作家와 言語
黃涀江/단국대 교수•국문학
Ⅰ. 藝術과 語法
문학은 구비 시대(口碑 時代), 사본 시대(寫本 時代), 인쇄 시대(印刷 時代)를 통하여 일관되게 언어를 수단으로 한 표현임을 의심할 수 없다. 문학가(작가)는 바로 그와 같은 언어를 미디어로 하여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이며, 문학 작품은 바로 그와 같은 예술가에 의하여 예술적으로 조직된 언어 예술이다. 언어를 예술적으로 조직한다는 것은 언어의 일상적 사용 이상의, 특수한 어법에 의존함을 의미한다. 미술 작품이 조형(造形)과 색채를 미디어로 하면서도 단순한 도장공(塗裝工)과 다른, 그 나름의 특수한 기법을 가지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음성을 미디어로 하는 음악 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역시 음성을 다루는 특수한 예술화(藝術化)의 기법이 요청된다 하겠다. 따라서 예술가는 작품의 사상성이나 주제와 내용 이상으로 그것을 예술화하는 어법과 기법에 능통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예술가가 습득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어법’이나 ‘기법’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일반화하여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실 ‘어법’이나 ‘기법’은 예술가의 가장 개성적인 분야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예술가를 구별하고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은 예술가 각 개인의 작품상의 기법이나 어법의 특성에 있지 않는가 한다. 예술가의 개성과 독창성은 기법이나 어법에서 보다 비중있게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법이나 기법상의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어법(또는 기법)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원칙론은 엄연히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예술 작품이 수단으로 삼는 미디어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어법의 문제는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미술 작품(회화)의 경우 미디어의 성격상 시각에 호소하는 예술일 수밖에 없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편 문학의 경우 본질상 어쩔 수 없이 시각으로 전달할 수밖에 없는 문자 언어라는 미디어로 하여 시각적 전달을 한다는 점에서 미술과 같다고 하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달 방식은 전혀 다르다. ‘회화’는 비록 시각적 전달을 하지만 그 전달의 방식이 전체적이요, 동시적이다. ‘그림’ 앞에 선 감상자는 그림의 부분을 어떤 순서에 따라 수용함으로써 전체상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림 앞에 서는 순간 그림 전체가 그의 시야에 들어옴으로써 그는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에 관계없이 작가가 형상화한 전체상을 동시에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 작품은 어떤가? 문학 작품(소설)의 경우는 결코 그림처럼 한눈에 다 들어오지는 않는다. 문자라는 기호로 이루어진 단어 하나하나를 작가가 이미 순서 지어 준 차례대로 시각적으로 수용하는데, 전체상을 파악하게 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표면적으로 볼 때 문장은 어떠한 것을 물론하고 선형적 서열(linear order)로 된 형태소의 줄(string)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을 ‘읽어 가는 행위’는 시간 차원에서의 , 선상(線狀)의 끊임없는 음성의 흐름으로 이루어지며, 이 음성의 선형적(線形的) 흐름은 음운 요소의 선형적 연속을 반영하고 있으면서 나아가 통사론적 표면 구조상 형태소의 선형적 연속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통사 부문의 심층 구조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문학 작품을 읽어 가는 독자의 경우도 위와 같은 선형적 흐름을 반복한다. 우선 시각을 통해 들어오는 선상의 음운과 단어(형태소) 하나하나를 작가가 깔아 놓은 논리에 따라 자기 내면에 구축해 감과 동시에 작가와의 내밀한 대화를 통해 작품의 세계에 참여하여 이를 재구성한다. 외면적 기호를 작가의 논리에 따라 구축해 가는 과정은 회화에서보다는 차라리 음악 작품에서 문학과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음악의 경우는 문자나 단어와 같은, 의미 변별 기능을 가진 분절음의 기호를 미디어로 쓰는 문학과는 달리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는 ‘음성’들을 유기적으로 편성하여 상징화함으로써 정감적 이미지를 재현하게 한다. 전달 메카니즘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미디어는 시각적이요, 음악은 청각적이다. 그러나, 문학의 전달을 엄격히 따져 볼 때 표면적인 시각적 전달과는 달리 내면적으로는 청각적 전달도 하고 있다고 하겠다. 인간의 오랜 역사적 전망에서 볼 때 문자는 극히 새로운 발명이라 하겠고, 문자의 길지 않은 역사를 통해서 볼 때 그것은 거의 언제나 구어(口語)로 존재하는 언어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고, 또 그렇게 사용되어 온 것으로, 그 자체 결코 새로운 종류의 언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문장성에 앞서 음성 언어로서의 속성이 본질적이라 하겠다. 특히 시 작품의 경우 음성적 전달의 전형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시어는 그 자체의 사전적 의미 이상의 이미지를 음성 상징을 통해 실현되고 있을 때가 많다. 문학의 언어는 또 미술의 미디어가 가지는 것과 같은 조형성을 지니는 다른 면도 인정된다. 흔치 않는 경우라고는 하나 순전히 외형적인 시각적 조형 효과를 통해 시적 이미지를 전하려고 하는 문학 작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어떤 시인의 ‘오리’를 읊은 시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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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의심할 바 없는, 회화와 같은 전체적 동시적 전달을 하고 있다. 위와 같은 극단적 사례가 아니더라도 시인은 흔히 ‘시의 회화화’라는 유혹에 빠져 대상에 대한 회화적 표현이나 조형적 외형화를 즐겨 취할 때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문학의 언어 자체 조형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도 생각된다. 균여의 노래에서 ‘마음의 붓(心筆)’이라고 한 데서 ‘마음’이 ‘붓’으로 조형 기호화 (造形 記號化)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마음’과 ‘붓’이 다음에 오는 ‘그리는 부처’와 매우 역동적인 결합 관계를 이루고 있다. 즉 ‘마음으로 그리는 것(慕)’ 과 ‘붓으로 그리는 것(畵)’ 이 유기적 통합을 보이고 있는 바 이는 ‘붓’이라는 조형 기호와 관련된 형상화의 효과라고 하겠다. 전통적 문학 이론에서는 문학 작품의 특색을 형상화에 두고 있는 바 ‘형상’이란 작품을 읽어 감에 따라 독자가 그 내용을 그림처럼 머릿속에 그려 가게 되는데, 독파함과 동시에 한 폭의 그림이 머릿속에 완성된다. 그럼으로써 당초 수많은 기호로 된 하나의 작품(문학)이 단일한 기호로 되어 있었던 하나의 작품(그림)으로 전환되었다고 하겠다. 그 까닭인 즉 한 폭의 그림은 언어로 된 작품과는 달리 분절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하나의 기호로 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폈듯이 문학의 미디어로서의 언어는 그 메카니즘에 있어서 매우 폭넓은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문학에 고유한 것 외에도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다른 예술 분야의 미디어의 가능성마저 자기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
