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개론’ 속의 문예학 혹은 언어학

韓基/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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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에서 문학 개론을 강의할 때, 가장 첫 번째이자 궁극적으로 부딪히는 설명의 난제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대단히 처치 곤란한 것이기 때문에, 문학에 관한 한 내로라하는 석학들도 되도록 피해 나가고자 하였지만, 문학 개론의 수업 시간에는 막무가내로 그럴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난해하고 복잡한 설명 방식을 시도할 수도 없다. 학생들은 언제나 분명하고도 명징한 해답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의에 의한 명제화의 진술 방식에 익숙해 있으며, 그들은 항상 ‘무엇은 무엇이다’라는 식으로 대답해 주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 주는 것이 옳은 것인가.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식은 그 매재(媒材)를 고려하는 것이다. 즉 문학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말하자면 문학은 말로 이루어진 어떤 것이다. 따라서, ‘문학은 말로 이루어진 어떤 것’이라는 명제화가 가능하다. 문학은 무엇보다 말로 이루어진 어떤 것이다. 말 또는 글.
  이렇게 하고 보면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언어란 무엇인가’를 말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언어란 무엇인가. 주지하다시피 이 질문에 잘 대답하는  방식의 하나로는 기호 이론이 있다. 즉 언어란 기호의 일종인 것이다. 기호에는 기표, 즉 시니피앙(signifiant)과 기의, 즉 시니피에(signifié)의 측면이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의사 전달을 한다. 이 둘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있으며, 그 결합은   근본적으로 임의적이다. 요컨대 언어는 자의적인 것이다. 하나의 약속일 뿐이며, 그것은 사회적, 역사적 제도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우선 되는 대로 이렇게 설명해 놓고 보면 학생들의 표정은 대체로 어리둥절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점차 증폭되어 간다고 느껴지기 때문일 터이다. 기표, 기의, 자의성, 제도 등 이 모든 말들이 그렇다. 그들에게는 실감을 안겨 주는 설명 방식이 아니면 설득력이 없으며, 추상적인 공소한 논리로 연역을 시도해 봤자 그들의 인식 지평에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최초의 명제, 즉 문학은 말로 이루어진 어떤 것이라는 설명이 보다 간명한 것이다. 오히려 “문학은 글이다”라는 설명이 그들에게는 좀 더 직접적이다. 그들이 지금까지 대해 온 문학은 거의 대부분 글의 형태로만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문학을 글로 생각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이 설명은 대단히 위험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인쇄 문학의 형태가 아니라 문학의 보다 원초적인 형태는 말, 즉 구어(口語)로 이루어진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문학 전공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배우게 되는 구비 문학의 개념은 이래서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단지 과거적인 형태로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시가(詩歌) 혹은 희곡 문학의 형태와 관련해서도 깊은 자국을 드리우고 있다. 문학을 단지 글의 형태로서만 다루게 되면 대단히 곤란한 문제들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의 문학 분류에서는, 남한에서 거의 문학으로 간주하지 않는 노래 가사들을 문학의 일 영역으로 취급하고도 있다. 역사적으로는 창(昌)의 형태로 존재해 왔던 시조 읊기, 그리고 개화기 시가의 일종인 창가, 또 판소리 등이 모두 구비 문학의 형태로 존재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말과 글의 차이는 무엇인가 여기서 말과 글의 구별 문제가 대두하게 된다. 말은 무엇이고, 글은 무엇인가.
