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 교육의 방법
김광해/강릉대 교수•국어학
1. 어휘에 대한 지금까지의 인식
우리나라의 국어 교육에 있어서 어휘 또는 어휘력이라는 문제에 관한 인식이나 그 교육에 관한 문제는 그 중요성에 비해 볼 때 일선의 국어 교육의 현장에서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과거의 교육 과정에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89년부터 새로이 개편되어 시행 중인 제5차 교육 과정을 보더라도 어휘의 교육과 관련된 내용들이 인식조차 되어 있지 않은 채 구성되어 있는 사실이라든가, 일반 대중들의 어휘력 증진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서적 등을 우리나라의 서점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는 사실이 이 분야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웅변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현행 우리나라의 교육 과정은 언어 기능의 신장이라는 대전제 아래에서 국어의 교육에 필요한 영역을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언어, 문학’의 6영역으로 나누어 전개되고 있는데 이는 종래에 비해서 한 단계 발전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 6개에 달하는 각각의 영역이 실제로 전개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인 어휘 부문에 관해서 어떤 눈꼽만 한 인식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알기 어렵다. 또한 선진국들에서는 자기 언어의 어휘를 풍부하게 하고자 하는 전통을 바탕으로 이를 위한 노력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전개되고 그에 발맞추어 어휘력 증진을 위한 다양한 교재 및 어휘집들이 풍부히 존재하는 데 비해 볼 때, 우리는 아직 그러한 분야에 대해서는 마냥 무관심한 현실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어휘력 증진을 목적으로 한 저서가 있다면, 어휘집으로서는 두 종류의 분류 어휘집과 한 종류의 유의어 반의어 사전이 있고, 어휘력 증진을 위한 서적으로서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사에서 출간된 李基文 (1985) ‘당신의 우리말 실력은’ 정도를 거론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언어 기능들은 기본적으로 낱낱의 단어들에 관한 지식을 토대로 하여 전개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단어의 의미와 적절한 용법을 모르는 상태에서 과연 어떻게 적절한 수준의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언어, 문학’ 등의 언어 기능들이 전개되거나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신장되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언어, 문학’ 등의 각 영역이 언어 기능이라는 커다란 집을 이루기 위한 추상적인 구조물이라면 그 구조물을 형성하는 구체적인 소재는 바로 단어인 것이다. 벽돌이나 철근이 없이 집을 지을 수 없듯이, 단어에 관한 지식이 없이 이루어지는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언어, 문학’ 등의 언어 기능은 없다. 이 비유를 한 번 더 전개한다면, 더 좋은 벽돌이나 철근을 사용하면 더 좋은 집이 지어질 수 있듯이 더 훌륭한 단어를 사용하면 더 좋은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언어, 문학’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할 수도 있다. 여기에 바로 어휘 교육을 질적으로 우수하게 전개하여야만 하는 당위성이 있다.
이에 관한 실질적인 예를 들기 위해서 국어과 각 영역의 내용 요소를 검토하여 어휘 교육에 관련된다고 할 수 있을 만한 요소들을 간추려 본다면, 우선 ‘읽기’ 영역 속에 포함되어 있는 ‘접사의 활용, 복합어, 유사어, 상대어, 사전적 의미, 문맥적 의미’ 등과 ‘문학’ 영역의 하위 구분에서 ‘행복한 단어, 슬픈 단어의 구별, 직유나 은유의 파악, 감각적 단어를 파악하고 사용, 생각과 느낌을 암시하는 단어를 파악하고 사용, 단어의 배열 방법, 의인화도 비유의 일종임을 인식, 진부한 직유, 은유, 의인화와 참신한 것의 구별, 주제나 작가를 암시하는 단어의 파악’ 등의 항목을 발견하게 되는데(제5차 교육 과정 참조) 이들이 어휘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나온 교육적 배려로서 충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형편임이 한눈에 드러난다.
