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쓰기와 언어 현실
이유범/소설가
1
- ‘모국어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삶을 직시하는 따듯한 눈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 .
소설 동인 ‘作法’을 결성하여 첫 작품집을 세상에 내놓으며 서문에 썼던 글이다. 모국어에 대한 지극한 사랑, 그 의미의 깊이와 질량은 날이 갈수록 막연하기만 한데 그 말을 썼던 심정만은 지금도 여전하다.
文體(樣式, style)란 용어는 그 개념과 쓰임새의 다양성으로 해서, 문예 비평에서는 아직까지도 두통거리로 남아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일반적으로는 문장상에 나타나는 특성 정도로 쉽게 이해된다. 그리고 한 작가의 작품은 하나의 문체적 특징을 갖는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문체라는 용어 자체가 상당히 다의적임을 아는 까닭에 이러한 소박한 견해에 대해, 굳이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한 작가의 문체가 그리 단순하게 규정지어질 수 없는 성격의 것이라는 것 정도를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이다.
한 작가의 개성이 문체를 만들고 그 문체가 그 작가의 작품 하나하나를 모두 일관한다는 생각은 작가의 개성을 너무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경우이다. 작품의 내용은 작가의 개성이 선택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선택의 범위가 이미 틀 잡힌 문체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특히 소설에 있어 작품 내용은 문체를 염두에 두지 않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선택되어지며, 문체는 내용이 선택되어진 이후에 그 내용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게 결정된 작품들의 문체가 집적되어 다른 작가와 구별될 수 있는 특성을 갖게 될 때 비로소 한 작가의 문체가 이야기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나는 내 작품들이 얼마나 넓은 문체의 폭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데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곧 내 문학의 폭을 증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확실히 문학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문체 문제로 좁혀 말한다면 쓰고자 하는 그 무엇이 쓰는 방식까지도 결정하는 것이다.
- 해가 바다 너머로 숨기 시작했다. 저녁 빛깔은 아침 빛깔과 또 달랐다. 소년의 등 뒤에서는 어머니가 그림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어머니는 또 다른 저녁이었다. 그것이 소년에게는 좋았다. 소년은 앉은 채로 어머니를 올려다 보았다. 어머니의 눈에는 저녁놀이 가득 들어 있었다.
- 어머니,
- 소년이 어머니를 불렀다.
- 왜 그러니?
- 소년은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목소리만도 충분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조용히 웃었다.
- 덜컥덜컥 매듭을 짓는 그 소리에 애써 상관을 안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이제 그 소리는 이명처럼 그의 귓속 전체를 휘저으며 울렸지만 짧은 바늘의 소리는 여전히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울컥 치받치는, 그래서 심성과 감정을 포함해서 그의 모든 것을 코끝이 찡하도록 여리고 나약하게 만들어 버리는, 친밀한 가족들의 사이에서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던 어린 시절에 문득 잠에서 깨어 자신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또 주위의 모든 사물이 전혀 낯선 것으로 느껴지는 그런 순간에 가질 수 있는, 와앙 하고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런 심정이 되어 버렸다.
위 두 글의 문체적 성격은 상당히 다르다. 이유는 간단하다. 윗글의 경우는 맑고 깨끗한 세계를 그리고 싶었던 탓이고, 뒷글의 경우는 어둡고 칙칙한 세계를 그리고 싶었던 탓이다. 두 글을 쓸 때의 관심의 영역이 달랐던 것이다. 먼저 문체의 성격을 결정하고 거기에 맞는 작품 세계를 찾아낸 것도 물론 아니다.
벌써 여러 해를 고민하고 있다. 적당한 어휘 하나를 구하지 못해서다.
요즘 사람들이 흔히 쓰는 ‘이해한다’라는 말의 뜻은 그 폭이 필요 이상으로 넓다. 일상에서 ‘이해한다’라고 했을 때, 그 안에는 최소한 거간의 사정을 ‘인지 납득’한다는 이외에 ‘용납’한다는 의미도 들어 있다. 사정을 충분히 알았으니 용납하겠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왜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충분히 ‘인지 납득’은 되지만 결코 ‘용납’할 수는 없는 일이 세상에는 좀 많은가. 그럴 경우에 써야 할 말이 좀처럼 찾아지지가 않는다. ‘사정은 충분히 알겠지만 용납할 수는 없다’라고 길게 말할 필요 없이 한 마디로 의사 표현할 어휘가 좀처럼 찾아지지 않은 것이다.