문학은 청각에 호소하는 음악적 성절을 가지고 있음은 앞에서 본 바와 같으나, 정작 청각 예술로서 시간의 상상적 인식 면에서는 문학이 음악보다 월등 철저하다. 그리고 문학은 최소한 ‘마음의 눈’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조형 예술적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시각(視覺)과 공간 세계에 전념하기는 문학보다는 조형 예술 특히 회화 쪽이 월등히 철저하다. 아이스토텔레스가 말한 시의 여섯 요소 가운데 melos, lexis, opsis는 이 문제를 논의하는 데 매우 시사적이다. 언어 구조인 문학에서의 렉시스 lexis (言辭)는 두 가지 요소를 결합하고 있다. 음악에 친근한 멜로스(旋律)와 조형 예술에 친근한 옵시스 opses (映像)이다. ‘렉시스’를 청각이 포착한 음성의 서술적 계열이라 생각한다면 렉시스란 말은 딕션 diction (語法)이라 할 수 있겠고, 어떤 하나의 정신적 ‘비전’으로 파악된, 공시적(共時的) 의미의 패턴이라 생각한다면 이미지 image라 할 수 있겠다.
Ⅱ. 時의 語法
시(時:poesy)는 인류의 모어(母語)라고 한다. 언어와 문예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며, 모든 언어 표현은 그 자체 상상력에 의하여 육성, 조작되는 창작물이다. 그러나, 언어 표현은 일상생활에서 특정한 목적에 봉사하고, 언어는 ‘현실성’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언어의 모든 관용(慣用)에는 언제나 개인적인 ‘취미’라는 미학적 인자가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어의 관용상 변화나 차이는 모두 상상력과 취미와 관련하여 생각할 성질의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런 전제 아래에서는 시인이야말로 가장 순정한 <언어 표출자라고 하겠으며, 언어는 시인의 손에 들어옴으로써 가장 순수한 <표출을 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한때는 시인의 개인적 언어 체계를 바로 그 시인의 개성의 표출로 이해하려는 견해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른바 문체(stil)는 ‘국어’의 현상으로 개성적인 것 , 어떤 인간, 어떤 시대 등등에 고유한 것이라는 인식과 함께 무엇인가 서로 일치하고 있다는 인식이 또 이에 대응하고 있다. 문체란 그 자체 ‘표출’이며 그 특징은 내면적인 것의 표출이라는 데 있다. 표출되는 내면적인 것은 다름 아닌 심적(心的)인 것이다. 문체에 대하여 기본적 의의를 지니는 ‘표출’이란 그 자체 다의적(多義的)이다. 문체는 자아의 영역에 속한 대상적인 것에 나타난 개인적 특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표출되는 것에 의하여 규정되는 경우도 있다. 문체에서 외면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며, 양자가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표출이란 표출되는 것, 곧 내면적인 것의 외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체의 개성(個性)을 말하는 논자는 실제로 많은 시인들이 자기 시대의 지배적 시학이나 문체론에 얽매여 순수히 개성적인 문체로 작품을 쓰지 못하는 사실에 눈감고 있다. 이미 선택한 장르 자체 작가에게는 하나의 구속이 되고 있듯이 당대에 지배적인 문체 규범, 독자들의 취향, 알려진 훌륭한 범례, 세대, 시대 등의 성격 등은 창조적인 시인에게 작용하여 그의 마음을 붙잡아 더러는 그를 지배하고, 더러는 그를 억압한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의 개인 문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적 문체’라는 개념 자체 결함이 있음은 명백하다. 이와 관련하여 ‘창작 행위에 시인의 전 개성이 관여한다’는 생각도 문제된다. 만약에 김소월이 그의 전성기에 쓴 시 한 편이 공교롭게도 작자 불명의 작품으로 전한다고 가정할 때 과연 그 시에서 제작에 관여한 시인의 전 개성을 추출하여 그 시의 작자가 ‘김소월’이라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을까? 그것을 밝혀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 다음으로 ‘개성만이 창작 행위에 관여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다. 고도의 작가 의식을 가진 참다운 예술가라 할지라도 창작 행위에서는 그 자신의 개성적 자아와는 무연한 힘의 관여를 용납하지 않을 수 없다. ‘개성적 자아와는 무연한 힘’이란 앞에서 말한 시대 , 독자, 문체 규범 등등과 같은 초개인적인 제약 요인을 가리켜 말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이와 같은 ‘힘’들도 창작 행위에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은 상당 수준으로 그 영향력을 줄일 수 있거나, 그 힘의 정도를 어림잡을 수 있다.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창작 행위에 관여하는, 시인의 마음속에 충만해 있는 뮤즈, 혹은 천재적인 신인들 이 곧잘 말하는 ‘영감’ 같은 것이다. 얼핏 허황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예술가의 창작 행위에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정체 불명의 것’이 작가를 충동하여 작품을 쓰게 한 경우의 체험담에 접하면서 개성적 자아와는 무연한 힘이 시인의 창작 행위에 관여하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적 개성’과 ‘창조적 예술적 개성’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시인의 언어와 관련하여 우리는 ‘시적 개성’을 ‘인간적 개성’과 동일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I.A 리쳐즈는 언어의 두 가지 용법- ‘지시적 용법’과 ‘정서적 용법’을 말한 바 있는데, 시에서 시인이 쓰는 언어는 정서적 용법에 속한다고 하겠다. 가령 시인이 자기 시에서 ‘내 마음은 호수요... ’라고 했을 때 그는 실제로 자기의 마음이 호수임을 진술하려고 했다고 할 수는 없다. 시의 언어는 정확한 지시보다는 그렇게 표현함으로써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결코 단순한 사실의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를 ‘환정적(喚情的)’ 으로 쓰는 시에 있어서 ‘진실’이란 실증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 그와 같은 정서적 언어가 우리들의 감정이나 태도에 미치는 영향에 의하여 그 언어를 ‘진실’로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현실에서의 갖가지 충동을 절단하거나, 절제하게 되는데, 시인은 그와 같은 억압을 하는 대신 정서어(情緖語) 구사를 통해 모순, 갈등하는 충동들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한다. 훌륭한 작품이란 대개 시인이 실현한 위와 같은 충동 체계화의 훌륭한 기록이며, 그것을 보존하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그와 같은 체계화를 작품으로부터 수신하는 것이다.