2. 어휘력에 대한 편견
어휘력의 증진 문제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실 중의 하나는 오늘날 일반인들 사이에 이상한 편견이 퍼져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가령 어떤 글 속에 자기가 알지 못하는 어려운 어휘들이 나오게 되면 많은 경우에 있으면서 이러한 글은 우선적으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된다. 그 비판이란 다름 아니고 좀 더 쉽고 알기 쉬운 말들이 있는 데 왜 현학을 앞세워 난삽한 글을 쓰느냐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때에 당연히 그 같은 비판적 태도를 취하여만 그 사람이 마땅히 국어를 사랑하는 충정이 지극한 사람이라고 치부하려는 풍토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풍조는 어휘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어휘력의 증진을 행한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어휘력의 축소를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우려되는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풍조의 출발은 그야말로 知的 誇示를 위하여 꽤 까다로운 한자어를 구사하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을 목표로 한 공격이었던 것이지만, 차츰차츰 문장이란 그저 쉬운 말로 써야만 되는 것이라는 풍조로 바뀌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우리는 정서적 표현을 위하여 매우 훌륭한 우리 고유의 단어들을 비롯하여 비록 우리 고유어는 아닐지라도 정확한 개념의 전달을 위하여 소중한 한자어들의 상당수를 사어(死語)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개중에 얼마 안 되는 문인들만이 풍부한 어휘라는 측면을 중시한 작품 활동을 하였거나 또 일부 관심 있는 어휘 수집가들이 국어의 어휘를 수집하여 실용에 부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그 절대적인 비중이 불과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이 오히려 신기하게 여겨져 관찰과 화제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는 실정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늘의 실정을 살펴볼 때,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있어서 어휘력 증진을 위한 분위기는 한마디로 말하여 이 분야에 대한 무관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오히려 국어의 어휘를 늘리고 활발하게 하는 방향과는 정반대의 분위기에 있다고밖에는 더 어떻게 말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보통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갖추어야만 하는 어휘의 양은 얼마나 되어야 하는가 또는 각급 학교에서 지도하여야 하는 어휘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기본적인 문제에서부터 어휘력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이득은 무엇인지, 그에 따라 어휘의 교육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에 이르기까지 이렇다할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못한 현실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이러한 황무지의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나라 말의 어휘력 증진을 위해 나아가자는 방향에서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이에 아울러서 그 구체적인 실천을 위한 방법들을 모색하여 봄으로써 발전적인 어휘 교육의 실현을 위한 시안을 제시하여 보도록 하겠다.
3. 국어의 발전에 있어서 어휘의 중요성
어휘력의 확대를 위한 노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가지므로 당위성을 가지게 된다.
첫째, 한 사람의 어휘의 양이 곧바로 그 사람의 지식의 양에 비례한다는 사실에 의심을 품거나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Jespersen은 일찍이 ‘한 나라 말에 존재하는 어휘의 10분의 1만 제대로 구사할 줄 안다면 그는 그 나라의 지식인의 반열에 들 만하다’고 말했으며, Wittgenstein은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전제를 따른다면 우리는 ‘어휘의 양이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것이다.’라는 더 이상 부정하기 어려운 명제에 다다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학습을 통하여 고등 정신 기능이 신장되면 그것에 비례하여 그가 이해하거나 구사할 수 있는 단어의 양은 자연히 늘어나게 되며, 심지어는 이를 역으로 말하여 그가 구사할 수 있거나 이해할 수 있는 어휘의 양을 측정한다면 그의 지식의 양을 측정할 수 있다는 명제까지도 성립시킬 수가 있을 정도이다.