  의외로 학생들은 말 언어 즉 구어 언어와 문자 언어의 차이에 대해서 대단히 생소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말과 글의 동일성에 익숙해 있거나, 그것의 역사적인 발생적 차이를 제대로 인지하고자 못하고 있기가 십상이다. 여기서 인식상의 혼란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예컨대 학생들은 우리글이 훈민정음의 창제 이후에 성립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태반이며, 그러한 조건에서 말과 글의 원초적 구별이란 애당초 어려운 작업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불란서의 쟈끄 데리다는 인류 문화 속에 은연중 배어 있는 말로서 중심주의를 비판한 바 있으며 그에 따라 이차적인 문화 형태로서만 기능하고 있는 글 양식의 존재론적 복권을 주장하기도 하였던 바, 이러한 각도에서 보면 역사상 훨씬 후대에 와서야 성립하게 된 문자 언어 형태의 현재의 문학이 오늘날 문학의 전방위 개념으로 인지되며, 그러면서도 문화적 전력 관계에 있어서는 점차 사람 사는 사회의 변방으로 내몰리는 양상을 내보이고 있음은 음미할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동양 사회에서는 오히려 글 문화 우위의 문화 전통이 오랫동안 지배해 왔었기 때문에 위의 사실은 더욱 더 아이러니컬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사실인데, 이 문제를 데리다는 글의 원초적인 선재성 주장으로 해소하려고 하고 있어 이채롭다. 요컨대 기표로서의 말보다는 기의 즉 의미로서의 문자의 형태가 선재했었다고 하는 것이 그의 주장의 요체인 셈이다.1)
  그러나 괜히 이러한 차원의 문제를 섣불리 제기했다가는 큰코 다치기 십상이다. 우선 말과 글의 구별 문제를 인식시켜야 하는 것인데, 엉뚱하게 말과 글의 권력 관계 문제를 제기하게 됐으니, 학생들은 급기야 웅성거리는 모습조차 보여줄 수도 있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을 뿐더러 납득하기조차 어려운 논지로 우리를 혼란시키고 있다고 학생들은 항의할 것이다. 그래서 처음의 명제로 되돌아온다. 문학은 말 혹은 글로 이루어진 어떤 것이며, 그것은 언어라는 근본적인 매재의 성격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우선 쉽게 말이 글로 다시 치환될 수 있다 함을 환기시켜 줄 필요가 있으며, 글은 말로 치환된다 함을 또한 깨우쳐 줄 필요가 있다. 말 또는 글은 원칙적으로 소통의 수단이다. 그러므로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문학을 한다. 즉 문학 역시 근원적으로는 소통의 욕망인 것이다. 무엇인가를 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문학을 하며, 따라서 문학 역시 근원적으로는 정치적 욕망의 일종이다. 정보 전달과 함께, 관계를 조정하며, 궁극적으로는 상대를,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는 욕망이 거기에는 개재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카프카의 경우와 같이 자기가 창조한 문학을 애써 매장하려 한 보기가 문학사상 없지도 않았던 것이긴 하나, 그러나 이와 같은 경우는 극히 예의적이다. 요컨대 문학은 본질적으로 소통의 욕망이며, 이 소통 관계를 전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텍스트(Text)를 운위할 수 있다. 담화의 일편 단위로서의 텍스트와 보편적인 의미 단위로서의 담론 즉 디스코스(Discourse) 개념을 상정하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설명은 조금 낯설기는 하나 대체로 이해될 수 있을 터이며, 학생들에게 조금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해 줄 수도 있다. 문학을 일반적인 것으로 설명하면서 지금까지는 들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용어, 개념들이 추가되고 있어서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로 이룩된 모든 담론, 모든 텍스트는 또한 문학인가? 여기서부터 문제가 어려워진다. 누구라도 대답할 수 있듯이 글로 쓰여진 모든 것들이 문학으로 인정되지는 않은 현실 속에서 문학적인 담론과 문학이 아닌 담론, 문학적인 텍스트와 비문학적인 텍스트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차이를 규명하기 위해 로만 야콥슨은 그 유명한 ‘문학성’ 개념을 내세웠거니와,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이 문학성 개념에 의지하여 문학과 비문학을 구분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노릇이다2) 문학이 가진 특유한 담론적 성격을 규명해 보기 위한, 방대한 인적 구성의 학술회의에서, 결국 전화번호부가 문학이 아닌 이유를 명쾌하게 해명하지 못하고 말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져 오거니와, 앞서의 데리다는 한걸음 더 나아가 문학과 철학의 근본적인 분리란 거의 불가능하다함을 입증해 보이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문학이란 무엇인가. 결국 ‘말로 된 어떤 것’이라는 설명이 가당하다 하더라도, 요컨대 그 ‘어떤 것’의 해명이 지난한 논구 대상으로 여전히 남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이에 대한 해명의 시도가 전혀 부재했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시도가 있어 왔으며, 그중 어떤 것은 여전히 대단한 설득력을 발휘하고도 있다. 다만 절대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지적하면서 필자가 즐겨 꾸며내는 문학 개론의 서반 강의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학생들의 반응을 조정하면서 문학의 원론적 성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서 나는 우선 하나의 관점 채택하기를 시도하는 편이다.