‘시’를 읽는 행위는 인쇄된 문자에 의하여 눈의 망막에 주어진 자극이
- ‘시각’→‘발음 이미지·청각 이미지’→‘시각 이미지’→‘지시’→‘정서’→‘태도’
위와 같은 경로로 전달되어 가는 심리적 과정을 밟으므로 시의 ‘의미’는 언어의 음감, 이미지, 지시, 감정, ‘태도’ 등을 중층적(重層的)으로 분석함으로써 구명될 수 있다고 하겠다. 시의 ‘의미’라고 해도 그것은 전달의 여러 층위로 하여 단순하지가 않다.
시에서 한 단어가 가질 수 있는 몇 가지 의미는 비록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는 하나 그것이 시의 의미를 ‘애매’하게는 만들고 있다. 그러나, 시어가 갖는 ‘애매’는 흔히 ‘애매’라는 말에서 연상하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시의 미적인 본질로 인식되고 있다. 시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독특한 미감, 흥미, 충족함 등등 환정 기능(喚情 機能)은 전적으로 그 언어가 가지는 본질적 ‘애매’에서 유래하고 있다. 시어의 중층적이며 다양성 있는 의미와 암시 등은 시어의 ‘애매성’과 직접 관련된다. W.Empson은 ‘시의 원천에는 애매라는 장치가 숨어있다’고 하였다. Empson이 말하는 ‘애매(ambiguity)’는 일상어의 ‘ambiguity’와는 다르다. 그는 시의 의미의 애매성을 분석하여 일곱 타입으로 분류하였는데, ‘애매’라는 의미 복합이 서로 다른 구조적 대응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밝혀냈던 것이다. 시에서의 ‘애매성’의 일곱 타입을 요약해 보이면 아래와 같다.
- (1) 단어 또는 구문(構文)이 동시에 몇 가지 방법으로 효과를 갖는 경우
- (2) 둘 혹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작자가 의도하는 하나의 의미를 이루는 경우
- (3) 명백히 관련 없는 두 의미가 하나의 말(pun) 안에 동시에 주어지는 경우
- (4) 서로 다른 몇 개 의미가 결합하여 작자의 복잡한 심리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경우
- (5) 하나의 이미지나 비유가 두 관념의 중간에 오는 경우
- (6) 말하고 있는 내용에 모순이 있어 독자가 해석해야 하는 경우
- (7) 두 의미 간에 모순이 있어 작자 심중의 기본적 분열을 나타내고 있는 경우
위의 일곱 타입의 ‘애매’는 시어의 체계적인 어떤 성격을 암시해 주는 바, 작품 ‘독법’에 계기적 (契機的) 사실이 된다. 이는 작가의 이념이나 감정과 긴밀히 복합되어 있다. 그렇다고, 작품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그 어떠한 의식(意識)도 배제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애매의 요인으로서 순간적인 정황보다는 둘 혹은 그 이상의 이질적 문화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사실 시의 ‘애매’를 만들어 내고 있는 시외적 (詩外的) 요소로서 문화적 배경, 장르의 역사, 종교나 정서적 전통 등등은 시(혹은 문학)의 언어와 음양의 교섭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이미 작품 속에, 작품의 언어 표현 속에 용해되어 들어가 있다. 언어란 그것이 속한 문화라는 큰 유기체의 살아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문학 작품은 그 내적 구조로 말미암아 이해됨과 동시에 작품을 둘러싼 문화의 구조적 부분으로서도 이해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일부 시인에 의하여 ‘시어’의 폐지와 ‘민중어’의 채용이라는 변혁이 시도되고 있는 바, 이는 문학계(文學界)라는 소사회(小社會)의 언어-소언어(小言語)를 광범한 민중의 언어-대언어(代言語)로 돌이키려는 문화적 지향으로 이해된다. 작품은 우리들의 내부 충동의 체계화 및 그것의 포괄적인 크기로 말미암아 의미 지워지는 바, 이 체계화에 직접 참여하여 크게 공헌하는 것은 ‘지시 언어’가 아니라 ‘정서 언어’이다. 문학의 경우 ‘말의 의미는 context가 결정한다’ 고 하겠는데 , 이는 사전적 의미-정의(定義)에서 온 불변의 의미-밖에 못 갖는 과학적 언어의 경우와는 다른 것이다.
말이 발해질 만한 충분한 정황이 주어진다면 말 그것의 사전적 의미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고려 속요의 후렴 같은 것의 기능은 노래가 한 절에서 다른 한 절로 발전해 가는 의미를 일정한 형태로 쌓아 가는 일, 다시 말하면 변화 속에서 통일을 보는 일, 혹은 통일 속에서 변화를 보는 일을 하고 있다. 어떤 경우는 같은 말의 반복임에도 역(逆)의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같은 말에서 역의 의미를 읽게 되는 경우는 말의 사전적 의미 따위는 더 이상 아무 짝에도 쓸 수 없게 된다. 연극의 대사 같은 데서 거듭 반복하는 단순한 말은 가요의 후렴에서와 같이 그 말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의미로부터 이탈하여 전혀 다른 구실을 하고 있는 예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그 말은 ‘말’ 이상의 것-제스처가 되고, ‘상징’이 됨으로써 ‘말’이 지닐 수 있는 의미의 너비를 최대한으로 확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들이 갖는 사전적 의미와의 거리는 Empson의 ‘복합어’의 경우와도 대비된다.
