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개론’ 속의 문예학 혹은 언어학
韓基/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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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문학 개론을 강의할 때, 가장 첫 번째이자 궁극적으로 부딪히는 설명의 난제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대단히 처치 곤란한 것이기 때문에, 문학에 관한 한 내로라하는 석학들도 되도록 피해 나가고자 하였지만, 문학 개론의 수업 시간에는 막무가내로 그럴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난해하고 복잡한 설명 방식을 시도할 수도 없다. 학생들은 언제나 분명하고도 명징한 해답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의에 의한 명제화의 진술 방식에 익숙해 있으며, 그들은 항상 ‘무엇은 무엇이다’라는 식으로 대답해 주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 주는 것이 옳은 것인가.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식은 그 매재(媒材)를 고려하는 것이다. 즉 문학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말하자면 문학은 말로 이루어진 어떤 것이다. 따라서, ‘문학은 말로 이루어진 어떤 것’이라는 명제화가 가능하다. 문학은 무엇보다 말로 이루어진 어떤 것이다. 말 또는 글.
이렇게 하고 보면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언어란 무엇인가’를 말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언어란 무엇인가. 주지하다시피 이 질문에 잘 대답하는 방식의 하나로는 기호 이론이 있다. 즉 언어란 기호의 일종인 것이다. 기호에는 기표, 즉 시니피앙(signifiant)과 기의, 즉 시니피에(signifié)의 측면이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의사 전달을 한다. 이 둘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있으며, 그 결합은 근본적으로 임의적이다. 요컨대 언어는 자의적인 것이다. 하나의 약속일 뿐이며, 그것은 사회적, 역사적 제도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우선 되는 대로 이렇게 설명해 놓고 보면 학생들의 표정은 대체로 어리둥절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점차 증폭되어 간다고 느껴지기 때문일 터이다. 기표, 기의, 자의성, 제도 등 이 모든 말들이 그렇다. 그들에게는 실감을 안겨 주는 설명 방식이 아니면 설득력이 없으며, 추상적인 공소한 논리로 연역을 시도해 봤자 그들의 인식 지평에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최초의 명제, 즉 문학은 말로 이루어진 어떤 것이라는 설명이 보다 간명한 것이다. 오히려 “문학은 글이다”라는 설명이 그들에게는 좀 더 직접적이다. 그들이 지금까지 대해 온 문학은 거의 대부분 글의 형태로만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문학을 글로 생각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이 설명은 대단히 위험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인쇄 문학의 형태가 아니라 문학의 보다 원초적인 형태는 말, 즉 구어(口語)로 이루어진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문학 전공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배우게 되는 구비 문학의 개념은 이래서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단지 과거적인 형태로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시가(詩歌) 혹은 희곡 문학의 형태와 관련해서도 깊은 자국을 드리우고 있다. 문학을 단지 글의 형태로서만 다루게 되면 대단히 곤란한 문제들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의 문학 분류에서는, 남한에서 거의 문학으로 간주하지 않는 노래 가사들을 문학의 일 영역으로 취급하고도 있다. 역사적으로는 창(昌)의 형태로 존재해 왔던 시조 읊기, 그리고 개화기 시가의 일종인 창가, 또 판소리 등이 모두 구비 문학의 형태로 존재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말과 글의 차이는 무엇인가 여기서 말과 글의 구별 문제가 대두하게 된다. 말은 무엇이고, 글은 무엇인가.