둘째, 어휘의 확대를 위한 노력의 필요성은 단어라는 것이 단순히 언어를 구성하는 하부 요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단어 하나하나마다에 고유의 역사와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당위성을 가진다. 우리가 고유한 우리말을 가지고 있는 경우 가급적이면 외래어라든가 또는 한자어를 사용하지 말고 고유한 우리말을 사용하자는 주장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반대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점에 있다. 같은 의미를 가진 외래어와 한자어 그리고 우리말이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우리말을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말들은 각각 뿌리를 가지고 있고 그 뿌리라는 것이 바로 그 단어의 역사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전제 위에 설 적에 우리는 국어의 질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가급적이면 많은 우리말들을 찾아내어야 하고 그것을 적절한 선에서 보급하여야 할 의무를 지닌다. 이때 그러한 단어들을 발굴하는 일은 학자나 국어 운동가들의 의무이겠지만 그에 동조를 보내면서 보급하는 의무는 우리 사회 전체에 있다.
이처럼 어휘력의 증진에 관심을 둔 일이 전통적으로 많지 않았기 때문에, 어휘력 증진을 위한 노력이라든가 교육 문제에 대하여 그것의 중요성이나 당위성을 정식으로 제기한 기록을 찾는 일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국어 교육 전문가라기보다는 평생을 순수 국어학에 종사해 온 전문가로부터 제기되고 있어서 시사받는 바가 크다(李基文, 1984:15). 다소 길다는 느낌이 들지만 희귀하면서도 지극히 중요한 지적이기 때문에 다음에 인용해 두기로 한다.
4. 어휘의 습득과 학습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우선 이 장에서는 어휘의 습득과 학습 문제를 구별함으로써 글 전체의 전제로 삼을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어휘 교육이라는 술어가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이 그 본질적인 성격상 구별되는 두 가지로 나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배우게 되는 어휘의 수준이 크게 볼 때 습득의 차원과 학습의 차원으로 나누어 파악되어야 한다는 생각 (金光海, 1988)에 기반을 두는 것이다. 여기서 정리된 내용을 인용해 두면 다음과 같다.
一次 語彙 | 二次 語彙 |
1. 언어 발달 과정의 초기부터 음운 부문이나 통사부문의 발달과 병행하여 습득된다. 2. 語彙 전체의 공동 자산으로서 기본적인 통보를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3. 어휘의 의미 영역이 광범위하여 전문적인 의미 내용보다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의미 내용을 지닌다. 4. 학습 수준이나 지식 수준의 고저와는 관계없이 대부분의 언중에게 공통적으로 습득된다. 5. 체계적인 교육 활동이나 전문적인 훈련과 관계없이 일상생활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습득된다. |
1. 기초적인 언어 발달이 완료된 후 고등 정신 기능의 발달과 더불어 학습된다. 2. 語彙에게 공유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나뉘어진 전문 분야에 따라 어휘의 분포가 한정되는 것이다. 3. 어휘의 의미 영역이 협소하고 용법상의 제약이 존재하며, 전문적이고 특수한 용법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문적인 분야의 작업이나 이론의 전개를 위한 술어로서의 기능을 담당한다. 4. 학습의 성취도나 지식의 정도에 비례하여 학습된다. 5. 의도적이며 인위적인 교육과 특수한 훈련 과정을 거쳐서 학습된다 |
5. 어휘 교육의 방법
우리나라에서도 어휘의 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름지기 단어들의 집합으로 구성되는 어휘라는 것이 언어라는 구조물을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기본적인 소재가 되는 것이니 만큼 그동안 이루어진 국어 교육의 모든 과정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져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나 지금이나 국민학교 과정에서 ‘낱말의 뜻풀이, 비슷한 말, 반대말 공부, 짧은 글짓기를 통한 단어의 학습’ 등을 통해서 행해져 오고 있는 교육들은 모두 어휘력의 신장을 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나아가 교재를 중심으로 새로 등장하는 단어들의 의미를 먼저 확인하는 작업을 해 두고 문장의 의미에 접근한다든가, 또는 그런 작업이 없더라도 문장을 먼저 공부함으로써 자연스레 문맥을 통해서 단어의 의미를 학습하는 일 등도 모두 어휘력 신장을 위하여 기여하기는 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중요한 문제가 국어 교육에 있어서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인식의 보급과 관계하여, 대체로 무의식적이거나 자의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결과적으로 비체계적으로 행해져 왔었다는 점에 있다. 교사들은 무엇에 근거하여 이 단어들을 가르쳐야만 하는지, 또 어떤 단어들까지 가르쳐야 하는지, 또는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교재로써 어디까지 지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객관적인 지침을 가지지 않은 채로 지도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일반인들도 어휘력이라는 것이 왜 중요한지, 또는 그 중요성만은 알더라도 어떻게 무엇의 도움을 받아서 어휘력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어떤 안내나 도움을 받기 어려운 실정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로 말미암아 전체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때 우리나라의 어휘 교육이라는 부문은 다분히 주먹구구식이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실정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에서는 바람직한 어휘의 교육의 전개를 위해서 우리는 대상을 어떻게 선정하여 어떠한 방법으로 전개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정규 학교 교육에서의 그것과 일반인에 대한 교육이라는 측면을 적절히 구분하여 가면서 논의를 진행시켜 보도록 하자.