현실을 기존 관념의 틀에서 표현치 않고, 자신이 직접 느껴 그것에 표현을 주려고 하는 예술가의 경우 언어는 표현의 수단이기보다는 차라리 현실을 포착하여 정착시키는 수단이 되고 있다. 이런 예술가에게 있어서 말이란 발견의 수단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껏 인지되지 않았던 새로운 현실이 작품 속에 문득 들어와 스스로의 표현을 찾아내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Ⅲ. 小說의 言語
소설은 예술적으로 조직된 언어의 사회적 다양성을 지닌다. 소설에는 인물이 등장하며, 이들은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각기 자기가 속한 사회 계층을 대표하여 말하고 행동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제각기 자기 계층의 ‘언어’로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소설의 문체를 작가 개인의 문체인 듯이 논하는 것을 보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물론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을 설정하고 그를 성격화하기 위해 그에게 어울리는 외양과 언어와 행동을 주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모두가 전적으로 작가의 독단에 의존한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소설의 인물이 사용하는 언어는 작가와 분리하여 인물 그 자신의 언어가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예를 춘향전에서 들어보자. 남주인공 이도령의 경우,
- (1) 이도령 히고 일은말리 글어 시 분명 면 잔말말고 불너오라(열녀츈향슈절가 3장)
- (2) 이도령 이른말리 우지말고 잘 잇거라 네 우름 소의 이 일촌간장 다 녹다 너 달려갈졸 모로랴마는 양반의 자식이 방의 천첩면 문호의 욕이 되고 사당 참예 못 기로 못다려가나니 부듸부조히 잇거라(위 12장)
- (3) 어 급마와락 여 와셔 야단이 날터인듸 절잇난 게집이라니번 잘너보리라 고 너만년이 수절다 고 관장의게 포악여니 살기를 바소냐 죽어 맛당건만 의 수청도 거역가(위 33장)
소설 전편에서 긍정적인 인물을로 다루어지고 있는 인물 이도령은 위에서 나타난 그 자신의 언어로 보는 한 조선의 봉건적 양반의 독선 (獨善)이 감지된다. (1)은 춘향이 기생의 딸이라는 말을 듣고 방자에게 분부하는 말로 ‘그러할시(기생의 딸이) 분명하면 잔말말고 불러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평민이나 천민에 대한 양반 특유의 고압적 자세를 볼 수 있다. (2)에서는 ‘사랑’보다도 ‘양반의 체모’를 우선하는 이도령의 말에서 그 자신의 앙반 의식의 뿌리 깊음을 읽을 수 있다. 사랑하는 이를 앞에 두고, 거침없이 ‘하방(遐方)의 천첩’이라고 하였고, 춘향과의 사랑이 ‘문호의 욕’이 된다느니, ‘사당참예 못한다’느니 전적으로 상대방을 무시한 언설을 당당히 하고 있는 데서 다시 한 번 이도령의 양반 의식을 씹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3)에 이르러서는 아무리 상대방의 절개를 시험한다고 하더라도 ‘절개 있는 계집이라니 한번 잘라보리라’라든가 ‘너만한 년이 수절한다 하고’ 등의 언표는 그 의미하는 내용과는 별도로 양반 청년 이도령 내면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어쩌면 본인도 의식 못하는), 춘향에 대한 ‘천기 의식’이 노출된 것으로 이해된다. 사실 이 마당에서 상대방의 절개를 시험한다는 태도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춘향에 대한 천기 의식을 끝내 버리지 못한 이도령의 양반으로서의 우월감에서 온 오만불손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위의 세 가지 예는 이도령이 자기가 속한 양반 계층의 의식을 부지중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를 단순한 작가의 문체로 설명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도령의 ‘말’은 표면상 춘향과의 사랑을 추구하는 순정의 청년으로서 하는 말이기는 하되, 깊은 내면에서 그가 속한 사회적 신분에서 할 수 있는 말을 시종 하고 있다. 그는 결코 양반으로서의 자신의 본질을 ‘언어’면에서 감추어 버릴 수가 없다. 소설에서 인물이 하는 말은 근본적으로 그 자신의 사회의 신분을 포함한 본질을 드러내 보인다고 하겠다. 그렇지 못한 인물이라고 한다면 소설의 인물로서는 별 의미가 없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춘향의 경우를 보기로 한다.
- (1) 츈향이 거동보소 추파를 잠간들어 이도령을 살펴보니 만고의 호걸이요 진세간 긔남자라 ··· (중략) ··· 가는목 게우 열어 엿자오도련임은 귀공자요 소녀는 천첩이라 번 탁졍 연후의 인야 바리시면 독숙공방 호을노 누워 우난 안이고 뉘가 고 그런 분부 마소셔(위4장)
- (2) 츈향이 엿자오 도련임 경셩의 올나가셔 절가인 미덜과 영웅호걸 문장들 다리고 밤이면 가무고 나지면 풍악제 날갓탄 천첩이야 손톱만치나 성각가 날만 날만 다려가오(위 12장)
위의 두 예는 춘향이 이도령에게 하는 말로, (1)은 춘향이 집으로 찾아온 이도령의 구애에 답하여 하는 말이다. 이도령에게 호의를 가지면서도 상대방의 구애를 성큼 받아들일 수 없는 춘향의 심정이 솔직히 나타나 있다. 이도령과의 첫 대면에서부터 춘향은 ‘천첩’이란 자기 비하 의식을 떼쳐 버리지 못함은 물론 그 뒤에도 이에서 끝내 자유롭지 못하다. (2)는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의 언약을 맺고, 남다른 관계를 가진 다음 뜻밖의 이별을 맞게 되었을 때 춘향이 서울로 떠나는 이도령에게 하는 말이다. 여기서도 춘향은 ‘날같은 천첩’이라는 자기 비하 의식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있다. 자기 출신에 대한 뿌리 깊은 비하 의식이 춘향에게는 일관되게 작용하고 있다. 이는 이도령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도련님은 귀공자요, 소녀는 천첩이라’, ‘도련님 경성에 올라가서 절대가인 미색들과 영웅호걸 문장들 다리고 밤이면 가무, 낮이면 풍악할 때 날같은 천첩이야 손톱만치나 생각할까’라고 하는 데서 양반 이도령과 천기 춘향의 신분적 한계를 춘향 자신 깊이 의식하고 있음을 알겠다. 이와 같은 심리적 소외는 춘향이나 이도령이나 매 한가지며, 두 사람의 언표는 부지중 그와 같은 심리적 장벽을 노출시키고 있다.