2

  문학 이론사상 문학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정의 방법으로는 그것을 ‘예술’로 규정하는 방법이다. 즉 문학은 언어로 된 예술, 즉 언어 예술이다. 이 설명은 의외로 학생들이 쉽게 알아듣는다. 왜냐하면 학생들에게 예술이란 말은 매우 익숙한 낱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음악, 미술 등을 예로 들어 그것들이 각기 음률 혹은 선, 색채 등의 매재를 가지는 것에 비하여 문학은 ‘언어’라는 매재를 가진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라고 설명하면 대개는 쉽게 알아듣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친다고 하면 아마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시시하다고 생각하리라. 이 정도의 설명이야 고등학교에서도 귀가 아프게 들어왔을 터이며,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한발짝 더 나아간 질문을 던져 주어야 한다. 예술이 예술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요컨대 다시 한번 돌아가서 묻는다면 왜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구별이 발생하는가, 환언하면 왜 그것이 예술로서의 문학인, 고유한 이유를 갖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물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예술성을 묻는 방식인데, ‘문학성’의 개념 역시 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전제하고, 위 질문을 던지면 학생들은 대체로 딱 막히기 마련이다. 그 이상 더 나아가서 그들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내가 던지는 화두는 ‘낯설게 하기’라는 단어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최대의 이론적 성과물의 하나인 문학 언어의 특수성을 문제 삼는 방식, 이를 학생들에게 보다 구체적인 실감으로 주지시키기 위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시 작품 하나를 예로 들어 본다. 문학적인 맛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을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잡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占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의 시 ‘그날’ 전문------
  ‘낯설게 하기’란 말하자면 “일상적 언어가 간단해지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고 언어 행위가 습관적으로 자동화되고 있는 반면에 시적 언어는 단순해지기를 거부하고 언어 행위가 습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배격3)”하는 특성을 가졌다 함을 지시하는 것으로, 요컨대 예술이 예술일 수 있는 것은 단순한 미적 반복 재생산이 아니라, 끝없이 새로지려는 갱신의 노력에 의해서 획득되는 것임이 누누이 강조된다. 윗 시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예컨대 ‘낡은 다리’라는 표현을 대표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으로, 일상 언어에서라면 결코 꿈도 꿀 수 없는 이러한 표현이 탁월하게 읽히는 것은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  (·)(·)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사이에서 중첩되는 ‘떠난다’와 ‘간다’, ‘노닥거리다’의 이미지 연쇄가 ‘다리’의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환기시키며 , 동시에 그것이 어머니의 늙은 다리를 지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늙은’과 ‘낡은’의 교묘한 음운 대치가 뛰어난 시적 표현으로 읽히게 되는 것이다. 이 정도 설명하면 학생들은 대체로 감탄하기 마련이다. 더 나아가서 ‘노닥거렸다’ 에 이어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鸅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로 넘어가 노닥거림의 이미지 뒤에 역설적인 가짜 안녕함의 의미로 ‘前方은 무사했고’ 표현이 나오며, 그 무사한 세상의 지배 이데올로기적 호도의 표현으로 ‘세상은 완벽했다’가 나오면서 그것이 극단화된 역설적 표현 어법, ‘없는 것이 없었다’로, 없는 것이 없으므로 창녀까지 있어서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나중에 그처럼 창녀가 되어 역전을 서성거릴 어린 소녀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는 표정으로 그렇게 무심하게 그려지고 있다 함을 설명하면, 학생들은 대체로 감탄을 넘어서 짧은 신음조차 발하기도 하기 마련이다. 