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소설에 나타난 남의 나라 말과 말법
--이인직에서 김동인까지
이오덕/글쓰기 교육 운동가
이 글은 왜 쓰는가?
이 글은 우리 소설이 어떤 문장으로 씌어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우리 소설은 우리 이야기를 우리말로 써야 한다. 과연 그렇게 씌어 있는가? 소설이라고 하는 이 서구 문학의 틀은 개화기 이후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것이다. 일본을 거쳐 들어왔다는 것은 일본 글을 통해서 우리가 그것을 알고 배우고 본받았다는 것이다. 또 일본 글을 통해서 알게 되고 쓰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쓰는 소설 문장에 일본 말과 일본 말법이 많이 들어 있을 것이란 짐작을 쉽게 할 수 있다. 이 글은 우리 소설 문장에 나타난 일본 말 글의 실상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 말 글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쓰고 있던 한자 말, 그리고 분단 이후 갑자기 마구 밀어닥친 영어 등, 이 모든 불순한 바깥 말들이 어떻게 일본 말 글과 함께 우리 소설 문장에 쓰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가를 실제 작품을 통하여 밝히려고 한다. 물론 여기서 지적하게 될 불순한 남의 말들은 제한된 지면에서 들어 보이는 보기 글 가운데 나타나는 말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 소설 문장이 전반으로 어떻게 씌어 있는가, 그리고 우리말이 잘못된 글로서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가를 짐작하기에 모자라지 않으리라고 본다.
소설은 어떤 글인가?
본래 우리말로 하면 소설은 이야기다. 농사꾼이고 장사꾼이고 고기잡이꾼이고 누구든지 듣고 즐길 수 있는 이야기이며 자리에 따라서 어린아이들도 즐길 수 있는 이야기다. 소설이 아무리 옛날의 이야기와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의 전통을 잃어버린다면 과연 그것을 두고 ‘우리것’이라 말할 수 있을지 나는 의심한다.
소설의 독자가 어떤 사람들이고 그 수가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자. 소설책이 많이 팔려 봤자 1~2만 부이고, 아주 썩 드물게 10만 부쯤 팔리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 인구에서 보면 그 독자는 지극히 적은 수다. 인쇄물치고는 신문이 가장 많은 부수로 찍혀 나오지만, 가령 100만 부가 팔리는 신문에 연재되는 소설을 읽는 이가 20만이 될는지 의문스럽다. 이른바 대중들의 입맛에 맞추어 쓴다고 하는 신문 소설조차 그 신문에 날마다 실리는 기사보다 덜 읽히는 것이 분명하다. 한 해에 한 차례씩 상금을 걸어 떠들썩하게 발표하는 신춘문예 당선 소설조차 얼마나 읽는지,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에게 물어도 읽지 않는다는 사람이 읽었다는 사람보다 언제나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늘날 소설의 독자는, 사람들이 장기나 바둑을 즐기듯이 ‘문학에 별난 취미를 가진 사람’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대체로 보아서 농민이나 노동자들은 소설의 독자가 아니다. 전체 인구의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일하는 사람’들이 소설의 독자가 될 수 없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오늘날의 소설이 ‘이야기’가 될 수 없고 ‘이야기’의 전통을 이어오지 못했다는 것이 아주 뚜렷하다.
그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귀로 듣기만 하면 되던 이야기가 눈으로 읽어야 하는(그래서 더구나 돈을 주고 책을 사야 하는) 문학으로 바꿔졌기 때문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봐야 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귀로 듣는 사람보다 눈으로 읽는 사람이 아무래도 숫자로 얼마쯤은 줄어야 하겠지. 그런데 오늘날은 의무 교육으로 모든 사람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사는 문제를 생각하면, 옛날에는 돈이 없어도 살았지만 요즘은 배추 한 포기도 양말 한 켤레도 모든 사람이 사서 먹고 사서 입고 신고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 있는데, 책도 그것을 꼭 읽어야 한다면 배추나 양말과 다름없는 생활 필수품으로 사게도 될 것이다.
내가 보기로 소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안 읽히는 아주 뚜렷한 까닭이 있다. 그것은 그 소설을 읽어 주어야 할 대다수 국민들의 삶이 없고, 삶의 말로 씌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곧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을 평가하는 관점
지금까지 우리 문학에서 소설을 논의한 분들이 적지 않아 문학사에 길이 남을 평론도 많은 줄 안다. 이런 평론들은 무슨 주의나 문학의 흐름, 또는 자기 나름의 문학관을 따라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생각을 비판하기도 하고, 구성과 줄거리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살피기도 하고, 작품의 배경이나 인물의 성격을 논하기도 해서 모든 면에서 작품을 평가하여 왔다. 그래서 무엇을 썼는가, 어떤 삶을 어떻게 그려 보였는가 하는 문제를 거의 남김 없이 논의해 왔다고 본다. 그런데 다만 한 가지, 어떤 말로 글을 썼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논의한 적이 없고, 문제를 내어 본 사람조차 없다. 소설이 우리말로 써야 하는 이야기인데, 그 말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 우리말로 씌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지난 80년의 문학사에서 단 한번도 논의해 보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문학 비평이란 것도 모두 외국에서 하고 있는 비평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일본이고 미국이고 영국이고 또 어느 나라고 문학 작품을 비판하는 데 작품에 씌어진 말이 제 나라 말인가 남의 나라 말인가를 논란한 글은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가령 지난날 그 누가 말에 대해 어떤 문제를 내놓았다고 하더라도, ‘소설의 말이 어쨌단 말인가? 우리는 분명히 우리말, 우리글로 쓰고 있다. 옛날에 쓰던 한문 글에 견주면 소설의 문장은 얼마나 발전했는가?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말을 우리 한글로 쓰는데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는가 ’모두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찌 생각하니 글을 쓰는 사람들이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세종 임금 때 한글을 만든 뒤로 몇 백 년이 지나도록 이씨 왕조에서 훌륭한 학자들이 얼마나 많이 나왔던가? 그러나 그 많은 학자들 가운데 우리글이 귀하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글로 쓴 사람이 그 누가 있었던가?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일본이 우리나라에 쳐들어 와서 36년이 지나고, 미군이 들어와서 45년이 되었다. 그래 겨우 80년이 지났는데 일본 글 속에 완전히 빠져서 책을 읽고 지식을 얻고 생각을 따라서 하여 온 지식인과 글을 쓰는 문인들이 어찌 그렇게 스스로 빠져 있는 상태를 깨닫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사태가 매우 급하다. 이씨 왕조 시대와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글을 모르고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 - 곧 민중들이 우리말을 지켜 왔지만, 이제는 글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모조리 잘못된 글을 배워 우리말이 말을 지키고 이어가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 소설이 우리말을 할 수 없는 일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문학은 소설이고 시고 처음부터 일본 말을 글을 그대로 옮겨 놓은 꼴로 쓰게 되었던 것이다.