의외로 학생들은 말 언어 즉 구어 언어와 문자 언어의 차이에 대해서 대단히 생소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말과 글의 동일성에 익숙해 있거나, 그것의 역사적인 발생적 차이를 제대로 인지하고자 못하고 있기가 십상이다. 여기서 인식상의 혼란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예컨대 학생들은 우리글이 훈민정음의 창제 이후에 성립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태반이며, 그러한 조건에서 말과 글의 원초적 구별이란 애당초 어려운 작업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불란서의 쟈끄 데리다는 인류 문화 속에 은연중 배어 있는 말로서 중심주의를 비판한 바 있으며 그에 따라 이차적인 문화 형태로서만 기능하고 있는 글 양식의 존재론적 복권을 주장하기도 하였던 바, 이러한 각도에서 보면 역사상 훨씬 후대에 와서야 성립하게 된 문자 언어 형태의 현재의 문학이 오늘날 문학의 전방위 개념으로 인지되며, 그러면서도 문화적 전력 관계에 있어서는 점차 사람 사는 사회의 변방으로 내몰리는 양상을 내보이고 있음은 음미할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동양 사회에서는 오히려 글 문화 우위의 문화 전통이 오랫동안 지배해 왔었기 때문에 위의 사실은 더욱 더 아이러니컬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사실인데, 이 문제를 데리다는 글의 원초적인 선재성 주장으로 해소하려고 하고 있어 이채롭다. 요컨대 기표로서의 말보다는 기의 즉 의미로서의 문자의 형태가 선재했었다고 하는 것이 그의 주장의 요체인 셈이다.1)
그러나 괜히 이러한 차원의 문제를 섣불리 제기했다가는 큰코 다치기 십상이다. 우선 말과 글의 구별 문제를 인식시켜야 하는 것인데, 엉뚱하게 말과 글의 권력 관계 문제를 제기하게 됐으니, 학생들은 급기야 웅성거리는 모습조차 보여줄 수도 있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을 뿐더러 납득하기조차 어려운 논지로 우리를 혼란시키고 있다고 학생들은 항의할 것이다. 그래서 처음의 명제로 되돌아온다. 문학은 말 혹은 글로 이루어진 어떤 것이며, 그것은 언어라는 근본적인 매재의 성격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우선 쉽게 말이 글로 다시 치환될 수 있다 함을 환기시켜 줄 필요가 있으며, 글은 말로 치환된다 함을 또한 깨우쳐 줄 필요가 있다. 말 또는 글은 원칙적으로 소통의 수단이다. 그러므로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문학을 한다. 즉 문학 역시 근원적으로는 소통의 욕망인 것이다. 무엇인가를 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문학을 하며, 따라서 문학 역시 근원적으로는 정치적 욕망의 일종이다. 정보 전달과 함께, 관계를 조정하며, 궁극적으로는 상대를,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는 욕망이 거기에는 개재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카프카의 경우와 같이 자기가 창조한 문학을 애써 매장하려 한 보기가 문학사상 없지도 않았던 것이긴 하나, 그러나 이와 같은 경우는 극히 예의적이다. 요컨대 문학은 본질적으로 소통의 욕망이며, 이 소통 관계를 전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텍스트(Text)를 운위할 수 있다. 담화의 일편 단위로서의 텍스트와 보편적인 의미 단위로서의 담론 즉 디스코스(Discourse) 개념을 상정하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설명은 조금 낯설기는 하나 대체로 이해될 수 있을 터이며, 학생들에게 조금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해 줄 수도 있다. 문학을 일반적인 것으로 설명하면서 지금까지는 들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용어, 개념들이 추가되고 있어서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로 이룩된 모든 담론, 모든 텍스트는 또한 문학인가? 여기서부터 문제가 어려워진다. 누구라도 대답할 수 있듯이 글로 쓰여진 모든 것들이 문학으로 인정되지는 않은 현실 속에서 문학적인 담론과 문학이 아닌 담론, 문학적인 텍스트와 비문학적인 텍스트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차이를 규명하기 위해 로만 야콥슨은 그 유명한 ‘문학성’ 개념을 내세웠거니와,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이 문학성 개념에 의지하여 문학과 비문학을 구분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노릇이다2) 문학이 가진 특유한 담론적 성격을 규명해 보기 위한, 방대한 인적 구성의 학술회의에서, 결국 전화번호부가 문학이 아닌 이유를 명쾌하게 해명하지 못하고 말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져 오거니와, 앞서의 데리다는 한걸음 더 나아가 문학과 철학의 근본적인 분리란 거의 불가능하다함을 입증해 보이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문학이란 무엇인가. 결국 ‘말로 된 어떤 것’이라는 설명이 가당하다 하더라도, 요컨대 그 ‘어떤 것’의 해명이 지난한 논구 대상으로 여전히 남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이에 대한 해명의 시도가 전혀 부재했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시도가 있어 왔으며, 그중 어떤 것은 여전히 대단한 설득력을 발휘하고도 있다. 다만 절대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지적하면서 필자가 즐겨 꾸며내는 문학 개론의 서반 강의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학생들의 반응을 조정하면서 문학의 원론적 성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서 나는 우선 하나의 관점 채택하기를 시도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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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론사상 문학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정의 방법으로는 그것을 ‘예술’로 규정하는 방법이다. 즉 문학은 언어로 된 예술, 즉 언어 예술이다. 이 설명은 의외로 학생들이 쉽게 알아듣는다. 왜냐하면 학생들에게 예술이란 말은 매우 익숙한 낱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음악, 미술 등을 예로 들어 그것들이 각기 음률 혹은 선, 색채 등의 매재를 가지는 것에 비하여 문학은 ‘언어’라는 매재를 가진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라고 설명하면 대개는 쉽게 알아듣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친다고 하면 아마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시시하다고 생각하리라. 