이런 언어적 표현 양상이 일상 언어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교묘한 이미지 연쇄의 방식으로 구성되고 있다 함을 쉽게 감득시킬 수 있는 셈이며, 여기서 더 나아가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는 아버지와 , 그럼에도 불구하고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감’ 으로써 세상을 즐기는 여동생, 부츠 신은 멋진 여자가 병치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 라는 즉 사람과 사랑 사이의 교묘한 음운 변이 효과를 노리면서, 그 사람의 현실적 부조리를 역설적으로 시사하기 위해 사랑하기 때문에 죽이는 인간 의지로 언표화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거두는, 이 시의 뛰어난 담론 운용 기술을 설명해 주면 학생들은 거의 입을 다물 줄 모르는 감탄의 표정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 시의 뛰어난 시적 자질은 물론 그 뿐만이 아니다. ‘그날 태연한 나무’라든지,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은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占 치는 노인 ’의 일련의 비극적 이미지의 병치, 그리고 ‘便桶의 다정함’이라는 풍자적 어조에 뒤이어 ‘그날 몇 건의 교통 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탄식이 이루어진 다음, 결정적으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역설적인   선언이 표현되면, 이 세상의 부패상이 과연 어느 정도인가를 통렬하게 고발하는 이 시의 시적 담론의 운용 솜씨가 가히 세계적인 수준의 것이라 일컬어 전혀 손색이 없다는 주장이 쉽게 납득되는 것이다.
  의도와는 다르게, 인용한 시의 시적 탁월성을 장황하게 설명해 놓은 꼴이 되고 말았지만, 내가 여기서 설명하고자 하는 바는, 요컨대 시적 담론의 미적 기저 구조를 뒷받침하는 예술적 언어로서의 특수성이 ‘낯설게 하기’라는 것에서 그 요체를 꼬집어 낼 수 있으며, 그것은 일상 언어가 지향하는 담론의 단순성과 관습성을 깨뜨리고 새로운 담론성을 추구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라 함이 이해될 필요가 있다. ‘늙은 다리’가 아니고, ‘낡은 다리’라고 하는 표현이 윗 시에서 그 극명한 실례를 제공하고 있다고 강조했거니와, 이와 같은 새로움의 표현 추구가 단지 형태론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통사론적, 담론적 차원에서 이루어짐으로써, 그것은 궁극적으로 시 ‘그날’이 가지는 한 편의 산문시로서의 문학적 , 형식적 틀의 특성, 즉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뛰어난 산문적 리듬 속에 숨가쁘게 조작해 냄으로써 한 편의 시로 통일시켜 내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문학 분석에 일반적인 단위 개념으로서의 담론 개념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함을 우리는 또한 여기에서 확인받을 수 있거니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를 기축으로 한 이 시의 시 문장 전체가 하나의 담론으로서, 이를테면 산업 사회적, 일상적 삶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고발하는 의미체로서의 시적 담론의 질서를 뛰어나게 구축하고 있다 함을 환기시켜 줄 필요가 있다.
  ‘낯설게 하기’의 개념을 축으로 한, 이러한 시적 언어의 특색 설명은 그러나 학생들을 전적으로 충분하게   만족시켜 주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러한 특징적인 시적 언어의 담론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언어 자체가 근본적으로 일상적 언어와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즉 시적 담론의 언어 역시 근본적으로는 일상적 언어를 재료로 하여 가공되는 것일 터이며- 더구나 그러한 시적 언어의 특질을 아무리 자세히 규명한다고 해본댔자 그것이 위대한, 훌륭한 시를 보증해 주지는 못하리라고 하는 점이 그들에게는 이미 어떤 선입견으로 확신되고 있는 터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현실적 관련성 아래서 시와 문학의 위대성이 발원한다고 믿고 있는 셈이며, 따라서 그들이 집착하는 것은 언제나 현실적 의미 관련성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의 이론 자체가 벽에 부딪힌 지점이 바로 이 지점, 즉 일상 언어와 시적 언어의 구분의 한계 지점, 그리고 문학과 현실, 언어와 현실 사이의 폭넓은 단절의 지점이었거니와, 이 지점에서 러시아 형식주의와 대표적으로 부딪힌 이론이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이론이었음은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마르크스주의는 형식주의와 어떻게 다르게 문학을 바라보는가. 이의 이론적 관심, 태도에서 표나게 드러나는 점은 이제,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질문 방식이 아니라, 문학이란 사회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 즉 글쓰기의 실천적 성격에 관한 문제로 주요 관심사가 대두하게 되며, 그때 주요 의제가 되는 것은 문학에 관한 일종의 윤리학, 혹은 전략에 관한 문제가 되는 셈이다.