이인직·이해조의 신소설
우리 소설에 나오는 한자 말이라면 춘향전이나 심청전이나 흥부전 같은 옛날 이야기책에서 문제될 것이지 신소설 이후에는 별로 문제삼을 것이 없다고 할 사람이 많겠는데, 사실은 신소설 이후가 더 문제다. 그 까닭은 옛날 이야기 책에 나오는 한자 말이나 한문투의 말은 워낙 오랜 세월 동안에 써 와서 민중들까지 귀에 많이 익은 말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른바 ‘문자 쓰는 말’ 같은 것도 더러 우리 겨레의 몸에 배인 것이 되었거나 그렇지 않은 것은 쉽게 그것을 버릴 수 있는 말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소설 이후에 일본서 들어온 한자 말 글은 아주 간단한 것이라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도록 되어 있어 우리말과는 바탕부터 다르다. 가령 보기를 들자면 ‘만화방초호시절’이라면 시골의 농사꾼이라도 대강 알아듣지만 ‘혈의 누’라든지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면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라 할밖에 없다.
우선 소설의 제목부터 생각해 보자. ‘血의 淚’ ‘鬼의 聲’(이상 이인직 소설) ‘燕의 脚’ ‘花의 血’(이상 이해조 소설)--이런 소설의 제목은 우리말이 아니다. 말이란 입으로 소리 내는 것을 귀로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혈의 누’ ‘귀의 성’ ‘연의 각’ ‘화의 혈’ 이게 무슨 말인가? 다 같은 한자 말이라도 옛날 이야기 제목은 누구든지 들어서 알 수 있는 말로 되어 있다. ‘춘향전’ ‘심청전’ ‘구운몽’ ‘홍길동전’ ‘흥부전’ ‘사씨남정기’ ‘임진록’·······들과 같다. ‘血의 淚’는 우리말로 쓰자면 당연히 ‘피눈물’이 되겠고, ‘鬼의 聲’은 ‘귀신 소리’가 되고, ‘燕의 脚’ ‘花의 血’은 각각 ‘제비 다리’ ‘꽃이 흘리는 피’로 써야 한다. 이렇게 우리말로 쓰지 않고 한자를 한 자씩 쓰고 그 음으로 읽도록 해 놓고는 그 한자를 잇는 토 ‘의’를 쓴 것이 바로 일본 글을 그대로 따라 흉내내었기 때문이다. 이익직이 일본에 유학을 갔을 때 , 그리고 신소설을 치음 발표했을 때 일본에서 나왔던 소설의 이름을 몇 가지만 봐도 이런 사정을 알 수 있다. ‘思出の記’(1900년·德富蘆化), ‘火の柱’(1904·木上尙江), ‘野菊の花’(1906·伊騰在千夫). 그 무렵 나오던 잡지에는 ‘都の花’ ‘心の花’ 같은 것도 있었다. 이런 소설 제목이나 잡지 이름에 나와는 한문 글자를 일본인들은 모두 그들 말로 새겨 읽는다. 일본 말로 읽는다기보다 일본 말을 편의상 한자 적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문인들은 우리말로 읽을 수 없는 한자를 써 놓고, 더구나 우리 말법에 나오지 않는 ‘의’를 한자와 범벅으로 써 놓았으니 이게 무슨 꼴인가?
이런 일본식 한자 말(사실은 이걸 ‘일본식’이라고도 할 수 없고, 무슨 이름을 붙일 말이 생각나지 않아 이렇게 쓴다. ‘한자 말’도 그렇다. 이건 ‘말’이 아닌 것이다.)은 소설보다 논문이나 신문 기사들에 더 많이 나타나 있는 것이지만, 소설도 오염이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고, 소설 문장의 오염은 다른 어떤 글의 오염보다 더 우리말에 해독을 끼쳐 왔다고 본다. 소설의 제목부터 이런 꼴이 되어 있는 것은 이인직과 이해조 이후에도아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다. ‘疑心의 少女’(김명순·1916), ‘少年의 悲哀’(이광수·1917), ’愛慾의 彼岸’(이광수·1936), ‘無能者의 안해’(김동인·1930), ‘深夜의 太陽’(김기진·1934), ‘B女의 素描’(이무영·1934), ‘流鶯記’(계용묵·1937), ‘明日의 鋪道’(이무영·1937), ‘大地의 아들’(이기영·1937), ‘大地의 虐待(오유권·1934)…… 이 밖에도 많이 있을 것일데, 한글로 써서는 그 뜻을 알아보기 어려운 말이거나, 쉬운 말이 있는 데도 일부러 한자 말을 써 놓고 ‘의’를 붙여 놓은 이런 말은 모두 일본 글르 따라 쓴 것이라 본다.
이제 소설의 문장을 좀 살펴보기로 한다.
- ‘겨울 추위 저녁 기운에 푸른 하늘이 새로이 취색하듯이 더욱 푸르렀는데, 해가 뚝 떨어지며 북서풍이 슬슬 불더니 먼 산 뒤에서 검은 구름 한 장이 올라온다. 구름 뒤에 구름이 일어나고, 구름 옆에 구름이 일어나고, 구름 밑에서 구름이 치받쳐 올라오더니, 삽시간에 그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서 푸른 하늘은 볼 수 없고 시커먼 구름 천지라. 해끗해끗한 눈발이 공중으로 회회 돌아 내려오는데, 떨어지는 배꽃 같고 날아오는 버들가지같이 힘없이 떨어지며 간 곳 없이 스러진다. 잘던 눈발이 굵어지고, 드물던 눈발이 아주 떨어지기 시작하며 공중에 가득 차게 내려오는 것이 눈뿐이요 땅에 쌓이는 것이 하얀 눈뿐이라. 쉴 새 없이 내리는데, 굵은 체 구성으로 하얀 떡가루 쳐서 내려오듯 솔솔 내리더니 하늘 밑에 땅;덩어리는 하얀 흰무리 떡덩어리같이 되었더라.’