다시 그와 같은 전형적 사례로 월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 (1) 상단아 이 모라라 울화나 나 죽것다. 널로하여 몃사이 죽난듸 밥속만 미넌야(위27장)
- (2) 츈향어모 듯더니 고 져년 어미를 보고 귀신으로 알고 진언을 치는구나 츈향아 네 이 몹실년아 …(중략)… 이것드리 무신이를 난고나 여보소 이셔방 자 어셔 멀이가소 고연이 여담절각으로 살인당리(위 29장)
- (3) 츈향이 찻난소의 어가야 여기 잇다 사령드라 삼문 잡어라 어사장모 드러간다. 오날 눈의 미운 연놈 쥐길난다 우우 어사우 조을시고 얼시고 졀시고 어제 전역의 우리 우 걸으로 왓던구나 천긔누셜 안이 라고 머퉁이를 여더니 그 일 부 노여마소 노여면 엇지나 나 안이면 츈향 날 얼시고 졀시고 지와자 조을시고 여보소 남원읍 사덜 말을 드러보소 아들나키 심지 말고 츈향갓턴 을 나아 이런 질검덜 보소 얼시고 절시고 지와자 조을시고 (위 33장)
위의 3례는 천기로 평생을 살아온 퇴기 월매의 생활과 의식 세계가 가림 없이 노출된 언표로 보인다. 한평생 사람들의 천대와 모멸 속에 살아온 천기의 내면 세계가 단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월매의 ‘말’은 그가 속한 천기 계층의 의식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이다. (1)은 거지꼴을 하고 장모 앞에 나타난 사위(이도령)가 밥 달라는 데 비위가 틀려서 내뱉는 말로 체면이나 염치를 가릴 수 없는 퇴기다운 언표로 인간다운 감정도 메말라 버린 듯이 보인다. (2)는 이도령과 옥으로 춘향을 찾아간 월매가 옥중의 춘향에 뇌까리는 말, 이도령과 춘향의 상면을 두고 혼자 하는 말로 그 말의 천속함이 천기의 의식 세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3)은 춘향이 변사또의 생일연에서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이도령의 암행어사 출도로 사태가 역전되고, 삼문 밖에서 기다리던 월매가 부름을 받아 기뻐 들어가며 하는 말이다. 평생 억눌려 살아온 천기의 한과 평소 깊이 눌러 감추어 두었던 복수심이 북받쳐 나온 것을 볼 수 있다. ‘사령들아 삼문 잡아라. 어사 장모 들어간다. 오늘 내 눈에 미운 연놈 죽일란다’ 에서 압박과 굴종의 세월을 무권리하게 살아온 천기 계층의 눌려온 권력 동경과 원색적인 보상 심리가 동시에 분출되어 나온 느낌을 받는다.
위의 예에서 보듯 소설의 인물은 제각기 자기 음성, 자기 언어를 발하고 있다. 결코 단순히 작가의 소리, 작가의 언어를 반추하고 있는 데 머물러 있지 않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작가의 소리, 작가의 언어는 과연 무엇이며, 어떤 것인가? 소설에서 작가의 소리로 볼 수 있는 부분은 일반적인 서술을 하는 지문(地文)으로, 이는 대개 표준어에 의한 직접적인 예술적 서술로 되어 있다. 지문에서 작가는 가능한 한 객관적 서술을 의도하는 관계로, 개성적 요소를 될수록 억제하고 정칙적(正則的)인 서술이 되도록 힘쓰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도 그 범주 안에서 다양한 변화 형태를 가질 수는 있다. 춘향전에서 작가의 언어에 해당하는 부분을 살펴보기로 한다.
- 엇더 일미인이 봄서우름 가지로 왼갓츈졍 못다 이기여 두견화도 질근 거 머리여도 자보며 함박도 질근 거 이부 속 물여보고 옥수나삼 반만 것고 청산유슈 흐르난 물의 손도 싯고 발도 싯고 물도 머금어 양수고 조약돌 덥석주여 버들가지 리도 희롱고 버들입도 주루룩 훌터여 물의도 훨훨 흘여보고 설갓튼 힌나부난 곳곳마닥 춤을 츄고 황금갓탄 리난 숩숩이 나라들어 왼갓 소다적의 츈이 거동보소 츈흥을 못이기여 추쳔을 하랴하고 면수마 추천줄을 수양버들 상상지의 친친얼거 가마고 셰류갓탄 고은 몸을 단졍이 높일적의 청운갓탄 고은머리 반달갓탄 용머리로 어리설설 흘여빗겨 젼반갓치 넌짓아 뒤단장은 죽절과 압치레 볼작시면 밀화장도 옥장도며 광원사 접저고리 방사 주진속것 셔수화뉴뮨 초록장옷 남방사주 홋단초 훨훨 버셔 거러두고 자주비단 수당혀를 셕셕버셔 던져두고 황건 건 지우자를 뒤단장의 부치고 섬섬옥수 넌짓들어 추쳔줄을 갈너잡고 능보션 두발질노 섭적 올나 발구를제 번 굴너 심을 주며 두번 굴너 통통차니 반공의 훨적 소사 가지가지 노든서는 평임으로 날아들고 비거비 난 양은 지황건이 난봉타고 옥경으로 난듯 무산선녀 구름타고 양산의 나리난듯 그도 그 형용은 세상인물 안이로다(위 2~3장)
위의 예문은 작가 자신의 주장이나 의지 같은 것을 적극적으로 내놓는 대신 비교적 평정한 객관적 서술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서적인 예술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제 삼자적 위치에서 서사의 객관화를 기하려는 작가 자신의 ‘언어’로 볼 수 있다. 다만 ‘왼갓츈졍 못다 이기여’ ‘츈흥을 못이기여’ ‘지화건이 난봉타고 … (중략)… 그 도 그 형용은 세상인물 안이로다’ 등에서 작가의 미학적 정감의 표출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춘향전에서 지문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소설은 등장인물의 소리와 작가의 소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구술 형식의 언어, 이를터이면 구전의 설화 같은 것도, 또 서간이나 일기, 비문학적인 실용문이나 과학적 논의, 기타 잡다한 ‘언어’적 소산이 필요에 따라 다 들어올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소설의 언어의 잡거성(雜居性) 논의도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 (1) 우리 슌군 유우씨 남슌수다가 창오산의 붕시니 속절업난 이 두몸이 소상 숨풀속의 피눈물 리여노니 가지마닥 아롱아롱 입입피 원이라(위20장)