3

  학생들을 향한 강의의 편의의 이유에서라면 이 경우에도 한 편의 시편 정도를 예화로 들어 두는 것이 좋다. 80년대 시사의 한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다음 노동시가 일응 적당하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 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박노해, ‘노동의 새벽’ 전문---
  언어적으로 썩 뛰어난 조탁 솜씨를 보여 준다고는 할 수 없는, 이 시가 그러나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이유는 명백하다. 노동자 계급의 삶과 의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노동자 시인에 의해서 쓰여진 이 시가 일거에 ‘노동가 계급 세계관의 반영물’이라는 것으로 격상되는 것은 아무래도 논리적 비약의 혐의가 짙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쨌든 그것이 획기적으로 노동자의 현실을 문학 양심 속에 담아내고 있고, 앞으로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 위상이 갈수록 점고되리라는(혹은 그래야 한다는) 예단 하에서 이 시의 비평적 가치 재단의 수준은 일거에 위대한 시의 수준으로 격상되기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비평적 가치 평가의 논의 전개에서 특징적인 점은 그 글쓰기의 지향점이 작품에 대한 치밀한 내재적 분석으로 항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바깥, 즉 현실의 징후 살피기, 혹은 어떤 이데올로기에의 몸담음을 집중적으로 문제삼은 태도를 볼 수 있는데, 이 경우 전제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전체로서의 사회, 그리고 역사 범주를 가정하는, 흑종의 사회 이론, 역사 이론의 틀인 것이며, 그런 거시적인 틀 아래서 문학이란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반영물로 간주된다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하면, 주지하다시피 하나의 사회 구성체로서의 사회 단위는 경제적 토대 구성으로서는 하부 구조를 우선 가지며, 그 토대의 생산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상부 구조들, 정치라든가, 이데올기, 문화, 예술 등이 모두가 일종의 토대 방영적 성격이라는 규정성 아래서만 자율성을 지닌다고 입론되는 바, 문학 역시 이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게, 일종의 상부 구조적 이데올로기 반영물로서의 사회적, 문화적 기능을 가지며, 그 때문에 본질적인 것은 토대의 생산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지, 문화, 예술 따위 한가한 호사 취미에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함이 이런 맥락에서 강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이런 쪽의 이론적 전제로부터 끊임없이 문학 실천의 구체적인 전략을 강조하게 되는가.
  역설적이지만 이런 쪽의 이론적 관심으로부터 오히려 문학 기능은 상대적으로 더 강조되는 현상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은 언어 자체의 직접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쪽의 이론적 맥락에서 ‘언어가 상부 구조인가, 하부 구조인가’하는 유명한 논쟁이 제기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다른 어떤 사회적 기능 수단에 비해서도 직접적이고, 전파력이 강한 언어이기에 그것에 의지하여, 그리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가공하며, 어떤 실천적 효과를 노리고자 하는 태도는, 이 부류의 이론 분자라면 최초의 마르크스에서부터 그리고 현재 활동하는 거의 대부분의 진보 표방의 문학 비평가에 이르기까지 별반 다름없이 일반적으로 견지되는 태도의 하나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문화 이론에 끼친 최대의 이론적 공적으로 간주되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에 의지하여 보더라도, 이데올로기 투쟁의 사회적 장을 이루는 문화적 투쟁의 영역에 있어서 의식 형성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문학 영역에서의 헤게모니 투쟁은 다른 어떤 투쟁에 비해서도 중시되는 바, 그것은 문학 행위 자체가 거룩해서라기보다 문학이 가지는 사회적 파급력의 기능성을 중시한 데서 귀결되는 태도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른바 미래 전망을 향해 나아가는 ‘운동 문학’의 경우, 대체로 융성하는 쪽은 오히려 시 또는 소설의 창작쪽이라기보다 비평쪽임을 우리는 또한 관찰할 수 있다. 이 경우 문학 비평 역시 일종의 문학 행위로서의 한 양식임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그럴 경우 문학 개념은 더욱 더 혼란스러워져만 갈 뿐임을 우리는 또한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하기 이전부터도 루카치는 소설을 반예술로 규정하고, 비평은 예술과 과학의 조합물로 갈파함으로써, 그 강한 현실 지향성을 드러내 보인 바 있거니와, 언어와 현실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어떤 특정한 부류의 글쓰기만을 문학으로 인정할 것이냐, 아니면 또 어떤 글쓰기만을 진정으로 가치 있는 글쓰기로 인정할 것이냐의 문제는 쉽게 일도양단 식으로 처리될 문제가 아니라 함이 이런 문맥으로부터 자명하게 도출된다.