이 글은 ‘銀世界’ 첫머리다. 여기 그려 놓은 구름은 아무래도 여름 구름인 것을, 겨울 구름이라고 잘못 생각해서 써 놓았지만, 구름의 모양이나 눈이 내려오는 모양을 아주 자세하게 그려 놓아 오늘날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정경 묘사와 크게 다름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같은 작가가 썼고 ‘銀世界’보다 5년 뒤에 나왔다는 ‘牡丹峰’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 열요(熱¿)하기로 유명한 샹푸란시쓰고(桑港)의 야소 교당 쇠북소리는 세간진루(世間塵累)가 조금도 없이 맑고 한가하고 고요하고 그윽한데, 여음(餘音)이 바람을 따라 흩어져 나가다가 수천 미돌(數千米突) 밖의 나지막한 산을 은은(隱隱)히 울리며 스러지고, 산 아래 공원(公園) 속에 가목무림(佳木茂林) 푸른 빛만 보인다.
- 천기청명(天氣淸明)한 일요일에 공원에 산보(散步)하러 모여드는 신사(紳士)와 부인은 한가한 겨를을 타서 한가히 놀러 온 사람들이라. 그 사람 모인 공원은 다시 열요장되어 복잡한 사회현상(社會現象)이 또한 이 가운데에 보이는데, 유심한 사진가(寫眞家)가 전 사람의 자취 비밀히 감추인 것(前人踪跡秘密藏)을 후인에게 전하려고 사진 기계를 가지고 다니면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취미 있는 진상(眞狀)을 가려서 박고 박는데, 열요한 사람들은 간단(間斷)없이 활동(活動)이라.’
여기 나오는 어려운 한자 말들을 신소설의 작가들은 마땅히 청산해야 되었는데 그것을 못했다. 마땅히 청산해야 되었다는 말은 덮어 놓고 말하는 욕심이 아니다. 이 ‘銀世界’보다 12년이나 앞서 나온 ‘독립신문’에 씌어 있는 글이, 신소설의 문장보다 훨씬 더 맑고 깨끗한 우리말로 씌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논설문이 그렇다. 그리고 ‘열요’니 ‘세간진루’니 ‘가목무림’ 따위 한자 말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천기(天氣)’니 ‘산보(散步)’니 하는 일본식 한자 말을 이때부터 소설가들이 끌어들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말을 그 누구보다 지키고 가꿔야 할 소설가들이 이래서 우리말을 짓밟고 학대하는 일에 앞장섰던 것이다.
소설의 제목에서 매김자리로 (관형격 조사) ‘의’를 일본 말 ‘の’를 따라 함부로 쓰고 있다고 했지만, 두 작가의 신소설 문장에서는 ‘의’를 그렇게 마구잡이로 썼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옛 이야기와는 달리 ‘의’가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고,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일본 글의 영향이다. 몇 군데 보기를 든다.
- ‘사람이 생목숨을 버리는 것은 사람의 제일 서러워하는 일인데……’‘血의 淚’
- ‘북문 안의 김광일의 집에는 (위 작품)
- ‘대동강 물에 빠져죽으려고 나가던 날의 세상 영결하는 말이라.’(위 작품)
- ‘난장이 같은 그림자가 옥련의 뒤를 따라간다.’(‘牡丹峰’)
- ‘김광일의 말은 옥련이가 떠나기 전에 성례하는 것이 가하다 하나, 구완서의 말은……’(위 작품)
- ‘최본평의 내외가 억척으로 벌어서……’(‘銀世界’)
- ‘강원감사로 내려오던 날부터 강원 일도 백성의 재물을 긁어 들이느라고 눈이 벌개서 날뛰는 판에 영문 장사들이 각 읍의 밥술이나 먹는 백성을 잡으러 다니느라고……’(위 작품)
- ‘맹모의 삼천하시던 교육이 없이’(‘目由鍾’)
- ‘민족의 부패함도 학문 없는 연고요’(위 작품)
- ‘본래 가정의 학문이 상없지 않고’(‘鬢上雪’)
우리말에서 극히 드물게 밖에 쓰지 않는 이 ‘의’는 신소설 이후 점점 많이 쓰게 되어 우리말이 일본 말 같은 짜임으로 되어 버린다.
문장의 끝맺음꼴을 보면 ‘이라’ ‘이더라’ ‘이러라’ ‘-더라’ ‘-았더라’ ‘-는지라’와 같은 ‘-라’꼴이 가장 많고, ‘-는가’ ‘-런가’ ‘-던가’ ‘아닌가’가 적지 않게 나오는데, 옛 이야기에는 극히 드물던 ‘-다’꼴이 ‘-라’ 다음에 많이 나온다. 이‘-다’는 움직씨의 나아감때(동사의 진행형)로 많이 쓰고, 가끔 그림씨(형용사)로도 나타나고 있다. ‘-다’를 이렇게 신소설에서 많이 쓰게 된 것도 일본 말 글의 영향이라고 본다. 그러나 신소설 문장의 끝맺음은, 그 뒤에 나온 우리 소설가들이 아주 ‘-다’ 한 가지로만 써서 재미없는 글체를 만들어 놓은 데 견주면 옛 이야기 말씨를 괘 많이 이어받아 여러 가지 재미있는 느낌을 주는 글이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광수 ‘무정’의 ‘언문일치’문장
1917년에 나온 이광수의 ‘無情’은 우리 신문학 역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장편 소설이고 또한 ‘언문일치’ 문장을 처음으로 완성한 작품으로 기념비가 될 만하다고 모두가 말하고 있다. 과연 이 작품에서 우리말이 어떻게 씌어 있는가 살펴보자.