이 정도의 설명이야 고등학교에서도 귀가 아프게 들어왔을 터이며,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한발짝 더 나아간 질문을 던져 주어야 한다. 예술이 예술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요컨대 다시 한번 돌아가서 묻는다면 왜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구별이 발생하는가, 환언하면 왜 그것이 예술로서의 문학인, 고유한 이유를 갖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물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예술성을 묻는 방식인데, ‘문학성’의 개념 역시 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전제하고, 위 질문을 던지면 학생들은 대체로 딱 막히기 마련이다. 그 이상 더 나아가서 그들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내가 던지는 화두는 ‘낯설게 하기’라는 단어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최대의 이론적 성과물의 하나인 문학 언어의 특수성을 문제 삼는 방식, 이를 학생들에게 보다 구체적인 실감으로 주지시키기 위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시 작품 하나를 예로 들어 본다. 문학적인 맛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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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을 향한 강의의 편의의 이유에서라면 이 경우에도 한 편의 시편 정도를 예화로 들어 두는 것이 좋다. 80년대 시사의 한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다음 노동시가 일응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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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을 두고, 우리는 여기까지 생각해 온 셈이거니와, 문학에 임하는 태도의 상이함을 두고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되는, 즉 형식주의, 미학주의, 객관주의, 언어학주의적인 태도와, 편내용주의, 사회학주의, 이념지상주의, 현실주의 등으로 지침될 수 있는 태도 사이의 대척점을 서로 한 편의 시 예화를 들어가면서 설명해 보았다. 오늘날 우리 시대 문학관의 진동하는 모습은 바로 이처럼 대립되는 두 태도 사이의 다양한 평형 지점으로부터 연유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며, 대학 강의 역시 이 현실의 자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학생들 역시 이 둘 사이의 대립적인 문학관의 자장 속에서 때로는 판단을 유보하며, 또 때로는 적극적으로 편을 들기도 하면서 그 둘 사이의 관계 조정을 위하여 애쓰는 모습을 보여 주며, 그렇게 하여 그 둘 사이의 대립이 결정적인 차이로 인식되기도 하는가 하면, 이 둘 사이의 대립이 상호 중재됨으로써, 한편으로는 현실 지향적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미적 객관화의 노력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그러한 중립적 태도가 대세를 이뤄나갈 수도 있다. 물론 그 사이에 정태적인 태도 조정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 현실 변화에 의한 문학 자체의 전체적인 성격 변화, 즉 요컨대 산업, 정보 사회화에 의한 문학 유통의 전반적인 신호 체계(code)화 경향은 또 한편으로 기존의 문학성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면서 새로운 문학을 탄생시킬지도 모른다. 문학이, 그리고 문학 개념이 역사적이라고 하는 이유가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주어지거니와, 흔히 인류 문명의 제4단계로 접어들었다고 운위되는 현 시기의 문명 변화 이후에 기왕의 문학 개념이 어떻게 재수정을 거칠지는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문학 이론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여러 이론들의 경향은 앞서와 같이 두 가지로만 대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전자의 태도, 경향을 20세기에 들어서서 나타난 몇몇 이론적 태도의 공통 분모로 인지하여 ‘객관적 존재론’의 명명을 부여할 수 있다면 , 후자의 태도는 오히려 고대 문학의 발생 이후에 끊임없이 모양을 바꿔 가면서 여러 가지로 존재해 왔던 모방론, 반영론, 리엄리즘론 등의 태도 경향을 뜻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 밖에 문학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답을 주고자 해 왔던, 혹은 문학 형성의 기능적 관계 요소를 문제삼는 주요 문예 이론으로서는 주지하다시피 표현론의 입장과 효용론의 입장이 대립해 왔다. 표현론이란 말하자면 문학을 창조 주체의 주체성의 소산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예컨대 시는 ‘시인의 사상, 감정의 자연스런 유로’라고 본다든지 , 천재적인 영감의 소산으로 파악하여, 현실 초월의 낭만주의적인 심의 경향을 강조해 왔다든지 하는 것 등은 자본주의 성립 이후 근대의 전형적인 문예관의 일종으로서 표현론적 입장을 개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효용론적 입장 역시 표현론적 입장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성을 가지고,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계몽과 흥미의 이중성으로써 독자에 호소하는 것, 따라서 ‘문학 당의정설’ 혹은 재도지기(載道之器)론이야말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최고의 실천적 문학 덕목이라고 파악되는데, 이런 식의 입론 방식은 기본적으로 효용론과 관련된 문학관을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중 모든 태도가 다 옳은 것으로 인정해야 된다는 뜻은 아니겠으나, 문학을 이루는 제 관계 요소들의 상호 작용으로 보다 합당한 문예학적 입장이 찾아질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결국 문학의 역사적 변이를 주도해 온 주체적 측면의 변혁요인이 발생했다고 보면 문학을 결코 어느 일방적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일이 온당한 일일 수만은 없는 것임이 분명해진다고 하겠다.