가) 對象
어휘력의 증진을 꾀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관한 문제를 놓고 앞에서 이를 국가나 전문 기관 또는 학자들이 담당해야 할 일이라고 규정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줄잡아 40만을 헤아리는가 하면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 국어의 총 어휘 목록(lexicon) 가운데에서 각급 학교의 학생들이나 일반인에게 보급하고자 하는 적정수의 어휘를 선정하여 등급을 평정하는 일은 열성만 가진 개인이 아무나 손쉽게 해낼 수 있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어휘의 계량을 위한 전산화 작업 같은 선행 작업이 필수적인 일이며 거기서 나온 자료를 다시 해독하고 선정하여 순위를 매기는 일도 필수적으로 수반된다. 따라서 이 일에는 상당한 인력이 동원되어야 하며, 따라서 방대한 예산의 지원이 또한 필수적이다. 이러한 일을 적절히 지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곳은 국가뿐이며, 또한 국가는 마땅히 이러한 일을 이끌고 나아가야 할 의무를 지닌다. 이러한 작업은 이렇다 할 선진국들이라면 기초적 작업은 이미 오래전에 끝난 일임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도 국가의 지속적 사업으로서 보완 작업이 진행 중에 있는 일이다. 이러한 작업은 가장 기초적이면서 동시에 선행적인 작업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작업이 먼저 이루어지지 아니하고는 다음에 제시할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는 논의조차 될 수가 없다는 점을 지적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도대체 가르칠 ‘무엇’이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인가?
어휘 교육에서 가르쳐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먼저 해야 할 일들을 나누어 기술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기초 어휘의 확정
여기서 말하는 기초 어휘라는 것은 곧 앞에서 말한 二次 語彙이다. 이에 관한 가장 이상적인 목록이라면, 인간이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을 면밀히 관찰하여 그 습득되는 어휘들을 문서에 따라 일련번호를 붙여서 나열해 놓은 것이 될 것이다. 가령, 이에 대하여 탁상공론식으로 말한다면, ‘엄마, 맘마, 아빠, 까까……’ 등에서 시작하여 그 다음에 나타나는 신체 부분의 명칭들 ‘손, 발, 눈, 코, 귀, 입, 머리……’ 등을 거쳐서 ‘꽃, 나무, 풀, 산, 하늘……’ 또는 ‘하나, 둘, 셋, 넷……’ 등의 숫자들이라든가 ‘가다, 오다, 크다, 작다, 많다, 적다……’ 등의 동사류 같은 것이 될 터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까지는 아무도 이러한 것일 것이다 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바로 이 정도까지가 우리나라의 기초 어휘라고 제시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앞의 탁상공론이 탁상공론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에 있는데 이는 알면서 생략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집어넣을 수 있는 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한 데서 나타난 소치이다. 이 “……”의 부분을 메우는 일이 바로 핵심적인 사업이 되는 것인데 이러한 일을 바로 국가나 혹은 국가적 사업을 대신할 수 있는 기관에서 해 주어야 한다. 이같이 계량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우리나라의 기초 어휘에 관한 자료가 확정된다면 이는 비단 어휘의 교육에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방면에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1956년에 문교부에서 조사한 ‘우리말 사용의 잦기 조사’라는 보고서가 지금까지도 여러 분야에서 가장 흔히 인용되고 있는 자료라는 실정을 생각해 본다면 그 유용성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한 기초 어휘 확정은 우리가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어휘 교육 방법의 모색을 위해서도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다. 즉, 어휘의 교육을 유아기의 어휘 교육과 정규 교육이 시작된 뒤의 어휘 교육으로 나눌 때, 이 자료는 그 각각의 단계에서 무엇을 어디까지 가르칠 것인지 하는 자료의 선택에 관한 문제들을 확실히 해소시켜 줄 것이며, 나아가 어느 정도의 지식 수준에 도달한 일반인들에 대하여는 어떠한 말들을 교육의 대상에서 제한해도 되는지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여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 학습용 기본 어휘의 제정 및 어휘의 평정