먼저, 한자 말을 어느 정도로 걸러 내었는가, 하는 문제인데, 옛 소설이나 신소설같이 한문투를 섞거나 한자 말을 함부로 쓰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가끔 우리말로 써도 될 한자 말이 나온다.
- ‘김장로의 딸 선형이가 명년에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하여 영어를 준비할 차로 이형식을 매일 한 시간씩 가정 교사로 고빙하여 ········’
‘매일’이란 말은 입으로도 쓰고 있기는 하지만 ‘날마다’로 쓰는 것이 더 좋다. 그러나 이런 말까지 욕심낼 수는 없지만 ‘고빙하여’는 아무래도 답답하다. 유식한 양반들이 쓰는 말을 그대로 소설에 써서야 제대로 된 우리말 문장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보기 글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준비할 차로’다. 이 ‘차로’도 그 당시에는 선비들 입에서 흔히 나는 말이었을 것이다. ‘血의 淚’에도 ‘빠져죽을 차로’가 나오고, ‘銀世界’에도 ‘안심시키려던 차에’가 나온다. 아무리 입으로 쓴다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 쉽고 깨끗한 일상의 말이 있으면 당연히 쉬운 우리말을 써야 한다. ‘준비하려고’ ‘준비하러’ ‘준비하라고’ 이렇게 얼마든지 쓸 수 있지 않는가.
이 ‘차로’는 ‘여행차’ ‘출장차’ 같은 말로 아직도 글 쓰는 모든 사람들이 그대로 쓰고 있다. 입으로 하는 말에는 ‘여행하러’ ‘출장하러’로 쓰는데 글쟁이들은 ‘차’로 쓰고 있는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말을 쓰지 못하고 글에 갇혀 있는 사정이 이런 데서도 나타난다.
- ‘형식은 지위와 재산의 압박을 받는 듯해 일변 무섭기도 하고 ····’
여기는 ‘일변’이 문제가 된다. 요즘 글 쓰는 사람들이 왜 ‘한편’이라 안 쓰고 ‘일변’이라고 쓰는가 참 이상하게 여겼더니 신문학 초창기의 소설을 읽고 비로소 그 의문이 풀렸다. 작가들이 입말을 쓰지 않고 책 속의 글말을 그대로 다시 글로 옮기고 있다는 것은 여기서도 알게 된다. (이 ‘일변’도 ‘銀世界’부터 나온다.)
- ‘선형의 눈썹과 입 언저리는 그 모친과 추호 불차하니, 이 눈썹과 입만 가지고도 족히 미인 노릇을 할 수 가 있으리라.’
‘추호 불차하니’는 고대 소설에나 나올 말이다. ‘족히’도 일상에서 쓰는 말이 아니다.
- ‘이는 청년 남녀가 가까이 접할 때에 마치 음전과 양전이 가까워지기가 무섭게 서로 감응하여 불꽃을 랄리는 것과 같이 면치 못할 일이며, ’
요즘 젊은이들은 말을 할 때도 ‘그 소식에 접하고 ’‘그 사람을 접했을때’ ‘그 책을 접하면’ 이렇게 말한다. 왜 우리말이 이렇게 더럽게 통일되는가 한탄했더니 그 근원이 바로 이광수 때부터 써 온 소설가들의 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언문일치’ 문장의 모범이 된다는 소설이 이런 꼴로 유식병에 고질이 된 상태에서 씌어 있으며, 한국의 소설은 이렇게 하여 우리말을 더럽히는 일에 앞장서 왔다.
이대로 쓰다가는 끝이 없기에 한자 말 문제는 그만두기로 한다. 지금까지 ‘춘원문고’(우신사)로 나온 ‘무정’(상)에서 12쪽까지 읽고 보기를 든 것이다.
다음은 매김자리토 ‘의’를 어떻게 쓰고 있는가 살펴본다.
- ‘북편 벽의 한 길이나 되는 책상에서 신구서적이 쌓였다.’
여기 나오는 ‘벽의’는 ‘벽에’로 써야 우리말이다. ‘의’를 이렇게 쓰는 것은 일본 글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 ‘부인과 여학생도 읍하고, 장로의 가리키는 교의에 걸터앉는다.’
- ‘형식은 영채의 지나온 이야기를 들으려 하여 묻기를 시작한다.’
- ‘노파는 숨소리도 없이 영채의 기운없이 말하는 입술만 보고 앉아서 ······’
- ‘그리고 형석은 어서 영채의 그 후에 지낸 내력을 듣고 싶었다. 영채의 하는 말은 꼭 자기의 생각한 바와 같으려니 하였다.’
위에 든 여러 대문에서 나온 ‘-의’는 모두 ‘-가’로 써야 우리말이 된다.
- ‘그네의 조상이 일찍 거지로 다른 부자의 대문에서 그 집 개로 더불어 식은 밥을 다룬 적이 있었고, 또 얼마 못하여 그네의 자손도 장차 그리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우리가 하는 입말로 쓴다면 ‘그네의’에서 ‘의’를 없애고 ‘그네’로만 써야 할 것이고, ‘부자의 대문’은 ‘부잣집 대문’으로 써야 할 것이다. ‘언문일치’를 목표로 썼다는 글이 이 모양으로 된 것은 ‘언’이란 것이 백성의 말, 민중의 말이란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지식인들이 책- 곧 일본 책만 읽고 그 책에서 배운 글을 그대로 자기의 말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에 문장의 끝맺음을 어떤 꼴로 썼는가 보기로 한다.