여기까지 설명하면 학생들은 대체로 수긍하고 동의한다. 장황하게 쳐들어 보이지 않더라도 언어체로서의 ‘작품’과, 그 작품이 그려 내고, 묘사해 내는, 즉 말하고자 하는 ‘현실’적 대상이 있으며, 또 그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와, 그것을 읽어 주는 ‘자’가 있다는 것이 네 가지 관계 요소는 누가 들어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고려 사항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M.H에 에이브럼즈가 ‘거울’과 ‘램프’라는 이미지로 위 반영론, 표현론 등의 이론적 입장을 탁월하게 설명해 낸 이후로 위의 설명 방식은 거의 대부분의 문학 개론서들이 채용하고 있는 문학 원론의 보편적 설명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거니와,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여기에 두 가지 정도의 요소를 추가하거나 요소를 변형시킴으로써 또 하나의 모델을 창출해 낸 로만·야콥슨의 언어학적 기능 모델의 설명 도식도 나로서는 매우 유력하다고 생각한다. 즉 주지하다시피 야콥슨은 언어 전달 행위를 이루는 구성 요소들을 발신자(Addresser), 수신자(Addressee), 전언(Message), 관련 상황(context), 접촉(contact), 신호 체제(code) 등 6가지로 설정하고, 이의 각 요소들 한 가지 측면에 집중하여 수행되는 기능들을 감정 표시 기능, 능동적 기능, 시적 기능, 지시 기능, 친교 기능, 메타언어적 기능 등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4) 있음을 볼 수 있는 바, 이렇게 볼 경우 문학적, 시적 기능이란 메시지 자체에 충실한 전달 기능 방식이라고 말하여지기도 하나 보다 일반적으로는 보편적인 소통 상황과 마찬가지로 문학 역시 그 소통 상황의 내부에서는 위 6가지 기능 요소가 모두 다 작용한다고 보고, 그중 어떤 요소, 어떤 기능이 치중된 문학 형식, 문학관이 특별히 존재한다고 볼 때, 모름지기 문학 원론을 가르치는 입장에서라면, 이 모든 측면들을 세심히 고려하는 입장에서 논의를 해 나가는 것이 마땅한 것이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위 에이브럼즈의 설명 모델에 비하면, 야콥슨의 설명 모델에서는 관련 상황(context), 접촉(contact), 신호 체계(code) 등의 개념이 생소하여 학생들에게는 상당히 어렵게 느껴지는 편인데, 관련 상황(context)이란 대체로 기왕의 문학 논의에서의 ‘현실’ 개념에 준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면 되겠고, 여기에 덧붙이자면 작품들 사이의 관계 즉 텍스트 관계(intertertextuality) 개념이 부가, 관련되는 정도일 것이며, 신호 체계(code)란 곧 일반 언어 소통 상황에서의 ‘문법’과 같은 것이니, 문학적 국면에서는 문예 비평 양식이 주로 수행하는 사회적 매개 소통 기능으로 대치시켜 설명하면 대개 이해가 가리라고 본다. 문제는 접촉의 개념인 것인데, 나는 이것을 우선 대학 강의에서의 수업의 공간 같은 것으로 설명하고, 그 밖의 소통 양식으로 전화 통화나, 편지, 일기 등이 가지는 고유한 접촉 상황을 예로서 환기시킴으로써 이해시키곤 한다. 아마 대부분의 학생들은 야콥슨의 이런 설명 도식을 들이대면 우선 생소한 느낌에 얼떨떨해 하겠지만, 문학이 무엇보다 언어에 대한 고려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보면 보편적인 설명 모델로서의 언어학적 모델을 먼저 이해시키고, 그러한 관련 문맥 아래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 방식을 이해시킨다면 기왕의 문학 개론식 설명 방식보다는 더욱 폭넓고 세련된 설명이 가능하리라고도 본다. 문제는 학생들이 아직 언어학적 설명 모델에 익숙해 있지 않은 실정이기 때문에 강의 현장에서 함부로 들이댈 수가 없다는 점이겠는데,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중 ·고등학교 과정에서부터 일찍 학생들에게 언어학적 설명 모델을 대강이나마 이해시키는 작업이 긴요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이데올로기 재생산 기능에 주력되어 왔던 중·고등학교 국어 교육의 내용을 개편하면서 앞으로는 언어 자체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의도에서 언어학적, 소통 이론적 설명도식을 일찍이 눈에 익히도록 한다면, 그것은 전체적으로 국어 교육의 합리화를 꾀하는 것이면서 한편으론 문학 교육의 질적 개선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합리성의 개념을 동원하여 말해 본다면, 문학 형성의 근본적인 추동력 역시 합리성의 일종, 즉 미적 합리성의 일종인 것으로 이해되며, 그 합리성의 계발은 무엇보다 언어적 합리성을 증진시키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할 때, 국어 교육에 있어 언어학 이론의 습용 획득 문제는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긴요한 과제로서 동의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