식 자판이 서로 배열이 다르고 치는 방식도 전혀 다르기 때문에 커다란 혼란을 되풀이하고 있다. 문교부에서 값비싼 컴퓨터를 국민학교에 교육용으로 보급하면서, 그보다 예산이 적게 들고 교육적인 가치도 높은 타자기 교육은 하고 싶어도 할 엄두를 못 내는 까닭이 바로 자판 통일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공부에서 부여하는 자판 급수 시험도 수동 타자기로만 보기 때문에, 수많은 학생들이 애써 익혀 합격한 두벌식 수동 타자기 자판의 자격증을 졸업하면서 모두 버려야 한다. 어떤 사무실에서도 두벌식 수동 타자기를 무용으로 쓰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네벌식 수동 타자기를 그대로 쓰든지, 두벌식 전자 타자기를 쓰고 있다. 그러나 이 두벌식 사무 전자 타자기 또한 수동식 타자기에 못지 않은 애물단지다. 의심스러운 분은 직접 두들겨 보시라. 글자가 치는 대로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한글을 낱자로 찍을 수조차 없게 되어 있다.
넷째, 수동 타자기의 교육적 값어치를 모르는 것이 문제다. 이 말은 컴퓨터를 버려 두고 기계식 타자기를 쓰자는 소리가 결코 아니다. 국민학교와 같은 단계에서는 컴퓨터보다 수동 타자기가 더 교육적 효과가 크고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현대는 물론 전자 시대이다. 곧 광자 시대도 닥쳐온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는 단계별 학습 타당성이 있다. 글자판을 칠 줄도 모르는 국민학생들에게 영문 자판으로 “dIr, cls, forma t;rem, if,...then...else” 따위의 도스 명령어나 베이직 명령어를 치게 하고, 그것들을 이용하여 프로그램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과연 온당하단 말인가?
<표 3> 두벌식과 세벌식 자판의 장단점 비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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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벌식 |
세벌식 |
글자판 배열의 통일
입력 방식의 통일
시프트 키 횟수
연타율
자판 키 개수
타자 능률
학습 진도
수동식 점자 타자기
한영 겸용 기계
수동 타자기
전자 타자기
컴퓨터 |
결코 이룰 수 없는 체계임.
결코 이룰 수 없는 체계임.
많음
높음(구조적으로 불가피한 문제).
33개
세벌식에 비해 낮음.
처음에 빠르고 숙달이 느림.
개발이 불가능함.
수동식에서는 결코 불가능함.
자판은 2.5벌식, 활자는 4벌식.
기계 구조가 복잡함.
피로도 높아 펀치병 요인이 됨.
입력과 동시에 찍히지 않음.
한글 낱자 입력이 안 됨
화면에 도깨비불 현상이 일어남.
받침을 따로 입력할 수 없음. |
손쉽게 가능함.
당연히 같음.
적음
낮음.
45개
두벌식에 비해 높음.
처음에 느리고 숙달이 빠름.
이미 쓰이고 있음.
모든 기종에서 이미 개발됨.
자판과 활자가 세벌식.
기계 구조가 간단함.
피로도가 낮음.
입력과 동시에 찍힘.
한글 낱자 입력이 됨.
화면에 원하는 글자만 나올.
받침만 입력할 수 있음. |
그보다는 먼저, 값싼 수동 타자기를 널리 보급하여 모든 학생들에게 타자 교육을 함으로써 글자 생활을 기계로 하는 능력을 가르치는 것이 순서다. 어릴 때부터 기계식 타자기를 치게 되면 문자 기계화에 대한 이로움에 일찍 눈뜨게 되고, 무엇보다 기계 작동 원리(기계 메커니즘)에 대한 커다란 교육적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된다. 프로그래밍도 자판을 익힌 다음에 교육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겠는가. 쉽고 순리적인 길을 두고, 어렵고 기초[계열성, sequence]를 무시하는 교육을 하는 이유를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다. 자동차 문화가 보편화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동차 설계 기술을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설계 기술을 배우기에 앞서 운전 기술을 익혀야 한다. 문자 기계의 운전법은 타자 능력이 아니겠는가?
3. 쉬운 길이 지름길이다.
쉬운 것은 위대하다. 현대는 정보 전쟁의 시대라고도 한다. 요즘의 마라톤 경기의 세계 기록은 5천 미터 육상 경기에서 한국 기록을 세운 선수의 평균 속도보다도 빠르다고 들었다. 선진국들은 이렇게 놀라운 속도로 경쟁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정장을 하고 양복 주름에나 신경을 쓰면서 국제 경쟁을 한답시고 뛰고 있는 꼴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굴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어 그 길을 보지 않으려고 할 뿐, 정보가 국제 경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시대에는 글자 생활의 능률[사무 자동화, OA]에 따라 국가 발전이 좌우된다는 이치쯤은 이제는 깨달을 때가 되었다. 우리에게는 세계 여러 나라 학자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는 ‘한글’이 있다. 한글은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하며, 기계화하는 데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문자다. 우리가 서양 말 흉내만 내느라 그것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문자 생활과 문화 수준이 이렇게 뒤떨어져 있는 것이다.