이인직과 이해조가 쓴 신소설에서는 ‘-라’가 가장 많고, ‘-다’는 주로 움직씨의 나아감꼴(동사 진행형)이 되어 ‘-라’ 다음으로 많이 나오는데, 이광수의 ‘무정’에서는 ‘-라’가 첫머리에 몇 번 나오더니 그 뒤로는 거의 안 나온다. 그래서 대부분의 맺음이 ‘-다’로 되어 버렸다. 물론 오늘날의 소설에 견주면 ‘-는고’ ‘-는지도’ ‘-리오’ ‘-는가’들이 여기저기 나오고, 같은 ‘-다’라도 ‘-렷다’까지 섞여 적잖이 다르지만, 오늘날의 소설 글체‘-다’가 이광수의 ‘무정’에서 아주 굳어졌다고 할밖에 없다. 풀이씨의 지난때 마침꼴(술어의 과거 종결 어미) ‘웃었다’ ‘생겼다’ ‘하였다’도 이광수 소설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는 소설의 글체가 이광수에 와서 이렇게 ‘-다’로 자리 잡게 된 여러 가지 까닭에 대해서 이 이상 더 자세히 살필 수가 없다. 다만 지난때(과거형) ‘었다’를 처음으로 쓴 이광수가 여기서 아주 증대한 잘못을 저지른 점을 한 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지난적 끝남때라는 ‘있었다’를 아무런 원칙도 없이 여기저기 함부로 써 놓은 것이다.
- ‘박진사의 집에 남은 것은 두 며느리와 영채와 형식뿐, 영채의 모친은 영채를 낳고 두 달이 못 되어 별세하였었다.
- 그 후에 박진사의 사랑에 있던 학생도 몇 사람 붙들리고 형식도 증거인으로 불려 갔었다 이틀 만에 놓였다.’
이 ‘있었다’ 꼴은 ‘무정’ 전편에 걸쳐 가끔 불쑥 나타나고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신소설 작가들의 작품에는 단 한 군데도 나오지 않았다. 신소설에는 ‘-었다’조차 안 나온다.
내가 믿기로 이‘있었다’는 일본 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영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영어를 배우는 가운데 우리말로 옮기면서 동사의 과거완료란 때매김(시제)을 이렇게 쓸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우리 말법을 영문법에 맞추어 적어 놓은 학자들의 책을 배운 결과가 이렇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니까 유길준의 ‘大韓文典’(1909)이나 주시경의 ‘國語文法’(1910)과 ‘朝鮮語文法’(1911)이 나오기 전에는 어떤 소설이고 소설 아닌 글에도 결코 이 ‘있었다’가 나오지는 않았던 것이다.
‘무정’이 나온 뒤로 70년도 더 지난 오늘날에도 거의 모든 소설가들이 ‘-있었다’를 아무 원칙도 없이 쓰면서 그 정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래서 70년도 넘게 끊임없이 글을 써서 우리말을 오염시킨 결과 20대나 30대의 젊은이들이 보통으로 하는 입말에도 예사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말은 글 속에서 자라나지 않고 글로서 살아가지 않은 사람들 곧 말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쓰지 않고 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특성을 파괴하는 이 말은 아무리 글을 쓰는 사람들이 예사로 쓰고 있다고 해도 결코 우리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무정’ 이후에 나온 이광수의 소설을 한두 군데만 들어 지금까지 언급한 말의 문제를 좀 더 보충해 본다.
- ‘최석(崔晢)으로부터 최후의 편지가 온 지가 벌써 일년이 지났다.’
‘무정’이 나온 뒤 다서 16년이 지난 1933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 ‘有情’의 첫머리다. 여기 나오는 ‘-으로부터’는 아직도 입말이 되어 있지는 않다. 당연히 ‘-한테서’라고 써야 할 것이다.
역시 같은 책을 한 장만 넘기면 다음과 같은 대문이 나온다.
- ‘작년 이맘때, 초추의 바람이 아침 저녁이면 쌀쌀할 때에 나는 최석의 편지를 받았고 그 후 한달쯤 뒤에 최석을 따라서 떠났던 남정임에게로부터 또 한 편지를 받았다.
우선 ‘초추’란 말인데, 나는 지난달 어느 책에서 ‘초추란 말은 아름답다. 초가을이라 해도 될 것을 초추라고 하니 괜한 낭만이 생긴다’고 쓴 어떤 분의 수필을 읽고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는가, 하고 깜짝 놀란 사실을 글로 쓴 일이 있는데, 이광수 소설에서 이 ‘초추’를 발견하고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가들이 쓰는 말이 이렇게 우리 온 국민들의 머리에 가슴에 스며들어가 있다는 것을 영광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참으로 두렵게 여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에게로부터’가 나오는데, 이것도 ‘-한테서’라고 쓰면 될 것을 왜 이런 말을 썼는지 알 수 없다. 이래서 오늘날 글 쓰는 사람들은 입으로는 하는 말 ‘-한테서’를 안 쓰고 ‘-으로부터’ ‘-에게로부터’와 같은 어설픈 글말을 쓰면서 유식함을 자랑한다.
다시 몇 줄 다음에 다음과 같은 대문이 나온다.
- ‘나는 이 사람의 편지를 다만 정리하는 의미에 다소의 철자법적 수정을 가하면서 될 수 있는 대로 본문을 상하지 아니하도록 옮겨 쓰려고 한다’
여기 나오는 ‘……의미에 다소의 철자법적 수정을 가하면서’는 아무리 좋게 봐도 이것을 소설의 문장이라 할 수 없다. ‘……뜻으로 얼마쯤 철자법을 고치면서’로 써야 할 것이다. 무슨 ‘-적’하는 일본식 한자 말이 소설에까지 나오게 되었다.
- ‘입감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나는 병감으로 보냄이 되었다.’
이것은 ‘文章’ 창간호(1939년)에 실린 중편 ‘無明’의 첫머리다. 이 소설의 제목도 문제지만, ‘보냄이 되었다’가 뭔가? 이것이 우리글에서 ‘언문일치’를 완성했다는 소설가의 문장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언문일치’의 글이라 믿어서 읽어 왔고, 그래서 쓰고 있는 그 글에 대해 철저하게 따져 보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 어떤 죄를 저지를는지 모르는 까닭이 이러하다.
김동인이 개혁했다는 ‘구어체’와 ‘서사문체’
김동인은 이광수보다 8년 뒤에 난 사람으로 이광수 뒤를 따라 나온 소설가다. 김동인은 ‘나의 소설’이란 제목으로 쓴 글에서 이광수가 쓰기 시작한 ‘구어체’를 자기가 다시 한걸음 더 앞으로 나가도록 개혁해서 완성했다면서, 처음으로 우리말 ‘문체’를 만들어 썼을 때의 힘듦과 어려움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김 씨가 말한 것을 몇 가지로 나누어, 과연 그가 혁신하거나 완성했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는 이광수가 썼던 ‘더라’를 안 쓰고 ‘-다’로만 썼다는 것이다.