- (2) 두어자 글을 도련임 좌의 올이나니다 복미심걸의 시즁기체후 일만안 옵시며 복모구구무림셩지지 젼라좌도 남원 천변 거는 임자성신 셩츈향은 도련임 올나가신 후의 신관사 나려와셔 수청안이든다 고 형문려 항쇄수쇄 족쇄야 엄수옥즁야 거의 죽게 되여니 도련임 려와서 불상 츈향을 살여주옵(위 25장)
위의 (1)은 옥중의 춘향에게 현몽한 이황(娥皇), 여영(女英) 두 비가 치수하다 죽은 순 임금의 뒤를 따라 죽었던 자신들의 내력을 이야기하고 있는 대목이다. 이것은 전승설화의 문맥 중, 한 어린 두 여인의 ‘언어’다. (2)는 옥중에 갇혀 명재경각(命在頃刻)한 춘향이 한성에 있는 이도령에게 써 보낸 편지의 글이다. 소설은 전승 설화와 편지 등의 ‘언어’도 수용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춘향전 안에 있는 기본적으로 작자 자신의 고유한 ‘언어’가 있고, 남녀 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계층의 다양한 인물들의 각이한 ‘언어’가 있고, 서간문, 설화 ··· 등, 또 비문학적인 언어들도 참여하고 있다. 이것은 소설이 다른 문학 장르와는 달리 다문체적인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목소리의 문학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소설의 언어를 그 나름의 독자성을 갖는 문체로서가 아니라, 단순한 예술 외적 매체로서 이해하는 경향이 농후했다. 소설의 언어는 중성적인 무성격의 단순한 전달 수단일 수는 없다. 위에서 본 다음성(多音聲)의 언어들은 소설 안에 들어와 서로 결합하여 질서 있는 예술적 체계를 이룬다. 이들은 소설 전체의, 보다 고차원의 문체론적 통일에 참여한다. 소설의 문체는 여러 문체의 결합 속에 존재하며, 소설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여러 언어의 체계를 수렴하고 있다. 소설은 예술적으로 조직된 언어의 사회적 다양성을 지니며, 경우에 따라 많은 언어를 병용하며, 또 개인의 말의 다양성을 내포한다. 언어는 역사적 존재로서 주어진 모든 순간에 있어서 내적으로 분화되고 있는데, 이 점은 소설 장르의 언어를 생각하는 주요한 전재가 된다. 언어의 사회적 다양성과 그 위에서 실현되는 개인의 ‘말’의 다양성에 의하여 소설은 테마를 묘사하고 표현하여 대상적 의미의 세계 전체를 관현악화 (管絃樂化)한다. 작가 자신의 말, 화자(話者)들의 말, 삽입적 장르들, 주인공들의 말-이들은 모두 언어적 다양성을 소설에 끌어들이는 구성상의 기본적 통합체로서 사회적 ‘음성’들의 다양성과 그것들의 상호 관련 양상을 구체화하여 보여 준다. 소설적 산문의 전제가 되는 것은 그 언어의 내적 분화와 그것의 사회적 다양성과 개인의 ‘말’의 다양성이다. 따라서 소설의 문체를 소설가의 개성화된 언어로만 이해하는 것은 소설의 언어를 본질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멀다.
‘말’은 스스로의 의미를 가지고 스스로 표현하는 것이기는 하나, 동시에 다양한 악센트를 가진 타자(他者)의 ‘말’과의 접촉이나 충돌 과정을 통하여 타자의 말이 가지는 다양한 여러 요소들에 공명하거나 반발하면서 자신의 문체를 형성해 가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말’이 가지는 내면적 대화라고 한다. ‘말’은 가능한 모든 기회를 통해 타자의 ‘말’과 만나 그것과 더불어 생동하는 긴장된 대화적 상호 작용을 갖는데, 이와 같은 ‘말’의 내적 대화성은 외면적으로나 구성상 직접 대화 형식을 취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소설 문체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있다. ‘말’은 대부분 타자의 말에 대한 생생한 응답으로서 태어나고, 타자의 말과 대화적으로 작용하는 가운데서 형식을 갖춘다. 소설의 ‘말’은 타자의 ‘말’, 타자의 언표와의 상호 관계, 상호 작용에서 성격화되고 있다. 사실 언어 안의 ‘말’은 반나마 타자의 ‘말’이며, 그것이 자신의 말이 되는 것은 그 말 가운데 자기의 지향과 악센트를 정착시켜 그 ‘말’을 지배하고, 나아가 자기의 의미와 표현에 갖는 지향에 흡수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때까지 ‘말’은 타자의 입술 위에서 타자의 문맥 , 타자의 지향에 봉사하며 존재해 온 말이다. 따라서 말은 필연적으로 타자로부터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말’은 그 어떠한 것이나, 또 언제나, 누구나 쉽게 빼앗아 자기 말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완강하게 저항하는 말도 있고, 빼앗아 자기 말로 만든 듯하였으나, 여전히 타자의 음성을 들려 주고 있는 말도 있다. 화자의 문맥에 끝내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말’도 있다. ‘말’이란 화자의 뜻대로 쉽사리 소유할 수 있는 중성적인 매체는 아니다.