그럴 만한 사람이 또 그런 짓을 저질렀다. 이 경우 결코 용납할 마음이 아니라면, ‘평소 네 행태가 그런 줄 알고 있으니까 이번 저지른 짓도 충분히 이해한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상대방은 그 말을 바로 용납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어라고 해야 하는가. 아무래도 맞춤한 말이 없다.
원래 ‘이해’라는 말속에 ‘용납’이란 의미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뒤에 그런 의미가 들어가게 됐다면, 그 까닭은 모든 것을 자기 편의로 생각하려 드는 현대인의 이기심이 아닐는지.
이렇게 어휘 하나하나가 나에게 있어 글쓰기는 어렵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까짓 단어 하나 정도야 하고 대범하게 넘기지 못하는 성격을 탓하기도 하지만 그 타고난 성격을 고칠 수 없는 한 어쩌겠는가.
하지만 언어와 관련해서 나의 글쓰기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에 있다.
2
옛날에는 손님을 귀하게 여겼다. 낯 모르는 나그네라 하더라도 묵어 가기를 청하면 거절하는 법 없이 맞아들여 손님으로 대접했다. 정성껏 음식을 차려 내고 잠자리를 제공했다. 손님이 불편해 하지 않도록 마음을 쓰고, 행여 누가 될까 아이들이 시끄럽지 않도록 주의했다. 또 기꺼이 손님의 말상대가 되어 주었다. 여차하면 이웃들까지 불러다 이야기를 나눴다.
옛날 사람들이 손님을 귀하게 여겼다는 것은 ‘손’이 그냥 ‘손’이 아니라 반드시 존칭 접미사 ‘님’이 붙은 ‘손님’으로 호칭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쉬이 알 수 있다.
사회의 모습이 도시화로 치닫는 지금은 옛날과 많이 다르다. 낯선 손님은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친척도 손님으로서는 귀치 않은 존재로 취급받기 일쑤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를, 나는 가끔 이렇게도 생각해 본다. 옛날 사람들이 반기고 귀하게 대접한 것은 손님 그 자체가 아니라 손님이 가지고 온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서적도 흔치 않았고 대중 매체도 발달하지 않았으며 여행도 자유롭지 못했던 옛날 사람들에게 말은 확실히 귀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 무렵 마을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말의 범위란 지극히 한정적인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마을 안의 말들, 그리고 그 말의 일부는 만들어 내면서 감질나는 그 말의 향연을 누리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다행이 며칠마다 장이 서기는 했지만 그 장 보따리에 묻어오는 말들도 좁은 한 고을의 말들일 뿐이었다. 장터에 나가 자신의 말을 해보지만, 모두 말이 하고 싶은 사람들뿐이라 흡족히 차례가 돌아오지도 않았다. 늘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채울 수가 없었다. 여전히 지긋이 눌러 참아야 하는 발화욕(發話欲)을 메울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보다 많은 말에 목말라 할 때 자신의 말을 들어 줄 상대가 없어 안달이 날 때, 그 말과 이야기 상대가 희소가치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마을에 타관의 나그네가 들어온다. 아니, 새로운 소식, 새로운 말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곳의 말을 신물나지 않은 새로운 소식, 새로운 말로 들어 줄 이야기 상대가 들어오는 것이다. 어찌 귀하지 않으며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는가. 가능하다면 손님을 한숨 재우지 않고 밤새 말의 향연을 누리고 싶었으리라. 청하지 않은 이웃도 하나 둘 모여든다. 바깥 세상의 새로운 말에 귀 기울이기 위해, 이곳 말을 바깥 세상으로 내보내는 데 자신의 한 입을 보태기 위해. 확실히 말이 귀하던 시대의 풍속도라 아니할 수 없다.
지금은 세월이 확실히 달라졌다. 인쇄술이 발달했고 종이가 풍성해졌다. 전파라는 것이 발명됐으며 아울러 현대적 교통 통신 수단이 지구를 하나의 촌락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 수도 엄청나게 불어났다. 그 귀하던 말이 이제는 도처에서 넘쳐나게 됐다.