한편 위의 계량 언어학적 조사 작업의 결과 나타난 자료들은 비단 기초 어휘의 확정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가지고 더 발전된 차원에서 응용될 수 있는 학습용 기본 어휘들을 제정하는 한편 나아가 그것을 다시 등급에 따라 평정하는 작업까지 이루어야 한다. 가령, 우리나라의 정규적인 교육이 국민학교에서 시작하여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로 마감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각급의 학교에서 교육되어야 하는 어휘량의 기준을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마련해 놓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휘 교육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를 해결해 주는 방안이다.
예를 들어 본다면, 우리에게 낯익은 영어 사전에서의 4단계 어휘 평정 방법에 따라 우리말 어휘들을 배열해 보는 시안이 마련될 수 있다. 이론상 그 방법은 간단하다. 국어의 경우 예컨대 유의 관계를 형성하는 한 무리의 단어들이 대개는 가장 쉬운 단어가 1차 어휘를, 좀 어려운 단어가 2차적인 어휘를 이루게 될 것이고 그 뒤에 다시 더 어려운 단어들이 배치되는 식으로 되어 다음과 같은 4단계의 어휘 평정이 이루어진 모양으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 **, *, 0 표들은 각각 그 개수의 많음에 비례하여 빈도, 이를 바꾸어 말한다면 그 단어의 중요성이 높음을 표시한다.
*** | ** | * | 0 | |
기쁨 | 환희(歡喜) | 법열(法悅) | 희락(喜樂) | ····· |
글 | 문자(文字) | 문적(文籍) | 문부(文簿) | ····· |
기르다 | 양육(養育)하다 | 보육(保育)하다 | 번육(藩育)하다 | ····· |
하늘 | 창공(蒼空) | 궁창(穹蒼) | 공명(空冥) | ····· |
*** | ** | * | 0 |
우거지다 | 울창(鬱蒼)하다 | 울울(鬱鬱)하다 | 깃다, 다옥하다 |
가난 | 빈곤(貧困) | 빈한(貧寒) | 애옥살이, 적빈(赤貧)···· |
튼튼하다 | 견고(堅固)하다 | 강고(强固)하다 | 튼실하다 |
나) 方法
1) 어휘에 대한 인식의 전환
우리나라에 있어서 어휘력의 증진을 도모하기 위한 방안으로써 가장 먼저 제안되어야 할 일은 어휘력이라는 것에 대한 이제까지의 인식을 바꾸는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잠깐 언급한 일이 있거니와 어휘력이라는 문제에 대한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인식은 어휘력의 증진을 위해서 긍정적인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방향으로 작용하는 일면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서구에서는 한 문장 속에 꼭 같은 단어가 2회 이상 나타나는 것을 금기로 삼는 등의 전통이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왔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우리나라의 문장 작성의 현실에 있어서는 조금만 생소한 어휘가 등장하면 글이 난삽하다, 현학적이다는 등의 비판을 감수할 각오를 하여야만 하는 풍토 속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들은 가급적이면 흔히 사용되면서도 쉬운 어휘를 구사하는 안일한 자세 속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것이 우리 문학의 한 전통처럼 되어 왔는데, 이는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러한 풍조는 결국 어휘의 발굴이라든가 재생을 위한 노력을 경시하는 풍조로 이어져서 어휘 구사력이 뛰어난 작가와 작품들이 드물 뿐만 아니라, 다른 측면, 즉 어휘를 그 나라 소중한 자산으로 보면서 이를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어휘집의 출간이나 어휘에 관한 연구 작업도 매우 늦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외국의 예를 든다면, 가령, 영어의 어휘력 증진을 위해 귀중한 작업으로 칭송을 받고 있는 저술로서 이미 1852년에 Roget라는 사람에 의해서 Thesaurus of English Words and Phrase가 출판된 사실이라든가, 또한 일본에서의 경우 1909년에 출간된 類語大辭典를 시작으로 그러한 유형의 작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사실들에 비교하여 볼 적에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진 유사한 작업은 150년 내지 80년의 격차를 보이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의 자기 나라 어휘에 대한 애착과 문장 작성에 있어서의 전통에 더하여 뜻있는 이들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써 오늘날 권위 있는 영어 사전의 출판으로 유명한 미국의 Webster사 한 군데에서만 10여 종의 비슷비슷한 분류 어휘집, 동의어, 반의어 사전들이 출판되는 수준에 이르러 있으며, 일본에서 나온 그러한 유형의 사전류들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그에 버금가는 작업이 과거 조선 시대에 활발하게 이루어진 바 있었으나(임지룡, 1989 참조), 이 전통이 중도에 단절되어 근대에까지 그대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이니, 이는 어휘의 보존과 활용 문제에 대한 우리들의 최근의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인 것이다. 