두벌식은 한글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는 구조다. 한글은 초 중 종성으로 모아쓰기를 한다. 한글 전산 코드도 초 중 종성 별로 두고 있고, 국어사전의 차례벌림도 초 중 종성으로 되어 있다. 기계화의 첫 관문인 글자판도 이와 같이 초성, 중성, 종성으로 1세트만 쓰는 것이 가장 발전적이다. 이것을 우리는 ‘세벌식’이라고 한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새로운 자판 표준안은 <그림 3>에 보인 바와 같다. 이것은 한글 기계의 모든 글자판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라고 판단된다. 실제로 이 자판은 수동 타자기, 전자 타자기, IBM 컴퓨터, 매킨토시 컴퓨터 등의 글자판에서 구체적인 검증을 거쳤다.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깊이 있는 비판을 바란다.
<그림 3> 기종 간 글자판 통일을 위한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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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벌식은 기종 간 글자판 통일이 불가능한 체계다. 영문 타자기는 홀소리, 닿소리 글자에 관계없이 한 세트의 활자만 사용하여 글자판과 인쇄 활자가 1:1 대응을 이룸으로써 기계화에 성공했다. 한글 속도 타자기를 처음 개발한 공병우 박사는, 기존의 한글 타자기 영문 타자기를 참고하여 밤낮을 씨름한 끝에 6개월만에 성공했다고 한다. (1949년; 글쓴이가 아는 바로는 공 박사가 어떤 일에 6개월을 모조리 쏟았다면, 아마 보통 사람들의 2~3년에 가까운 노력과 정열에 해당될 것이라고 본다). 이렇게 하여 나온 타자기가 3벌식 쌍가이드(쌍초점) 방식의 한글 타자기였다. 영문이 닿소리, 홀소리 알파벳을 가로로만 늘여 쓰는 것과 달리, 한글은 초성, 중성, 종성의 글자를 옆과 아래로 모아쓴다. 고성능 문자 기계화에는 1세트만의 활자를 씀으로써 ‘글자판’과 ‘활자’와 문자 생활의 ‘인지 구조’ 사이에 1:1의 대응 관계를 이루어야 하므로, 이러한 문자 기계화의 근본 원리에 맞도록 하기 위해서는 쌍초점 방식으로 창안된 세벌식이 최종적으로 성공을 안겨다 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고성능 한글 속도 타자기의 시초가 된다.
그러나 한글 타자기가 점점 퍼져가고 있을 무렵, 자판 통일을 한다고 실시한 표준 자판이 번번이 두 가지로 발표되었기 때문에 도리어 자판 통일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고 말았다. 텔레타이프는 네벌식으로는 불가능하며, 수동 타자기는 두벌식으로는 실용화할 수 없다. 지금 각 상업학교에 쓰이는 두벌식 수동 타자기는 컴퓨터 자판과는 이름만 두벌식이라고 붙여졌을 뿐, 자판 배열도 다르고 입력 방식도 완전히 다르다. 상업학교 학생들이 타자 시간과 컴퓨터 시간에 가짜 두벌식과 두벌식 자판 사이에서 겪고 있는 모순을 보면 알 것이다. 하루 빨리 과학적인 자판으로 통일을 성취해야만 한다.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중대한 국면에 처해 있다.
한글의 특성을 살리고 기종 간 자판 통일이 되는 세벌식 자판으로 표준화를 단행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지름길이다. PC 100만 대 보급을 눈앞에 두고 있고 국제간에 정보 경쟁 시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오늘날과 같은 자판 혼란 상태가 마냥 앉아서 연구만 하고 있을 수 없는 지경에 몰려 있다. 그러므로 체계적인 자판 연구와 함께 당장 쓸 수 있는 잠정적인 대안을 아울러 찾아 나가야 한다고 본다. 그만큼 현행 2벌식 자판의 모순점(단점)은 근본적인 문제를 안겨 주고 있다고 하겠으며, 글쓴이는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으로써 지난 40년 동안 각 방면으로 실질적인 적용과 시험을 거친 3벌식 자판을 제안한다. 글쓴이가 판단하기로는 <그림 3>의 3벌식 자판이 잠정적인 대안으로서 훌륭하게 제 몫을 해 줄 것임은 물론, 앞으로 과학적인 검증을 통해 나오게 되리라 기대되는 진짜 ‘표준 자판’과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글자판일 것임을, 이제까지의 연구와 적용에서 확신을 갖는다. 부디 관련 정부 담당자와 전문 학자들의 관심과 노력을 간절히 바란다.
<사족> “사람은 반드시 자기가 자신을 멸시한 뒤에야 남이 자기를 멸시하게 된다.”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외면하고 우리 스스로 문자 기계화에 멍에를 씌우는 일은 이제 그만해야 할 것이며, 이에 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은 학교 교육에 있다고 본다. 글쓴이가 생각하기로는, 국어 국문과 교수님들이 학생들에게 손으로 써 온 과제물은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학교 교육에서 원고지 대신 타자기가 자리를 대신하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 전에는,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글자 생활의 기계화가 근본적으로 제자리를 잡기는 어려울 것이 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