신문사에서, 잡지사에서, 출판사에서, 라디오에서, 텔레비전에서 ·····, 하루에도 얼마만큼의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일까 . 또 거리 이곳저곳에 나붙는 수많은 말들····, 어디를 가나 귓속을 파고드는 온갖 말들······. 우리는 완전히 말에 포위되었다. 가히 말의 홍수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잠자리에 들어 눈을 붙인 뒤에야 잠시 말에서 해방될 수 있는 정도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말에 목말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현대인에 있어 말은 더 이상 귀한 것이 못 된다. 오히려 귀찮은 존재이기 일쑤다. 요즘의 말이 옛날에 비해 엄청나게 평가 절하되었음은 그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요즘 사람들이 손님을 귀치 않게 여김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3
말의 홍수의 시대, 확실히 우리 현대인은 범람하는 말에 파묻혀 산다. 따라서 현대의 말의 문제는 말의 희소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말의 풍요에서 온다. 그리고 말의 풍요, 그것을 결코, 긍정적인 쪽으로만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데에 고민이 있다. 확실히 이 시대의 말의 문제는 심각한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수년 전, 간단한 글로 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일이 있다. 물론 그때의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 현대의 우리들은 확실히 인류 역사상 일찍이 누려 본 일이 없는 언어의 풍요 속에 살고 있다. 까딱 잘못하다간 범람하는 그 언어 속에 익사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앞설 정도이니 언어의 빈곤을 살았던 옛 사람들에 비하면 상당히 행복한 셈이다. 하지만 ‘말’의 참뜻을 생각하면 왠지 그 행복이 행복으로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 ‘말’이란 말속에 참말과 거짓말의 두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거짓말은 애초에 언어가 아니라 개 짖는 소리, 하품 소리 등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곧잘 쓰는 ‘말도 아닌 소리’에 불과한 것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말이란 ‘참’이란 접두사가 필요 없이 그냥 ‘말’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현대의 언어의 풍요는 결코 언어의 풍요가 아니다. ‘말’ 아닌 ‘소리’의 무절제한 범람일 뿐이다.
- 하루에도 현기증 날 정도로 쏟아져 나오는 온갖 광고와 선전의 어휘들, 명약 아닌 약이 없고, 양서 아닌 책이 없고, 명화 아닌 영화가 없다. 오직 소비자만을 위한 상점, 오직 사회만을 위한 기업, 국가와 국민만을 위한 공공 단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진실로 그러한가? 우리는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다. 과장과 허위, 유희와 희롱으로서의 말놀음이라는 생각 때문에 , 광고 문안 작성자 스스로도 믿을지 어쩔지 모르는 그 죽은 언어의 수용자에의 강요와 거부, 그 강요와 거부는 차라리 끈질긴 전투처럼으로도 보여져 광고가 어떤 효과를 얻었다면 그것은 설득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용자 쪽의 자포자기의 심정에 힘입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윗 글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광고만을 주로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도처에서 상업 광고처럼 과장되고 허위가 넘실거리며 속이기 위해 왜곡되고 비틀린, 진실로서 듣는 이(또는 읽는 이)에게 다가가기보다는 현혹으로서 눈가림하려는 말들을 만난다. 정의가 앞서야 할 정치판에서, 믿음이어야 할 여러 가지 거래에서, 사랑을 나누어야 할 종교의 현장에서, 진리가 수수되어야 할 학교의 교실에서까지 우리는 구박받고 목 졸리고 터지고 깨지며 괴로워 하는 말들을 만나는 것이다.
말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언제나 쌍방적인 것이다. 말이 말로서의 존재 의의를 가지려면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말은 비로소 산다. 현대 문명은 수많은 말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현대인들은 그 말들을 다 들어줄 수가 없게 되었다. 말은 말이로되 듣는 이 없는, 생명력을 가질 수 없는 말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말의 공급 과잉 현상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살리기 위해 필요 이상 목청을 높였다. 과장된 말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나중에야 어떻게 될 값이라도 우선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야 한다는 급한 마음이 앞섰다. 허위의 말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말은 단순한 본질이 아니라 힘을 가진 구체적인 작용이다. 말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더불어 산다. 내가 움직여 남을 돕고 남이 움직여 나를 돕는 것이 사람 세상이다. 더불어 사는 사람 세상에서 나만이 더 이익을 갖고자 하는 이기심이, 속여서라도 남을 내 유리한 쪽으로 움직이도록 만든다. 왜곡의 말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서구식의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정제되지 않은 채 밀려들고 거기에 자본주의적 상업주의가 부채질한다. 속임수의 말이 횡행하는 까닭이다.
사람의 본능은 본질적으로 동물의 그것과 흡사하다. 거기에 많이 결합할 때 그 말은 동물적인 것이 된다. 퇴폐와 수치의 말들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본능의 특성은 그 발현이 단세포적이고 즉각적이라는 데에 있다. 거기에 야합이라도 하듯 도시 문화의 상당 부분이 사유적이라기보다는 감각적이 통속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저질의 말들이 번성하는 까닭이다.