그 실정을 더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는 아직 우리말 어휘의 전체적 집합을 대상으로 한 분류 어휘집 하나도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남영신(1987)의 ‘우리말 분류 사전’이라는 책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직 순수 고유어이면서 명사와 동사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말 총 어휘 목록에서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한자어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못한 상태이며 다른 품사에 해당하는 어휘들에 대해서 또한 마찬가지로 아직 분류 정리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어휘를 소중하게 인식하고 이를 발굴하여 보존 및 재생하는 일에 외롭게 노력을 기울인 작가들을 볼 수가 있는데, 다음에 소개하는 바와 같은 작가들이 그러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작가들을 기억하는 한편 그들의 자세를 본받으려는 인식을 널리 펼쳐 나가야만 할 것으로 생각된다.
2) 교재 편찬
이 문제는 현재 우리나라 정규 학교에서의 교육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어휘 교육을 위한 실질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절실히 요구되는 방안의 하나이다.
앞에서 지적하였던 대로 어휘력 증진의 중요성이 널리 인식되어 정규적인 학교 교육에서 사용을 학습 기본 어휘의 제정을 추진하는 한편 전체적인 어휘를 대상으로 한 평정이 이루어지고 난 후, 어휘 교육에 관한 내용이 교과 과정에 반영된다면, 그 다음에는 당연히 이들을 교과서에 반영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가장 철저히 하기로 말하자면 매 학년마다 교과서의 부록으로서 필수적으로 가르쳐야 할 어휘 목록이 첨부되어야 할 것임은 물론이고, 각 단원마다에도 새로 나오는 단어들이 표시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단어들은 곧바로 해당 학년이나 혹은 단원의 학습 목표가 될 수 있으며, 따라서 당연히 평가의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어휘집이 제공되어 지도와 학습에 있어서의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정도까지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정규 교육과는 별도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어휘력 증진 프로그램은 그 같은 체계적인 선행 작업을 크게 고려하지 않은 상태로도 병행될 수가 있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교재를 다양하게 제공하는 일이다. 우리는 종종 일간 신문에서 제공되는 낱말 맞추기 퍼즐 같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유형의 작업이 대중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결국 단어라는 것 자체가 일반인에게 독립적인 오락의 대상이 될 수 있을 정도로 흥미를 끄는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반인들이 무의식 속에서일지라도 기본적으로는 단어 실력이라는 것을 매우 가치 있는 재산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과, 나아가 자신의 단어 실력이 얼마나 되느냐에 대해 항상 상당한 관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까지 이러한 오락적 수준을 넘어서면서 일반인들의 어휘력 증가를 희구하는 욕구에 부응할 만한 적절한 교재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는 영어의 경우 이른바 ‘word power’를 늘리는 일을 목적으로 하는 다양한 교재들이 개발되어 있는 사실과 비교하여 볼 때, 우리의 상황은 또한 황무지에 가까운 모습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어휘력 증진을 위한 특수 목적을 가진 책들의 제목만을 소개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영어권이나 일본에서 자신의 어휘력 확대를 통해 문장을 세련시킨다는 목적하에 출간된 책들이다.