- “물론 그 ‘깨닫더라’의 ‘더라’도 구어(口語)에도 사용되는 것이지만, 우리의 양심은 ‘깨닫겠다’라 하여 철저히 하여 놓지 않으면 용인치 못하였다. 당시의 춘원의 작품은 구어체(口語體)라 하여도 아직 많은 문어체(文語體)의 흔적이 있었다. ‘이더라’ ‘이라’ ‘하는데’ ‘말삼’ 등을 그의 작품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불철저한 것은 모두 배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동인의 첫 작품인 ‘약한자의 슬픔’은 1919년에 발표하였지만, 이광수의 ‘무정’은 그보다 두 해 앞선 1917년에 나왔다. 내가 보기에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가 쓰는 소설의 글체 ‘-다’형은 이광수의 ‘무정’에서 아주 정해졌다. 다만 ‘무정’의 첫머리에 ‘리라’ ‘할는지’ ‘하렷다’가 한 번씩 나올 뿐이고, 그 뒤로는 아주 ‘다’뿐이라고 해야 옳다. 이 장편 소설 ‘무정’과 같은 해에 발표한 이광수의 단편 ‘소년의 비애’에는 ‘-라’ ‘건마는’이 몇 군데 나오고, 같은 ‘다’라도 현재 진행형인 ‘한다’가 많이 나온다. 또 어색한 한자 말투성이에다가 일본 번역투 ‘의’도 마구 나오는데, 김동인 씨 ‘무정’을 안 읽고 ‘소년의 비애’만 읽었을 리가 없고, ‘무정’을 읽어도 앞머리만 읽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가령 이광수 소설에 ‘다’ 아닌 여러 가지 맺음꼴이 더러 섞여서 나타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우리말을 더 잘 나타낸 것이라 보아야 할텐데, 그 여러 가지로 재미있게 쓰이는 맺음꼴을 모조리 다 없애고 ‘다’로만 아주 통일해 버린 것을 ‘동인만의 문체’ ‘구어체 문장의 완성’이라 자랑스럽게 여긴 것은 큰 잘못이라고 본다. ‘다’만 쓰면 구어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큰 잘못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자기로 모르게 일본 글을 따른 때문이라고 본다.
‘깨닫겠더라’를 ‘깨닫겠다’라 하여 “철저히 해 놓지 않으면 용인치 못하였다”고 했는데, ‘깨닫겠더라’와‘깨닫겠다’는 그 뜻이나 말의 느낌이 많이 다르다. ‘깨닫겠더라’하면 지난 일을 돌이켜 보는 뜻이 나타나고, 또 감탄하는 느낌도 나타난 말이다. 그래서 ‘깨닫겠다’고 잘라 말하는 것과는 달리 써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한다’‘이다’와 같은 ‘현재법 敍事體’를 안 쓰고 풀이말의 맺음꼴(종결 어미)을 모두 과거형으로 써서 구어체가 완성되도록 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한 까닭은, 현재형을 써서는 “근대인의 날카로운 심리와 정서를 표현할 수 없”고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명료치 못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나 이것은 도무지 그 근거가 있을 수 없는 말이다. 어떤 일이나 행동이 분명히 끝나거나, 몇 가지 일이나 행동이 차례로 일어나고 이뤄지는 것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할 때는 마땅히 과거형으로 써야 하고, 그렇게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가 눈앞에 펼쳐진 어떤 상황을 그려 보일 때는 현재형으로 쓰는 것이 좋고, 또 저절로 그렇게 쓰게도 된다. 이것은 우리가 지껄이는 이야기 말을 생각해 봐도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김동인 씨는 어째서 현재형을 모두 배척하고 과거형으로만 썼는가? 그리고 그것을 ‘구어체의 완성’이라고까지 착각하였는가?
김동인 씨는 과거형으로 맺는 문체를 자리 잡기 위해 얼마나 애썼던가를 말하면서, 현재형으로 쓴 글과 과거형으로 쓴 글을 함께 나란히 써 놓고 그것을 “心讀, 音讀을 몇 번이나 하였던가? 껍질을 깨뜨린다 하는 일은 과연 어려운 일이었다”고 돌이켜 보고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 쓰는 글이 제대로 살아 있는 말이 되어 있는가 없는가를 알아보려면 그렇게 글을 써 놓고 수없이 읽고 생각하고 그래서 자기 기분을 확인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런 글을 써서 시골 사람들에게 읽어 들려 주고는 그 반응을 알아보든지, 시골 사들이 이야기하는 말이 어떤가를 살펴서 그 말을 따라 쓰는 연구를 애써 하는 것이 옳았다고 본다. 책만 읽고 글만 쓰는 사람이 그렇게 해서 혼자 그 줄만 자꾸 읽고서 스스로 만족하는 글체가 과연 민중이 읽어야 할 이야기 글의 글체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동인 씨는 소설 문장을 과거체로 완성한 그 어려움을 말했지만 그것은 이미 이광수가 다 닦아 놓은 길이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아직도 ‘シタ’와 ‘スル’가 철저히 區劃되지 않았는데, 필자의 처녁작은 ‘약한자의 슬픔’이다”고 말했지만, 이것은 전혀 모르고 한 말이다. 일본의 메이지 시대에 나온 소설부터 어느 것을 읽어 보아도 ‘シタ’란 과거형과 ‘スル’란 현재형을 구별하지 않고 쓴 글은 없다. “區劃하지 않고 썼다”란 말은 무슨 뜻인가? 한 작품 안에 현재형이나 과거형 중 그 어느 것 한 가지로 통일해서 써야 한다는 말이라면 서사문을 전혀 모르고 한 말이라고 할밖에 없다. 그러기에 모든 글월을 과거형으로만 쓰려고 했지.