말의 지배는 힘의 지배다. 말을 나눔은 곧 힘의 나눔이며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요체다. 힘의 독점은 필연적으로 말의 독점을 가져온다. 독재의 말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독점 의식은 배타적이며 편견적이다. 상대방의 말을 인정 않은 아집의 말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독재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독재는 늘 위장될 필요가 있다. 정의와 민주를 위장한 거짓의 말들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독재를 거부하고 저항한다. 독재자는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권위를 강조하고 강압의 수단을 부단히 강구한다. 폭력의 말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참으로 말이 풍성한 세상이다. 그 풍성한 말들 속에는 위에서 말한 과장, 허위, 왜곡, 속임수, 퇴폐와 수치, 저질, 독재, 거짓, 폭력의 말들이 마구 뒤섞여 있다. 하지만 이러한 말들은 결코 말이 아니다. ‘참’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없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말들이 여전히 판을 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판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꾸자꾸 확대 재생산된다는 사실이다.
말은 집은 진실이다. 요즘은 집을 잃고 허공을 헤매는 말들이 너무도 많다. 문필가에게는 더없는 불행이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문필가는 곧 말을 양식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양식이 자꾸만 썩어가고 있으니······. 어떤 처방을 내려야 할 것인가. 다음은 위에 인용한 글의 뒷부분이다.
- 이제 우리는 진실의 집에서 부당히 소박맞고 허공에 방황하는 말들에게 다시 그 집을 찾아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말을 대하고 행할 때에 無私와 無邪의 마음을 가질 일이다. 이기심이 앞서 작용하는 한 말은 말이 아니다. 자신의 장삿속이 앞서는 한 광고의 어휘는,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앞서 생각하는 한 위정자의 공약은, 상업주의 이해를 앞서 생각하는 한 신문의 활자와 방송의 전파는, 권력에 편승해서 자신의 출세를 생각하는 권력자에 대한 아부의 獻詩는, 이미 말이 아니라 소리의 뱉음일 뿐이다. 진실과 믿음은 늘 利害에 앞서기 때문이다.
- 또 한 가지,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는 한 듣는 이로 하여금 곡해할 가능성이 있는 일부의 언어는 설혹 그것이 거짓이 아니더라도 차라리 말해지지 않는 편이 옳다. 바둑 통 안에 검정 돌과 흰 돌이 있다는 것을 함께 말할 수 없을 때, ‘흰 돌이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해서, ‘흰 돌만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해서, 결코 자위해서는 안 될 일이다.
-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 말(글)이 대중성을 띠는 입장이라면 그 힘과 공공성에 관련하여 더욱 엄격해야 한다. 이 경우, ‘임금님의 옷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곧 미친 짓이고,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우매하거나 사심이 있거나 용기가 없는 탓이며, 침묵한다는 것은 의무의 포기 이외에 그 아무것도 아니다. 침묵하며 ‘거짓은 말하지 않았다’고 자위하려 든다면 그것은 자타에 대한 기만이다. 차라리 혀를 끊는 은 것이 정당하다.
마지막, ‘차라리 혀를 끊는 것이 정당하다’라는 것은 다분히 작가로 살아가고자 했던 나 자신을 의식한 말이다. 왜냐하면 작가란 곧 시대의 양심이며 파수꾼이니 하는 거창한 말의 진의는 따지기도 전에 ‘진실된 말을 함’이 곧 작가의 존재 이유이며 또한 그 ‘진실의 말’이 작가들의 존재 자체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의 실천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의 글이 생명력 없이 죽어 버리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나의 글쓰기가 아름다운 모국어를 하나하나 진실의 집에서 쫓아내는 그런 반역의 행위가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이러 저런 생각을 하면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
崔尙鎭의 학위 논문을 읽은 일이 있다. ‘國語意味論의 易學的 方法論 硏究’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국어를 중심으로 하여 언어 의미를 동양 전통 사상인 역(易)의 원리로 설명하고자 시도한 아주 독창적이고도 재미있는 글이다.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모든 宇宙的 存在가 氣를 가지고 있으므로 言語 意味도 氣를 가지고 있다. 言語 意味가 나름대로 固有한 意味力을 가질 수 있는 것은 言語 속에 氣가 있기 때문이다. 또 意味가 無限이 生成될 수 있는 것도 氣에 의함이요 일정한 構造力을 지닐 수 있음도 氣에 의함이다. 따라서 言語 意味는 意味하는 바의 기능에 따라 氣를 지닌 하나의 小存在的 意味體이다. 意味는 宇宙의 運行처럼 生成하고 變化한다. ········<중략>·····
- 大宇宙가 宇宙 全體의 變化와 生成에 의해서 形成된 것이라면 小宇宙는 宇宙에 存在하는 各各의 個體와 變化와 生成이다. 大宇宙가 大氣를 지니고 있다면 小宇宙는 小氣를 가지고 있다. 大宇宙가 易의 調和와 規則의 原理에 의해서 운행된다고 한다면 小宇宙도 그 原理에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곧 宇宙 秩序의 根本 原理이기 때문이다.