그런 까닭에 ‘말’에는 타자의 지향이 깃들어 있게 마련이다. 소설가는 타자의 지향을 자기 작품의 언어에서 쫓아내려 하지 않음은 물론 다양한 여러 언어가 갖는 배경-사회적, 사상적 시야도 결코 차단하거나 파괴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그 모든 것을 자기 작품 안에 끌어들여 타자의 지향이 깃들어 있는 ‘말’들로 하여금 자신의 지향 , 즉 제 이의 주인에게 봉사하게 한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작가 자신의 지향을 굴절시키게 한다. 작품 안에 들어온 각이하고도 다양한 언어들의 특이한 사회적, 사상적 성격에 대응하여 작가의 지향도 다양한 각도로 굴절하지 않을 수 없다. 각이하고 다양한 소리와 말은 소설 속에 들어와 각자의 소리를 내면서 소설의 질서-예술 체계 안에 편입되어 버린다. 소설의 발전이란 곧 소설의 언어가 내적으로 전개하는 대화성의 심화, 확대 및 세련과 관련된 현상이다.
‘화자’와 그의 ‘말’의 문제는 곧 소설 장르의 기본 특성과 관련된다.
(1) 소설에서 화자의 ‘말’은 단순히 화자의 의사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화자의 직접적인 ‘말’로 되어 있더라도 작자의 말로 묘사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묘출하는 작자의 ‘말’과 묘출되는 화자의 ‘말’ 사이에 역동적인 대화적 관계가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츈향이 거동보소 팔자쳥산 기리며 주슌을 반야 가는목 게우 열어 엿자오 츙불사이군이요 열불경이 부절은 옛글의 잇오니 도련임은 귀공자요 소녀는 천첩이라(위 4장)
위에서 춘향의 ‘말’의 작자 자신의 말 ‘춘향이 거동보소 …’로 묘사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츙불사이구이요…’의 춘향의 말도 묘사하는 주체인 작가와의 대화적 교섭을 통해 최종적으로 확정된 ‘말’로 결코 단순한 춘향의 ‘말’로만 생각할 수가 없다. 이 대목에서처럼 ‘츈향이 거동보소…’류의 직집적인 묘사의 형식을 취하지 않았더라도 소설에서의 화자의 말은 위의 경우와 다름없이 작가에 의하여 묘사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한다.
(2) 소설의 화자는 역사적 구체성을 가진 인물로, 그 본질에 있어 사회적 인간이라는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언어이며, 결코 그 자신의 개인적 방언(方言)일 수 없다. 소설의 인물이 아무리 개성적일지라도 그의 언어는 결국 그 어떤 사회적 의의와 사회적 보편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만약에 소설의 인물이 순수히 개인적 언어밖에 할 수 없다면 그의 ‘말’은 아무런 예술적 공감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3) 소설의 화자는 그 기본에 있어 사회 의식적 존재이며, 따라서 그의 말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사회 의식적이다. 화자의 말은 세계에 대한 고유한 시점을 가지며, 어떤 면에서든 사회적 의의를 지니려고 한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언어 유희’에 떨어지는 소설의 경우를 생각하기 어렵다. 반대로 사회 의식적 무게를 지닌 ‘말’을 대화화하여 묘사함으로써 역동적인 소설의 언어를 실현한다.
소설은 가능한 모든 언어, 언어적 양식을 이용하여 가능한 모든 세계, 심지어 이미 쇠멸해 간 과거 세계, 사회적, 사상적으로 소원해진 가치의 세계까지도 그 자신의 언어로 자기를 말하게 하고, 작가는 그들과 대화적으로 결합하는 가운데 자기의 지향과 악센트를 첨가하게 된다. 작가는 자기의 세상을 타자의 언어의 이미지 가운데 삽입하되, 타자의 언어의 지향이나 고유한 특성을 압박하지 않는다. 소설 가운데 나오는 인물들의 ‘말’은 그 내부에서 그 인물들과 그들의 세계에 대한 작자의 ‘말’과 융합한다. 이와 같이 두 개의 시점, 두 개의 지향, 그리고 두 개의 표현이 하나의 ‘말’에서 내적으로 융합할 때 타자에 대한 대화적 저항은 불가피하게 된다. 이로써 소설은 전체로서 복수(複數)의 세계, 복수의 시점, 복수의 악센트가 상호 작용하면서 소설 나름의 특성 있는 이미지를 실현할 수 있다. 작가는 소설 작품에서 그 시대의 여러 계층의 다양한 목소리-여러 언어들을 결집하여 언어적 다양성의 소우주(小宇宙)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Ⅳ. 作家와 言語
문학 작품은 작가라고 하는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의 생활 속의 일정한 시간에 태어나, 그 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 그 제작하는 시간 동안 작가는 자신의 경험에 대하여 가장 높은 수준의 지배력과 통제력을 갖는다. 문학 작품이야말로 뛰어난 감수성과 식별력을 가진 작가들이 값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험들의 복잡하고 도 미묘한 조화를 기록해 낼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이다. 그러나, ‘자기(self)’ 를 표현하는 데 그치는 작가는 왜소한 자아를 넘어서 영적인 교제에까지 올라갈 수는 없다. 문학에서 표현이란 언제나 무엇인가의 전달이며, ‘그대’와의 사귐이다. 문학 작품은 은유적 방법으로 향수자(享受者)들의 영혼을 승화할, 무한의 가능성을 표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문학적 언어는 이론적 언어와는 달리 형상성(形象性)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는 이론적 견해나 논의의 결과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충일(充溢)한 세계를 환기하며, 언어의 외부에 있는 대상을 보여 주기보다는 그 스스로 대상을 창조한다고 하는 것이 옳다. 이 때문에 문학 작품은 모든 언어 수단을 이용하게 된다. 소설의 형상성(形象性)은 단순한 대상성(對象性) 이상의 것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떤 종류의 감정 내용을 지니게 마련이다. 이와 같은 수법에서 중요한 것이 은유로서 이는 어떤 언어 표상이 그 자체의 고유한 의미와 다른, 전화(轉化)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를 말한다. ‘배움의 동산’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단순히 풀, 나무가 있는 녹지를 연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은유는 직유에서 나온 것으로, 비교하여 쓰는 ‘··· 과 같은 ’ ‘마치···· 인 양 ’ 등의 문법 형식이 숨겨진, 말하자면 ‘직유의 축약형’이라 할 수도 있다. 은유를 과연 ‘축약된 직유’로 단정해도 좋을는지 의문이 없지 않으나, 표상(表象)의 이분화(二分化)가 은유의 기반이 되고 있고, 그것이 어떤 말의 본래의 의미와는 다른, 전화된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은유가 확실하다. 그런데 은유와 상징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상징화는 환원 작용이며, 은유화는 확대 작용이라 하겠다. 성서에서 보는 ‘살아있는 하나님’은 어떤 상(像)이나 특정한 이름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 때문에 신앙 깊은 사람들은 이름 없는 ‘하나님’을 여러 가지 서로 모순된 표현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요, ‘신랑’이요, ‘주(主)요’, ‘심판자’요, ‘생명’이요, ‘목자’요, ‘포도나무’요, ‘영원불멸’의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만약에 하나님이 어떤 상징물로나 상(像)으로 고정되었다면 그것은 우상(偶像)이다. 그러나, 앞에서와 같은 모순된 이름들이 암시하는 수많은 가능성은 마침내 그로 하여금 신성한 과정을 살고 있는 존재로 인식케 하고 있다. 이야말로 은유에 의한 무명성(無名性)의 획득이라 하겠다. 엄격히 말하여, 문장 안에 들어 있는 개개의 낱말은 다소간에 사전적 의미를 초월한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는 점에서 ‘은유적’이다. 문학 작품에서 ‘의미’라고 하는 것은 단어를 뛰어넘은 곳에 살아 있다. 그러므로 평가받는 문학 작품의 걸작은 모든 시대에 걸쳐 언제나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유보하게 된다.