김 씨는 자기가 발명했다는 그 문체로 쓴 작품으로 ‘감자’를 들었는데, 어떤 소설이고 과거형으로 썼을 때 그 글이 단조롭고 이야기의 진행이 한결같아 재미가 덜할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매우 불편할 것이 뻔하다. 그리고 사실은 그렇게 쓸 수도 없다. 실지로 그 ‘감자’란 작품조차 마주 이야기가 나오는 어느 대문에서는 ‘그의 팔에 늘어진다’고 현재형을 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밖에 다른 작품에서도 현재형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과거형을 고집하는 김 씨가 ‘과거 완료형’이란 것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이광수의 작품과 다름없이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오고 있다.
세 번째는 ‘그’라는 대명사를 자기가 처음으로 의식해서 썼다고 말한 문제다.
- “春圓의 作에 ‘그’라고 한 곳이 두세 군데 있기는 하지만 보편적으로 사용치 못하였다. 春圓은 지금의 ‘그’라고 쓸 곳을 대개 이름(고유 명사)으로 하여 버렸다. He 와 She를 모두 ‘그’라고 보편적으로 사용하여 버린 때의 용기는 지금 생각하여도 장쾌하였다.”
이광수가 ‘그’를 안 쓰고 사람의 이름을 쓴 것은 잘한 일이었다. 우리의 이야기 말에는 3인칭 대명사가 안 나온다. ‘그아이’ ‘그 사람’ ‘그놈’ ‘그호랭이’와 같이 매김씨(관형사)로 쓰기는 했다. 그런데 사람 이름을 안 쓰고 ‘그’란 대명사를 쓴 것을 아주 큰 공으로 생각한 모양인데, 이것 역시 일본 소설의 문장을 따라 간 것이 라 생각된다. 김동인 씨는 ‘그’만 썼지만, 그의 뒤를 따른 소설가들은 서양 말같이 남녀를 구별해서 ‘그’ ‘그녀’를 써서 우리 소설의 문장이 점점 더 말에서 멀어져 갔던 것이다.
여기서 ‘그’를 어떻게 썼는지 ‘감자’의 한 대문을 보기로 하자.
- ‘그는 열 다섯 살 나는 해에 동네 홀아비에게 80원에 팔려서 시집라는 것을 갔다. 그의 새서방(영감이라는 편이 적당할까)이라는 사람은 그보다 20년이나 위로서, 원래 아버지의 시대에는 상당한 농민으로 발도 몇 마지기가 있었으나 그의 대로 내려오면서 하나 둘 줄기 시작하여서 마지막에 복녀를 판 80원이 그의 마지막 재산이었다. 그는 극도로 게으른 사람이었다. 동네 노인의 주선으로 소작밭개나 얻어주면 종자만 뿌려둔 뒤에는 후치질도 안 하고 김도 안 매고 그냥 버려두었다가는 가을에 가서는 되는 대로 거둬서 ‘금년엔 흉년입네’하고 전주집에는 가져도 안 가고 혼자 먹어 버리곤 하였다. 그러니까 그는 한 밭을 이태를 연하여 붙여 본 일이 없었다. 이리하여 몇 해를 지내는 동안 그는 동네에서는 밭을 못 얻으리만큼 인심과 신용을 잃고 말았다.’
여기 든 글 가운데 ‘그’가 8번 나오는데, 이렇게 한 대문에 나오는 ‘그’가 같은 사람이어야 하는 데도 다른 사람으로 되어 있다. 처음 세 번 나오는 것은 복녀를 가리고, 그 다음부터는 복녀의 남편을 가리킨다. 이래서 때로는 글을 이해하는 데 혼란을 일으킨다고 해서 뒷날의 소설가들이 ‘그녀’란 말을 일본 소설과 서양 소설을 따라 또 하나 만들어 쓰는 구실을 주었던 것이다.
넷째는, 지난날 우리 소설가들이 어떤 말을 귀한 우리말이라 깨닫고 있었던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말을 써 놓은 대문이 있다.
- “형용사와 명사의 부족도 곤란이었다. 지금 보통으로 쓰는 형용사 가운데도 당시의 개척자의 땀이 얼마나 섞여 있는지? 이런 말 혹은 이런 형용사는 너무 상스럽지 않은지, 야비하지나 않은지, ‘그’라는 대명사가 과연 적당한지-필자의 당시의 기억을 보면 몇 번을 읽어 보고 한 뒤에 자기 스스로 암송하여져서 그 ‘야비됨과 그 상스러움’을 모르게 된 뒤에야 발표할 용기가 생겼다.”
여기서 낱말을 가려 쓰는데 고민하였다고 했는데, 얼핏 생각하면 수긍이 가지만, 형용사와 명사가 모자랐다면서 “이런 말은 상스럽지나 않은지, 야비하지나 않은지”하고 쓰기를 주저했다는 것이, 이 작가가 써 놓은 문장에 비춰 보아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다. 작품을 아무리 읽어 봐도 형용사에서 고심한 것을 짐작할 수는 없다. 우리글이 다 그렇지만 특히 소설 문장에서는 명사와 동사가 많이 나와서 큰 노릇을 하고, 형용사는 명사나 동사만큼 중요하지 않다. 이 작가의 문장도 예외가 아니다. 고심한 낱말은 명사와 동사와 부사 쪽이 아닌가 싶다.
다음에 드는 몇 가지 보기를 생각해 보자. 묶음표 안의 말은 내가 써넣은 것이다.
- ‘고함을 발하였다(질렀다)’
- ‘복습을 필한(끝낸) 후에’
- ‘마음속에서 쟁투하고(싸우고) 있었다.’
- ‘공상이 속속이(연달아) 머리에 왕래하였다.(오고 갔다)’
- ‘그와 동정도로(같은 정도로) 가고 싶었다.’
- ‘미안을 감하였다(미안을 느꼈다)’
- ‘혐오의 정과 수치의 염이(미운 감정과 부끄러운 느낌이) 나지마는’
- ‘전광과 같이(번개같이)’
(이상 ‘약한자의 슬픔’에서)
여기 든 글에서 묶음표 안에 적어 놓은 것과 같은 쉬운 말을 안 쓴 것은 그런 말을 그 당시에 쓰지 않아서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다만 좀 더 품위가 있는 말로,‘상스럽지’ 않은 말로 쓰려고 하다 보니 이런 한자 말을 쓰게 된 것이라고 나는 본다.