崔尙鎭의 논문은 이어, 역학에서의 기(氣), 질(質), 형(形), 상(象), 행(行), 운(運)에 언어학의 의미체, 의소(義素), 음성 기호, 생성 체계, 문법적 기능, 의미적 환경을 각기 대입하여 설명한다.
역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국어 의미론의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 이 논문의 주지일 터이지만 여기에서 이 논문을 언급하는 까닭은 언어의 본질을 하나의 우주적 氣로 정리한 그 대목에 있다. 그것은 평소 막연히 가지고 있던 내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인간을 대우주(macrocosm)에서 생성된 소우주(microcosm)로 보고 소우주인 인간의 마음과 기운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생성된 언어 또한 하나의 소우주로 파악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조선 초 학자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확실히 언어는 하나의 소우주다. 끊임없이 변형되고 생성되는 세계이다. 그 변형과 생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기이며 언어의 경우 기란 바로 사람들의 마음이며 의식이다. 물론 한국어는 한국어 나름대로 하나의 소우주이다. 따라서 한국어를 변형시키고 새롭게 생성해 나가는 것은 한국인의 마음이며 의식이다. 한국인은 정신 상황이 한국어를 만들어 낸다.
요즘 한국어의 모습을 만들어 나가는 기는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을까? 선량하고 명랑한 기일까, 아니면 음울하고 칙칙한 사기(邪氣)일까. 부드러운 기일까, 아니면 거칠고 사나운 기일까. 타인에 대한 포용의 기일까, 아니면 공격적이고 냉소적인 비틀린 기일까.
다음은 요즘 고등학생 사이에서 쓰이고 있는 은어의 일부이다.
- 쪽주다: 창피주다
- 아잡토: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토인
- 아리랑: 돈 뺏고 구타하는 것
- 짜져!: 저리 가!
- 천재: 천하에 재수 없는 놈
- 뽀리까다, 쌥치다: 훔치다
- IBM: 이왕 버린 몸
- 빡 오르다: 화나다
- (말을) 씹다: (말을) 말같이 듣지 않다
- 우등생: 우주에서 떨어진 등신 같은 생물
- 특공대: 특별히 공부도 못하면서 대가리만 큰 놈
- 호걸: 호떡집 걸레
- 꼴지르다: 고자질하다
- 개지랄: 개성 있고 지적이고 발랄하다
- 절세미인: 절에 세든 미친 인간
- 진담: 진한 농담
- 농담: 농도 짙은 진담
- 담생이: 담임 선생님
은어 자체의 속성을 감안하더라도 위의 말들이 풍기는 분위기는 아무래도 으스스한 두려움을 느끼게 만든다. 한 시대 앞 고등학생들이 만들어 쓰던 은어와 비교하면 한국어를 만들어 내는 우리의 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결코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건강한 우리말을 창조해야 할 우리들의 언어 의식 안에 좋지 않은 기가 그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는 것이다.
5
가히 홍수란 말로 비유될 수 있을 만큼 풍성한 말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쓸 말도 있지만 못 쓸 말도 많다. 다듬고 키워야 할 말도 있지만 솎아내야 할 말도 많다. 사람을 살리는 말도 있지만 사람을 죽이는 말도 많다.
언어의 본질을 기라고 할 때 그 기를 이루는 것은 사람의 정신이다. 모국어의 기는 곧 우리들의 정신이다. 그 정신을 키우는 것은 또 우리 모국어이다.
모국어를 양식 삼아 목숨 부지하는 것이 작가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는데····, 내 스스로 내 양식을 썩이는 것이나 아닌지? 글쓰기가 두렵고 고통스럽지 않을 까닭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