3) 교과 과정에의 반영
어휘의 교육을 위하여 국가나 전문가들이 맡아서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는 어휘 교육의 중요성을 교과 과정상에 적절히 반영하는 일이다. 서론에서도 잠시 언급한 일이 있지만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교육 과정에는 어휘 교육을 중요하게 인식했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제5차 교육 과정을 보더라도 어휘에 관한 항목은 특별히 설정되어 있지 않고, 언어 교육의 한 부문으로서 아니면 문학 교육을 위한 한 하위 부문으로서 간단히 삽입되어 있을 뿐인 실정이다.
나아가서는 국어 교육의 내용을 연구한 논문들에서조차도 어휘 교육에 관한 사항들은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중에서 어휘 교육의 부문을 어느 정도 비중 있게 취급한 한 논문으로 李大揆(1975:103)가 있는데 이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6. 맺음말
어떤 언어가 있다면 그 언어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성분은 단어들이고 그 집합은 어휘를 이룬다. 이때의 단어 또는 어휘라는 대상은 그 언어의 실질적인 내용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언어를 통한 정보의 전달이라는 것은 바로 어휘들을 통해서 수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휘가 가지는 의미는 그러한 단순한 이론을 넘어서서 또 다른 중대한 국면을 지니고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어휘를 적절히 구사할 수 있다는 말속에는 그 어휘를 구사하는 개인의 지적 성취의 수준에 관련된 능력, 예컨대 고도의 판단 능력, 조직 능력, 분석 능력, 적용 능력, 비판 능력 등을 비롯하여 현재 진행 중인 주제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까지가 더불어 결합되는 수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적격의 문장을 생성해 낼 수 있다는 실로 중대한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이며(金光海, 1988:57), 또한 단어들 하나하나마다에는 각자에 부여되어 있는 의미 기능에 따라 사상, 역사, 정서 또는 다양한 감정 등이 결부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쓴 글이 어떠한 반응에 연결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어떠한 단어를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어떤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단어의 양이라는 것이 관점에 따라서는 그의 세계, 바꿔 말한다면 지적 역량 같은 것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사용될 수 도 있을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곧 개인의 어휘력이라는 것이 그 개인의 지적 성취와 비례를 이루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생각인데, 이러한 인식은 어휘력이라는 문제를 놓고 생각할 적에 부정되기 어려운 생각이다. 이러한 사실들에 근거한다면,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든지 간에 어휘력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일에 주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휘력의 중요성이 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동안 이 분야의 발전을 위한 노력에 있어서 자랑할 만한 일을 이룩하여 놓은 것이 드물다. 이를 하루라도 빨리 만회하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들이 되도록 많이 생겨나야 할 것이고, 또한 이끌어 가는 입장에 서 있는 관계 기관과 언론 관계자, 출판인들은 이 분야에서 앞으로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겠다. 우리나라의 어휘력의 증진을 위한 교육이라는 문제를 앞에 놓고 지금 우리는 아직 출발점에 서 있다.
참고 문헌