  결국 문학과 현실과의 관계 문제로 치환될 수 있는 이러한 문제 범위는 문학 현상 내부에 끊임없이 긴장의 파고를 드높인다. 문학이 현실 변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는 하지만, 보다 근원 범주로서의 현실 변화가 문학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은 말할 나위 없이 크기 마련이어서, 역사적 현실 변화가 문학의 변화, 즉 문학사에 끼치는 영향은 문학의 개념 자체를 뒤바꿀 정도로 심대하게 그 영향의 흔적을 드리우는 셈이다. 80년대에 문학 개념의 변화가 어느 정도 현저하게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만큼 그 기간 동안 이루어진 현실 변화가 거대한 것이었음을 뜻하는 것이거니와, 이 사실은 적어도 약 100년 안쪽에서 우리 문학사에 일어난 결정적인 변화, 즉 고대 문학과 근대 문학의 분기 현상을 규명해 보면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과거 한국의 전통 장르들은 대부분 소멸 또는 위축되었던 셈이며, 서구적 근대시, 근대 소설, 근대 희곡, 근대 문예 비평 등만이 살아남아 오늘날 문학 개념을 형성하는 주도 양식 혹은 전방위 양식으로 부상, 지반을 구축하고 있음은 역으로 그 사이에 일어난 근대적 사회 변화 자체가 그만큼 격렬한 것이었고 곧 서구화를 뜻하는 것이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것이다. 이에 문학 개념 역시 근본적으로 뒤바뀌어 온 셈이다. 결국 문학 역시 자체로만 논해질 수는 없고, 현실이라는 포괄적 대상 범주와의 상관관계 아래서만 논해질 수 있음이 여기서 시사되고 있으며, 그 변화를 지칭하는 일반 범주, 혹은 일반 개념으로서의 역사라는 것을 매개시켜 생각해 보면 문학 역시 결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유동하는 것이라 함을 확연하게 명제화할 수 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물음 역시 이러한 문맥에서 보면 정태적인 것으로서의 명제화가 아니라, 문학 개념 자체가 끊임없이 유동한다는 것을 전제함으로써 요컨대, ‘문학은 역사적인 것이다’라고 하는 명제가 무엇보다 강조되면서 문학에 대한 그 이해의 폭이 넓어져야 할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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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을 두고, 우리는 여기까지 생각해 온 셈이거니와, 문학에 임하는 태도의 상이함을 두고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되는, 즉 형식주의, 미학주의, 객관주의, 언어학주의적인 태도와, 편내용주의, 사회학주의, 이념지상주의, 현실주의 등으로 지침될 수 있는 태도 사이의 대척점을 서로 한 편의 시 예화를 들어가면서 설명해 보았다. 오늘날 우리 시대 문학관의 진동하는 모습은 바로 이처럼 대립되는 두 태도 사이의 다양한 평형 지점으로부터 연유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며, 대학 강의 역시 이 현실의 자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학생들 역시 이 둘 사이의 대립적인 문학관의 자장 속에서 때로는 판단을 유보하며, 또 때로는 적극적으로 편을 들기도 하면서 그 둘 사이의 관계 조정을 위하여 애쓰는 모습을 보여 주며, 그렇게 하여 그 둘 사이의 대립이 결정적인 차이로 인식되기도 하는가 하면, 이 둘 사이의 대립이 상호 중재됨으로써, 한편으로는 현실 지향적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미적 객관화의 노력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그러한 중립적 태도가 대세를 이뤄나갈 수도 있다. 