작가가 작품에서 쓰는 언어적 기법에 ‘이화(異化)의수법’이 있다. 일상 회화에서는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전달되기만 하면 발화(發話)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만족할 수 있다. 목적이 달성되는 한 그것이 어떤 언어로 어떻게 전달되었는가는 이차적인 문제다. 그러나 문학에서는 전달만에 목적을 둘 수는 없다. 너무 일상화되어, 맛을 잃어버린 언어의 맛을 되찾고, 언어의 감촉을 통하여 삶의 감촉을 되살리기 위하여 낯익은 언어를 낯설은 언어로 바꾸는 ‘이화의 수법’을 작가는 쓸 수 있어야 한다. ‘춘향전’이나 ‘심청전’ 같은 작품은 속속들이 알려진 작품이라 그것을 연극으로 공연할 때 별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은 뻔하다. 이런 예술의 경우 배우들 이 비록 같은 역이나마 전 사람과 어떻게 달리 해석하고 연기하는가 하는, 가변적인 부분에 관심이 쏠리며, 이것이 흥미의 중심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배우가 얼마만큼 종전의 연기자와는 다른, 특색 있는 ‘이화의 수법’에 성공하고 있는가가 평가될 것이다. 하나의 작품은 그 내부 구조의 이화도 문제가 되겠으나, 그것이 한 나라의 문학사, 혹은 세계 문학사에서 ‘새로운 언어’로서 그 질이 논의되고 , 다른 여러 작품과의 언어적 대립과 차이가 문제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그 작품은 이미 그 나름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 그것’은 상대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언어’로 보완되어야 하듯이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은 언어’는 또 상대적으로 ‘나의 언어’, ‘당신의 언어’, ‘ 그의 언어’ 등등을 성립시키게 된다. 다양한 ‘나의 언어’들의 존재는 다언어 (多言語) 사용을 시사하는 사실이다. ‘나의 언어’의 특성은 ‘나’의 경험으로 조건지어지는 것이기는 하나, 이 경험은 사회적 여러 관계, 현실의 구조에 의하여 규정될 것이다. 따라서 이들 ‘나의 언어’는 이와 같은 사회적 여러 관계, 현실의 구조에 의하여 성격화된 여러 언어 및 여러 방언(方言)으로서 이들 여러 언어의 총체는 곧 그대로 사회를 언어로써 표현한 것으로, 문학의 다언어(多言語)의 특징을 이로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작가는 글을 씀으로써 자기를 객관화하여 생각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그는 자기의 본질을 내면적으로 개조할 수도 있다.
예술이 일상(日常)의 진실로부터 분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가도 예술에 관한 한 일상의 인간과 구별된다. 문학 작품은 인간 혼자만의 창조물이 아니라 작가와 언어 사이의 협력의 산물이다. 작가와 언어는 순간적 체험을 지속적인 개념 작용으로, 감각적 인상을 구체적 현상으로 전환할 때 서로 협력하고, 서로 규제한다. 작가와 언어는 서로 제휴하여 인간의 정신적 창조, 우주에 대한 통일적 비전으로까지 갈 수 있는 정지 작업을 하고 있다. 따라서 작가는 협력의 파트너인 언어에 관한 기법-어법을 터득해야 하고, 또 문학의 어법은 양자의 협력 과정에서 부단히 새로워지고 특성화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언어에 관하여 작가는 쉼 없는 개발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바, 이로써 작가는 문학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에 참여하게 된다. 당초 원초적(原初的) 언어에서 ‘언령(言靈)’의 존재를 발견한 태초의 인간들은 언어에 대한 경외심과 함께 이를 섬기고, 나아가 이를 부리고, 이로써 또 다른, 무한하고 다양한 세계(문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세계를 개시(開示)한 것이 문학의 언어다. 작가는 은유와 이화 등 가능한 모든 기법을 통하여 일상의 언어를 문학의 언어로 재생하여 작품을 구축하고, 생명을 부어 넣는다. 은유적 언어가 낯익어지는 순간 ‘죽은 은유’로 화하여 더 이상 은유일 수 없게 되듯이 문학의 모든 어법은 부단한 이화 작용을 통해 작가에 의하여 부단히 ‘낯익은 것’으로부터 ‘낯설은 것’으로 바뀌어지고 새로워지면서, 의미 있는 실체가 된다. 작가는 작품 창조 과정에서 언어에 관한 ‘연금사(鍊金師)’ 가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
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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