명사와 동사와 부사뿐 아니라 토에서도 이른바 ‘상스러움’을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 ‘복녀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면서 감독에게로 돌아왔다.’(감자)
이 ‘-에게로’란 토가 문제인데, 이런 토는 아직까지도 우리가 쓰는 입말에 안 나온다. 이 경우라면 ‘감독에게’ 하든지 ‘감독한테’라고 말한다. ‘에게’보다 ‘한테’가 더 널리 쓰인다. 그런데 어떤 사전을 보면 ‘한테’를 “‘에게’의 통속적인 말”이라 풀이해 놓았는데, 이렇게 소설가들이 살아 있는 민중의 말을 쓸 줄 모르고, 이상한 글말만 쓰다 보니 이제는 사전까지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 ‘그의 손에 얼른얼른하는 한 자루 들리워 있었다’
- ‘복녀의 손에 들리워 있던 낫은 ····’
이 대문에 나오는 ‘들리워’는 누가 보아도 ‘쥐여’나 ‘잡혀’로 써야 할 것이다. 소설가 말을 골라 쓰는 데 정확한 말, 실제로 쓰는 살아 있는 말을 찾아 쓰려고 하지 않고 ‘상스럽지 않는 말’ ‘야비하지 않은 말’을 골라 쓰려고 하다 보니 이렇게 된다.
- ‘혹은 그런 일을 하면 탁 죽어지는지도 모를 일로 알았다.’(‘감자’)
‘죽어지는지도’이건 우리말이 아니다.
- ‘그 집의 방의 배치를 익히 아는 엘리자벳트는’ (‘약한자의 슬픔’)
- ‘이 소리에 엘리자벳트의 용기의 대부분은 꺾어졌다’(같은 작품)
- ‘그는 남작의 자기를 들여다보는 눈으로 남작의 요구를 깨달았다.’ (위의 작품)
이 글들에 나오는 대부분의 ‘의’ 토는 일본 글 번역투가 된 데서 생겨난 것이다. 우리말을 골라 쓰는 표준은 상스러운가 아닌가에 있고, 일본 말을 자기도 모르게 따라가고 있는 데 대한 깨달음은 전혀 없고 보니 이런 글이 될 수밖에 없다.
- ‘말은 짧지마는 이 말을 남작에게 하는 것은 엘리자벳트에게 큰 부끄러움에 다름 없었다.’(‘약한자의 슬픔’)
‘큰 부끄러움에 다름 없었다’ 이것도 우리말이 아니다. 이 글을 살펴보면 누가 생각해 봐도 ‘큰 부끄러움이었다’고 하든지 ‘(·····것이) 엘리자벳트는 크게 부끄러웠다’로 되어야 한다고 판단할 것이다. 일본 말 ‘-에 다름 아니다’를 여기서 ‘다름 없었다’란 형용사로 만들어 과거형으로 쓴 것은, 모든 말끝을 과거형으로 일부러 통일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맺는말
우리의 소설 문장은 이인직과 이해조가 길을 안내하고, 이광수가 그 길을 개척했는데, 다시 김동인이 그 길을 넓히고 다졌다. 이래서 오늘날 이른바 ‘언문일치’가 되었다고 하는 문장을 ‘완성’했는데, 이 소설 문장이 사실은 우리 겨레 말을 제대로 살린 ‘말과 글이 진정 하나로 된’ 문장이 되지 못했다. 우리가 쓰고 읽는 소설 문장은 일본 글을 따르고 일본 말법으로 우리말을 쓰는 글이 되어 버렸고, 마땅히 청산해야 할 한자 말도 그대로 써서 우리말을 혼탁하게 만드는 일을 저질러 왔다고 본다. 이 글에서 지금까지 말한 것을 간추려 요약하면, 첫째 모든 글월의 몇 음을 ‘다’로 통일해 버렸고, 다음은 우리말에서 좀처럼 안 쓰는 토 ‘의’를 함부로 쓰면서 우리말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움직씨(동사)를 수없이 죽였고, 셋째는 우리 이야기 말에는 쓰지 않는 3인칭 대이름씨를 쓰고, 과거 완료형 때매김까지 만들어 번역체 문장을 만들고, 넷째는 여기에도 온갖 한자 말을 아무 깨달음도 없이 마구 쓰면서 순수한 우리말은 수도 없이 학살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잘못을 신소설 작가부터 시작해서 우리 문학을 개척했다는 분들이 저질렀다.
그런데, 한편 생각하면 우리 소설 문장을 만들어 놓은 이런 분들이 잘못한 점도 많지만, 그들 나름대로 글을 제대로 써 보려고 여러 가지로 찾고 만들고 다듬고 고치면서 애를 쓴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면 이 몇 분들-이인직·이광수·김동인-의 뒤를 따른 수많은 작가들은 어찌하였던가? 내가 보기로 많은 훌륭한 작가들이 나왔고, 남의 나라에 자랑할 만한 작품도 지금까지 적지 않게 씌어져 나온 줄 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몰라도 문장에서만은 앞서 간 몇 사람이 닦아 놓은 그 길을 아무런 비판도 없이 그대로 따라가기만 했다고 본다. 이광수나 김동인은 그렇게 일본 문장을 닮아 버렸다고 했지만 그래도 무척 애를 쓰고 고민을 했고, 앞서 간 사람을 제각기 비판해서 제 나름대로 무엇을 보여 주려고 하였는데, 그 뒤의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뒤의 사람들도 마땅히 앞서 간 사람이 한 일을 비판하고 새로운 길을 보여 주려고 애써야 했을 것인데, 그렇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그 앞서간 사람들이 잘못해 놓은 것을 점점 더 되풀이하고 확대하기만 했다. 이래서 일제 36년이 가고, 다시 분단 45년을 보내는 동안 우리말 우리글은 아주 엉망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어느 소설가도 그 어느 평론가도 우리글이 빠져 있는 깊은 함정을 깨닫지 못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소설을 비롯한 모든 글을 바로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고, 말을 살리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를 온 겨레의 과제로 걱정하고 논의해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