물론 그 사이에 정태적인 태도 조정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 현실 변화에 의한 문학 자체의 전체적인 성격 변화, 즉 요컨대 산업, 정보 사회화에 의한 문학 유통의 전반적인 신호 체계(code)화 경향은 또 한편으로 기존의 문학성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면서 새로운 문학을 탄생시킬지도 모른다. 문학이, 그리고 문학 개념이 역사적이라고 하는 이유가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주어지거니와, 흔히 인류 문명의 제4단계로 접어들었다고 운위되는 현 시기의 문명 변화 이후에 기왕의 문학 개념이 어떻게 재수정을 거칠지는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문학 이론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여러 이론들의 경향은 앞서와 같이 두 가지로만 대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전자의 태도, 경향을 20세기에 들어서서 나타난 몇몇 이론적 태도의 공통 분모로 인지하여 ‘객관적 존재론’의 명명을 부여할 수 있다면 , 후자의 태도는 오히려 고대 문학의 발생 이후에 끊임없이 모양을 바꿔 가면서 여러 가지로 존재해 왔던 모방론, 반영론, 리엄리즘론 등의 태도 경향을 뜻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 밖에 문학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답을 주고자 해 왔던, 혹은 문학 형성의 기능적 관계 요소를 문제삼는 주요 문예 이론으로서는 주지하다시피 표현론의 입장과 효용론의 입장이 대립해 왔다. 표현론이란 말하자면 문학을 창조 주체의 주체성의 소산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예컨대 시는 ‘시인의 사상, 감정의 자연스런 유로’라고 본다든지 , 천재적인 영감의 소산으로 파악하여, 현실 초월의 낭만주의적인 심의 경향을 강조해 왔다든지 하는 것 등은 자본주의 성립 이후 근대의 전형적인 문예관의 일종으로서 표현론적 입장을 개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효용론적 입장 역시 표현론적 입장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성을 가지고,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계몽과 흥미의 이중성으로써 독자에 호소하는 것, 따라서 ‘문학 당의정설’ 혹은 재도지기(載道之器)론이야말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최고의 실천적 문학 덕목이라고 파악되는데, 이런 식의 입론 방식은 기본적으로 효용론과 관련된 문학관을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중 모든 태도가   다 옳은 것으로 인정해야 된다는 뜻은 아니겠으나, 문학을 이루는 제 관계 요소들의 상호 작용으로 보다 합당한 문예학적 입장이 찾아질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결국 문학의 역사적 변이를 주도해 온 주체적 측면의 변혁요인이 발생했다고 보면 문학을 결코 어느 일방적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일이 온당한 일일 수만은 없는 것임이 분명해진다고 하겠다.
  여기까지 설명하면 학생들은 대체로 수긍하고 동의한다. 장황하게 쳐들어 보이지 않더라도 언어체로서의 ‘작품’과, 그 작품이 그려 내고, 묘사해 내는, 즉 말하고자 하는 ‘현실’적 대상이 있으며, 또 그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와, 그것을 읽어 주는 ‘자’가 있다는 것이 네 가지 관계 요소는 누가 들어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고려 사항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M.H에 에이브럼즈가 ‘거울’과 ‘램프’라는 이미지로 위 반영론, 표현론 등의 이론적 입장을 탁월하게 설명해 낸 이후로 위의 설명 방식은 거의 대부분의 문학 개론서들이 채용하고 있는 문학 원론의 보편적 설명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거니와,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여기에 두 가지 정도의 요소를 추가하거나 요소를 변형시킴으로써 또 하나의 모델을 창출해 낸 로만·야콥슨의 언어학적 기능 모델의 설명 도식도 나로서는 매우 유력하다고 생각한다. 즉 주지하다시피 야콥슨은 언어 전달 행위를 이루는 구성 요소들을 발신자(Addresser), 수신자(Addressee), 전언(Message), 관련 상황(context), 접촉(contact), 신호 체제(code) 등 6가지로 설정하고, 이의 각 요소들 한 가지 측면에 집중하여 수행되는 기능들을 감정 표시 기능, 능동적 기능, 시적 기능, 지시 기능, 친교 기능, 메타언어적 기능 등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4) 있음을 볼 수 있는 바, 이렇게 볼 경우 문학적, 시적 기능이란 메시지 자체에 충실한 전달 기능 방식이라고 말하여지기도 하나 보다 일반적으로는 보편적인 소통 상황과 마찬가지로 문학 역시 그 소통 상황의 내부에서는 위 6가지 기능 요소가 모두 다 작용한다고 보고, 그중 어떤 요소, 어떤 기능이 치중된 문학 형식, 문학관이 특별히 존재한다고 볼 때, 모름지기 문학 원론을 가르치는 입장에서라면, 이 모든 측면들을 세심히 고려하는 입장에서 논의를 해 나가는 것이 마땅한 것이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위 에이브럼즈의 설명 모델에 비하면, 야콥슨의 설명 모델에서는 관련 상황(context), 접촉(contact), 신호 체계(code) 등의 개념이 생소하여 학생들에게는 상당히 어렵게 느껴지는 편인데, 관련 상황(context)이란 대체로 기왕의 문학 논의에서의 ‘현실’ 개념에 준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면 되겠고, 여기에 덧붙이자면 작품들 사이의 관계 즉 텍스트 관계(intertertextuality) 개념이 부가, 관련되는 정도일 것이며, 신호 체계(code)란 곧 일반 언어 소통 상황에서의 ‘문법’과 같은 것이니, 문학적 국면에서는 문예 비평 양식이 주로 수행하는 사회적 매개 소통 기능으로 대치시켜 설명하면 대개 이해가 가리라고 본다. 문제는 접촉의 개념인 것인데, 나는 이것을 우선 대학 강의에서의 수업의 공간 같은 것으로 설명하고, 그 밖의 소통 양식으로 전화 통화나, 편지, 일기 등이 가지는 고유한 접촉 상황을 예로서 환기시킴으로써 이해시키곤 한다. 아마 대부분의 학생들은 야콥슨의 이런 설명 도식을 들이대면 우선 생소한 느낌에 얼떨떨해 하겠지만, 문학이 무엇보다 언어에 대한 고려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보면 보편적인 설명 모델로서의 언어학적 모델을 먼저 이해시키고, 그러한 관련 문맥 아래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 방식을 이해시킨다면 기왕의 문학 개론식 설명 방식보다는 더욱 폭넓고 세련된 설명이 가능하리라고도 본다. 문제는 학생들이 아직 언어학적 설명 모델에 익숙해 있지 않은 실정이기 때문에 강의 현장에서 함부로 들이댈 수가 없다는 점이겠는데,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중 ·고등학교 과정에서부터 일찍 학생들에게 언어학적 설명 모델을 대강이나마 이해시키는 작업이 긴요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이데올로기 재생산 기능에 주력되어 왔던 중·고등학교 국어 교육의 내용을 개편하면서 앞으로는 언어 자체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의도에서 언어학적, 소통 이론적 설명도식을 일찍이 눈에 익히도록 한다면, 그것은 전체적으로 국어 교육의 합리화를 꾀하는 것이면서 한편으론 문학 교육의 질적 개선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합리성의 개념을 동원하여 말해 본다면, 문학 형성의 근본적인 추동력 역시 합리성의 일종, 즉 미적 합리성의 일종인 것으로 이해되며, 그 합리성의 계발은 무엇보다 언어적 합리성을 증진시키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할 때, 국어 교육에 있어 언어학 이론의 습용 획득 문제는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긴요한 과제로서 동의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